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사명이 있는 복음
김남준
열린교회
목 차
1.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 2014.8.10 장년 여름수련회(저녁) 1
2.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벧전 2:9) 2014.8.11 장년 여름수련회(저녁) 15
3. 그의 덕을 선포하라(벧전 2:9) 2014.8.12 장년 여름수련회(저녁) 29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8.10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8.11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3 (2014.8.12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8.10.(주일) 첫째날 저녁
<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54~68년 네로의 박해시대에 기록된 듯함
- 로마에서 쓴 듯 "바벨론에 있는 교회" (벧전 5:13)
-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들을 격려함
- 실패의 경험: 소망 중 인내를 격려함
II. “산돌”이신 그리스도
- 장별 주제: 1장 소망, 2장 하나님의 백성
- 연결점인 그리스도: "산돌" (벧전 2:9)
- 예수 그리스도: 생명 돌+모퉁이 돌이 되심 (행 4:11)
- 예수께 접붙여져 함께 지어져 감 (엡 2:21)
- 영적 생명(중생을 통한 성화)+불완전함
- 중요한 소명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
- 영혼의 변화와 온전한 인격과 생활
-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통해 성취됨
- 그리스도와 연합+물처럼 흐르는 삶
- 예수는 세상의 거치는 돌 (벧전 2:8)
III. 신자의 정체1: “택하신 족속”
A. “택하신 족속”
1. 이 구절의 의미
- genos eklekton "선택 받은 족속"
- a "한조상의 후손", b "민족, 족속"
- 당시 보편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지시
2.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
- "(이방인이나 유대인)아닌 제3의 족속이 나타났다"
『베드로의 설교』
- "기독교인이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있다"
『폴리캅의 순교』
-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입니다"『플루타크의 도덕론』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
3. 기독교인의 구별: 존재적 특성
- 하나님 사랑과 독특한 삶의 방식
- 구약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구별
- 제의, 나라 크기와 제도가 아닌 존재의 다름
- 로마시대 때: “새로운 족속”, “제 3의 족속”으로 불림
B.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
- 교회의 언어적 선포와 존재적 선포
- 세상과 구별: 사상+삶의 방식 ⇒ 은 거룩한 인격
- 이 모든 구별을 지배하는 것: 사랑(은혜)
- 많은 사업보다 존재론적 선포 중요
- 예수님을 닮음: 정의-사랑 이상 인격임
- 예수님과의 만남: 새로운 방식의 삶+사랑
- 공동체 규합이 아닌 영적 엽합으로 보여줌
IV. 신자의 정체2: “왕 같은 제사장”
- basileion hieratuma
A. 두 가지의 해석
a. "왕의 제사장, 왕께 봉사하는~"
b. "왕 같은 제사장, 왕적 제사장"
- 루터의 새 해석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 긴장
- 루터는 말씀과 성례에 관한 동등 자격 강조
- "mamleket kohannaim"에서 유래 (출 19:6)
- "제사장들의 나라" 다른 표현임 (Calvin)
- 이방인에게서 성별됨 → 제사장
- 이방인을 향해 승리, 심판함 → 왕 같음
B. “제사장들의 나라”의 은유
a.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적 선택
b.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c.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 (호4:6)
- 제의/문화 일원론: 원뿔 구조임
- 둘의 분리는 없으나 제의적 사명이 우선임
- 건전한 종교의 기반 위에 문화사명 가능
C.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a. 하나님께서 우주 만국의 왕이심
b.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 공동체
- 봉사의 대상: 하나님+교회+세상
- 봉사의 핵심: 신적 경륜의 지상적 성취
- 세상을 향한 신적 경륜을 앎+자기를 앎
c. 신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 받게 하심
- 구약 이스라엘의 존귀한 구원사적 지위
-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겸직 불가함
- 신약에선 예수 안에 두 직분이 만남
- 신자: 영적 연합 통해 두 직분을 계승함
- Clemens Alexandria의 설명
* 그리스도 왕국을 유업으로 받음: “왕 같음”
* 섬김의 기도와 가르침: 제사장
- 신자의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섬김의 소명
- 세상의 중보자 예수 성육신의 모본을 봄
V. 적용과 결론
- 이미 대대적인 신앙의 박해가 시작된 때임
- 조직적 핍박과 함께 변절자들이 속출함
- 불신현실에 비관하지 말고 신자 정체성 숙고
- 어차피 참 신자 일생은 이 세상에서 거치는 돌임
- 예수님 생애의 고난과 소명의 영광을 숙고함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8.11.(월) 둘째날 저녁
<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잘못된 신자의 삶: 신앙의 원리를 떠남
- 엉클어진 삶: 생각+실천+영적 오류 때문임
- 신자: 세계관/인생관의 혁명적 변화를 겪은 사람
- 무너진 옛 관점 위에 새로운 관점을 수립해야 함
- 자기관점 아닌 하나님 관점을 수용함이 신앙고백
- 신자 정체에 대한 인식의 유지가 요구됨: 지식+은혜
II. 신자의 정체3: “거룩한 나라”
- ethnos hagios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
- ta ethne “이방인들”, ethnos “이스라엘”
- “왕, 문화, 전통 의해 연합된 무리”를 뜻함
A. “거룩한”: hagios
- hagos(종교적 경외심)에서 유래함
1. 주께 바쳐진 구별 (마 4:5, 27:53)
- 하나님과 그분 봉사위해 미리 점유됨
- 또 다른 소유권이나 사용권이 허락되지 않음
2. 주님과의 관계 (수 5:15, 고전 3:17)
-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관련됨
a. 존재적 초월성: 미천 인식+경외심
b. 도덕적 완전성: 비참 인식+의존심
- 하나님의 거룩함, 체험 없이 신앙은 성립하지 않음
- 하나님의 거룩함의 체험: 속성+시행방식의 경험
- 진정한 경건은 비밀스런 종교적 원천을 가짐
- 이 보이지 않는 경건의 원천에서 세상과 구별됨 가능
- 예화: 일본의 국사된 젊은이 모친에 편지함
- 모친의 탄식 "피안의 다리 원했으나 명리승이 되다니..."
- 소명의 오해: 이런 저런 일하나 존재적 변화가 목표
- 신자는 존재로써 하나님의 누구이심(whoness) 알게 함
B. “나라”: ethnos
1. 거룩함의 소명: 공동체 독특한 특징
- “택하신, 왕 같은, 거룩한”: 모두 신적 관계를 의미
- 사회의 개혁과 도덕적 개선 말하나 신자는 속이 허함
- 교회가 하나님보다 세상 평가에 더 마음을 씀
- 사상, 윤리, 은혜를 추구하지 않고 대리만족을 구함
-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 사랑” (마 22:40)
- "하나님 사랑, 의롭고 득특한 백성"
2. 네 가지가 필요함
a. 철저한 자기 성찰
b. 말씀의 빛이 필요
c. 마음을 쏟는 기도
d. 의로운 삶의 용기
III. 신자의 정체4: “하나님의 보물”
- "그의 소유가 된 백성"
A. 이 구절의 의미
- "laos eis peripoiesin"
- Heb. segula “자기 기업의 백성”(leam segullah, 신 14:2),
“나의 특별한
소유”(segullah, 말 3:17)
- segullah는 sagal(감추다)에서 유래 ('보석'KNJ)
- 전치사eis(into) 종말론적 구원 뜻
- "(하나님 자신)의 보물이 될 백성"
- 오류: "하나님께 속한 백성"(NIV), “하나님의 백성”(RSV)
- already~but not yet의 성격임
- "하나님 백성~긍휼 얻은 자" (벧전 2:10)
B. 주께 보물같은 백성들
- 이미 하나님 백성이나, 아직 완전치 않음
- 이미 소중한 자들이지만, 더욱 소중하게 됨
- 사랑 받고 있지만, 더욱 사랑받게 됨
-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교회의 소중함을 앎
-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로 통한 사랑을 받음
- 예수, 교회를 사심으로써 소중한 존재되게 하심
a. 애굽의 바로: 기적들과 희생 지불
b. 세상의 사탄: 구속과 희생으로 삼
- 교회의 사랑을 통해, '보물 같이' 여기시는 사랑 미리 맛봄
- 신자를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
- 이 사랑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동체로써 누림
- 그런 사랑으로 종말까지 영원토록 교회를 보존하심
- 수준 높은 영적 삶, 거룩한 의무: 사랑이 표지가 됨
IV. 적용과 결론
- 신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히 인식해야 함
-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거룩한 특권과 위로를 누림
- 이 세상은 버려도 그대는 보석 같은 존재임
- 소중한 것을 은밀히 숨기시고 보호하시는 주님
-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가 지불한 희생을 잊지 말라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8.12.(화) 셋째날 저녁
< 그의 덕을 선포하라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구원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편견과 무지
- 신자의 구원을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성립 안에서 이해함
- 신자의 새로운 정체성은 그리스도 통한 은혜 언약의 산물
임
- 세계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 경륜에 참여할 소명
- 이를 위한 신적 경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II. 우리에게 행하신 일
- hopos "어떤 식으로‥하기 위하여"
- 신자에게 새 정체성들을 주심은~선포하게 하기 위해
A. 어두움에서 불러 냄
- ek skotous hymas kalesantos
- "너희를 어두움으로부터 불러내" (벧전 2:9)
- 여성 skotia와 남성 skotos의 차이
- 자연적, 지적, 영적, 도덕적, 어둠의 담지자
1. 지성적 어두움
-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고" (고전4:5)
- 이방인으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함
- 따라서 자신, 이웃, 세계에 무지함
- 또한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좇음 (벧전 1:14, 18)
- 무지 위에 구축한 세계와 삶에 대한 잘못된 견해
2. 영적인 어두움
-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 불가함
-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림(고후4:4)
- 자연인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무지와 오류들
- 거듭난 영적 감각 (영광+죄+사랑) 없음
- "빛이 있으라“ (창 1:2)
- 인간의 재창조는 세계의 창조를 따른 재창조 (고후 4:6)
- 초대교회: 이교도 회심의 증거 “어두움⇒빛”
- "어두움에서 빛으로" (행 24:18)
- 영적 어둠은 사탄의 권세를 동반함 (눅 22:53)
- "그로 인하여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워진 총명이 빛을
향해 피어난다" (클레멘트 1서 36:2)
- “(신자는) 이방의 빛이 되게하며, 눈먼자를 보게하며, 족쇄
에서 끌러주며, 어둠에 앉았던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바나바 14:5-7)
- 십자가 사건은 사탄의 영적 권세를 무력화함 (골 2:15)
- 신자에게 자유를 주심은 결국 자율적 존재되게 하시기 위
함
- 영적자유⇒자율화⇒진정한 자유
3. 도덕적 어두움
- 영적 어두움과 결탁됨 (요 3:19, 롬 13:12)
- 이방인의 영적 무지와 부도덕한 삶
- 성도의 삶의 반복적 표현으로서 "단정함"이 나타남
- 롬 13:13등 신약에서만 6회의 용례
- 성도, 시민, 교인, 여성으로(롬 13:13, 딤전 2:2, 딤전 3:2,
딤전 2:9)
B. 빛으로 들어가게 함
- eis to thaumaston autou pos
- "그의 놀라운 그 빛 속으로"
- 전치사 eis(into)는 종말론적 진입을 의미함
- 그러나 already~but not yet의 성격임
- 영적 소경이 눈을 떠 하나님 알게 되는 것과 같음
- 이제 그 빛으로 인간과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됨
-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끌린 인생 가능해짐
- 연약한 존재: 성경+교회+목양 통해 인생을 살아감
- 은혜에서 삶으로 잃어 버린 것은 어둠에 속한 것들임
- 찬란한 진리의 빛 안에 주신 거룩한 복락을 생각함
III. 하나님의 덕들을 선포하라
- hopos tas aretas exaggeilete
- 그리하여 “ 그 덕들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A. “그 덕들을”
- tas aretas: “그 덕들을"
1. 그리스적 문맥
- 도시국가가 높이 평가한 인간의 탁월한 성품
- 시민적 유익을 위해 칭찬 받을 가치 있는 인간 정신의 힘
2. 기독교적 문맥
- 영광의 나타남: 신적 구원 행동을 통해
- 세계에 드러난 영광: 신적속성+시행방식
-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 등을 가리킴 (Calvin)
- "날 위해 지었나니~찬송 부르게 하려함~"(사 43:21)
- "tehillati"와 "yesapperu" 해설
B. “선포하게 하려고”
- "너희로 상세히 말하게 하시려고"
- 인류에게 행하신 위대한 구원 경륜
- 신자만을 위한 예배 속에서의 선포가 아님
- 언어+존재(신자의 인격)+삶의 방식을 망라한 선포
- 교회의 존재론적 선포: 사상+윤리+은혜
a. 사상적 전투: 성경 진리를 확신함
b. 윤리적 전투: 신적 정의를 확신함
c. 신령한 전투: 은혜 필요를 확신함
- 세상을 살면서 고난, 희생, 수고를 일상으로 여김
- 믿음을 따라 살 때 고난을 일상적으로 여기게 가르침
- 믿음에 대한 댓가 아닌 이득만 가르침: 신앙의 힘을 상실
- 땀으로 읽고, 눈물로 쓰고, 피로 외치며 살아감
IV. 적용과 결론
- 세상에서 충성하되 때때로 세상을 멸시함
- 세상을 위해 섬기지만 영원한 나라의 영광과 비교함
- 그리스도의 고단한 삶과 하늘 영광을 묵상함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8.10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8.11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8.10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3 (2014.8.12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I. 본문해설
베드로전서는 54년에서 68년경 어느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유명한 네로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였고 이 때 기독교회는 심각한 박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장소를 암시하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5장 13절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에 나옵니다. 거기에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는데 주석가들은 바로 그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경험이 있는 베드로는 핍박의 진원지인 로마에서 이 편지를 씀으로써 박해받고 있는 교회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쓰라린 실패의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불타는 순교자의 심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소망 가운데 인내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편지는 핍박을 견디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남편과 아내가 가정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하고, 이웃을 위해 어떤 태도로 삶을 영위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와 같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양의 원리까지도 포괄적으로 가르쳐주는 실천적인 교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토대가 1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살아있는 소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실천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1장과 3, 4, 5장은 주옥같은 삶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연결 점에 바로 2장이 있습니다.
