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1~4)
녹취자 : 오희열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유언처럼 쓴 편지입니다. 자신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도 부탁하라고 당부하면서 사도가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너도 빨리 감옥으로 와서 갇혀라.” 이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서 공동체가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1절부터 4절을 모두 설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1절에 보면,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너는 은혜 안에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강인함입니다. 이것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강함은 모든 것을 은근히 이기는 큰 힘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함입니다.
저는 그래도 목회 사역이라는 것을 83년부터 전도사가 되어서 했고, 전도사가 되기 3년 전부터 이미 전도사처럼 일을 했으니까 벌써 한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수많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진짜 못된 인간도 있었고 진짜 다시 봐서는 안 될 사람들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열정이 불타고, 가끔 섬기다 보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은 사람,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나쁘지 않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한 3년 뒤에 보면 없습니다. 넉넉잡아서 3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열정이나 눈물이 가식이었느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힘이 달리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2년만 하다가 도망칠 작정을 덤벼든 것이 아니라 하려고 했고 눈물도 사실이었고 마음의 열정도 진지했는데 힘이 달린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힘이 안 되니까 도저히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전국을 터널로 뚫어 놓았지만 예전에는 대관령을 아흔아홉 굽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세어보니까 아흔아홉까지는 안 되고 팔십 몇 굽이였습니다. 물론 조선 시대 때에는 아흔아홉 굽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끔 거기를 티코로 넘는 대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티코는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도 모를 것입니다. 티코 아십니까? 아시면 꽤 연세가 되신 것입니다. 원래 티코의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실 것입니다. “Tiny Cozy”, “작지만 편안한 차”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입니다. 불편합니다. 작다는 것은 맞는데 cozy는 아닙니다. 이 차가 대관령을 넘습니다. 그런데 엔진에서 불이 나야 합니다. 왕~! 하는 소리를 내면서 rpm 이 빨간 줄을 왔다 갔다 해야만 간신히 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5000cc 정도 되는 고급승용차가 간다고 해봅시다. 어떻겠습니까? rpm은 2000 에서 3000 왔다 갔다 하면 스르륵 넘습니다. 제가 티코를 운전해봤습니다. 시속 140km 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건 진짜 창공을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깡통에 넣어서 던진 것 같습니다. 그 속도감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시속 140 km 를 달립니다. 누가 못 달린다고 합니까? 그런데 계속 그렇게 간다면, 그리고 대관령의 높이가 두 배쯤 된다면 가다가 차가 박살나면서 퍼져버릴 것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예라고 생각합니다. 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죄송하지만 우리 집사람과 여행을 갔는데 그 여행 중에 딱 하룻밤 크루즈를 타는 코스가 있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부푼 꿈을 안고 크루즈를 탔는데 다시는 안탄다고 했습니다. 저희를 먹방에 집어넣었습니다. 약간 폐소 공포증 같은 것이 있습니다. 폐소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좀 시원하게 트인 곳을 좋아하고 컴컴한 곳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중간의 먹방에 저와 아내를 넣어 둔 것입니다. 연애하는 중이라면 거기도 재밌겠지만 말입니다. 그 다음날 올 때는 열리지는 않지만 창이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건 진짜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나 그걸 탈일이지 저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그 배가 8만5천 톤짜리 배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녁때 출발하는데 아내와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 이거 가는 거야? 안 가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니, 가만히 느껴봐.”, “못 느끼겠어. 안 가는 것 같아.” 밖을 봐도 너무 높으니까 배에 부딪치는 파도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고 어스름하니까 바깥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르고 그냥 잤습니다. 그런데 밤사이에 500km 정도를 갔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강인함은 그렇게 팔팔뛰는 강인함이 아니라 그렇게 항공모함처럼, 크루즈처럼 웬만한 파도가 와도 요동하지 않으면서 자기 갈 길을 쭉 가는, 그것이 강함입니다. 무엇도 못 막아내도록 밀고 가는 힘, 그것이 은혜 안에서 강한 것입니다.
