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이 솔
I. 본문해설
저는 바울 신학에 새 관점하고는 관계가 없는 주제여서 제 마지막 시간에 별도로 뺐습니다. 저는 평생 목회도 하고 신학도 공부해오면 느끼게 된 점 하나가 우리의 가장 어려운 우리가 느끼는 현실적인 어려움 중에 하나는 어떻게 내가 공부하는 그런 신학을 우리의 삶으로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학 공부가 단지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슐라이마허 이전에 우리 개혁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혀 생소하게 느껴질 아름다움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강의를 들으시면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될 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대개 이런 순서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신학을 한다 그럴 때 신학이라는 의미를 아주 좁은 의미에서 보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직업적으로 사역을 하기 위해 받는 목회자 준비를 위한 교육 과정 그것이 신학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슐라이마허 이후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오히려 그 이전에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전 포괄적인 모든 삶의 행위가 신학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저의 표현입니다. 모든 인간은 신학인으로 태어나요. 그래서 심지어 무신론자가 신은 없다 라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아주 중요한 신학 행위에 속한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에 대한 견해가 자신의 삶에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리고 결국은 뒤집어 말하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추적해 들어가게 되면 결국은 거기는 신에 대한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신학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 자체 신학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말하자면 편협하고 그 다음에 지식 일변도로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고요한 의미에서 신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할 필요 가있는데 그게 뭐냐면 신학을 한다는 것이 뭐냐? 결국은 지식과 사랑의 결합이다.
그래서 그러면 이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렇게 지식이라는 것이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죠. 그 다음에 사랑에 결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개를 묶었을 때 이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이것이 이렇게 서로 세퍼레이트된 게 아니라 이것이 딱 통합된 상태에서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제 다트 엘로 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중요한지 호세아 4장을 보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언하실 정도로 이 지식 여기서 얘기하는 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거든요. 이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가를 가르쳐주니까 이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인간에 쉽게 얘기하면 지적인 어떤 정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상이 구약에서 나오고 그 하나님의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임무였고 자신이 그 지식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누구고 그 다음에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에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상이 신약에 와서 아주 중요한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크리스톨로지컬 컨버전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다트 엘로힘 사상은 그노시스 크리스투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사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인제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환치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갖는 유일하고도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뭐냐? 그러면 두 가지 인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그 다음에 모두수 오페라인데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속성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과 만나면서 특히 영혼을 가진 인간과 만나면서 관계를 맺으면서 이 관계를 맺는 당사자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이 현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의지할 곳이 없고 비참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불의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렇게 무지개 빛깔처럼 찬란한 빛으로 하나님의 속성이 게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한 인간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역사 속에 어떻게 전개되고 공의가 사회 속에 어떻게 실현이 되는가 하는 이 시행의 방식에 대한 그런 지식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이 인류 사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함양하는데 끼치는 영향력은 정말 큰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인 빛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빛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훨씬 더 시간이 길어지지만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위한 지성의 가장 중요한 자격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능력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런 것이 있기는 있지만 매우 희미해서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 충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핑계할 수 있을 정도보다는 더 뛰어나게 명료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를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드는 중생 그리고 회심과 연결을 짓습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신자에게 뉴 센스. 뉴 센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센스티브 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뭐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관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기 위한 가장 지성에 중요한 지식은 자격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학은 중생한 사람의 신학이지 비중생자의 고유한 의미에서는 비중생자는 충분히 신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움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경외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 무한한 격차에서 오는 그런 떨리는 두려움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이끌리는 사랑 결국은 도덕입니다. 도덕. 그래서 이 존재와 도덕의 격차를 인정하면서 인간이 한없이 하나님 앞에 비참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를 않고 그 하나님께로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 이것이 결국은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야레 사상입니다. 야레 사상.
