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9-11)
녹취자: 조경훈
성경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고 말합니다. 어제 배운 것을 잠깐 말씀드리면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도는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라고 말합니다. 다 빼버리면 목회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중생과 함께 심겨진 주님을 향한 사랑을 점점 북돋는 것” 이고, 전도는 “그렇게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을 예수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 불붙듯 타오르게 할 수 있느냐? 그 불길은 장작의 도움 없이는 안 되는데 그 두 개의 장작은 지식과 총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식(ἐπίγνωσις)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고, 총명(αἴσθησις)은 판단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자의 임무는 어떻든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에 대해 풍성한 이해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양의 중심자리에 와야 하고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가르쳐 올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함으로써 그러한 사역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사랑은 불길처럼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 한 50명 정도를 목회하다가 생애를 끝내고 어떤 사람은 몇 만 명의 교인을 목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주신 다른 그릇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농어촌 목회자들을 섬기는 일을 한 17년째 하고 있는데 저는 농어촌에 있는 목회자들 중에서 추호의 가식이 없이 무릎을 꿇고 깊이 존경하고 싶은 목사님들을 몇 분 만났습니다. 목회의 본질은 얼마를 맡겨 주셨든지 그 사람들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회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그 목회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입니다. 목표와 목적은 다릅니다. 목표는 도달해야 할 중간 단계이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마지막입니다. 예를 들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목표이고 전투에서 미친 듯이 승리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이 죽기를 각오하는 이유는 전투에서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이라면 전투에서의 승리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에 있어서 전투와 같은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두 번째 ‘진실하여’, 세 번째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세 개입니다.
첫 번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 라고 나오는데 ‘선한 것’ 이라고 나오지 않고 ‘다른 것’ 이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며’ 라는 것은 희랍어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인데 이것은 “분별하다” 보다는 “시험해서 정체를 드러내다.” 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 보아도 가짜나무를 만드는 기술이 한국처럼 발달한 곳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원목이 너무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진짜 원목인지 가짜인지 어떨 때는 건축을 좀 아는 사람이 만져보아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건축에 대해서 좀 관심이 많기 때문에 건물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살짝 한번 긁어봅니다. 나무는 긁어보면 나무의 긁히는 표시가 나지만 플라스틱 껍질이 나오면 그것은 프린트한 것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 봐도 이렇게 정교하게 나무무늬를 만드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합판 같은 것을 찍은 가짜나무도 있습니다. 진짜 나무를 대패로 얇게 벗긴 스키다 라고 하는 무늬목을 부칩니다. 긁어보면 겉에는 나무인데 속에는 또 다른 나무가 나옵니다. 이와 같이 제가 열쇠 같은 걸로 긁어서 그 정체가 뭔지 확인해 보는 것을 ‘도키마조’라고 합니다. 즉, 목회의 첫 번째 목표는 디아페론타를 도키마조하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교인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디아페론타를 “보다 가치 있는 것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분별하는 것” 이라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학교 다닐 때에 조흔판 이라는 단어를 배운 적이 있으실 겁니다. 숯돌같이 생긴 것인데 어떤 광물질의 정체가 뭔지를 모를 때 그 조흔판에 갈아봅니다. 그러면 돌멩이의 색상은 검은색 인데 이상하게 긁어보면 초록색 가루가 나옵니다. 겉으로는 까맣게 보이지만 원래 그 돌멩이의 정체는 가루의 색깔로 나온 초록색입니다. 그렇게 긁는 행위가 바로 도키마조입니다.