II. “산돌”이신 그리스도
2장 6-7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 모퉁이의 머릿돌은 연결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베드로전서의 2장 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 즉, 생명의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시대의 건축 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쪽에서 벽을 쌓고 또 이쪽에서 벽을 쌓습니다. 그러면 두 벽이 모퉁이에서 만납니다. 모퉁이 돌은 하나로 되어 있지만 대게 크게 사각형으로 되거나 “ㄱ”(기역) 자로 되어 있어서 양면의 벽을 함께 싣고 있는 기초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퉁이 돌로 이쪽 한 벽과 저쪽 한 벽이 연결이 되어 서로 힘을 보태주고 지탱함으로 건물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훌륭한 하나의 은유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는 크게 두 부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어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과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어 회원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 세계관과 인생관에 있어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서 유대인의 관점도 아니고 이방인의 관점도 아닌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같은 인생관, 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모퉁이 돌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돌이 아니라 생명의 돌이셨습니다. 모퉁이 돌 비유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연결된 영적인 공동체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돌인 동시에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것을 사도는 사도행전 4장 11절(“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에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이미 있는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써 교회가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이러한 복음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했고, 여기에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중시하는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구원을 단순한 개인의 문제라고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구절이 그렇게 보여도 앞뒤 문맥을 보고 성경 전체의 문맥을 보면, 그것은 공동체적인 구원의 한 국면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거기에는 소명이 있습니다. 이 소명도 개인적인 소명이 아니라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받은 소명입니다. 처음부터 구원을 받을 때 이미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교회에 내가 접붙여진 것이고, 사명을 감당해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온 교회를 몸으로 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리를 위해서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며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 웨슬레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는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중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 생명의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입니다. 그 교통의 통로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고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집니다. 성령과의 지속적인 교통 속에서 살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자원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존재적인 근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비록 구원을 받았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새롭게 심겨진 사람이지만 매일 매일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와 씨름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여전히 죄의 흔적들이 있어서 어떤 때는 그것을 덮어주고 어떤 때는 그것을 징계하고 어떤 때는 형제 교정으로 그것을 올바르게 잡아주는 고통을 지불해야 합니다. 또한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하도록 헌신하며 살아야 하는 모순적인 현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당신의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한번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기에 충분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성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원과 회심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한쪽 날개일 뿐입니다. 절대로 날 수가 없습니다. 구원파에서 도덕적인 문제들이 심각하게 터진 것은 그들의 교훈의 기초가 매우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성화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성도들이 배우고 들어야 할 대부분의 내용은 성화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어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살려주셨지만 하나님이 유보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존하면서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악을 이기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용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은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사명이 있는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주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 설교를 해서 우리보고 무위도식하지 말고 교회에 봉사하라고 세게 밀어 붙이실 모양이다. 요즘 우리가 좀 태만하니까 그 따위로 사명을 감당하면 되겠냐고 계획적으로 밀어 붙이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구원받은 사건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모르고 멸망 가운데 죄의 종노릇 하며 죽을 사람들을 살려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그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상적으로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한번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순수한 사랑이 마음에 감화를 주었을 때 ‘주님을 위해 나 자신을 다 버려서 살고 싶다.’라는 삶의 방향성이 정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한번쯤은 갖는 경험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보다 더 악하게 사는 사람, 더 사명감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파가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한계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격은 지금 그 구원의 의미를 따라 살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격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대로 현재를 살아갈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십 원보다 조금 모자라는 구원밖에 안됩니다. 우리가 전도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애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렇게 사는 것 외에 우리의 삶에 또 다른 선택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첫 번째 계획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첫 번째 계획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삼일 동안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계획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계획은 이 세상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그냥 이 세상에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소명입니다. 여러분은 스쳐 지나가셨겠지만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제자를 불렀으니까 이제 능력 있는 전도자, 복음 선포자, 치유자, 설교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부르셨을 때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he presents is the best proclamation." “현존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선포다.”라는 말입니다.
(예화) 최근에 제가 어떤 글을 읽었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데도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방학 때 시골로 놀러가다가 우연히 절에 들렀습니다. 잠시 절간을 돌아보고 쉬어가려고 절간 툇마루에 앉았습니다. 그 학생의 집안은 카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이 와서 고등학생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얘, 너는 누구니?”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무개입니다.” “여기 왜 왔니?” “지나가다 경치가 좋아서 잠시 들렀습니다.” 젊은 스님이 옆에 앉아서 물었습니다. “너는 이 세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눈 뒤에 조그만 쪽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얇은 책을 한권 주면서 “내가 잠시 내려갔다 올 테니 시간나면 한번 외워 보거라.” 그리고는 돌아와서 다시 한 두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언했습니다. “엄마, 아빠, 난 비로소 인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오늘 출가할 테니 허락해주십시오.”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었던 그 집에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마침 옆에 사촌 형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유학을 해서 일본 불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형이 부모에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인간으로서 자각이 생겨서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하니까 허락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출가를 해서 고등학생이었던 그 학생이 지금은 70세가 넘는 스님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절간 툇마루에 와서 몇 마디 말을 건네어 젊은 학생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이 성철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글을 쭉 써내려 가는데 워낙 진실하고 진지해서 마음에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글을 읽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화두가 있었습니다. ‘생각 없이 절간을 찾은 어린 학생의 마음을 한 두 시간 만에 움직여 60여 년을 후회 없이 그 길을 걸어오게 만든 힘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때 제 마음 속에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존재의 울림”,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주기철 목사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고 하다하다 지친 일본 경찰은 차를 태워서 신사 앞을 지나갈 테니 창문을 조금만 열고 눈길을 거기에 두고 고개를 까딱하면 석방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거부했습니다. 그를 심문하고 체포하던 일본 순사들의 생생한 증언이 있습니다. 그는 창 한 자루, 칼 한 자루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모든 순사들이 그를 체포하기를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교회의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다 석학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는 석학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훌륭한 학자가 반드시 교회를 움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움직이고 감화를 끼치고 심지어는 이방 세계에까지 충격을 주었던 사람들은 학식과는 상관이 없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압도하는 위대한 힘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소수의 위대한 인물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덕을 온 세계에 선포하는 방식에는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삶과 존재로서 자기를 통치하고 계신 그리스도,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소명입니다. 그것은 그가 선교를 하느냐 목회를 하느냐 장로를 하느냐 집사를 하느냐 하는 삶의 양상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이고 탁월한 섬김입니다.