그래서 이제 존 칼빈은 이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기치로 내걸었던 것이 뭐냐면 피에타 에뜨스케. 경건과 학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경건이 오고 이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거룩함에 영향력이 단지 지성이나 혹은 정서 혹은 의지만이 아니라 영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질서를 재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로서의 경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거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마음 안에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소위 얘기하는 제네바 아카데미에 문장 손 위에 이렇게 손 위에 이제 하트가 그려져 있는 문장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지식과 사랑을 신학 탐구에 있어서 하나로 결합되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던 전통은 이미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고 중세에 베르나르드수 같은 사람은 끌레르보의 베로나르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노띠띠아 에스트 아모르 라는 명제를 고집합니다. 뭐냐 하면 지식이 곧 사랑이다. 사랑이 아닌 지식 지식이 아닌 사랑은 참된 지식도 사랑도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제 히스베르투스 희랍어로 얘기하면 히스베르 휘치우스가 되고 라틴어 이름으로 하면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가 됩니다. 사람이 우트레이트 대학에 교수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가 이미 종교개혁의 영향이 쓰러지면서 이렇게 영적으로 기울고 있었을 때 그 사람이 영국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청교도 신학 그러니까 교리와 실천이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런 청교도 전통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람이 네덜란드에 와서 이런 아주 굉장히 중요한 운동을 펼칩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히 나델에 레포르마띠에 라고 하는 제2의 종교 개혁 운동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 후 학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나중에 독일의 경건 주위에 종자 씨들이 됩니다.
그러면서 중요하게 내세운 게 뭐냐 하면 신앙의 엄정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당시 프리시 지어니즘 이라고까지 합니다. 엄격주의 정도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실천에서 우리는 엄격함 만을 말하는데 이는 완전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교훈 일치하고 모든 신실한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온전히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엄정성을 요구하는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 엄정성에 근거고 또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엄정한 삶을 살게 하시는 유효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일하고 유일한 엄정함의 기준인데 거기서부터 그분의 양식 혹은 형상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온전한 신앙이라고 하는 원판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이러한 일치를 건너뛰고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서 대충 때워버린다면 이건 참된 신앙이 아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신앙에 있어서 지식과 사랑 혹은 지성과 윤리를 하나로 묶어야 된다고 강조한 운동들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영국에 메소디스트 운동입니다. 감리교라고 흔히 번역하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감리교가 아니라 메소디스트입니다. 영어에서 메도디에서 나오게 되는데 삶에 방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너무 유별났기 때문에 약간 비꼬는 쪼로 메소디스트들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위필드라든지 그다음에 존 웨슬레 라든지 찰스 웨슬레 라든지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따르고 구별된 삶을 강조하고 옥스포드에 홀리 클럽에서 추구하던 운동이었는데 두 가지를 단단히 묶어 주는 이 두 가지를 단단히 묶어 주는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개혁주의의 목회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지식과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고 두개를 하나로 묶는 전통이 있었고 이것이 인제 한편으로는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 이 두개의 바퀴를 움직이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여기에서 많은 목회의 결과물들과 신학적 결과물들을 생산해 내고 그것들을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이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뭐냐 하면 설교와 신학이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만 들어서는 이 사람이 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사람에 신학적인 입장이 매우 불분명해요. 그래서 설교 자체가 신학적인 논란의 대상이 안 됩니다. 심지어는 지금 같은 경우는 장로교 보수적인 장로교회의 목사의 설교나 뭐 감리교 왜 자유스러운 목사의 설교나 별 차이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니까 이건 인제 설교에 어떤 고유한 특성은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입니다. 개인을 거듭나게 하고 교화시키고 또 심지어는 불신자들에게도 참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소위 이야기하는 렐레반스입니다. 그런 연관성을 가지고 자신들이 믿는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서 그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 설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학함 이란 이렇게 지식과 경건이 함께 연결이 되고 그것이 목회에 적용되는 아니면 신자의 삶에 적용되는 이러한 통일적인 구조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개혁주의보다는 오히려 복음주의에 대해서 더 관심을 많이 갖잖아요. 복음주의도 사실은 알고 보면 아주 개혁주의에 가까운 그런 컨저버티브한 그런 복음주의부터 시작을 해서 이름만 복음주의지 사실은 복음에 본질과 가치를 심각하게 해서 훼손한 극단적인 자유주의적인 주장을 가진 복음주의까지 다양한 층차가 존재해요.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가 자기 책 속에서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는 불이 꺼진 등불과 같다. 그렇게 이름만 복음주의지 사실은 복음에 대한 참된 신앙을 버렸다 라고 개탄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음주의의 뿌리가 오직 개혁주의 하고만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견해에 의하면 종교 개혁자들과 그 다음에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그리고 18세기 이렇게 내려오면서 이게 복음주의가 됐는데 본래에 이렇게 유지하고 있던 이런 궤도를 어느 정도 이탈한 정도에 따라서 이런 복음주의에 층차가 나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역사를 이렇게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설명을 한다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는 이러한 사상 속에는 역사적인 개혁주의만 영향을 끼친게 아니라 이렇게 부흥주의라고 하는 이런 영향 특히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드 부흥 운동 후에 전개된 미국의 소위 이야기하는 부흥주의 리바이벌리즘 이라고 하는데 이건 결코 좋은 뜻이 아닙니다. 리바이벌은 부흥이지만 리바이벌리즘은 인위적인 방식으로 부흥을 추구하는 그런 인본주의와 기독교 종교적 열정주의가 가미된 것에 표현입니다.
