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 세 번째 지평 2
녹취자: 도현정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부활의 지평들 A. 첫 번째 지평: 역사적 부활 B. 두 번째 지평: 종말적 부활 C. 세 번째 지평: 현재적 부활 III. 청교도 영성의 핵심: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삶 A. 그리스도와의 연합 B. 예수 죽음에 참여함 C. 예수 부활에 참여함 IV. 결론 |
지난 시간에는 III. 청교도 영성의 핵심 중 A.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하다가 끝이 났습니다. 연합의 세 지평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III. 청교도 영성의 핵심: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삶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뤄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의 구속도 마찬가지입지다. 창조, 구속,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단, 창조하실 때에는 성부가 중심이 되셨고, 구속할 때에는 성자가 중심이 되셨고, 구원을 적용시킬 때에는 성령이 중심이 되십니다. 나머지 두 위 없이 한 위의 사역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위의 배제도 없습니다.
A. 그리스도와의 연합
첫째는 성육신적 연합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인성을 가진 분이신데 이 인성을 가진 그분이 사람들과 인성적 연합을 가지십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관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바라보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관련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만물들은 하나님은 일정한 법칙을 주셨고, 인간이 직접 돌보지 않아도 만물은 움직입니다. 그 법칙은 무엇입니까? 법칙만 만들어놓고 하나님은 하늘로 철수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법칙 안에 계십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모든 만물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학문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 규칙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빙크는 이를 로고스 실재론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만물은 일정한 규칙이 있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계셔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자연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인간이 그리스도와 아무 연관 없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써 모든 인류와 본성적 연합을 가지십니다. 어떤 사람이 극악하게 살아와서 사회에 커다란 손해를 끼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악을 저지를 때에도 여전히 그 사람이 가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인정받아야 하는데, 바로 그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와의 인성의 연합에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 연합을 발견하는 것이고, 충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비적 연합입니다. 첫 번째 연합까지는 불신자들도 가지는 연합이지만 이제부터는 신자만이 가지는 연합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 교회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육신적 연합은 영적 생명은 없습니다. 신비적 연합을 가지기 전까지 사실상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랬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은 교회 밖에 있던 자를 교회에 접붙이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연합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로써 첫 번째 연합은 모든 인류, 두 번째 연합은 모든 신자라는 전제가 있게 됩니다.
세 번째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자들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며, 매일 매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면서 성화되어 가고, 점점 더 성숙한 신앙적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 사람들을 모두를 통해서 이뤄진 모든 교회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이 연합은 성화된 혹은 영화된 신자들만이 누리는 복이며 연합입니다. 이것을 제가 제 3의 지평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까지는 많이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이 세 번째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연합을 정리하자면, 이 세상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인생을 살다가 자신의 힘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거듭나게 되면 신비적 연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듭난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많이 깨어지게 되고 기도하게 되며 무수히 많은 시련을 견디게 되는데, 이렇게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겪는 고난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는 절대적 십자가와 상대적 십자가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고유한 의미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이며, 이는 인간이 동참할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 때문에 겪는 고난입니다.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는 자기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십자가, 예를 들어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그것 때문에 자신 안팎으로 질서가 깨어지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일 수가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잘못 살았는데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 잘못 살았던 모든 것은 예수를 믿어도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추억을 많이 쌓고 기도하고 모범을 보이면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존경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상처만 주게 되면 나중에 자식들과 좀 잘 해보려고 해도 가족은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이런 것이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의 실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절대적 십자가이든 상대적 십자가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 앞에서 잘 죽고, 또 그 시련을 통해 그분이 누군지 배워가는 기회로 삼는데, 그렇게 하는 동기가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참고 인내하고 성숙하는 기회로 삼을 때에 비로소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 봉헌이 됩니다. 그래서 1522년 마르틴 루터가 다음과 같은 혁명적 발언을 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평범한 진술이지만 당시에는 천지개벽할 만한 발언이었습니다. “남편이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때 하나님과 하늘의 천사는 미소를 띱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께 봉헌이 됩니다. 절대적 십자가이든 상대적 십자가이든 모든 것을 예수 때문에 견디고 인내하고 참아내면 그것이 그리스도께 봉헌이 됩니다. 그렇게 봉헌이 될 때 이 시련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빛나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닮은 인격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죽기 전보다 교회는 더 빛나고 거룩한 예수의 몸이 되어갑니다. 훗날 우리는 영화되고 구원의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이 전 과정을 가리켜 영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기서 ‘육체’라는 단어는 사르키(σαρκί)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를 이야기할 때에는 죄와 무관한 육체입니다(요1:14, 골2:5). 요한복음 1장 14절의 언급된 그 육신에 대한 이야기도 당시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익숙한 사상에서 보면 충격적 발언입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신 영역에서 물질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이기에,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아름다웠는데 인간이 죄를 짓고 그 세계를 망가뜨려버렸으나 망가진 그것을 치료하고 고치면 만물이 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과 창조세계에 내려진 저주가 풀리는 것과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에 오염된 육체입니다(롬3:20, 엡2:3).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7:5). 이것은 우리의 살덩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할 때에 이 말은 육체 속에 고난을 채워가면서 내 속에 가득 차 있었던 그 무언가를 몰아낸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죄성입니다.
