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1-1
녹취자: 박지성
자기가 생각하는 ‘The way of living’을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발표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 발표를 귀 기울여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시대에서부터 사람들에게 있어서 ‘The way of living’이라는 것은 가장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유용한 삶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은 먹고 살만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은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이 또 하나의 ‘The way of living’을 가르쳐주는 철학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복음은 철학을 넘어서는 철학이상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떤 삶이 인간에게 가장 복된 삶인가라는 것을 규정함에 있어서 이런 이론들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영혼과 시간의 문제, 신의 존재의 문제, 인간의 문제, 영혼의 문제 이런 많은 문제들이 함께 끌어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낯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상의 놀라운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소피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이 철학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그릇되고 잘못된 인간의 편견에 의해서 굽어진 사상들을 비판한 것이지 결코 올바른 철학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이런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일반 학문의 전체적인 구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최대의 순응하는 가운데 신학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잘못되고 부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왜냐면 원래의 신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전체적인 통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오늘날의 학문의 시스템은 철저하게 찢어지고 분열의 분열을 거듭해서 전문화의 길로 가는 학문의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학문의 구도 속에서 신학을 집어넣고 거기에 학문을 끼워 맞추다보니 무슨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냐면 신학이 고유하게 추구하는 이상인 통합, 그리고 전체를 통활함으로써 거기에서 인간에게 ‘The way of living’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그러한 통전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파편화로 말미암는 분열현상은 사실 신학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예화) 여러분이 미국에 살고계시니까 저보다는 더 소식이 빠르겠지만 1996년에 미국의 철학계와 포스트모더니즘 학계를 뒤흔드는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96년에 뉴욕대학교 문리학과 교수로 있던 ‘앨런 소칼’이라는 사람이 듀크대학의 ‘Social Text’라는 전문적인 S.S.K. Social scientific knowledge를 추구하는 잡지에 논문을 하나를 싣게 됩니다. 그 논문의 제목이 뭐냐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투 월드 트랜스포머티브 허머뉴딕스 오브 퀀텀 그래비티’ 그래서 ‘양자중력학의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 라는 논문이었습니다. 그 논문을 기고했는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통과가 됩니다. 논문이 통과가 되고 그것이 ‘Social Text’에 실리던 그날 프랑스에 있는 잡지에 인터뷰를 해서 거의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기에 두 권의 책이 같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자신의 ‘Social Text’에 실린 논문이 순 엉터리고 뻥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내가 쓴 것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그 책이 나중에 ‘Fashionable Nonsense’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이 되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S.S.K.라는 운동은 뭐냐면 scientific knowledge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들을 사회학적으로 변형시키는 운동들입니다. 예를 들면 E=mc²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입니다. 이 공식을 가지고 사회학에 원용될 수 있는 철학논문으로 변형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처럼 쇼를 했던 내용이 뭐냐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적인 개념이 거꾸로 양자중력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현대 수학에서의 비선형성이라는 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식으로 논문을 쓴 것입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혹할만한 논문을 쓴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고 좌파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장황한 표현을 늘어놓고 말을 꼬고 또 꽈서 어렵게 만들고 그들이 좋아하는 비유들을 만들고 좋아하는 표현을 뒤섞어서 이 엉터리 같은 논문을 뻥튀기로 실은 것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과학자가 너무 야비한 방법이었다고 했지만 이 사람은 얼마나 오늘날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를 넘나든다는 미명하에 자신도 정리되지 않은 파편적인 지식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사과하게 됩니다. 아주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들뢰즈, 크리스테바, 라깡 이런 사람들을 단칼에 정리하면서 자연과학에 관한 파편적인 지식들을 자기 분야에 끌어들여서 독단적으로 사용을 하면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명한 책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냐면 당대에 최고의 학자들이라는 사람이 저 저명한 학술지를 심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분별해낼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학문에 있어서의 전문성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이제 누군가가 여기서 저기로 넘나들기만 하면 너무나 판단하는 사람들의 지적인 훈련들이 전문화하고 구획화되었기 때문에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판단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만들어낸 예화인데 재미있습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얘기했더니 멈출 수 없이 사람들이 배꼽을 잡으면서 웃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어떤 평신도가 성경의 로마서를 읽다가 너무 어려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가서 “이 구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목사님이 휙 한번 읽어보더니 “이 양반아, 이것은 우리 목회자들은 몰라. 이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라서 신학자에게 물어봐야해.” 그래서 이 사람이 신학교에 가서 신학자들을 찾았습니다. 신학자에게 “뭐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제가 사실 로마서를 보다가 모르는 게 있어서요.” “이런 미안합니다. 저는 성경신학전공이 아니라 조직신학 전공입니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성서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교수님, 성서신학을 전공하셨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질문이 있는데 로마서를 읽다가….” “아, 미안합니다. 저는 구약이 전공이라 신약은 모릅니다.” “그럼 누구를 찾아갑니까?” 신약성서학을 하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그래서 간신히 신약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서 제가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공관복음서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합니까?” 바울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신학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저는 사실은 로마서가 전공이 아니라 바울의 전체적인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바울의 서신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간신히 찾았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전공하셨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이것을 몰라서 로마서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전공해서” “그럼 어떻게 합니까?”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해서 간신히 로마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찾아갔는데 “몇 장입니까?” “8장입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9절을 전공해서….”