이게 분명이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부흥주의적인 경향이 그러면 18세기부터 생겨났냐 그건 아니죠. 맨 처음 기독교가 생겨 난 이래로부터 이런 쪽에 치우친 이단들은 뭐 언제나 있었죠. 몬타누스 같은 몬타누스주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도나티즘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들이 언제나 있었고 또 그것들이 초대 교회의 교부시대 그 다음에 중세의 신비주의 신학 등등으로 이렇게 계보가 이어지지만 그것들은 간접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직접적으로 오늘날에 복음주의 영향을 주었다 얘기입니다. 그래서 인제 이런 부흥주의가 그러면 역사적으로 어땠느냐 이게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면으로는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주었고 근대 선교 운동에 이바지하고 부분적으로 사회 개혁에 공헌을 합니다. 그러나 인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지적해야 될 중요한 점이 이런 부흥주의가 가져온 심각한 폐해 중 하나가 목회자 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인 말하자면 경향을 교회 역사에 본격적으로 도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지성적인 전통을 무시하면서 그러면서 새로운 기독교의 경향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깊은 뿌리들을 잘 모르고 또 그것을 우리들이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는 이 기독교의 형태가 가장 고유한 형태에 가깝고 약간에 문제들이 가미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훨씬 더 심각한 이탈을 우리들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크노래에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든가 데이비드 웰스에 4부작 시리즈 같은 것들은 이런 문제들을 우리에게 아주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는 저작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여기에 보면 여러분들이 보기에도 좀 이상해진 것입니다. 여기 지금 이렇게 숲속이네요. 많은 사람들이 어두우니까 그렇겠지만 불을 환하게 켜 놓고 뭐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설교를 듣는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평범한 설교자가 아닌 새로운 제스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 장면이 보여요. 이게 18세기 말에 일어났던 켄터키 지방에 부흥의 광경을 판화로 담은 것입니다. 이때 이제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게 됩니다. 사실은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드에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때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래도 신학적으로 통제를 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 사후에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잘못된 운동으로 변질이 되고 그의 후계자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유니테리안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놀라운 자유 원더풀 프리덤을 주장하면서 이게 뭐냐 하면 신학교를 만들고 거기에 학제를 세우고 차근차근히 공부를 하고 이렇게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은 이것은 성령이 없던 시대에나 이렇게 하는 것이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주어지면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래서 이런 것 필요 없다. 누구든지 성령 받으면 설교할 수 있고 심지어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의 자격을 가졌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회심한 징표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쫓아내야 된다. 이런 주장까지 조지 위필드가 유포하게 됩니다.
