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웨스턴 침례신학교 특강 1
자기가 생각하는 “The Way of Living” 을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발표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 발표를 귀 기울여 들었던 것이죠. 이것은 사실 그리스 철학시대부터 사람들에게 있어서 “The Way of Living” 이라는 것은 가장 커다란 관심사였어요. 어떻게 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그리고 유용한 삶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은 먹고 살만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은 절실한 문제였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이 또 하나의 “The Way of Living” 을 가르쳐주는 철학이라고 생각을 했건 것이죠. 사실은 기독교의 복음은 철학을 넘어서는 철학 이상의 것이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었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떤 삶이 인간에게 가장 복된 삶인가 라고 하는 것을 규정함에 있어서 이런 이론들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영원과 시간의 문제, 신의 존재의 문제, 인간의 문제, 영혼의 문제 이런 많은 문제들이 함께 끌어들여 오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그 이상의 놀라운 즉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소피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이 철학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리고 비난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간의 편견에 의해서 굽어진 사상들을 비판한 것이지 결코 올바른 철학에 대해서 비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하는 것 이 자체가 사실 일반학문의 전체적인 구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체제에 순응하는 가운데 신학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잘못되고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신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전체적인 통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오늘날의 학문 시스템은 철저하게 찢어지고 분열의 분열을 거듭해서 전문화의 길로 가는 학문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런 학문의 구도 속에서 신학을 집어넣고 거기에 학문을 끼워 맞추다보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했냐면 신학이 고유하게 추구하는 이상이 있는데, 통합 그리고 전체를 통할하므로서 거기에서 인간에게 “The Way of Living”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그러한 통전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러한 어떤 지식의 파편화로 말미암는 지식의 분열 현상들은 신학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에요. 여러분, 미국에 와서 살고 계시니까 저보다 소식이 빠르겠지만 1996년에 미국의 철학계와 포스트모더니즘 학계를 뒤흔드는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을 했습니다. 1996년에 뉴욕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로 있던 벨란스 호컬이라는 사람이 듀크대학의 "Social Text"라고 하는 전문적인 SSK, Social of Science Technology를 추구하는 잡지에 논문을 하나 싣게 됩니다. 논문의 제목은 뭐냐 하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양자 중력학의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 라는 논문이었어요. 그 논문을 기고했는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통과가 됩니다. 통과가 되고 그것이 "Social Text“ 라는 잡지에 실리던 그날 그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잡지에 인터뷰를 해서 똑같은 날 거의 같은 날, 같은 시기에 두 권의 책이 같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Social Text“ 에 실린 논문이 순 엉터리고 뻥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내가 쓴 것이다, 그리고 발표를 합니다. 그 책이 나중에 ”Passion of Nonsence“ 라고 하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이 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켜요. SSK라고 하는 운동은 뭐냐 하면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들을 사회학적으로 변형시키는 운동들이에요. 예를 들자면 2=MC 자승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슈타인의 공식이잖아요. 그 공식을 가지고 사회학에 원형 될 수 있는 철학 논문으로 변형시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서 주장하는 내용, 자기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장한 것처럼 쇼를 부린 내용이 뭐냐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인 개념이 거꾸로 과학에 있어서 양자 중력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수학에서의 현재적인 비선향성이라고 하는 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식으로 논문을 쓴 거예요. 사람들이 굉장히 혹하는 논문을 쓰게 된 거죠. 나중에 그것은 순전히 꽝이었다. 좌파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장황한 표현을 늘어놓고 말을 꼬고, 또 꼬고, 또 꽈서 어렵게 만들고 그들이 좋아하는 비브리브라프를 만들고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뒤섞어서 이 엉터리 같은 논문을 뻥튀기로 실은 것이다. 그리고 발표를 해버린 것이죠. 그래서 한쪽에서는 너무 과학자로서 야비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얼마나 오늘날 소위 이야기하는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를 넘나든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자신도 정리되지 않은 파편적인 지식들을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지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사건이었어요. 아시죠? 그러면서 이 사람이 도네즈, 크레스티 빠, 락깡 이런 사람들을 단칼에 정리하면서 자연과학에 관한 파편적인 지식들을 자기 분야에 끌어들여서 그래서 독단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망가뜨려놓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 유명한 책이에요. 이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냐면 당대에 최고의 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저 저명한 학술지를 신설한 사람들이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학문에 있어서 전문성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이제 누군가가 여기서 저기로 넘나들기만 하면 너무나 판단하는 사람들의 지적인 훈련들이 전문화하고 구획화 되었기 때문에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판단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만들어 낸 예화인데 재미있으니까 들어보세요. 제가 웨스트민스터 가서 갓 브리스 총장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멈출 수 없이 웃더라구요.
