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집회 2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3-35)
녹취자: 표명희, 이시내, 유은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사랑 하는 요셉의 죽음에 관해 슬퍼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이 야곱은 바로 앞에 섰을 때 자기 나그네 길이 130년이고 조상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노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심히 험악한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라헬을 만난 것 이었고 바로 이 요셉은 라헬의 소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야곱의 마음에 어쩌면 유일한 기쁨이었고 그래서 이 아이와 함께 야곱은 위로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을 야곱이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 곳에 보냈고, 갔을 때 이미 형들은 도단이라고 하는 곳으로 이동한 후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과업을 수행하기위하서 도단으로 갔고 거기서 드디어 형들을 만났습니다. 그 형들이 악한 마음을 품고 이 아이를 죽이고자 하였고 결국은 웅덩이 속에 던지고 마지막에는 이 아이를 결국 상인에게 팔아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끌려가게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옷을 벗겨 염소의 피를 뭍이고 이것을 아버지에게 가지고가서 요셉의 옷이 맞느냐고 보아달라고 했을 때 요셉은 이 아이의 옷을 보면서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악한 짐승이 이 요셉을 찢었도다 악한 짐승이 요셉을 먹었구나 하고 통곡하며 우는 광경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나그네 길에 유일한 위로였던 이 요셉을 잃어버린 야곱의 마음은 아마 그것을 똑같이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그런 비참한 마음 이었습니다. 이 슬픈 소식을 직면하고 이 야곱은 깊은 고통 속에서 가족들의 위로를 거절하였고 그로 그는 옷을 찟고 베로 허리를 동였으니 이는 자신의 마음에 비참함과 애통함 그리고 자신의 죽을 것과 같이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를 위로하였지만 그 위로를 거절하였고 고백하기를 슬픔 속에서 스올로 내려가겠고 하였습니다. 이 스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을 때에. 이 스올은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장소로 알려져 있고 거기는 생명의 기운과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빼앗기고 음습하고 어둡고 침침한 그래서 어떤 삶에 생기와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 소망 없는 절망을 고백 할 때에 바로 스올로 내려간다 혹은 스올로 내려가는 것 같다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오래도록 다윗이 슬픔에 잠겨있다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많은 날들 동안에 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많은 날 동안 이 사람 야곱은 깊은 슬픔 속에 잠겨 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이 야곱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으로 일평생 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상명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혹은 참척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두 단어 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한자어입니다. 참척이라는 단어는 비참할 참자에 다가 척자는 슬프다 할 때에 척자입니다. 그러니까 비참하게 슬픈 것, 이것이 참척입니다. 상명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상은 잃어버릴 상자이고 명자는 밝을 명자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눈에서 빛을 잃어 버린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참척, 상명 이 단 어들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들일까요?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살아있는데 자식이 먼저 죽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참척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상명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을 앞세워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고 난 부모는 빛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인데 이것은 삶에 아무 희망도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참척 혹은 상명을 육적으로만 적용하지 말고 영적으로 한번 적용해 보기를 바랍니다.