B. 예수 죽음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들어옴으로 내 속에 있는 죄성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은 곧 죄를 죽이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칼빈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가를 짊어짐, 자기 부인, 내세묵상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앞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번째인 자기 부인은 wife가 아닙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행하면 할 때는 즐거웠겠으나 종국에는 인생을 파괴합니다. 먹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음식에 대한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체중 유지에는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는 것이 죽는 쾌락을 잘 압니다. 음식이 입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약 15초 정도라고 합니다. 음식이 주는 식감, 냄새, 모양, 터지는 즙 등등 목구멍 속으로 내려가면 아무 것도 못느끼는 그것을 입 속에서 단 15초를 느끼기 위해 그다지도 식탐에 매달립니다. 그러니 미각이 발달한 사람들은 얼마나 미친 듯이 따라가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15초씩 수 백번을 맛보아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했던 로마제국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은 이런 자는 몸이 형편없이 망가집니다. 식욕과 건강 두 가지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것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청각도 그렇습니다. 저는 청각이 매우 예민합니다. 오디오를 많이 들을 것 같으나 그 어떤 오디오의 음질에도 만족을 못해서 잘 안 듣습니다.
세 번째는 내세 묵상입니다. 잠세적인 것들은 영원의 빛으로 볼 때 의미가 드러납니다.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과 그 역사를 보고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탄핵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이제 탄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배웁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영원의 빛으로 우리의 현실을 봅니다. 영원까지는 그만두고 긴 안목을 두고 보면 인생에 대한 안목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그것을 영원으로 상승시켜서 우리의 잠세적 인생을 볼 때면 우리는 아마도 훨씬 더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잠시 지나가는 인생이라고 칼빈은 이야기 합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묵상하는 것은 죄를 죽이는 생활의 핵심입니다.
예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적인 차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개인적인 차원은 자기 깨어짐의 경험 안에 있는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합니다. 깨어진다는 것은 그릇 같은 것이 충격을 받아서 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곧 망가짐, 파괴됨인데, 자기 깨어짐을 이에 적용하여 생각하면 아주 부정적인 것에 대한 깨어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천국 소망보다는 지상의 낙을 추구하며 살려는 거친 마음, 죄성, 자기 사랑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자기 의, 자기사랑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자기의가 깨어질수록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옛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죽어 있고, 자신을 향해서는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애입니다. 신자는 시련과 고통에 믿음으로 참여하면서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한 신뢰를 버립니다. 절대 의존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첫째는 당신만이 당하시는 고난이 있고, 두 번째는 참여적 고난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류 구속을 위해 하나님으로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여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만의 고난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참여하도록 허락해 주신 고난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고난 뒤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됩니다.