(예화)어떤 평신도가 로마서를 읽다가 너무 어려운 구절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께 가서 “목사님 이 구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휙 읽어보더니 “야, 이 양반아, 우리 목회자들은 몰라. 이 구절은 너무 어려운거라서 신학자들에게 물어봐야해.” 그래서 이 사람이 신학교에 가서 신학자들을 찾았어요. “제가 로마서를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랬더니 “미안합니다. 저는 성경신학 전문이 아니라 조직신학전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냐고 그러니까 성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서 신학 전공한 사람을 찾았어요. “교수님, 성서 신학 전공하셨다면서요?” “네. 그렇죠.” “ 제가 질문이 있는데요. 제가 로마서를 읽다가..” “네, 미안합니다. 저는 구약이 전공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찾아가야 되냐니까 신약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그래서 간신히 신약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제가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공간복음서 전공입니다.” “그럼 누굴 찾아가야 됩니까?” 그랬더니 바울신학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그래서 바울신학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어요. “교수님, 로마서를 읽다가.. ”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로마서가 전공이 아니라 바울의 전체적인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로 바울의 서신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간신히 찾았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전공하셨다면서요? 이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이구, 로마서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그래서 간신히 로마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찾아갔어요. “이거 이렇게 모르는데..” “몇 장입니까?” “8장입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9장 전공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에서 조차도 무엇인가 자기 분야의 조금이라도 빗나간 것을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저는 I have no idea.”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 사람이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해서 심오한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 되는 거예요. 이러한 학문의 방식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냐면 결국은 계몽주의 이후로 이것들이 계몽주의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이런 식으로 학문이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오히려 학문 안에 일어나는 역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엉뚱하게도 이게 근대의 경제 역사와 관련이 있어요. 무슨 뜻이냐면 16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리상의 발견이에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커다랗게 생각해서 중국과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이렇게 세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신대륙이 발견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서 저 위쪽에 있었던 포르투갈 같은 나라는 살다가 살다가 도저히 이제는 밥을 먹고 살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지니까 “에이 씨, 죽을 바에야” 하고 배를 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갈 때까지 간 거예요. 갔더니 다른 나라들을 발견한 거예요. 말하자면 아프리카나 다른 나라들이었죠. 그 지리상의 발견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서 이 사람들이 이것을 경제와 연관시킵니다. 그렇게 하면서 지리상의 발견을 먼저 시도한 나라부터 차례대로 공업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 되냐면 2차 대전까지 되는 것이고 2차 대전이 일어난 원인 자체가 뭐냐 하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생산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제품을 생산해낸 다음에 그것을 팔 고객을 찾는 거죠. 그러나 이미 벌써 열강들이 전부 다 전 세계를 찢어서 식민지화하고 거기서 싼 노동력과 원료를 가져다가 자기네 기술을 보태서 공업화를 통해서 제품을 만들어 낸 다음에 대량 소비지를 찾는 거죠. 여기서 더 이상 판로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기득권을 가진 나라들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 2차 대전이거든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하면서 이제 폭발적으로 과학이 발달되기 시작하고 여러분들도 잘 아는바와 같이 영국에서 이것들이 화려하게 꽃이 피는데 그것이 바로 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산업혁명이에요. 왓튼의 증기 기관이라든지, 방적기라든지 이런 많은 생산기제들이 발명이 되면서부터 물건들을 값싸게 찍어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생산 수단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사회자체가 강력한 해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예전에 경제활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를 들어 내가 신발을 만든다면 가죽 사는 것부터 무두질을 해서 꿰매고 깔창을 만드는 것까지 내가 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만든 다음에 자기 식구들이 쓰고 조금 더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 그 남은 구두를 가지고 시장에 나가서 쌀하고도 바꾸고 밀하고도 바꾸고 또 옷하고도 바꾸고 책하고도 바꾸고 그렇게 해서 사는 거예요. 수공업 시대죠. 그렇게 될 때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든 관계 자체가 인간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익명성이라는 것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localization이 이루어져서 각 지역들마다 각기 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이 생산 활동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까 그 다음에는 도시가 형성이 되고 제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인프라를 가지고 있는 도시에 모든 것들이 몰리게 되어서 오늘날은 전 세계 인구의 95%가 도시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도시 속에 몰리게 되니까 얘기하면 굉장히 길어요. 그러나 간단히 이야기하면 상대주의들이 도입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전에는 혼자서 모든 것을 했는데 이제는 가죽을 만드는 사람은 가죽만 만들고 끈을 만드는 사람은 끈만 만들고, 무두질 하는 사람은 무두질만 하고, 깔창을 만드는 사람은 깔창만, 그러니까 누구도 산업 활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인간관계가 단절이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한편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과학은 자기의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주 철저하게 효율을 추구하게 되는 거죠. 효율을 추구하려면 알다시피 전문화되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 연구 분야 자체들이 산산이 찢어져서 아주 갈기갈기 나눠지는 거죠. 오늘날의 이 학문의 분야가 분과되는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물질문명을 이루어가는 과학계통에 있어서 적실성을 갖는 것이지 인문학 특히 우리와 같이 무엇인가 인생전체를 통합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해답을 받는 그러한 말하자면 신학이나 아니면 총체적인 인문학적인 활동에 있어서는 이 학문의 구조 자체가 적합하지 않는 거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신학이 이런 오늘날의 학문의 구조 속에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많은 기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예화)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예전에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무기를 가장 잘 만드는 최강국 아닙니까? 어마어마한 무기를 만들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미국의 과학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꿈의 전투기라고 이야기 하는 F20까지 탄생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그런 것들을 만들 때 모든 것들을 한군데서 통합을 해서 이루어졌다고 해요. 지금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반전단체의 항의도 많고 여러 가지 많은 비밀 노출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의 전투기를 만들게 된다면 그 전투기의 사업을 수천 개의 연구 과제로 쪼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것을 각기 한 대학이나 연구소에 주는 것이 아니라 수천 개의 대학과 연구소에 다 찢어서 배분을 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대학교 공과에 있는데 보잉사로부터 연구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엄청나게 돈을 준다는 거예요. 