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1-2
녹취자: 백두라
당신 오랫동안 내가 지켜봤는데 참 착한거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소원을 내가 세가지만 들어주겠다. 그런데 당신이 무엇을 빌든지 당신 아내는 두배를 받아야 한다. 두배를 더 잘하게 될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소원이 잇습니다. 무엇이냐 했는데 우리가 주말마다 부부대항으로 골프를 치는데 우리 부부가 너무 꼴찌를 해서 창피합니다. 나를 잘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이만큼 친다면 당신 아내는 당신보다 두배를 잘 칠것입니다. 괜찮습니다. 부부가 합산해서 경기를 하는 거니까요.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저를 백만 장자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다. 그 대신 당신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되는 거다. 부부니까 상관없습니다. 세 번째 소원은 저에게 가벼운 심근경색을 주십시오. 이렇게 웃으시는 분들 중에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까 모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어 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교회에 신앙에 연구하는데 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냐면 하나님이 신학의 재료로 주신 계시를 굳게 붙드는 것이지 이러한 학문의 영향에 의해서 유익한 것은 우리가 받지만 유익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가 그 피해를 줄일수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까 조금 전에 여러분들에게 인간이 학문을 한다고 할때에 학문을 하는것은 주체이고 학 그 앞에 붙은 있는 로지앞에 붙어있는 개체입니다. 그래서 지어로지 로지하는거는 인간이 하는것이고 지어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파이어로지는 로지하는건 인간이고 파이어는 생명을 따로 있는겁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어로지 하는거는 로지 하는건 인간인데 그 대상이 되는건 페어스 하나님입니다. 다른 모든 학문은 사실은 연구하는 인간이 이 주체보다 객체를 더 작은것인데 작다고 해서 크기가 작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객관적으로 있는 물질이고 자연현상들이고 사회현상들이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니까 객관적으로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고 인식하는 인간 주체가 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훨씬 더 우위에 있는 주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그런 학문의 논리가 성립이 안되는 위치에 페어스와 로기아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메워주는 논리가 머냐면은 페오스 자신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로기아를 통해서 인간이 접근하므로 페어로지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학문인데 그 페오스와 로기아 사이에 하나님의 이블라치오 계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미리 알려주시는 선행된 신학으로서의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계시 자체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는 지식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알도록 밟고 올라가는 그 계단 자체가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을 밟고 올라가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사물의 객체에 대해서 연구함으로서 학문을 이루어가는 이런 근본적인 학문의 구조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자신에게 접근 할수 있는 선행된 계시를 여러 곳에 두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서 접근을 기준으로 하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고 부르고 매개를 기준으로 이야기 할 때는 자연계시와 초자연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소위 애기하는 자연 , 인간의 양심과 역사, 구조, 사람의 마음의 구조 이런 속에 뭍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흔적들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은 두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종류의 신학이 불가능하다 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첫째는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계시해 주신 것 자체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하나님을 더듬어 아는데 사용할수 있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렸다고 보는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자체에 하나님이 본래의 하나님을 알수 있는 창조의 찬란한 빛들을 인간의 타락과 함께 거두셨기 때문에 그 객관적인 사람들의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것들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신 가장 중요한 수단은 특별계시의 특별형태인 성경이 우리에게 남아있고 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신학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외적인 원리는 이 성경계시이고 내적인 원리는 바로 이 성경을 인식하는 나인데. 나의 이성 자체가 원리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믿음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신학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에 관한 가장 온전한 지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의존해야 할 것이 성경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떤 식으로 이 신학을 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하느냐 하면은 우리들이 이성으로 추론해서 알수 있는 것들은 신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진리가 아니고 오히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들은 이성의 추론이 불가한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증명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할수 있습니까? 그분이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것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잇습니까? 이러한 명제들이 성경계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을때 그것을 아멘하고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아멘하고 믿는 신앙은 계시 그 자체의 타당성 때문에 우리가 믿는게 아니라 그 계시를 주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분의 말씀으로서 계시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때 믿는다 라는것은 라틴어로 크레데레데움 하나님을 믿는것 여러분 크레데레데우 하나님 때문에 믿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것 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의 계시를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느냐 안믿느냐에 따라서 대부분의 하나님의 존재에대한 신뢰와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과 관련시켜서 이문제를 의논해 보겠습니다.
