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집회1
녹취자: 서재임, 문미경, 임종찬
제가 몇 해 전에 ‘글로벌 세계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강의를 한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때 들으셨던 분들은 오늘 강의가 훨씬 친근하게 다가오시리라고 믿고 혹시 그러지 못하진 분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관심을 잘 안가지고 살고 있는 사상계 안에서 그리고 현대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한편 살펴보면 그러면 우리에게 좋은 도전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화)현재의 세계에 있는 인간이 만든 배 중 가장 큰 배는 67만 톤가량 되는 배가 있고, 일본에서 만들었습니다. 그 배의 경우에는 길이가 약 400m쯤 되고, 크기가 축구장 3개 반 정도 보다 훨씬 크다고 하니까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입니다. 자, 그런 벌크 선으로 된 배를 탄다면 위에는 평평해서 엄청나게 넓은 배 간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미션이 무엇이냐면, 북쪽으로 가라는 미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침반을 들고 북쪽을 확인을 하고 종일 갑판위에서 북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 미션에 매우 충실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67만 톤짜리 거대한 배가 남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록. 그러면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갑판위에서 북쪽으로 가라는 미션을 받고 자기는 최선을 다해 북쪽을 향해 걸었지만, 그것은 사실은 미션에서 실패한 것 입니다. 배 자체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선교로 목회로 사회활동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 사역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이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고 이 시대의 정신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세상의 시류 속에 진실하게 사역을 하면서도 그 시류 속에 같이 내려가게 됩니다.
(예화)제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느 학생이 리포트를 냈습니다. 자기 친구를 만난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주의에 관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맨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예수님이 나를 고치시려고 바꾸시려고 굉장히 애를 쓰셨는데 그래서 내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하나님 도와달라고 자기가 항상 기도를 했더니, 요새는 하나님이 자기를 고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긴 그대로 살도록 나에게 적응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그것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학적으로 정의가 되었으니까 웃겠지만, 그 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듣는 오늘날의 시대는 상대주의 relativism의 시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현대는 이런 상대주의에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도대체 상대주의란 무엇이냐? 저는 오늘 강의를 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3시간 반 분량의 강의입니다. 너무 길게 하면 밥 한 끼 먹고 너무 진을 빼니까 최대한 빨리, 저도 굉장히 힘들게 왔습니다. 그래서 짧게 하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선 현대 정신과 상대주의 문제를 살펴보고, 다음에 삶의 지혜로서의 기독교의 절대성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리고 크게 세 번째 파트에 가서 현대사회와 교회의 사명을 어떻게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겠는가 라는 순서로 강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소위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relativism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라고 보는 것이 상대주의입니다. 상대주의라고 하는 기본적인 것은 어떠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라고 하는 그리스의 철학자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 프로타고라스가 활동하는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2700년 전 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아주 획기적인 삼단요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2700년 후에 어떻게 인류의 역사가 전개될 것인지 하는 하나의 예고편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 역사를 보면 그리스는 인류의 문명의 4대 발상지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의 역사를 우리들이 찬찬히 공부하는 것은 인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또 기독교 사상이 어차피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라고 여겨집니다. 알다시피, 그리스 문명은 미케네문명에서 시작이 되었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에게문명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에게문명의 종자 씨가 된 것은 놀랍게도 이집트 문화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냐면, 이집트 사람들이 학문을 통해서 그 많은 물건들이 들어오고 여기에서 모인 많은 사람들이 크레타섬과 에게해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이 되고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대의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여행하며 사업을 하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집트에서는 어마어마한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집트를 처음 갔다 왔는데 여러 가지 많은 충격이 있었지만, 그 중에 충격하나가 왕실에서 입던 속옷을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겁니다. 썩지 않고 아주 건조하니까 파피루스들과 함께 남아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잠자리 날개 같은 내복입니다. 그런 옷은 현대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손으로 그것도 직물을 짜서 잠자리 날개처럼 만들어서 귀부인들이 속옷, 우리로 말하면 란제리로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까지 있습니다. 그렇게 아주 발달한 문명입니다. 화장하는 것도 역사가들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주전 5000년경부터 인간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고급 메이크업이 없으니까 진흙과 숯 그런 것을 가지고 발라서 사람들을 예쁘게 보이게 하고, 영어로 화장품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커스매틱스 cosmatics라고 합니다. 커스매틱스 cosmatics가 히랍어 코스모스 cosmos에서 나온 것입니다. 히랍어 코스모스 cosmos는 질서, 우주입니다. 그래서 화장품의 용도는 무엇이냐 하면 질서를 상실한 얼굴을 마치 질서가 있는 것처럼 위장시켜서 보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안 하고 다니는 사람의 얼굴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내 얼굴에 무슨 질서가 더 필요하랴, 이것은 얼굴 자신형입니다. 그다음에 이왕 배린 몸, 이 두 가지 메시지입니다. 그까짓 질서를 더한들 뭐가 달라지랴, 그래서 화장을 안하신분들은 극도로 교만하거나 극도로 미천하거나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질서를 잡아라 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어쨌든 엄청난 절대 왕실 속에서 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고도의 전문성을 지난 장인들 층을 만들어서 물건들을 파는 것 입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이제 장사를 하러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른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할 때, 브로커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장사에 아주 능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 절대 국가는 대부분 농경이나 가축을 하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농사가 잘 안되든지 홍수가 나고 그러면 신이 진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고 중심이 하늘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백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먹여주는 것은 신이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먹여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관심을 사람에게 두는 것 입니다. 관상을 보는 법도 배우고 물건을 안 살려하는 것을 어떻게 마음을 돌려서 사게 하는가, 여기서 싸게 사다가 어떻게 확 비싸게 팔 것 인가를 이런 것을 연구하니까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냐면 사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량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아주 발달하고 장사 기술들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로는 이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든 4대문명의 발상들이 메소포타미아, 중국황하, 이집트 모두 다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하늘 중심적이고 신 중심적이고 인간은 겨우 신에 의한 꼭두각시내지는 시중들다가 평생 죽는 그런 존재밖에 안된다고 보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프로타고라스처럼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주장까지 나온 것, 그래서 인류역사의 매우 초기부터 이렇게 가치관이나 세계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이분법으로 주어지는 것 입니다. 신 중심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인간중심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방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주의 적인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을 보면, 다 사람 얼굴을 하고 있고, 친근한 신입니다. 신들끼리도 그렇게 가까이 하기에 먼 신이 아니라 이혼하고 바람을 피우고, 고자질하고 울고 웃고 배반당하고 그런 신들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그리스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리스 신화이고 이 신화가 그대로 가서 복잡하게 된 것이 로마신화입니다. 세계관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은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나 가치가 어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그것이 바로 상대주의입니다. 이 상대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상대주의적인 생각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들어오게 되었느냐 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서구 구라파는 기독교 역사가 지배를 했기 때문에 기독교사상사가 곧 당시의 철학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중세에 과연 철학이 있었느냐 라는 논쟁이 치열하게 있었지만, 적어도 1900년대 초기까지 만해도 중세에는 철학이 없었다, 그리고 신학만 있었다 라는 주장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에띠엔느 질송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1900년대 초에 아주 유명한 논문 하나를 발표합니다. 프랑스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대학에서 데카르트를 전공을 했고, 근대 철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 데카르트의 어마어마한 발상의 전환, 그래서 철학계에서는 데카르트를 기준으로해서 철학사가 중세철학사와 근세 철학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62년을 기점으로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으로 구분이 되어지게 되는데, 현대 철학의 주도권은 대개 프랑스 철학자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사람의 획기적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판단의 논거를 인간에게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라고 하는 단어는 그냥 thinking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그러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의심을 하면서 정밀한 이성의 논증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회의적으로 보고 부인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회의하고 있는 나 자신, 이것만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Cogito ergo sum의 라틴어 명제가 나옵니다. 