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 수련회 1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녹취자: 오희열
제가 여러분처럼 사역을 하던 약 25년 전과 비교를 하면 아주 놀라운 변화가 그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목회와 관련해서 일어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전선이 없어진 것입니다. 25년 전, 30년 전만 해도 선교와 목회에, 특히 목회에서 딱 전선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신앙이고 저기는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저것은 비 진리이다.’라는 전선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말입니다. 그런데 25년, 30년 사이에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아까 우리가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북한에는 특수부대원이 15만 명이고 우리는 약 3만 명 정도 되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는데 저는 그 숫자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옛날무기로 싸웠기 때문에 38선에서 모두 모여서 밀고 밀리는 전쟁이었지만 지금은 전쟁이 나는 동시에 북한이 타깃으로 삼는 미사일 폭격 목표지점이 1400 곳이고, 우리도 그 쪽에 타깃을 1천여 개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있는 미사일을 거의 다 퍼부으면서 비행기가 부산에서 평양까지 날아가는데 F22 같은 비행기로는 20분이면 날아갈 거리 밖에 안 되고 날아갈 필요도 없이 충청도에서 쏴도 평양까지 날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전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간첩들이 모두 동해안, 서해안으로 침투했습니다. 지금은 날도 추운데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관광객으로 들어오면 무제한으로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원의 개념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 사역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우리가 왜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구원해야만 이 사람이 저주받아서 지옥을 가지 않고 천당을 간다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것과 함께 어떤 의미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살지 않으면 그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이웃도 불행해지고 하나님도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고 그 사람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려고 하니 그 사람 자신도 살아가는 삶이 끊임없는 형벌과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사람의 좋은 위로자가 되고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고 그가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해주면, 교회에 딱 고정된 멤버로만 있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굉장한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한 7, 8년 되었을 것입니다. 대구에 내려갔습니다. 집회를 하는데 저를 불렀습니다. 그 교회에 담임 목사는 출타 중이었고 부목사님이 앉아서 저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교회 자랑을 한 없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어떤 부서를 담당하고 계십니까?” 했더니 장년교구를 담당하고 있답니다. 옆에 계신 분은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총신을 나오셨습니까?”, “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목회자로서의 양심에 비추어서 당신이 맡고 있는 교구 식구가 800명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정말 구원받았다고 판단되는 비율이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적게 잡으면 20% 이고 많이 잡으면 30% 입니다.” 그때는 제가 지금보다 훨씬 까칠했는데 그 대답을 듣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지금 나에게 뭘 자랑하십니까?” 자기네 교회가 한참 뜨고 있는 교회라고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뭘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목사님이 돌보고 있는 양 100마리 중에서 20마리는 양이고 나머지는 야수입니다. 그런데 뭘 나에게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새카만 후배였는데 그렇게 한 침을 놓았습니다. 굉장히 당황해 했습니다.
오늘 여기 보십시오. 물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갈 때는 자기가 사역자로서의 모든 인생을 마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장한 감정으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하고 거기에서 유언적인 가르침을 남긴 것입니다. 그 밀레도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던 탈레스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면 물이 굉장히 풍부한 도시입니다. 로마 문화가 엄청나게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데 마이크 없이 1만8천 명이 앉아서 공연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원형극장이 지금도 있습니다. 장로들을 그렇게 불러놓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역을 했던 심정을 먼저 토로하고 그 다음에 무슨 사역을 했는지를 말한 후에 마지막에 자신의 결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두 번씩 읽은 것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행 20:18) 하면서,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 20:19) 그리고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행 20:19) 그리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이라고 네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모든 눈물’ 얼마나 많이 흘렸으면 ‘모든’ 이라는 표현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겸손’, 그리고 ‘참은 것’, 그리고 ‘주를 섬긴 것’ 이렇게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이 본문을 읽다가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해서 이 본문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20번도 더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어울리는 장면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이 아주 독선적이고 키 작고 대머리에 앞머리도 튀어나오고 목도 짧은, 그런 외모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과격한 바리새인의 모습이 딱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아시아에서 있었던 회고를 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눈물’이었습니다. 사역지를 눈물로 적시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신기하게 사용하십니다. 물론 눈물을 많이 흘려도 하나님께서 그릇이 안 되는 사람에게 한 번에 몇 만 명의 교회를 맡기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역의 가치는 절대로 규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와 있으면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가?”, 이런 것을 배우지 말고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매일 매일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노력합니다. ‘교회의 규모를 보고 그 목회자를 평가하지 말자.’ 아주 작은 교회이면서도 신실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큰 교회를 하면서도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지만 사역지를 눈물로 적셔야 합니다.
