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김경애, 조원정, 백지영, 김미현, 김명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저를 잘 알고 계신 분도 계시고 모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20년 전에 XXXX. 그리고 저는 한국에 있는 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외국에 유학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계속 공부를 했고 학교에서도 10년 정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있는 큰 신학교중의 하나인 총신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0권 넘게 책을 써서 한국에 200백만 권 정도가 독자들에게 팔렸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루 종일 강의해 드리려고 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해서입니다. 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강의는 적어도 한 20년 이상 조나단 에드워즈를 강독하고 연구한 결과입니다. 이번 강의의 목적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방대한 사상과 전집인데 예일대학에서 출판한 25권의 전집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에게 이 시간이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의 사람인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가 각광을 받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사람이지만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유럽과 제3세계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3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오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날은 정말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히 이전 세대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려움들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한국에서 중국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을 통해서 모두 혁파되었던 노자와 공자와 맹자에 관한 교육을 다시 장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도덕의 보편적인 기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 그리고 여러 가지 학문의 진보는 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을 어떻게 올바르게 살기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7, 8년 전에 뉴스위크지에 중국에 대한 것이 실렸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것입니다. 거기의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중국은 테크노크라시가 지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술 관리국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경제대박이 이루어지고 기술혁신이 이루어집니다. 나라는 풍요하고 점점 부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도덕적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하는 이상적인 그림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충분히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 중국의 중국만의 문제이겠습니까?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이 심각하게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오면서 이미 도덕은 기초적인 다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지 그런 선이나 악이나 영혼, 무한,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유가사상은 인간이 어디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어디로 가는가가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관심사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의 관심사는 개인의 행복과 평화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의 복음적인 가치의 기준을 상실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아주 힘든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들에 대해서 지금 철학이나 현대사상이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동성애도 심각하고 여러분도 아마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피터 ? 라는 학자는 동성애를 뛰어넘어서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 사람은 남자가 어떻게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왜 인간은 인간과만 결혼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와 결혼할 수 있다고 하고 개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자체가 인간의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이런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인식 때문에 조다난 에드워즈의 통합적인 신학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에 미국에 살았던 신학자입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졌던 비전은 동일하게 우리가 가진 비전이기도 합니다. 에드워즈의 비전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는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둘째는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자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를 한번 보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와 어머니 에스더 에드워즈의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한 교회에서 67년을 목회를 했습니다. 엄청난 기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첫 번째 결혼에서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부인이 남편과 ? 그래서 교회의 허락을 받고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11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화면에 보이는 곳이 에드워즈가 태어난 집이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 터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주 어려서부터 명석한 수재였습니다. 13살 되던 1716년에 지금의 예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4년 후에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석사를 했습니다. 그해 강사가 되어서 예일대학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나이가 18살이었습니다. 그는 19세부터 맨해튼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결단하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미셀러니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에 예일대학에서 교수로 임명을 받고 1926년에 노스햄턴에서 부목사로 부임을 합니다. 1927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그리고 1927년에 24살 되던 해에 사라 피에르 폰트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부인인 사라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 증손녀입니다. 미국에 있는 목회자 ?의 딸이었고 에드워즈는 사라의 경건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에드워즈하고 사라 피에르 폰트는 6살인가 7살 정도 차이가 나고 에드워즈가 청혼을 했을 때의 사라의 나이가 13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 5년 후에 결혼을 한 것입니다. 1729년에 에드워즈 목사는 노스햄턴 교회에서 담임을 했고 바로 이 노스햄턴 교회에서 역사에 남는 커다란 부흥이 노스햄턴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노스햄턴 교회가 화면에 나옵니다. 1734년에 『신적이고 영적인 빛』을 출간했고 이때에 노스햄턴에서 대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1737년에 『놀라운 회심이야기』가 출간되었고 1738년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과 열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1740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방문해서 노스햄턴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미국역사의 제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가 8월인데 그다음에 1741년에 그 유명한 ‘진노하시는 하나님 아래 있는 죄인들’을 설교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대각성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있고 그리고 성령의 역사들을 설교하고 퇴장했습니다. 그리고 1742년 4월 16일에 노스햄턴 교회가 회중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은혜를 많이 받고 이제는 이 말씀대로 우리가 언약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서약식을 하게 됩니다. 1744년에 ?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최근에 나온 의학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특별히 현대의학에 있어서 여성들이 어떻게 아이를 갖고 임신해서 아이를 어떻게 출산하는가에 대한 책입니다. 그 책을 청년들이 돌려보면서 ? 으로 사용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젊은이들을 치리하게 됩니다. 그중 일부에 사람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커다란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그 교회를 떠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된 것입니다. 1742년에 신학감정론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는 자기의 사위가 될 뻔 했던 사람인데 1747년에 훼어컨서트를 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에 유럽에 책을 보내서 전 유럽이 미국과 함께 기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자는 세계적인 ? 입니다. 1749년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사위가 될 사람이 써놓은 일기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모아놓은 책이고 거기에 에드워즈가 해설을 붙였습니다. 굉장한 책입니다.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로 된 책은 아마존에서 쉽게 살 수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7권을 사왔습니다. 그리고 6권을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50년에 노스햄턴 교회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리고 1751년에 스토크브리지에 ? 교회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54년에 그 유명한 책 『의지의 자유』가 출간되었습니다. 1755년에는 너무 너무 유명한 책인데 이 책은 여러분이 기독교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기초가 될 두 권의 책입니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논문입니다.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어로 된 책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책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두 가지의 강의를 들으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최소한 천지창조의 목적 10시간과 밀러 ? 10시간 정도입니다. 철학적인 훈련이 되신 분들은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1757년에 원죄론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프린스턴대학의 학장으로 취임을 합니다. 1758년 56세 때인가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은 후 부작용으로 에드워즈가 소천을 합니다. 55세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부인도 필라델피아에서 죽습니다. 그 다음에 1758년에 『원죄론』이 출간되고 1765년에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이 출간됩니다.