신학적인 약간의 부주의함이었다고 우리들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안 머레이가 이제 이런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뭐냐 하면 더 나아가 그들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보고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 두는 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왜요? 누구든지 말씀 임한 사람은 설교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결국은 전통적인 직위와 직무들은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하기를 주장하고 그리고 기독교 목회 사역을 공격하는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이 훨씬 더 발언할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다. 이러면서 이제 신학 교육의 어떤 전통적인 강조점들이 희석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들이 이제 19세기에 와서는 무디의 부흥 운동 같은 것으로 더 심화되고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극단적인 은사 중심적이고 그런 체험 중심적인 종교로 변하면서 이 기독교는 이런 유구한 지적인 전통들과 상당히 많은 부분 결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그런 사주들도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이 17세 후반부터 이제 이성주의에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에서 심화된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제 낭만주의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시대를 구분하자면 예전에는 중세시대에는 신이 중요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인간이 중요하게 되고 계몽주의 이후에 극단적인 이성주의 시대에는 이성이 중요하게 되고 낭만주의와선 인간의 감정이 그러다가 이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유주의로 넘어 오게 되고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 하는 걸 깨닫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 마음 속에서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면서 그러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나 이런 내적인 말하자면 심리들에 오히려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런 외적인 기준들이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위 이야기하는 릴레이티비즘 상대주의에 대두입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의 발전들 그리고 20세기 초 옆에 일어나는 닐스 보어 같은 사람에 의한 양자 역학에 새로운 탐구와 그 다음에 가설들의 확립 그 사람의 양자 역학에 가설들은 아직까지도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죠. 그래서 그런 양자 역학에 도움이 없으면 스캐너나 그 다음에 자기 부상 열차나 이런 거 이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거 이제 그 다음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말하자면 증명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과연 절대적인 자연의 법칙도 각기 일반 세계냐 초거시 세계냐 미시 세계냐 미시 세계는 서브 아톰 월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원자 이하의 분자 이하의 원자 이하에서 일어나는 새 물리의 법칙들이 각각 다르다면 결국 우리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들도 관습이나 혹은 선입견 혹은 어떤 기득권층에 강요에 의해서 아주 정교한 스킴에 의해서 세워진 전통이 아니겠느냐는 회의를 가져오면서 이제 그런 도덕 기준에 대해서 부인하는 것이 모든 철학 그 다음에 역사, 문학, 그리고 심지어 미학, 건축학 심지어 요리에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학에까지 루이스 드라이버 같은 사람에 소위 이야기하는 수학 직관주의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수학조차도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그런 논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봇물처럼 상대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인간이 처음에 신을 끌어내리고 이성을 등극시켰는데 이성을 끌어내리고 감정을 그걸 끌어내리고 그 다음에 등극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의 심리 현상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이나 왜 인간이 억압 받는 도덕의 기준이 있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이 생기는 거야. 이러한 가치 상실적인 그런 분위기들이 사실은 이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번성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역사 해석입니다.
그래서인지 에드워즈는 주관적인 충동에 대해서 주관적인 충동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은 그걸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결국은 서로 신학적인 견해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인제 조지 마스터는 아마 우리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드 최고의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죠. 위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꾸짖었을 때 그 순회 설교자는 확신하지 못한 채 냉정하게 주제를 무시했다. 두 복음 전도자는 협력자로 남았지만 가까이 사역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 인생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친 위대한 멘토 중에 하나인데 난 여러분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그래도 한 3년 정도는 심해 본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충분히 좋은 보상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무조건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말이 많은 사람들한테 내가 얘기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럼 어떻게 채집하느냐?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당신의 아름다움에 흔적을 남겨 두셨어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 정도가 모두 똑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인간이 맨 처음 타락하기 전에 원의 상태에 있었을 때에 그 소위 이야기는 센스 어브 뷰티 미감 능력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서 객관적으로도 자연히 자연과 이 세계가 훼손이 됐고 그걸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도 그것이 훼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림을 그리려면 이런 식으로 아름다움을 주어요.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퍼져 나올수록 아름다움의 정도가 작은 것이고 올라갈수록 깊은 거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양심까지 펼쳐져요. 여기 이런 것들이 가장 아주 포머스트하게 모여 있는 이 직접들이 성경입니다. 성경. 그래서 성경을 뭐라고 말할 수 있냐 하면 하나님에 아름다움의 엑기스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느냐? 결국 우리들이 보는 아름다움을 계속 추적해 가면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들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엑기스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성경이 구속 사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 사역이 뭐냐 하면 타락한 인간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잖아요. 이렇게. 구원하시는데 그것이 역사 속에서 전개가 됩니다. 이렇게. 전개가 되는데 타락한 인간이라는 이 현실 이것이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계속 반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 대적하고 막 이렇게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미처 현시되지 않았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아주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이 세상의 계기가 되는 거야. 웬 단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눈빛이네. 그래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극단적으로 찬란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그게 바로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주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급히 해야 될 것은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속 사역에 아름다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정수 중에 정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통해서 성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일반 학문으로 그리고 일반 학문을 지나서 예술과 그 다음에 미술, 음악, 예술 그리고 펼쳐지는 모든 학문의 세계들이 하나님의 다 아름다움으로 수렴이 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결국은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있는 자 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쑨마에쎄 라고 하죠. 최고 유 최고 유 이셨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그 최고의 유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니까 만들어진 모든 사물들에 대한 원관념은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국은 아름다움도 그렇게 하나님 속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그냥 개별적으로 흩어져 존재하던 모든 사물들을 그렇게 그물망처럼 엮어서 어떻게 그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이 세계 속에 들어 내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보여주기 위한 학습이 신학입니다.