딱 보니까 티타늄 강도에 관한 연구. 그러니까 티타늄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견딜 수 있고 이것이 주위의 열, 속도 이런 것과 어떤 함수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해 내는 거죠. 이 사람들은 이 결과를 도대체 무엇이 쓸려고 하는지 모르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탐구해 내는 거죠.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것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니까 최고의 연구를 만들어 내는 거죠. 이런 것들을 다 만들어낸 수백 개, 수천 개의 연구과제들의 결과물을 종합해서 이제 말하자면 상층부에서 보잉사나 이런 전문팀들이 분석해가지고 새로운 전투기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사실은 공업화의 길을 가고 말하자면 기계를 만들고 물질문명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좋은 학문을 구조지만 그러나 사실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인생전체의 지혜를 담론하는 이런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학문에 있어서는 이것은 그렇게 썩 좋은 구조가 아니라 굉장히 나쁜 구조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왜 이런 학문이 이런 식으로 분과가 나눠지는지는 이야기 하고 역사적인 배경을 더듬어 가자면 아마 오늘 하루 종일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들어가야지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까 그 다음에 무슨 현상이 오게 되냐면 신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칠 때에 이런 식으로 모두 파편적으로 나눠진 가운데 가르치는 거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조직신학을 하는 교수는 성경 전체 속에 흐르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다루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대부분이 성령의 원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원어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오히려 원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성서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교리적이고 일관된 사상의 그 뼈대가 무엇인가 하는 소위 말하면 씽크로니즘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놀랍게 언어를 연구하고 이 속에서 해석을 해야 되는데 성경 전체에 흐르는 통일성에 사상에 의해서 통제가 잘 안 되는 가운데 미시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지게 되요. 그런데 실천신학을 한다는 사람은 실천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theory가 철저하게 기반이 되어야 하거든요. theory가 기반이 되고 그 theory가 사실은 실천이 흘러나오는 뿌리가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pratical theory를 하는 사람들은 이 이론 신학 자체가 매우 약해요. 그래서 조직신학적 기반도 별로 없고 역사 신학에 대한 기반도 별로 없고 더욱이 실천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 더욱이 성령의 원어를 충분하게 다룰 수 있는 실력들을 안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실천신학을 할 때에 기반 자체가 기존에 있는 실천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던져놓은 이론을 기반을 가지고 선호를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면서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서 자신도 그 많은 선택의 기반 중에 하나가 또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다보니까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이 네 개가 전통적인 신학의 사각 기본이고 그것들이 모두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가운데 학문 활동을 이루어져야지만 생산적인 활동이 되는데 그렇게 안 하게 되어 버린 거죠. 그것은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죠? 학문이 그렇게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온 거예요. 그래서 더 지독하게 나눠진 거예요. 이제 성서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렇게 얘기 하면 안 돼요. 저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송아지를 연구했습니다. 우습죠?
그리고 이제는 대학에서 로드학에 통합된 어떤 논문을 쓴 것 자체에 대해서는 그 학적인 신빙성을 허락을 안 해요. 이런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빗어지게 된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다 할 수는 없으니까 통합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거죠. 이것이 이제 오늘날 우리 신학의 실상이거든요. 이것들이 더 강력하게 촉진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에요. 20세기 이후에 이런 현상들이 더 심화되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60년대 이후에 이런 일들이 더 심화 되었고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현상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만약에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신학을 공부하되 목회적인 레레반시가 없어요. 적실성이 없어요. 설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가장 설교를 잘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리고 본인 자신도 별로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요. 그리고 목회학 박사를 받은 사람이 가장 목회를 잘 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한국에는 없어요. 그리고 본인도 목회학 박사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목회를 잘 해야 된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거는 그거고 그건 그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목회적인 레레반시가 없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부를 많이 하고 온 목사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려는 운동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고 하여튼 어디서 후져도 박사학위 가진 사람이면 advantage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에요. 오히려 순수하게 목회에 전념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을 훨씬 더 신뢰하는 분위기예요. 왜냐하면 한국에도 80년만 해도 박사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매년 2만 5천 명씩 쏟아져 나온 데니까 심지어 박사학위를 가지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는 그런 세상이니까 사실이에요. 그런 희소성 자체가 없어졌어요. 이러한 목회적인 적시성이 사라지게 된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잘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예요. 여러분들은 말하자면 취업특강 비슷한 거예요. 또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권위가 있잖아. 나는 취업자니까. 취업전선의 동향을 내가 얘기해 줄게요. 잘 들어봐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냐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뜻을 세우고 내가 여기에서 머리가 터지더라도 최고로 공부를 잘 해서 딴 것 필요 없고 내가 배운 것 잘 가르치겠다고 해서 여기에서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생을 살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이거나 지식이나 울궈서 계속해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내 일평생 가족들하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마음을 먹으면 간단해요. 그런데 여러분 100명 가운데에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 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면 그다음에 목회지를 가져야 되는데 아까 얘기한데로 5년, 10년 이렇게 허비하면서 여기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신학공부의 이런 원천적인 구조의 결합 때문에 목회적인 적실성을 못 갖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되냐면 학문의 세계에 continue 하자니 전문성이 떨어지고 목회에 와서 목회를 거들자니 목회적인 적실성을 못 갖게 되는 거죠. 오히려 유학을 안 오고 여러분의 동료들이 좋은 목사님을 만나고 잘 갖춰진 교회에 가서 목회를 배우면서 계속 고민하고 성도들과 씨름하고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되는지를 온몸으로 7, 8년을 거쳐서 목회적인 근력이 생겼다고 하면 이 사람이 훨씬 더 목회적인 적실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까딱 잘못하면 얼치기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낙심할 필요는 없어요. 