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
녹취자: 최원정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오늘 저녁과 내일 오전에 강의 드릴 제목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저는 어차피 두 번의 강의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기도문이 크게 3토막으로 나뉘는데 첫째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2부가(두 번째)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향한 소명입니다. 이렇게 나뉘는데 그 중에서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 이 구절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00님이 기도해주시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말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들이 주기도문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가 살아야 할 복음적인 내용들을 압축한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지만 그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평소에 기도하시던 주기도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님의 어떤 소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좀 보실래요? 저를 안 보시면 제가 강의를 할 수가 없으니까. 책은 나중에 집에 가서 보시면 되고요 제 강의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저기 쓰여 있는 것도 여러분에게 다 나눠드립니다. 저를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주 간절히 기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기도제목이 다 이루어져서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 사람의 꿈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시는데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안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 것도 양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도 우리가 반대로 서로 용서하지 않고 있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꿈꾸고 그리던 세상,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꿈꾸고 그리던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를 요약을 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 가장 짧은 대답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만약에 올바르게 성도들에게 잘 가르치면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핵심적인 진리를 거의 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린 책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 책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독자들도 그렇게 쉬운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번역한 것이 조선족 사역자가 하셨습니다. 그 번역도 중국인들이 읽을 때 확 감동에 되게끔 번역이 되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천천히 읽으면서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쉽게 가르치려고 한다면 반드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에게 그 교재가 배부가 되었는데 그 교재를 잘 이해한다음에 여러분들이 편한 말로 바꿔서 교재를 만들어 복사해서 성도들에게 나눠줘서 가르쳐도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 중에 한 간증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화) 지금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는 자매입니다. 싱글이지만 돈도 많이 벌었고 사회적으로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근데 무엇인가 굉장히 마음이 허전하고 신앙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을 우연히 손에 넣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왜 그런 공허함이 들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진을 찍잖아요. 근데 옛날 사진기에서 초점을 잘못 맞춘 채 잘못 찍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그 사진이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이 뭉개져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가까이 있는 사물 희미하고 멀리 있는 사물도 뿌얘서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신앙이 그런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 짓지 않고 자기가 엄청난 말하자면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무엇인가 마음이 곤고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신약의 교회가 살아야 할 삶은 예수님의 삶을 확대한 것이고, 예수의 삶이 그려진 것이 복음서입니다. 그 복음서의 삶을 더욱 축약한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꿈에 그리던 세상과 공동체를 다 이루고 돌아가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지만 예수님이 드리던 주기도문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어떤 점에서 이루어졌지만 어떤 점에서 지금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며 사는 중국인들이 있고 한국인들이 있고 미국인들이 있고, 전 세계의 아랍사람들이 있고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셨던 그 기도를 우리도 하면서 그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너무 안타깝게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남편이 병에 걸렸습니다. 고칠 의사도 없다고 합니다. 이제 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합니다. 애통하며 기도합니다. 아 물론 남편 빨리 죽어버리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데 돈이 없습니다. 그럼 돈 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립니다. 눈물을 쏟으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많이 보셨죠? 그렇지만 주기도문을 기도하면서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왜 그럽니까? 예수님의 관심사와 그 사람들의 관심사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살아가면서 만드는 사회는 예수님이 만들었으면 좋은 그런 사회와는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적으로 경험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상관 없이 주기도문이 자기의 기도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를 아시죠? 