문제는 성도들의 판단력이 흐리니까 좋은 것도 나쁘게 보이고 나쁜 것도 좋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하도록 성도들을 길러내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판단력이 없을 때 교회에 대한 충성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중세에서 배우고 종교개혁시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단일수록 그것을 어마어마하게 강조합니다. 맹목적인 교회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이 갖춰진 성도들로 길러내면 그 사람들이 그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으면서 섬기고 봉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신앙의 요체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잇몸에서 자꾸 피가 나옵니다. 신문을 읽다 보니까 잇몸에서 피가 나올 때 빨리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심장마비나 신장에 심각한 위험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치과에 뛰어가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 치과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보고 “아니. 목사님. 그것 모르셨습니까? 큰일 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잇몸에서 피가 나오면서 고름 같은 것이 나오는데 그것을 먹으면 피 속으로 흡수됩니다. 그러면 균이 몸에서 돌면서 결국은 심장으로 들어가서 쇼크를 일으키거나 심장에서 쇼크를 안 일으켜도 우리 몸에서 피를 걸러서 맑은 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정수기와 같은 신장으로 들어가면 신장이 망가집니다. 집안에 있는 정수기에다가 물을 붓지 않고 뜨물을 부으면 망가지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의학지식까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조금 알고 나면 섬찟섬찟 할 정도로 판단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에서도 똑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끔 성도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특히 이 편지를 쓰는 사도바울시대에는 수많은 초대교회의 이단들이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많은 유대교완전주의 같은 중요 이단사상들이 교회에 도전하면서 교회에 심각한 손해를 입히고 있던 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른 것을 분별하며’ 라고 말할 때 이것은 뼈에 사무치는 심각한 얘기였기 때문에 목회의 첫 번째 목표로 등장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함으로써 그런 목회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너무 너무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성경의 뼈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교리를 탄탄하게 가르쳐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교회를 볼 수 있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내야 됩니다.
여러분. 교인들을 목회해 보셨으니까 알지만 예수 믿다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꽤 있지만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오는 교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를 제대로 안 믿어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으려면 심각하게 공부를 해서 교리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교육을 안 받으면 절대로 천주교에서 영세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특별히 교육받지 않아도. 막 줍니다. 그 증거가 뭔지 아십니까? 교리반에 새로 수평 이동한 교인들 그 중에서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고 평신도도 있지만 삼위일체에 대해 얘기해보면 80%가 이단적인 교리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양태론 아니면 삼신론 아니면 단일신론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배운 적인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구원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애매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교회에서 교리교육을 한창 할 때에 교인 중에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들어왔습니다. 평신도들하고 같이 시험을 보면 평신도들은 60점 80점 나오는데 신학대학원 다니는 아이들은 점수가 20점이 나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분별력이 생겨날 수 가 없습니다. 어떻게 교리를 가르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교리를 가르쳐서 뼈대를 만들고 성경을 풀어헤쳐서 몸을 만들어서 몸이 있는 사람처럼 교리의 뼈 위에 성경의 살을 입혀서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되게 만드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예화) 선교적인 일 때문에 중국에 자주 갈 수 밖에 없는데 한 선교사님이 좋은 동역자가 있다고 하면서 목회자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사람이 대화해보면 딱 알게 되는데 잠깐 앉아서 대화해 보았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고 영락없는 목사입니다. 언어의 장벽은 있지만 대화를 하고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를 하는데 그 목사가 자기네 교회 교인 중에 좋은 청년들을 우리학교에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만날 일이 없어서 한 2년 정도 연락이 뜸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목사는 덜컥 신사도운동에 깊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자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꽤 뚫어 본다고 하고, 성령님이 오늘 내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좋은 거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도키마조 디아페론타” 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가 목회를 하다가 어떤 한계에 부딪쳐서 신사도운동 하는 곳에 간 겁니다. 그곳에서 사람이 막 쓰러지고 소리를 지르고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해보니까 사람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신학이고 나발이고 다 버려버리고 한마디로 뿅하고 가버리는 겁니다. 자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 2~3백 명 모여서 아주 재미있게 목회하던 목회자였는데 삼시사방으로 교회가 다 찢어지고 한마디로 개판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판단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 노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목사 한 분이 어느 날 설교시간에 “나도 사실은 구원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라고 해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도키마조 디아페론타” 가 안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시대를 회상해 보십시오. 여러 곳에서 설교자들, 특히 디모데나 이런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분별력 갖기를 힘쓰라고 수없이 간구하고, 교회를 위한 가장 큰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분별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아기적인 신앙의 특징은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목회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여” 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실 진실하다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학생만 되면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는 진실한 사람이 되거라. 혹은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훌륭하다”라는 이 표현에는 물론 지위도 있지만 돈이 많고 권세가 높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도덕성이 따라옵니다. 모든 사람이 걸어갔으면 좋을만한 어떤 표상이 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진실함은 솔직함과 관련되지만 솔직함만은 아닙니다. 악인이 자기 속셈을 솔직히 털어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째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나는 네 돈을 뺏고 싶다. 그래 내가 욕심쟁이다. 그러나 나는 양보 못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고 빼째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진실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도덕’이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매우 요긴합니다. ‘도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가 막힌 단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중국어로 ‘따오 道 (dào)’입니다. ‘따오 道 (dào)’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객관적인 원리 혹은 진리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로고스’입니다. ‘도덕’은 중국어로 ‘따오더道德(dàodé)’라고 하는데 ‘덕’이라 단어의 정의를 내리자면 ‘덕’은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힘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덕스럽게 합시다.” 라고 하는 뜻은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화합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으면서도 진리에 부합하도록 결론을 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인이나 어떤 사람을 일방적으로 두호해서 그 사람이 이익을 보게 하는 것을 덕스러운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도덕입니다.