취업특강 하나 듣고 낙심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양쪽 길을 다 걸어 본 사람으로서 이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양쪽 고민을 다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야기를 하고 나도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목회적인 적실성을 이렇게 상실된 가운데 왜냐하면 신학의 근본적인 목표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처음 시간에 정의를 했잖아요. 그래서 17세기의 화란의 유명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페튜르스판 마스트리어스라고 하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걸출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죠. 페튜르스판 마스트리어스 라고 하는 이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어요. “독트리나 에스티 디벤디 데오 페르크리스툰” 라틴어로 말하자면 신학지식이란 독트리나가 거기에서 신학지식을 이야기합니다. 신학지식이란 에스티 디벤디 데오, 데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디벤디 살기 위한 것이다. 페르크리스툰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살기 위한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정확하게 신학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실천적으로 정의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참된 인간으로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이것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이 신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이런 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게 되니까 목회적인 적실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적실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이것이 신학 지식 그 자체가 삶의 지혜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한국에서는 신학을 3년, 혹은 신학 대학에 들어가서 7년을 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7년, 혹은 3년을 신학공부를 해서 내보내니까 교회에 사역을 하러 간지 1년도 안 돼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신학교에서 배운 것 아무 쓸모가 없다. 그리고 다시 신학을 해야 되겠다.” 그게 뭐냐 하면 목회를 위한 신학을 다시 해야 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모순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이에요. 이런 속에서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졸업을 해서 교회로 돌아갔는데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느냐고 하면 전혀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또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보면 만날 신학공부하면서도 마치 신학교 입학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을 공납금으로 계속 까먹으면서 신학지식을 축적한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신학지식은 쌓였지만 공납금을 다 내고 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없더라. 이제 나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런 내용을 잘 다룬 책 중에 하나가 프란시스 쉐퍼가 쓴 “이반젤린 디 제스트”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 속에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신학교를 갔는데 거기서 극도의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쳐 준 것이죠.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영매주의에 빠져서 귀신에게까지 시달리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신학교에 말씀의 떡을 얻기 위해 갔는데 그곳은 나에게 돌멩이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신학 자체에 대한 무용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 지금 현재는 옛날에는 외국에서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가 그 사람의 장래를 보장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어느 교회 브랜드로 교회를 시작했느냐,(제가 솔직하게 실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교회의 후원을 받느냐가 목회의 훨씬 더 중요한 성공의 관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해나가야 될 것이냐? 여러 가지로 논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강의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학문들을 어떻게 묶어야 되겠느냐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그림을 보시면 사람이 하나 나오고 이제 세 개의 학문의 분야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학문을 가르쳤던 하나의 커다란 규범, 카테고리였어요. 피치카라고 하는 것은 자연학이죠. 자연학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로키카, 논리학으로 연결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지식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에티카로 이어지게 되는 피치카, 로키카, 에티카 이 세 가지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비록 자연에서부터 얻어지는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논리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를 가르쳐주는 그런 한 방식이었던 것이죠. 이런 가르침은 예수님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아요?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너희가 어찌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느뇨. 너희는 하나님에게 이 들풀이나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마지막에 에티카가 나오는데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동양에서도 이런 것들이 나오죠.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순리라는 로키카를 발견하고 그럼으로 인간이 영리로 사는 것은 불행으로 이끌 것이라는 결론을 내는 거예요. 저는 지금 이 모든 학문들이 이런 것들이 다 같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구조들이 이렇게 통일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개되어 왔다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무너지게 된 거죠.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학문이 해체주의를 길을 걷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데카르트의 이전까지만 해도 데카르트에 와서 중요한 선이 그어지면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고의 체계는 존재론이 중심이 되었어요. 그래서 늘 질문이 뭐냐 하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에 본질이 그러하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식으로 학문적인 질문을 하는 거죠. 그러나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존재론 중심의 물음은 인식론 중심으로 전환이 된 거죠. 그래서 내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봅시다. 예전에는 여기에 하나님(존재 중에 존재는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여기 중심에 서 계시고 여기에 모든 자연 사물들과 모든 인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것들을 인식하는 나까지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나를 비롯해서 하나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사실은 말하자면 상대적인 존재들이었어요. 그러다가 그것이 획기적인 혁명을 이루면서 인간이 이 중심에 들어오게 되고 그리고 내가 모든 중심이 되어서 사물들을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내 주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돌아가고 있는 수많은 대상 중에 하나로서 그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상대주의에요. 그래도 그때는 어떤 것이 있었냐면 이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의 주위를 돌고 있는 패러다임으로 휘돌고 있는 존재들을 인식할 때에 어떤 통일적인 보편 관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거죠. 그것을 그들은 이성이라고 부른 거예요. 이런 상대주의적인 이 견해는 사실은 중세에서 곧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그 근대주의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7세기 그 이전에 이미 16세기, 15세기에 있었던 인문주의 르네상스의 영향을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르네상스의 그 영향은 다시 중세 말기로 돌아가면 역사 속에서 그 서양철학의 체계자체가 종합화와 해체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전을 해 와요. 