이 명제는 사실은 데카르트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미 데카르트 이전에 데카르트보다 한 13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위대한 교부가 자기의 책속에서 Si enim fallor, sum이라는 명제를 발표합니다. 만약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오류라고 할지라도 내가 오류에 빠졌다는 그 사실에는 오류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라는 명제를 밝힘으로써, 소위 얘기하는 아카데미 코스라고 하는 당시의 회의주의라고 하는 이 회의주의자들은 이제 그 프로티누스에서 비롯되는 회의주자들인데, 이 회의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불가지론에 대해서 답을 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독교 역사가 계속 오는데 이제 에때엔느 질송이라는 사람이, 그렇지 않고 이 위대한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데카르트의 획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은 중세말기의 기독교속에 있었던 사상에 뿌리에 의해서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는 4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학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테제가 무너지고 에때엔느 질송의 테제들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실제로 오늘날 철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이러한 역사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옛날에 이미 철학계에서 다 버린 테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고, 어쨌든 학문적으로 본다면 에때엔느 질송에 의해서 이 테제들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앙리 베르그송과 장 폴 사르트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좀 더 옛날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연결을 시키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계속 있었고, 이미 모든 보편교회의 사상들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집적하기를 시도했던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12세기 때 사람인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기독교에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던 이 기독교의 사상들을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근간으로 해서 이성적으로 완벽한 하나의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시도들을 합니다. 그 시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Summa Theologiae 신학대전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위대한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십자군 전쟁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 국가들이 총 궐기를 해서 이슬람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한 번만 이기고 나머지는 다 지게 됩니다. 9번의 전쟁을, 그것 때문에 이제 초토화되는데, 그때에 기독교권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냐면, 우리는 진리의 빛 안에서 살고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저 사라센제국, 이슬람 제국은 짐승 같은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진리의 빛으로 저들을 교화해야 한다고 배운 것 입니다. 그래서 이제 돌격하고 들어갑니다. 9세기, 10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보니까 충격을 받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학문도 너무 놀라워서 유럽에 있는 대학들은 전부다 기껏해야 12세기, 13세기에 대학이 시작이 됩니다. 근데 여기는 이슬람 쪽에는 훨씬 이전에 대학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 대학의 역사가 가능했던 것은 아주 심하게 이야기를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언제 받아들여졌느냐에 의해서 대학 시립의 시기가 결정 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5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의 사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전개해서 그것의 체계를 잡고 지식들을 구체화하여 집적하는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 냅니다. 논리학, 형이상학, 신학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수사학도 나오고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 때까지 있었던 모든 학문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모여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종합이 되어서 쫙 펼쳐지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몇 개라도 읽어보면, 스승인 플라톤과는 매우 대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우리 기독교하고 사고방식이 너무 비슷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pre-evangelic프리이벤져리스 다시 말해서 복음이전에 준비된 사역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그렇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일치를 이루는 전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상들은 그가 쓴 여러 가지 폴리테리아라고 하는 이상국가라고 하는 여러 가지 책 속에 잘 나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을 받아들인 것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고, 너무 이성주의적이고, 그리고 플라톤과 갈등을 일으킨다라고 보고 플라톤을 남겨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고 불경건하다고 해가지고 싹 없애버립니다. 기독교권에서 사라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센제국에서 보존이 됩니다. 이 사람들이 와가지고 기독교 땅을 점령하고 나가지고 뒤져보니까 놀라운 진리의 학문의 체계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지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이것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베로에스, 특히 아비첸나 이런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이슬람 신학 안에서 어떻게 신과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할 것인지 하는 것을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놀라운 학문의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이냐 이성이냐 라는 것을 가지고 계속 갈등을 하면서 교회가 성장해 갔듯이 거기에도 알가잘리파 같은 신앙 중심파, 이성 중심파가 있어서,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투쟁을 하고 갈등을 하면서 이슬람 역사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그 자료들이 이슬람 국가를 통해서 수입돼 들어오면서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에게 있는 학문의 체계들이 얼마나 정리가 되지 않았는가를 깨닫게 되면서 이제 흡수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체계들을 이슬람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이슬람 철학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생겨나게 된 기독교학문의 형태를 스콜라티시즘 scholasticism, 스콜라주의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스콜라라고하는 말은 히랍어의 스콜레 schole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히랍어의 스콜레 schole에서 영어의 스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스콜레 schole가 무슨 뜻이냐면, 할 일없는 한가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학교는 할 일 없고, 한가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벌어먹느라고 땅을 파고 고달픈 민초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스콜레한 상태에서 오늘 학교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스콜라티시즘scholasticism이라고 하는 사조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여기서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간략하게 얘기하면은 스콜라주의라고하면은 이것을 권세주의라고도 번역하는데, 이것은 엄격한 논증의 방식, 원인과 결과, 질문과 대답, 이런 논리의 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상세화의 방법을 가리켜서 스콜라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스콜라주의라는 말자체가 어떤 학문의 결정적인 한 형태가 아니라, 학문을 하는 방법론 중의 하나가 스콜라주의입니다. 이런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을 가지고 최고의 금자탑을 세운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번역된 책으로 따지면 60권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엄청난 분량의 지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또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쨌든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게 12세까지 집행을 하다가 13세기에 와서 굉장히 커다란 기독교 역사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그 소용돌이가 뭐냐 하면 교회가 극도로 부패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엄청난 반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제도권의 교회가 아닙니다. 제야에서 엄청난 반성이 일어나게 되면서 과연 우리 기독교신앙에서 철저하고 상세한 학문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예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나와 있는 대로 청빈한 삶을 살면서 예수를 따라야 되겠다는 실천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실천적인 운동은 당연히 상당부분, 이 스콜라주의의 거대한 학문의 체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반감들을 가지고 있는, 그러나 전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문들이 수도원을 통해서 계속 유지가 되어왔고, 수도원의 학문이 대학보다는 초기에 훨씬 더 높습니다. 그래서 대학들을 캠브리지 대학 등을 모두 수도원에서 세웁니다. 그렇게 아주 놀라운 학문의 세계들이 수도원을 통해서 전승됩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카톨릭 안에 있었던,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때에 일어난 사람들이 수많은 수도사들, 프란시스코, 도미니코, 닥발 수도사 운동이라든지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개혁운동이 실패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개혁운동이 카톨릭 안에서 성공을 했더라면 종료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고 그러고 나서 13세기 이후 내려오면서부터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사상계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실재론實在論, 유명론唯名論 논쟁입니다. 실재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세계는 모두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러기 때문에 진짜 실재를 저 하늘나라에 혹은 위대한 이데아의 세계 속에 있고,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에 속지 않고 여기에 현옥되지 않는 것만이 눈에 보이는 실재를 넘어서는 정말 존재하는 실재 reality, 레알리따스 혹은 이데아를 발견하는 길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초월적으로 인간의 논리의 구조, 인과관계의 모든 고리들을 뛰어넘는 그런 무엇인가 직관적인 것들을 통해서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런 직관을 얻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것이 실재론입니다. 기독교 실재론입니다. 그런데 유명론은 그게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어차피 알 수 없는 거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들을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서 그것이 무엇인가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유명론입니다. 