(예화) 20년 전에 여기 통영으로 제가 집회를 내려왔습니다. 집회를 부탁을 해서, 와달라는 날짜에 집회를 하면 끝나고 바로 부산에서 집회가 있는데 가는 시간이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못가겠습니다 라고 얘기했더니 통영 주최 측에서 “목사님.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통영에 헬리콥터가 있습니다. 여기 집회 끝나고 헬리콥터를 태워 드릴 테니까 부산까지 15분 만에 가실 수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때는 헬리콥터 정기노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못 갈 이유가 없어서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 후에 그 교회에서 저를 차에 태워서 산꼭대기에 있는 헬리콥터 장까지 갔는데 진짜 헬리콥터가 왔습니다. 손님은 저 혼자였고 헬리콥터에는 조종사 두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20년 전인 그때 저는 처음 내비게이션을 봤습니다. 조종사들이 나와 있는 화면에 통영에서 부산을 찍으니까 파란 줄이 쫙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신기해서 계속 봤는데,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빨간 줄이 나오는데 비행기가 똑바로 가면서 빨간 줄이 파란 줄을 지우면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약간 옆으로 나오면 다시 돌아갔습니다.
객관적인 진리인 하나님말씀에 인간이 합치되어 있는 상태가 도덕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실함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의 두 번째 목표는 진실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 진실함의 기준이 목사인 나의 이익이나 교회의 이익이나 국가의 이익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진리에 달린 것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목사도 진리에서 어긋나면 “그것은 싫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교인을 길러내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진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났고, 진리를 따라서 생각하고 사는 게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격과 모든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진리요’(요14:6) 라고 얘기 하셨습니다.
(예화) 신학교 동기 가운데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보통 스님이 아니라 전국 불교도연합회 사무총장까지 한 거두였습니다. 그런데 뭘 하다가 잘못했는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전경이 “이거 한번 읽어 보시우.” 하고 쑥 집어넣는데 보니까 기드온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이 자식아.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전국 불교도연합회 사무총장이야. 어디 이 같잖은 것을.” 하고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안 나가고 뚝 맞고 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독방에서 눈을 뜨고 나면 그 파란색 성경이 눈에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져다 놓고 탁 폈는데 하필이면 그 구절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람 얘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일평생을 거쳐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겠다.” 라고 끝을 내는 데 도대체 누구이기에 내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거기서 회심을 하고 목사가 되었고 지금도 목사입니다. 덕분에 불교에 많은 비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도가 확실하게 있다고 그렇게 말 안하고 노장사상에서도 바깥에 진리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인간과 관계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이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인식하는 그 사람 안에 진리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인간 본성이라고 표현합니다. 플라톤 같은 사람들의 해석은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앙은 이미 객관적으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켜서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그 잣대가 무엇이냐, 그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거기에 확실하게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자발성이 있어야지만 진실이라는 것이 성취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제가 음식을 너무 맛있게 먹는다고 회장님이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많이 먹지는 않지만 오늘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요리 중에 하나가 중국에 충칭라즈지 라고 하는 음식입니다. 도저히 입에 넣고 씹을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매운 고추와 함께 손가락 반 토막쯤 되게끔 닭을 뼈째 잘라서 그것을 바삭바삭하게 튀긴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먹으면 매운 게 아니라 혀가 마비가 되는데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편도선 수술을 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충칭라즈지를 좋아하지만 편도선 수술을 한 상태에서 한줌 먹었다고 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방금 잘라낸 편도에 혓바닥이 마비될 정도의 그 고추 성분이 수술해서 도려낸 그 부분을 휩쓸고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치는 것입니다.