그런데 그 중요한 해체기가 언제였냐면 중세철학의 스콜라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해체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배운 유명한 실제론, 유명론, 관념론 논쟁이에요. 그런 것들이 이미 기독교 안에서 해체 작업들이 이루어진 가운데 이것이 르네상스를 촉진시킨 운동이 됩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러니까 종교개혁은 인문주의 운동의 한 산물이에요. 그런데 세속적 인문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로 종교개혁과 함께 갈라지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서 이제 계몽주의가 나타나서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꼬끼또 에르고 슘”이라는 명제를 내놓는 거죠. 여기에서 꼬끼또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 꼬끼따르에서 온 거거든요. 생각하다에요. 그런데 그냥 생각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회의하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나는 회의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이야기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모든 이제껏 까지 주입된 강요된 제도와 인식 속에서 나에게 전수된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하는 것이 인간이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 “꼬끼또 에르고 슘”에 핵심이에요. 그런데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한다고 해도 죽어도 의심할 수없는 사실 하나가 남는데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거예요. 의심할 수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해버리면 내 존재의 기반자체가 사라지니까 그러면 환상이 되어버리잖아요. 그거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명석하고 판명한 법칙에 의해서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을 한 후에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 그것은 진리이다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서 유명한 영원진리창조설이라는 것이 나와요. 그것이 뭐냐 하면 예전에는 진리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최고의 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참된 존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전부 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과 진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을 만든 거죠.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자체라기보다 진리를 초월하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진리의 법칙을 던져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의 던져놓은 법칙은 자연세계 속에서는 자연법칙으로, 그리고 도덕세계에서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예전에는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하고도 항상 의심을 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의심 없이 대담하게 받아들이면서 폭발적인 기술문명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날의 엄청난 물질문명의 터닝 포인트는 사실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학문이 흘러오다보니까 이런 사상들이 신학을 커다랗게 강타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예전에 신학을 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신학에 있어서 커다랗게 중요한 명제들이 상당히 위협을 받는 거예요.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어요?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우리 학문의 대상이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은 개미가 사람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신학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이 이해되는 것 자체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소위 이야기하면 엔티시던트띠알로지가 있는 거예요. 선행된 신학이 먼저 있었고 그 하나님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행된 신학이 계시에요. 그 계시를 인간들이 연구함으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보는 건데 인간이 그 계시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 이유는 그 계시자체를 이해하라고만 주신 것은 아니라고 보는 거죠. 어느 것들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만 오히려 더 실용적이고 중요한 것, 명제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들은 사실은 이해할 수 있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게 주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신학에서는 믿음이 신학을 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거죠. 믿음을 통해서 신학활동을 해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틀은 아까 말씀드린 일반학문의 진리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사고의 틀이에요. 왜냐하면 근대학문의 규범과 이 틀 짜임 자체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구조 속에서 짜여진 틀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학문의 세계 속에 뛰어든 다는 그 자체가 일반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학문의 틀하고는 맞지 않은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시죠? 그럼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안 맞는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신학이라는 이 독특한 학문을 공부하면서 일반학문의 틀 속에서 짜여진 방식의 학문의 원리를 그대로 가지고 신학을 공부한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아주 망가진 신학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죠.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바로 그 때에 얼마 되지 않아서 소키누스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소키누스가 형성한 사상이 바로 소키누스주의에요. 소시아니즘라고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운 것이죠. 소키누스주의 근본적인 신학의 원칙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모두 기각되어야 한다는 것이 소키누스주의 원칙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안 믿는 거죠. 동정녀탄생, 예수그리스도가 양성을 가지신 분이라든지, 중생비밀이라든지 다 쓸데없는 거죠. 믿음이라는 요소 그 자체를 신학 속에 도입하는 것 자체를 처음부터 거절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렇게 쌓아올린 그 신학의 결과물들이 놀랍게도 약 1100년, 1200년 전에 성행했던 펠라기우스주의의 복사판이 되는 거죠. 그러면 결국 만약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결국은 마지막에 갈 수 있는 길은 완전한 자유주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외에는 없는 거예요. 물론 이제 신학의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순수하게 강의실에서 지식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현장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할 줄은 몰라도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강제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신념에 어긋나는 거죠. 그 사람 자체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이제 이러한 많은 한계, 이러한 많은 어려움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극복해야지만 올바른 신학함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되는데..
(예화)당신 내가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당신 착한 사람이잖아. 당신의 소원을 내가 세 가지만 들어주겠다. 그런데 당신이 무엇을 빌든지 당신 아내는 두 배를 받아야 된다. 그러니까 이제 두 배를 잘 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부대항으로 매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오는데 우리 부부가 만날 꼴찌를 해서 너무 창피합니다. 나를 잘 치게 해주십시오.” “그 대신 당신이 이만큼 잘 치게 되는데 당신 아내는 당신보다 2배를 잘 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왜?” 우리 모두 부부가 합산해서 경기를 하니까 그래서 그것을 들어주겠노라고 했어요. 두 번째는 “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겠다. 그 대신 당신 아내는 2백만장자가 된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가 부부인데요.” 그러면 마지막 소원이 뭐냐 그랬더니 “저에게 가벼운 심근경색을 주시옵소서.”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사실은 막 웃는 분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대요. 웃으면서 공부를 해야죠.
