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7-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에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 같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고 예정하신 그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시간에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구속의 놀라운 은혜와 사실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셔서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으니 곧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형벌 받지 않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물이든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같은 지면에 서서 쳐다보는 사람과 3층에서 쳐다보는 사람과 60층 꼭대기에서 쳐다 보는 사람은 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현저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구속의 목적은 우리 한 사람의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지옥의 형벌을 면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 천국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지만 그것은 학년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들이 답안에 쓰는 것이고, 이제 성숙하게 되면 나 한 사람을 구원한 하나님의 계획이 나 하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큰 계획 속에서 나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구속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이러한 우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태어나서 그 제약을 받으면서 사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은 형체가 있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보고 지각하고 그 사물들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과감히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아무대도 안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있다, 없다 라고 말할 때 그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 ‘이다’라는 것은 현저하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서 바위가 있다라고 할 때 있다는 아주 분명합니다. 크기와 형체, 만지면 딱딱하고 차가운 그 무엇까지 느껴집니다. 그것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기가 있다라고 할 때는 있는 개념이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 우리 모임 가운데 사랑이 있다라고 이야기 할 때 그 있다라는 개념이 바위하고는 아주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그 있다의 주체가 하나님이 될 경우에는 그러면 그것은 아주 현저히 다른 개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박 목사님의 영혼과 교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밤에 박 목사님 머릿속으로 출장 가는 일은 없습니다. 박 목사님 영혼이 우리 집에 출장 오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영혼이라도 영이신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영이시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영혼입니다. 그러니까 영으로서 같은 성질을 가지고 교제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존재의 양상이 하나님의 영을 닮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창조주로서 그 둘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관상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으로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속성은 원래 다발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은 어떠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교리를 배울 때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 할 때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를 동그랗게 팝니다. 가운데 동그란 데는 영원성, 불변성, 무한성, 완전성 등등의 소위 독립적인 속성을 넣고, 그 파인애플을 쪼개면서 사랑, 공의, 자비, 의로움 등등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리를 배우면서 생각할 때 마치 하나님이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로 구성된 분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성 요소가 없이 단일하게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떠한 구성요소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구성 요소가 없이 구성되어 있는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도 금속과 플라스틱과 유리와 철사와 다양한 도장과 이런 것들로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도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체 안에도 여러 가지 핏줄과 여러 가지 기관들로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성 요소로 되어 있는 것은 구성 요소끼리 서로 의존을 합니다. 그것이 잘 의존이 되어 있을 때 그 사물을 아름답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 하나님을 들여다볼 때 누구도 그 하나님을 볼 수도 없거니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도 그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파악하는 길은 그 하나님이 이 피조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고 싶습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취는 봄이 옵니다. 그러면 그 햇빛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겨울내 꽁꽁 얼었던 그 도랑을 햇살이 따뜻하게 비출 때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얼음장 아래로 졸졸졸졸 시냇물이 얼었다가 흐르게 만들어 줍니다. 죽은 것처럼 시커멓던 물이 오르는 소리가 나면서 새싹들이 돋아납니다. 빨래를 내다 널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득실득실 달라붙었던 균들이 살균 되어서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서 태양으로 햇살로 계속 올라가면 그 햇살 속에는 얼음 녹은 물도 없고, 죽은 균도 없고, 파아란 새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악될 수 없는 그냥 빛줄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빛줄기가 얼음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얼음과 관계하며 물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식물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죽었던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게 만듭니다. 더 실감나는 비유를 들자면, 우리 학교 다닐 때에 초등학교 때 사용해보던 프리즘이 기억날 것입니다. 프리즘을 놓고 햇살을 쫙 받습니다. 그 프리즘을 캄캄한 까만 통에 놓고 햇살을 받으면 그 프리즘이 확 분광이 되면서 저 위에서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무지개가 나옵니다. 그러나 프리즘 너머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중 어떤 색깔도 없습니다. 아무 색깔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눈으로 파악되지 않은 빛이 들어올 뿐입니다. 그 빛이 있다는 것은 빛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는 어떤 비춤을 받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을 통해서 그 빛이 있다는 것을 겨우 알 뿐입니다. 그래서 그 빛의 존재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식 사이를 걸쳐 있는 아주 독특한 피조물이고, 아주 철학적인 물질입니다. 