그럼 목회의 어려움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진리를 좋아합니다. 지금도 설교할 때 무슨 말씀을 전하든지 심지어 우리들이 생각할 때 죽을 쓰는 것 같은 설교인데도 여기에 똑바로 앉아서 메모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습니까? 어떨 때는 그러던 교인이 벌떡 일어나서 목사님한테 삿대질하고 교회 떠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결국 진리가 정말 맛스럽고 좋은 것이지만 그 진리만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받아들이는 상태도 문제입니다. 잠자는 방을 바닷가 쪽으로 주셔서 아침에 커튼을 걷으니 눈이 부시게 햇빛이 쫙 들어오는데 얼마나 상쾌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안질이 걸린 사람이면 어떻겠습니까? 미치지 않겠습니까? 맛있는 음식이 입병이 난 사람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죽을 맛입니다. 향기로운 향수냄새가 코에 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따라서 참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자가 항상 환영을 받을 수는 없다는 데에 목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진리를 가르치면서 진리를 설교하고 진리를 외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서 그 진리를 싫어할 때 그 고난은 목회자의 상 받을만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물러서지 않고 꺾이지 않겠다는 거룩한 강인함, 내가 어떤 최악의 상황을 만나도 이 진리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인함, 이것과 함께 내가 죽고 또 죽을 지은 정 이것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단오한 지사의 결의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진리를 토해내지 않으면 교회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때로는 성도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야단을 치고 싶은데 그러면 모든 게 깨져 버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오히려 얼마나 힘이 드냐고 위로를 해 줍니다. 내 편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어떡하든지 그 마음을 돌이켜서 진리로 돌아와서 진실한 사람이 되게끔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아들이 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에 노회에서 목사가 됐습니다. 얘는 우리부부한테 무슨 얘기를 하면서 말을 더듬습니다. 그러면 우리부부는 “너. 지금 거짓말 하려고 그러지?” 하면 못합니다. 우리가 교인들을 길러낼 때 예수 믿고 돈 많이 버는 교인 국회에 진출한 교인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진실하게 살 수밖에 없는 교인들은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교회 있든지 옆의 교회에 가든지 아니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든지 어디서든지 그런 교인을 만드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입니다. 휘랍어로 ‘아포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라는 단어입니다. “아”는 “없다.”는 뜻이고, “프로스코포스” 라는 단어는 “흠집”을 뜻합니다.
저는 배를 좋아합니다. 가게에서 엄청나게 큰 배인데 싼 값에 팔고 있었습니다. 왜 싸냐고 물으니까 조그만 흠집이 있어서 그러는데 먹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배가 흠집이 없었다면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렸을 것입니다. 장가가는 아들을 위해서 며느리 다이아반지를 샀는데 쪼그만 콩알만 한 것하고 콩알보다 훨씬 큰 거 두 개를 주인이 내밀면서 같은 값이니까 큰 거 가져가라고 대신에 약간의 흠이 좀 있으니까 이해하시라고 그러면 여러분은 흠이 있는 큰 것을 사가시겠습니까? 흠 없는 작은 거 사가시겠습니까? 반지를 만들어서 딱 끼워버리고 밑에 집어넣어 버리면 모르겠지? 며느리가 언젠가는 알게 됩니다. 그것을 처분할 때 보석상에 가면 흠집이 있다는 것을 딱 알아냅니다. 흠집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허물없이’란 ‘흠이 없는 것’,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가능한 삶일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이외에 누가 이 세상에서 흠 없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흠 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허셸포드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바다에서 주인이 종에게 얘기했습니다. “얘야. 가라.” 주인님 어디로 갈까요? “북극성을 보고 계속 그 쪽으로 가거라.” 그 얘기는 배를 공중으로 뛰어 올려서 북극성에 착륙을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북극성의 별을 보고 북극성을 가는 것처럼 계속 노를 저어면 그 쪽 방향에 가고자 하는 항구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렇게 흠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외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것을 그릴 때에는 마음속으로 완벽한 동그라미를 생각하며 그립니다. 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로그램메틱한 것입니다.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흠 없는 삶을 살아야하고,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흠’이라고 하는 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학적인 흠, 윤리적인 흠 모두를 가리킵니다. 교리적으로도 흠이 없고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는 살을 사려고 애를 쓰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에 가지와 열매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심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흠 없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인들에게 그것을 잘 가르쳐서 자신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들이 자녀문제를 가지고 얘네들을 어떻게 할지 무지하게 많은 고민을 합니다. 부모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녀에게 물려주면 물론 걔는 100미터 달리기를 한 30미터 앞으로 가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이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애들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3대 가는 법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 아이가 그 재물을 끝까지 보존해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그 다음 대에까지 그 재산을 물려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가 교인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자녀들을 위한 최고의 보험은 그 자녀들을 좋은 예수쟁이로 만들어 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가 다른 것들을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려고 하고, 흠 없이 사려고 몸부림치면 하나님께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복을 주셔서 부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좀 없고 