(예화) 소설가 박 완서씨는 아들이 이었는데 의사였습니다. 의사의 길을 가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아마 레지던트 쯤 하고 있을 때였는데 불행히도 이 아들을 죽음 저 편으로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상명의 슬픔에 잠겼고 결국은 어느 날 기력을 회복하고 밥을 먹으면서 그 경험을 후일 자기의 책속에 이렇게 썼습니다. 자식을 앞세우고 어미라는 년이 그래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밥을 목구멍에 쳐 넣는 자신을 보면서 무섭고 토할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자식을 앞서 보낸 그 비참한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앞서 보낸 산자였던 자식의 죽음, 죽은 자가 되어버린 자식의 삶에 대한 기억은 살아있는 부모의 마음에 죽음이 되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오늘 이렇게 참척과 상명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PK, MK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일평생 회심하지 않고 불신자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근에 저희 집사람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도 했는데 매주 화요일 전도를 하다가 그 집을 발견했는데 80이 넘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드렸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앉혀놓고 복음을 애기했더니 말을 뚝 끊으면서 "당신들은 지금 정신이 돈 사람들이 아니냐. 사람이 혼인을 해서 부부 생활을 안했는데 어떻게 애기가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예수는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을 열심히 우리 집사람과 전도대원들에게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속에 하나님에 향한 반감과 미움이 꽉차있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이야기들을 그들에게 할아버지가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또 전도하러 갔는데 할아버지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3년 전에 83세였으니까 초창기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 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회심을 안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냐 하면 자신은 불신자였고 자녀들은 한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의 아내만 교회 다니고 딸은 불교신자가 됐고 또 다른 딸은 무신론자가 됐고 안 믿는 자녀들로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라고생각하지 말고 한번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회심했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 할아버지를 지성으로 가서 전도를 했고 교회에 모시고 와서 예배를 드렸고 결국은 일 년 후에 이 할아버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인데 80이 넘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있었던 불신의 문제를 정자세로 앉아서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을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1900년대 초에 83세니까 1920년대 그때 만약에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일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았고, 자기의 자식들도 그렇게 불신자들이 되거나 이정도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근데 결국은 목사의 아들로서 회심하지 못했고 그렇게 가정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문제를 풀기위해서 이 육체보다도 더 비참하게 육신의 자식을 그렇게 죽여서 먼저 떠나보내는 것이 참척이요 상명이라고 한다면 육체는 기껏해야 우리와의 인연이 이 세상에서 몇 십 년 입니다. 왜? 하늘 나라가면 가족끼리 모여 사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늘나라에 갔을 때 나는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이 땅에 있어서의 핏줄에 대한 사랑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부모 자식 남편 아내 이런 인연은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 칠 팔 십년 계속되는 인연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아있고 영원한 운명을 지니고 있는 피조체입니다. 그러면 육신이 육신으로서의 자녀를 잃어버린 슬픔이 크겠습니까 아니면 영혼으로서 자녀를 죽음상태로 내보내는 것이 더 슬프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여러분의 자녀가 회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언제쯤이면 여러분들의 자녀가 회심할 수 있을까요?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아마 우리 자녀는 회심했을 거야 억지로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회심의 문제가 왜 이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처럼 부각이 되는냐 입니다. 우선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구 원법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봅시다. 구 원 파에서는 아이들이 의식이 있어서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는 절대로 구원은 받을 수 없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린아이 적에 죽은 모든 아이들은 지옥에 갑니다. 아이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지옥에 갔다고 믿어야지요. 그러나 이제 어린 아이들을 언약 적인 관점에서 구원 문제를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결국은 구원은 내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라는 것도 중요한 관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듭 났는가 거듭나지 않았는가 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믿음의 작용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주 유아 때 죽는 사람들이라든지 아니면 치매상태에 있는 사람들, 아니면 정신 적인 지체가 있어서 태어 날 때부터 사물을 제대로 인식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러면 두뇌의 어떠한 결함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의 모든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는 것인가 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의 자력으로 예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 하실 것이다 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을 받아들일 없는 상태에서 유아로서 죽었을 때 이때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따라서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건 교파에 따라서 견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 일치를 보는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 건 뭐냐 하면 자신의 힘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인지 능력이 있는 성인들의 경우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꼭 19세 이상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이 믿음은 결코 회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모두 일치를 본 견해입니다.