최인훈라는 소설가가 『광장』이라는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자. 진하게, 핏빛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면서 살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문장력이나 지식 때문이 아닙니다. 누에의 입에서 실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자기가 알고 확신한 바에 따라서 흘러나오는 결과로서의 삶과 자신의 존재 사이에 있는 논리적인 연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는 교회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도덕적인 문제가 불거지고 자기가 만든 제품에 하자가 생겨서 언론의 비판을 받기 시작하면 주가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회사는 재빨리 사장을 바꾸고 책임자들을 경질해버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미지 개선 작업에 들어갑니다. 직원들을 시켜서 연탄배달도 하고 신문사를 불러서 촬영도 하고 우리 회사가 그런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새로운 광고를 내면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런 식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흠 없고 순전하신 모퉁이 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그런 위대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신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사명이라면 도대체 그런 신자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먼저 소개시켜 드리려고 합니다.
III. 신자의 정체1: “택하신 족속”
A. “택하신 족속”
1. 이 구절의 의미
먼저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게노스 에클레크톤’(γένος ἐκλεκτόν)이라고 나옵니다. ‘선택을 받은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게노스’라는 것은 한 핏줄, 한 조상으로 연결된 한 덩어리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게노스’라는 단어가 대표적으로 쓰인 것이 요셉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흩어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후세의 교육을 염려한 나머지 열두지파 대표들이 모여서 당시 통용되던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해서 자라나는 세대에 읽히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생긴 것이 ‘70인경’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당시 헬라어로 옮겨놓은 성경입니다. 그 희랍어 70인 역에 요셉 스토리가 나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가서 양식을 구할 때 요셉은 “너희가 누구냐?”라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가 모두 한 조상에서 나온 족속입니다.”라고 대답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핏줄이 같지 않더라도 문화나 왕, 역사 등에 의해 한 덩어리의 공통성을 가진 단위로 묶여질 수 있는 민족이나 족속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너희는 선택받은 족속이요”라고 했을 때 ‘너희’라는 것은 당시 존재하는 보편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은 ‘도대체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맨 처음 복음이 선포되고 기독교의 정체가 드러나던 1세기와 2세기로 데려가 보려고 합니다.
2.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에 관한 유사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옛날의 책들을 ‘외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당 시대의 참고 자료가 됩니다. 외경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방인이나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제 3의 족속이 나타났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당 시대 사람들의 인상이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구별되었는데, 유대인들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사상에 완전히 틀이 잡혀져 있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의 삶이 있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의 세계관과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세계관이 있고 인간 중심의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두 족속 외에 다른 족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또렷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타협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아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교회 역사에서 속사도 교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폴리캅의 순교’라고 하는 외경이 있는데 이 책에서 기독교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다.” 이방인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도 달랐고 이방인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물론 불신자입니다. 플루타크가 쓴 유명한 책이 한 권 있는데 『도덕론』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플루타크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로마의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을 가리켜서 그들은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덕론』에서 플루타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에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첫째, 선하고,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1세기와 2세기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지칭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매우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정도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이상 언급한 내용은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칭송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탁월한 특징은 선함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하고 경건한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자유를 얻지 못했고, 심지어 핍박을 받고 때로는 순교의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사랑을 받는 경건한 모습을 통해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두렵게 했고, 지울 수 없는 존재의 울림이 느껴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3. 기독교인의 구별: 존재적 특성
기독교인은 그가 어떤 지위를 가졌느냐, 교회에 출석하느냐, 밥 먹을 때 기도를 하느냐, 가정에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목사님을 모셔다 예배를 드리느냐,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하느냐, 이런 것에 의해서만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적인 울림이 그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울림은 형식과 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 안에 있어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얼마 전에 제가 만난 교수님이 한국과 미국 문화의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서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습니다. 자기 친척이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비자 문제로 많이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민국에서 어느 미국 남자가 친절하게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데 잘 해결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남자의 할머니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은 은인이다. 그분은 우리가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아무 소리하지 말고 그분에게 사례를 하거라.” 아들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미국은 그런 것을 하면 안 된다는데.”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짐승이다.” 그래서 돈 봉투를 가지고 가서 “당신한테 너무 고마웠다.”라고 하면서 갖다 주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그것을 받고 꺼내서 세어보더랍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친절에 너무 고마워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가지고 안 됩니다.” 하더랍니다. 성의껏 3000불을 넣었는데 “30만 불은 넣어 오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으면 30만 불짜리 연금이 날아가 버리니까 가져오려면 30만 불은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로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어디 가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큰일 난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 사람이 미국에서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일은 반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받고 어떤 때는 안 받다가 오늘은 기분이 별로여서 안 받았다면 그런 존재의 울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무원으로서 일평생을 살아온 그의 삶의 방식이고 확신이고 신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관성 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상당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켰는지 문제를 냈습니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느 학생이 자신의 신념을 기록했습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종교이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을 믿는 것인지를 이야기하면서 쭉 써 내려갔습니다. 이 독실하던 사람이 자기 제자가 쓴 한 페이지짜리 글을 읽고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존재의 울림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저는 극단적인 세속주의를 부르짖는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 중 어떤 사람에게서도 이런 존재의 울림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위대한 존재의 울림을 울리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방인들보다 더 탁월한 사상을 주셨고 진리를 주셨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약의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이 구별된 것은 크기나 규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두 줄 밖에 안 나오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세계에 당신의 존재를 알리기에 작은 이스라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어두운 밤, 시골에서 반딧불을 보신 적 있습니까?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데도 또렷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밤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제의(祭儀), 나라의 크기, 제도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다름 때문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선포 때문에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족속, 제 3의 족속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B.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진리 선포에는 언어적인 선포와 존재적인 선포가 있습니다. 우리가 천하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결코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은 세상 끝 날까지 유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셨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의 선포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천당에 갈 수 있다. 우리의 할 일은 끝났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식의 복음적인 해석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볼 때 대단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세탁되고, 견고하게 지식으로 세워지고, 삶 전체를 한 줄 한 줄 피를 찍어 써내려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죄와 분투하고, 사회의 더러운 악에 항거하고 몸부림치며 분노하는 치열한 삶 속에서 서서히 존재의 울림을 갖게 됩니다.
저는 양심에 손을 얹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지위가 매우 높거나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한풀 꺾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의 누구라도 그런 것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높은 지위에 있을 때 울림이 있고 내려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낙향해서 골방에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고 있어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은 오늘 부여받은 높은 자리나 오늘 획득한 물질적인 자산에 의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물질을 소유하고 남보다 커다란 재능을 소유하고 계발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자리에 있든지 존재적인 울림을 가지고 산다면 동네 골목에서 편의점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컵라면을 팔아도 그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1세기와 2세기 자료를 볼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껏 자신이 살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삶,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거룩한 인격으로 자신의 구별됨을 유지해가야 합니다. 이것을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세기와 2세기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제 3의 족속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들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지만 저들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많은 사업을 하는 것보다 이런 저런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을 지시하고 움직이는 높은 권력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인 선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이승훈 씨, 기독교에서는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이런 사람들은 죽었으나 아직도 그 존재의 울림이 우리에게 울려 퍼집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어디에서 목회하다 돌아가셨는지 아는 사람은 여러분 가운데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애양원 하나 정도 알 것입니다. 몇 명이나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을까요? 도산 안창호 선생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지신 분이었을까요? 그것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존재의 울림이 역사의 시공을 넘어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5공에서 3공에서 6공에서 권력의 줄을 타고 높은 지위에 올라 4년 동안, 5년 동안 매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선택된 족속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높은 권력자들이든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든 누구 앞에서나 항상 동일한 복음을 선포하셨고, 당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정의가 어떻게 사랑에 의해 완성되는지 온 인격과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존재의 울림이 모자라기 때문에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냐, 돈이 얼마나 있느냐, 얼마나 큰 교회 다니느냐, 직분이 무엇이냐, 이런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의존에서 오는 은혜는 선택을 지탱하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됩니다. 명료한 지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생한 이해와 깨달음, 말씀대로 살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힘찬 은혜,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계속 역사하는 것만이 이런 존재의 울림을 드러내는 첩경이 됩니다. 공동체가 모여서 규합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데모 하는 것을 통해서 세력을 보여주는 것이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기독교인의 규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말 세속적인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의 영적인 연합을 통해서 예수가 이 세상에 계실 때 보여주셨던 존재적 울림에 공동체 모두가 동참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IV. 신자의 정체2: “왕 같은 제사장”
신자의 두 번째 정체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희랍어 성경은 이 부분을 ‘바실레이온 히에라테우마’(βασίλειον ἱεράτευμα)라고 담고 있습니다.