가난해도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어디선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목회하는 목표는 결국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분별력 있는 것, 두 번째는 진실한 것, 세 번째는 허물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또한 목회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돼있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영광이 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경이 영광을 항상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광은 크게 세 가지의 신학적인 범주로 성경에서 제시됩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한 장소를 정해서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신데 당신이 마치 특별히 거기에만 있는 것처럼 당신 자신의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가시나무떨기 사이에서 본 불꽃, 성막 위에 하나님의 임재, 이사야가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뵈옵는 것 이런 것들은 한 특정한 장소와 관련지어서 일종의 ‘쉐키나’ 라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영광을 확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례인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그 무엇인가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것을 효과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돌린다. 모든 영광을 주님 홀로 받으소서. 영광을 주님께 돌립시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말하고 생활하고 설교하고 목회하고 혹은 평신도일 경우에 그냥 한 사람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나를 가까이에서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존재와 인격, 삶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심지어 저런 독특한 인격, 독특한 삶, 심지어는 자신들과 다른 독특한 생활 방식이 자기 것 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까? 아. 그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구나.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존재일까? 이런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다니엘과 다리오 왕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 던져 졌습니다. 다리오 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잘못할 것 같아서 아침에 달려가서 채신도 없게 뭐라고 말합니까?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20) 이 사람은 하나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인데 다니엘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있구나. 저 사람은 내 밑에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됐습니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그 하나님을 알고 회심을 해서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마지막으로 성취되는 위대한 비전은 이 지구상에서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내가 인정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깊이 파고들어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고 엎드리며 그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 덮여져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비전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영광이고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려함이라 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목회자의 목양을 받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흠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과 인격, 사상, 생활방식, 정확히 말하면 존재 자체를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정말 있구나. 나도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자기도 부복하는 것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러한 영광을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공한 목회를 통해서만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목회자들도 있고, 잠깐 살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것 같은 목회자가 있습니다. 괄목할 만한 큰 영향력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두고두고 심금을 울리며 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대교회의 목회자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선교를 하던 사람도 아닙니다. 인디언 마을에 몇 명씩 모이는 곳에 가서 비스킷 같은 것을 구워가지고 다니면서 폐결핵에 걸려 죽을 때까지 한번 설교하고 한사발의 피를 쏟기 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조나단 웨드워즈의 큰 딸하고 교제를 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쩌면 사위가 될지도 몰랐을 그 사람한테 깊은 감동을 받고 선생님처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그 사람에게 너의 일기를 책으로 내자고 그에게 허락을 구했지만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 설득을 했을 때 마지막에 그가 “나의 이름이 빛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출판을 허락합니다.” 라고 말하고 죽습니다. 그렇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일기집이 영국을 휩쓸고 미국을 휩쓸면서 헨리 마틴, 짐 엘리엇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면서 부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 있을 동안에 무슨 업적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권의 책으로 한 시대를 깨워 놓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기가 기도 좀 하는 사람이라고 교만해 진 사람들은 그 책을 읽으면 겸손해 질 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찬송이 되게 한다.” 라는 것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 보다 어떻게 보면 더 적극적인 것이고, 그 분의 이름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시 8절 말씀으로 돌아가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거짓말 하는 것을 아주 우습게 아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국회에 와서 선서를 하고도 30분 후면 들통 날 거짓말들을 사회의 유력인사들이 마구 쏟아냅니다. 