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교역자 수련회 개회예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오늘날 목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도 기능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목사는 도의 사람입니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생애적으로 깊이 체험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도에 이르지 않으면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깨닫고 체험한 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관심사가 두 가지 나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의 삶의 한 가지 이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화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예수화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화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인간이 예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화 된다는 것은 예수 안에 계시된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양측면을 모두 보여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화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다양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중 하나는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의 분신처럼 되는데 도가 멀리 있어서 끊임없이 수도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게 살아있어서 참 예수 안에 계시된 인격을 본받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이상입니다. 두 번째 이상은 뭐냐 하면 ‘너희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은 나로 만족하지 않고 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전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절실히 기도하는 이유도 회심을 통해서 그대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없이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구원파입니다. 중생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화될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적인 자기 욕심에 빠진 사람을 “너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거지.”라고 하는데 원래 입신양명(立身揚名)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입신(立身)은 자기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천지를 주관하는 진리에 자기 자신을 합치시키심으로써 자신이 참된 인간이 되게끔 세우는 것입니다. 세움의 과정에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 처음 시작이 공부하는 것, 배우는 것입니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신에 의한 자각을 갖고 학생이 됩니다. 양명(揚名)은 무엇입니까? 이름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회장이 되었다. 저 사람이 총장이 되었다.”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양명은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후대에 이루어집니다. 선비는 당대에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을 아주 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선비는 외롭게 진리를 말하고 참 인간의 도를 말합니다. 당대에 그들은 항상 거치는 돌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를 보면 어느 폴리스에서 도편추방(오스트라카)을 합니다. 오스트라카는 조개껍질, 혹은 도자기 쪼가리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직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에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 이름을 적어라.” 하면 이름을 적어서 던져 버립니다. 그것을 모아서 표를 계산해서 많이 얻은 사람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덕이 있는 사람이 많은 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너, 저 사람 찍었어?” “응, 썼어.” “저 사람은 나쁜 일 한 사람도 아닌데, 왜 쫓아내는 거지?” 그 사람의 별명은 ‘더 저스트(the just)’, ‘의’였습니다. “나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저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난다.” 의인이라는 소리가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서 있는 존재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 불편한 것입니다. 룸살롱 옆에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후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아, 그는 성실한 삶을 추구한 사람이 있었구나.’ 그 사람을 발견하고 추종합니다. 그게 바로 ‘양명’입니다.
선비들에게 있어서 입신양명은 삶의 목표였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입신’은 자기완성이고 ‘양명’은 이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완성하는 동기는 이인, 사람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짐승처럼 인생을 살아가는가? 정말 가엾다. 너에게는 진리의 빛이 없구나. 나는 가졌으니 나는 너에게 빚진 사람이다.’ 그러면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삶의 모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참된 인간의 도리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맹자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넓은 집에 살며”, 이것이 뭐냐 하면 ‘도덕’, 내지 ‘대의’입니다. ‘대의’, ‘가장 올바른 곳에 서며, 가장 넓은 집에 살며, 가장 올바른 곳에 서며, 가장 넓은 길로 행하여’, 이것은 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대도’, 큰 길입니다. “큰길로 행하며 뜻을 얻으면 일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가리니 세상의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할 수 없고 세상의 권력과 유력이 그를 굴복하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를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부른다.” 이것이 ‘대장부’의 의미입니다. 주먹질을 잘 하는 사람이 대장이 아니라 큰 꿈을 꾸는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영화 ‘사도’에 보면 영조가 세자를 자르고 싶어 했습니다. 왕이 “저놈을 잘라라.” 하면 체신머리가 없으니까 중량감이 있는 신하에게 주청을 올리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가 편지를 남기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죽음은 좌절의 표현이 아니라 근절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대장부의 언어입니다. 똑바른 길을 걸어가는데 굽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를 버리지 않고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 때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그 다음 사람에게 시킵니다. 그 다음 사람도 똑같이 “전하,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죽습니다. 혹은 유배지로 가게 됩니다. 유배지로 가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정진하며 글을 씁니다. 그리고 양명을 합니다. 마지막에는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여 죽는데 “나에게 사역을 먹이다니.” 선비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명을 생각합니다. 선비가 되는 순간 그들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에 잘못된 명령으로 사약을 받아 죽는데 그것이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나오는 피로써 그것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원래 그러한 사람입니다. 거기에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이 내게 와도 도덕을 구하는 사람은 공명을 하찮게 여기며,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를 탐하지 않습니다. 부귀를 탐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할 짓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혼자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거기에서 단두대의 칼이 뚝 떨어져서 목이 잘리는 대도 그것이 대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똑바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이 자기의 신념을 따라 죽습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닙니다, 연암 박지원의 『호질』이란 책에 보면 호랑이가 못된 사람들을 징벌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유학자인데 밤마다 과부집을 뒤지는 남자가 나옵니다. 유학자이지만 군자는 아닙니다. 지식은 잔뜩 들어있습니다. 이리로 들어와서 이리로 토해놓고 밥벌이를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게 ‘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고 해서 선비들의 가장 추잡한 학문입니다. 