여기서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앞에 비굴하게 굴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겸손은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데에서 오는 겸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적이 있는 겸비함이지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는 겸비함이 아닙니다. 눈물과 겸손, 오래 참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1년 동안에 얼마나 그 사역자가 다 참을 수 있는지를 저는 멀리서 다 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섭섭하실지 모르지만 수습을 마치고 떠나가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도 마음 상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정을 둔 적이 없습니다. 왜? 두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참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가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은 스티로폼 엉덩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씩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고 아직도 그 충격이 유지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과 갈등을 일으킨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중에 사도바울의 자존심을 아주 상하게 했던 갈등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직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보았지만 사도바울은 자기 혼자서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증명하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사도냐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진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사도직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사도이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이, 사도행전과 복음서를 통틀어서 볼 때, 사도의 가장 중요한 표가 ‘세메이온’이었다는 것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메이온’은 희랍어로 ‘표적’입니다. ‘믿음을 주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사도의 매우 중요한 표였습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들이 그 짓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게 했지만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했고, 가톨릭에서는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성인으로 추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기적이라는 ‘verification’이 있어야 했습니다. 안 되면 만들어서라도 집어넣어야 성인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변증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여기서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너희들이 모두 나에게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사도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 등기소에 가서 떼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진짜 사도이다.” 하며 눈물로 변증을 하면서 “사도인 증거를 말해볼까?” 하는데, 기사와 표적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많이 참지 않았느냐?, 내가 진짜 사도가 아니라면 그렇게 참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참지 못하는 성격과 얼마나 많이 투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참았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면 내가 참았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내가 거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내가 사도인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참음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하는가 하면 사랑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지금 사도행전에서 하는 것입니다. 잘 참아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줍니다. 참는 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는 것은 너무 훌륭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목표는 무엇입니까?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참는 것이지 그냥 아무 일도 못 하면서 그냥 씨름하면서 참는 것은 참음이 아닙니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기려고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비난과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참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밖으로 다 쳐내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모든 것을 품고 고통을 받더라도 여기에서 묻히고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대지입니다. 두 번째는 그 자세입니다. 모든 눈물, 사역지를 눈물로 적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의 사역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과 목회에 복을 주시는 것이 보입니다. 복을 쭈욱 주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그게 보입니다. 그것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물처럼 확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말하면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청년부가 100명씩 1부, 2부, 3부, 4부 까지 나눠진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3부로 나눠졌습니다. 1부 고등부 애들을 올라와 안고 어린아이들을 사역하던 목사가 있는데 지금은 유학 갔습니다. 그 목사가 열심히 기도하면서 청년부를 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1부에서 금요일 밤마다 150명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예전에는 세 부서가 통틀어서 150명도 안 모였습니다. 그런데 3분의 1토막에서 150명이 모여서 기도했고 거기서 기도하던 아이들이 다른 데에 가서 기도하면서 하는 얘기가, 기도를 좀 하려고하면 기도회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의 훈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 2시까지 기도를 하고 그 청년부를 다 실어다 주었습니다. 교통편이 없다고 했더니 그 기도회에 참석했던 어떤 성도가 800만원을 내면서 중고로 봉고차라도 사라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복입니다. 눈물이 있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눈물과 겸손, 그리고 오래 참음,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섬김. 