우선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와 제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를 사랑하고 또 그의 사상이 나의 목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은 학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변적인 사상가일 뿐 아니라 나 같은 지역교회의 목사에게도 영향을 끼친 신학자였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에 가서 에드워즈를 통해서 배운 지성과 의지의 중요성 그리고 존재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언급으로 이 강의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교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워즈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신학분야에서가 아니라 일반학문의 분야에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박사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의 세계가 워낙 ? 더욱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양한 국면의 사역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인 동시에 신학자였고 과학자였고 그리고 설교가였고, 부흥가였고, 저술가였고, 철학자였고, 심리학자였고, 그리고 교육자였고, 또 문학가이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문학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는 것은 필수코스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한 권이라고 읽어보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몇 분 안 됩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 로마서 강해입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였고 지금까지 약 150권 가량의 책이 번역되었는데 로이드 존스가 에드워즈를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에드워즈의 위대함을 칭송하면서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알프스산맥이고 루터와 칼빈은 히말라야산맥입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또한 에드워즈의 신학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에 나는 이미 에드워즈에 심취해있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책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했고 그의 글들을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에드워즈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저의 공헌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에드워즈가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에드워즈의 사상이 포괄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책을 보더라도 그는 영적 각성과 부흥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에드워즈가 소개되었지 에드워즈의 포괄적인 사상을 로이드 존스가 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도 지금 에드워즈는 부흥사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과 미국에 소개되는 리처드 백스터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 사람은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였습니다. 그 당시의 청교도는 세 부류가 있었는데 칼빈주의적 청교도, 율법주의적 청교도, 그리고 알미니우스적인 청교도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심리주의적인 청교도입니다. 리처드 백스터 이 사람은 알미니우스적인 청교도였습니다.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에 입각한 청교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주 탁월한 사변의 능력을 가진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교회에서도 그냥 실천적인 목회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참 목자상』이라는 그의 유명한 고전을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그리고 오늘 이 설교가 내 인생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남긴 주인공입니다. 그의 『참 목자상』, 『회심』, 『성도의 영원한 안식』 같은 것들은 기독교에 있어서 영원한 고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실천적인 목회자로만 알려져 있는 것은 그의 저작이 골고루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어로 된 신학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보편신학』, 『기독교 신학방법론』 등에 등장하는 중세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수많은 인용은 그가 얼마나 사변적인 신학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의 최대의 장점은 성경을 중심으로 모든 지식을 통합하는 통합신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지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기초로 해서 역사, 과학, 사회, 그리고 모든 학문에 있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연결시키는 그런 종류의 통합적인 신학입니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사상의 진정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는 어떤 한 부분들을 빼내서 사람들이 마치 자신과 똑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마치 1999년도에 있었던 캐나다 토론토의 비성경적인 성령운동 같은 데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비주의 운동을 조나단 에드워즈와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말하자면 조장된 현대의 부흥운동들을 진실한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들과 생각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끌어들인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은 책을 한두 권 읽었다고 해서 알았다고 파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그의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300년 전의 영어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에드워즈의 영어는 그래도 존 오웬의 영어보다는 쉽지만 그러나 현대영어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만만한 영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별도로 18세기의 영어를 공부해야합니다.
그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와 저의 학문에 대해서 읽어보겠습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마틴 로이드 존스를 대하기 전까지는 사실은 에드워즈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신격화하듯이 너무 칭찬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전집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여기 스크린에 나온 이 책입니다. 이것은 19세기에 나온 작품인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 중에서 하나입니다. 그래도 그때 『Banner Of Truth』라는 영국의 출판사에서 두 권짜리로 복권을 했습니다.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아주 돋보기를 쓰고 보아야할 정도로 작은 글씨입니다. 그 책은 에드워즈가 쓴 책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아마존닷컴에 들어가면 그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싸지는 않습니다. 100불이면 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 그림에 보이는 이 책은 사실은 불완전하니까 이후에 이 책이 나왔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이 책을 한 60년에 걸쳐서 계속 책을 내놓았고 지금은 모두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25권 정도의 책이 나왔는데 한 책의 분량이 700페이지에서 800페이지에 달합니다. 이 책은 비쌉니다. 전부 다 사려면 미화 2,500불에서 3,000불 정도입니다. 그 당시의 저는 앞에 나왔던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 분량이 너무 광대해서 다 읽지는 못하고 부흥, 영적 각성, 은혜로운 기록들, 그런 책을 읽었습니다.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인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다음에 나오는 이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의 진수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내세우고 모든 사상의 체계를 성경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우주적인 사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성경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을 하면서도 철학, 미학, 윤리학, 자연학, 이런 것들을 모두 통합해서 성경의 게시를 설명하는 광대한 우주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는 계몽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계몽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어로 Enlightenment 빛이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계몽주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계몽주의 사상은 빛이 들어온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계몽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전까지는 인간은 피동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고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전까지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많은 사물들 혹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천사일수도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중심이고 세계와 모든 것들은 이렇게 돌아가는 객관적인 관측의 대상들입니다. 이것이 계몽주의에 와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들어가고 이렇게 많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일수도 있고 천사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도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이 시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요소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은 더 이상 옛날처럼 인간에게 무엇을 하라고 일일이 간섭하는 그런 신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그리고 이성에 의해서 사물 즉 소위 이야기하는 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계몽주의이고 여기서부터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기서는 어떤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을 해도 이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이성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폭발적으로 학문들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성과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데카르트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뒤에는 바로 르네상스라는 것이 있고 르네상스 이전에는 13세기에 기독교 신학의 거대한 사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가 바로 이렇게 근대 사상인 계몽주의가 일어났던 쓰나미와 같이 계몽주의가 밀려왔던 때에 살았던 격변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에드워즈 이전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학문이 세태를 따라서 모든 학문적인 지식들을 통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의 목표가 기술을 개발해서 물질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 교육의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나 덕스럽고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서양교육은 3학 4과를 중심을 이루어져있었습니다.
기술을 물질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 교육의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나 덕스럽고 시원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 문법논리나 수학 ? 논리학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변증한 것을 배우고 ? 을 통해서 자기 의견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했습니다. 사건은 이러한 일들을 하기에 적합한 이슈를 연마하는 기초학문이었는데 수학, 00, 음악, 천문학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학 교육은 이러한 인문학이나 자연학을 공부하고 그 위에 신학을 공부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신학의 임무였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모든 학문들을 공부한 최고의 지성인들이 신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이 여왕이라면 철학은 궁녀들이었고 나머지 학문들은 그 밑에서 봉사하는 시녀들입니다.
당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의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에드워즈 때 이미 학문의 통합적인 구조들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그 자체를 계속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 사상에 .. 유물론을 기초로 해서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고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적일 수밖에 없고 도덕과 죄와는 어떤 관계에 있고 역사와 ? 는 어떤 상관관계에 있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무얼 보든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보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입니다. 회의할 때는 공산주의이고 가서 장사할 때는 자본주의면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가 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유신론을 기초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는 이렇게 생겨났고 하나님이 이런 목적이 있어 인간을 창조하셨고 교회와 역사는 이런 관계에 있고 인간은 이러이러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 교육인 것입니다. 성경에 단편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생각하든지간에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교육입니다. 결국 우리 목회의 목표입니다. 예수 믿고 잘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병들든지 죽어가든지 높은 지위에 올라 씩씩하게 살든지 간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행복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행복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 교육이고 선교이고 목회입니다.
이때에 에드워즈 시대에는 이러한 구조들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더 부서지고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오늘날 그 사람이 더 복음적이고 ? 이 뛰어나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특히 한국이나 여러분 중국처럼 순식간에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사회에는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고 돈이 최고로 부각되어가는 이런 것들은 ?
에드워즈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 저는 20년 가까이 에드워즈를 읽었습니다. ? 만 팔천 페이지를 모두 읽지 못했습니다.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는 만 오천 페이지 정도 읽었습니다. 설교집 몇 권 아직까지 ? 그러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나열할 수 없고 여기서 강의할 목표는 아닙니다. 그러면 에드워즈의 어떤 것들을 공부하면서 사랑에 빠졌는지를 이야기함으로 여러분에게 자극을 주고 여러분에게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발전의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그러면 제가 에드워즈의 어떤 책들을 읽으면서 에드워즈의 신학에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겠습니까?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소개해야 할 책은 미셀러니 책입니다. 원래 영어에는 에세이와 미셀러니의 차이를 설명할 수 ? 에세이는 시장에서 물건 ? 미셀러니는 시장을 가다가 ? 여기에서 미셀러니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대개 잡기, 혹은 잡록이라고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이 책을 한국에서는 신학 묵상집이라고 많이 번역을 했습니다. 사실은 신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들에 대한 지식들을 가지고 자기 생각들을 적어 내려간 그런 하나의 그림입니다.