그럼 신학적으로 회심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두 가지 입니다. 회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 회개이고 거기서 절망한 자신을 향하여 어떤 구원의 희망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럼 신학적으로 회심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 이것이 회개이고 거기서 절망한 자신을 향하여 어떤 구원의 희망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는 것 믿음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심은 결국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하여 영혼을 하나님 앞에 살아나게 하셨을 때에 살아난 그 영혼이 의식 속에서 자가의 살아난 상태를 처음으로 구현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런데 이 중생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중생이지만 성경은 이 중생과 회심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고 중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이지만 회심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믿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장작을 팰 때 장작을 무 썰듯이 깍두기 썰듯이 장작을 팰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고 나무를 세워놓고 결을 본 다음 그 결을 따라서 도끼질을 하면서 나무를 쪼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방식의 일방적인 능력과 부르시는 그리스도예수의 초청 앞에서 회개하고 믿고자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는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면서 구원의 일방성과 양면성을 우리에게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실천적으로 적용을 하면 결국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고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할 필요성과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할 의무를 강조할 때에 그가 구원에 이르는 회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진실한 회심 없이는 결국은 구원받을 수 없는데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중생이라는 자신의 글 속에서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뉘우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열심이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심 없이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죽음 할 때에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죽음의 개념을 영혼의 죽음으로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와 영혼은 각각 다른 성격의 다른 양식으로 존재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의 개념은 영혼의 죽음과는 사뭇 달라서 이 둘을 혼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판단하자면 그런 식의 죽음은 영혼에게는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기능이 끊어지고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활동의 정지가 죽음입니다. 그 활동의 정지는 무슨 활동의 정지이냐면 이 살아있는 생명체는 두 가지 독특한 기능을 갖는데 하나는 환경에 대한 반응 외적인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반응 두 번째는 자신 안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데 이 두 가지 기능이 생명유지의 필수적인 기능이고 이 두 가지 작용이 멈췄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는 것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기능이 멸절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영혼의 죽음의 개념은 무엇인가 영혼의 죽음의 개념은 멸절이 아니라 영혼을 영혼답게 하는 어떤 공급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영혼답게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생명, 진리, 사랑, 의 이런 것입니다. 특히 생명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사람에게 충족히 영적으로 부어졌을 때 그 때에 그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의 위계가 되는 외부적인 행동 외부적인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영혼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영혼이 되도록 생명의 작용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에 대해서 유혹이 올 때에는 저 유혹에 굴복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혹을 이기고 내 마음에 있는 은혜로서 이 모든 외적인 사물들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반응하며 살 수 있는 영적인 파워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죽어버리면 모든 동작을 멈추지만 영혼은 죽으면 죽을수록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육체의 열매들을 쭉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dead works 즉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에서 끊어졌을 때 이 영혼은 이 속에서 일어나는 사악한 육욕들에 복종하면서 온갖 육체의 열매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악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 사이의 중대한 차이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자녀가 우리 몸으로 난 자기 자식일 수도 있고 우리들이 자식처럼 생각하는 우리교회의 아이들 일수도 있습니다. 어른들 일수도 있고. 그러면 과연 그렇게 그 사람이 죽은 영혼의 상태에 있는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누구도 완벽하게 구별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네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체크를 해보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난 사람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소유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하는 것이 분명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즉, 이런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어느 것이 가치 있고 가치 없는 것인가 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것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고 내가 싫은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자기 판단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금석은 무엇이냐 하면 신령한 것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령한 것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환경이 무엇이냐면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서 그 은혜를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심하고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신령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이 마음속에서 신령한 것들을 이미 보았고 모든 신령한 것들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떤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이 자신의 영혼에 가까이 와 닿을 때 거기서 기쁨을 느끼고 소망을 느끼고 그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입니다. 