서론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만 이런 현상들이 신학의 영역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하나님의 신학의 재료로 주신 그 계시를 굳게 붙드는 것이 이런 학문의 영향에 의해서 유익한 것은 우리가 받되 유익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들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죠. 저는 아까 조금 전에 여러분들에게 인간이 학문을 한다고 할 때에 학문을 하는 것은 주체이고 학, 그 앞에 붙어있는 로지 앞에 붙어 있는 것은 객체야. 예를 들어서 지오 로지 그러면 로지 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지오는 객관적으로 있는 지구라이거에요. 바이오 로지 그러면 로지 하는 것은 인간이고 바이오, 생명은 따로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떼오 로지 하는 것은 인간인데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떼오스 야. 하나님이야. 다른 모든 학문은 사실은 연구하는 인간인 이 주체보다 객체가 더 작은 거예요. 작다고 해서 크기가 작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것들은 객관적으로 있는 물질이고, 자연현상들이고, 사회현상들이고 인간은 그것을 인식하니까 객관적으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인간 주체가 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훨씬 더 우위에 있는 주체가 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은 그런 학문의 논리가 성립이 안 되는 위치에 떼오스와 로기야가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사이를 이어주는 논리가 뭐냐 하면 떼오스 자신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로기야를 통해서 인간이 접근하므로 떼오 로지라는 것이 불가능한 학문인데 그 떼오스와 로기야 사이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미리 알려주시는 선행된 신학으로서의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계시 자체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접근하게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알도록 밟고 올라가는 계단 자체가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을 밟고 올라가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사물인 객체에 대해서 연구함으로서 학문을 이루어가는 이런 근본적인 학문의 구조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선행된 계시를 여러 곳에 두셔요. 그것을 우리들이 신학적으로는 둘로 나누어서 접근을 기준으로 할 때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고 부르고 매개를 기준으로 이야기할 때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 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자연, 인간의 양심과 역사, 구조, 사람의 마음의 구조 이런 속에 묻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흔적들이에요.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걸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죠. 그런데 사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종류의 신학이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거죠.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계시해주신 자체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하나님을 더듬어 아는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렸다고 보는 거죠. 인간의 타락성 때문에.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자체에 하나님이 본래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창조의 찬란한 빛들을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이 거두셨기 때문에 그 객관적인 사물들의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 이것들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신 가장 중요한 수단인 특별계시의 특별 형태인 성경이 우리에게 남아있고 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중요한 신학의 재료가 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외적인 원리는 이 성경계시이고 내적인 원리는 바로 이 성경을 인식하는 나인데 이 나의 이성자체가 원리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원리가 되는 거죠. 그것을 다른 말로 성령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신학활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에 관한 가장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이 성경계시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어떤 식으로 이 신학을 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을 하느냐면 우리들이 이성으로 추론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진리가 아니에요. 오히려 신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들은 이성의 추론이 불가한 영역에 머물러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겠어요? 그분이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있겠어요? 이러한 명제들이 성경계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그것을 아멘하고 믿는 신앙이 필요한 거예요. 이 아멘하고 믿는 신앙은 계시 그 자체의 타당성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를 주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분의 말씀으로서 계시를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믿는다는 것은 라틴어로 말하자면 “크레데레 데움”하면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그러나 “크레데레 데오”라고 하면 하나님 때문에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성경의 계시를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대부분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좌우되는 거죠.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되는 거죠. 그러면 신학과 관련시켜서 이 문제를 의논해보자면 이렇게 되는 거죠.