자 여기까지 설명한 것을 아주 명료하게 그림으로 그렸는데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있습니다. 이 구속 사역들이 성경 속에 펼쳐져요. 그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봐요. 직관합니다. 보면서 하나의 구속 사건 속에서 그 밑에 구속 사건 이 자체가 여기에 아까 말씀 드린 모두스 오페라인데 예요. 하나님의 속성이 시인된다는 방식이예요. 그러면 그것을 추적해 내려가면 여기서 A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적해 나가면 B라는 하나님의 성품 보이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처럼 찬란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결과가 결국은 뭐냐면 러브 혹은 아모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기에 가장 큰 좋은 인간의 내면의 환경은 하나님과 뜨겁게 연애하는 지성입니다. 여러분 연애해봤죠? 물론 여기에는 못해보신 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애도를 표해요.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수많은 언어가 가슴 속에서 막 폭포수처럼 막 솟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글로 옮길 수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 문제고 어쨌든 솟아져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게 안 올라오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를 애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동사무소 직원을 만나는 것입니다. 언어가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아름다움을 인식하면서 수많은 언어들이 솟아오르면서 이게 신학적인 활동이 말하자면 불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솟아오르는 감정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의 진료 거든요. 이 진료를 어떤 신학을 가지고 형성할 수 없을 때 그 때 이것은 그냥 종교적인 체험 속에서 돌다가 그냥 쓰레기처럼 소진되어 버리거나 혹은 에너지처럼 고갈되어 버리거는 타버린 제가 되거나 그렇게 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부한 결론이 중요한 내용이 뭐냐면 하나님을 열애 하는 지성 그것이 가장 좋은 마음의 환경이다.
한 5년 되었나요? 제가 그랜 래피즈에 갔을 때 조나단 에즈워드에 한참 쉼 취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일 대학에서 나온 스물 일곱 권으로 된 판본이 있습니다. 만팔천 페이지 만칠천 이지 이상되는 그런 불량인데 하여튼 너무 쉼취했어요. 아마 제 생각에는 게으른 때도 있었고 열심이 읽었는데도 있었지만 어쨌든 한 20년에 집중적으로 말하면 15년 정도에 걸쳐서 한 3권 도 설교집 빼놓고는 거의 모든 책을 정독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에드워즈에 대해서 항상 가슴 벅찬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다리를 놔서 이 분을 만났어요. 그래서 강가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에드워드에 대해서 진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분이 60프로 정도 말씀하시고 내가 40프로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된 중요한 결론이 뭐냐면 목회의 본질은 목회의 본질은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아름다움이 사랑에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아름다움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여러분 어떤 자매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프로포즈를 못 받는데 어떤 사람은 한 열사람이 대쉬를 해요. 이유가 뭐 때문일까요? 신앙이 깊어서? 그 자매가 기도를 많이 해서? 아닙니다. 뭐 때문일까요? 돈이 많아서? 아니면 건강해서? 아닙니다. 왜요? 예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게 뭐냐? 예쁜 것은 사랑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하나님에게 대입시켜 보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인 설교와 가르침만 아니라 생활과 모든 태도 모든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 주고 그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에 따르면 전도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마 한국 교회의 영향을 많이 끼친 설교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분이 설교를 무엇이냐고 정의할 때 로직 오브 파이어 불 붙은 논리다 여기에서 로직은 신학입니다. 지식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고 파이어는 경험과 그 다음에 신령한 요소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콘트 리즌 요건 신학입니다 이야기하는 희랍어로 로고스가 되는 것입니다. 요건 뭘까요? 요건 파도스나 에토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가 결합이 된 상태에서 우리들이 습득하고 살아가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의 소명을 한번 받으면 자동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 소명을 유지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거룩한 의무에 묶어야 된다. 그렇게 마음을 거룩한 의무에 묶는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은혜로운 묶어져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아 가는 비결이다.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신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심미할 수 없고 그 다음에 사랑 심미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면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한다고 할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야 됩니다. 