A. 두 가지의 해석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왕의 제사장, 혹은 왕께 봉사하는 제사장이라는 해석과 왕 같은 제사장, 왕적인 제사장이라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통해서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드높이는 위대한 혁명적인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루터의 새로운 해석 즉,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왕적인 제사장이 되었다.”라는 해석은 잠시 교회에 커다란 긴장을 가져왔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팽팽한 긴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이야기했을 때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하나의 교회를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상 하나의 교회를 두 개의 계급으로 뚜렷이 나누었습니다. 가르치는 교회와 가르침을 받는 교회, 즉 사제들로 이루어지는 명령하는 교회와 평신도들로 이루어지는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사제들의 계급은 거룩한 계급이고 그 아래에 있는 평신도들의 계급은 그렇지 않은 계급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사제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성례를 할 때 우리는 여러분에게 성례를 가지고 가지만 카톨릭에서는 성례는 여기에 있고 모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습니다. 자기 손으로 포도주잔을 들고 먹거나 떡을 손으로 집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평신도는 거룩한 성체에 손을 댈 수 있는 계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입을 벌린 사람의 입에 성체를 넣어주고 포도주를 줍니다. 루터는 이러한 사상을 반대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이 찢어지고 모든 중보직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 없이 그리스도 한분만을 의존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라는 의미에서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례를 받음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은 교역자들과 성직자들과 다름없는 똑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목회자, 장로, 집사, 이런 교회의 제도와 질서가 필요 없다고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인간의 중보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가 이미 이루신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상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단어는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출애굽기 19장 6절을 따온 것이라고 봅니다. 19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것이 바로 구약입니다. 신약은 이것을 구체적이고 영적으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신약에서는 구약의 열매인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이 계승이 되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제사장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성별되었다는 점에서 구약의 제사장과 같고, 이방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사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중보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들은 왕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B. “제사장들의 나라”의 은유
“제사장들의 나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은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매우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재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방 사이에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으로서의 특징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구별된 가운데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율법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삶의 모델을 통해서 이방 나라와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구별되었고, 율법을 따라 산다는 점에서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도덕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공경하는 종교적인 기반 위에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이 구축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이것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대사회와 아무리 잘 소통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룩한 무엇이 없다면 그 소통은 저들의 것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느끼는 것보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울림이 더 크다면, 느끼지 못하는 경건, 만질 수 없는 하나님, 확신할 수 없는 우리의 교리보다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저들의 선포를 들으면서 우리가 배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비록 높고 훌륭한 지식은 없어도 이미 알고 있는 건전한 복음의 교리들을 굳게 붙들고 매일 매일 주님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경건한 삶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 웅장한 존재의 울림을 요구하지만 교회에는 이러한 경건이 현저하게 감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화란에 가서 유명한 신학자 네 분을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그 중 두 분은 아주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개혁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영향력이 있는 교회로 새롭게 태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왜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우리 앞에 있는 현대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이성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위대한 힘을 회복하는 일은 이성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C.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또한 본문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릅니다.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위대한 통치 주, 주인이시며 다스리시는 임금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권을 가지신 만국의 황제이심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그분께 반역한 이 세상을 토벌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복종시키도록 부름 받은 봉사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 가지 봉사의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교회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과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봉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봉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존재의 위대한 울림을 갖는 것입니다. 이 봉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나 타락한 이 세상을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위대한 경륜의 지상적인 성취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지식을 획득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누구인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경륜에 저항하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분노하고, 한편으로는 무지와 죄악 속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애통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신자를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존귀한 구원사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의 겸직이 불가능했습니다. 왕으로서 제사장직을 넘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겸직될 수 없는 구약의 두 직분이 만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의 직분과 왕의 직분이 함께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직분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의 한 몸을 이루면서 구원사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셨던 왕직과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을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a)라는 경건한 교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왕 같은 사람들이고, 세상을 위해 섬김의 기도와 가르침으로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구원 받는 순간,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신분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을 받고, 천사도 흠모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가정을 이루어가고, 교회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정직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사업을 하고, 이웃을 섬기는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위대한 존재적인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한 세기에 몇 명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인물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종으로 울리고, 그렇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작은 종으로 울림을 울립니다. 울림의 음파의 파장과 울리는 거리는 다를지라도 동일한 종류의 울림을 끼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삶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우리는 이런 모본을 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높은 지위나 재산이나 학벌을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빛이 되어 주셨고, 웅장한 울림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울림을 듣던 사람들은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박해를 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V. 적용과 결론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8.11 장년 여름수련회 저녁)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이미 대대적인 신앙의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조직적인 핍박과 함께 변절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쓰나미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그 앞에서 모래성으로 집을 짓는 것처럼 느껴져서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존재의 선포를 통해 불신앙의 세계 속에서 싸우는 것은 우리의 씨름이 아니요 혈과 육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는 전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장렬하게 순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웅장한 울림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신의 현실에 비관하지 말고 신자의 정체성을 깊이 숙고하여야 합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신자의 정체성을 숙고해야 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소금도 되고 설탕도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자의 일생은 이 세상에서 거치는 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소명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다 건너, 물 건너, 남의 나라까지 나의 존재의 울림을 울릴 수는 없어도 마주 대하며 만나는 나의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 나의 친구들, 하나님 없이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을 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훨씬 더 견고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희생하고도 주님을 섬길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을 회복하여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될지를 반성하고 예수와 함께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I. 본문해설
우리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덕을 입어서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현실을 보면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평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편안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의 현실이 닥치면 이것은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할수록 현실에 대한 불만은 증폭되고,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자신의 삶의 사태를 개선해보려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 삶의 상황을 보면서 믿음이 식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잘못된 신자의 삶은 올바른 신앙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질서 지워진 선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잘 질서 지워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질서 지워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알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은 선한데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써 악하게 되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모든 것을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면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질서가 생깁니다. 이 질서에 대한 인식 없이는 선한 삶,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헝클어진 삶을 사는 것은 생각, 실천, 영적인 이해, 이 모든 것의 오류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는 반지성적이고 감정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시대에는 헝클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뜨거움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일평생 이 질서가 무엇인지 배우고 질서 잡혀진 선한 삶을 추구하며 살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것은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영적으로는 예수와 상관없이 끊어져 있던 사람이 영적으로 생명을 부여받아 예수께 접붙여져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된 사람입니다. 지성으로 보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세계의 의미와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입니다. 신자가 됨으로써 불신자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에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각자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자는 이것이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관점이 수립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고백을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계와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혹은 로드십(Lordship)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로드십,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예수가 날 위해 죽었고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그분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 주인이십니다. 나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만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그분의 통치를 받고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시대에 박해를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다양한 민족들을 통일한 나라였기 때문에 상당히 너그러운 정책을 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큰 제국을 통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만 들으면 자유를 주었습니다. 첫째, 로마에게 낼 세금을 정확하게 낼 것, 이것은 양보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나중에 생긴 것인데 황제를 숭배하는 사상을 강요했습니다. 너희 종교를 버리고 황제를 숭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황제도 숭배하고 너희들의 종교도 지키면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 고백을 했고 그분께 내 인생과 모든 세계가 그분의 것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어떻게 하나의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황제가 우리의 주라고 고백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사실을 배반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또렷이 유지하고 일평생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와 마귀와 이 세상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의 정체성,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또렷한 인식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빛나는 지식과 뜨거운 은혜입니다. 빛나는 지식과 뜨거운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 주어진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빛을 받고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러면 신앙고백은 신앙고백대로, 삶은 삶대로 찢어지게 되고 이것이 결국 오늘날 교회가 욕을 먹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주가가 떨어진 회사가 이미지 개선하는 방법처럼 접근해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닥부터 모두 긁어내고 신앙을 다시 구축해야 될 문제인 것입니다.
II. 신자의 정체 3: “거룩한 나라”
사도 베드로는 신자의 세 번째 정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거룩한 나라’는 희랍어 성경에 ‘에뜨노스 하기오스’(ἔθνος ἅγιος)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기오스’(ἅγιος)라는 단어는 ‘하고스’(ἅγος)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하고스’는 희랍의 문학에서 ‘종교적인, 종교적으로 구별된’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권으로 넘어오면서 ‘하기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바로 ‘거룩하다’라는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에뜨노스’(ἔθνος)는 ‘나라’,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족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nation'입니다.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에뜨노스’라는 단어는 남성명사 단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수로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 에뜨네’라고 쓰이면 ‘나라들, 민족들’이 되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뜨노스’라고 단수로 쓰이면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고, ‘타 에뜨네’라고 복수로 쓰이면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 뜻이 확장되어서 비록 같은 핏줄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왕의 통치를 받으며 문화 전통 등에 의해서 한 덩어리가 된 사람들의 거대한 연합을 ‘에뜨노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A. “거룩한”: hagios
1. 주께 바쳐진 구별 (마 4:5, 27:53)
‘거룩한’,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하고스’, 종교적인 경외심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면 ‘거룩하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4:5),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3) 여기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구별되었을까요? 하나님께 바쳐짐으로써 구별된 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잘 되는 식당은 예약을 하지 않고 가면 마냥 바깥에서 기다리거나 혹은 못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식당에 가면 테이블 위에 ‘예약석’이라고 푯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이미 온 사람은 기다리는데 주인이 그 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이미 예약된 자리입니다. “김 아무개 씨가 열 명의 친구들과 함께 오후 6시에 이 자리에서 식사하기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그에 의해서 선점된 것입니다. 미리 점유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함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향해 구별되었는가 하면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구별된 것입니다.
사소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입이 생기면 십일조를 떼어 놓습니다. 어떤 성도가 물어봅니다. 그것을 쓰고 다시 채우면 안 되느냐고 하는데 안 그러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떼어놓는 그 순간 구별된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점된 것입니다. 딱 떼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어디 어디 가자고 합니다. 그때 “안 돼. 주일이야.”라는 것은 곧 하나님에 의해 떼어 놓은 바쳐진 날,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선점된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전통을 따르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이 깨어지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로마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따로 떼어 놓아 선점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이나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주도권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제 서가에서 와서 책을 보면서 목사님은 어쩌면 이렇게 철학책이 많으시냐고 불경도 있다면서 놀라워합니다. 불경도 가지고 있고 가끔 봅니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서가에 있는 모든 책들 중 어떤 철학책이나 종교책도 제 사상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사상은 이미 그리스도께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무엇에 쓰일까요? 그들도 무엇인가 좋은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진리들이 언뜻언뜻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것인데 사람들이 짝을 잘못 맞춘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가져다가 해체해서 짝을 다시 맞춰주는 것입니다. 설교 속에서 불교나 도교의 이야기를 조금 인용한다고 해서 종교 혼합주의로 가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리에 다시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한 성도이지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거룩해진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하나님에 의해 예약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점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값을 못하고 살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께 봉사하기 위해 미리 점유된 것은 다른 소유권이나 사용권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에 의해 선점이 된 거룩한 것이 침범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반응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위로가 됩니다. 내가 항상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예약되고 선점된 사람이 그 부르심과 배치되는 삶을 살 때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이 근심이 됩니다. 그 의는 곧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응징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응징의 대상이 될 것이니 두려운 것입니다.
2. 주님과의 관계 (수 5:15, 고전 3:17)
두 번째 거룩하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5장 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또 고린도전서 3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관련이 됩니다. 따라서 ‘거룩하다’라는 의미가 주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되면 두 가지 의미를 다시 갖게 됩니다.