아까 얘기한 실재론은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이고 지금 얘기하는 유명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방식, 그러면서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계의 큰 사상이 대립을 하게 되는데 실재론, 관념론적 실재론, 유명론이 대립을 하면서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충격이. 그러면서 쉽게 얘기하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은 여기에 있고, 모든 사유의 중심은 하나님이고 가치와 존재의 중심도 하나님이고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존재들은 그 영원한 존재를 덕(德)입어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이 모든 구도들에 중대한 변혁, 파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파열 속에서 윌리암 옥캄, 쿠자의 니콜라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등장을 하게 되면서, 기존에 내려왔던 실재론적이고 존재론적 중심적인 사유의 체계에, 인식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티브들이 그들이 첫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에 늘 있었던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봇물처럼 쏟아져 내려오면서 14세기에 와서 둑이 터지듯이 어마어마한 조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입니다. 남부 지방 쪽에서는 예술, 회화, 조각 이런 것들을 통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예술운동을 통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르네상스는 rinascimento인데 ri는 '다시'이고 nascimento는 ‘태어나다nasco’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재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뭐가 재탄생하는 것이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누구라고 보느냐 라고 하는 인식이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재탄생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언젠가 원래 있었던 nascimento가 뭐냐 그것이 가장 근접한 것이 그리스사람들이 폴리스시대 때 인간이 누군가를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 그곳으로 돌아간다라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얘기하면 너무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대단히 원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짧은 학문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계시 없이 일반계시 속에서 살던 인간의 역사 가운데는 가장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한다고 믿고 그것을 사회 속에서 실천했던 사람들이 그리스시대 사람들입니다. 그 그리스시대라고 하는 것은 폴리스 시대의 그리스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마케도니아가 나와서 제국을 만듭니다. 거기서부터 이게 많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제국이 알렉산더가 죽고 나서 몇 조가리가 나고 로마로 넘어가고 나서는 이런 정신들이 제국의 통치라고 하는 거대한 통치의 구조 속에 필터링 되어서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 것은 다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면면한 사상들이 근대시민혁명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런 운동들이 르네상스에 일어납니다. 빨리빨리 넘어가겠습니다.
북쪽 이탈리아에서는 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미켈란젤로, 보카치오, 단테라든지 이런 사람들에 의한 피렌체 운동들 말고 위쪽에서는 그런 운동들이 학문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인문주의가 이루어집니다. 인문주의의 핵심이 뭐냐 하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사상이 광범위하게 유럽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14, 15세기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그 사상이 무르익으면서 엄청난 사건이 폭발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종교 개혁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상사적으로 결국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 인문주의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기본적인 골격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을 하려고 했던 기독교 인문주의가 있었고, 아예 기독교와 단절하려고 애를 쓰면서 인문주의를 구축해가려고 했던 인문주의가 있었고, 후자를 가리켜서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릅니다. 그 기독교적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마르틴 루터, 칼빈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때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날 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눈 뜨게 되던 중요한 교부학적 가치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까지 역사가 흘러내려오면서 카톨릭에 의해서 중세에 장악되었던 인간과 교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생각하다가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 그 가치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발견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저작들을 통해서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재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카톨릭에 의해서 중세에 장악되었던 인간과 교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생각하다가 기독교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 그 가치를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발견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저작들을 통해서 성경에 나온 인간의 재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발견하게 되면서 소위 임마고데이(imago dei)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새로운 논의들이 이뤄지면서 인간가치에 대한 재발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거나 소외된 그런 인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의 성경과 교구들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그 키를 가르쳐주었는데 이것들이 잘못 가르쳐지면서 사실은 왜곡된 인간에 대한 인식들을 중세 속에서 펼쳐져 왔고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이루어가는 전체 속에 소모되어도 괜찮은 하나의 부속품처럼 여겨서 헤겔주의의 목표 아래에 있는 개체의 존재 가치 인식되게끔 왜곡시켰다라고 본겁니다. 이러한 사상을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 교회의 전형적인 가르침들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그 회의를 품은 이유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정결하고 도덕적이고 탁월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회의를 갖지 않았을 겁니다. 가질 가능성이 매우 작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는 꼴을 보니까 너무 개판인 것입니다. 면죄부 판매는 물론이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교회의 대주교가 되고 거기 주교가 되고 돈 주고 다 사고 팔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에서 나체파티까지 벌어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민초들이 다 고민을 해서 자기들이 교육받아온 이 기본적인 기독교 사상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때에 14세기 인물(1463∼1494)인데 이탈리아 사상가 가운데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는(그책은)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자료입니다. 아주 두껍지 않고, 원래 라틴어로 쓰여진 건데 영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데 디그니타 호미니스( De hominis dignitate)>라는 작품인데 거기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하셨다. 아담아 나는 너를 창조하였노라, 그리고 이 세계를 창조하였노라.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창조된 세계와 너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을 너에게 맡겼다. 내가 너를 창조했지만 너를 위해 미리 내가 정할 운명, 미리 내가 계획하고 확정한 세계의 어떤 상태는 없다. 모든 건 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런 구절을 지녔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창조주와 인간이란 건 인정을 하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미리 뭘 정해놓으시고 이런 게 아니라 만들어만 놓고 하나님은 손을 띄시고 멀리서 그저 너도 혼자 컸으니까 너 혼자 힘으로 잘해 보거라.. 그러면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우리는 이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의 운명은 하나님이 계속 간섭하셔서 뭘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 모든 오토노미.autonomy.‘지율’.. 이것을 주셨고 우리가 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에 의해서 인류의 역사의 미래는 물론이고 인간의 장래도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상을 확 퍼트린 겁니다. 이 사람은 천재였습니다. 평생 공부하느라 장가도 안 갔습니다. 근데 백작집안이라 돈이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엄청난 공부를 했는데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인간이 신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될 때에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모든 공부들을 끝냈다고 선언합니다. 그걸 구 백 개의 논제를 만들어서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들을 망라해서 그것을 (∼∼?)자기 논리로 세우고 온뉴?의(온지역의) 철학자들이 모두 모여서 자신과 일대 무한대로 경쟁하려,.논쟁하려 했습니다. 결국 차비까지 자기가 다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데 교황 측에서 이걸 열리게 내버려두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 이단으로 하고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조사해보니까 실제로 별로 이단인 게 없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만큼 이 사람이(미란돌라) 훨씬 똑똑 했다는 겁니다.. 어쨌든지간에 야단만 맞고 끝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이 이게 14세기에 엄청난 충격을 준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너혼자 잘해봐라 이렇게 맡기셨다는 겁니다. 이 세계와 모든 자신의 운명을...그렇게 하나님을 너무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전근대적인 미봉에 사로잡힌 무지가 만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면서 대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의 인문주의자들이 나오면서 이제 새롭게 성경의 계시 안에서 인간의 존재를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즉 카톨릭에서 해석한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이것을 이를 보여줍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인간이 무엇이관데 당신은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손해가 됩니까? 손해가 된다면 신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형벌을 내릴 것처럼 경고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답은 안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속에 있는 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뭐냐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의도에 맞게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인간에게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본주의와 휴머니즘이 충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없어서 더 말씀은 못 드리는데 그 내용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굉장히 엄청난 내용입니다.