목회를 위해 필요한 지식인데 이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면 여기 신학자들이 계신데 이렇게 말씀 드리면 안되지만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온 순서가 설교의 순서가 아닙니다. 동의하죠? 왜 말이 없어요. 동의하죠? 그렇다고 공부를 안한 것이 설교를 잘하는 순서냐 라고 할 때 우리는 더더욱 동요하면 안됩니다. 왜냐면 그렇게 말하면 용기를 가질 사람이 우리 중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린 그런 용기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그래서 신학을 지금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이렇게 신학이 너무나 세분화되어 가지고 이렇게 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는 데는 상당히 도움을 주었는데 이걸 모두 통합해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통합의 능력을 통합하는 일을 아무 분과에서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 신학에서도 안하고 멀로 교수님 얘기예요. 리차드 멀로 교수님. 조직 신학에서도 안하고 그리고 역사 신학에서도 안하고 신약에서도 안하고 그러면 누가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들은 실천 신학에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요. 그런데 실천 신학자들의 관심은 또 따로 있습니다. 이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지식은 그렇게 세부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오늘 우리 김 박사님 바울 신학의 관점을 강의를 들으면서 참 많이 은혜를 받았거든요. 저런 분의 이런 종류의 지식은 전쟁으로 이야기하자면 첨단 무기입니다. 첨단 무기. 그런데 나라가 명운을 걸고 싸울 때에는 첨단 무기가 필요하지만 이북에서 뭐 그저 뭐 너댓 명 열댓 명 아니면 이삼십 명 일이백 명 휴전선을 넘나드는데 우리가 한발에 150억 200억 하는 사드를 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걸 다 살려면 쪼그만 나라는 도저히 역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그만 나라라고 칠 때 저걸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구입하려면 에버딘에 가서 또 한 5년 내지 10년 고생을 해야 된다 이거야. 첨단 무기만 가져오고 소총이 없으면 그게 전쟁이 되겠어요? 우리는 사드가 있으니까 니네가 뭘 가져와도 가만 안 두겠다. 공비 하나가 넘어오는데 사드를 쏠 거냐 이거야. 그래서 저런 분들의 지식들은 한국 교회가 계속 투자를 해서 미래를 위해서 쫙 비치해 놓는 거야 최신무기를. 그래서 뭐 까부는 놈들이 나타날 때에는 스위치를 눌러서 첨단 무기를 발사하는 거야. 모든 사람이 저런 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발언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덜해도 되는구나 하는 격려를 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뭐냐 하면 이렇게 이피 샌더스 하나만을 깊게 파서 20년쯤 공부해 가지고 세계적인 논문을 쓰는 이런 종류의 지식이 목회는 별로 필요 하지 않다. 무슨 얘기냐면 그런 지식만을 가지고 목회를 모두 커버할 수가 없다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이해되시죠? 신학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뭐냐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한것입니다. 거기에서 삶의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이제 우리 공부는 맨 처음에 이런 원리를 취해요. 여기 바이블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 자체에 대해서 먼저 공부를 하고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공부 중에 하나가 성경 원어에 대한 공부예요. 그럼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여기에서 출발을 해서 신학을 도는 것입니다. 신학에 여러 가지 조직 신학부터 시작해서 많은 신학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더 도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돌면서 이제 신학 그 다음에 여기에 철학, 인문학, 역사, 예술, 문화, 법학 등등등 펼쳐 나가면서 다시 이것이 무엇으로 가든지 항상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해서 그것들을 심지어 법학까지도 해석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법의 연원이라든지 오늘날의 법이 법일 수 있는 근거를 묻는 법철학에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신학을 올바르게 공부를 하면서 이 지식들을 통합해 나가는 것이 목회를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지식들이 되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다가 보면 결국은 자신이 시간은 한정 돼 있고 얼마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 지성사에 도도한 물길 속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만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에서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뭘 좀 알았다고 껍죽거리지 말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올드 아이 노 이스 댓 아이 노 낫씽. 이걸 고백을 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을 채찍질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이일약불능십보 노마십가즉역급지의 공재불사. 여기서 기이 라고 하는 것은 천리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리마가 한번을 뛴다 할지라도 열 발자국을 갈 수 없고 노마 이건 아주 우둔한 말이예요. 우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치게 될 것이니 일에 성과는 그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데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될게 우리는 기이가 아닙니다. 노마입니다. 기이 천리마가 아니라 우둔한 말입니다. 그래서 우둔한 사람이 이기는 길은 뭐냐 하면 남이 잘 때 안 자고 먹을 때 덜 먹고 놀 때 덜 놀고 쉴 때 덜 쉬어서라도 그것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채직질을 해야 된다. 어거스틴이 누구예요. 고백록입니다.