여러분 혹시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본 적 있으십니까? 파스칼이 팡세를 쓴 목적은 당시의 사상에 대해 기록된 목적으로 아주 방대한 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아놓고 그것을 가지고 기독교 변증서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파스칼이 그랬던 것처럼 에드워즈도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이런 생각, 이런 것들을 짧게는 한 구절에서부터 길게는 서너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단편적으로 작성을 해서 보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살 때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쓴 것입니다. 36-37년 정도 됩니다.
여기 밑에 나와 있는 것이 미셀러니의 속편이고 이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 손으로 그 당시에 종이로 묶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예일대학에서 나온 책을 기준으로 네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기록 방식은 초대교회의 교부 중에 테르툴리안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사람은 2세기에 기독교 최대의 교부 중 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시적인 능력과 헌신된 신앙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였고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몬타나우스주의 이단에 빠지긴 하는데 아주 오늘날의 형태의 신학용어 중에 중요한 것들을 이미 설정해 놨습니다. 삼위일체라든지 하나님의 본질, 위격, 한 30여 가지 되는 신학용어들 자신이 다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철학이 신학을 휩쓸어버리는 당시에 ? 위협을 경고하면서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은 기독교 종교의 상징이고 아테네는 철학의 상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철학적인 ? 그리고 철학적인 관념을 가지고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앙 ? 그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라든지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이 사람이 메모의 사람입니다. 항상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지팡이 위에 구부러져있는데 뚜껑을 열면 거기에 잉크하고 펜하고 있는데 길을 가다가도 생각이 나면 뚜껑을 열어서 적습니다. 여러분도 메모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에드워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말을 타고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생각나는 것을 머릿속에 두는 것이 아니라 말 위에서 메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종이에 적어서 옷에다가 집어넣습니다. 생각이 많이 떠오르는 날은 여기저기에 막 넣습니다. 그래서 집에 오면 아내가 다 뽑아내어서 하나씩 하나씩 정리를 합니다.
실제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초중의 하나로 ? 이런 에드워즈의 사상과 특성 때문에 미셀러니라고 하는 책에는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 미학, 철학, 음악, 과학, 윤리, 역사까지 막 넘나들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막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했습니다. 믿으시겠습니까? 사서오경,
실제로 말입니다. 올해 2월 달의 일입니다. 화란에 갔는데 유명한 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한사람하고 같이 대화를 했는데 중국 철학이 서구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아십니까?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경제학에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애덤스미스, 애덤스미스가 쓴 유명한 책이 화폐경제에 관한 일반 ?이라는 책이 있는데 소위 말하는 국부론이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 여러분 함께 배우셨습니다. 모르십니까? 경제를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 수요와 공급가격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이 ? 사상을 접하면서 터득한 사실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과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닐스 보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1900년대 초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현대 양자 물리학의 대부입니다. 현대 양자 물리학은 한참 ... 이 사람에 의해서 1927년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논쟁을 하게 되는데 그때 논쟁에 나섰던 사람은 세계적인 거목과 같은 학자입니다. ? 사람의 아인슈타인, 결국 아인슈타인을 꺾습니다. 최소한 양자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을 이건 것입니다. 가게에서 물건 사면 바코드로 찍는 것, 물리학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 사람이 양자역학에서의 모순들을 그거에 대한 답을 직관적으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주역의 일로 ? 모순적인 것은 서로 충돌되는 것은 사실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서로 상도적이다.
소위 얘기하는 원자라고 하는 아톰, 아톰 이하의 세계를 서버 아톰이라고 하는데 서버 아톰 속에 이루어지는 물리의 법칙은 우리 거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법칙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17세기 초반에 에드워즈가 17세기의 사람이었는데 중국의 중요한 모든 집들이 ? 중국에 식영, 추슈, 예기, 이런 것이 나오면 내용들을 묵상해서 비판하기도 하고 중국 사람들도 성경에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논증들을 ? 많은 학문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것, 성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이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미셀러니가 체계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에드워즈의 사상이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입니다. 에드워즈 사상의 진수는 모두 미셀러니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도 이 책이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너무 궁금한 것은 한권이라도 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그리고 만약에 돈이 없어서 사기가 그러면 미국에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에 그의 전집을 읽을 수 있도록 다 오픈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운이 잘 안됩니다. 하루에 30페이지 정도입니다. 몇 개 씩 다운 받아서 읽어보십시오.
나는 미셀러니 네 권을 읽으면서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지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탐구할 수 있을까라는 데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에드워즈의 사상이 정말 질서 정연하고 폭넓고 정말 아름답다는 그런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지혜다. 진리라면 그것은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를 사람들이 잘못 해석을 해서 오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인간이 이해를 잘못 한 것입니다. 비록 어떤 진리를 몇 개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 진리를 올바로 연결하지 않으면 아주 심각하게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에 A라는 종교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어떤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들이 이렇게 있는데 진리들을 잘못 연결을 합니다. 그럼 여기 마지막에 잘못된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진리를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였고 B라는 철학이 있다고 칩시다. 여기도 진리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못 연결을 합니다. 여기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도 진리이고 이것도 진리입니다. 잘못 사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거짓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이런 것을 밝혀내서 해방시켜주어서 이 진리가 올바른 위치에 오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A라는 조표를 알아야 되고 B도 알아야 되고 그래서 이건 진리인데 이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미셀러니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모든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지식은 결국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셀러니를 통해서 에드워즈의 방대한 사상들을 알아갑니다.
25권의 책 가운데 제가 지금 제일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미셀러니입니다. 두 번째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일판 기준의 저작으로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편입니다. 이 책은 미셀러니가 나에게 에드워즈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눈을 열어주게 되었다면 그런 사상으로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에 대한 지식을 열어준 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구속사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역사서술은 그의 전집 속에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다음에 구속사의 저술을 위한 노트입니다. 이 책이 완전히 완성된 책이고 ? 여러분은 헷갈릴 것입니다. 책을 보면 00 31이라고 나오는데 25권까지 밖에 책이 안 나왔는데 어떻게 31이 나올 수 있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저작들을 에드워즈 센터에서 1번부터 50몇 번까지 분류를 했습니다. 실제 책으로 나온 것은 25권으로 끝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책들은 한권의 책으로 출판할 정도의 가치가 없는 메모를 해놓은 이런 것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나오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31권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책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웹사이트에 떠있는 31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대개 여러분 구속사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반응이 없습니까? 구속사라고 하면 대개 성경의 구속사를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의 구속사가 시작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최고조가 이루어지게 되고 승천하시고 사도행전의 역사가 전개가 됩니다. 마지막에 완성된 구속사에 대한 전망이 계시록에 나오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경에 우리들 시대에 대해서는 안 나옵니다.