지질 시간에 피요르드라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수능본지 오래되어서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피요르드는 빙하가 흐르면서 생긴 것입니다. 빙하는 원래 흐르기 때문에 하(하)를 쓴 것입니다. 얼음이 녹아서 흐른다는 것이 아니라 얼음 자체가 이동하기 때문에 빙하입니다. 그런데 100m 의 눈이 쌓여서 압축되어 7cm 가 된 것이 빙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빙하의 결정체에는 기포가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눌렸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응축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높이가 수 백 미터 되는 덩어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얼음을 한 번 들어봤는데 기포가 있는 얼음과 무게 자체가 다릅니다. 그것이 위에서부터 수 백 미터, 때로는 천 미터씩 된 것이 어느 한 순간에 녹아서 내리는데 지금은 그 내리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하루에 30cm 씩 이동을 합니다. 이것이 이상 현상으로 밀고 내려올 때 빙하가 어마어마한 무게로 땅을 누르면서 내려옵니다. 그 빙하가 밀고 나가고 빈자리에 바닷물이 들어온 것을 피요르드 지역이라고 합니다. 배를 타고 500m 만 나가면 단번에 수심 1000m 입니다. 그것이 무엇의 결과입니까? 힘. 팔딱팔딱 뛰는 힘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힘으로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이 추진하거나 밀어내는 힘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섬기다가보면 진짜 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팔팔 뜁니다. 그리고 막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1년 뒤에 시름시름하다가 2년 뒤에 깊은 침체에 빠진 후 3년 뒤에 사라지고 그 후 1년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신앙을 떠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강해지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미 정답이 나왔습니다. 제 설교는 쉽습니다. 어디 안에서 강하라고 했습니까? “은혜 안에서” 입니다. 원래 강한 사람이 있습니까? 누굽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 강한 사람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마음에 막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고 열정적인 사람을 비난할 이유가 없고 여러분 모두 그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오랫동안 그래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든 저런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오래 그래야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쇄빙선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아라온 호입니다. 얼음을 깨고 지나갑니다. 두께 1m의 얼음을 깨고 지나간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3m의 얼음을 깨고 간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작은 자매들의 키를 둘 합친 두께입니다. 그것을 배가 우주주죽 찢고 가르면서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어마어마한 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힘이 꾸준히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영적인 힘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 안에서. 결국 마지막에 1년 전에 등불처럼 반짝거리던 사람들이, ‘저 사람 뭐 좀 하겠구나.’ 했는데 사라지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거나 물론 신변에 놀라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든지 시련을 당했다든지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전자기기가 모두 콘센트에 꽂혀있습니다. 그것을 확 뽑아보십시오. 모든 기능이 다 사라지듯이 그리스도인의 강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그때 강한 것입니다. 비록 지식이 좀 부족하고, 어떤 때는 인격도 좀 모자라는 것 같아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뻐하고 기도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살고, 이런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동행해 주시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은혜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섬기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쉬운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은 하나님이 우리로 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요즘은 꽃길 신앙이 대세입니다. 꽃길을 걷는 신앙? 제가 아무리 해도 읽지 않는 것이 간증인데, 간증을 봐도 늘 꽃길 간증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니까 이런 것도 좋고 이렇게 취직도 되고 했더라 하는 꽃길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버린 사람들은 꽃길만 걷게 하셔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꽃길만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 거기에 행복의 기준을 맞추면 종교를 갱신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꽃길 인생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사람이 여기에 올라와서 짧은 연설을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을 한다고 합시다. 그게 나이든지 여러분이든지 지체든지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짧은 말인데 큰 울림을 줍니다. 그런 아우라는 수만 리 꽃길을 걸어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시밭길을 걷게 하시느냐? 물론입니다. 가시밭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 구원받은 신자는 두고 가는 세상이 그리워서 눈물 흘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는 순간부터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그 가시밭길을 걷는 것이 신앙에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런데 괜찮습니다. 거기서 향기가 날립니다. 향기가 날립니다. 이것이 아주 오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여러분의 친구와 선배를 붙들고 이야기해 보십시오. 인생사는 것이 꽃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 철이 안 든 사람이고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살아서 힘들고 같이 사는 사람은 같이 살아서 힘들고 혼자 살까 같이 살까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고충이 있고 직업을 못 구한 사람은 또 고충이 있습니다. 더욱이 인생에서 뜻을 세우고 그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꽃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나를 부러워하는 어떤 후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팔딱팔딱 뛰는, 마치 바다에서 잡아온 생선이 육지로 올려다 놓으니까 미친 듯이 뛰는데 30cm, 40cm 를 점프합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합니까? 한 대여섯 번 뛰다가 그 다음에는 쭉 뻗어버립니다. 그런 것 말고, 파도가 와도 상관없이 쭉 지나가는 항공모함처럼, 얼음이 얼어도 3m 두께나 되는 얼음을 아무것도 없는 듯 조용히 깨면서 지나가는 쇄빙선처럼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여러분 같은 나이에 열린 교회를 만나서 지금은 거의 권사님 정도의 수준에 와있는 사람들, “목사님, 저 이번에 결혼해요.”, 혹은 “목사님, 저희 방금 결혼했어요.” 했는데 아이들이 벌써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매들도 있습니다. 한결 같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눈에 팔딱팔딱 뛰지 않아도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20년 전에 영혼을 섬기던 사람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구역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힘입니다. 