[도표] 성경이 있고 많은 일반 학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반 학문들은 올바로 어떤 진리들을 찾아냈을수도 있고 잘못 찾아 냈을수도 있습니다. 옥석이 섞여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올바르게 찾아낸 진리가 있다면 그것도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모든 학문이 찾아낸 심지어 이교도들이 찾아낸 진리조차도 원래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론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교도들이 발견했다 하더라도 진리라는 사실이 참된것이면 원래 하나님의 것들인데 그것들을 부분적으로는 옳게는 찾아냈는데 연결을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연결시켜서 기독교를 오히려 배척 하는데 진리를 입증자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학문에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은 신학을 하는 우리의 입장은 끊임없이 우리의 학문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이 성령에 대한 확신, 성경으로부터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명제적 진리에 대한 신뢰를 우리들이 영적으로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학문 활동을 해야지만 이 학문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상자료]이것들을 표현하자면 이런식으로 되는 겁니다. 성경이 있고 그 성경계시를 믿는 신앙이 있는데 그것을 굳게 붙들고 그 이상 나가지 않는다면 성경을 정말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성경에 관한 학문들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들은 성경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학문과 간접적으로 관련있는 학문들로 나뉘어 지는 겁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학문들은 성경언어학, 조직신학 이런것들로 시작이 돼서 그것들이 점점 펼쳐지면서 인문과학, 자연과학 등 점점 날개를 펼쳐 가는것 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외면으로 확대되어가는 진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적능력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능력이 워낙 미미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조금 바깥에 있는 인근 학문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중심이 성경을 굳게 믿는 신앙에 있어서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풍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개하고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 속에서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은 발견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을 가르키거나 많이 빗나가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도 중심에 하나님을 놓게 된다면 다 자유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소위 얘기해서 신이 없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신학자 였던 것은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서 이성적으로 학문을 하다가하다가 마지막에 가는 그 마지막은 결국은 하나님도 계시도 부인하고 데카르트가 맨 마지막에 던진 명제처럼 "나 라는 인간 자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바로 인간의 죄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가치론적으로 자신의 행복이 최고라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영상자료] 이것들이 어떻게 생각하냐면 줄에다가 쇠구슬을 매달고 돌리는 겁니다. 지적인 능력이 적은 사람은 작게 돌립니다. 지적능력이 많은 사람은 크게 돌립니다. 이 외형의 하얀선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자기가 정말 제대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게 확대될수록 굉장히 지적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찬양)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수 있어요.
누가 작사하신건지 아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수 있어요.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현상 속에서 그러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알수 없는 미추에 대한 분별이 생겨나는것 입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분별. 그것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는 비결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의학적 사실 하나를 얘기할 테니까 충격을 받으셔야 합니다. 잇몸이 자꾸 병이 생기면 심근경색으로 죽거나 아니면 심부전증 환자가 될수 잇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그 사실을 들었을때 충격이었습니다. 잇몸에서 피가 나는 것과 심근경색과 심부전증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뒤져보니까 잇몸에 고름이 생기고 피가 나오는데 자기도 모르게 계속 먹는데 우리의 몸에 있어서 불순물을 걸러주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신장과 콩팥인데 거기에 계속 로드가 걸리는 겁니다. 그것이 심장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 이치를 알게 되면은 잇몸에서 피가 나는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병원을 찾는데 그 지식이 없으면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창자가 부어있는데 잇몸에서 피가 나온다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죽거나 심부전증으로 죽는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들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것들이 확장되지 못할때에는 이 세상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갑니다. 아침에 먹는 콘프라이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안에서 잠식되어 살아갑니다. 사회 속에 살면서 신앙으로 불을 받아서 막 어떤행동을 하는데 그쪽으로 사람들을 가도록 도와주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것입니다. 그게 머냐면 한시대에 태어나서 사상이 되어서 세대가 되는것 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얘기하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본받지 말고라는 히랍어 단어는 수스케마티죠라는 단어인데 붕어빵 찍어내는 그런걸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라는 것을 전면적으르 위배하는 것이기때문에 공부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중심에 항상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더 잘 믿게되고 믿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기쁨을 얻고 그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은것이 왜 이렇게 내 마음에 믿어질수 있는지 탐구하고 연결하는 이러한 작업들은 신학과정에서 안가르쳐 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혼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저자 문제를 가지고 8년동안 연구해서 박사를 했습니다. 근데 사실은 그거를 바울이라고 규명을 했어도 그것이 내 영혼의 유익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1장부터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읽어서 그 속에서 양식을 얻어야 하고 계속해서 내 마음에서 순환되는 가운데 나의 마음에 감동과 영감을 주는 가운데 신학의 연구과 이루어지고 다른 학문들로 뻗쳐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 [영상자료] 예를 들자면 다양한 학문들이 있습니다. 그 학문들 중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나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알다시피 죽음이라는 개념이 의학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이라는 개념과 법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의 개념. 문학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각각 다릅니다. 인격이라고 할때에 그 인격을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은 심리현상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학에서 이야기 할때는 자아 결정적인 능력을 가진 주체이다. 법에서 이야기 할때는 권리를 행사할수 있는 주체입니다. 