한 가지는 존재적인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나면,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셔서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이 계시고 자신은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십시오. 무한한 우주의 공간에 떠도는 별들,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항성의 거리가 약 4.3광년이니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런 우주를 생각할 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가글을 하면서 우주를 생각합니다. ‘몇 분 만에 입안에 균들이 많이 생겼겠구나.’ 그리고 가글을 한 모금해서 왈칵 왈칵 하면서 ‘수백만이 또 죽어가는구나.’ 그러고 확 뱉습니다. 그들에게는 내 입이 우주이고 이빨 하나가 은하계일 것입니다. 우리도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시인 진자앙(陳子昻)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전불견고인(前不見古人)이요”, “앞에서는 뒷사람을 볼 수 없고”, “후불견내자(後不見來者)라”, “뒤에서는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구나”, “염천지지유효(念天地之有效)하니”, “천지의 유효함을 생각하니”, “독창연이체하(獨愴然而涕下)라”, “홀로 외로워 눈물만이 흐르는구나.”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우주를 보면서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인생의 최초의 순간이 옵니다. 그것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합니다. 이어령 박사는 책 속에서 고백을 하는데, 여섯 살 때인가 논둑으로 굴렁쇠를 굴려가다가 한순간 탁 주저앉으면서 통곡을 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자기가 이 드넓은 세계에 사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없이 죽은 사람은 신앙 없이 사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는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데 백년 뒤에 다시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년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60년 정도만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또 하나는 불변성입니다. 제가 눈 수술을 하고 눈이 밝아졌는데 돌아와서 교회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 사람들이 너무 늙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모두 중년부인이었고, “집사님”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다 권사님이었고, “권사님”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사실 할머니였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져서 오히려 불편한 게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눈이 밝아져서 거울을 보는 게 한참 동안 적응이 안 되었습니다. ‘저 늙은이가 누구인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변합니다.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거꾸로 흘러가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나를 만나서 목사님은 더 젊어지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 아첨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발언은 성령이 슬퍼하신다고 말입니다. 변하는데 더욱 새롭게 변하는 게 아니라 완전성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변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불변성, 그런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완전성도 없습니다. 누구인들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닮은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도 사랑합니다. 자식을 낳고 비로소 아버지가 되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식을 낳아서 어미가 되어서 밤잠을 못자고 얼굴이 반쪽이 되도록 아이를 젖먹이고 기르고 정신을 못 차리도록 고생을 실컷 하고 나면 비로소 자기 엄마를 생각할 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애를 안 낳으면 아직 인간이 덜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저에게 그래도 사랑이 꽤 있고 정의롭고 자비심이 있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니까 “이것이 나의 사랑입니다.” 하기가 부끄러워서 차마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유를 하면, 노래방에서 부르면 한 80점이 나오던 사람이 야유회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려고 하는데 첫 번째 노래하는 사람이 파바로티입니다. 두 번째 호세 까레라스가 왔습니다. 세 번째 플라시도 도밍고가 왔습니다. 그러더니 안드레아 보첼리가 노래를 하고 “당신이 한번 해보십시오.” 하는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렇지 않은 자신 사이의 차이가 불결하고 더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서 통절한 회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완전성을 가진 분이고 나는 그렇지 못한 더러운 인간이라고 할 때 어떤 반응이 생겨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게 되고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엮어지면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미천한 죄인인 나 자신, 그리고 온 땅에 드높고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깊이이고, 영성이라는 것도 거룩함과 관련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지 않고는 신앙이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그 성품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풍부하게 경험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정동이 일어납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정의로우신 분이구나. 하나님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구나.’ 마음에 이런 감동을 받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지고 도덕적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 은총을 힘입어 사는 것이 인격화 될 때에 존재의 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경건’(piety)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체험의 반응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에 와서 도덕적인 교훈을 받고 위로를 받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의 예배와 말씀과 교제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비밀스런 종교적인 원천을 갖는 것입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2008년 여름수련회 말씀인데 스터디 교제도 있고 요약본도 있습니다. 차근차근히 들으면서 구축해가십시오. 이러한 신앙생활이 아니라면 모래 위에 지푸라기로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건의 원천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화) 일본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에 어느 스님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불도를 닦고 공부를 많이 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국사(國師)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승려로서 최고의 영예입니다.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께서 불공을 드려주신 덕택으로 제가 젊은 나이에 일본의 국사가 되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그러면 엄마가 맨발로 달려와서 “우리 아들 장하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출가할 때 도를 잘 닦아서 차안(此岸)에 사는 고통 받는 중생들을 피안(彼岸)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어 주기를 원했는데 너는 겨우 명리승이 되고 말았구나.” 명예와 이득을 좇는 세속적인 승려라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쾅’ 하는 각성이 주어졌습니다. 엄마로부터 받은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러면서 한순간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왕 앞에서 그 직을 사하고 시골로 낙향하여 도를 닦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종교들도 이런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인격적인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주로 섬기는 기독교에서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 없는 신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갖게 됩니다. 교회 일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상식도 풍부한데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존재적인 울림이 있으려면 존재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사상적인 질서가 잡히고 삶이 그 질서에 맞춰져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하든지 확고한 신념과 사상 속에서 행하는 사람이 될 때 그에게서 존재의 울림이 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사명은 이 땅에서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큰 소명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여러분도 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겪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으로부터 감화를 받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받았던 감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울림이 전달되었을 때 그 힘이 무엇인지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얼굴이 예뻐서 존재의 울림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늙어서 쭈글쭈글해지면 존재의 울림은 없어집니까?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존재의 울림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좋은 학교를 못 나온 사람은 일평생 존재의 울림을 한 번도 못 울릴까요?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존재의 울림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을 당해서 허둥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저렇게 간절히 부를 수 있을까?’ 그 사람의 학벌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얼굴이나 나이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울림은 그런 것들과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이 울려 퍼지는 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우리는 주께 바쳐졌다는 점에서는 이미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개차반 같은 인생을 살아도 우리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별해 놓으신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성화의 생활입니다.
B. “나라”: ethnos
1. 거룩함의 소명: 공동체 독특한 특징
본문에서는 ‘나라’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에뜨노스’입니다. 성경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거룩한 자녀로 불러주신 것도 강조하지만 더 많은 구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공동체로서의 거룩함이 강조됩니다. 곧 “거룩한 나라”라고 했으니 결국은 이 거룩함의 소명이 공동체의 독특한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으니까 사회를 개혁하고 도덕적인 면을 개선하자고 말을 하지만 신자는 속이 허합니다. 어느덧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이런 상태를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욕을 하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여기에 더 마음을 씁니다.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라고 했던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박수를 치고 잘한다고 우리를 추켜세워도 주님께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이 그분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게 하면 세상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분께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세상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고 어떻게 할 것인지 반성해서 기독교가 개선된 적은 없습니다. 교회의 영적 갱신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평가에 더 마음을 많이 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온전한 기독교 사상으로 정돈된 질서를 갖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빛으로 살고, 진리에 부합하는 소금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면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불러서 세미나를 합니다. ‘아, 정말 저렇게 기도해야 하지. 아멘.’ 하고는 끝이 납니다.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을 불러다가 간증을 듣습니다. 가슴에 감동이 일어나면 감동받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올바로 살자고 올바로 산 사람을 데려다가 올바로 산 이야기를 듣고 끝이 납니다. 모든 것이 대리만족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거룩한 나라라고 불러주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제 초대교회시대에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또렷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제 삼의 족속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준 인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 울림을 들으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혹은 그들에게 권세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존재의 울림이 워낙 커서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고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컴퓨터를 하는 사람들은 그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울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울림 때문에 사실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2. 네 가지가 필요함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거룩한 나라로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 찬란한 말씀의 빛, 마음을 쏟는 기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의로운 용기가 그것입니다.
III. 신자의 정체4: “하나님의 보물”
A. 이 구절의 의미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신자의 정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 구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λαὸς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이라는 조금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 구절은 신명기 14장 2절, 또 말라기 3장 17절에 나오는 ‘자기 기업의 백성’, 혹은 ‘나의 특별한 소유’,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레암 세굴라’(לְעַם סְגֻלָּה)라고 나오는데 ‘레’(לְ)는 ‘어디 어디로’ ‘무엇 무엇을 위하여’, 이런 뜻이고 ‘암’(ְעַם)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세굴라’(ַסְגֻלָּה)라는 단어는 ‘샤갈’이라는 동사에서 나왔고, ‘샤갈’은 ‘숨기다, 감추다’라는 의미입니다. ‘세굴라’는 피동여성단수분사인데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말라기서의 이것을 ‘보석’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보석은 여러 겹 싸서 남이 못 보는 곳에 둡니다. 과시할 때만 목에 걸고 다니고 얼른 싸서 감춥니다. 그것이 바로 ‘세굴라’입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있는 ‘페리포이에신’(περιποίησιν)이라는 단어입니다.
B. 주께 보물같은 백성들
학자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into'라는 전치사가 지금 현재도 귀하지만 미래에 그렇게 보석처럼 귀하게 여김을 받는 상태로 들어가게 될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핏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성화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보석 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모든 불결과 거룩하지 않은 것들이 다 벗겨져 나가고 완전히 거룩한 백성들이 될 때 하나님께 더 소중한 보석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원석에 비할 수 있다면 원석을 잘 다듬은 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캐럿(Carat), 클리어(Clear), 컷(Cut), 3C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됩니다. 캐럿의 크기가 얼마나 큰가, 얼마나 투명하냐, 얼마나 커팅이 또렷한가, 여기에 따라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은 원석이라면 하나님이 그것을 깎고 다듬어서 마지막에 완전한 보석으로 만드셨을 때는 더욱더 소중한, ‘완전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주석가들이 많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셔서 귀한 백성이지만 아직은 완전히 소중해진 것은 아니고 그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 앞에 더욱 소중한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것은 ‘그의 보물이 될 백성’을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해졌고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으로서 소중한 자들이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고 마지막 때에 더욱더 완전히 소중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랑받고 있지만 종말에는 더욱더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될 보물 같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입니다.
