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녹취자: 조경훈
모든 성경 중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성경의 한 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어느 날 시편 23편을 읽다가 우리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시편 23편을 세 번에 걸쳐서 시리즈로 전하였고 시편 23편만을 설교한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장소에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분들은 유년 주일학교 시절에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시편 23편을 찬송으로 부르던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이 시를 다윗이 언제쯤 기록하였을까요? 얼핏 보면 이 시는 다윗의 목동시절을 노래하는 것 같아서 그가 소싯적에 시편 23편을 썼을 것이라고 보지만, 구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말년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쓴 한 편의 그림과 같은 시입니다. 이 시 속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복음의 진리들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이 교회에서 저에게 마음껏 설교하라고 하신다면 18시간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한테 주어진 시간은 5번 밖에 없기 때문에 압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토막은 총론이고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입니다. 두 번째 토막인 2절부터 5절까지는 어떻게 해서 이 시인에게 여호와가 목자이실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노래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의 미래의 결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왜 이 위대한 시의 시작을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였을까요? 이 질문은 아주 사소한 질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하나님의 성함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존함은 크게 세 가지로 구약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 또 하나는 ‘여호와’ 그리고 또 하나는 ‘주’ 혹은 ‘주님’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세 가지 존함은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엘’ 혹은 ‘엘로힘’ 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함은 ‘강하다.’ 혹은 ‘두려워 떨다.’ 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함은 모든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시면서 어떤 신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큰 권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존함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알려진 존함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진 존함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주’ 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라는 단어인데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면서도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그분의 소유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모든 것들을 그분이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들의 소유주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분의 처분대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고 나도 그 중에 하나이다.’라는 고백이 그 성함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쓰인 하나님의 존함은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존함이 아니고 ‘여호와’가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마도 ‘야웨(יהוה)’ 라고 읽혀지는 하나님의 존함은 원래 뜻이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에 의존하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홀로 스스로 계신 분, 하나님 한분만이 절대적으로 있으신 분이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분의 있으심에 기대어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존함은 하나님의 모든 존함 중에 가장 고유한 존함이어서 우리로 말하면 호적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과 같이 고유한 하나님의 존함입니다. 이 존함은 모든 열방에 알려진 존함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본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호와라고 하는 존함은 하나님과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이는 이 존귀한 하나님의 이름을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편 23편을 기록하면서 자신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로서 그 높고 높으신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뜻하면서 하나님의 이 존함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그 하나님이 누구일까요?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은 크기, 모양 이런 것들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그분을 볼 수가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매개물들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누구도 본 자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는 그 분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먼 나라를 여행하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수 천 년 전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어마어마한 유적을 보면서 그들은 가고 없어도 어떤 정신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던 사람들인지를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한 번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밤에 밖에 나아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 밤하늘에서 셀 수 있는 별들의 수는 약 6천 개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공해가 없는 맑은 청정한 하늘에서 계산된 숫자입니다. 우리 인류는 수많은 별들 중에 아무데도 갔다와본 적이 없습니다. 빛이 1.2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달을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딱 한 번 갔다 온 것이 끝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얼마나 넓을까요?
어느 날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우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을까요?”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그것을 알면 내가 너 같은 애들을 가리키고 있겠니? 그렇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너희 집이 어디냐?” “저는 장안동에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 중에 너희 집 화장실에 빨간 전구가 있는데 그 전구를 여덟 마리의 날파리가 돈다고 칠 때 그 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고 거기에 붙어있는 세균과 같은 존재가 바로 너다.” 도대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을까요? 과학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지만 대충 합의를 보는 것이 우주 이쪽 끝에서 반대쪽 마지막 끝까지의 거리가 빛의 속도로 약 150억 년을 달려야 할 거리라고 추정을 합니다. 빛이 태양까지 도달하는 것은 8분 정도 걸립니다. 어마어마한 크기가 바로 우주의 크기인데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관측이 가능한 크기가 그 정도이니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쪽 끝에는 무엇이 있고, 위와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에 딸린 가족입니다. 8개의 위성이 돌고 있고 세 번째가 지구입니다. 별은 원래 항상 폭발하며 빛을 내는 항성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속한 것은 태양계이고 그 태양은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는데 타원형의 바람개비같이 생긴 우리은하계 안에 중심으로부터 2만 6천 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이 있고 우리은하계 전체는 약 2천 억 개의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 이루어지고 하나의 항성에는 적으면 3~4개부터 많으면 수십 개에 이르기까지 위성이 딸려있어서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는 우리은하계의 별의 수가 실제 4조 개쯤 된다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런 은하계가 천 억 개 쯤 있는 곳이 우주라고 하는데 그것도 관측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그렇습니다. 밤하늘에 유난히 왕별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의 별이 아니라 수 천 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은하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마어마한 드넓은 우주 공간 안에 태어나서 아주 오래 살아야 백 년 정도 살다가 사라집니다.
