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라간 사람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23:27)
녹취자: 백지영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하나의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공식은 가장 마음이 아프고 슬펐던 때가 사실은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때라는 사실입니다. 슬프고 가슴 아플 때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슬프고 가슴 아픈 감정과 기쁘고 환희에 찬 감정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이 고난이 바로 우리를 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목숨을 끊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 전 예수님은 이러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법정의 판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나 우리처럼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고 그 재판은 매우 잘못된 재판이었지요. 원래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죄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죄를 밝히고 처벌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었고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또 혹시 잘못해서 죄 없는 분을 재판에 회부했다면 정확하게 사실을 조사하고 심리하여 죄지은 사람 100명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을 억울하게 형벌 받지 않게 하는 것이 법의 정신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거짓 증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재판장인 빌라도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 재판장으로서의 소신을 꺾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어준 부당한 재판이었지요. 더 우리들이 놀라운 것은 죄 있는 자 실제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바라바는 놓아주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줬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 지고 조용히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로마민족이 변방의 야만인이었던 시절에 만든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인류가 고안해 낸 사형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하나의 막대를 세우고 또 다른 가로 막대를 막대에 사람을 매달아서 못 박습니다. 기차선로에 쓰이는 큰 못으로 손목에다가 못을 박고 도르래 같은 것으로 묵어서 높이 올린 다음에 십자가에 띄우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발에 못을 박고 그러면 무거운 몸이 못 세 개에 매달려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은 거기에서 살이 찢어지고 동맥이 터지면서 출혈이 일어나게 되요. 의학적으로 출혈이 일어나게 되면 탈수현상이 나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커다란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스타오로스’라고 하는 이 십자가는 그래서 로마 사람들에게는 죄를 지어도 로마사람들은 십자가의 형벌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 십자가의 형벌은 그렇게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고 가장 잔인 죽는 그 순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받게 어떤 사람들은 3시간이나 6시간 매달렸다가 죽지만 어떤 사람은 3일씩이나 매달렸다고 하니 깨어났다가는 혼절하고 혼절했다가는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서서히 기력이 빠지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당하신 후에는 브라이오리온이라고 하는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심한 채찍질과 구타를 당하셨습니다. 온 몸이 피로 물들었고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벗은 몸에 홍포를 입힌 다음 갈대를 들려주어 마치 임금처럼 만들고 조롱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일 이라는 사실을 비웃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전 날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로 쏟아지기까지 기도하셨고 그리고는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가 문초를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빌라도에서 다시 헤롯에게, 헤롯에서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오시고 그 시간이 금요일 날 아마도 아침 6시 7시 그 쯤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약 130-150kg되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질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불의한 재판이고 불법한 재판이었습니다. 원인 무효의 사형언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도 되지 않는 판결에 복종하시듯이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 모진 매를 다 맞으시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재판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사람들이 모함을 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심지어는 마귀도 모르는 아주 위대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진 속죄의 제물로 삼으심으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가 그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기독교 신앙에 찬동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개념 규정은 아주 상당히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믿고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하나님 앞에 작정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껍질밖에는 없는 복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에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행복이 이 모든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보았습니다. 자기를 주인삼고, 자기를 임금 삼으며, 자기를 섬기며 살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노예가 되었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잘 안됩니다. 이 세상에 그가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누구든지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남의 행복까지 짓밟아 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끝없는 불행과 고뇌가 어디서 오는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여러분만한 시절에 21살에 제가 회심했는데, 고등하교 다닐 때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내가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자체가 내 인생에서 너무 무거운 숙제였습니다. 도대체 이 인생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왜 이렇게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데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고통과 이 좌절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문학이나 사상이 그 답을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읽는 순간에는 마치 진통제처럼 박수도 치고 싶고 감격도 하지만 끝나고 나면 나는 다시 완전히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해요. 그러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대 성인 중 한 분이 아니라 그 분이 정말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던 그 모든 것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시고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안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바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들 -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 부활, 그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 희생, 고난 - 이런 단어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을 가지고 예수를 이용해서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무한하고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그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왜? 내가 지은 모든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나도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하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회개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머릿속에다가 혹은 입에다가 계속 넣어주어도 그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눈이 내릴 때 바가지를 덮어놓으면 바가지에 눈이 하얗게 쌓이지만 바가지를 벗겨내면 땅에 눈 한 방울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껍질뿐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의 비밀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이런 모임에 따라다니면서 거의 방학 때면 수련회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애기하나 낳고 불신자로서 만나는 전도 현장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여러분이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접하고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깊은 회개와 십자가의 경험 속에서 만나지 않으면 신앙이 심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이 완전히 다른 세계이지요? 사회에 나가보면 그 정도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혼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어떤 이유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올 수가 있었을까요? 이때가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고 하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신다고 하는 이 사건은 최대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사형언도를 당하고 난 다음에도 사람들의 의견은 갈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끝났다 죽을 것이다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 이는 바다도 건너갔고 죽은 나사로도 살린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일으켜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지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 이렇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누군가 한번 볼까요?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한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백성은 뭐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47절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 백성들의 정체는 무엇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나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온 사람들이었어요 그가 브라이오리온이라고 하는 왕궁수비대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구타를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경거리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도 그들에게는 구경거리였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도 그들에게는 구경거리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으로서는 티끌만큼도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친근하신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며 절규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이 왜 그렇게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고 생명이신 그분이 죽음에 복종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죄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고 악을 행하던 이 백성들을 위해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해서 다른 사람들을 주고, 돈 벌어서 남을 주고, 훌륭한 학식을 갖추어서 자기보다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이렇게 해서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는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서 자기를 준비하지 않고 신앙을 게으름의 수단으로 삼는 학생들입니다. 형제들하고 모여서 기타 치면서 찬양하는 게 즐거워요, 아니면 도서관에서 밤을 새면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워요? 그래서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엔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한 순간 여러분이 지금 이 젊음은 30년 후에 지불 만기가 되어서 돌아올 어음이야 지금 여러분이 허송세월을 하면 30년 후에는 도산이야. 그 수표가 날라옵니다.