어쨌든지간에 그러면서 이제 상대주의사상들이 봇물처럼 밀러들게 됩니다. 그런 사상들이 근대주의로 넘어오게 된 겁니다. 근대주의에서는, 데카르트 이후를 근대주의라고 하는데 모더니즘을 현대주의로 번역하는데 현대주의가 아니라 근대주의입니다.
모더니즘이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뭐냐면 그것이 기독교든지 기독교가 아니든지 간에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도덕 원칙과 진리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근본적인 자리가 심리적이든지 인간의 공통적 도덕 감각이든지간에 어쨌든 공통적으로 합일 이룰 수 있는 가치와 도덕의 근거들이 있다는 근대주의가 있고 하나는 그런 건 없다고 보는.. 그런걸 단절하는 근대주의가 있고 이 단절하는 근대주의가 후기 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본격적인 말하자면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장폴 사르트르’ 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고등학교 철학 선생이었다가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고,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앙리베르그송을 읽는 동안 모든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평생 진리를 허무는 일에 헌신하며 살기로 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진리를 왜 허물고 싶었던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원래 없는 건데 결국은 인간의 지배계층들이 자신의 지위를 곤고히 하기 위하여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자체가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얽매어 있는 동안에는 참으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이것들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허무한 것인지를 밝혀서 사람들 속에 다 무너뜨리고 나면 진리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뭐라고 했냐하면 ‘이념의 존재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없어도 되는데 이유를 물을 수도 없이 그냥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자기의 책속에서 인간에 대해 ‘인간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게도르 팬 파이트?”...‘던져진 존재’다. 이유를 물을 수 없이 누구에 의해서 라고도 말할 수 없이,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허공중에 던져져서 이 실전 이 장소에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근거를 물을 수 없는 우연적인 존재일 뿐이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나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게 뭐겠습니까? ‘인간은 자유다... 자유는 자윤데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무엇이든지 제약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 자유는 자윤데 무시무시한 자유, 그게 인간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불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직면해야 하는 운명이면서도 그 불안에 의해서 겨우 존재를 확인하는 그러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다닐 때 사회 시간에 열심히 줄치면서 외운 거 있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여태까지 이런 질문이 이뤄줬습니다. “자, 인간이시죠?,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당신은 누구일까요?,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과 동물은 어째서 똑같이 먹고 싸고 하는 게 구별되어야 할까요?, 신은 누굴까요? 흙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흙은 뭘까요?” 이러한 것들이 옛날에 인간에 대해서 묻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왜? 이것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할 때 인간은 현실적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고 거기에서 행복이 온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모두 질문이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은 본질보다 더 선행하는 것이 있습니다..왜? 본질보다 더 물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실존입니다. 실존이 뭐냐면 지금 a라는 내가 b라고 하는 c나 d가 아닌 나로써, 과거나 미래나 영원이 아니라 지금 정해진 시간 공간에 현재 내가 있다는 것, 이게 이그지스턴스 existence.라고 하는 실제입니다. 그럼 내가 실존으로써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 이것은 본질보다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하나의 문장이 말해주는 합의는 어마어마한 겁니다. 우리는 본질을 모르면 인간이 갈 길도 알 수 없다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본질은 보다 중요한건 ‘내가 이 시간에 여기에 이 인간으로, 그것도 한국 사람으로, 남자도 아니고 여자로, 혹은 여자도 아닌 남자로, 늙은이나 애가 아니라 젊은이로, 혹은 젊은이나 애가 아니라 다 늙은이로 존재하는’ 겁니다. ‘유식하거나 깡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별로 없고 모르는 것도 없는 사람 속에 내가 있다라는 것...’ ‘깎아놓은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못생긴 사람도 아닌, 그러나 절대로 예쁘다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란 겁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문제는 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제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냐, 니가 누군지 생각해봐라. 이런 것들은 다 신화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란 겁니다.
아까 얘기한 앙리베르그송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앙리베르그송의 기본적인 사상은 ‘엘랑 비딸(Elan vital)이라는 사상입니다. 엘랑 비탈이 뭐냐면, 그러면 모든 것이 우연적이고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어떻게 인류의 역사가 ?하게 발전되어오고 인간이 이렇게 진화되어가고 그 사람들이 진화를 이야기하니까, 사회는 발전되어가고 이런 어떤 연속성들이 쭉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사람은 이때에 ’엘랑비탈‘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그 인간과 역사가...이 세계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어떤 규격체나 아니면 수학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약동성을 가진 생명이다. 이 생명이 약동적으로 운동하면서 이 세계의 역사와 인간의 사회, 그리고 이 모든 인간의 동물과 진화..이러한 것들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이것이 옛날의 명제라면 이제는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는 별개의 것이다.’ 라고 이런 알 듯 모를 듯 한 명제를 이야기합니다.