저는 교만한 마음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책을 읽으면서 특히 신학을 공부한 이래로 책을 읽다가 야 이 사람은 진짜 천재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존경하는 존 오엔 까지도 탁월한 분 이시다 라고 생각했지 천재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러다가 어거스틴을 만났어요. 이 사람의 책을 2권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위대한 지성 앞에 고개를 숙였어요. 그리고 고백했어요.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그리고 6개월 동안을 때로는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거스틴은 누구고 김남준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천재성을 주셔서 이런 책을 쓰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왜 이렇게 편애하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건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응답이 오기를 네 은혜가 족하다. 아멘. 포기했어요.
그리고 위로를 받은 것은 어거스틴이 컴패션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학문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 하나 가르쳐준 사람이 없이 그 뛰어난 철학자들의 글과 모든 서적들을 읽어냈고 나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 중에 아주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겨우겨우 내 설명을 알아들었습니다.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은 생각해보세요. 무슨 뜻이냐면 읽어도 끝까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감사한 마음을 갖자 그런 생각을 가졌다 얘기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이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공부를 해 나가는 한 과정은 이 중에 일부이지 이게 전부가 아니라 이거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영원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요. 그렇지만 그래서 결국은 영원을 안다는 것과 사랑을 안다는 것은 완벽하게 동의어예요. 다시 말씀드릴께요.. 아 영원을 안다는 것과 사랑을 안다는 것은 완벽한 동의어예요. 사랑을 통해서만 영원을 아는 거야. 인간의 지성으로는 영원을 알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습니다. 전혀 다른 것으로 영혼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이제 육체의 아름다움 밖에 모르는 사람은 육체와 세상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하고 탐미의 정신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도하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마다 자기가 얼마나 추루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배우고 그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존재로서 보여줍니다. 이게 어떻게 말하면 존재의 아우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목회란 추루하게 된 것 그리고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별해서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대적하는 마음만 품게 하지 않고 본래의 선한 것들로 회복되도록 그렇게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신학함에 있어서 신앙이 매우 중요한 열렬한 신앙을 갖는 것 이게 하나님을 향한 열애라고 제가 묘사했지만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고 삶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듭니다. 믿음에 의존해야 하나님 알기를 원하는 구도자로 서는 것 이것이 신학함에 요체입니다.
구도자라는 표현을 가지고 누가 나를 막 비난을 했는데 앞뒤에 분명히 이 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데 이 도는 불교의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도라고 자꾸 트집을 잡습니다. 그래서 한국말을 끝까지 읽어 보고 그리고 생각을 해야지. 구도자입니다. 도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신학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다. 성경 신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수학 심지어는 수학까지 이런 것들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실적 질서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 이렇게 전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을 전달하고 또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고 그 지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말과 신앙 그리고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다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구절을 읽읍시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내신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