처벌도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증인, ‘말튜스’ 라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한 번쯤 위증했다고 해서 그렇게 큰 게 아닌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휙 뛰어 넘어서 지금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약 3,500년 전으로 무대를 옮기도 성경을 기준으로 1,500년 전 쯤 뒤쪽으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모세와 함께 광야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때 무시무시한 십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는 은총만 주어졌는데 시내산 언약에서는 죽음의 칼이 함께 들어옵니다. 그 계명에서 “거짓증거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거짓증거하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에 의해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증인으로 섰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목격한 대로 증거 하는 것이고 거기에 위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위증이 허락되는 이유는 위증에 대한 벌이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쉽게 위증을 합니다. 거짓말을 해도 1년 밖에 감옥에 안 가니까 위증을 해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1년 살고 이럽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처럼 위증을 해서 십계명을 어기게 되면 돌로 쳐서 죽인다. 사형을 당한다고 하면 사람이 함부로 증언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이것을 구약의 배경으로 가져가면 구약에는 소위 얘기하는 봉신조약이라는 것이 주어집니다. 한 나라의 왕이 나라를 점령하고 땅을 떼어서 봉신들에게 주고 약정을 맺습니다. ‘너는 나에게 충성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지켜준다.’ 등등의 조항들이 맺어집니다. 이것을 확실하게하기 위해서 소를 반으로 갈라놓고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길을 그 조약서를 들고 둘이 같이 그곳을 지나가는 겁니다. 조약서의 한 부는 왕이, 한부는 신하가, 한부는 신당에 보관을 합니다. 그 뜻은 “우리 중에 누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것에 대한 증인을 서고 있는 신들이 이 언약을 어긴 자에게 징벌을 내려서 이 짐승처럼 쪼개 버리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언약의 계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까지 자기 증인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한 치의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지켜보셔도 나는 이 내용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생사를 건 맹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목회의 어려움을 많이 얘기합니다. 고집된 장로를 꺾는 것도 힘들고 등등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힘든 일은 목사 바깥에 있는 것이 목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매순간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목사가 가장 힘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교인들이 버릇이 없어서 목사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교회를 사랑할 줄 모른다고 종종 타박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양의 사명을 맡겨 주셨을 때에는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 안에 있는 양떼들을 향한 그 마음이 된 상태에서 목회하기를 바라심으로 우리를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못하게 하는 요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제가 선배님들의 연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목회의 연수를 지났지만 저도 험한 세월을 지났습니다. 지나고 보면 느껴지는 게 정말 가장 어려운 것은 목회자가 순수하게 양떼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양떼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 사랑은 예수를 향한 사랑과 나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사람 사랑이냐 하나님 사랑이냐를 논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안에 형제 이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전심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 외에 누가 계시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 얘기뿐 아니라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완벽하게 한 사랑 안에 살게 하시고자 온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양떼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강의 첫 시간에 얘기했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거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까 좋은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 매달리게 되니까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목회하시다가 많은 어려움도 겪지만 마지막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그 어려움을 겪게 하신 하나님을 결국 찬송하게 되지 않습니까? 당장은 이 어려움은 저 인간 때문에, 이 인간 때문에 하고 싸우지만 세월이 지나고 신앙적으로 다 소화하고 나면 그 때에 그 일이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떼를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는 목회자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나쁜 거니까 나쁜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목회자에게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그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미끄러지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주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목회자는 양떼를 사랑한다. 양떼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거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라고 이야기 했는데 희랍어로 ‘스프링크나’(σπλάγχνον)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심장이 아니라 창자를 말합니다. 직역을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창자들로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나온 것일까요? 문화적인 맥락이 다른데 대게 우리 전통 유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노장사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감정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혼이 어디 있을까 물어보면 심장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 사랑을 지배하는 영혼의 가장 내밀하고 깊은 핵심적인 좌소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창자들이라고 하면 우리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들을까봐 심장으로 번역했는데 사실은 창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3년에 죽은 이디아민이라는 콩고의 독재자였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이 군대의 하사였는데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탈취합니다. 