아주 어린아이들도 회심하고 나면 하나님말씀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아주 커다란 사모함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화) 저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엄마 아빠가 함께 교회에 등록하러 왔습니다. 엄마는 가서 은혜로우면 등록을 하자 그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은혜를 참 많이 받아서 눈물로 예배를 드렸는데 아빠는 푹 잤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회심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배 드렸어요? 그래 드렸다. 어땠어요? 예배시간도 길고 설교도 길고 그래서 계속 졸았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빠 그러면 오후 예배는 제가 다녀올께요 제가 직접 가서 한번 보고 올게요 그리고 이 아이가 오후예배에 왔습니다. 이 아이는 먼저 교회에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오후예배에 앉아서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아빠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그 교회에 등록해요 제가 들어봤는데 정말 은혜로워요 그리고 이 아이는 캐나다 할머니 집으로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빠가 그날 저녁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너무 자존감이 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모조리 못 알아들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알아들었고 자기는 예배시간에 계속 졸고 잤는데 이 아이는 그것을 듣고 나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까 아빠가 그 다음 주에 나도 도대체 저 아이가 이해하는 것을 내가 못 듣는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나도 한번 들어보리라 하고 딱 앉아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달 뒤에 이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대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면서 아빠 교회 어떻게 하셨어요 아 내가 은혜를 받고 그 교회에 등록했다고 하니까 아이가 울더랍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눈을 뜨고 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월요일마다 모이는 인턴쉽이 있는데 목회자 인터쉽 학생들을 한 17명 정도씩 일 년에 양육을 하는데 그 학생 중의 하나가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회심에 관한 책을 읽고 조카하고 같이 사는데 자기 방에서 이제 뭔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열시 반이 되었는데 이 조카가 자기 방으로 자러 가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얘야 너무 시간이 늦었다 어서 가서 자거라 그랬더니 싫어 삼촌 나 여기서 책 볼꺼야 두 번이나 가라고 했는데 안가고 책을 보는데 무슨 책을 보나 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어린이 전도협회에서 나온 글 없는 그림책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섬짓한 마음이 들면서 혹시 이것이 내 조카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는 6살짜리 아이 있는데로 데려가서 삼촌이 같이 읽어줄까 하고 책을 펴놓고 이제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 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감나게 다 전했더니 갑자기 이 아이가 앞에 앉아있더니 벌떡 달려가서는 삼촌 목을 꽉 끌어안더랍니다. 그러더니 막 울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삼촌은 내가 너무 복음을 무섭게 전해서 이 얘가 놀랐나보다 전도자가 믿음이 더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왜 우니 왜 우니 계속 울더랍니다. 너 삼촌이 너무 무섭게 말했니? 왜 우니? 아니야 그럼 왜 우니 계속 울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데 너무 슬퍼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러면서 막 울더랍니다.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에게는 이런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지에서 물론 자가의 감정이나 신앙의 경험들을 받아들이거나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서 뚜렷하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0% 인정합니다. 그것은 100% 인정하고 그런 점에서 어떤 문화 속에서는 그 사람들을 다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줘야 하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종족과 인종을 막론하고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그 사람사이에 중간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회심했으면 했고 회심 안했으면 안했습니다. 그럼 회심한 사람은 종족과 인종 모든 것을 불문하고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물론 문화는 그것을 소통하게 어렵게 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킬 줄을 모릅니다.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언제 굴복시킵니까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종종 하나님이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복음적인 회개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나의 죄 때문에 그분이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죄를 지은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실망하고 뉘우치는 이 복음적인 참회는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회개와 참회가 있을 때에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없다 이것입니다.
네 번째는 실제의 삶이 무신론적입니다. 그러니까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해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이 개념을 고려하면서 무엇을 판단하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적인 무신론의 삶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영혼에 대한 다섯 가지의 표지들입니다. 그러면 분명한 것 하니는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진지하게 고통스럽게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지 않는 한 결국은 회심 없는 것이고 거기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진정한 회심이 없다면 표징이 없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사역에 있어서 본질적입니다.