사역자들이 이야기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악 조건 속에서 사역했는지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런데 성과가 없습니다. 감동이 아닙니다. 이것이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중 앞에서나 개인 앞에서나 누구에게도 거치는 것이 없이 거리낌이 없이 헌신한 일이 있었는데 모든 것은 하나의 초점으로 맞춰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파한 것’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회심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사람의 첫 번째 의식 속에서의 영혼의 움직임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거룩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구원의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데 회심의 경험이 없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라고 하니까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닙니다. 골프에 빠져서 거의 미쳤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구원이 골프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라는 의미에 신학적인 의미를 두어서 골프를 칠 때 18언더파가 나오면 천국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허무와 모든 것을 골프로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자면 “나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이 사명입니다.” 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 없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belief’ 뿐만 아니라 ‘trust’ 도 그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에 의하면, 매우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를 들자면 선천적으로 사유기능 자체가 잘못 되어서 망가지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어려서 죽은 아이들, 특히 믿음의 가정에서 죽은 어린 아이들, 이런 경우는 회심 없이 구원에 이르는 예입니다. 그리고 평생 죄인으로 살았는데 낙원에 이르게 된 강도처럼, 마지막 의식이 남아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그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옛날의 복음에 대한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셔서 구원하실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서 일반화 시킬 수 없는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인간으로서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된 사람, 그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의 죄에 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네 살만 넘어도 유아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그냥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직접 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도바울은 목회가 무엇이고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아서, 회심한다고 해서 그가 아주 훌륭한 신자의 삶을 사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구원받지 않으면 그렇게 좋은 신자가 되게 하는 설교 자체가 그 사람에게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신자, 비중생자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총회에서 청소년 목회에 대해서 강의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눈이 막 쏟아져서 사람들이 별로 못 왔습니다. 한 사람씩 무슨 부서인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돌아가서 빠른 시간 내에 자기가 돌보고 있는 양떼들이 회심자인지 비회심자인지 알아보라.” 약 7년 전에 인턴십 때 이것이 주제였습니다. 인턴십에서 한 열댓 명이 모였는데 한 달 정도 여유를 주고 모두 조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청년부 50명 정도를 맡고 있는 형제도 있었고 초등부를 한 45명 맡고 있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한 300명을 맡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에게 한 달을 주니까 거의 다 조사를 했습니다. 그 중 한 전도사가 특이했는데 초등부 4, 5, 6학년을 담당한 전도사였는데 45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45명을 한 달 동안 선생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 만났다고 합니다. 면담을 해서 체크를 하고 부모님과도 면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번개를 맞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 것입니다.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다섯 명은 확실히 구원받은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래도 좀 넓게 마음을 잡으면 7~8명은 구원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 열두 명을 제외한 33명은 결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이 온다는 것입니다. “What should I do?”,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 회심집회도 배워가고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조사해봐라. 그러면 아마 충격적인 통계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45명 중에서 다섯 명은 구원받았고 나머지는 구원받지 못했는데 계속 좋은 사람이 되라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장애인들을 모아놓고 100m를 9.8초에 주파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으면 착하게 살라고 하면 되지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것이 없다.” 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까? 분위기가 심각해졌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마음으로 답을 해라. 그 조사에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파악된 사람들이 정말로 회심하면 좋겠는가?”, 했더니 “아멘!” 합니다. “어느 정도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회심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김정은이 회심하다고 해서 우리가 싫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베가 회심한다고 해서 우리가 싫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정도로 그것을 원하는가 말입니다. “당신이 설교하고 있는 중등부실 맨 뒤에 십자기에 매달려서 피 흘리고 죽으면 그 아이들이 다 회심한다고 하면 ‘Yes, I do!’ 할 정도로 원하는가?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모두 좋으신 예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믿는 참된 신자가 되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설교하는 그 예배당 뒤에 못 박혀서 죽어도 좋을 정도로 정말 원하는가? 아니면 무엇이 그것을 못하게 하는가?”
