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김경애
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목사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면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합니다. 저도 그런 고민을 했고, 신학이 무엇이고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것은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훨씬 많은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최근에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라는 책을 썼습니다. 2,0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그중의 650페이지를 1권으로 냈고 그리고 2권과 3권을 지금 모두 다 써놓고 원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3년 내에 모든 책들이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면서 정리하게 된 내용 중의 하나가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정말 그 신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 자체를 목회를 위한 하나의 자격획득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실은 신학의 참된 아름다움과 그 향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올바르게 신학을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올바른 신학함에 대해서 다음 그림을 보시면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신학공부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런 지식이라는 것이 사랑과 결합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트 엘로힘’()에 대한 사상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라고 할 때 ‘다트’(지식)이라는 것은 ‘야다’() 라는 동사에서 나오는데 이 지식은 우리가 단순히 아는 것 같은 희랍적인 사유방식에서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게 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그 무엇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호세아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고 하실 정도로 그 지식이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 지식이 그리스인의 마인드에 그런 정보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 지식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사상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우리 온 인류에게 보여주실 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그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인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을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둘로스 크리스투’(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그리스의 노예라고 부를 때 자유로웠던 그를 노예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이 바로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아난케’(ananke)의 숙명에 매이게 되고 이것이 바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예수가 온전케 되기를 원했던 소망의 이유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다른 하나는 그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두 번째는 그 성품이 인류 속에 더 넓게 말하면 자연세계까지 그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작용하고 시행되는지를 아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의 깊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 뿐만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자신 그리고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름다우시다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는 하나님의 이름 ‘쉠’()에 대한 찬송이 나옵니다. 히브리어에서 ‘쉠’ 이름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물의 본질적인 특성을 대변하는 것으로써 그 사물의 이름은 곧 그 사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똑같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과 완전 동의어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그 아름다움에 대한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올바른 신학을 할 수 있는 지성의 중요한 자격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능력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 신학교에서도 여학생들이 결혼이 늦어지거나 잘 못 갑니다. 학교를 오래 다니고 수많은 남학생에 둘러싸여 있는데 프러포즈 한번 받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진짜 예쁜 여학생은 그의 신앙이나 출신 교파와 상관없이 신천지만 빼놓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남학생들이 데시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왜 대부분의 여학생은 문자 한번 못 받아 보고 왜 어떤 여학생은 열 명, 열다섯 명의 남학생들이 돌격을 할까?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 예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잘 봐라 저런 얼굴이 예쁜 얼굴이다. 저런 얼굴은 미운 얼굴이다.’ 이런 교육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알아보는 것입니다. ‘아, 예쁘구나!’ 그런 심리적인 능력이 자연적으로도 있는데 이런 영적인 정신적인 심리적 능력을 갖춘 지성이 신학공부를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중생과 참된 회심을 통해서 New sense가 Spirit 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다운 중생과 회심 이것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감각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고, 높고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히 (우리는) 그분 앞에서 뛰어난 위엄과 권능과 영광이 너무 커서 그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떠는 부복함으로 신학을 시작해야 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런데 만약에 그것밖에 없다면 그 두려운 공포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랑을 경험합니다.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분이 참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왜 그런지 그분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사랑의 이끌림을 경험하고 신학공부가 시작이 되고 또 그런 심미적 활동과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속에서 신학이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의 조화는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제네바의 개혁자인 존 칼빈이 내세웠던 표지가 ‘Pietas et scientia’ ‘pietas는 그야말로 경건입니다. ‘scientia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하나가 편지 속에 남긴 말인데 이것이 나중에 제네바 문서의 문장이 됩니다. ‘Cor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님이시여 저의 마음을 당신께만 드립니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지금 화면에 보면 인물 한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기스베르티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라틴어이름입니다. 