잠자리와 파리가 놀다가 헤어질 때, 잠자리가 파리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달에 만나자.” 파리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헤어지면서 파리가 “오늘 재미있었지? 우리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시점부터 그 끝이 어딘지를 짐작할 수 없는 영원과 영원 사이를 흐르는 무한한 시간의 침묵 속에서 있다가 사라집니다. 흔적도 남지 않고 잠깐 풀잎에 이슬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넓고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그 거룩한 하나님 성에서 찬양할지어다.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은 그 위대한 하나님을 우리는 창조의 세계를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첫 번째 시작이 사랑이 아닙니다. 첫 번째 시작은 두려움입니다. 나는 오늘 있다가 사라지는 들풀에 맺힌 이슬과 같지만 하나님은 이 온 땅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은 위대하고, 나는 미천하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에서부터 신앙은 출발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동네 아저씨 중에서도 은퇴하고 집에서 노는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농담할 때도 하나님을 거침없이 들먹거리며 낄낄거리고 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여김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는 두려움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무섭고 두려운 공포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완전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고 엄위로운 분으로만 알았는데 복음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나 같은 비천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져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연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다시 그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 나를 다시 살게 하여 멀어졌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한 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 떨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랑에 이끌리면서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고 위대하셔서 나는 그 분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나는 철저한 죄인으로서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의인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영광스런 교회의 지체요 라고 아무리 나를 많이 불러주셔도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은 목사요 훌륭한 장로요 권사요 집사요 성도요 라고 불러주어도 진정으로 구원을 아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는 단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의식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23편을 펼치자마자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놀랍게도 그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시인은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피조세계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어떻게 그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나와는 관계없이 무섭고 두렵기만 한 위대한 절대자를 자신의 아빠처럼 자신의 엄마처럼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목자로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개인의 신앙입니다. 위대하시면서도 나를 위해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감화와 인격적인 감화가 내 안에 있어서 그분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분과의 생생한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을 했다면 시인은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목자이시면 자신은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양’이라는 단어는 안 나옵니다. 푸른 풀밭으로 인도한다고 하지만 양만 풀을 뜯어먹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자신을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그냥 양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사람은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늙은 양이라고 말할 것 같은데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비디오를 하나 그립니다. 우리나라의 풀밭이 아니라 뉴질랜드 같은 청정지대의 파란 풀밭에서 하늘에는 밝게 햇빛이 비치고 뭉게구름이 떠가는데 깨끗한 샴푸에 목욕까지 해서 백옥처럼 하얀 어린 양이 풀밭을 뛰어다니는 슬로우비디오의 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나는 주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살기는 개떡같이 살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편 23편을 썼으면 감동이 안됐을 텐데 실제로 목동이었던 시인이 썼습니다. 시인은 양들을 직접 치고 기르던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중의 유비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내가 양인 것은 내가 목동이었을 때 양을 기르던 것과 너무 비슷하다.’ 즉, 자신이 목동으로 양을 이끌고 사랑하고 기르던 방법과 유사하게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린 양인 나를 선택하시고 돌보고 인도하시고 길러내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의 정서 속에 누구를 보면서 ‘그 사람 참 착해. 그 사람은 꼭 양 같아.’ 라고 하면 그것은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늑대 같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지 않고 양 같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양에 대한 그 그림은 한국적인 그림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양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을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 것은 양 전체를 표현한 게 아니라 온순하게 죽는 순간까지도 주인을 믿고 따르며 복종하는 그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투영한 것이지 모든 것을 집어넣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양에 대해 그리는 그림은 연약하면서도 고집이 있고 잘못된 길로 많이 가는 그림입니다. ‘길 잃은 양의 비유’가 잇고, 이사야 53장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나옵니다. 