그렇게 각각 개념들이 다른데 근데 작자 자신의 학문의 세계에 관련해서 몰입할 때에는 다른 분야에서의 동일한 (잘 안들립니다) 개념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개념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제 만약에 그런 학문들을 사회학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의 개념. 경제학, 미학, 수학, 법학에서 이야기하는 개념들을 철학은 이 다지평적으로 접근하는 죽음의 개념을 최소공약수 적으로 모아서 모든 학문의 분야에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말할때에 이것을 설명할수 있는 꼭 죽음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설명할수 있는 공통된 그 무엇을 본질적으로 제공할수 있도록 통치를 제공하는 것이 철학의 사물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거지 머리 나쁜 사람들이 할 수가 없고 또 역설적으로 머리 나쁠수록 해서 개발을 해야 되겠죠? 그러나 특히 요즘과 같이 현대사상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인문학의 기본 문화, 역사, 철학 이 세가지의 학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으면 다른 학문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런 사고들을 가지고 있을때 여러분들이 구원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기독교 시각에서 생각하는것과 일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개념이 다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전부다 통합할수 있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때에 사회 구원 운동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할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고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학은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냐면 일반 학문이 사상처럼 지나가는 구조 속에서 이것들을 통합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신학은 이 위에 있습니다. 철학은 시대존재를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 상층부에서 이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학문분과의 격자적인 다지평의 교차들 그 속에서의 최대공약수가 철학이라면 신학은 사실은 이러한 일반 학문속에 있는 모든 공약수를 능가하는 신과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이것들을 이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 불렸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학을 이해해서 이 신학이 거꾸로 철학을 판단하고 철학을 비판하고 철학을 올바로 잡아주고 그 철학은 다시 다른 학문들에게 이해의 틀들을 제공하는 구조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영상자료] 그렇게 되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면 우리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학문들을 폭넓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신학만 공부 하는 것은 탑을 이렇게 길다랗게 쌓아 올리는 위험이 됩니다. 아래를 툭 치면 우르르 무너질수 있습니다. 밑변서부터 쌓아 올려져서 위로 상승해가야지만 안정적인 건축이 되는 것처럼 신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학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일반계시라고 하는 것은 특별계시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글기고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빛 아래에서 볼때 특별계시의 의미가 정확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역사를 사용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인간과 사회, 문화 이런것 들이 모두 만나는 가운데에 주어진 당대의 사람을 향한 일차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그 배경이 되는 것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질수록 이 계시의 의미는 아주 찬란한 빛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일반학문과 신학의 관련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뿔은 제가 직접 만든 설명입니다.[영상자료] 무슨 얘기냐 하면은 신학, 특별계시, 죄의 예배를 꼭지점이 반영하고 있다면 밑변은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 인간의 일반적인 삶을 규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죄의적 영역과 삶의 영역 이런 예배의 영역과 일반 우리의 인생의 영역 이런것들을 향해서는 우리들이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구분해서 설명할수 있습니다. 이원론적인 입장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물질계약설의 영향을 받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존재의 칭찬을 설명하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것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것들이 한정된 존재의 형태를 가지고 시공간에 더 많이 메이는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물질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형태가 되면 될수록 잃어버리는 존재의 분량만큼 여기서 말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무조건 존재하는 사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를 잃어버리고 낮은 형태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무생물, 식물, 동물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적이고 정신적일수록 선한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이것이 물질적인 형태를 띌수록 그 상실한 선한것의 분량만큼 악이 개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서 어떻게 되냐면 우리들이 이 두영역 사이에 단절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사이의 단절성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의 자체를 완벽하고 철저한 대결 구도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굉장히 영적이고 선한 시간들이고 나아가서 한푼이라도 벌어서 밥을 먹고사는 이 삶은 굉장히 세속적인 삶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성도들은 마치 예배들을 끝마치고 나갈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처럼 가게 되고 일주일동안 살아가면서 오직 소망은 예배에 모이는 거고 일생을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의 마지막 기대는 오직 죽는것입니다. 이런식으로 되어서 신앙자체가 매우 타계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것을 이원론으로 한다면 일원론의 문제는 머냐면 이 두가지 사이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특별은총이 일반은총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이렇게 모여서 주일날 11시에 드리는 예배와 실제 살아가는 삶 사이의 경계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것 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율법적인 삶이 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자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식의 설명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것들은 하나의 원뿔 형태입니다. 윗부분이 신앙, 특별계시, 죄의 예배라면 아래는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 삶입니다. 위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원이 하나 나오고 가운데 점이 하나 나오겠죠 이런 관계에 있는것이 바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그다음에 제위와 삶. 구속과 창조 이런 관련성입니다. 그대신 이 두가지는 단절된 것도 아니고 구분이 없는것도 아닌것이 이러한 사선의 형태로 기울기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반학문은 신학의 확장된 외연이 되고 일반학문이 올바르게 추구되었다면 이것들을 핵심적으로 축소하고 축소하고 수렴할때에 하나님의 존재로 환원될 것이며 그리고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의 연장이기 때문에 특별계시의 도움으로 일반계시를 바라보게 될 때 일반계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은 특별계시의 신앙을 강화하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