그래서 이제는 한국에서 조차도 무엇인가 자기 분야에 조금이라도 빗나간 것을 질문 받았을 때에는 “I have no idea”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그 사람이 자기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심오한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의 방식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냐면 결국은 계몽주의 이후로 이것들이 계몽주의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이런 식으로 학문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은 학문 안에 일어나는 어떤 역사를 반영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이것이 근대의 경제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16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지리상의 발견입니다. 예전에는 커다랗게 사람들이 생각해서 중국과 아프리카, 유럽 이렇게 세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신대륙이 발견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렇게 저 위쪽에 있었던 포르투갈 같은 나라는 살다가 살다가 도저히 이제는 밥을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니까 죽을 바에야 하고 배를 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갈 때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떨어지든지 말든지. 갔더니 다른 나라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아프리카와 같은 다른 나라입니다.
지리상의 발견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여기서 이 사람들이 경제와 그것을 연관을 시킵니다. 그렇게 하면서 지리상의 발견을 먼저 시도한 나라서부터 차례대로 공업화가 시작이 됩니다. 그것이 2차 대전 때까지 계속됩니다. 2차 대전이 결국 일어난 원인 자체가 과학기술을 발전 시켜서 생산 활동을 활발하게 제품을 생산해낸 다음에 그것을 팔 고객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강들이 다 찾아서 식민지화하고 거기서 싼 노동력과 원료를 가져다가 자신의 기술을 보태서 공업화를 통해서 제품을 만든 다음에 대량 소비층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더 이상 판로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기득권을 가진 나라들과 전쟁을 일으킨 것이 2차 대전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하면서 폭발적으로 과학이 발달되기 시작하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영국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는데 이것이 18세기의 영국에서 일어났던 산업혁명입니다. 와트의 증기기관이라든지 방적기라든지 이런 많은 제품들이 생간기제들이 발명이 되면서 물건들을 값싸게 찍어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생산수단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 자체가 강력한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의 경제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 내가 신발을 만든다면 내가 가죽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두질을 해서 꿰매고 깔창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 한 다음에 자기 식구들이 쓰고 조금 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구두를 가지고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쌀과도 바꾸고 밀과도 바꾸고 옷하고도 바꾸고 또 책하고도 바꿔서 각자 그렇게 살았습니다. 수공업의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모든 관계가 인간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익명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컬리제이션이 이루어져서 각 지역들 마다 각기 씨족이나 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 활동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도시가 형성이 되고 제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인프라를 가지고 있는 도시에 모든 것들이 몰리게 되어서 오늘날은 전 세계적의 인구의 95%가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도시 속에 몰리게 되니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상대주의가 도입된 것입니다. 전에는 혼자서 모든 것을 했는데 이제는 가죽 만드는 사람은 가죽만 만들고 끈을 만드는 사람은 끈만 만들고 무두질하는 사람은 무두질만 하고 깔창 만드는 사람은 깔창만 만듭니다. 누구도 산업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이런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과학은 자기의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효율을 추구하게 됩니다. 효율을 추구하려면 알다시피 전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연구 분야들이 산산이 찢어져서 아주 갈기갈기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문의 분야가 분과되는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물질문명을 이루어가는 과학계통에 있어서 적실성을 갖는 것이지 인문학 특히 우리와 같이 무엇인가 인생전체를 통합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해답을 받는 신학이나 아니면 총체적인 인문학적인 활동에 있어서는 이 학문의 구조 자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뭐냐면 신학이 이러한 오늘날의 학문의 구조 속에서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많은 기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화) 예를 하나 들면 예전에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무기를 가장 잘 만드는 최강국이 아니었습니까? 어마어마한 무기를 만들고 그것이 사실은 미국의 과학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꿈의 전투기라고하는 F22까지 탄생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만들 때 모든 것들이 한군데서 통합을 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반전단체의 항의도 많고 여러 가지 많은 비밀노출과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의 전투기를 만들 때 그 전투기 사업을 수천 개의 연구과제로 쪼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각기 하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주는 것이 아니라 수천 개의 대학과 연구소에 다 찢어서 배분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대학의 분과에 있는데 보잉사로부터 연구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엄청난 비용을 준답니다. 받아서 보면 ‘티타늄 강도에 관한 연구’ 티타늄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견딜 수 있고 이것이 주위의 열, 속도 이런 것과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결과가 도대체 무엇에 쓰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탐구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다 만들어낸 수천 개, 수백 개의 연구 과제의 결과들을 종합해서 상층부에서 보잉사와 같은 전문팀들이 분석해서 새로운 전투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공업화의 길을 가고 기계를 만들고 물질문명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좋은 학문의 구조이지만 아까 말한 것 같이 인생 전체의 지혜를 담론하는 이런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학문에 있어서는 이것은 썩 좋은 구조가 아니라 나쁜 구조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학문이 이런 식으로 분과로 나누어지는지를 이야기하고 역사적인 배경을 더듬어가자면 오늘 하루종일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우리가 논의하고자하는 핵심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무슨 현상이 오게 되었냐면 신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칠 때도 이런 식으로 모두 파편적으로 나누어진 가운데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하는 교수는 성경 전체 속에 흐르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은 다루는데 이분들의 대부분이 성경의 원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안 그런 실력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원어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안 됩니다. 