얼마 전에 이랜드 사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경매장에서 102억인가를 주고 사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치가 있다고 나중에 전시회를 할 때 쓴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동생이 그렇게 소중한 것으로 호두를 까먹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아마 ‘쟤가 미쳤나?’ 그럴 것입니다. ‘이 소중한 것으로 어떻게 호두를 깨먹을 생각을 하나?’ 기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102억짜리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호두를 까먹는 일보다도 못한 일에 쓰임 받을 때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너무 교만해지든지, 자기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는 열등감 속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오늘 성경은 신자의 정체를 보물과 같은 존재라고 부릅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구약에서 ‘세굴라’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하나님도 감추어 두고 싶은 존재일까?’ 언젠가 외국을 여행하면서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그림 앞에만 새카맣게 모여 있었습니다. 유리로 벽이 둘러져 있었는데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계적인 박물관에서는 워낙 귀중한 작품의 경우에 진품은 지하실에 감추어두고 가품을 전시해 놓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고 감탄을 하는데 사실은 가짜인 것입니다. 너무 소중한 것은 감추어놓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실감이 안 났습니다. 보물을 가져본 적이 있어야 실감이 날 텐데 말입니다. 저에게 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입니다. 회심하던 해에 산 성경이니까 38년 정도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성경을 기가 막히게 수리해주는 데가 있다고 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은 성경을 지방까지 보냈습니다. 성경을 다 뜯어서 새로운 책을 만들어 보내주었는데 옛날 같은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 한 10년 전쯤 날근날근한 성경을 품에 안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누군가가 죽어도 사겠다고 하면 얼마에 팔 수 있을까?’ 가격을 못 정했는데 최종적으로 결론내기를 2억 원에도 안 판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돈을 주고 살 사람도 없겠지만 2억을 준다고 해도 나는 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참으로 소중한 것은 감추어 둡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매들도 옷을 새로 사 입고 오면 자꾸 뭐가 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새로 사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주차장에 뛰어가서 문안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것도 몇 달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가 묻든지 말든지 발로 차고 다니고 찌그러져도 그냥 끌고 다닙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감춥니다.
거룩함의 특성을 나라에게 기대하시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소중함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너희’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모든 흩어진 보편교회를 가리키면서 사도는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보물처럼 소중한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자존감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라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식은 기초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아들에게 접붙여진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거룩함에 참여하여 거룩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의 신부인 교회를 보석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보석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교회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 값을 지불하시고 교회를 사심으로 교회가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붙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가지 재앙을 보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치루고 나서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전에는 사탄에 결박되었던 존재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구속의 제물로 내어주시고 희생당하심으로써 건져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불신자로 나뒹굴며 살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때 우리가 보석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석과 같이 여기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 나타나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연합된 교회의 일치와 사랑과 교제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보물 같이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항상 떠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좋은 것을 받는다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의 일부가 나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도 교만해지는 것은 내가 특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서 주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고 여기 있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못 만났다는 우월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얻는 모든 유익을 통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아름다운 교회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폭력적이고 무지한 사람들이 교회를 짓밟습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들도 용서하셔서 그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보물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공동체적으로 보물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보물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이미 소중하지만 종말의 날에 완전히 소중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는 보물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신앙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이 준 권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시는 경우에 그에 합당한 존경심을 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삶의 일부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소유가 많거나 공부를 많이 했거나 얼굴이 뛰어나게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꺾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아닙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예뻐도 못생긴 사람이 있기 때문에 빛나는 것이니 예쁘게 생긴 한 사람은 못생긴 수천의 사람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가진 사람이 빛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꺾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경을 표하기를 원하는 점에 있어서는 정직하게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기독교적인 당당함, 성도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보물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자존감, 비록 돈이 없고 사회적인 지위가 조금 낮아도 인간의 존엄을 해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혈기로 나타나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네 가지 조건을 이야기 할 때 용기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아직 완전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소중한 보물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이니 적어도 호두나 깨다가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쿵’ 하는 존재의 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보물처럼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이것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누리도록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 앞에 보이는 지체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보석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찬양)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하나님은 세상이 욕하고 짓밟고 침 뱉는 교회들조차도 감추어두고 싶은 보물처럼 여기면서 종말까지 당신의 교회를 지키십니다.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 탁월하고 거룩한 의무,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표지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새로운 족속들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의 생각과 모든 것들이 땅에 꽂혀 있습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고 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실제로 거룩하게 살지 못해도 우리를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불만족스러워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주고 사신 보물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정체성을 명료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열렬한 기도 속에서 우리의 심정을 토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살려는 거룩한 용기와 철저한 자기 성찰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매일의 기도시간, 예배시간마다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한 다발 쥐어주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과 같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은혜를 통해, 비참한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 언제나 내 곁에 계시는 임마누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보물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매일 매일 체험합니다. 그 속에서 삶의 사태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아도 능히 그것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발견하며 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그 속에서 ‘쿵’ 하는 존재의 울림이 들리는 것입니다. 삶의 사태가 자기 마음에 맞게 전개될 때 헤헤거리고 좋아하는 것은 존재의 울림이 되지 못합니다. 부자가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됩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없이 성공한 부자가 하나님 때문에 성공한 부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에서 존재의 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발에 치이는 것 같고 패배하는 것 같고 실패하는 것 같아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당신이 감추어두고 싶은 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음속으로 계속 눈물이 나는 것이 윤일병 사건입니다. 그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을 군화발로 차고 짓밟았습니다. 윤일병은 엄마의 마음에 보물이었습니다.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영적인 수준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을 대하면서 지위의 높낮이, 소유의 유무, 학식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인간으로 예의를 갖추고 대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런 문제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3-4)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눈이 어두워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사람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의 외형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는 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보물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동안 숨기고 보호하시고 지키고 돌보셨고, 더 정결하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한 나라, 하나님 앞에 완전히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에 합당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도 싫은 나를 보물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시고 이 세상 한 가운데 두어 존재의 울림과 진리의 광채가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우렁찬 선포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의 덕을 선포하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Ⅰ. 본문해설
사도 베드로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그 목적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가장 완전한 기쁨의 삶입니다. 신앙의 물러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이 하찮게 여겨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이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구원 받은 이후의 우리의 삶이 구원의 계획을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의도와 우리의 삶의 의도가 일치를 이룰 때 거기에서 구원의 기쁨이 유지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소명으로 설명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즉시 이 땅에 이미 임한,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오지 않은, 그러나 미래에 반드시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그 안에서 행복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금 말씀드린 단순한 신앙의 원리를 붙들고 살지 않으면 어떠한 신비한 경험을 하고 예수를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 위에 쌓아올려지는 모든 헌신과 기독교적인 삶은 모래 위에 쌓아올린 집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았다고 할 때 이 나라는 앞으로 올 나라가 아니라 이미 임한 나라입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 믿은 것을 가지고 ‘나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라에는 태어날 때부터 나와 똑같은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 속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음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개인의 신앙을 통해서 얻은 것이지만,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접붙여져 한 몸이 되었으니, 우리는 이 왕국의 소명을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이미 임했으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분투하는 것이 구원 받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의 문맥 안에서 이해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신자들인 교회의 지체들과 관계를 맺고, 불신자들인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구도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구도 속에서 질서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속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말씀의 빛과 열렬한 기도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생활이 가미 될 때 그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견고한 신앙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위대한 기독교적인 존재의 울림이 이 구조 속에서 태어납니다. 이것은 지식만을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지식의 얼개가 없이는 질서가 잡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깊은 영적인 체험과 함께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고, 매일 매일 열렬한 경건의 생활을 통해서 내가 믿은 바를 붙들고 살 수 있는 구체적인 결단과 용기가 삶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아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않아도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입니다.
Ⅱ. 우리에게 행하신 일
바로 그러한 소명을 가리켜서 성경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명은 우리에게 이미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것, 이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이는’이라고 나오는데, 희랍어 ‘호포스’(ὅπως)라는 접속사입니다. ‘어떠 어떠한 식으로 무엇 무엇을 하기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후반절에 보면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so that may'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었던 너희들을 구원하셔서 새로운 정체성 즉,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보물이 된 소유로 만들어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렇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의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A. 어두움에서 불러냄
제일 먼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어두움으로부터 불러내었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이 ‘어두움’은 어떠한 어두움입니까? 여기에서 쓰여진 희랍어 단어는 ‘스토코스’(σκότος)입니다.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어두움’을 가리키는 단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코티아’(σκότία)라는 여성형 단어가 있고 ‘스토코스’라는 남성형이 있습니다. 여성형의 의미는 한정적입니다. 자연적으로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것과 영적인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남성형은 훨씬 더 의미가 폭넓습니다. 햇빛이 없어서 어두운 물리적인 어두움도 스토코스라고 불렀고,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한 영적인 어두움도 스토코스라고 불렀고, 지성이 모자라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도 스토코스라고 불렀고, 심지어 어둡게 하는 세력들을 가리켜서 스토코스라고 불렀습니다.