지금도 이란과 이라크 사람들에게 가장 거친 쌍욕은 ‘양 같은 놈’입니다. 이 설교를 할 때 저 앞에 중동에서 30년 동안이나 선교사역을 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제 설교를 들으면서 ‘아니. 30년을 중동에서 산 나도 모르는 이야기인데 신빙성이 없다.’ 라고 하고 가서 원주민에게 물어봤더니 김남준 목사님의 설명이 정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참아도 양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들에게 양 같은 놈이라는 의미는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고 지저분하고 들이대고 그런 그림의 종합이 양 같은 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많은 짐승들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지어는 신약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양이라고 부르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의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짐승들을 보면 모든 짐승들은 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나 호랑이는 엄청나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호랑이가 한번 내려치는 힘이 2톤이라고 합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의 펀치에서나 나올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입니다. 호랑이는 짐승을 잡아먹거나 해칠 때 덤벼들어서 이빨로 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후려쳐서 쓰러트린 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린은 목이 길고 아주 커서 다른 밑에 있는 것들이 보지 못하는 위험을 멀리서부터 감지하고 도망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큰 이빨도 없고 빨리 달릴 수도 없지만 사자가 나타나도 몸을 동그랗게 감고 있으면 아무도 못 먹습니다. 스컹크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방귀를 뀌어서 가까이 오는 동물을 졸도를 시킵니다. 카멜레온은 변신을 합니다. 아프리카를 가면 사파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임팔라입니다. 키가 70cm 정도밖에 안 되는 개 한 마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 임팔라는 아주 순한 초식동물입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배고픈 사자가 풀을 뜯고 있는 임팔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살금살금 사자가 기어갑니다. 항상 바람을 앞에 두고 가는데 그래야지만 냄새가 임팔라에게 안 가기 때문입니다. 낮은 포복으로 가서 돌격해서 붙잡을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임팔라가 들어오면 사자는 전력질주를 합니다. 사자는 오래 못 달리기 때문에 빨리 승부를 봐야합니다. 임팔라가 사자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도망을 가며 달려가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거의 물리기 직전까지 가서 임팔라가 마지막에 도저히 도망을 못가겠으니까 몸을 확 돌려서 사자와 충돌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임팔라의 뿔이 사자의 어깨를 찌르면서 등 뒤로 튀어나왔습니다. 둘이 함께 뒹굴며 쓰러졌습니다. 사자는 죽을 상태가 됐고 임팔라는 몸부림을 치면서 뛰어나왔습니다. 사자를 촬영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추적을 했는데 치료를 좀 해주었겠지만 결국은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짐승들에게는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이빨도 어금니만 발달됐고 짐승을 물어뜯을 수 없는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이 있긴 있지만 만두처럼 말려서 공격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멀리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스스로 한 번 길을 잃어버리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짐승 중에 세상 미련한 게 돼지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돼지를 기르는데 돼지가 가끔 울타리를 나와서 돌아다닙니다. 밤새도록 마실 돌아다니고 새벽에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유익을 주고 보호를 받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렇게 설명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생양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물론 야생양이 있습니다. 야생양은 다 잡아먹혀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자꾸 잡아먹히니까 더 높이 올라가고 그러다가 추락사를 합니다. 그 위에는 먹을 게 별로 없어서 산양의 개체수가 급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110cm정도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독수리가 와서 채갈 정도의 종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진화하면서 커졌다는 것입니다.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됐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작고 왜소했었는데 점점 더 인류가 큰 체구를 가진 걸로 변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위대해서 자기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10톤, 15톤 씩 되는 고래를 잡아다가 어항 속에 잡아다가 구경을 하고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호랑이를 매를 때리고 훈련을 시켜서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하면 그대로 따라 하게끔 합니다. 