이 사유는 당대의 커다란 충격을 줍니다. 여기서 허무주의가 나오고 그랬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전에는 최고의 존재는 ‘신이다’라고 봤습니다. 신이 100% 참된 존재자이고 그 참된 존재자는 참된 존재를 100%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된 존재자다. 그런데 인간은 90정도만 주고 동물은 한 60정도만 주고 식물은 한 20정도만 주고 무생물은 10정도만 줬다라고 생각해봅시다. 그걸 가지고서 유명한 래더 오브 비, 소위 얘기하는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존재가 얼마나 완전하느냐에 의해서 말하자면 미천한 무생물에서부터 시작해서 신까지 올라간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자는 꼭 존재자로 본겁니다..그런데 여기 와서 달라지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정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정말 존재하면 참된 존재라면,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게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하는 사물들이 있으면 신의 존재 양식이라면 이것들과는 다른 존재여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 이런 컵은 시간과 장소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컵이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머릿속에 있다는 개념과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혹은 공기가 여기 있습니다, 혹은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다가 죽어가신 고귀한 정신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때는 ‘있다’라는 계산은 같아도 있는 방식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뭐냐면 우리가 참된 존재라면 존재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존재의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자라고 불러질 수 있으면 그는 이미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사유로 길을 열어가고 그러면서 이제 상대주의적인 것, 여태까지 말씀드린 이런 것들을 모든 가치의 기준이나 판단을 상대적으로 보는 이런 인간을 가치기준의 중심으로 보는 사유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역사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현대에서는 봇물처럼 퍼지면서 이러한 것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부정운동들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연세 드신 분들은 현대 사회를 보면서 도덕적 충격을 많이 느낍니다. 어떻게 사회가 이럴 수 있을까?라며.. 그게 옛날보다 지금이 부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여러분의 현재 50대 60대분들이 10대나 20대때 교육받던 거하고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가르칠 내용들은 현재 학교에서 상실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설날에는 세뱃돈을 주면서 이렇게 많이 컸냐, 길거리에서 몰라보겠다. 몇학년이냐, 3학년이에요. 하면 ‘그래 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참되거라 바르거라....’이런 말을 하며 그렇게 배웠습니다. 학교에 학급에 가면 급훈이나 교훈이 붙어있는데 보면 ‘정직 근면 청결.’.‘참되고 바르고 씩씩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자,’ 뭐 이런거였습니다. 우리 딸이 3년 전에 고등학교 졸업해서 지금 대학교 3학년이 됐는데. 처음으로 딸 졸업식 때 학교에 가게 됐습니다. 그때 학급에서 급훈을 보았는데 이렇게 달려있었습니다. “경쟁은 엄연히 존재한다. 살아남자..”
그래서 이 책속에도 제가 썼습니다마는 1950년대의 대한민국 국가의 표어는 “무찌르자 공산당”입니다. 그래서 모든 책의 뒤에는 ‘우리의 맹서’라는 게 나옵니다. 그리고 공산당을 어떻게 하면 무찌르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60년대는 “증산 수출을 건설하자”..박정희 대통령 혁명이 일어나고...그다음에 70년대에는 “유신으로 번영하자” 그게 국가적 구호였고, 학교 대문 앞 같은 데에 붙여놓게 됩니다. 80년대는 유신이 끝나고 민주화 운동이 나오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나와서 뭐라고 했냐면.. “나라에 충성 부모의 효도..”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90년대에 김영상 대통령 때에는 그 위에 뭐가 나오냐면 “삐삐는 진동으로..” 빠삐아십니까? 그게 뭐냐면 가치로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0년대는 삐삐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하얗습니다.. 이건 누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제가 찾아낸 겁니다. 근데 이게 얼마나 정신이 변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가르칠게 없는 겁니다... ‘참되거라../뭐가 참된 건데?, 선생님 말씀 잘듣고/아니 그건 당신 위해서 하라는 거지, 공부잘하고../그건 당신이 엄마편 드는거잖아, 나라에 보탬이 되고./그건 정권에 봉사하라는 거지.’ .결국 .‘그럼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라고 이렇게 묻게 되는데, 물어도 없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현대사회에서 만나는 현대인들이고, 그런 사조들이 난...
걱정스러운 것이 있는데 난 중국선교에서 중국이 변해오는 것을 봤습니다. 순간이에요 순간. 물질주의가 밀려들어와서 개방이 되고 신흥국가들이 급속이 성장을 추구하게 됩니다. 급속한 성장이 일어나면 반드시 부의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부의 불균형 문제들로 나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에서 불균형이 나오면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수긍을 하는데 이게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부의 불균형이 일어나면 도덕이 무너집니다. 한 달 내내 가정부를 해도 하루에 100불...그런데 가서 외국인에게 몸을 팔면 하루에 이백불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런 유혹들을 현실적으로 젊은이들이 극복을 못하고 무너져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조들이 확 들어오게 될 때 기독교적으로 무엇이 절대적인 것인가를 굳게 세워주지 않으면 어느 한순간에 확 밀려오면 바람처럼 확하고 빠져나가고 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그걸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다가올 캄보디아에 물질적인 번영의 시기를 대비하면서 물질주의 번영이 밀려오면 반드시 봇물처럼 밀려오는 게 상대주의가 밀려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모든 방면에서 이것들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에스테틱스(Aesthetics) 미학입니다. 이 미학이란 것이 처음에 생겨난 것은 17세기 말에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조적으로 로맨티시즘.. 낭만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낭만주의는 조금 있다 나오는데 뉴턴주의의 반론으로 생겨나는데 뉴턴주의가 경험과 관찰에 의한 정확한 원인과 결과 관계에 이야기한 거라면 낭만주의는 내 느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굉장히 정적입니다. 예전에는 좁은 미학... 기본미학은 어떤 사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거기에는 비율과 균형과 조화 이런 것들이 있다고 본겁니다. 예를들어 여러분들이..스키니진.을 입은 여자가 위에다가 다홍저고리를 입으면 어떻게 될까요? 확 깨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면 규범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태까지 내려온 노마티브 에스테틱스 normative aesthetics..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가치들을 누가 정했느냐. 그러면서 미와 추에 대한 개념 자체에 대해 도전을 한 겁니다. 그러면서 노멀티브한 관점이 아니라 데스트럭티브destructive한 관점을 접근한겁니다. 그래서 미적 사실의 설명을 주면..