오히려 원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성서신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교리적이고 일관된 사상의 그 뼈대가 무엇인지 하는 소위 ‘신크로니즘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놀랍게 이 언어를 연구하고 이 속에서 해석을 내리는데 성경 전체에 흐르는 통일성의 사상에 의해서 통제가 잘 안 되는 가운데 미시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또 실천신학을 한다는 사람은 실천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테오니’가 철저하게 기반이 되어야하는데 ‘씨어리’가 기반이 되고 그 ‘씨어리’가 사실은 실천이 흘러나오는 뿌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실천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이원신학 자체에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적인 기반도 별로 없고 역사신학에 대한 기반도 별로 없고 더욱이 실천신학을 하는 사람은 더 더욱이 성경의 원어를 충분하게 다룰 수 있는 실력들을 안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천신학을 할 때 기반 자체가 기존에 있는 실천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던져놓은 이론의 기반을 가지고 선후를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면서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서 자신도 그 많은 선택의 기반중 하나가 또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이제 조직 신학은 역사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이 네 개가 전통적인 신학의 사각기본이고 그것들이 모두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가운데 학문 활동이 이루어져야지만 생산적인 활동이 되는데 그렇게 안 하게되어버렸습니다. 학문이 그렇게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나뉘어서 이제 “성서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송아지를 연구했습니다.”이런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학에서 통합된 어떤 논물을 쓰는 것 자체에 대해서 학적인 신빙성을 허락을 안 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기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다할 수 없으니까 통합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신학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사실 더 강력하게 촉진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20세기 이후에 이런 현상들이 더 심화되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60년대 이후에 이런 현상들이 더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현상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면 신학을 공부하는데 적실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학박사를 받은 사람이 가장 설교를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리고 본인 자신도 별로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목회학박사를 한 사람이 가장 목회를 잘 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한국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목회학박사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목회를 잘해야 된다고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적인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려는 운동이 많이 있었고 하여튼 어디서 후져도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이면 유리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목회에 전념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을 훨씬 더 신뢰하는 분위기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80년대에만 해도 박사가 드물었지만 매년 25000명씩 쏟아져 나오니까 심지어는 박사학위가 있어도 아파트 경비원에 취직한다고 하는 세상이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희소성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목회적인 적실성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잘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말하자면 취업특강과 비슷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나는 취업자니까. 취업전선의 동향을 내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문제냐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뜻을 세우고 내가 여기서 머리가 터지더라도 최고로 공부를 잘해서 다른 것 필요 없고 내가 배운 것을 잘 가르치겠다고 해서 여기에서 그냥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일생을 살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지식이나 우려서 학생들을 가르쳐서 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자고 마음먹으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100명 가운데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뿐이고 이제 목회지를 가야하는데 아까 얘기한대로 5~10년 이렇게 허비를 하면서 여기서 공부를 했는데 이게 여태까지 이야기한 신학 공부의 이런 원천적인 그 구조의 결함 때문에 목회자의 적실성을 못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학문의 세계에 이바지하자니 전문성이 떨어지고 목회에 와서 목회를 거들자니 목회적인 적실성을 못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학을 안가고 여러분들의 동료들이 좋은 목사님 만나고 잘 갖추어진 교회에 가서 목회를 배우면서 계속 고민하고 성도들과 씨름하고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7~8년을 거쳐서 목회적인 근력이 생겼다고 할 때 이 사람이 훨씬 목회적인 적실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까딱 잘못하면 얼치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취업특강 하나듣고 그렇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양쪽 길을 다 걸어본 사람으로서 이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난 양쪽 고민을 다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목회자 된 적실성이 상실된 가운데 신학의 근본적인 목표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처음 시간에 정리를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17세기에 화란의 유명한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트’라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걸출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독뜨리나 에스트 디벤디 데 오 페르크리스투” 라틴어로 말하자면 “신학 지식이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기위한 것이다.” 