그 사람이 기도의 이르는 쉬운 길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시대이래로 최고의, 사도 시대 이후로 가장 고통을 받은 순교자가 있다. 그것이 주기도문이다. 이 순간도 주기도문은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막 모임하다가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합니다. 그렇죠?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빨리 외우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기도문을 계속 찔러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생각과 몸이 모두 다 따로 노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유일신을 생각합니다. 가슴으로는 다신론입니다. 세상도 신이고 돈도 신이고 쾌락도 신이고 하나님도 신입니다. 그 다음에 가슴 아래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일까요? 누가 그런 것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목회자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들을 무지하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두 개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르게 안 가르치면 세상에서 잘못배웁니다. 안 가르치면 세상에서 나쁜 것을 습득합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유일신론, 가슴으로는 다신론, 행동으로 무신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이 눈물로 주기도문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무엇을 가르치고 있든지 다 때려치우십시오. 그리고 주기도문을 가르치십시오. 모르면 배우십시오. 탐구하지 않는 교역자는 선한 목자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목회자는 절대로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양떼들이 여기서 굶어 죽는데 목동이 풀을 뜯으러 가지를 않습니다. 드러누워서 과자나 먹고 TV를 보면서 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이 굶어 죽든 말든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부시 무렌(不是牧人)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하오 무렌(好牧人, 선한 목자)은 웨이 양 세밍 (为羊舍命), 곧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근데 사람들이 순교를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여러분 중에 순교하신 분 있습니까? 지난달에 순교하신 분 있습니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근데 수많은 중국의 사역자들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대부분 순교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목숨을 버린다는 이야기는 모택동의 총을 맞고 “예수 만세!” 하고 죽는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넒은 의미에서 순교입니다. 양떼들이 방황합니다. 모릅니다. 깨닫지를 못하고 무지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꼴이 아니라 거짓된 세상의 꼴을 먹습니다. 양들이 괴물처럼 변해갑니다. 그럼 공부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기 싫어도. 능력이 모자라도. 나는 금년에도 와서 여기 모인 분들보다 훨씬 많은 분들에게 주기도문 강의를 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 중 몇 사람이나 우리가 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까 말입니다. 넘기다가 아유 졸려 힘들어. 하고 툭 던져 버린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목회사역은 한없는 진지함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어떻게 교인들에게 이것을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알고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엄청나게 깊은 뜻을 이 주기도문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들어가서 보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예수님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를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온전하고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주기도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입니다. 우선 “계신”이란 말이 “在 [zài] ” 중국말로 “자이”라고 합니다. 한국말에서는 존칭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在 [zài] ”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아버지는 계시다.”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라는 사상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 다음을 보면 신이 없다고 하는 세대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가 무신론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는 무신론입니다. 유물론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질밖에 다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물질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신론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눴는데 하나는 사상적인 무신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합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근데 불신자들은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무신론입니다. (다음 사진은) 영국에서 굴러다니는 버스입니다. 제가 영국에 갔을 때 2층 버스에 붙어 있던 광고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썼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하나님은 아마도 없을 것에요." 더 재미있는 것은 "걱정하지마세요." 왜 하나님이 계신 게 그들에게 걱정거리가 될까요?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여태까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나쁜 것이 아니다. 동성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쾌락을 즐기는 것. 그것이 왜 나쁜데? 너희들이 여태까지 하나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무서워서 그런 것을 못했다면 지금 해라. 그래서 인생이 짧으니까 즐겨라. 이것을 광고하겠다고 모금을 했는데 2주일 만에 150만 위안이 걷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금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신론입니다.