정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 햇빛과 같아서 분석할 수도 없고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작용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정확한 말이 없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아무데도 안 계시면서 안 계신 곳이 하나도 없으시며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면서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신 그 효과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 되신 존재의 그 효과를 비참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는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쌍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긍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냅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해 전에 묵상하게 되었을 때, 막 가슴이 몇 달 동안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최고의 의무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리반을 토요일마다 하는데, 제가 카테키스무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라틴어로 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또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교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셋이니,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의 관해서인데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게 카테키스무스. 그러니까 하나님을 묵상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을 응시하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들여다 보면서 태양이 무엇인지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면 돋보기 가지고 태양을 쳐다 봤다가 한참동안 눈에 뭐 맞은 것처럼 그럴 때 있었습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똑바로 눈을 뜨고 정오에 태양을 본들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여기 망막 다 탑니다. 그러한 식으로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에 대해 파악을 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제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줍니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최대의 저주였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지식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게 바로 히브리말로 하자면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뭐라 그럽니까.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아는 너희들은. 너희는 여호와를 알라.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면서 하나님을 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사사기서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전통이 끊어졌을 때 그 사사기 기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와 여호와의 큰 일을 행한 그것을 본 세대들이 다 죽었으므로.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하나님 없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제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더라. 그러면 도대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화) 5년전이었습니다. 교회가 성탄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탄 예배에 어떤 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한 중년 신사가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이 직업이 뭐냐 하면 대학교 강사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철학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절대 안 믿습니다. 술을 밤새도록 후배들과 퍼 마시고 가정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끌려 왔는데, 친척집에 놀러 왔다고 교회에 끌려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 들어와 보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잠자기에 너무 푹신한 의자, 그래서 앉아서 잠을 청했는데 시작서부터 조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잠깐 있다가 자야지 하면서 앉았는데 제가 올라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올라오더니 성경을 탁 펼쳐들고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진 것입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어나고 있는가.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데 계속 비 오듯이 눈물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가. 다행이 아내는 저쪽에서 예배를 드려서 자기를 못 본 것입니다.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더 센치해져서 그런 일이 생겼겠지.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집이 저기 충남에서 180Km 떨어져 있습니다. 한번 더 가자 그래서 다시 올라왔는데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자기가 철학에서 배운 하나님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플라톤의 경험, 체관이 직관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되는 것은 머리를 굴려서 파악하지만 인간의 이성을 워낙 초월하는 이 속한 초월계에 속한 것은 신적인 체관을 통해서 그것을 뛰어 넘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드디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닫게 된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딱 두 가지에 대한 앎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면 그 속성은 하나님의 존재는 형언할 수 없는 분이지만, 형언할 수 없는 그 분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특별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빛깔의 속성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이 어떠한 속성이든지 간에 그 속성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에게 임할 때에는 그것은 심판을 받아서 고생하기도 하고 형벌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쳐서 피를 흘리며 생명을 거둬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광경은 예쁜 광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 이것은 찬란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속성은 또 다른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물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 나를 택하사 흙으로 빚은 나를 건지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 때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죄인이 나 하나 뿐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쩌면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나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그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신자가 짖는 죄 중 가장 무서운 죄가 구원을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타락과 그리고 물러가는 부패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찬송가 한 절을 부를 때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신 성부,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몸 버려 십자가에서 자신을 찢으신 성자. 그러한 쓸모없는 인간의 돌 같은 마음속에 그러한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의 그 강권하시는 사랑. 이것이 벅차오르듯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오는 그 사람은 잘못 살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고의로 하나님 앞에 잘못 살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뜨겁게 끓는 물이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면 심는 과정이 없이 돌같은 얼음이 될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랑이 제가 늘 말씀 드리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못 박혔다는 그 말이 히브리말로 에스타오르마아이입니다.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완료입니다. I have been crucified. 