성경이 있고 많은 일반학문들이 있어요. 그러면 이런 일반 학문들은 올바로 어떤 진리들을 찾아냈을 수도 있고 잘못 찾아냈을 수도 있어요. 옥석이 섞여있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올바르게 찾아낸 진리가 있다면 그것도 아우구스트누스의 고백처럼 모든 학문이 찾아낸 심지어 이교도들이 찾아낸 진리조차도 원래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트누스의 말하자면 학문론이에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이교도들이 발견했다 하더라도 진리라는 하는 사실이 참된 것이면 원래 하나님께 속해 있던 것들인데 그것들을 부분적으로는 옳게 찾아냈는데 연결을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연결시켜서 기독교를 오히려 배척하는데 그 진리를 입증 자료로 사용하는 거죠. 이해될 수 있겠죠? 학문에 그런 것들이 섞여있는 거죠.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은 신학을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우리에 학문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이 성경에 대한 확신, 성경으로부터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명제적 진리에 대한 신뢰를 우리들이 영적으로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학문 활동을 해야지만 이 학문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자면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성경이 있고 그 성경계시를 믿는 신앙이 있는데 그것을 붙들고 그 이상 나가지 않는다면 성경을 정말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나온 것이 성경에 관한 학문들을 공부하는 거죠. 그래서 학문들은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학문과 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학문들로 나눠진 거죠.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학문은 성경언어학, 조직신학 이런 것들로 시작을 해서 그것들이 점점 펼쳐지면서 인문과학, 자연과학 쪽으로 점점 날개를 펼쳐가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이렇게 외연으로 확대되어 가는 진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적능력과 비례하는 거죠. 지적능력이 너무 미미해. 아무리 공부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괜히 고생하지 말고 빨리 접어야 해요. 집에서 빨래나 하고 애나 키우기에 적합한 몸매를 가지고 무슨 백조의 호수를 하겠다고 발레 연습을 하다간 관절염에 걸려요. 안 되는 사람은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예요. 그 능력이 아주 미미한 사람이 있어요. 미미해도 미미하면 미미한대로 성경에서 조금 더 바깥으로 나가서 인근 학문을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도 중심이 성경을 굳게 믿는 신앙이 있어서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아멘, 아멘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아. 그러면 그 사람은 풍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개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 속에서 어디든지 계신 그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많이 빗나가는 삶을 살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머리가 좋아도 이 중심의 끈을 놓쳐. 그러면 다 자유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소위 얘기해서 힘이 없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신학자였다고 한다면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서 이성적으로 학문을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가는 그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도 계시도 부인하고 데카르트가 맨 처음에 던져줬던 명재처럼 나라는 인간자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바로 인간의 죄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의 근원이에요.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치론적으로 자신의 행복이 최고라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것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줄에다가 쇠구슬을 매달고 돌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적인 능력이 적은 사람은 조금 돌리는 거예요. 능력이 많은 사람은 세게 돌리는 거예요. 이 외연의 하얀 선이 확대되면 확대 될수록 자기가 정말 제대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확대 될수록 그 사람은 정말 지적으로 행복한 사람이에요.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누가 작사했죠? 아우구스투누스가 작사했어요.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같이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그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현상 속에서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미추에 대한 분별력이 생겨나는 거예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분별력, 그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비결이 생겨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의학적 사실을 하나를 이야기 할 테니까 충격을 받으셔야 해요. 잇몸이 자꾸 병이 생기면 심근경색으로 죽거나 아니면 신부전증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저는 그 사실을 들었을 때에 충격이었어요. 도대체 잇몸에서 약간씩 피가 나는 것과 심근경색이 뭔 상관이 있으며 그것이 신부전증과 무슨 상관이 있나? 그래서 다시 뒤졌어요. 막 가서 찾아보니까 잇몸이 고름이 생기고 피가 나요.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먹어요. 우리의 몸에서 불순물을 거르는 기관이 신장이에요. 콩팥이에요. 거기에 계속 로드가 걸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심장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예요. 그 이치를 알게 되면 잇몸에서 피가 나는 것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병원을 찾는데 그 지식이 없으면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 말대로 창자가 구만리인데 잇몸에서 피가 나온다고 호들갑 떨 필요가 있나? 이렇게 미련하게 살다가 심근경색으로 죽거나 신부전증 환자가 되는 거죠. 이해되죠? 그러면 여러분들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것들이 확장되지 못할 때에는 이 세상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예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뭔지? 뭐 그게 무슨 뭐 아침에 먹는 포스트.....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그 속에 잠식되어 들어가요. 사회 속에 살면서 신앙으로 불을 받아서 어떤 행동을 하는데 그쪽으로 사람들을 가도록 도와주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한 시대에 태어나서 사상에 의해서 쇠뇌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이야기하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본받지 말고 라는 희랍어 단어는 “수수께마티지오”라는 단어인데 붕어빵 찍어내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요. 그렇게 찍어내는 거예요. 여기에 자기도 계속 찍히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데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행동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공부를 해 나가게 되요. 그 중심에 뭐가 있어야 되냐면 항상 성경과의 관련이 있어야 돼요. 성경으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더 잘 믿게 되고 그 믿는 것에 의해서 자신이 기쁨을 얻고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은 것이 왜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믿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연결하고 이렇게 하면서 하는 이 작업들은 신학과정에 안 가르쳐 준다는 데서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자신이 혼자 해야 되요. 그래서 로마서의 저자 문제를 가지고 8년 동안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썼어요. 그런데 사실 그것을 바울을 규명을 했어도 그것이 내 영혼에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에요. 문제는 1장부터 읽어야 되는 거죠. 무슨 얘기인지 알겠죠? 읽어서 그 속에서 양식을 얻어야 되는 거죠. 그게 계속해서 나의 마음속에 수반되는 가운데 남의 마음속에 감동과 영감을 주는 가운데에 신학도 이루어지고 다른 학문들로 뻗어나가야 되는 거죠. 그 다음.