그 다음에 무신론이 또 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성경 구절을 보면 마태복음 15:8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실제 삶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그렇게 삽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게 산다면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양 떼들이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별로 신경 안 쓰고 산다면 그것이 어떻게 선한 목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입술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무신론입니다. 기도를 배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을 확고하게 믿을 때에 기도를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실제로 기도하게 만드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중국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따오(导 [dǎo]) 라는 개념이 있죠? 옛날에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따오는 인격적인 신의 개념과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역사가 흘러가면서 이게 하나의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그냥 저 멀리 있는 비인격적인 원리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지 인간이 그 도에게 말을 걸고 도가 나에게 말을 걸고 하면서 도를 사랑하고 도에게 사랑을 받고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참 신을 중국사람들에게 설득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만약에 하나님을 그런 식의 따오라고 생각을 하면 그 하나님께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반드시 그분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분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기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난 대답할 것입니다. 단호하게 그렇습니다. 분명하게 그렇습니다. 그러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잘못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잘못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잘못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이에게 좋은 것인지 알고 막 가져다가 먹입니다. 엄마에게 지식이 없습니다. 속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분유를 먹였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커집니다. 그리고 기형아가 됩니다. 죽습니다. 그러면 물을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잘못 사랑하는 것인가요? 여기에 대한 대답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예수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잘못 사랑하는 사람들을 올바로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주기도문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뒤에 내려가 보면 리차드 도킨슨(Richard Dawkins)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의 책이 중국에도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먼 시계공』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무신론자인 도킨슨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자연의 진화하는 (것을) ‘맹목적인 물리학의 힘’이라고 봤습니다. 그냥 무엇인가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아무 의식이 없이 자연의 힘들이 결합을 하면서 진화를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연적인 진화의 결과들이 이상하게 우리 눈에는 숙련된 시계공이 설계를 하고 계획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증명을 합니다. 근데 이것은 모두 과학과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배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만유 인류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 사이에 있는 물리 법칙에 대해 수학적으로 설명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프린키피아』 원리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역사에 한 커다란 충격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신비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의 모든 현상이 수학으로 계산되었던 것입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때리면 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서 충돌을 해서 번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깊이 오해하고 있던,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새로운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많은 물질의 법칙들이 저 우주로 가면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뉴턴에 의해 발견된 과학의 법칙들이 예외가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사람이 나오는데 슈뢰딩거(Erwin Schrodigner)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원자보다 더 작은 말하자면 분자보다 작은 원자의 세계들에서 일어나는 법칙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물리학의 방식과 똑같이 설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깨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라는 사람이 이러한 분자 이하의 세계에서 고전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법칙들이 들어맞지 않다는 것을 입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닐스 모아(Niels Bohr)라는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이 사람이 놀랍게도 중국에 있는 주역의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 눈에는 서로 대립적이라고 보이는 것이 사실은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양자역학의 이론을 발견시킵니다.
여러분 북경에 가보면 -지하에 다니는 고속철도인- 메가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양자역학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가게에 가면 바코드로 찍어서 가격이 얼마 나오고 하는 이런 것이 바로 양자역학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양자역학에 대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법칙들이 적용이 됩니다. 이 말씀을 왜 드리냐면, 여기에 ‘펜이 있다.’ ‘있다.’라는 말이 ‘자이’(在 [zài])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을 접고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다.’ 라고 말해봅시다. 그러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근데 볼펜이 있는 것처럼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사랑이 없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다. 라고 할 때는 펜이나 사랑 같은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성령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 만약에 이런 비유를 제가 잘 듭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근데 너 양심이 있다고? 저 사람에게 양심이 있을까? 모든 사람이 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눕혀 놓고 배를 갈랐습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양심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올바른 접근입니까 잘못된 접근입니까? 양심이 심장의 옆에 있을까요 간 옆에 있을까요? 왜냐하면 ‘심장이나 간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양심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적으로 보면 양심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믿어요, 안 믿어요? 그러면 마치 ‘봐라. 어디 하나님이 있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배를 가르고 ‘양심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화) 내가 신학생 때 전도를 하는데 어느 사람이 나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신, 하나님 봤어?” 제가 봤다고 말해야 할까요, 못 봤다고 말해야 할까요? 