지난주 새벽예배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주전 327년에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인도를 침공하다가 느려진 군대를 보고 전리품들을 모두 포기하고 불태운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스 중동부에 가면 ‘테르모필라이’라는 해발 약 15m 정도밖에는 안 되는 아주 자그마한 언덕이 있습니다. 이 언덕의 이름이 ‘클로노스 언덕’입니다. 당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이미 페르시아가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 사람들과 협의를 해도 결국은 정복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보낸 사신들을 던져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전쟁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협력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자기를 전심으로 따르던 용사들과 함께 그 클로노스 언덕으로 가서, 거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요충지에서 결사항전을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영화 『300』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은 300명만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있었던 레오니다스 왕의 전략적 판단에 동의하는 그리스 연합군 700명이 함께 따라갑니다. 모두 1000명이었지만 중심된 사람들은 300명이었고 그 사람들이 그 언덕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것입니다. 그때 쳐들어온 페르시아의 군대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군대를 보내면 온 힘을 다해서 이 병사들이 페르시아 군대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시체가 더미로 쌓여도 계속 넘어왔습니다. 결국은 거기서 모두 죽습니다. 방패는 걸레가 되고 칼은 다 부러집니다. 나중에는 병사들의 팔, 다리가 잘립니다. 이빨로 페르시아 군대를 물어뜯으며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해서 100만 명이 300명을 상대로 1주일 동안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 한 것입니다. 그동안 그리스 연합군들이 전열을 정비하면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전쟁을 합니다. 마지막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무찔러서 페르시아가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클로노스 언덕에 비석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써 있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여, 그대들이 스파르타에 간다면 전해주오. 우리는 스파르타인 답게 싸웠고 그리하여 여기에 묻혀있노라고.” 이게 ‘전사’입니다.
이것은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한 얘기가, “내가 이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았는데 내가 이 복음을 마지막까지 전파하는 일을 마쳐야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아깝게 여기지 않노라.” 한 것입니다. 군인이 되었는데 전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 심한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전투에는 관심이 없고 보급품에만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교역자들,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적 전투의지가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아깝지 않고, 내가 이들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서 이들이 산다면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다.” 생각해야 합니다. 사역을 해오면서 많은 괴로운 순간이 있었지만, 여러분을 포함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은, 내수동 교회에서 고등부를 할 때도 그렇고, 그 전에 신성교회에서 초등부를 할 때도 그렇고, 그들은 평신도 청년들이었는데 진짜 죽을 것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교역자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정말 자기가 죽어서 이 아이들이 다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것 같은 교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내수동 교회를 나와서 개척하기 전에 600명 정도 모이는 한 교회에 1년 6개월 정도 있었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그 전에 교사들의 모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곳은 교역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안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의를 상실한 교역자 집단은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서비스를 하는 것을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시세말로 밥 먹고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허무합니다. 어떻게 만난 주님이고 어떻게 만난 사명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 가지 입니다. 사역의 자세는 모든 눈물과 겸손이며, 오래 참음과 주를 섬긴 것. 사역의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하는 것, 마지막으로 결의는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 그곳에서 영적인 부흥의 불꽃이 튀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예전 30대 초반에 한참 부흥에 관한 기록을 모으고 거기에 불붙었을 때에는 정말 가슴이 뛰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는 그렇게 자기를 다 버리고 기꺼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때로는 들것에 실려서 겨우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부흥의 불꽃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부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무늬만 교역자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그에게 남아있는 일은 교회에서 종교적인 서비스를 하는 일들 쪽으로 계속 그를 데려가게 됩니다. 본질에 도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거기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제가 목사님들과 이야기했는데 광주 사태 때 데프콘2 까지 터졌습니다. 그때 우리 친구가 춘천의 미사일 부대에 근무했는데 거기에 키가 190cm 되는 흑인들이 근무한다고 합니다. 