화란어 이름으로는 ‘히스베스트 휘치우스’ 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17세기에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대학의 교수였고 영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침체기에 있던 네덜란드의 제2종교개혁 소위 나데레 리포르마티(Nadere Reformatie)라는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는) 아주 경건한 신학자였고 당대에 이 사람보다 가톨릭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박식한 논쟁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학생들과 아주 뜨거운 경건을 나누면서 그 학생들에게 그룹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온몸으로 실천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Precisinism'이라는 엄정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엄정하게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러한 엄정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일치해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신대원 학생들이 저희 교회에 와서 인턴십 훈련을 받는데 스물 댓 명이 와서 훈련을 받습니다. 근데 그 중의 한 학생이 과제를 수행하다가 정직의 문제에 걸려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하드 드라이버 외장하드에 엄청나게 많은 PDF 파일로 된 책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그것을 모두 지워버렸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돈은 없고 책은 살 수 없고 하니까 친구들이 PDF 파일 떠놓은 것을 돌려보면서 했는데 이런 것들이 휘치우스의 눈에서 보면 너무 위선적이고 야비한 행동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식으로 남의 책이나 복사해서 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다고 할지라도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신학 함이라는 것은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맨 오른쪽에 보면 옥스퍼드의 홀리클럽(Holy Club)의 사인입니다. 옥스퍼드클럽의 이 사람들은 Methodist 라고 불렀습니다. 감리교도라고 불렸지만 원래는 감리교도라는 뜻이 아니라 영어 Method 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방식주의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그랬습니까? 그들이 철저하게 영국 사회에 대해서 성찰하면서 그 당시 영국사회는 윌리엄 렉키(William Lecky) 같은 사람에 의하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 영국사회를 복음으로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들이 굳게 붙들었던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대로의 삶, The way of living' 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는 신행일치의 삶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의 방식이 불신자들과 구별이 잘 안되는데 이 사람들은 뚜렷하게 구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Methodist 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조롱이 섞인 명칭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결국은 우리 기독교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목회의 전통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것이고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이 함께 어우러진 가운데 목회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후대에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성경의 해석을 아주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들의 체험 속에서 더 풍부하게 만들어내어서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누려 행복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행복해지고 그 결과물들을 다음세대에 남겨주어서 그 다음세대들이 지식의 빛 아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하는 것이 신학과 목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문제는 신학과 설교가 찢어져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의 설교라고 해서 깊이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교파별로 뚜렷한 설교의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배에 독특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다니던 교회가 장로교였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을 시골에서 다녔는데 거기는 감리교였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닐 때는 성결교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성결교의 목사님은 굉장히 뜨겁고 열렬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도나 설교할 때 얼굴이 새빨개지시면서 외치시던 광경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설교 속에 탁월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지금은 열정도 사라지고 신학의 내용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설교라는 것은 절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한편의 설교는 한 번의 신학적인 표명입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 어떤 장중한 신학이 자신 속에 밀려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학 함이라는 것은 지식과 경건과 목회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복음주의의 뿌리는 역사적인 종교개혁에 있다고 봅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는 -특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주의는- 두 개의 뿌리를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인 뿌리와 부흥주의라는 또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18세기에 미국에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나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1차 대각성운동과 찰스 피니에 의해 주도 되었던 2차 대각성운동과 같은 이런 각성운동과 기도운동 등으로 이어지던 부흥주의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Revivalism’이라고 불리는 이 부흥주의는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부흥주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성령에 대한 격정적인 강조를 하면서 어려움을 가진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들을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이전까지 목사가 되려면 의사가 되는 것처럼 일단은 기본적인 자질이 지성의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미국을 기준으로 ‘목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항상 진리와 연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목사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뭔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기독교신학에 있어서 지성적인 전통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페이지를 보시면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숲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집회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옆에 횃불이 타고 있고 저 앞에 강대에서는 몇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손을 쳐들고 있는데 설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말에 켄터키 지방에서 있었던 부흥운동입니다. 이때에 어떤 강력한 영적인 체험이 있었고 이것들을 잘못 해석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주장합니다. 그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Wonderful Freedom을 주장합니다. 