예를 들자면 다양한 학문들이 있어요. 학문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죽음이라는 개념이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이라는 개념과 법학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이라는 개념,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개념이 각각 달라요. 인격이라고 할 때에 그 인격을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은 심리 현상의 주체에요. 그러나 그것을 윤리학에서 이야기할 때는 자아결정적인 능력을 가진 주체에요. 법에서 이야기 할 때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에요. 그렇게 각각 개념들이 달라요. 그런데 각자 자신의 학문의 세계에 관련해서 몰입할 때에 다른 분야에서의 그 동일한 단어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그냥 자기 그 개념에 충실하면 되는 거죠. 그러나 이제 만약에 그런 학문들을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개념, 경제학에서, 미학에서, 법학에서, 수학에서 등등의 개념이 있다고 해봐요. 철학은 이 다지평적으로 접근하는 죽음의 개념을 최소공약수적으로 모아서 모든 학문의 분야에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말할 때에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꼭 죽음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공통된 그 무엇을 본질적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에요. 그러니까 철학은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하는 것이지, 머리 나쁜 사람들은 할 수가 없고 또 역설적으로 머리 나쁠수록 해서 개발을 해야 되겠죠. 특히 요즘과 같이 현대사상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인문학의 기본, 문학, 역사, 철학, 이 세 가지의 학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으면 다른 학문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거죠. 그렇게 해서 이렇게 이해하게 되잖아요. 그런 사고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 여러분들이 구원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기독교 신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일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개념이 다르겠죠. 그러면 그것들을 전부 통합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 사회 구원운동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고들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신학은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냐면 이런 구조를 이루고 있는 거죠. 신학은 오히려 일반학문이 이렇게 사선처럼 지나가는 구조 속에서 이것들을 통합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신학은 사실 이 위에 있는 거란 말이죠. 왜냐하면 철학은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으니까 그 상층부에서 이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학문분과의 격자적인 다지평의 교차들 그 속에서의 최대공약수가 철학이라면 신학은 사실은 이러한 일반학문 속에 있는 모든 최대공약수를 능가하는 신과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이것을 이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고 불렸던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해서 신학을 이해해서 이 신학이 거꾸로 철학을 판단하고 철학을 비판하고 철학을 올바로 잡아주고 그 철학은 다시 다른 학문들에게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구조가 이루어져야 되는 거죠.
우리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학문들을 폭넓게 공부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학만 공부를 하는 것은 탑을 이렇게 기다랗게 쌓아올리는 위험이 있는 거죠. 아래를 툭 치면 우르르 무너질 수가 있는 거죠. 밑변에서부터 쌓아올려져서 이렇게 위로 상승해가야지만 안정적인 건축이 되는 것처럼 신학이 그렇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런 학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일반계시라 것은 특별계시의 배경이 되는 거죠. 그리고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빛 아래에서 볼 때에 그 특별계시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더욱이 성경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역사를 사용하셔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사람과 사회, 문화 이런 것들이 모두 만나는 가운데에 주어진 당대의 사람들을 향한 일차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그 배경이 되는 것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질수록 이 계시의 의미는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일반 학문과 신학의 관련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뿔은 사실은 제가 직접 만든 설명이거든요. 무슨 얘기냐면 이것이 신학, 특별계시, 제의, 예배를 꼭짓점이 관여하고 있다면 밑변은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 인간의 일반적인 삶을 규율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의 제의적 영역과 삶의 영역, 이러한 예배의 영역과 일반 우리의 인생의 영역 이런 것들 향해서는 우리들이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구분해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원론적인 입장은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물질계약설의 영향을 받은 거죠. 플라톤은 자신의 존재의 층차를 설명하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것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것들이 한정된 존재의 형태를 가지고 시공간에 더 많이 매이는 형식으로 존재를 하는 거죠. 그것이 뭐냐 하면 물질의 형태에요. 그래서 물질의 형태가 되면 될수록 잃어버리는 존재의 분량만큼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은 그냥 무조건 존재하는 이런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 존재를 잃어버리고 낮은 형태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무생물, 식물, 동물 이런 층차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영적이고 정신적일수록 선한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이것이 물질적인 형태를 띨수록 그 상실한 선한 것의 분량만큼 악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러한 것을 이원론이라고 이야기 하죠. 이 두 영역 사이에 단절성을 강조하게 되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사이의 단절성을 강조하고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 자체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대결의 구도로만 이해를 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굉장히 영적이고 선한 시간들이고 나아가서 한 푼이라도 벌어서 밥을 먹고 사는 이 삶은 굉장히 세속적인 삶으로 여겨지는 거죠.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성도들은 마치 예배를 끝마치고 나아갈 때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처럼 가게 되고 일주일동안 살아가면서 소망은 오직 주일날 예배에 모이는 거고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마지막 기대는 죽는 것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되어서 신앙자체가 매우 타계화 되어 가는 거죠. 이런 것을 이원론으로 한다면 일원론의 문제는 뭐냐 하면 이 두 가지 사이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거죠. 그래서 특별은총이 일반은총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이렇게 모여서 주일날 11시에 드리는 예배와 실제 살아가는 삶 사이의 경계 자체를 부인해버리는 거죠. 이렇게 되면 무 율법적인 삶이 되기가 아주 쉬운 거죠.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식의 설명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은 하나의 원뿔 형태에요. 윗부분이 신학, 특별계시, 제의, 예배라면 아래는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 삶이에요. 자 위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면 어떻게 될까요? 원이 하나 나오고 가운데 점이 하나 나오겠죠. 이런 관계에 있는 것이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제의와 삶, 구속과 창조 이런 관련성이라는 거죠. 그 대신 이 두 가지는 단절된 것도 아니고 구분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러한 사선의 형태로 기울기를 가지고 나타난다는 거죠. 그래서 일반학문은 신학의 확장된 외연이 되고 일반학문이 올바르게 추구되었다면 이것들을 핵심적으로 축소하고, 축소하고 수렴할 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으로 환원될 것이며 그리고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의 연장이기 때문에 특별계시의 도움으로 일반계시를 바라보게 될 때에 일반계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은 특별계시의 신앙을 강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