자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을 보고 선교지든지 한국의 목회지든지 간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도 선교를 통해서 한 사람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거기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죄인인 것과 예수그리스도가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믿을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신앙심을 갖게 함으로서 그들을 구원 얻게 하는 것 그래서 예전에는 사단의 권세와 지휘아래 있던 진노의 자식이었던 그들이 거기서 구출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힘바 되고 거기에 접붙혀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 생명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는 교회를 통해서 교회에 접붙혀진 신자 각사람 각 사람에게 분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선교지에 나와 있는 여러분들은 교회론이 약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론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이 기독론적으로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우리에게 연관이 되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예수의 생명을 우리가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사역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구원받은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이 선교사와 목회자의 사명은 정확하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인데 온전케 하는 방법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통해서 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개 하고 구원받은 것은 엄청난 일일지 모르지만 겨우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고 새 생명을 탄생한 것은 너무나 잘한 것이지만 그 아이를 사람답게 길러 놓지 않으면 태어난 아이도 불행하고 부모는 더 불행하고 이웃들도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낳아보신 분들은 알지만 배 가르고 아이 낳는 것은 불과 몇 시간 혹은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새끼를 사람답게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자식에 대한 엄청난 많은 투자와 사랑 교육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매일 매일 배 가르고 애를 낳는 것 같은 고통을 지불해야지만 겨우 그 자식이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선교사로 목회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전도만 하고 아무것도 안합니다. 제가 어디 동남아 여러 선교지를 다녀서 선교사님들 설교하는 것을 제가 들었는데 물론 이제 저는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몇 번을 들으면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합니까 아니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되겠죠 아멘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함께 하실까요 안하실까요 합니다 아멘 그게 뭡니까 그래도 선교지에서 선교사들로부터 하다못해 밀가루포대라도 하나씩 받은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안하겠습니까 신세지는 입장에 있는 백성들인데 시키는대로 안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신앙이 생기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정말 거듭난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설교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선교 사업을 하는 것은 비즈니스지 선교가 아닙니다.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무엇과 똑같나면 애를 순풍순풍 일곱 여덟 계속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가 바쁘게 돌아다니느라고 밥도 안차려주고 오줌 똥도 안 치워주고 기저귀도 안 갈아주고 애들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그리고 공부도 안 가르쳐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일곱 여덟 마리의 가축이 한방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성도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주 따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공부 좀 하라고. 공부하고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하게 구원의 도리룰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만 일단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따로 모아서 깊이 정확하게 점점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처음에는 멀건 죽을 타서 먹여서 예수 믿게 만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게 아닙니다. 얼마쯤 젖 먹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이유식을 해야 합니다. 젖에 무슨 양분이 있겠습니까 그 큰 놈이 계속 빨아먹는데. 맹물이지 그렇게 해놓고 이유식 먹이다가 애가 똥도 싸고 오줌도 누고 돌아다니고 그러면 이유식가지고 안됩니다. 밥을 먹여야지 밥 먹고 나면 고기도 먹이고 야채도 먹이고 골고루 먹여서 그 다음에 아이가 큰 아이가 되면 어른 상에서 같이 앉아서 밥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가 스무 살이 됐는데 이유식을 끓여서 그것을 주면 그것 먹고 어떻게 가서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겠습니까? 근데 정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앤드류 머레이 선교사를 본받아야 됩니다. 그는 선교사 이면서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그분의 설교가 신학적으로 어떤 면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참 신실한 성경을 깊게 설교했던 화란의 신학과 영국의 청교도의 영적인 특성들을 함께 조화를 이루는 그런 훌륭한 말하자면 설교자였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설교집이 베스트셀러 입니다. 1800년대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근데 구원받은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합니다.