그리고 온갖 기행적인 행동으로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경악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부하들이 또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기를 뒤집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쿠데타를 이기고 그 쿠데타의 주모자를 색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모자의 배를 가르고 그의 간을 꺼내서 씹어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그랬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버려 두면 그 간에서 그 놈이 부활해서 또 괴롭힌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작아작 씹어 먹어서 다 소화시켜 버리고 이놈을 자기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것이 창자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동사로 쓰인 예가 있는데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민망히 여기시니.” 에서 ‘에스프랑크니스떼’(ἐσπλαγχνίσθη) 라는 단어입니다. “창자가 떨리기까지 감동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원숭이 엄마하고 새끼하고 산책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새끼 원숭이가 까불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그물에 걸렸습니다. 엄마가 구하려고 했는데 벌써 사람들이 와서 이 애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엄마가 계속 따라갔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자기 새끼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어미도 그 광경을 보면서 죽습니다. 죽은 다음에 사람들이 이상해서 “얘가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죽었을까? 라고 해서 봤더니 나중에 어미라는 사실을 알고 죽은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단장이라고 합니다. 창자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 어미가 단장의 아픔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비극과 고통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고 그것은 영혼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가 뒤집힐 정도로 흔들린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표현이 얼마나 강한 표현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도 정말 한 번의 설교에 수 백 명 수 천 명이 회심하는 위대한 역사 속에 나오는 전설적인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못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지만 놀라운 인격을 갖춰서 한마디만 하면 교인들이 조용해집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너무 기운이 없어서 제자들이 이끌어오면 힘이 없어서 손을 들고 자녀들아 너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라고 하면 눈물바다가 됐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런 인격을 갖추고 싶은데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떡하겠습니까? 어차피 그것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몸부림치면서 해야 될 일은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언젠가 이 목회도 잠깐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30대에 교회를 개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친구들 만나면 맨날 은퇴 얘기하고 건강얘기 합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엊그제 권성훈 목사님 만나서 하는 얘기가 자기가 나타났을 때 혜성같이 나타났다고 그랬는데 인생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일 모레면 은퇴이고 잠깐 있다가 우리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목회 할 동안에만 목회자이고 목회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계속 돼야 될 일이 있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목회 그만 두고 기력이 남아 있을 때는 노회도 찾아오시고 교역자 수련회도 찾아오지만 우리가 더 늙어서 수족도 못쓸 때가 되면 가만히 집에 누워 있거나 요양원에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목회 할 수 없고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아내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나 혼자 요양병원에 누워있어도 계속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누가 이제는 모두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요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예화) 마지막을 한 가지 예화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주도에 제 친구가 있습니다. 직장생활 할 때 입사동기인데 우리 모두 창고에 모여 앉아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신학교를 가게 됐고 각자 목자가 됐습니다. 친구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목회를 했는데,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교인 한 70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19년 동안 목회해서 200여명 교인이 모였고 1,700평 교회를 지었고 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만나서 그러는 겁니다. “목사님. 시골은 재미가 없습니다.” “왜요?” 하고 물으니까, 친구는 “비전도 없고...” 라고 하길래 사모님도 거기 계셨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비전은 무슨 비전?” 다 노인네들 밖에 없어서.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헐. 너 목사냐? 무슨 놈에 얼어 죽을 비전이냐? 네가 정말 젊은 사람을 원했으면 홍대 앞에다가 개척을 하지. 왜 제주도로 내려갔냐? 그렇게 얘기 했더니 “아. 그럼 목사님은 비전도 없는데 평촌에 가서 땅을 사고 교회를 지었냐?” 고 해서 “비전은 무슨 놈에 얼어 죽을 비전이냐? 교인들이 모여서 갈 데가 없고 서울은 비싸니까 거기로 간 거지. 아니. 젊은이가 없고 노인 밖에 없는 것을 투덜거려 뭐하냐? 매일 열심히 전도하고 목회해라. 그리고 한 사람씩 죽으면 데려다가 염해서 수의 씌워서 하늘나라 보내주면 그게 목회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그랬더니 목사님 보다 옆에 계신 사모님이 은혜를 받는 겁니다. “아멘. 아멘.” 너무 큰 비전 꿈꾸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했지만 마지막에 로마를 보는 것 보다 더 위대한 비전이 감옥 속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마지막에 그는 예수 닮는 것을 목표로 하고 예수님 사랑하는 삶은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얼마큼 달려갈 수 있을지, 얼마큼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목회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멀리 못가도 그 길 따라 걸어가다가 마지막에 모든 일 끝내고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이 낯설어 보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