구속사에 대한 것을 거론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성경에서 시작해서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 계시록에서 끝나는 것이 늘 있는 일인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사도시대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해서 2세기, 3세기 4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18세기 종교 개혁 이후에 까지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 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몰락, 천상교회의 영광까지 다룬 것으로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통일성 있는 하나의 신학 역사서를 완성한 것입니다.
나는 에드워즈의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이 유세비우스라는 사람, 유세비우스의 교회 상, 이 사람들은 3세기 때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4세기에서 5세기를 살았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저 사람은 중국 역사상 공자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저 사람에게 와서 모든 이전의 역사와 철학들이 통합이 되고 이 사람에게서 풀어 나감으로서 서양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앙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다. 심지어 이런 말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비판하는 방법을 어거스틴에서 배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 펠라기우스주의, 000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호하고자 역사소설을 시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피너스주의, 다리우스주의, 알미니우스주의, 이신론과 같은 시대의 정신에 맞서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상이나 사람들의 이름을 인터넷에 쳐서 소피너스 주의가 무엇인가 찾아보십시오.
에드워즈의 저작을 읽으면 읽을수록 칼빈의 경우와 같이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18세기에 무너져가는 사조 말고 원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따라서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7세가까지 신학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모든 신학자들의 책을 읽는 것으로서 기독교 신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로마 제국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나뉩니다. 서로마제국 교부들을 라틴교부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을 헬라교부 혹은 그리스 교부라고 합니다. 여기는 철학과 논리를 기초로 기독교의 진리를 발전시켜 갔습니다. 여기는 성경과 신비를 중심으로 직관을 중심으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초기에는 그리스인들의 신앙이 훨씬 건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쪽이 훨씬 더 견실하고 웅장한 신학을 했습니다. 반면에 여기는 신비와 직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신학이 불건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수많은 저작들이 생산이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책들이 수천 권인데 이렇게 되면서 중세로 넘어갑니다. 다음에 중세말기가 옵니다. 중세의 시작이 어거스틴에서 시작이 되고 거의 끝날 무렵 아퀴나스가 등장을 합니다.
다음에 14세가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아까 얘기했던 인간의 이성과 자율이 강조됩니다. 이런 것들이 발전해서 인문주의가 됩니다. 인문주의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쳐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이 나중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다가 ? 조약에 의해서 모두 평정이 되고 ? 와 자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카톨릭은 카톨릭대로 싸우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17세기에 신학의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를 개신교 교부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신학자들이 생산이 됩니다. 여기에 있는 중요한 책들을 읽는다는 것이 신학공부의 시작입니다. 당연히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읽는 것이 신학공부의...
마치 중국 사람을 공부하면서 한자를 알아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방대한 사상을 종합적으로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는 조나단과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만 읽을 때는 굉장히 독창적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것들을 이미 있었던 기독교 사상의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학문에 있어서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항상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병행이 되어야 됩니다. 누가 뭐라고 이야기하든지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알게 된 이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발견한 것이 최초다. 이러이러한 것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몰라서 그렇지 다 찾아보면 옛날에 다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스펄전의 생애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는 것을 스펄전이 봤답니다. 자기 설교하고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는 것을 스펄전이 보았답니다. 자기 설교하고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나고 난 뒤에 그랬답니다. 어떻게 당신 그럴 수 있느냐고 그것 내가 예전에 한 설교인데 어떻게 내 설교를 베껴서 할 수 있느냐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내가 설교를 내 설교가 아니고 베껴서 한 것은 맞는데 당신 설교를 베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설교를 베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은 스펄전보다 더 먼저 시대의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스펄전도 언젠가 그 사람의 것을 보았는데 그 봤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옛날에 읽은 것이니까 자기가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안 할수록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진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정말 자기가 넓은 광야에 작은 돌멩이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넓은 바다에 떠있는 작은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잘 모르는 사람을 놓고 자기가 엄청나게 큰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무지는 알아도 진짜 지식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신학에 있어서 독창적이었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중세의 신학자들 그 다음에 종교개혁자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가치와 질서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한 이론과 실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아름다움과 통일성, 진리와 사랑에 관한 담론 등에서 예외 없이 어거스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또 하나 있는데, 그런데 여러분이 잘 읽지는 않겠지요. 잘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확실히. 존 오웬의 'Biblical Theology' 이 책이 원래 라틴어로 쓰였다가 19세기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 책은 900페이지정도 되는데 그런데 정말 6개월까지 읽었었는데 정말 읽다가 몇 번 던지고 싶었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이 책은 여러분에게는 성경 신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이것이 언약신학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느냐고 하는 것을 언약으로 풀어서 성경의 역사를 설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오웬은 성경 신학에서 17세기의 신학자이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와는 100년 정도 선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영국에서 황태자라고 불린 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영국 크롬웰의 공화정 시대 때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저작 전집이 16권으로 되어 있는 데, 존 오웬의 작품 이 사람의 책은 비교적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마존이나 영국의 ? 사 웹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면 16권의 책을 4000 위안 정도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 전집의 경우에는 제 생각에는 15000 위안 정도? 그런데 이 사람이 쓴 성경적 신학, 이 책이 사실은 구속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여기서 이 사람이 수많은 희랍의 문헌들과 ? 문헌들을 정신없이 인용을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박식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네 나라의 말은 물론이거니와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는 물론이고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랍비 해석가들의 작품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어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오웬의 성경적 신학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를 비교해 본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오웬의 성경적 신학이 밀림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아마존 강 위를 위로 날아서 가는 것 같은 책이라면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큰 배를 타고 그 물줄기를 따라서 여행하는 것 같은 책입니다. 오웬은 역사적 관점을 언약적 관점을 따라서 성경의 시대를 나눕니다. 그 나눠진 시대마다 각각 하나님의 다른 경륜이 있습니다. 그 경륜들이 서로 다른 것은 그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언약이 서로 다른 언약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들은 전체적으로 인류의 구속이라는 통일성을 이루면서 각 시대마다 서로 서로 다른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역사를 언약을 중심으로 이해를 하면서 광대한 이방문헌들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칼 트루먼이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의 존 오웬 연구가가 있는데 그래서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언약과 보편교회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모든 보편교회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가톨릭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가톨릭이 개신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가톨릭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인데 그 이전까지는 하나의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나 그리고 안젤무스나 이런 사람들이 가톨릭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인 뿌리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의 사상이 21세기의 우리 프로테스탄트와 맞느냐고 하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택동 시대에 살던 여러분의 할아버지들이 여러분 사상하고 똑같은 사상이겠습니까? 모택동시대에 살던 사람하고 공자시대 살던 사람하고 같은 사상이겠습니까? 공자시대에 살던 사람들하고 은나라 시대의 사람하고 같은 사상이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조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이 있으면서 이 사상들 중 어떤 사상은 틀렸다고도 말하고 여기는 맞다고도 말하고 여기는 비슷하다고도 말하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후손들은 여러분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성경과 역사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다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책 ? 페이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유 선생님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틀 안에서 성경의 역사를 해석해 갔습니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속사에서 오랜만에 대조적으로 성경 자체의 진술에 따라서 언약들을 근거로 경륜을 해석해 갑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르는 시대의 다양성보다는 그 다양한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인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속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행위들은 인간에게 자신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계시하는 수단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죄 때문에 비참해집니다. 이 비참한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역사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구속사의 전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죄가 들어온 것은 나쁜 것이지만 죄 때문에 인간들이 비참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사람이 지었지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회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기회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결혼하지 않은 형제들, 결혼을 할 때 어떤 여자를 골라서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예쁘기만 하면 신앙은 없어도 됩니까? 그것은 안 되면 신앙만 좋으면 되겠지요? 기본이 아닙니다. 어떻게 신앙 좋은 것이 기본이겠습니까? 내가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한국에서도 결혼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우선 자꾸 결혼이 늦어지고, 한국도 굉장히 예쁘면 무엇이든지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예쁜 여자들은 ? 