여기에 한 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신자가 참여하도록 했는데 교회에 접붙여진 몸으로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고난에 참여하는 것만큼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고(예수의 생명이 넘치기 때문), 고난이 침투 못해서 참여 안한 것만큼은 성성하게 자기가 살아있어서 죄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죽게 한 그 죽음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신자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을 실재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 자동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신자,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견딘 신자, 그 고난 속에서 예수를 바라보며 자기 개인으로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연합된 가운데 참여하는 신자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 속에 실재화 됩니다. 예수의 몸 중에 일부가 되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신앙이 떨어져서 이기적이 되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프면 지체들에게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신앙이 충만해지면 시험에 들고 아파하는 다른 지체들의 고통이 내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들로 인해 슬퍼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 돌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느끼며 아파합니다. 예수 때문에 참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이미 십자기에 돌아가신 예수의 죽음이 영적으로 우리에게 스며들어 그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잘못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키고 죽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하면서 잘못 살아있는 이 많은 것들을 스며 들어온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이것을 삼키면서 죽입니다. 그 죽음만큼 까리따스의 사랑, 곧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가득차게 됩니다. 당연히 그것은 생명입니다. 순수한 영적 생명입니다. 요즘 주일에 진행되는 설교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원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상황을 이탈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삶의 상황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생명의 힘이 필요합니다. 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죽이는 만큼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그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골8:28, 고후1:10).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과 내세를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히 12:2, 눅 9:23). 육신을 죽이고 성령으로써 죄의 성향을 죽여야 합니다.
두 번째 교회의 차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자들이 참여할 수 없는 배타적 고난(마 26:31)이 있고, 신자들이 참여하도록 허락된 고난이(고전 12:26)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고난을 당신의 고난으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경험 안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고난이 우리에게 실제적 연합을 가져다줄까요?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원망하고 복수를 꿈꾸고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끊임없는 상처를 줄 뿐입니다. 이런 것을 겪는다고 해서 예수와의 연합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과 순종의 삶이 필요합니다. 현실은 억울하고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 없으나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성화시켜주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노나”는 시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음과 영혼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들어온 만큼 옛 자아는 죽고 새 자아가 살아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는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 안에서 교회는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합니다. 우주적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수께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사랑은 우리 모든 지체들에게 부어집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만약 신앙이 있다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다면, 그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게 만들고, 고통당하는 교회와 교회의 많은 지체들을 붙들고 고통당하게 되며 시련을 견뎌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흠 없이 순결한 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 죽게 됩니다. 공동체를 섬기면서 더 예수와의 실제적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시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함께 동참하게 될 때에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 있게 되고,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그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순종을 통해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자기를 봉헌하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고 그분의 이름으로 산다고 결단하며 이 고난에 참여할 때에 그분께 봉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게 됩니다.
C. 예수 부활에 참여함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는 예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깨어짐의 경험 안에 있는 새 사람은 살아납니다. 예수의 죽음이 신자의 마음속에 파고들 때 죄의 죽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죽은 만큼 파릇파릇한 예수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죄가 죽지 않은 만큼 육욕의 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정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의 성품은 중생과 함께 심겨진 새 본성과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바빙크는『개혁교의학 개요』(Our Reasonable Faith)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지하실 교회 있을 때에 공과교재였습니다. “신자들의 영적 싸움은…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의 싸움이며, 신자 안에 지속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죄와 신자의 마음 속에 심겨진 생명의 영적 원리 간의 싸움이다. 그것은 참된 의와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도록 재 창조된 마음의 속 사람과 비록 중심적 위치는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영역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더 맹렬하게 싸우는 옛 사람 간의 싸움이다. … 이 싸움의 심각성은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데, 새 사람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다.” 또 어거스틴은 『참된 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 사람의 끝이 죽음이듯이, 새 사람의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이다. 처음 인간이 죄의 사람이라면 나중 인간은 의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 두 종류의 사람에 있어서, 옛 사람 즉 땅의 사람은 한 인간이 일평생 사는 동안 끌고 다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피할 수 없이 옛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기 마련이며, 더욱이 그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비록 옛 사람이 쇠해가고 새 사람은 성장한다 할지라도 하사는 동안에는 항상 이 옛 사람을 끌고 다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동 깊습니다. 옛 사람은 어차피 끌고 다닙니다. 어떨 때는 옛 사람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술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는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다음은 사소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저의 정리입니다. “신자는 자기 깨어짐의 전 과정을 통해 마음의 쇄신을 경험하고, 마음의 틀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기에 적합한 틀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누립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거룩한 삶을 좇는 새로운 경향성이 되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에 적합하도록 신자를 준비시킵니다. 은혜 경험의 핵심은 죄인을 용서하고 당신과의 사귐 속으로 다시 부르시는 사랑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적 영향력의 크기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생명력의 총화입니다. 그 생명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죄 죽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안에 실재화되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부활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 부활의 생명을 현재적으로 누림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고난을 이기고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도록 부름 받고 있는 부활의 세 번째 지평입니다. 이 지평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