전도를 해서 끊임없이 하는 것과 구원받은 사람들을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을 가르치고 성경을 더 깊이 가르쳐서 점점 더 깊은 지식으로 데려가고 그 지식을 통해서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이 아이들의 믿음과 신앙이 강화되어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 사역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고 회심과 중생에는 관심이 없고 뭔가 자꾸 어려운 것을 가르칠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들을 죽 눕혀놓고 매일 그 얼굴에 분칠을 하고 루즈 바르고 눈썹 그리고 새 옷 입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죽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도 죽일 수 없습니다.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와서 혹은 집안이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에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중국에 '계림'이라는 지역에 가봤더니 호랑이 산장이 있습니다. 가본 거 맞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하얀 호랑이를 봤습니다. 거의 세계적으로 멸종 단계에 있습니다. 400 키로씩 돼 보이는 큰 호랑이가 울면 쩌렁쩌렁 울립니다. 근데 너무 비참한게 호랑이가 스무마리 쯤 여기 쭉 서 있습니다. 근데 조련사가 ‘엎드려!’ 하면 신속하게 엎드립니다. ‘옆으로 굴러‘ 하면 옆으로 구릅니다. 근데 말을 안 들으면 조련사가 작대기로 탁 때리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구릅니다. ’다시 일어나!’ 하면 일어나고 ‘누워!’ 하면 벌렁 눕습니다. 그래서 20마리가 체조를 그렇게 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맹수이긴 한데 오랫동안 길들여진 맹수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회심하지 않은 자가 예수믿은 사람처럼 반듯해질 때 길들여진 맹수라 했습니다. 본성은 하나님을 물어뜯고 싶은 야성을 가지고 있는데 교육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제가 여러해 전에 지방을 내려가면 담임목사님은 어디 집회에 가서 청년에게 설교하는데 청년들이 집회에 가더니 교역자들이 모여앉아서 자기교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을 하더랍니다. 우리교회가 요새 이 지방에서 이 도시에서 뜨고 있는 별. 그래서 몇 천명씩 모이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배운 것 좋아하니까 뭐 좋은 점이 있냐고 물어보며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부목사에게 물어봤습니다.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데 500가정을 돌보고 있는데 8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당신 회심이 없으면 구원 없는거 믿냐‘고 물어 봤습니다. 자기도 총신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믿는다고 합니다. ’그럼 회심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겠죠?‘ 그랬더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이 돌보고 있는 800명중에서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습니다. 20%쯤 될 거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근데 당신은 나한테 지금 뭘 자랑합니까. 당신이 맡고 있는 800명의 영혼 중 160명만 오늘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모르겠다 이거 아닙니까. 그럼 뭘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교회에서 아까 말한대로 인턴쉽을 하는데 17명정도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와서 교육을 받습니다. 한 학기동안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교회로 돌아가서 당신이 만약에 담임목사를 하고 있다면 중등부를 하고 있다면 중학생들을 놓고 초등부를 하고 있다면 4,5,6학년들을 놓고 그냥 그것도 않 하고 교사 하고 있다면 당신이 맡은 반 아이들을 기준으로 정직하게 명단을 놓고 구체적으로 이 사람이 회심했는가를 5가지 기준을 놓고 확인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서로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황당했습니다. 어떤 전도사는 45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1명만이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 했습니다. 어떤 전도사는 중학생들을 돌보는데 20명 정도가 구원받았고 나머지는 구원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왜 이렇게 교회를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가 선교 사업을 하는데도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도 이 사람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가.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 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회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아님니다. 이것은 벌써 제가 7년동안 보면서 여러번 강의를 했기때문에 이미 다 들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구원받은 신자 안에도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죄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것들이 무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를 닮아갈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계속 부풀어져 일어나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구원 하는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계속 진리와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도록 양육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 목회 사역의 본질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회심의 은혜 두 번째는 그 회심한 은혜를 죽을 때 까지 신자가 간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때는 내 맘대로 막 하고 싶고 그러다가 선교지는 목회지보다 훨씬 편하잖아요? 전혀 동의를 않 하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목회지에 있으면 선교사와 비교되지 않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입니다. 어디가든 우리나라 말이 통하고 문화도 똑같고 얼마나 편합니까. 목회가 않 되면 물론 선교사님보다 물질적으로 고생하는 목회자들도 더 많습니다. 매주일이면 편지가 많이 옵니다. 끼니걱정하는 편지부터 시작해서 자기의 빚을 갚아달라는 편지까지 옵니다. 심지어는 자기아들 해외 연수 가는데 보태달라는 편지까지 옵니다. 근데 그렇지 않다면 선교사님들도 더 낳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합니다. 근데 제가 아는 목사님들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교회에서 고난을 안줍니다. 그래서 순차적으로 넣어드리면 담임목사가 되는데 단돈 50만원을 마음대로 못쓰게 합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은 목사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목회하면 안 됩니다. 