그 사람이라고 꽃길만 걸었겠습니까? 결혼하고 시댁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세상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다 겪고 그것은 큰 차이가 없고 이 점에서 저 사람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저 점에 있어서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좋은 입장에 있다고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겪으면서도 조용히 3m 두께의 얼음을 깨고 지나가는 쇄빙선처럼 쫙 밀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산 아래 물 속에 무엇이 있든지 깊이 1000 m의 웅덩이를 만들면서 산을 깎고 내려가는 빙하처럼 그렇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안에 있는 강함입니까? 무슨 힘?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은혜를 받고, “뭐 어느 정도를 알고 나니까 새로운 것이 없고 지루하더라.” 하는 것은 부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아름다움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매일매일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의 지식의 양을 습득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기를, 거의 심장마비를 느낄 정도로 매일매일 발견해서 10살 때부터 한 80년을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 가운데 점 하나를 안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흐리멍덩한 마음속에서 신앙의 초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약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매들에게, “계속 나이는 먹고, 너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할래?”, 형제들에게, “너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물론 뭐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을 파고들면서 우리의 기를 꺾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내던지고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향해 연애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무계획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저는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때로는 긴 안목으로 봐야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긴 안목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전망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 그 가닥들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은혜 안에서 살면 하나님이 놀라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올해의 리더들은 은혜 안에서 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리더는 그 사람들에게 인도받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힘이 나는 사람이 있고 같이 앉아있으면 힘이 더 빠지는 리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넘치는 은혜의 강함으로 방황하는 사람을 붙들어주고 정신 나간 사람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눈을 뜨게 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콘센트에 탁 꼽고 그리고 말씀에 매일매일 은혜를 받고 무엇보다도 기도록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군사, 여기에는 “병사”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이 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군 체계는 사병, 부사관, 그 다음에 장교, 이렇게 세 계급으로 카테고리가 나누어 있습니다. 사병은 이등병부터 시작해서 병장까지가 사병입니다. 그 다음에 하사부터 원사까지가 부사관 입니다. 그리고 소위부터 그 위까지를 장교라고 부릅니다. 이 번역을 “군사”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병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장군과 영관급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병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런 예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군사”가 제일 좋은 번역입니다. 여기서 군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반성해야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Sweet Christianity, 달콤한 기독교입니다. 머쉬멜로우처럼, 초콜릿처럼, 그것도 다크 초콜릿이 아니라 스위트 밀크 초콜릿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로이스 초콜릿처럼. 그런 기독교가 되어 버렸고 그 다음에 매우 유약한, 연약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잃어버린 안일한 기독교, 그리고 소비적인 기독교. 이것이 오늘날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투적인 삶을 산 적은 없습니다. 다만 부흥의 시대에 영적으로 교회에 은혜가 충만했던 시대에는 전투적인 삶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그럴 때에는 교회가 그렇지 않은 달달한 기독교가 100년을 걸려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규모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전투적인 교회가 그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보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왕이 있고 전사가 있고 일반 백성이 있고 노예들도 있습니다. 그때 노예는 다른 나라의 노예 같지 않고 굉장히 인격적인, 사실은 slave 라기보다는 servant 로 불려야하는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전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국가의 국민의 숫자가 1만 명 정도 되는 나라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라의 규모가 크다고 해야 1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10%가 전사라고 한다면, 이 전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전투하는 훈련, 그리고 전쟁이 나면 언제든지 가서 싸울 준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은 당시에 이미 부패한 전사 그룹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군인들로서는 나를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을 요즘 우리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사는 기본적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인생의 시집가고 장가가고 알콩달콩 하며 사는 그런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욕망을 절제하고 음식의 양은 통제하지 않지만 음시그이 질은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 새로운 음식,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쾌락에 빠지면 군인 정신이 무너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 자기 인생에 최고의 보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지 않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예비군입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의 인생의 보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멋있는 말을 준비하고 잘 죽지 않는 갑옷과 창, 무기들을 준비하고 나라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전사들은 그보다 더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녀를 낳을 수는 있지만 1대1올 결혼해서 독립된 가정을 가지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전사는 늘 지혜자인 왕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 왕의 대단한 지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인생의 참된 도리를 생각하고 언제든지 이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준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장렬하게 자기를 바쳐서 죽는 사람들이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이런 집단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화랑제도는 여러분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이 화랑제도보다 더 지독한 화랑 같은 제도가 고구려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의제도”였습니다. 