1. 지성적 어두움
제일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지성적인 어두움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베드로전서 1장 14절에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이상의 성경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였고, 인간과 이 세계에 대해서도 무지한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무지를 친구삼아 망령된 행실을 좇으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지 위에 엉성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이상한 이야기들로 엉성하게 짜깁기를 해서 그것을 인생관으로 붙들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인생관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까? 충분했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도 확신에 찬 인생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삼아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에 어두움을 물리쳐주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누구이고, 이 세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미들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두 알았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금도 성경을 읽고, 때로는 책을 읽고 때로는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아, 우리가 정말 몰랐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지성의 어두움을 지속적으로 벗겨주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못 믿었거나 혹은 믿었다 하더라도 아주 무지한 상태에서 저급한 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두움
두 번째는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에서 우리를 불러내주셨기 때문에 지성의 눈도 뜨여서 알지 못하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떠한 사물들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대부분 경험을 통해 압니다. 우리의 경험은 밖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실어 나르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을 보고 피부에 접촉을 하면서 정보들이 들어옵니다. 어떠한 사물들에 대한 정보는 한번 경험을 하면 우리의 뇌리 속에 차곡차곡 정보로 저장됩니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물은 차갑구나.’ 정보가 들어갑니다. ‘이 플라스틱은 말랑말랑 하구나. 이 유리그릇은 단단하구나.’ 이러한 정보들이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물을 보면 시원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계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정보를 쌓아 가면서 지식의 크기가 커집니다. 더 공부를 하고 지성을 훈련하면 이러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생겨납니다. 냉장고에서 꺼냈을 때는 깨끗한 물통이었는데 왜 겉에 이슬이 맺히는지에 관해 어린아이일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차가운 물통에 있는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이슬이 맺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는 우리의 육체의 감각 기능을 통해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신령한 세계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의 기능이 파괴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시 복원시켜 주셔서 신령한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전까지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려면 신령한 빛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 신령한 빛을 볼 수 있는 감각 기관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시신경이 남아 있는 맹인이 있고 시신경이 완전히 죽은 맹인이 있습니다. 시신경이 남아있는 맹인은 볼 수는 없어도 지금 빛이 지금 들어오고 있고 빛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신경이 완전히 사라진 맹인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캄캄한 밤중이고 빛에 대한 감각의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한 맹인처럼 신령한 빛에 대한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신령한 빛이 들어오게 하심으로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 이천 년 전에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빛이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중생과 회심을 통해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예전에는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 나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한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은 예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거룩해지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로 아무리 행복해져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해지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번영이 주는 행복보다 거룩함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더욱 갈망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함, 영광, 죄, 은혜, 사랑, 진리,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일제히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심하고 난 다음에 예배드리는 것이 싫고 성경을 읽는 것이 싫고 교회 나와서 은혜 받은 성도들과 교제 나누는 것이 귀찮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심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질료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질료를 하나씩 빚으시고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는데 첫 번째 개별 사물은 놀랍게도 ‘빛’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빛으로 처음 창조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바깥에서 완전히 죽어있던 우리들을 구원하심으로 재창조하실 때도 제일 먼저 빛이 들어왔습니다. 영혼에 신령한 빛이 들어오게 하셔서 더 이상 사단의 권세에 매여 있지 않도록 우리에게 신령한 빛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예전에 있던 것과는 다른 세계관, 다른 인생관, 다른 인생의 목표, 완전히 다른 사랑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예전에 살아가던 삶과 비슷하지 않은 삶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는 첫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기독교인들의 인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몇 가지 자료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 경건한 자, 선을 행하는 자로 비쳐졌습니다. 유대인의 삶의 방식도 아니고 이방인의 삶의 방식도 아닌 완전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제 3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 그러나 경건한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또 다른 분명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별되고, 경건하고, 선하고, 삶의 방식이 다른 특징들을 종합해 볼 때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일 먼저 무엇이 있었기에 그러한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놀라운 지성의 변화였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자료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교도들의 회심의 증거에 대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소명을 주시는데 너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건져내신 그 위대한 일을 임금과 왕들 앞에서 선포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그릇으로 바울을 택하신 이유였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3절에 보면 영적인 어두움은 항상 사단의 권세를 동반한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도 다르고 이방인과도 다른 사람이었는데 다름의 원초적인 원인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클레멘트 1서 36장 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워진 총명이 빛을 향하여 피어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니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전에는 우리가 어리석고 어두웠는데 총명이 빛을 향해 다시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총명이 피어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어두움에서 그들이 구출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누구를 사랑해야 할지를 알았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지 알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았고, 세계와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외경 가운데 바나바서 14장 5-7절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신자(그리스도인)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그 사람들을 이방의 빛이 되게 하며 눈 먼 자를 보게 만들어 주며 족쇄에서 끌러주며 어두움에 앉아있던 자들을 그 감옥에서 이끌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는 것을 빛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보았고, 그 빛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 제대로 예수를 믿으면 그가 이방인들 중에 빛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시 그 빛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 당시는 미개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복음을 이야기해도 새롭게 느껴졌겠지만, 지금같이 개명하여 사상도 많고 지식도 많고 철학도 많은 시대에 그러한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양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고 그에 따른 교육을 받았습니다. 서양철학의 역사가 마치 과학기술이 발전하듯이 한 시대가 철학을 하면 다음 시대가 그 위에 쌓아 올리면서 발전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철학이 나오면 그 다음 철학이 앞서 있던 철학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다시 건축합니다. 그 다음 철학이 나오면 기존의 것들을 허물고 구축합니다. 허물고 구축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서양철학이 기존의 철학들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자기부정을 반복하면서 수립되어온 역사입니다. 지금처럼 이 모든 인간의 지식과 세계의 운명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연성을 강조하는 철학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 철학이 견고한 터전을 가진 사상들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고린도나 아테네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담론하던 곳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에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이유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태어난 어떤 종파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새로운 철학사상인가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지금은 그 시대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빛이 되어야 하고 전도라는 행위 자체는 이 빛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우리 교회 와보세요. 우리 교회 새로 지었어요. 와보세요.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세요.” 이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을 그에게 던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전도입니다. 그 빛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빛이 되어서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한 삶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자기보다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눠 주는 삶입니다. 그것은 신학교에 가서 교역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이 있어야 나눠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누어 주겠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서 어두움에서 건짐을 받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고 세상에서 무슨 지식을 접하든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깨달으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 지혜에 합당한 삶을 살고, 그 힘이 내게는 부족하니까 열렬한 기도생활에서 은혜를 공급받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해서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에 헌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보람된 인생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에 이미 답이 나왔고, 그러한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데 세상은 원래 다 어렵고 힘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사단의 영적인 권세를 무력화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속박을 느낍니다. 돈이 떨어지면 속박을 느낍니다. 가고 싶은 데도 못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예쁜 옷이라도 사 입으려 해도 돈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속박을 느낍니다. “하나님, 우리를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부를 주시옵소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도 속박을 당합니다. 매일 병원에 입원해 있고 어디에 가고 싶어도 신장이 안 좋아서 비행기도 못 타고, 다리가 아파서 워킹도 못하면 “하나님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하는 것을 보면,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속박을 느끼는 것들입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받으면 자유로워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그 자유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공산주의사회보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자유주의국가가 공산주의국가보다 좋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자유롭게 내버려둡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자유롭게 내버려두지만 그 자유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일단 자유를 주어야만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가 됩니다. 수련회에 오니까 자율성은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납니다. “새벽예배 나오십시오.” 그러면 나옵니다. “그만 기도하고 밥 먹으러 가십시오.” 그러면 가는 것입니다. 3일 동안 계획을 짤 수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표대로 움직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주어져야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삶의 원천이 되고 목표가 되고 근원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을 ‘자율’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자율적으로 살아보다가 안 되어서 주님께 온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외국에 가서 아버지의 감시에서 벗어나 온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살 때 자유를 만끽하였지만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타락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방탕하게 살았지만 마지막에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은 ‘신율’(神律)입니다. ‘신율’ 안에서의 자율.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를 신율에 입각한 자율적인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이고,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의 통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3. 도덕적 어두움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도덕적인 어두움은 당연히 영적인 어두움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어두움입니다. “그러므로 내 맘대로 살 수 있다.” 이것은 도덕적인 어두움입니다. 두 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우리가 이방인으로 살았을 때는 신령한 어두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고, 그것이 도덕적인 어두움이었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성도의 삶에 대한 표현으로서 ‘단정하다’라는 형용사가 나타나는데 신약에서만 6번 나타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며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2)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감독의 자격을 이야기 할 때도 ‘단정하며’라고 이야기합니다.
단정하다는 것은 예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백만 원짜리 핀을 꽂고 치렁치렁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단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값이 싸고 낡은 옷이어도 흠 잡을 데 없이 정숙하게 차려 입고 누구에게 내놓아도 예의범절에 어긋난 옷차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을 가리켜서 단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단정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점으로 질서 잡힌 삶입니다. 생각의 질서가 있고 영혼의 질서가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사용할 것은 사용하고 이용해야 할 목표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 사이를 구분할 줄을 아는 질서 지워진 삶을 가리켜서 단정한 삶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삶 속에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성도로서의 단정한 삶, 시민으로서의 단정한 삶, 교인으로서의 단정한 삶, 여성으로서의 단정한 삶, 혹은 성직자로서의 단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모든 것들이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난 성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B. 빛으로 들어가게 함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 그것은 우리를 지성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희랍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에이스 토 사우마스토브 아우토 포스”(εἰς τὸ θαυμαστὸν αὐτοῦ φῶς)라고 나옵니다. “그의 놀라운 그 빛 속으로”, 여기에도 전치사 'into'가 나옵니다. 이것 역시 종말론적인 진입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어둠속에 살던 우리를 건져 내서 우리에게 주신 빛은 놀라운 빛이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에는 충분한 빛이지만 완전한 빛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우리에게 주실 찬란한 진리의 빛에 비하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빛이라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빛입니다. 영적인 소경이 눈을 떠서 이 세상을 보게 된 것과 유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b) 여기에서 떠오르는 그림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쇠사슬에 매여 있던 죄인이 그 모든 것이 끊어지고 찬란한 빛 가운데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빛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나니까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세계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자기와 같은 비천한 인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죄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이길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 빛과 은혜를 매일 매일 공급받으며 마음을 오로지 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이기며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할 때는 매우 커다란 혼란이 옵니다. 이제 인생관도 바뀌었고 세계관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사단의 권세 아래 눌려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성령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러한 계획을 따라 살지 않고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죄를 좋아하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세상 나라에서 만족을 얻으며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면 그 속에서 커다란 찢어짐이 일어나고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 때 느끼는 고통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통입니다. 지성적인 혼란과 영적인 혼란이 오고 도덕적인 부패가 오게 될 때 아주 혼란스러운 삶이 펼쳐집니다. 당연히 존재의 울림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자니 세상 나라를 버릴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머물러 살자니 이미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았습니다. 다시 세상을 좇아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보아도 옛날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변화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보려고 하니 하나님 나라의 행복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둘 사이에서 모든 것을 양립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내 주셨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새로운 구조, 새로운 판을 따라, 그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 외에 또 다른 희망은 없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황제가 로마를 통치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명한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명상록』은 아주 유명한 명작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미워하였고 엄청난 박해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부 유럽에서는 극심한 박해가 일어났고 이 때 비엔나의 상투스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집이 어디인지, 가문이 어디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답하는 것은 하나, “나는 크리스찬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크리스찬’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도인을 경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크리스토이’라고 불렀습니다. ‘호이’는 희랍어에서 복수남성접미어입니다. ‘어느 가문’ 뒤에 ‘호이’를 붙이면 그 가문에 딸린 식객들, 혹은 그 가문에 딸린 추종자들, 더 고유하게는 그 가문의 소유된 노예들 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만 따라다니는 떨거지들”이라는 의미로 ‘크리스토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의 노예 같은 놈들”이라는 의미가 바로 ‘크리스토이’입니다. 성경 번역 중에 제일 잘못된 것은 ‘종’이라는 단어입니다. ‘둘로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종’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노예’라고 해야 합니다. ‘종’과 ‘노예’는 엄연히 달랐습니다. ‘종’은 'servant'이고 ‘노예’는 'slave'입니다. 종은 취업을 해서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 종으로 삯을 받고 일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정기간이 지나서 계약이 끝나면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종입니다. 그런데 'slave'는 그 집의 소유입니다. 월급도 받을 수 없고 자식을 낳아도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그 집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할 때 이것은 종, 둘로스의 개념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종’이라고 번역했는가? 서구에서 킹제임스 버전이 1611년에 번역이 되었습니다. 17세기입니다. 노예를 부렸다는 서구사람들의 컴플렉스 때문에 ‘노예’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다 뺐습니다. 그래서 ‘노예’라고 번역되어야 할 단어들을 전부 ‘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상투스가 심문을 받을 때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께 속한 자입니다. 나는 그의 노예입니다.” 두 가지가 그를 붙든 것입니다. 진리의 밝은 빛, 은혜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진리의 밝은 빛과 불같은 사랑이 그를 묶어서 스스로 즐겁게 예수께 속한 자, 예수를 따라 다니는 자, 예수의 소유, 예수의 집안의 노예라고 자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세비우스(Eusebio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4세기 때의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권의 중요한 역사책을 기술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책 가운데 『교회사』에서 이야기 합니다. 상투스는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그를 심문하는 자들은 상투스로부터 어느 민족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가문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에 상투스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습니다. 불로 쇠 의자를 시뻘겋게 달구고 거기에 주저앉히면서 그의 생각과 고백을 취소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는 불에 타서 죽으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라는 동일한 고백을 하고 죽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찬란한 진리의 빛의 비추임을 받고 그것을 통해 그 사랑을 현재적으로 강력하게 붙들고 살아갈 때, 그 힘이 불같은 시련을 이기고 순교를 감내하게 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이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을 가져다 준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성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건져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지성적인 어두움이 물러가는 기쁨이 있어야 하고, 신령한 빛에서 사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감사와 찬송, 가치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하나님의 덕들을 선포하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A. “그 덕들을”
“그 덕들을”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타스 아레따스’(τὰς ἀρετὰς)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는 아주 심오한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땅한 번역이 없어서 ‘덕’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탁월함’입니다.