몇 년 전에 우리 동네에 과천 어린이대공원이 있는데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똥’ 전시회...똥 전시횐데 거기에 나온 메인 캡션이 이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너의 생각에 똥침을 놔주마..”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똥을 식품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근데 60% 정도를 재활용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똥을 개척해서 거기에 소회되지 않는 영양분을 추출해서 말하자면 가공식품을 만들어서 재생산 해내는 겁니다. 누가 먹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때 나오는 선전이라면 가공식품이니까 “이 똥의 원산지는 유럽입니다. 좀 비싸겠죠. 이 똥의 원산지는 베트남이다..”라면 싸지 않을까, 아니면 “이 똥은 천연재료만 먹고 싼 똥입니다..”그다음은 넘어가겠습니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라고 하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아주 재밌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누구냐면 .건축갑니다. 여태까지의 건축가는...제가 건축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교회도 제가 디자인해서 짓곤 했는데.. 여태까지의 건축학은 이렇게 뭔가 바닥과 조화를 이루는 벽, 벽과 조화를 이루는 천장, 천장과 조화를 이루는 문..문과 조화를 이루는 앞의 디자인..이런 것들이 다 연결이 되면서 와 이쁘다 이것들을 만드는 게 건축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건축이 뭐야 되느냐 “올모스 낫씽(almost nothing)”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거여야 된다는겁니다. 그래서 만든 게 뭐였냐 하면 이게(화면 보여주며) 레이드쇼 드라이브에 있는 아파트먼트입니다. 이게 뭐냐면..벽돌 대신 강철과, 이때는 이게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강철과 유리로 아파트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다음 나온 게 일공대 건축법이거든요. 가보진 못했습니다. 난 좀 더 많은 사진자료를 받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겁니다. 그냥 유리가 있으면 유리만 느끼게...‘아, 진짜 유리같구나...’ 그다음에 돌이 있으면 ‘아, 돌이 있는 그대로구나’.. 하나 더 가공을 안했던 게 아니라, ‘아, 여기는 돌이구나,’ 여기는 강철..‘아 여기는 쇠구나..’ 그걸 느끼면 충분하다 는겁니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미학적인 요소들을 다 허물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나오냐 하면 ‘더 모던 아키텍쳐 미스 the modern architecture miss.’ ‘미스 웨이 미스.’ ‘미스 안에서 현대건축학은 자기 갈 길을 잃어버렸다.’ 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뭐냐면 아까 얘기한대로. ‘어떤 건축에 있어서 절대적인 게 있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해체주의와 고전적, 클래시컬 아키텍쳐 사이에 있는 인물인데 해체주의de-constuctivism쪽으로 가게 되면 거기도 뭐 건물을 사각형으로 된 걸 이렇게 세웁니다. 건물 한쪽을 아주 녹여버립니다. 녹인 것처럼 촛물처럼 똑똑 흐르게 세우고.. 이렇게 해가지고 건축의 양식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없는 건축을 만듭니다. 땅이 사용하지 않는 건축, 큐브에 매달아서 공중에 띄우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흰 구름 흘러가듯이..흘러가면서 사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면 (그림 보여주며)앤디 워홀의 작품이거든요. 벽이 있고, 건물 안쪽에다가 알루미늄 찌그려져 있는 것 같은 것들을 붙였습니다. 쓰레기처럼 보이는데 이게 말하자면 엄청난 작품이라는겁니다. (화면)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입니다. ‘베르나드 츄미’라고 하는 사람인데 도시미학도 변하게 됩니다. 원래 정원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개념에 의해서 채원과 파다라이스 개념이 있는데..채원의 개념은 가난한 사람들이 정원을 가꿀 때 생산을 위해서 정원을 가꾸는 것입니다. 채마밭이라고 그러는데 거기다가 작물을 심어서 거둬서 먹는 게 있고......또 하나는 돈 있는 부자나 집권자들은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이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그래서 그것을 볼 적마다 자기가 돌아가야 할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하늘에서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개념 이 두 가지인데 이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민주화되고 근대국가에 접어들면서 이 정원의 개념이 공공개념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민을 위한 거대한 휴식공간을 만들라는 요구가 거세집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런 것들을 만들어주어야만 선거에서 그 사람들을 뽑아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게 공원과 정원의 개념이 도시의 근대성을 갖고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베르나드 츄미라는 하는 사람이 파리의 빵뎅지역이라고 하는 굉장히 넓은 지역인 공원 조경공사를 맡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이 이런 상대주의를 도입하게 됩니다. (화면 보여주며) ‘라빌레뜨’라고 하는 공원인데 저기 구조물이 저렇게 놓여있습니다. 저기 서른여덟 개를 만듭니다. 공원이 두 개의 부지로 되어있는데...옛날에 저런 조형물을 만들면 잔디밭과 어떠한 조화를 이룰 것인가, 주의의 건물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것인가. 여기에 있는 건축물은 다음에 나오는 건축물과 비유와 균형을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안하고 그냥 서로 상관이 없는 저런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건축물을 38개나 만들었는데 이것을 폴리라고 이름 짓습니다. ‘미친 짓’, 내지는 ‘어리석은 것’이란 뜻입니다. 폴리를 38개를 만듭니다. 더 재미있는 건..(화면 보여주며)길이 나오는데, 길이 생겼으면 한참동안 걸어가면 어디론가 우리를 인도하려고 만든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길 따라 가다보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베르난드 츄미라는 사람은 ‘왜 꼭 길을 걸어가면 어딘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합니다. 길은 그냥 길로써 존재하고 그냥 걸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디를 데려가는 것이 길의 목적이라는 것은 편견이라는 겁니다. 이해하든 말든...
이러한 상대주의가 어디에 들어가냐면 수학에 들어갑니다. 루이장 이르부르 투씨앙 브라운 포라고 하는 네덜란드의 수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 논문이 낸 것이 1910년대로 기억하는데...논문을 냈을 때 교수가 그 논문을 집어던져버립니다.. ‘이게 논문이라고 썼냐? 이게 철학책이지 논문이야?’라며 던져버립니다. 근데 이 사람의 것들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들이 수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데 옛날의 고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냐면 ‘수의 원칙의 실체는 바깥에 있다. 바깥에 규칙으로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것이 인식함에 있어서 수에 대한 개념이 생긴거다.’.라고 본겁니다.. 근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고 봅니다. ‘수학 자체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라는겁니다. 그래서 대중교육..대중교육이 뭐냐면 어떤 것이 있으면 그것이거나, 그것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지 중간은 없다.’ 라고 보는 겁니다. ‘p나 마이너스 p이지 중간은 없다.. 예를들어 ’나는 사람이다.’하면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지 중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중간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아방가르드가 나옵니다.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이라고도 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몇몇이 이뤄왔던 공통규범의 전통을 폐기하고, 포기하고..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예술들을 지칭하는 건데 19세기의 미학 전통들을 비율과 균형,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아름다움의 원형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방가르드가 나옵니다.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이라고 합니다. 그 아방가르드가 나온 것입니다. 이는 20세기 초반에 지금까지 면면히 이뤄왔던 소위 공통규범의 전통을 포기하고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현대예술들을 지칭하는 것인데, 19세기에 확립된 미학의 전통인 비율과 균형 같은 것 들을 아름다움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인과 미인이 아닌 사람은 결국 비율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비율의 문제지 뭐가 그리 다른 것은 없습니다.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가 전통적인 미학들을 파괴하고 그래서 새로운 시도들을 끊임없이 해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상대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대중문화가 등장하게 됩니다. 대중문화가 등장해서 획일화된 문화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몇 해 전에 났던 신문기사가 났는데 말레이시아에 사는 십대의 방을 위에서 사진을 찍고 한국에 사는 십대의 방을 사진을 찍고, 미국에 사는 십대의 방을 찍어놓고, 퀴즈를 냈는데 ‘이 세 개 중 어느 방이 미국일까요?’ 하는 퀴즈였습니다. 아무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농구공, 나이키 운동화, 리복 테니스라켓, 이미 글로벌한 상품들이 다 있어서 똑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아방가르드 운동에 방해가 될 줄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도 몰랐습니다. 이 아방가르드가 이제 음악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아르망드 쉘가르드라는 사람이 표현주의 음악의 선구자입니다. 음악이 원래 장조든지 단조든지 조가 있고, 그래서 단조는 슬프고 침울하면서도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장조는 좀 경쾌하면서도 인간에게 발랄하게 만들고 하는 것인데 이 사람의 음악은 그 조를 무시해버리고 무조 음악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는 ‘우우우우~’ 이렇게 괴기음악처럼 흘러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장조, 단조처럼 그런 조가 있어서 균형을 맞추고 따라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편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화성이나 대위에 대한 모든 이론 자체가 전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무가 중에서는 리즌스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발레곡 봉의 제전을 만들었습니다. 음악은 감정적으로 가라앉고 좋거나 슬프게 하는 등, 어떤 마음속에서 정동을 일어나게 하는 것, 정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음악의 본질인데 반해, 스트라빈스키의 무조음악 같은 것은 그렇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로 막 움직이면서 규칙들을 다 파괴하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아주 파격적인 안무가 덧붙여졌습니다. 리즌스키의 공연을 본 당시의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야, 굉장하다’와 신경질을 내면서 ‘이것도 도대체 음악이고 무용이냐’. 그러면서 예전에 있었던 발레의 규칙들은 다 파괴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백남준씨 작품입니다. 이 사람의 1960년대 초기 대표작이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입니다. 이 작품은 멋있는 그랜드피아노 2대를 올려놓고 도끼를 갖고 올라가서 다 때려 부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소 머리를 잘라서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소머리와 피아노를 짓이겨서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백남준씨의 정신적인 스승은 존케이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은 사람을 앉혀놓고 위에서 샴푸를 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예술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피아노를 파괴함으로써 기존의 부르주아적 중심의 지배질서들을 다 파괴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다다익선이란 작품이 나옵니다. 