즉 신학을 공부하고 지성의 자격을 갖추고 그렇게 해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던 시대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던 구시대이고, 지금은 놀라운 성령이 역사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즉시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주장들이 나중에는 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 중에 회심이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쫒아버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이안 머레이라는 영국의 학자가 이런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던 이들은 설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두는 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냥 설교하면 된다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들은 부흥주의를 계속 촉진하게 되고 그러면서 2차 대각성운동 때에 와서는 이 부흥운동이 완전히 변질됩니다. 이때 지도자였던 찰스 피니라는 사람은 신학적으로 매우 부주의한 사람이었고 원죄부터 시작해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복음을 믿어지게 하는 성령의 역사까지 모두 거부하던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자였습니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를 훨씬 넘어서는 펠라기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드와이트 무디 같은 사람을 거치면서 그 후에 은사주의로 발전하고 20세기에 오순절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세상을 정복하는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한쪽 날개가 지식과 사상입니다. 또 한쪽의 날개는 사랑과 윤리입니다. 그래서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이 두 개의 기둥이 있었고 이 두 개의 기둥을 실제의 삶속에서 구현되도록 연결해주는 아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런 지성과 사상과 윤리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의 웅장한 전통인 한쪽 기둥이 훼손되면서 사상과 지식이 무너져버렸고 사실은 윤리라는 이런 기둥들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체험을 강조할 때 비인격적인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학교마다 교단마다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부정적인 영향력을 각기 모두 예외 없이 받으면서 오늘 지금 이 시점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런 조나단 에드워즈시대 때에 함께 1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크게 미쳤던 인물이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가인 조지 휫필드였습니다. 한때는 제가 이 사람의 설교와 전기를 모으는 일에 열심을 냈었는데 젊은 시절에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는 그 후에 있었던 엉터리 설교자와는 질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설교가 굉장히 성경적이었고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깊이나 이런 면에 있어서는 에드워즈와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조지 휘트필드가 자주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에 와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에 에드워즈가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관적인 충동, 설교나 부흥회의 어떤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충동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게 됩니다. 이때에 휘트필드는 무시합니다. 이러한 사실부터 이미 벌써 이런 조짐들이 넓게 확산되어서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이 지적이고 사상적인 전통들을 파괴할 위험성들이 이미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조지 마스던이라는 학자는 현존하는 최고의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가중 한사람인데,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휘트필드가 영적 충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꾸짖었을 때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은 채 그 주제를 무시했다. 두 복음전도자는 협력자였지만 함께 사역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들이 올바른 신학 함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선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에센스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엑기스로 모아놓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엑기스일까요? 아름답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보자면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어떤 사물이 아름답다고 할 때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으로 볼 때에는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은 동의를 하지 않는데 혼자서 어떤 사람이 너무 예쁘게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니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즉 아름다운 것은 진리와 같아서 객관과 주관에 걸쳐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예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는 그런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저녁때 집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컴퓨터게임을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런데 컴퓨터게임을 합니다. 내가 아는 어느 목사도 갔더니 컴퓨터에 써 붙였습니다. ‘게임은 절대 하지 말자.’ 저는 게임에 몰두해본 적도 없지만 20년 전에 딱 한번 6시간을 해본 것이 전부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끌렸으면 하지말자고 목사가 거기에 써 붙여 놓았겠습니까? 끌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두 가지 사실(fact)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어떤 사물의 개별적 완전성입니다. 어떤 사물이 이데아에 완전히 합치해서 완전할 때 그것이 예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편적 질서와의 어울림이 그 아름다움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소나무가 뿌리째 흙덩어리와 함께 여기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해보면 예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나무가 아무리 훌륭한 몇 십 억짜리 소나무라고 할지라도 주변 환경하고 안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나무가 파란 바다와 하얀 모래밭이 있는 곳에 숲을 이루고 있다면 아주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두 번째 팩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인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과 당신의 아름다움을 구속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온 땅에 알리는 가장 훌륭한 장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이 아름다움의 진수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 중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렇게 지금 이렇게 활처럼 세 개의 반원이 그려져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나타냅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보면 밑으로 캐 내려가면 하나님의 성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다.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사랑하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사역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면서 그 지식을 가지고 구속사역을 볼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 생각나게 됩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워낙 조나단 에드워즈를 좋아하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 인생의 네, 다섯 되는 멘토 중의 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일대학에서 나온 에드워즈 전집 27권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2-3권을 빼놓고는 다 읽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최고의 연구가 중의 한분인 이 분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만났는데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한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가 도달한 아주 중요한 결론은 ‘목회가 무엇인가?’