데프콘2가 떨어지고 전황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지만 거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흑인들이 그 소식을 듣더니 “Mommy, mommy...” 하면서 울더랍니다. 칼날이 오가고 피가 튈 때 그것을 씻으면서 칼집에서 칼을 빼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이성동목사가 이야기했습니다. 연평도 폭격을 받아 본 모든 해병들은 지금 계속 승진하고 있답니다. 왜? 거기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승진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겪을 사람들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천지차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무서워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세계에서 지휘관이 되려면 한 번 쯤은 다리가 잘리고 손이 끊어지고 모가지가 떨어지면서 피가 쏟아지는 한복판을 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피를 한 번 뒤집어쓰고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경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영혼의 변화를 말로 하는 것은 입술에 침을 바르면 된다. 그러나 목회자가 정말 그 갈망을 가지려면 기도를 해야 한다.” 요즘도 저희 집 사람이 말하는 것이, 나하고 살면서 제일 힘들고 섭섭했을 때가 언제였느냐고 하면 제가 너무 은혜 받았을 때랍니다. 아이 둘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기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슬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집은 사기를 당해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수업 자체가 밤 10시 10분에 끝나고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니까 11시 10분까지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집에 오면 가족들이 다 자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은 시간이 있었는데 그 토요일은 설교준비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새벽에 가서 설교준비를 하고 돌아오면 오후 4시나 5시쯤 돌아와서 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때 엄청 힘들었는지, 아주 애절한 얼굴로 “여보, 오늘은 부탁이 있어.”, “뭔데?”, “꼭 들어줘.”, “뭔데?” 그때는 제가 친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은 철야기도하지 말고 나하고 같이 얘기도 하면서 오늘 토요일만 같이 있어줘.” 했다고 합니다. 저는 기억이 상세하게 잘 나지는 않는데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제가 조금 늦게 갔습니다. 보통은 8시쯤 나가는데 지금 제 생각에는 9시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는 너무 외롭고 힘이 들어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가방을 착착 챙기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나가더랍니다.
저는 이야기합니다. “기도해라. 그리고 당신들이 한 번은 그 전쟁을 해 봐라.”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하라고 하면 사람들을 모아서 하는 기도만 생각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보시면, 모세, 여호수아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깊은 위기 속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합심기도 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혼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 토요일마다 가방을 싸서 나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목회자로서 제일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가서 웃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청소를 다 합니다. 사찰집사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다 청소를 하지는 못하십니다. 한 시간 반 동안 깨끗이 청소를 합니다. 한 200석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단을 걸레질 하면서 설교 준비가 완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내일 여기서 설교를 하는 것 아시지요? 내일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서 큰 역사를 보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돗자리 하나를 펴고 무릎 꿇고 앉아서 찬송을 30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시작하는 시간이 빠르면 10반이나 11시가 됩니다. 너무 피곤할 때는 새벽 1시까지 기도하다가 자고 그렇지 않을 때는 3시, 4시, 어떤 때는 기도하고 나면 아이들이 새벽기도 오는 소리가 웅성웅성 들렸습니다. 2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내수동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에 이만큼이라도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기간이 없었으면 저는 관성에 의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구약의 히브리어나 가르치고 토판이나 갖다 놓고 고대 문헌이나 연구하면서 잘난 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제가 담임 목회를 하기 전에 사역을 하면서 세 번 정도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첫 번째 교회에서 아이들 회심 사건을 통해서 깊이 만났고 두 번째 교회에서 오래 참는 것, 세 번째 교회에서 부흥을 한 번 보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냥 사역을 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본질에 한 번 도전해보라는 것입니다. 피 맛을 봐야 군인이지, 피 묻은 지휘봉을 손에 잡아봤어야 그게 진짜 지휘관인 것입니다. 탁상에 앉아서 커피나 홀짝홀짝 마시면서 가늘고 하얀 손에 삽자루 한 번 쥐어보지 않은 지휘관이 진짜 군대의 지휘관이겠습니까?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본질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들이 바뀌게 될 것이고 영혼들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 길은 매우 어렵고 거의 똑같은 충고를 24년을 했지만 이것을 그대로 따른 사람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굵직굵직한 목회자가 나오니 않는 이유입니다. 마음을 정하고 전심으로 자신을 쏟아 부어서 사역에서, 영적인 전쟁에서 이기는, 레오니다스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그 위대한 왕처럼 전사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