찌에로 더 부찌엘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만약에 나한테 네가 하나님을 봤냐고 물어봤는데 못 봤다고 말하면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냐. “우리 집 사세요. 우리 집 좋아요.” 라고 이야기했는데 “너희 집 봤냐?” “못 봤어요.” 그러면 물건이 팔릴까요, 안 팔릴까요? 그래서 저는 봤다고 말했습니다. 근데 우리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하나님이 봤냐고 물을 때 볼펜을 본 것처럼 하나님을 봤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못 봤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근데 때로는 이것을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랫동안 사랑하며 함께 살아왔다고 칩시다. 혹시 그 사람이 들고 있는 볼펜을 보면서 내가 저거를 막대기인데 볼펜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 일수도 있어 라고 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어떤 오해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평생 사랑하던 마음이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왜? 그것이 눈으로 본 것은 착각이 있을 수 있지만 믿음으로 보는 그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믿음으로 보는 것은 그런 착각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사물의 존재의 방식입니다. 사물의 존재의 방식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정적으로 존재하는 것. 두 번째로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 세 번째로는 충만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이렇게 그린 이 안에 있는 것은 볼펜이고 볼펜과 떨어진 이 공간은 볼펜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한정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입니다. 볼펜, 나무, 칼, 돌, 책상,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두 번째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느 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낸 영혼은 내 안에 있지 이 사람 안에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기에 있지 저쪽으로 출장가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내가 밥을 못 먹어서 빼짝 말랐습니다. 그 때에도 내 영혼이 내 안에 있습니다. 밥을 많이 먹어서 두배쯤 커졌어요 살이 쪄서. 그러면 나중에는 그 찐 살에는 내 영혼이 없을까요? 여기는 내 영혼이 있고 여기는 내 영혼이 없어.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제한적인 사물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영혼이 저 사람 속에 들어가고 개 속으로 들어가고. 이렇게는 안 됩니다. 그냥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귀신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있다가 저쪽으로 가면 여기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돼지들에게 들어가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나와서 그리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게 바로 두 번째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 돼죠? 마지막 세 번째가 충만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근데 앞에 두 가지 기준으로 보면 아무데도 안계십니다. 이렇게 딱딱하고 차가운 것을 찾아보려고 하나님을 막 찾아도 그렇게 찾아도 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배를 가르고 양심이 없기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피묻은 장갑으로 사람들 내장을 쑤시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만적으로 계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시면서 모든 곳에 계시지만 또 아무 곳에서도 인간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도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차셔서 어디서든지 당신의 증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그 거룩한 하나님 성에서 찬양할지어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릴 수 없지만 색칠할 수 없지만 어떤 그림보다 분명하게 살아계시고 어떤 색칠보다 아름다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며 사는 것, 그 비밀을 안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화)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합니까, 못 생긴 여자를 좋아합니까? 여러분 중에서 미녀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중국의 배우 탕웨이가 한국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그 사람이 시집을 온 게 한국에서 엄청난 뉴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이 애기를 낳았는데 어떻게 생겼다고 한국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유명해졌을까요? 솔직히 나는 탕웨이가 시집 오기 전까지 탕웨이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이렇게 보기 싫을 정도로 못생긴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유명해졌을까요? 아니 중국에서 시집 온 사람이 한 둘입니까? 아니 시집을 올든 말든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한국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근데 왜 이렇게 관심을 집중할까요? 막 축하한다고 그러고 어떤 남자들은 시기하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우면 사람들이 사랑합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보면서 성도들이 “이야 저런 사람이 하나님과 연애하는 사람이구나.” 그것을 느끼면서 부러워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동의할 수 있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셨습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울하십니까? 저도 젊었을 때 연애해봤습니다.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예뻤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예뻤습니다. 근데 사랑하니까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돈이 없었습니다.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은 그 하나님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보여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국에도 지금 여자들이 나이가 많아도 시집을 잘 못 가요. 특히 교회에서는 심각합니다. 예수 믿는 남자를 찾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몇 년이 지나도 누가 와서 우리 한번 서로 사귀어 봅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남자들이 적고 여자들이 많아서 내가 프러포즈를 못 받는다. 고 말입니다. 근데 저기 있는 사람은 7-8명이 결혼하자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앙이 좋아서? 아닙니다. 漂亮(piaoliang). 예뻐서입니다. 하나님도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사람들이 모릅니다. 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설명해서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때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아름다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 그래서 그분을 뜨겁고 깊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 하나님이 그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온 세계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그림을 보면 우리 은하계입니다. 우리 은하계에는 약 2,000억 개 이상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00억 개의 별입니다. 2000억 개의 별인데 위성과 행성이 아니라 태양처럼 언제나 불타는 항성입니다. 태양 주위를 지구를 포함해서 8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는데 그 행성들 주위를 다시 160개의 위성이 돌고 있습니다.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달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다 합치면 저 은하계 안에 약 4조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 온 우주 안에 저런 은하가 약 1천억 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밤하늘에 보면 굉장히 큰 왕별이 보입니다. 