1. 그리스적 문맥
‘아레떼’(ἀρετή)라는 단어가 맨 처음 사용된 것은 그리스 사람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도시 국가였습니다. 인구 1,000명에서 10만 명 되는 작은 국가였습니다. 나중에 알렉산더가 나타나서 모든 도시 국가를 통일해서 그리스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헬라제국이고 여기에서 헬레니즘이 꽃을 피웁니다. 그리스에서 꽃을 피우고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그 세력이 아프리카까지 펼쳐집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웁니다. 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제국을 세운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생애를 보면 그는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검소했고, 죽을 때까지 정복의 여정 속에서 살았습니다. 호화로운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전쟁의 병사들과 같이 참여하면서 고생하였습니다. 그가 위협을 무릅쓰고 전쟁을 했던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의 빛 없이 사는 인류는 얼마나 무지하고 어두운 족속들인가?’ 그리스 철학과 사상, 문명의 찬란한 빛을 전 세계에 나눠주어서 짐승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자고 하는 문화적인 사명감으로 제국을 통일하고자 하였고, 자기 나라 말을 전 세계 공용어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지금은 알렉산드리아에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곳은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헬레니즘의 위대한 유산을 로마가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위대한 로마제국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폴리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마을 같은 국가였습니다. 만 명 정도에서 십만 명 정도 모여 사는 동네만한 작은 국가였습니다. 그런 국가를 이루면서 살다보니까 지금처럼 몇 천만, 몇 억이 되는 국가와는 다릅니다. 항상 국가 전체가 풍전등화의 상태였습니다. 만 명쯤 되는 국가에 이만 명쯤 되는 군대가 쳐들어와 싹 쓸어버리면 나라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들에게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사람답게 사는 사회가 되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왕이 어마어마한 호강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조그만 나라에서 왕이 호강을 하면 얼마나 호강했겠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레떼, 탁월함은 도시 국가의 존립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한 인간의 탁월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애국’의 개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시민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무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민적인 유익을 위해 칭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의 정신의 힘을 가리켜서 아레떼라고 불렀습니다. ‘탁월함’, 그것이 사회 교육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큰 제국에 맞게끔 교육과 법률과 문화와 제도들과 윤리를 구축한 것이 바로 로마의 법 체계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돈 많은 사람들의 행복은 돈을 쓰는 재미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멋있는 목욕탕을 지어 줍니다. 그 당시 목욕탕은 병을 예방하고 위생을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계급에 상관없이 드나들 수 있는 큰 공중목욕탕을 만들어 놓고 “김 아무개 어느 회사 사장이 기부했다. 어느 가문에서 기부했다.” 그렇게 씁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평촌에 훌륭한 고등학교를 하나 짓습니다. 거기에 수영장, 승마장, 풀밭이 있어서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하고 최고의 선생님들을 초청해서 돈을 댑니다. 돈을 벌어서 그러한 것에 쓰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전통들을 많이 물려받은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입니다. 어마어마한 학교 빌딩 같은 것을 한 사람 이름을 걸어놓고 짓습니다. 수백 억, 수천 억 빌딩을 짓습니다. 우리도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업해서 먹고 살기만 하지 말고 많이 뜻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에서 본적 없는 아름다운 신학교를 세운다든지 말입니다. 세계적인 학자들을 초빙하고 훌륭한 목사님들을 모셔서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2. 기독교적 문맥
‘덕’의 개념이 기독교 문맥으로 들어오면서 바뀌게 됩니다. ‘덕’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덕, 탁월함’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통해서 당신의 큰 능력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것을 ‘아레떼’라고 불렀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해주는 탁월한 능력과 힘, 지혜,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덕이라고 불렀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서 덕이란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의 나타남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학자들은 이사야서 43장 21절에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뒷부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찬송’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탁월한 덕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사랑, 이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찬송, 덕입니다. 그것을 부르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B. “선포하게 하려고”
성경에 보면 ‘예사페루’(יְסַפֵּֽרוּ)라고 나오는데 ‘상세히 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세파르’(rp's)는 ‘책’이고 ‘소페르’(rfevo)는 ‘서기관’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파르’(rp's;)가 동사로 쓰이면 ‘세세히 말하다’, 혹은 ‘셈을 헤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사람들에게 상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포하게 하시려고”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자들만이 주고받는 예배 속에서 성직자에 의해 선포되는 설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언어와 존재, 인격,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방식, 경건한 생활, 이 모든 것을 망라한 전 포괄적인 삶을 통해 선포되는 존재의 울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울림이 있는 교회가 될 때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존재론적인 울림이 있는 사람이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하는 것과 나쁜 짓만 하고 똑같이 술 먹고 방탕한 사람이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할 때의 효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 “우리가 신앙적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울림이 있는 것이지, 신앙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 “신앙적으로”라고 하면 ‘예수도 안 믿는 놈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평소에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라고 할 때 거기에 울림이 있는 것이지, 개판으로 사는 사람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한다면 ‘저 사람이 그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리도 느끼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잘 느끼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선포입니다. 교회가 그런 존재론적인 울림을 가진 가운데 신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깊은 영향력을 갖습니다.
교회의 존재론적인 선포를 통해 사상적인 전투가 이루어집니다. 사상적으로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어떻게 책 한 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며 구체적으로 공부해서 그런 사상들을 하나씩 격파해 나가야 합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늘 강조하겠지만 신학교를 후원하고 좋은 신학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말하고 글 쓰고 이 세상의 사조와 전투하고 이단과 싸우는 일을 후원하는 일은 교회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가치를 확고하게 붙들었다면 어떻게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전도만 하고 성령운동만 하면 세상의 사조들이 밀려올 때 그러한 것을 변증할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사상가들에게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전투입니다. “뭐 그렇게 고단하게 사느냐? 적당히 타협하고 편안하게 살자. 굳이 동성애자를 반대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이미 세계적으로 확산이 되고 있는데. 좋은 게 좋은 건데 그냥 살자.” 이러한 유혹들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불변의 진리가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적인 계명이 있고 이것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다.”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는 신령한 전투입니다.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게임, 오락, 유흥, 향락,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고, 여기에 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시간이 나지 않고 책 볼 시간이 없습니다. 핸드폰, 컴퓨터, TV, 이러한 것들을 붙들고 씨름할 동안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뼈아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구역장들이 불평을 하는데 구역원들이 구역공부를 하러 올 때 예습을 안 해온다는 것입니다. 15년 전만 해도 교회에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새카맣게 답을 달고 기록을 하고 와서 구역장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발하게 토론하면서 구역공부를 했습니다. 요즘은 깨끗한 책을 들고 와도 그나마 구역예배에 와주는 것이 감사하고 그것 때문에 타박하면 그나마도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누구 위해서 구역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구역예배 나오는 것이 커다란 행세나 하는 것처럼 구역장에게 적선이나 하는 것처럼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한 문화 속에 매몰되어서 비판정신 없이 살다보니까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항거해야 합니다. 거기에 나 자신을 물 흘러가듯이 떠맡기고 살면 믿음에서 파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날에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가 몇 명이나 오겠느냐”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일생 살아가면서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신령한 전투가 날마다 벌어집니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갉아먹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강하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번영의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됐다고 간증하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그렇게 안 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손들고 다니는 사람 보았습니까? 수백만 명 중 한 사람이 간증하고 신문에 나오고 손을 흔들며 대박이 터졌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대박 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쪽박을 찼습니다. ‘나도 혹시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러한 목적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설정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고난과 희생, 좌절과 아픔, 수고,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생애야말로 모순적인 생애 아니겠습니까? 가장 능력이 많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그렇게 먹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잠도 못 주무시는 삶을 사여야 했습니까? 나이가 서른 밖에 안 되신 분이 “네가 오십도 안 된 것 같은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50세가 되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폭삭 늙으셨으면 그렇게 느꼈겠습니까? 믿음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에게 좌절과 고통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향한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루면서도 믿음을 따라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대신에 이득을 보는 것을 가르칩니다. 쓰레기 같은 기독교가 나오게 되고 결국 신앙의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내 믿음과 반대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속에서 혼란을 느낍니다. 그것을 혼란스럽게 여기지 말고 당연히 올 수 있는 것이 왔다고 여겨야 합니다. 변함없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예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그리스도인은 땀을 흘리며 읽고 눈물로 쓰고 피로 외쳐야 합니다. 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존재의 울림을 통해 알려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덕을 만민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사람들이 빛을 받고 그들도 그 빛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살되 종종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영광을 멸시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섬기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비교하면 잠시 머무는 세상의 영광은 하찮은 것이라고 묵상하며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도 우리 앞에서 이 길을 걸어가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투하는 삶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에 참여할 기약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덕을 선포하고 존재의 울림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선포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보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입니다. 이 소명과 사명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