결혼을 못하는 자매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교회는 예수 믿는 여자들이 예수 믿는 남자를 찾으니까 남자 수는 적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예수만 믿으면 직업도 없고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들한테 얼른 시집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집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생긴 자매는 다 갑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은 10년을 교회를 다녀도 누가 와 가서 차 한 잔 마시자고 프러포즈를 안 합니다. 못생겼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섯 명 여섯 명이 접근을 해 가지고 자기하고 살자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것을 보면 여기서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추하면 무슨 감정이 생기느냐 하면 혐오의 감정의 생깁니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추함의 주인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을 볼 때에 예쁘다고 느끼게 되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을 볼 때 추하다고 생각되면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추할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이 추한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몰해(沒解),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여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싫어하던 사람을 오해를 풀어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서 사랑하게 해 주는, 하나님을 싫어하던 사람을 그 오해를 풀어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 아름다움의 정수가 성경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인 것은 그 속에서 구속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더 감격스럽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이 더 감격스럽습니까? 예전에는 여러분도 어렸을 때 야,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정말 신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새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뭔가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생명까지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은 아닙니다. 제가 올 여름에 유럽에 두 달 정도 있었습니다. 한 달 있고 그 다음에 한 삼 주 있고 그랬습니다. 진짜 먼 곳을 갔습니다. 아이슬란드라고 아십니까? 한 사람도 한국 사람이 없습니다. 동양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중국 사람들을 여러 사람 만났습니다. 여기서 아이슬란드가 얼마나 멉니까? 여기서 런던까지 가려면 10시간 정도 걸리고 영국에서 4시간 정도 가면 아이슬란드가 나옵니다. 거기까지 왜 갔을까요? 경치를 보려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와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것까지 우리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그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입니다. 그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정수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접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질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항상 뜨겁게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에 관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형제가 어떤 자매를 사귀었습니다. 소원대로 얼굴이 예쁜, 피아오량(漂亮)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맨 처음에는 피아오량(漂亮)(큰 소리로), 한참 지난 다음에는 피아오량(漂亮)(중간), 또 한참 지난 다음에는 피아오량(漂亮)(작은 소리로), 또 한참 지난 다음에 피아오량 마?(漂亮吗?), 또 한참 지난 다음에는 뿌 피아오량(不漂亮). 왜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새로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시간이 지나면 늙지 않습니까? 저쪽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그러면서 싫어지는 것입니다. 영화배우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탐 크루즈입니다. 같은 남자지만 정말 멋있게 생겼습니다. 그 부인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니콜 키드먼입니다. 둘이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니콜 키드먼이 마지막으로 정말 아름답게 찍은 영화가 물랭루즈라고 하는 영화인데, 파리에 있는 물랭루즈라고 하는 쇼를 보여주는 극장에서 쇼우 걸로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예쁩니다. 세계에서 그렇게 예쁜 여자가 없을 정도로 예쁜데, 그러면 계속 사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혼했습니다. 다른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훨씬 못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초선, 왕소군, 양귀비, 서시 이렇게 막 나가다가 너무 예쁘니까. ? 그런데 육체의 아름다움은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육체적 사랑을 가져 오지만 정신에 대한 아름다움은 정신의 사랑을 동반합니다. 이런 경우 있습니다. 사람을 딱 보았는데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만납니다. 그런데 별로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처음에 만났는데 별로입니다. 그런데 뭔가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지루할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또 지루할만할 때 이 사람이 이렇게 착한 사람이구나, 아니면 이 사람 이렇게 지식이 많구나, 이 사람이 이렇게 나에 대해서 배려하는구나 그런 것이 계속 나타날 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런 좋은 점들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름다움의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더 보여줄 게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너무나 많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돈이 좋고, 쾌락도 좋고, 지위도 좋고 그러니까 거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랑은 다른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목회의 목표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사랑하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냥 일만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되기 위한 가장 큰 자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에 대한 많은 증거를 자신 안에 가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7년 전쯤 천문학을 배웠습니다. 1년 동안 배웠습니다. 그래서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을 선생으로 불러서 사례비를 주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해가 안 되던 신학적인 문제가 천문학을 배우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문학을 가르쳐 주는데 가르쳐 주는 이 사람은 날 가르치지만 그런데 자기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물론 그 사람은 ? 그래서 그것을 내가 설교해 주면 그때서야 놀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만이 모든 학문을 최종적으로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동양 사상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연을 보았습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릅니다. 이 사람이 본 것은 자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나서 인생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물은 언제나 이렇게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그 다음에 더 막히면 넘쳐서 넘어가고 그러면서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역시 순리를 따라서 살아야겠구나 그러면서 이것을 문학으로 표현을 하는데, 물(水)이 지나가는 것(去) 이것이 법(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그리스 사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피지카(physica), 자연학입니다. 이것을 로지카(logica), 논리(論理)로 연결을 합니다. 여기에서 에티카(ethica), 윤리(倫理)를 찾아냅니다. 이럼으로써 인간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 바다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들풀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면서 인간이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욕심에 휘둘려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간이 순리를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이 법의 정체(正體)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중국철학에서도 보면 공자는 이 도(道)가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 도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그런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하면 악한 사람하고 갈등을 일으키겠고 그러면 누가 옳으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자가 생각하는 도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품는(含)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없이는 이런 것을 찾아간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경의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데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구속사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 25권 가운데 제 6권이 ‘The Writing of a Philosophical Science’입니다. 에드워즈가 쓴 이 과학철학 책은 자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세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 속에 당신의 충만한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내신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천둥과 벼락이 떨어지는 날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회심하기 전에 자연을 보면서 느꼈던 것과 회심한 후의 차이가 어떠했는지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회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두렵던 자연의 세계가 하나님 만나고 이렇게 아름다움과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 수단이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 여러분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화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화론을 알고 그리고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이해를 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신앙을 버리게 된 것도 사실은 진화론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을 믿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있을 그 때에 진화론을 미리 가르쳐 주어서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이치적으로 잘 설명해 주어서 이후에 초등학교 중학교 때 교육을 받으면서 진화론을 배워도 그것에 자기가 매몰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회심한 아이들에게 한손에는 성경을 또 한손에는 제대로 쓰여진 과학책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과학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것은 당시에 커다란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하나의 과학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뉴턴주의입니다. 뉴턴이라는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써서 세계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 책이름이 PRINCIPIA입니다. 이 책 제목을 보면 자연 법칙 속에 나타난 수학의 원리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신기하게 보이던 모든 현상들이 모두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고 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들은 수학의 법칙이 성립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하는 이 모든 사건들이 그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렇게 종교적으로만 해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왜 천둥번개가 치는지 그리고 왜 비가 오는지를 다 설명을 합니다. 그 현상들은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뉴턴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보아라. 결국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는 뉴턴주의를 잘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함으로서 이런 자연법칙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논증을 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에서 발견한 지식들을 신학으로 연결하는 것들을 보면서 신학이 얼마나 통합적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이제 300년 전 책이니까 오늘날 아주 발달된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부분들이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점에 대해서 깊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책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책이 제 8권인데 ‘윤리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그림으로 보면 17세기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17세기에도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사람인데 18세기에 이미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산업혁명이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불란서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유럽 전역으로 흩어진 사라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주 지식인이었고 자본가였고 실제로 사회 산업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정말 중산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흩어져서 16세기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그 자손들이 내려오면서 기술이 축적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미국 같은 경우는 유럽보다 100년 정도 뒤떨어져서 19세기 중반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니까 덕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제 8과에서는 윤리 문제를 다룹니다. 