이 작품은 상대주의를 극단화한 작품입니다. 이 사람의 재미있는 일화가 클링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면담하기 위해서 백악관에 갔습니다. 거기서 바지가 흘려 내렸습니다. 자신은 스캔들이라고 했지만 르윈스키 스캔들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칸덴스키 작품이 나오게 되는데 쉽게 이야기 하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뉴턴주의가 나오는데,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물질과 관련된 법칙, 시간과 공간, 과학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법칙들이 우주에서도 통용되고 하나의 동일한 규칙으로 이 모든 세계가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 뉴턴의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이 자연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하는 수학적 원리를 찾아내는데, 그 작품이 ‘크린티비아’라고 하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한 체계를 들으면서 현대인들은 ‘모든 것들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엄격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구나. 여기에서 이탈하는 것은 미신이거나 아니면 기적이거나 인간이 오해하거나 잘못된 것이다.’라고 보고 기적의 존재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후 뉴턴주의가 일어나다가 낭만주의로 번져가게 됩니다. 낭만주의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모든 것을 과학적인 구도로 보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낭만주의운동은 객관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 속에서 뭔가를 느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 연애지상주의, 인간의 감정 자체에 대한 고결한 이해, 이런 것들이 많이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지혜와 같은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상대주의로 나가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오늘날 내려오고 있는 전체적인 하나의 조류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상대주의적으로만 보는 조류 속에서 그러면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들이 과연 전통적으로 교회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이해해온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과 일치를 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한번 되짚어봐야 합니다. 원래 기독교는 철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것이냐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혜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기 직전에 아덴에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는데 별로 성과를 못 냈습니다. 그 후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린도에 와서 결심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노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결국 사도바울의 이 언급은 ‘봐라, 철학은 다 필요 없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것 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 말은 ‘너희 중에 그래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진짜를 이야기 하겠는데, 내가 너희에게 지혜를 말하고 싶다.’는 말이고, 그 지혜가 바로 소피아, 철학에서 추구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십자가 없이, 예수 없이 지혜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누구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가 일생동안 찾아왔던 그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 현대인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삼성이 잘나가서 이번에 매출을 최대로 올렸고, 이미 세계적인 기업이 되고, 엄청난 돈을 벌여 들였습니다. 애플과 싸움을 해도 끄떡하지 않고 결국은 애플을 꺽을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신문에 보니까 삼성이 이렇게 잘나가는 비결이 거기에 간부들은 부장급 이상들이 작년에 363일을 출근했데요. 오늘날의 회사는 거의 하나의 종교집단인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너희 회사를 사랑하라. 사장에게도 이와 같이 할지니라.’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인간관계가 이제는 치열한 경쟁관계여서 서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뭔가 허심탄회하게 자기를 다 쏟아놓고 자기를 받아들여주는 공동체, 자기로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겨주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욕구를 채워주면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이 여자는 지금 돈으로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물질만능주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영국에 갔더니 영국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대학등록금인데 대학에서 1년에 3백만원 하던 등록금이 9백만원으로 올랐습니다. 정부도 도저히 감당이 안되고, 학생들은 갑자기 기숙사비부터 시작해서 등록금까지 어마어마하게 오르니까 감당이 안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대생에게는 비교적 좀 젊고 돈 많은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똑 같은 일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대 앞에 토요일이면 벤츠 승용차들이 쫙 줄을 서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가서 한번 어울려주면 자기가 6개월 동안 벌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예전에는 유교적인 관성에 의해서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행위의 원칙들이 절대적인 규칙으로 승계되어 왔고, 그래서 여자들이 은장도를 차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런 규칙들이 허물어져버렸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동성애가 허용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는 이미 게임 끝났어요. 이제는 그 정도가 아니라 피터질러와 같은 교수는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결혼을 사람과 사람이 해야 된다는 것이 왜 절대적인 원칙인가? 그러니까 개하고도 살 수 있고 소하고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에 8mm라는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8mm라는 영화는 니콜라스케이지라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왔고, 처음부터 끝까지 토할 것 같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스너프라고 하는 장르를 채택한 것입니다. 스너프는 아주 거친 정사장면과 엽기적인 살인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정사하다가 잔인하게 상대방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영화들이 엄청난 충격을 주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좋은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 더 이상 자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엽기적인 살인과 폭력성을 집어넣어 인간을 강력하게 자극해서 인간의 감정이 정이 움직이는 데를 갈 수 있는 최대한 진폭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에게 못 말리는 것이 있는데 호기심입니다. 어떤 짐승의 시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려진 것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할 이는 아무도 없건만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앞 다투어서 그것을 보려고 합니다. 분명히 보고나면 토할 것 같을 텐데 그거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대한 많은 것을 최고의 진폭으로 느끼려고 하는 그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주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생산해낸 정보의 양을 CD에다 담으면 달나라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것도 매년 어마어마한 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홍수와 같은 정보가 있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보 속에서 정보를 인식하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들을 자꾸 묻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외모 지상주의가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외모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은 굉장히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매들한테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매가 선을 보고 오면 물어본답니다. ‘선봤다더니 괜찮아?’ ‘응’, ‘그 사람 잘생겼어?’ 물어본답니다. ‘그냥, 그저 그래.’ 두 번째 질문은 ‘학교는 어디 나왔어?’ ‘뭐, 어디 나왔대.’ 세 번째 질문은 ‘집안은 괜찮아?’ 네 번째 질문은 ‘성격은 괜찮아?’ 다섯 번째 질문은 ‘돈은 좀 있대?’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하고 선을 보고 오면 첫 번째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 물어본데요. ‘근데 예뻐?’ 그 다음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두 번째도 ‘근데 예뻐?’ 세 번째도 ‘근데 예뻐?’ 한답니다.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중가요 스타죠. 그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사람은 절대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관객을 끄는데 있어서만 저렇게 파격적인 의상을 입는답니다. 뉴패션인데 생고기로 만든 옷이에요. 생고기를 찢어가지고 만든 옷이에요. 이런 것이 사회의 해체성 내지는 상대주의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류는 앞으로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에 대해 오늘 이 시간에 간략하게 몇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중생과 회심이 중요합니다. 중생은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회심은 그렇게 살아난 영혼의 최초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인 것을 온전히 믿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러니까 성인은 누구든지 회심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면 반드시 회심을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의 토대로 돌아와서 생각할 때 회심하고 중생하지 않는 사람은 엄격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일부가 아닌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 하나님의 신령한 영,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지를 굴복시킬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감동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역을 할 때, 외국인을 사역하든 내국인을 사역하든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거듭남과 회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30년 전하고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하고 교회 시설도 좋아지고 교육의 내용도 더 나아졌을지는 모르지만 회심한 사람들의 비율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1년에 한 차례씩 그 목회자 인턴십을 합니다. 