입구(口) 자에 귀이(耳), 이리로 듣고 이리로 토해내서 삯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온 몸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진리를 파악하고, 온 몸으로 생각하고, 온 몸으로 체험하고, 온 몸으로 그것을 따라 사는 것, 삶을 사랑하지만 언제든지 대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래서 죽음이 친구처럼 가까운 것,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아우라가 없습니다. 그 아우라는 신학교 1학년 때부터 나옵니다. 제가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뷔페 집에 가면 무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맨 처음에는 무순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을 씹어 잘근잘근 하면 영락없이 무 대가리 맛이 납니다. 크기는 달라도 아우라가 있어야 합니다. 무시할 수 없는 사람으로 뚜벅뚜벅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면서도 부귀에 대한 꿈이 그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세상의 무서운 권세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아우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가 아닙니다. 군자들만 선비가 될 수 있습니다. 선비들에게는 학문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귀를 얻는 수단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를 완성하고 이웃을 참다운 도덕의 질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퇴계 이황은 자신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하늘을 향한 ‘경’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터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학문과 사색, 생활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경외심을 가지고 학문, 자연, 자신의 내면세계, 이웃의 삶, 국가, 모든 것을 보면서 성심(誠心),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조악한 밥을 먹으며 간장 국물에 국수 한 그릇을 먹고 허기를 느껴도 누가 범접할 수 없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사는 이가 선비입니다. 이것은 르네상스의 인간상과 똑같습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꼬기또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같은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미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아무 것도 상관없이 자신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대자함으로써 자기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꼬기또 에르고 숨(Cogito, ergo sum.)같이 비합리적인 전제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파악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인간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실존철학자들은 결국 설명하기를 포기합니다. 저도 20대에 심취해 보았고 밤새도록 친구들에게 거품물며 떠들 수 있는 지식의 양이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인생의 도움을 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해결이 안 납니다. 인간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이웃을 세우는 과정과 결코 분리되지 않고 일치됩니다. 사역을 열심히 하였는데 10년, 20년이 지나도 인격이 개떡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섬기는 참다운 섬김일 수 없습니다. 섬기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을 단절해 버립니다. 내면속으로 파고들면서 자신이 어떠한 덕의 일을 요구합니다. 덕이라는 말 자체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산속에 있는데 무슨 영혼의 힘이 나오겠습니까? 무인도에 혼자 있는데 말입니다. 영혼의 힘이라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 강한지 약한지, 악덕인지 미덕인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관계적인 동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니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를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비들이 실재론적인 사고는 그러한 선비정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에 굉장히 도움을 줍니다. 이 이야기는 선비정신을 기독교에 덧입히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목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학문을 안 하는 목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없는 학문을 본 적 있습니까? 이웃과 분리된 경건, 지식과 동떨어진 경건을 본적이 있습니까? 모두 다 통합을 이루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되어 가고”라고 고백을 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이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은 것이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이웃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게끔 사는 것이 목사의, 엄밀히 이야기 하면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3천 명, 4천 명, 혹은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장로들이 모여서 내가 은퇴하고 나면 후임자가 왔을 때 교회가 성장할 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하는데 어느 장로는 20%의 확률로 본다고 합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잘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아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그 사람의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왜 나쁘겠습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하려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대게 도저히 큰 교회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마음을 비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마음을 비운 것도 있지만 능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릇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단에 올라갔을 때만 진리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산속에 있을 때도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생각하던 것을 말하고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고, 기회가 없으면 그것을 혼자 조용히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물러납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은 최고 정점의 상태에서 은퇴를 합니다. 아까운 상태에서 은퇴하는 것입니다. 최용석 교수 설교는 진짜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런 설교를 들어볼 수 없을 정도로 무르익었습니다. 이제 은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은 자기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자체가 퇴장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현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 잠깐 피고 지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큰 교회를 할 수도 있고 작은 교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허전한 것입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도 주일날 정신없이 사람들이 좁은 예배당을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 혼자 예배당에 서 있을 때 가슴이 텅 비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역이 크고 활발하다는 것과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목사의 길은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사역을 할 때나 안할 때나 동일한 삶의 이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자의 이상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존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열렬하면 기도도 열렬합니다. 사람이 이기적이면 기도도 이기적입니다. 맨날 자기네 교회, 자기네 사역, 자기네 부서, 그것 밖에 모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사람됨과 그의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삶의 모든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보고서로 가르쳐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고서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고서를 잘 쓰면 ‘잘 하고 있네. 이 사람 별로인 가봐.’ 어느 정도는 평가가 되겠지만 어떻게 그것이 다 평가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누가 감독하고 가르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고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며 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따끔한 한 마디의 충고나 작은 실수 때문에 맞게 된 낭패를 통해 스스로 새기고 생각하며 큰 교훈을 얻어 자기를 완성해갑니다. 