세권의 책이 같이 담겨져 있는데 오전에 강의하면서 너무 중요하다고 했던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한 ‘사랑과 그 열매’라고 하는 세편의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똑똑하게 공부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생각나게 하는 책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철학’ 그 한권이 우주에 나타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준다면 ‘윤리학’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편의 논문을 여러 번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참으로 이성적이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신학적 판단에 있어서 철학적인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책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이 책은 제 21권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 이 세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론이 곧 성령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들의 해석에 비하면 그렇게 탁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위일체 진술을 보면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 피터 롬바르드(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10세기의 신학자입니다.) 그 다음 토마스 아퀴나스, 기롤라모 잔키우스,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17세기 신학자 페트루스 반 마스트리히트, 그 다음 코케이우스 이런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라고 할 때 삼위는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말하는 것이고 일체라고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본직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방식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좀 다릅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먼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시는 분이다. 그럼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 분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방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합니다. 그러면 세 분을 위격이 셋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나면 셋인데 어떻게 한분이신 하나님이 나올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설명하는 것이 여기 나오는 소위 얘기하는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른 위격이시지만 세분 속에 동일하게 교통하는 상용호섭 하는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위격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그 다음에 강조합니다. 그 상용호섭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켜서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배우는 신학에서는 서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 방식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서방교회의 모델보다는 동방교회의 모델을 따라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삶, 질서, 관계 이런 것들을 중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서방교회 모델보다는 동방교회 모델이 훨씬 더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접근 방식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위격들 간의 관계에서 보고 그 안에서ㅕ 신적 본질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위격간의 사랑을 추론하려고 하였던 것은 동방교우들만의 전통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원천인 서방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전통에 의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계 중심적인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신적본질 안에서 세 위격간의 관계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 그리고 피조물들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 또 다시 관계를 맺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한 모델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는 이런 삼위일체론에 입각해서 우주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과 인간, 자연사물까지 하나의 연관을 이루는 질서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신자, 신자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이 삼위일체론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림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그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서 하나님 밖에 다른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서 하나님 밖에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에게 부어주십니다. 성자입니다. 그리고 이 성자의 신부가 교회입니다. 그 아버지께로부터 부음 받은 성자에게 준 사랑이 아들과 혼인관계에 있는 신부에게 다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신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들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또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이런 식으로 깊이 생각하고 받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받는 거기에는 항상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아들을 통해 교회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랑은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데 이바지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지 마치 그 사랑을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 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다음이 ‘신앙 감정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Religious Affections’이라고 하는 이 책입니다. 아마 에드워즈가 쓴 책 중에서 어려운 책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완 머레이라고 하는 스코틀랜드 목사님이 20세 때 이 책을 읽었지만 너무 딱딱하고 어려워 아무 유익을 얻을 수 없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작품을 43세 때 썼습니다. 이때는 이미 에드워즈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무르익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영국 경험주의의 이론들을 사용해서 성경심리학 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고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6세기, 17세기 접어들면서 데카르트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방법서설이나 중요한 책들을 보면 그가 인간의 지성의 인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주지주의적인 경향의 하나의 반동으로서 경험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배운 유명한 이야기가 타블라라사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하면 백색서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 하얀 칠판같이 태어나는데 그런데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그 칠판에 무언가가 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쓰여진 것을 가지고 사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 중에 ‘심은 대로 거둔다.’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경험주의가 일어나고 그것을 어떤 일을 판단함에 있어서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데카르트주의가 인간의 지성을 중요시했다면 여기서는 이제 무엇을 느끼냐는 감정과 의지를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경험주의입니다. 이것이 낭만주의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18세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17세기 18세기에 영국에 소위 얘기하는 ‘신플라톤주의’라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이제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결정을 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이제 그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양보더;거 나니까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니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비도덕적으로 사는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도덕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의 관계를 탐구해서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가?’라는 것을 고민했던 학문이 ‘도덕 심리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런 사상을 깊이 접하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어떻게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가?’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들을 신플라톤주의가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 이라고 하는 책에는 가장 중요하게는 성경으로부터 그대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여기에 부흥을 깊이 경험하면서 부흥에서의 경험이 들어오게 되고 신플라톤주의를 도구로 사용해서 설명을 하고 그리고 17세기말 18세기에 있었던 신어거스틴주의 운동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이 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일반학문분야에서 일어나고 이것은 기독교분야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맥락은 같이 합니다. 여기에다 도덕 심리주의가 이것들이 모두 참고가 되면서 ‘신앙 정동론’이라고 하는 자기의 정리된 신앙의 은혜에 대한 심리적인 ‘성경심리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 다음 어쨌든 설명을 들으면 소용없고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 ‘자유의지론’입니다.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 저작 전집의 제 1권입니다. 아마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던 주제가 ‘자유의지의 논쟁’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칼빈이 쓴 자유의지에 대한 글들을 기독교강요에서 읽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자유의지론’ 이라는 책 대신에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쓰긴 썼는데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예의 상태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도 자기의 유명한 책 ‘자유의지론’을 집필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지만 선과 악에 대해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옳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물론 여기서 ‘옳다’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오늘 내가 약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책은 얼마나 어려운 책인지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미친 사람이 쓴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을 저도 읽었는데 이것을 사람들마다 해석 하는 게 정반대되는 용어도 있어서 그래서 어쨌든 저도 많은 혼란을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지의 자유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매우 난해한 철학적 주제입니다. 개혁파정통주의자들조차도 세부적인 사항까지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아주 탁월한 신학자 세 사람들도 각기 이것을 약간 차이 나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유명한 에드워즈 시대에 잔키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유니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마루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도르트대회 아실 것입니다. 그 때에 대표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각각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결론은 유사했지만 각각 달랐습니다. 잔키우스 같은 경우는 자유선택이 곧 자유의지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조금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유니우스는 좀 더 섬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지성은 자유 하되 의지는 무능한 것이 현실적인 죄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고마루스는 좀 더 달랐습니다. 타락 전, 후 모두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는 있다. 