나는 매일 매일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학교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학교가 아닙니다.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별의별 대책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월급이 적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OECD 국가 중 상위입니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선생들 손을 다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은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모두 교사가 됩니다. 모두라고 하는 것은 좀 과장이겠지만 그저 특별히 소명을 발견 못하면 교사가 소명인 줄 알고 다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미래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사람은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를 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하면서 하면 안 되겠어요? 그리고 가서 아예 유서를 쓰고 시작을 해요 학교에 부임할 때 나는 돈 때문에 선생님 노릇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 스러져 가는 대한민국의 이 불쌍한 아이들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이 다 지옥같이 학교를 다니느냐 아닙니다. 우리 딸은 지금 대학교 3학년인데 아빠 나는 내 인생 중에서 고3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좋은 신앙생활을 했고,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심지어 선생님을 막 폭행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안 그래요. 내가 학생들을 다루어 본 경험에 의하면 그런 아이들일수록 똘만이 기질이 많아 그래가지고 어느 선생님이 하나가 존경할만하잖아? 그럼 조폭 똘만이들이 선생님한테 복종하는 것처럼 선생님한테 완전히 복종을 해요. 복종할 애들은 있는데 훌륭한 선생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도 아주 간절히 호소를 합니다. 정말 죽어도 실력이 정식 학교에 가서 선생님 할 실력이 안 되면 학원 선생이라도 되라 이거입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도서실의 총무라고 되라 이거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과 만나 그리고 그 불쌍한 아이들을 깊이 끌어안고 개념 없다고만 말하지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거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누군가가 나는 우리 기독청년들이 일만 명을 이 학교에 파송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이 아이들을 위하여 자기를 산화시킬 일만 명의 무슨 과목이면 뭔 상관있겠어요? 가서 깊이 이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내 인생은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그 때에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 한 인간의 삶에 그런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철저하게 깨뜨려진 사람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꿈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나를 주인삼고 살아갔던 꿈의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내 힘으로 살아갔었는데 이번에는 예수 후원 받아서 그것을 이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꿈도 나처럼 거듭난 꿈이 되어야 해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 따랐지만 이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베풀어주셨던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은 사람도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병 고쳐 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팔복산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이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꾼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어디 이때만의 일입니까?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방관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십자가를 만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고 그 은혜로 나를 살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할 인생이라고 생각을 하고 주님을 위해서 거듭난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그 꿈이 기적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 많이 해도 시험 떨어져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거듭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뭐냐면 한국의 젊은이들 속에 배어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기력과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이라고 해서 꼭 나쁜 짓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그냥 시간 보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이폰 들고 맨 날 그거나 두드리고 앉았고, 그렇게 해서 이다음에 뭐가 되겠어요? 통계를 보니까 하루에 32번을 핸드폰을 본대요.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젊은애들 보니까 아예 예배당에 올 때도 나는 예배 시간에 왜 아이폰을 자꾸 두드리나 했습니다. 성경도 있고 찬송도 있고 다 있대요. 그것을 어떻게 내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렇게 해서 거기 오락에나 빠지고 그렇게 살아서는... 그러면서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미친 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십년 뒤 혹은 5년 뒤에 정말 올바른 길을 걸으면서 내가 평소에 꿈꿨던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주어진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꽤 긴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의 큰 무리였습니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브라이오리온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 나오셨을 때 여인들은 흐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은 계속 해서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에 이 여자들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그 길을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이 여자들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저렇게 죽어야지만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저 고난을 내가 당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었던 것입니다. 울었다는 이 단어가 ‘에큰하우센’ 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흐느낀다는 단어가 아니라 소리를 내서 펑펑 우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자 피어린 통곡으로 바뀌었고, 이 여인들이 통곡하고 울었지만 결국은 로마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을 섬기시던 주님의 그 두 손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시던 그리스도의 두 발에도 못을 박았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언덕을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망치 소리 내 마음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결국은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오르시던 골고다 언덕에 이름 모를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교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도 있고 골고다 언덕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따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죽으신 것을 생각하며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분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여러분이 공부하는 동기가 되어야 하고 그 눈물이 돈을 버는 동기가 되어야 하고 그 눈물이 시집 장가가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위해 죽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을 깊이 새기고 어찌하든지 나를 살린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 그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으니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인생이 그분을 위한 인생이 되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는 십자가의 정신이 있는 사람들을 주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으셔서 자기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