희랍어에서 현재완료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라고 하는 그 표현은 전부 현재 완료로 쓰여져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에게게르타이도 모두 현재 완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희랍어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탕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을 따라서 선교의, 목회의, 평신도의 삶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영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양하게 주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나무는 땅에 심겨야 하듯이 그 삶의 양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밑에 깔려 있는 이 기본적인 고백은 바로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하나님이 사물과 관계를 맺으셔서 그것을 통해서 발현되는 그것을 통해서 발현되는 강한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 속성에 대한 앎,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알면서 우리는 그 사물과 맺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위로 수렴하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 마음 속에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쉭 하고 불길을 내뿜을 때 거기에다가 나무를 댈 때, 금속 중에서도 마그네슘을 댈 때, 납을 댈 때 쇠를 댈 때, 동을 댈 때, 철을 댈 때 은을 댈 때, 얇은 막으로 있는 것을 댄다고 하면 불꽃 모양 자체가 다 다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 하늘에 펑하고 쏘면 형형색색의 폭죽이 확 타오르지 않습니까. 다양한 색깔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냐 하면 터지는 화약은 다 똑같은 화약 속에다가 섞는 금속의 성분을 다양하게 변화를 주어서 형형색색의 불꽃을 가진 그런 폭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이신데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다양한 속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속성 중에 다른 속성과 같지 않은 독특하고 중요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사랑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 중에 매우 유별난 속성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 하나님의 simplicitas,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비참한 자와 관계를 맺으실 때 자비를, 죄 지은 자를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고 불쌍한 자와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의 긍휼 등등을 보여주십니다. 이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발현되는 속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하나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안에 그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 때에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만, 삼위로서 존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삼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셨는데 아무 사물도 없었을 때 성부는 성자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고, 또 성자는 성령과 성부에게서, 성부는 성자와 성령에게서 서로 사랑을 받으시고 사랑하시는 의존의 사랑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모든 속성은 하나님과 상대할 피조물이 있어야지만 발현되는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인데, 사랑 만큼은 피조물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삼위 간의 이루어진 교통이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의 어떠함과 그 속성이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가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대상, 그것을 알고 그 대상과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속성을 아름답게 드러내시는지를 배우고 그 속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만물들을 다루는지 그 시행방식에 대해 알고 증진 시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일차적인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실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일 것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일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속성을 드러내시는지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밤 늦은 시간에 모여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교회의 대치할 수 없는 본분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신의 지체들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글이든지 말이든지 삶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빛 된 삶입니다. 이웃돕기 하는 것이 빛 된 삶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때, 그 아름다움의 정수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그 속성이 현란하게 움직일 때 그 속성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실제로 우리 마음 속에 다가오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꽃이 있다. 예쁜 꽃이 있는데 그냥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그러면 조화일까 생각할 것입니다. 바람이 쫙 붑니다. 꽃잎이 막 춤을 춥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 끝까지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불결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움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면 그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인간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부터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이 생기겠습니까. 자매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볼수록 무슨 감정이 생깁니까. 대답을 빨리 해야 시집을 빨리 갑니다. 뭐가 생깁니까. 왜 그렇게 성격이 좋고 신앙이 좋아도 못 생긴 형제를 보면 가슴이 뛰지 않는데, 성격도 까칠하고 신앙도 없는 멋있는 형제를 보면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잘 생겨서. 잘 생겼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보기에 좋다는 것,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 보다도 우리를 잡아 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밤 중에 공부를 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까. 아니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까. 진도 나가야 합니다. 빨리 대답하십시오. 공부하는 것이 선한 것인데, 이 아이는 착각을 합니다. 공부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마음에 끌리는 예쁜 것은 공부가 아니라 게임이기 때문에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점점 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됩니다. 기도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이미 보았던 혹은 아직 못 보았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꾸 바라볼 때에 그 때 우리의 마음이 확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작곡한 것입니다. 어떻게, 신앙의 눈으로 보니까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은데 믿음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그러면서 흠뻑 그 사랑에 심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인생이 뒤집힐 정도로 은혜를 받았어도 몇 달, 아니 몇 주 불과 얼마동안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추함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꽂히게 되면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요한이 무엇이라고 경고하였습니까. 너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나니.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지성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그럴 때 마음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그것을 좀 보여 주십시오. 내가 한번 많이 보고 예전보다 주님을 점점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 모든 곳에서 흩어져 있고 심지어는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에도 흩어져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가 있는데, 평생 병원체만 연구하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균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답니다. 그 균이 우리에게 병을 옮기는 게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힘입어서 생명을 가지고 기동하는 그 생명의 작용이 너무너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실 그 이름