그것이 입신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덕을 후대의 사람이 기억할만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외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이신 주님이 자신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야기 했습니다. 이상근 교수님이 LA에 가서 96세가 되셨을 때 뵈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도 없이 혼자 사시는데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긴 내가 뭘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아내도 없고 나 혼자 90살이 넘어서 혼자된다고 했을 때 내가 과연 저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저것이 어느 하루에 형성된 마음일까?’ 제가 이야기 합니다. “사역 좀 잘 해라. 왜 그렇게 실수를 하냐. 지혜가 없는 거냐.” 여러분은 담임 목사가 사역에 대해 지적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덜 된 존재이구나. 나의 모자라는 성품과 마음의 경향성이 하나님의 일을 자꾸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자기 반성을 통해서 입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다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온전해 질 수 없는데 되는대로 살지.’ 이것은 잘못입니다. 온전해 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고쳐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빨리빨리 해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반복합니다. 일반적으로 두 번 세 번 네 번 같은 실수를 계속 하는 사람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우하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반성의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키워서 쓰고 싶어 하지 않고 잘 준비된 사람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치열한 입사 경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세상이 조금 나를 기다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사회와 세상에 그러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자기를 반성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귀를 누리거나 공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완성해 나가고, 자기 같은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 누군가가 참된 길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편한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번에 은정 비서가 사임을 하고 비서가 바뀌었습니다. 참 잘 하였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비서 복은 있습니다. 나를 뒤집어 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김수미 간사가 왔는데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목사님, 벽 하나 사이가 이렇게 먼지 몰랐어요.” “왜?” “목사님, 이렇게 사시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어떻게 사세요?”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지만 나는 내가 부럽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다시 반복해서 살겠는가 하면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감사할 줄도 모르겠네.’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잔인하신 분이십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끊임없이 진리를 토해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의 시련이 끝나면 또 다른 것이 옵니다. 어떤 때는 환경이 나를 괴롭혀서 진리를 깨닫게 하고, 환경은 가만히 있는데 진리가 나를 괴롭혀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도록 만듭니다. 나는 그것이 끝나는 순간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끝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싸움이니”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이라도 도를 찾고 걸어가는 사람에게 “아주 잘 했다. 정말 수고했구나. 이제 내게 와서 쉬어라.” 하실 때 그것이 유감스러운 초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마라나타!”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목사, 기독교 선비로서 사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쉽습니다. 확실히 공부를 잘 하고 똑똑한 사람은 설교를 잘 합니다. 외국에서 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불러서 강단을 세워 보면 ‘저건 아닌데.’ 하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틀이 짜여져서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딱 떨어집니다. 허툰 말은 대게 공부를 안 한 사람이 합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전하는 도에서 그 도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도에 자기의 진액을 발라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단에 서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끊임없이 그 도에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몸부림치면서 사는 삶이 그로 하여금 그 도에 대해서 말할 때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를 세워주는 진실 앞에 무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내가 이러한 존재여서는 안 되겠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무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이 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독특한 향취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우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은 즉, ‘입신’과 ‘양명’에 대한 고민, ‘수기’와 ‘치인’에 대한 고민, ‘자기완성’과 ‘이웃 완성’에 대한 고민은 같이 가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결심문을 10대에 썼습니다. 그의 결심문 제 1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와 이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는 이 길을 갈 거야.’ 그것은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자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 왜 그렇게 사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에드워즈 결심문 1번입니다. “나와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온 몸을 던져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는 부자였습니다. 지금으로 환산해 보면 수백억의 갑부였습니다. 땅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부귀를 찾아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던져주지 않았던 것은 유감입니다. 6명이나 되었던 노예를 거느렸던 것 또한 유감이고 은수저를 들지 않고는 밥을 먹지 않았던 것도 유감입니다. 공동회의 때 사모가 손을 들고 생활비 좀 올려달라고 했던 것도 유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들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거기서부터 자유롭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여수 애양원에 갔다가 기겁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손양원 목사님을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이었는가를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뒤집어집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절절히 것이 있습니다.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과 실제 손양원 목사님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뒤바꿔 놓을 정도의 자료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에게도 흠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주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악한 쪽으로 해석하지 아니한다는 의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산정현교회 권사들, 장로들 중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인물이 태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할 것 같습니까? 그러면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찬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완성해 가시는 입신의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드높여 당신의 덕을 선전하게 하시는 양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사람도 외롭습니다. 세상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사람도 외롭습니다. 그러나 도의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로고스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