대학원에 다니거나 졸업반 학생들 중에서 면접을 통해 들어와서 17명 정도씩 놓고 월요일마다 한 학기를 가르칩니다. 그들에게 회심에 관한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돌보는 사람들 중에 회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조사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자기가 45명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딱 한 명만 구원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이 나온 사람이 20%는 그래도 구원받은 걸로 확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교회에 머물러 있지 그 사람들은 언제라도 신앙을 버릴 수 있는 자기 확신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표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역의 목표 자체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확고하게 의심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리가 이 가슴속에 새겨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하고 강력한 십자가와 복음의 승리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하고 전하고자 하는 우리 사역자의 마음속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이 상대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 이 비참한 현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이미 현대인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 되고 돌려서 천천히 얘기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게 만들어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화사역이니, 구제사역이니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하면서 그 속에 본질적인 것들을 가져다주는 일에 있어서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제일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래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 뜨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중생과 회심을 위해서 우리들이 깊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도 한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 한번 조사해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이들을 위해서 해줘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들이 가져야 할 것은 지성적으로 이 기독교의 통합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 이 성경인데 이 성경에 대한 특별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참되신 하나님과 인간이 죄인인 것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참된 성경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철저하게 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되고 삶과 우리의 신앙의 규칙에 규범이 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주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솔라 스크립튜라’, 라틴어로 ‘오직 성령으로써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 볼트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솔라 스크립튜라’라고 하는 말은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 유일한 규칙이라는 뜻이지 모든 면에서 ‘성경만 가지고’ 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솔라 스크립튜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권위 있는 단 하나의 기준이라는 뜻이지 성경만가지고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함께 우리는 일반학문도 배우고 사회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하면서 일반계시의 이해들을 같이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특별계시가 다이어몬드라면 일반계시는 거기에 깔아놓은 빌어도?입니다. 빌어도? 위에 빛이 비취고 다이아몬드가 있을 때 찬란하게 빛나듯이 일반계시의 배경으로 특별계시를 이해함으로써 지식을 확장하고 여기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왜 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져야 됩니다. 그것은 삼각형의 구조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역사와 신학에 대한 지식, 자연과 예술에 대한 지식,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까지 확장이 되어서, 지금 설명한 것처럼 철학, 역사, 건축, 미학, 사회, 예술, 음악, 수학, 환경 이 모든 것 속에 현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성경의 궁극적인 규범인 성경으로 이 문제를 비추어 볼 때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가지고 우리가 믿는 바를 우리들이 통용되는 언어가 아닌 계몽주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역할들을 하면서 소통이 될 때, 그 때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 신앙의 지혜가 철학이나 이 사회에서 말하는 지혜보다 훨씬 탁월하고 뛰어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최고의 지성입니다.
두 번째로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두 번째 의미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빛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지성적인 면에 있어서 사상과 진리를 ??했다는 이야기고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건이 중요합니다. 그 경건의 핵심적인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떨림과 사명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해 계시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그 분 앞에 항상 비천하고 티끌 같은 존재다. 거기에서 오는 두려움과 떨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은, 가까이 다가가 그 분과 일치가 되고 싶어 하는 이끌리는 사랑이 결국은 탁월한 경건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윤리적인 생활이 이뤄지게 되는데 이 윤리적인 생활은 존재론적인 인식, 즉,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 하는 인식, 여기에서 복종의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의문적인 인식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지만 나는 죄를 지었고 미천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인간이라는 인식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을 붙들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사는 윤리적인 생활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조류를 따라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아주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애쓰며 살아가야 하지만 도덕적인 결심만을 가지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현대사회 속에서 문제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잘 억제하면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이 결국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하나님의 위대함, 도덕성 앞에서 인간은 그에 합당하도록 거룩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면서 그 거룩한 태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의거하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올바른 지식이 있고 실천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과 실천이 움직이기 위해 이것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 데 올바른 것을 안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지식과 실천을 연결해주는 제 3의 신이 있는데 이것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힘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은혜의 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우리 자신이 얻은 지식과 이 실제적인 삶을 연결시켜주는 이 역동성을 하나의 우리의 모든 복음과 선교사역에 있어서 초월적인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 연계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 지식과 실천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은혜가 우리의 사역 속에서 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세론 적이고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겸손함과 하나님을 향한 의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놓고 보면 결론은 이미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공부해서 훌륭한 지성의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성경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학문들도 사용하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진리에 합당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서 사람들에게 빛으로 드러나자.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고전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의 답이 가장 현명하고 탁월한 것인데 문제는 이 답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현대사회의 정신과 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면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도 우리 인간의 지혜는 생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평소에 우리가 듣던 그 복음으로 돌아가 이 복음을 사역하는 복음사역을 하는 우리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가득히 주어져서 이것이 우리의 사역 속에서 언제나 충만하게 나타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를 전적으로 헌신하며 드리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이 어두운 세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이 모든 세계를 곰씹고 있는 정신들을 깊이 이해하고 이러한 세상의 정신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도전할 때 우리들이 이것들을 이해하면서 올바르게 도전하는 지도자들이 될 때에 많은 양떼들이 그 길로 따라가서 이런 모든 현실들을 극복하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 최후의 승리를 믿으면서 우리들은 불과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이 선교 역량 속에서 자신을 허비하다가 하나님 앞에 죽는 사람인 것입니다. 죽어도 선교의 역사는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면 돌아올 수 없는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니까 올바로 알고 자기 자신을 다 쏟아 부으면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 시대의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복음이 우리에게 정한 그 궁극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가서 사역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