한국은 그래도 좀 낳습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목회자에게 존경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미국에서는 어느 목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고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심취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끝나고 막 나가는데 장로님 한분이 막 따라와서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그러더랍니다. ‘애들 생각도 하셔야지요. 이 교회 짤리면 어디에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하잖습니까. 누가 그러던데 그거 하나는 정말 속 편하다구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자기 눈치 보지 자기가 눈치 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버클리에 있는 목회자들이 너무 부러워 하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미국에 집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을 해서 300명이 모였습니다. 미국에서 쉬운 것이 아닌데 교회가 쪼개져서 150명이 나갔습니다. 여기 올라갔는데 이렇게 빛이 비쳐야 하는데 이렇게 없어요. 컴컴해서 '목사님 전기를 하나 다세요. 그래야 설교자가 얼굴이 환해서 모든 교인들이 볼 거 아니에요.'그랬더니 '목사님 집회끝나고 가기전에 우리 장로들한테 얘기해서 등좀 하나 달라고 하세요'(웃음)
그게 뭐냐하면 그것을 달 수 있는 권한을 안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달아달라고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딱 잘라서 ‘안됩니다’ 그러더랍니다. 왜 안돼냐고 그랬더니 여기다 등을 달면 목사님 얼굴은 환하게 비추기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혼자만 영광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럼 조명가게 사장님은 뭐 하나님보다 더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수백개의 조명을 받으니까요.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은 이름만 대면 아는 목사님인데 청병을 받으러 갔는데 이 강대가 너무 높더랍니다. 그래서 한 80센티만 낮춥시다 했더니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일 년에 10센티씩 몰래 낮췄답니다. 8년이 걸렸답니다. 그래도 사실 저는 그렇게 목회하진 않았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황당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모르실 것입니다. 정말로 모르실 것입니다. 근데 누구에게는 십자가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우선 제일먼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 공식을 대입해 보세요. 정말 나의 자녀들은 회심을 했을까. 그리고 정말 구원을 받았을까. 한번 대화를 나눠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째튼 여러분들이 돌보도록 맡겨진 양떼. 동네에 사는 사람은 얘기 할 거 없고 등록해서 여러분들의 목장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명단을 적고 비록 외국 사람들이지만 대화를 많이 해서 한번 정확하게 사실을 알아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이 사람들이 회심을 했는지 않 했는지를 조사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러면 회심하지 않았을 때 이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한번 성경적으로 규명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갑니다. 자꾸 예수님이 쓰러지시니까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어서 따라가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한결같이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들은 슬피 울면서 이 십자가의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여자들이 너무 우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에클라우셀'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몸을 돌리시며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마라.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라. 이유가 무엇때 문이었냐면 예수님은 40년후에 역사적으로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이 피투성이되어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때문에 통곡하며 울지만 그렇지만 40년 후에는 큰 심판이 임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데 그때는 피가 도랑을 이룰것이고 이민족의 말발굽이 예루살렘을 짖밟아 너희를 도륙할 것이다. 그때의 너희의 자녀들이 그 끔찍한 일을 당하는 바로 그 세대가 될것이다. 나는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은 몸.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께 올라가고 다시 심판자로 이세상에 영광스럽게 재림할 것이지만 너희의 자녀들은 그렇게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니 회개하고 울어라. 선교사님들, 선교를 잘 하고 있다는 것이 자기 자녀도 선교를 잘하고 있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우셨습니까? 그 눈물을 병에 담으면 얼마큼 될까요? 가장 훌륭한 선교는 좋은 엄마, 훌륭한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식에게 두 가지만 하면 부모의 역할을 하면 부모의 역할을 모두 한 것 입니다. 첫째는 기본적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교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심하여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두 가지만 하면 그는 모든 것 을 한 부모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분들은 부모님으로 받은 유산도 많고 옛날에 사업을 해서 재산이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 물려줄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복에 기인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살아있는 신앙심. 이것은 그 아이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살던지 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은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아까 말씀드린 여든 세살의 그 망령된 할아버지 같은 자식이 나온다면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의 자녀의 영혼의 상태를 성실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무엇이냐하면 '매일 아빠가 기도해 주기'입니다. 아이가 와서 "아빠 교회에서 숙제 내 주었어요. 나 기도해 주래." 아빠가 자기도 회심을 안했는데 애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려니 너무 낯 간지러워서 "엄마더러 해달라고 해라." 하고 이틀인가를 안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밥 먹다가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아빠는 나빠. 왜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기도해 주라고 선생님이 숙제를 냈는데 아빠는 도데체 기도를 안 해주는 거야? 아빠 때문에 내가 숙제 안 해온 학생이 되잖아." 