다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학문은.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지,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안에 있었던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묻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흔적들이 다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천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 다음에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문학 속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미술 속에서 그 다음에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은 음악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좀 오바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온갖 것들이 전부다 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까 이야기 했듯이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것을 저절로 아름답다고 판단이 잘 안 서는 것입니다. 그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 음악 재생)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평균율입니다. 약 450곡 정도를 작곡 했는데 이게 가장 대표적인 곡입니다. 왜 이렇게 시대가 지나가도록 이 음악이 사랑을 받고 아름답습니까. 저는 이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이게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느냐 하면, 철처한 수학적인 수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른 채 우리의 몸이 쫙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을 갖고 학문의 세계를 내려다본다면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범죄심리학도 아름답습니다. 범죄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그렇게 작용하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렇게 그렇게 반응할 수 없는 그것을 보면서 거기에서 인간의 추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전 우주에 모든 지식속에 모든 사실 속에 깔렸구나. 야, 찾으러 다니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해 보여도 밤 하늘의 별이 마치 깨를 쏟아 놓은 것처럼 많아도 그 별 하나와 별 하나 사이는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입니다. 북두칠성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별 사이의 거리가 900만 광년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 그 꿀단지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 모아놓은 특별한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입니다.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들을 모아놓은 보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로켓을 타고 온 우주를 싸돌아다니는 것 보다도 요한복음 펼쳐놓고 읽는 그것이 훨씬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나는 가진 지식 없고 그리고 다른 사람만큼 탁월한 학문의 지혜가 없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성경속에서 만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수많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심지어는 영혼이 없는 피조물들과도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속성을 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성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피조물들 속에서 실행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슴이 저밀 정도로 그 순간 순간이 아주 현란한 것입니다. 현란한 것입니다.
그 분이 팔이 다쳐서 이제는 연주를 못 합니다. 김영욱씨라고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연주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땀이 막 흐릅니다. 그리고 20분쯤 되니까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그 선율 하나에도 사람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저 뒤에서 껌 씹고 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는 없겠습니까.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는 이 시간은 어떠한 시간이겠습니까.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부스러기들을 모아놓은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 속에서 선포되어지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가 확 울려 퍼지는 시간입니다.
(찬양)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러면서 언젠가 기도원에 가서 말씀을 준비하는데, 산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인간인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러한 진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 성경은 항상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찬란하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속성이 있고, 악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눈부신 속성이 있고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충성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위하여 빛줄기처럼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눈부신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사람이 형벌을 받고 죽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은 찬란한 것입니다. 기가막힌 예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부르던 복음성가 있지 않습니까. 무화과 나무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리라 그러면서 하박국에 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러다보다. 문맥이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유다나라가 망해가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아람나라에 덧붙여서 거기에서 그냥 아부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더럽게 사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하나님이 마지막에 될일들에 대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들을 싹 쓸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쓸어 버리 실 때 하나님이 전쟁이나, 심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쓸어 버리십니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 죽을 때는 악한 사람만 골라서 죽입니까. 6.25때 죽은 사람들은 다 악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나라로 보면 커다란 재앙이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 받은 상태는 사람들이 다 죽고 무화과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도 뭐고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기뻐하리라. 나는 기뻐하리라. 왜 기뻐합니까. 무화과 열매도 없고 포도나무 열매도 없고 송아지가 없어서 밭도 갈 수가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완전히 거지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고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형벌을 받아서 심판으로 다 부서진 그 폐허 위에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속에서.