조의들은 단군신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장가는 물론 일체의 바깥 생활을 끊고 거의 승려처럼 생활하면서 밤낮으로 무력을 단련해서 조국이 부르면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을 모두 내어놓는다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조의였습니다. 제가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그게 몇 명이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고도로 수련된 사람들이고 연개소문도 그 조의 출신입니다. 이 사람들은 완전히 종교집단이고 무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양제가 쳐들어왔을 때 물리치고,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동원한 군대의 숫자가 3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집니다. 대단한 패배를 당하고 결국 모두 도망을 가고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은 있지만 북경까지 내려가서 국경선을 그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때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모두 조의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군량미 창고를 찾아내서 거기를 급습하여 모두 태워서 후방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일에 특공대처럼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습니다. 지금도 해군의 UDT, 미국의 SEAL, 그리고 특전사령부, 해병대, 이런 사람들은 군대의 체재 자체가 다릅니다. 눈빛 자체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진짜로 부패한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고, 공수특전단의 하사나 중사 쯤 되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낙하산을 일 년에 백 번씩 뛰어내리며 특공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군사를 많이 가진 나라가 강인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어떤 군사가 되라는 것입니까? 좋은 군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군사가 좋은 군사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가 왜 싸우는지를 알고 그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군사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기에 훌륭하게 연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exercise'라는 단어가 'exercitus'라는 라틴어에서 나옵니다. 이 말은 ‘군사훈련’입니다. ‘연습’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체력 단련하는 것도 exercise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군사들처럼 자기 일에 훌륭하게 단련되어 있어서 아주 능숙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군사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누구도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특수부대에 있었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육군에서 무궁화 두 개쯤을 달면 자기 부하들이 500명에서 600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특전 사령부의 무궁화 둘은 부하가 60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조직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결혼하고 나니까 우선 육체적으로 힘이 들고 근무지를 옮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나더랍니다. 그래서 결혼을 못 하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은 기본적으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혜택을 받으면서 한 가지 일에 그 사람이 집중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 로 여러분에게 강조했던 것은 강해져라. 그 강함은 은혜에서 온다. 그 강함은 팔딱팔딱 뛰는 강인함이 아니라 10년 쯤 지나도 거기 그냥 그렇게 있는 그 강인함이다. 시집을 가서 교구로 올라가서 있을 수도 있고 연세가 너무 많으신 분들은 한 20년 후에 소망부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거기에 가서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강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얽매이면 힘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군인이 아닙니다. 리더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리더는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지만 자기의 임무가 부를 때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은 하나님이 은혜 주신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풀르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보면 기록에 나오는데, 주전 327년 늦은 봄이었습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그리고 인도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영어식 발음이고 알렉산드로스는 희랍어식 발음입니다. 이 사람의 선생님이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이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천재였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되었어도 세계를 한 번 움직여 볼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 지도자로서의 한 면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한 가지 중요한 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전략을, 많은 군대를 거느리면서 숫자로 뭉개며 전쟁을 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스타일이었다고 한다면 알렉산더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많은 군대는 몸집이 비둔한 사람과 같아서 훌륭한 전투를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26만 대군을 4만으로 격파해 버립니다. 당연히 알렉산더 군대의 장점은 아주 기가 막힌 기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도로 진격을 해 가는데 군사들이 굉장히 굼뜨고 부대의 이동이 늦어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점검을 해 보니까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얻은 값진 전리품들이 수없이 수레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금은보화들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 보너스로 주고 나머지는 국고로 들어가면 국가를 부강하게 할 텐데, 어느 한 순간 움직임이 둔해진 부대를 보면서 알렉산더가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전리품을 내려놓아라. 모두 모아라!” 하고 불을 질러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수십 조, 수백 조의 값어치가 나갈 명품과 보석들을 모두 불태워 묻어버리고 길을 떠납니다. 이 일을 한 역사가가 이렇게 적습니다. 굉장히 감명 깊습니다. “그러자 그런 일은 계획하는 것일 실행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소수의 병사들만 불만스러워했을 뿐 대부분의 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군대는 더욱 전투 의지에 불타게 되었다.”