신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살기위한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정확하게 신학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실천적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참된 인간으로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수 있겠는지 이것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듯이 이런 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게 되니까 목회적 적실성을 상실했다고 했는데 적실성의 상실이었다는 것이 무슨 얘기냐면 이것이 신학지식 그 자체가 삶의 지혜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겠는데 한국에서는 신학을 3년 혹은 7년을 하게 되면 신학대학원을 들어가면 3~7년을 신학공부를 해서 내보내니까 교회 사역한지 1년도 안되어서 하는 말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무 쓸데가 없더라.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다. 그리고 다시 신학을 해야겠다. 목회를 위한 신학을 다시 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은 그런 모순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자, 이런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졸업을 해서 교회로 돌아갔는데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었느냐하면 전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럼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느냐하면 그것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만날 신학공부하면서도 마치 신학교 입학할 때의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사랑을 공납금으로 계속 까먹으면서 신학 지식을 쫒아가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학지식은 쌓였지만 공납금을 다 내고나니까 하나님 사랑은 없더라.
그래서 이제 나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을 다룬 책 중의 하나가 ‘프란시스 쉐퍼’가 쓴 ‘예배의 자리는 이제부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속에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신학교를 갔는데 여기서 극도의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사람이 광신술에 빠져서 영매주의에 빠져서 귀신에까지 시달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나는 신학교네 말씀의 떡을 얻기 위해서 갔는데 그들은 나에게 돌멩이를 주었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결국은 신학자체에 대한 무용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실 외국에서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가 그 사람의 장래를 보장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브랜드로 교회를 시작하느냐 그것이 솔직하게 여러분들에게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의 후원을 받느냐가 목회에 훨씬 더 중요한 성공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냐 여러 가지로 논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오늘 강의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학문들을 어떻게 묶어야 되겠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다음에 그림을 보시면 사람이 하나 나오고 세 개의 학문의 분야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학문을 가르쳤던 하나의 커다란 규범 카테고리였습니다. ‘피지카’라는 것은 자연학에 대해서 어떤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는 ‘로기카’ 논리학으로 연결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지식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에티카’로 이어지게 되는 ‘피지카’, ‘로기카’, ‘에티카’ 이 세 가지의 순환적인 과정을 세 가지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비록 자연에서부터 얻어진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논리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겠는가를 가르쳐주는 그런 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아라. 너희가 어찌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느뇨. 너희는 하나님에게 이미 들풀이나 공중에 나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마지막에 ‘에티카’가 나오는데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동양에서도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순리라는 ‘로기카’를 발견하고 그러므로 “인간이 영리로 사는 것은 불행으로 이끄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학문들의 이런 것들이 모두 다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구조들이 이렇게 통일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개되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소위 얘기하는 해체주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이.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데카르트’ 이전까지만 해도 ‘데카르트’에 와서 중요한 선이 그어지면서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고체계는 존재가 중심이 되어서 늘 질문이 뭐였냐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식으로 학문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존재론 중심의 물음은 인식론중심으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여기에 하나님, 존재중의 존재는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중심에 서 계시고 여기에 모든 자연 사물들과 모든 인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것들을 인식하는 나 까지도 하나의 패러다임 속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비롯해서 모든 하나님 주의를 맴돌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말하자면 상대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획기적인 혁명을 이루면서 인간이 이 중심에 들어오게 되고 내가 모든 중심이 되어서 사물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도 내 주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돌아가고 있는 수많은 대상들 중 하나로서 그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대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때에는 어떤 것이 있었냐면 이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의 주위를 패러다임으로 휘돌고 있는 존재들을 인식할 때에 어떤 통일적인 보편관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이 이성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이 견해는 사실 중세에서 곧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그 근대주의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17세기 그 이전에 이미 16세기, 15세기에 있었던 인문주의의 영향을 르네상스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르네상스의 그 영향을 다시 중세말기로 돌아가면 역사 속에서 그 서양철학의 체계자체가 종합화와 해체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전을 해 옵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해체기가 언제였냐면 중세철학의 스콜라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해체주의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배운 그 유명한 실재론, 유명론, 관념론의 논쟁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기독교 안에서 해체작업들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것이 르네상스를 촉진시키는 운동이 됩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종교개혁은 인문주의 운동의 한 산물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인문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로 종교개혁과 함께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 계몽주의가 나타나서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소위 얘기하는 “cogito ergo sum 꼬끼또 애르고숨” 이라는 명제를 내놓은 것입니다. ‘꼬끼또’는 라틴어 ‘꼬끼따레에서’ 온 것입니다. 