그런데 외적으로, 자연적으로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렇지만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는 무능하기 때문에 결국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의지를 이런 식으로 논의했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된다고 하는 이론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이제 ‘원죄론’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판 전집 제3권에서 원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죄에 관한 교리는 이 ‘원죄론’이라는 제목을 단 3권 뿐 아니라 미셀러니, 설교집 곳곳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원죄론’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존 테일러라는 사람의 공격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의 비국교도 설교자이자 신학자였는데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인 도덕성을 강조하는 반칼빈주의의 가르침으로 영국교회를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는 이미 당시 미국에도 팽배해진 이런 유사한 사상,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있는 세 개의 논문을 기록했는데, 원죄론, 미덕의 본질,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원죄론’에서 ‘모든 인류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논쟁을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조직신학적인 서술이 되어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풍부한 가르침을 원죄 교리에 대한 깊고 풍부한 가르침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집’입니다. 25권의 책 중에서 상당히 여러 권의 책, 아마 6-7권 정도의 책이 설교집입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집의 껍질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이 이제 ‘Sermons and Discourses’ 라고 하는데 전부 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설교니까 잘 안 읽습니다. 사실은 좋은 신학 공부 중에 하나가 좋은 설교집, 깊이 있는 설교집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논쟁서들을 통해서는 아주 정밀하게 합리적으로,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쳤습니다. 에드워즈의 가르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논증 방식은 스콜라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면 대중적인 방식은 교화주의를 사용했습니다. 스콜라주의라는 것은 꼬치꼬치 캐들어 가서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게 단순화시키는 것이 스콜라주의입니다. 물음-질문-물음-질문 방식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논쟁적인 저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중적인 방식으로 할 때는 교훈적인 저술이었습니다. 대상은 논쟁적인 경우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대상이고 대중적인 방식의 청중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설교집’에는 이런 교화적이고 교훈적이고 성도들 일반을 상대로 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탁월한 신학들을 쉽게 써내려가서 성경을 풀어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좀 많이 읽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읽어도 쉽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것입니다. 분량이 굉장합니다. 한편의 설교가 작은 책 한권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분량입니다. 한번 설교하면 2시간, 3시간 정도의 분량이 됩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15분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위인전기 많이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위인전기를 읽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고 사람 되는 길을 높이 갖게 됩니다. 똑같이 신학을 공부할 때에도 올바르고 위대한 신학자의 글과 글을 읽고 삶을 공부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가 꼭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방향을 그리로 갈 수 있는 하나의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화장품을 선전할 때 모델들이 못생긴 사람은 하나도 안 나오고 예쁜 여자들이 나옵니다. 그 때 그 화장품을 바른다고 해서 다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나도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시한 책들을 읽지 말고 높은 수준의 책들을 읽고 진지하게 공부하면서 하루나 이틀해서 될 것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을 쭉 그 사람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 특히 여러분은 아직 책들이 거의 번역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영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읽는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여러분이 중국어로 접할 수 있는 좋은 신학책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학책들의 백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에드워즈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순환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를 잘 이해하려면 에드워즈의 신학의 배경이 되었던 신학 이외의 다른 학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아직 책들이 거의 번역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영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읽는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여러분이 중국어로 접할 수 있는 좋은 신학책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학책들의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순환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를 잘 이해하려면 에드워즈 신학의 배경이 되었던 신학 이외의 다른 학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미학적 신학 같은 경우,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미 그때에 미학이 시작되던 시대였습니다. 바움가르텐, 기얌바티스타 비코, 조셉 에디슨 이런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질서, 조화, 균형, 진리, 윤리, 규칙, 이런 고전주의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운동이 낭만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낭만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언가를 보면서 아름다운 것을 느끼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미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학은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규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미학은 철학에 비해서 형이하학적인 학문입니다. 에드워즈의 미학적인 신학은 그의 영적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1722년에 뉴욕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숲속에서 깊이 체험 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미학적인 단어들이 그의 설교와 글 속에 풍부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달콤한, 탁월한, 아름다움 등등의 이런 것들은 사람이 누구든지 느끼는 게 풍부하게 될 때 언어도 같이 풍부해지게 됩니다. 여러분도 설교가 풍부해 지려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잘 습득된 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혹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성경에서 어떤 진리를 체험하는 것을 커다란 질료라고 한다면 올바른 신학은 형상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순종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커다란 반죽덩어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빵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이만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굽지도 않고 먹으라고 사람들에게 주면 사람들이 먹겠습니까? 그런데 빵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굽기도 하고, 찌기도 하고, 튀기기도 하고, 부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떡들을 준다면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영적인 경험과 치열하게 공부한 것이 항상 수레바퀴처럼 두 개가 같이 다녀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하나가 많은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매일매일 신비 체험을 하는데 신학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서 이상한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공부만 많이 하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으면 극단적인 이성주의로 가서 메마른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에드워즈와 관련되어서 형이상학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에드워즈는 존재와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성향이론을 설명했습니다. 이상현 박사는 한국 사람인데 퓨리탄 신학교의 교수였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의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서 이제 이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물의 존재의 본질을 성향이론으로 설명하였는데 그것이 혁신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의 본질을 성향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이전부터 계속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 도표를 보시면 하나님은 존재가 곧 본질이고 본질이 곧 실체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경우는 존재와 본질이 다르고 본질이 실존과 다릅니다. 실존이라고 있는 것은 시간 속에 현재적으로 공간속에 존재하는 현재성으로서의 존재를 얘기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이만한 장미꽃이 봉우리가 맺혔습니다. 자라서 활짝 폈습니다. 이제 시들어서 냄새가 나고 썩어 갑니다. 이 세 가지의 장미가 각각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존은 다른 것입니다. 계속 변해가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릅니다.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가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경향성이 따로 있고 영혼의 본질이 따로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영혼의 경향성이 곧 영혼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란시스 튜레틴 17세기 제네바 아카데미 학자는 인간의 영혼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영혼 안에 있는 성향, 기능, 행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책 내용 읽음) 그래서 튜레틴은 이런 것들을 회심을 설명하는데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구원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중생은 하나님의 독력적인 동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곧 자신의 영혼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력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튜레틴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책 내용 읽음) 그래서 이런 것을 마스트리히트는 17세기 신학자는 중생을 영혼이 영적 성향에 대해 갖는 새로운 지향성이라는 해석을 했습니다. 도표를 보십시오. 영혼의 기능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여기에 줄이 하나 더 처져야 합니다. 마음은 행동을 산출하는 공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자체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지 육체와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도 영혼의 기능인데 그 기능 안에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마음이라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은 지혜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고, 의지는 선택하는 능력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인간이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뉴턴주의를 보겠습니다.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의 구분은 15세기이전 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인본주의가 일어나면서 신학 안에서 형이상학과 자연철학 을 구분하는 방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데타플, 다네우, 홀베르다, 드레이 이런 사람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는데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뉴턴이 세계를 흔들어 놓는 새로운 책을 씁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뉴턴이 다녔던 기숙사가 있는 캠브리지 대학의 사과나무입니다. 그 사과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쓴 책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들』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와 뉴턴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데카르트의 경우 관심점이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뉴턴은 인식의 대상인 자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설명 방식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합리적인 관계 설명 방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뉴턴의 경우에는 수학적 법칙이 설명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계몽주의를 불렀고 뉴턴은 과학주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신론과 이신론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이신론을 여러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노자 같은 데서 이야기하는 ‘도’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도가 와서 복을 주고 도가 혼내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너무 높은 분이어서 이 세상을 스스로 돌아가게 시계가 태엽 감듯이 법칙만 만들어서 돌아가게 해두셨다. 그래서 결국은 계몽주의, 낭만주의로 이어진 다음에 과학주의가 나옵니다. 그래서 과학 실증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은 철학이니 뭐니 이런 것들 다 무너져 버리고 철학도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철학 내지는 분석철학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과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강의를 하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여러분 이런 공부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서 책을 열 권 읽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열심히 잘 듣고 오늘 순환책에도 나왔습니다.