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막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내일 굶어죽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가 갈 세상에서 스치듯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영혼을 향하여 가슴 벅찬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입니다. 그게 성경 속에 액기스처럼 농축되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성경을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만 읽는다고 하는데 신앙이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성경의 글자는 읽는데 그 글자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심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나도 모르게 이끌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성경에 모두 골고루 묻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은 진하게 어느 곳은 여리게, 그러나 어디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있지 않은 것이 없도록 그렇게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도대체 성경에서 진하게 모여 있는 그 아름다움의 덩어리들이 어디입니까. 거기로 가고 싶습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사시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수많은 인간들과 만나시면서 관계를 맺으시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는 사람의 인격 속에서 풍부하게 나타나서 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속성이 우리와 지금 관계를 맺고 있고 이 모든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이 악하게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하게 살면 마지막에 어떻게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성경이 권장하는 영광 돌리는 방식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우리를 통해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되 그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 속으로 우리가 맺은 관계와 같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사람들에게 갖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할 설교의 절반을 딱 했는데 나머지는 내년에 와서 하면 될 것입니다. 안 불러 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찬란한 그 속성이 눈부신 빛이 이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그것들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하나님 없이 형벌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충분히 죽어있는 인간들에게 찾아 오셔서.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평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이 설교 단에 서서 나에게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놀라우신 성품을 티끌만큼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최고의 가치는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자기의 구속을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인간 존재의 가치입니다. 변호사로 일생을 살 것이냐, 아니면 똥이나 푸면서 일생을 살 것이냐,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 것이냐, 리어카나 끌면서 채소장사나 하면서 살 것이냐, 공무원을 할 것이냐, 아니면 구멍가게를 할 것이냐, 이것은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못한 직업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덜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이 당신과 관계를 맺은 우리들의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구속받은 그 이후의 삶도 넓은 의미에서는 구속의 과정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들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원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을 때는 하나님 자신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만 알도록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펼쳐져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접힌 채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을 때는 필연인데, 이것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질 때에는 이게 필연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이용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알고 보면 하나님 안에 그렇게 하기로 작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펼쳐지는 이것은 접혔을 때의 그것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 이렇게 때가 차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고, 그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눈부시고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인간들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때가 되매 이 시간 속에서 찬란하게 펼쳐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죄사함, 구속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속의 이유가 바로 이렇게 존재에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이 세계의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드러내시는 그 속성의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우리로 하여금 발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끔찍한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실 뿐 아니라 구속받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끝없는 연단과 시련 속에서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아름답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아, 위대하신 하나님 그 분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안에 이렇게 접힘이 된 뜻이 우리의 구속 속에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의 살아가는 이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필연적인 뜻들이 우리를 통해서 남김없이 선하게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오늘도 주님의 아름다움을 배워가며 그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워서 날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눈부셔 하는 인생을 살다가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을 벗어 버리는 그 날이 이 땅에 있는 날 동안에는 육체 바깥에 계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탁월하게 바라보는 그러한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는, 겉 사람은 후패하여 날마다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삼키기 때문입니다. 육체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정신도 삼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고, 이제는 주님 앞에 버려진 것 같고, 이제는 아무 유익한 것이 없는 그러한 비참하고 쓸모없고 때로는 자신도 자기가 싫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그 때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그러면서 그 불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죽음의 기운에 육체와 정신이 삼키우는 그 때에도 이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삼키는 이것이 사실은 완전히 우리를 벗고 하나님을 뵈옵기 위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삼키는 것도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 아름다움에 한없이 감격하면서 사는 이런 삶,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