생각하다입니다. 그냥 생각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회의하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나는 회의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러한 얘기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모든 이제껏 까지 이입된, 주입된, 강요된 제도와 인식 속에서 나에게 전수된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하는 것이 인간이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 ‘꼬기또 에르고숨’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한다고해도 죽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하나가 남는데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입니다. 의심할 수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해버리면 내 존재의 기반자체가 사라지니까 환상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의심할 수 없는 명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명석하고 현명한 법칙에 의해서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한 후에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 그것은 진리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 유명한 소위 이야기하는 영원진리창조설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진리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최고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베레에세’ 참된 존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전부다 하나님 자신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이 하나님과 진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 자체라기보다는 진리를 초월하는 분으로서 이 세상의 진리의 법칙을 던져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의 던져놓은 법칙은 자연세계 속에서는 자연 법칙으로 도덕세계 속에서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러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예전에는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하고도 항상 의심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의심 없이 대담하게 받아들이면서 폭발적인 기술 문명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터닝 포인트는 사실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학문이 흘러오다가 보니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냐면 이런 사상들이 신학을 커다랗게 간파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신학을 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신학에 있어서 커다랗게 중요한 명제들이 상당히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우리의 학문의 대상이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은 개미가 사람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신학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이 이해되는 것 자체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소위 얘기하는 ‘엔티씨던트 띠얼로지’ 선행된 신학이 먼저 있었고 그 하나님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행된 신학이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인간들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보는 것인데 인간이 그 계시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 이유는 그 계시 자체를 이해하라고만 주신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느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오히려 더 치명적이고 중요한 것 그리고 명제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들은 사실은 이해할 수 있게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게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에는 믿음이 신학을 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통해서 신학 활동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이러한 사고의 틀은 아까 말씀드린 일반 학문의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사고의 틀입니다. 그 자체가. 왜냐하면 근대학문의 규범과 이 틀짜임 자체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구조 속에서 짜여진 틀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학문의 세계 속에 뛰어든다는 그 자체가 일반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이 학문의 틀하고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조금만 더 들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안 맞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신학이라는 이 독특한 학문을 공부하면서 일반 학문의 틀 속에서 짜여진 방식의 학문의 원리를 그대로 가지고 신학을 공부한다고하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아주 망가진 신학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바로 그때에 얼마 되지 않아서 ‘소키누스’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소키누스’가 형상한 사상이 ‘소시아니즘’이라고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웠을 것입니다. ‘소키누스주의’의 근본적인 신학의 원칙은 무엇이냐면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모두 기각되어야한다”라는 것이 ‘소키누스주의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안 믿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 예수그리스도가 양성을 가지신 분이라든지, 중생의 비밀이라든지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요소 그 자체를 신학 속에 도입하는 것 자체를 전부다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쌓아올린 신학의 결과물들이 놀랍게도 약 1200년 전에 성행했던 ‘펠레기우스주의’의 복사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결국은 만약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게 되면 결국은 마지막에 갈 수 있는 길은 완전한 자유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신학의 학문이라는 자체가 순수하게 강의실에서 지식을 팔아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현장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직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교회라는 구조자체가 그것은 신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자체는 이미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많은 한계 그리고 이런 많은 어려움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극복해야지만 올바른 신학함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