할 수 없이 이 아빠가 밤에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를 하다가 아빠가 회심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아이를 위해서 울어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자신은 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해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들이 아무리 사랑해줘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큰 사랑으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감싸주면서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렀는지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그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는 항상 자식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편안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떠나고 그러다 이런 나라에 오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그러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린나이에 심지어 고등학생 중학생밖에 안된 나이에 기껏해야 대학교 들어갈 나이에 외국에 공부하러 보내버리고 자기는 못가고 항상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이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지만 영원히 우리들이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아이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자기 안에 계신 우리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아이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길을 걸어 갑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러분들이 그렇게 선교 일에 바빠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그것이 이 아이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체험하는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한없이 퍼주고 돌봐주었다고 해서 아이들이 효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것이 그 아이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여러분의 자녀가 회심하는 일을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러고 회심하지 않았다고 믿어지게 되면 더 늦기 전에 이제 여러분들의 품을 떠나면 그 아이가 영영 그 신앙을 안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제 주위의 가까이 지내는 노회에 있는 목사님들의 자제들 중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때 까지는 부모의 감시하에 있으니까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도회지로 가거나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면 아니면 지방으로 안내려 가면 '저 이제 회사 다니니까 독립 할래요 하더니 교회에 출석을 안합니다. 목회자의 자녀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노년에 눈을 감으면서 우리의 자식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눈을 감는다면 우리가 다른 모든 방면에서 성공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 하면 끝까지 예수를 안 믿다가 자녀들이 지옥의 불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면 천국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거기가 과연 천국이 될 수 있겠느냐 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줬더니 제가 가르치는 대학에서 어느 여학생이 글을 써서 레포트를 냈습니다. 자기가 너무 예뻐하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너무 예뻐하고 사니까 엄마가 너무 싫어하는데 어느날 학교 갔다가 오니까 이 강아지를 저 시골로 보내 버린 것입니다. 두 달동안을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 강아지 생각만 하면 눈에 이슬이 맺히는 상태가 2년이 가더랍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회개하는 내용을 썼는데 나는 누구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슬퍼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친구의 영혼, 우리 가족들의 영혼이 개의 영혼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선교사역 하면서 울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의 영혼 보다 더 소중한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양떼의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일까요?
선교를 할 때는 종종 교만해 질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할 때 사람들이 홀리듯이 듣고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듣겠다고 몰려오면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면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잘 하는것 같아도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 같아도 저 어두운 구석에서 회심하지 못 한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역을 하면서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그 모든 이유들이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자녀들을 유아세례줄 때에는 우리가 서약을 했었습니다. 이 아이의 구원을 나의 구원으로 여기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가 믿는 종교의 도리를 거룩한 모범과 함께 이 아이에게 가르치기를 힘쓰기로 다짐하느뇨? 라고 할 때 '아멘' 하나님의 교회 앞에 서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것이 부모들의 전적인 책임이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이 자녀가 진정한 회심에 이르도록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어떻게냐 하면 마치 어린아이의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을 때 사랑하는 아들을 귀여운 딸을 떠나 보냈을 때 처럼 상념에 슬픔에 잠긴 엄마처럼. 참척의 슬픔에 잠긴 아빠처럼. 그렇게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아이를 위하여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도 보다 본질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는 영혼에게 온갖 좋은 것을 가르치고 기독교적인 예의를 가르쳐도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혼 하나하나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돌보고 하나님의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성령의 은혜를 주시도록. 그래서 우리의 어눌한 설교를 듣고도 이 사람들이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꼭 믿는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눈물을 간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