제 친구 목사님이 어떤 교회의 리더 수련회에 갔답니다. 시간표대로 하자면 자신의 강의가 몇 시에 끝나야 하는데 20분이 넘어가니까 여러 명이 안절부절 하더랍니다. 단체로 연극에 가려고 단체 입장권을 끊어놓았는데 자기의 강의가 끝나야 갈 텐데 강의가 길어져서 연극표를 공표를 날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수련회에 와서 아무리 하나님의 영혼 구원, 눈물이 있는 기도를 말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 상태로는 전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올 한해 이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주님을 향해 전의에 불타오르는 상.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어차피 여러분은 리더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한 1년을 버텨야합니다. 1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치욕 속에서 버틸 것인가? 아니면 1년 동안을 전의에 불타서 살 것인가?
정말 재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신앙이 사라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길을 잘 열어주시니까 마음이 잘 변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자기에 맡겨진 사명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은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뒤로 물러갑니다. 그것은 삶의 양상이지 그것이 궁극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왜? 기본적으로 군사는 자기 일에 얽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딱 붙들고 “내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아멘!” 금년 한 해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 앞에 떼어 놓은 해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 먼저, 영혼 먼저, 하나님 영광 먼저, 섬김 먼저.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전의에 불타지 않는 리더들이 모여서 무엇을 한들 거기에 전쟁에서의 승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정교한 작전회의를 짜면 뭐하겠습니까? 그 총알이 퍼붓는 전투지에 나갈 의욕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무엇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스 동중부 쪽에 가면 테르모필라이 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은 평야인데 해발 15m 남짓한 언덕이 있습니다. 소위 콜로미스 언덕이라는 곳입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리스는 폴리스가 작아서 연합군이 아직 뭉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쟁을 앞두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스파르타의 왕이 호소를 했지만 이 정치가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라는 사람이 몸소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마지막으로 막아야 하는 요충지로 달려갑니다. 계곡과 같이 있는 곳입니다. 그 역사적인 장면을 영화로 만든 것이 “300”입니다. 사실 300이 아니라 300명의 군사들이 레오니다스 왕과 거기에 있고 700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왕과 뜻을 같이 해서 1000명이 거기를 막은 것입니다. 쳐들어온 군대의 수는 1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300명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거기서 필사의 각오로 막은 것입니다. 거기서 살아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장렬하게 죽자,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렇게 죽기 살기를 각오하고 그 건장한 청년들이 거기서 페르시아 군대와 그 좁은 계속에서 싸웁니다. 100만 대군이 뚫지를 못합니다. 가보면 수많은 자신들의 동료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가면 죽고 또 죽습니다. 도저히 이기지를 못합니다. 결국 그것을 뚫게 되는데 마지막에 칼과 칼이 부딪치면서 칼까지 다 산산조각이 나고 병기라는 병기는 다 잃게 됩니다. 그때 팔 다리가 잘려진 스파르타 병사들이 이빨로 물어뜯고 죽어가면서 항전을 합니다. 일주일동안 그 100만 대군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연합을 조직하고 전열을 정비해서 100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막아내고 마지막 결정적으로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곳에서 대승을 거둠으로 그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100만 대군과 맞서서 300명이 7일 동안을 저항하다가 레오니다스 왕을 포함해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죽습니다. 지금도 콜로미스 언덕에 가면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여! 그대들이 스파르타에 가면 전해주오. 우리는 스파르타인답게 싸웠고 그리하여 여기에 묻혔노라.”
딱 한 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두 번도 아니고 연습도 안 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예전에는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몰라서 방황했습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그렇게 살기 싫어하거나 살기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 리더가 되었습니다. 자, 어떤 리더가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한낱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그저 풀잎처럼 태어나서 사라질 한 나라의 왕, 한 나라의 임금을 추종하며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전심으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명예가 이제까지 남아있다면,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사는 위대한 군사의 삶은 얼마나 놀라운 보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 기록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이런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며 산다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그렇게 전투적으로 사셨을 텐데,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졌을 텐데 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부탁이 아니라 주님의 부탁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얽매인 모든 문제를 주님 손에 맡기십시오. 하나님, 이런 많은 얽매인 것들이 있지만 나는 이것을 주님 손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명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 나와 동행해 주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