제가 작년에 예일 대학에 갔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센터에 들러서 소장과 직원을 만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 소장이 친절하게 안내해서 차타고 30분 정도 가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아버지가 목회하던 곳,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난 집을 들러 보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케네스 인케나라고 하는 학자인데,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이 사람에 대한 책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미니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다시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과학 철학을 읽어 봤냐? 과학을 좋아하냐?” 그랬더니 자기는 좋아하지도 않고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과학을 모르면 에드워즈의 25%를 모르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과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었더니 소수문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도 소수라고 합니까?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누어지지 않는 수, 소수가 1, 3, 5, 7, 9, 13, 17, 19, 23, … 이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발생의 규칙성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데 그 규칙성이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의 규칙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그것이 수학의 8대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게 리먼 가설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풀면 벼락부자가 될 것이고 노벨상을 받을 것입니다.(녹취자 의견: 수학에서는 필드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과학을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신학자에게 충고를 한 번 했습니다. 그 사람이 웃었겠지요. 그래서 저는 시간만 있으면 과학을 공부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은 신학적인 함의가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수학이 현대 사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줍니다. 사실 진정한 철학을 수학이나 자연학이 먼저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철학에서 찾고 그 철학이 각 학문에 영향을 주어 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그런 책을 읽으면 자기 실력도 느는 것입니다. 공부와 휴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부는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칼빈대학의 존 쿠퍼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최근에 책을 한 권 썼는데 『만유내재신론: 철학자들의 또 다른 하나님』(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ilosopher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입니다. 이 책에서 이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언급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유내재신론 자였다고 합니다. 신론에 관해서는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가 초월신론, 그 다음에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동양사상도 범신론에 많이 가깝습니다.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신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고 새고 모든 것이 하나의 껍데기이고 그것이 모두 본질로 돌아오게 되면 마지막에 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들을 동양에서 풍부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풍부한 사상들과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문헌에서 몇 가지를 인용하고 싶었는데 어디에 가서 찾으려다가 찾지 못했습니다. 인의예지라고 하는 것이 인간 밖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봅니까? 인간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까? 인간 안에 원래 있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인간이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이 명정한 상태로 돌아가면 자기 안에 인의예지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것도 하나의 범신론과 많이 통합니다. 이것과 이것의 중간이 무엇이냐면 만유내재신론 혹은 범재신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이 모든 사물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피조물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 속에 신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마치 인간 안에 영혼이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처럼 신도 그렇게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만유내재신론은 것입니다. 이런 것의 하나의 주창적인 사상가가 된 사람이 사진에 나오는 스피노자입니다. 그 사람은 화란의 철학자인데 그러나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 속에는 사실은 이런 식으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유내재신론 자였다는 흔적들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유내재신론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하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까 뉴턴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이런 법칙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법칙을 움직이는 분도 하나님이다. 그 사실을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런 오해를 받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론은 성경과 개혁신학이 기본적으로 에드워즈 신론의 중심이 되었고, 플라톤주의의 설명을 빌렸고 특별히 유대교에 나타난 신비주의 중에 까발리즘이라고 하는 12세기의 유대 성경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빌렸고 그 다음에 물리법칙에 대한 뉴턴적인 물리법칙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이고 기타자료를 보강을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계몽주의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당시에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사상, 그런 사상들과 몸부림치면서 싸운 이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나의 목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모든 목회에 철저하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회심 목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교회에만 나오면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접붙여져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만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하고 회심할 때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읽고 공부하면서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교회에 다녀도 예수 믿고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수많은 가르침을 들이 부어도 그 사람은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돌아가서 정직하게 여러분이 돌보는 영혼을 종이에 써 놓고 이 사람이 정말 구원받았을까를 표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잘 모르겠으면 한 번 만나서 물어보기 바랍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표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기도할 때 눈물이 나고,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고 싶고, 회개하고 싶고, 그런 표가 있는지 보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영적인 몸을 이루는 것이지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돌보는 영혼들이 정말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그것을 여러분이 심각하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설교 사역의 중요성입니다. 그래서 설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함으로 사람들이 올바르게 변화되어서 예배시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서 넓은 의미의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사역을 하면서도 하루에 13시간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도 않습니다.
세 번째 신앙교육의 중요성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설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려고 힘써야 합니다. 계속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치고, 어떻게 그 교리를 따라 살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노력을 설교자라면 다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약점인 무지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무지라고 하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여러분이 뜨거운 전도의 열정으로 많은 사람을 예수를 믿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한 곳에서 “여기에서 내가 목회를 하다 죽겠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찬찬히 가르쳐서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아프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기를 낳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영혼들이 살고 있습니다. 새벽에 열심히 기도하고, 낮에는 열심히 사역하고, 밤에는 열렬히 공부해야합니다. 남들이 먹을 때 자기는 기도하고, 남들이 놀 때 자기는 공부하고, 남들이 잘 때 자기는 열심히 독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 다 재워놓고 당신은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에 기도하지 않고 새벽과 밤에 기도했습니다. 낮에 기도하면 사람들 병도 못 고쳐 주고, 말씀도 못 가르쳐주고, 먹을 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새벽과 밤에 그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게 희생입니다. 7시간, 8시간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러가고 싶은 대로 놀러가고, 쉬고 싶은 대로 쉬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입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밭에 심어서 따다 갖고 가서 길거리에서 팔아서 돈을 벌려면 남들이 잘 때 여러분이 일을 해야 하고, 남들이 놀 때 여러분은 물건 팔러 나와야 합니다. 돈 버는 사람도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너무 게으른 것입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이 집중되어서 불꽃이 눈에 튀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뭔가를 해야겠다고 입술을 깨물면 여기가 찢어져서 피가 흐를 정도여야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렇게 하면 마지막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25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20년 동안 놀았다면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젊지만 나이 들면 기억력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열심을 내서 헌신하고 공부하다가 순교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배운 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며 신자의 삶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돕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삶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우리 교회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영상으로 5분 정도 보여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족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19살부터 시작해서 55세까지 쓴 모든 책들을 여러분이 한 번 쫙 훑어 봤습니다. 여러분이 기회가 있으면 에드워즈의 저작들 중 이론 중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든지,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든지, 아니면 정동론이라든지 무엇이든지 한 강좌를 가지고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틈나는 대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시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실력을 기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도록, 그래서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여러분은 에드워즈와 위대한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