과학자들이 그게 큰 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은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빛이 수십만 광년을 가도 못가는 수조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왕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1천억 개가 있는 게 우주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볼 수 있는 우주의 지평선 안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우주의 지평선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있는지 우리 인간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누가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으셨다면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밑에 보면 17세기에 살았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라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우주의 조화』라는 책에서 놀라운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발견한 지구를 포함한 6개의 행성들의 공전 주기를 계산해서 음표를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아주 놀라운 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바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두셨는데 그게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세상에 아름다운 질서들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것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그 다음의 사진을 보시면 두 사람이 나오는데 이쪽에 나오는 사람은 20세기에 아주 유명한 무신론자입니다. 앤터니 플루(Antony G. N. Flew)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런던의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습니다. 근데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그것은 신이 왜 없는가? 왜 그렇게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신 없이도 어떻게 잘 살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연구해서 발표를 한 것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죽기 한 6년 전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책을 씁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신』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리고 그 책을 펴낸 지 3년 뒤인 2010년에 죽습니다. 이 사람의 이런 변심이 엄청난 충격을 세계 학계에 던져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세계 무신론계의 대부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내가 아무래도 평생 잘 못 생각한 것 같다. 신은 있다. 이렇게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인가? 우리 이렇게 질문 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신이 있다고 했으니까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이제 밥 먹을 때도 기도해야 돼?” “아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럼 이 사람이 생각하는 신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바로 중국 사람들이 생각했던 따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일도 없고 그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개념 속에 모든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 한 철학적인 근거로서 상정하는 신입니다.
옆에 나오는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 책이 분명히 중국에서도 번역될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 태생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스위스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습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신은 없다." 신은 없다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많은 복잡한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막 개판으로 남 괴롭히고 나쁜 짓만 하던 사람도 죽으면 끝이다. 그 다음에 남을 위해 열심히 희생하고 고통을 받으며 살던 사람도 죽으면 끝이다. 너무 그렇게 고생한 사람은 억울한 것입니다. 이 사람 이야기가 신은 없다. 근데 이런 경우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래서 그냥 그렇게 고생하던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그 신한테 상도 받고 행복하게 산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자. 그러면서 우리도 이렇게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살지 않겠느냐. 신은 물론 없지만 저렇게 나쁜 짓을 계속 하며 산다면 죽어서 지옥 간다고 치자. 그러면은 그런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겠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인격체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살아계시고 사랑하시고 생각하시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너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그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나오는데, 어거스틴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고백록 속에서 말한 것입니다. “(중국어로 읽음) 우리를 일으켜 당신을 찬양함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되기를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 주님의 품에서 쉴 때까지 안식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실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봅시다. “(중국어로 읽음) 책갈피 속에는 고백의 눈물과 당신의 희생과 상한 영혼과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람들의 구원과 약속된 도성과 성령의 보증과 구속의 잔 등과 같은 경건의 표상들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데 어찌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리요.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속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로다.’라고 노래하는 이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누구도 ‘수고하는 자들아, 나에게로 오라.’는 부르심을 듣지 못합니다. 거기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배우는 것이 멸시를 받습니다. 이는 당신이 그것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신 탓입니다.” 한번 집에 가서 잘 읽어보십시오. 너무 아름답습니다. 플라톤도 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람도 따오가 생각합니다. 근데 거기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그분께 회개하는 눈물, 통회하는 심령,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계실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성을 뛰어 넘어서 성경 말씀을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이는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근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안 믿던 사람들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로 계실 뿐 아니라 살아계시고 살아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계실뿐 아니라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근데 그 하나님은 인격저인 하나님으로서 살아계십니다.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면서도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만큼 큰 소망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그러니 오늘 그 하나님이 계신 것, 살아계신 것, 그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이것만큼 놀라운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찬양합시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목회사역이 바로 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존재하심과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전하게 해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게 우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