이었습니다. (결국)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각에 따르면 목회란 그냥 교회의 재산을 불리고 빌딩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이 바로 목회의 본질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진실한 인격입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신학공부는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입니다. 연애는 너무 약합니다. 열애입니다. 하나님과의 Burning love. 불타는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신학을 하는 방식입니다. 혹시 성경을 읽으면서 최근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찬송을 하면서, 혹은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주면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성품에 목이 메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신학의 가장 훌륭한 방식입니다.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할 때 -‘Theology’ 할 때 목사가 되기 위한 전문직 양성을 위한 필수과정으로써의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의미하게 된 것은 슐라이어마허 이후에 생겨난 신학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학 그 자체를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모든 인간은 신학인으로 태어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는 선언도 훌륭한 신학적인 표명입니다. 모든 인간은 신학인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학입니다.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하나인 페르투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네덜란드 신학자는 ‘독트리나 에스트 비벤디 데오 퍼 크리스툼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신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정의들을 다 모아서 정의 했습니다.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 자체가 신학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제 나이 14년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15살 때입니다. 정확하게 14년 2개월 되었을 때 주일날 교회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고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었던 이유는 인생에 대한 자각이 생겨났는데 교회에서는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어린 나이에 목사님 설교를 집중해서 듣기도 했지만 별 특별한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때에 논둑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던 14년 2개월 된 아이의 마음의 고통은 아주 단순한 질문과 연관이 되어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세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면서 한참을 통곡하고 난 다음에 눈물을 씻고 논둑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무신론자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6년 동안 무신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교회에서는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목사님은 워낙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울었겠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이나 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Education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 속에 고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그것을 끌어내서 그 아이로 하여금 고민을 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인간은 진리를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결국 이런 가슴 저린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고 바로 신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모든 진리들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삶을 뒤흔드는 어떤 신학적인 명제, 신앙의 표명에 대해서 피어린 고뇌를 해봐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이 신학적인 진술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온 삶으로 온 몸뚱이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 확신에 따라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어야합니다.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 목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는 신학이 아니라 맨 처음에 기독교신앙을 가질 때 해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 진리와 신학적인 명제를 따라 사는 이 일에 내 목숨이 방해가 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그런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하고 신학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결국은 사상이 있어야할 것이고 그 사상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합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목회자의 소명이 진짜일까 의심해 봐야합니다. 떠밀려온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대학을 수없이 떨어져서 아니면 취업이 죽어도 안 되어서 이것이 소명이다. 그런 소명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부해야 하느냐하면 학교를 다닐 때에는 온전히 공부에 전념해서 공부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지경에 이르기까지 건강이 상할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공부해야합니다. 공부를 하다가 몇 번쯤 쓰러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까지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의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고백입니다. 딱 한사람 예외가 있는데 어거스틴입니다. 이 사람의 책 2권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은 천재구나!’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천재로 만드시고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겨우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십니까?’ 6개월을 기도했는데 정말 속상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은 아니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순자가 권학(勸學)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기일약(騏驥一躍) 불능십보(不能十步)―천리마가 한번을 뛴다고 해서 열 걸음을 갈 수 없고, 노마십가(駑馬十駕) 즉역급지(則亦及之) 공재불사(功在不舍)―노마라도 우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신학을 자신의 온 몸으로 추구해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그리고 세상을 올바로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세계를 올바르게 가꾸며,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신학공부를 해서 지금은 비록 묘목이지만 묘목이었던 적이 없는 거목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국교회의 큰 나무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