어마어마한 600kg 되는 체구의 호랑이들이 굴러 뛰어 앞으로 취침 뒤로 치침 하면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럴 정도로 위대한 존재이고 어마어마한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살게 한 장본인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처음 창조할 때부터 모든 세계에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위대한 지성과 정신의 능력을 주셨지만, 인간은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살기를 마치 양들이 그 주인을 의지하고 돌봄을 받으며 사는 것처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그 분의 양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도할 때 예수 믿는 것이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주 예외적이라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인간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에게 대들고 까불고 지갑도 훔쳐서 가출을 하고 자기 좋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결국은 부모에게로 돌아가서 용서를 빌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은 곧 자신이 태어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영장이기 때문에 그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하게 과학이 발달되어서 이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20분 안에 주파하는 기차가 생긴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살아있는 동안에 곧 생길 것입니다. 시속 2,500km내지 2,800km로 튜브 속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시대에 우주여행을 하고 달나라로 여전도회 기도회를 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55년 전 쯤 서울의 변두리에 대한 저의 기억은 전 세계 어디를 다녀도 그렇게 비참한 곳은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덜 외롭고 덜 고민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더 많은 살인사건, 더 많은 외로움, 고독, 소외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결국 인간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위해서 창조된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장군이었고, 시인이었고, 정치가였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보고 누려보지 못한 영광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자신은 주님 안에서 겨우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르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목자로서 양을 다루는 방법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10장만큼 목자와 양에 관한 비유를 풍부하게 보여주는 성경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주 아름다운 묘사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당신의 양떼로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자기의 여행담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가운데 도로가 나있고 이쪽에 있는 수 백 마리의 양떼들이 길을 건너서 저쪽 풀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동을 하다가 목동이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그 벌판에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목동은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양떼들이 길 위에 서서 움직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양떼들을 보고 비키라고 했지만 꼼짝을 않는 것입니다. 목동이 돌아와서 양떼들에게 자기 음성을 들려주면서 “얘들아 가자!” 하니까 꿈쩍도 않던 양무리가 목자의 음성을 따르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짐승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매질을 해야지 움직이는 짐승들이 있고, 목자가 말을 하면 음성을 기억하여 듣고 따라오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양이 그렇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짐승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기를 원하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죄를 짓도록 놔두십니다. 주님을 떠나고 싶어 하면 하나님이 발목이라도 꺾어 버리실 것 같은데 그냥 놓아두십니다. 성복교회에 성가대원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주일날은 어디를 가야됩니까? 교회를 가야됩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 안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1번, ‘큰 일난다.’ 2번, ‘괜찮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사람들은 주일날은 교회가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일을 안 지키면 큰 일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직접 해 보면 별일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도사님들이 심방전화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집사님. 왜 안 나오셨습니까? 어디 아프셨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 안 나옵니다. 사람들은 ‘주일날 꼭 지켜야 된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 안가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주일에 교회 안 가 봐도 큰 일이 별로 안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화) 어느 자매가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주일날을 교회가 코앞인데도 늦잠을 자는 것입니다. 엄마 권사님이 깨우다, 깨우다 지쳐서 먼저 교회 가버렸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딱 보니까 10분전이라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세수하고 마스크 쓰고, 빵모자 쓰고 가야지 하고 교회를 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나 네 고등학교 동창 아무개야.” “어. 그래. 웬일이니?” “지지배. 웬일은 무슨 웬일. 오늘 우리 등산가기로 했잖아.” “아니야. 나는 교회 가야돼.” “안 돼. 우리 친구들 모두 모여서 버스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너 빨리 와.” “안 돼.” “아니. 낮에는 우리하고 놀고 저녁에 가면 되잖아. 너 네 하나님은 저녁때 교회에 없냐?” 그래서 갈까 말까 하다가 벌써 11시가 됐습니다. 목사님의 지루한 설교를 들으면서 참고 졸고 있을 생각을 하니까 ‘낮에는 친구들하고 놀고 오후예배 드리면 되지.’ 하고 가방 밑에다가 성경을 안보이게 깔아놓고 등산복을 입고 뛰어간 것입니다. 친구들하고 용마산을 올라가는데 중간쯤 올라가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내가 진짜 선택을 잘했다.’ 예배당에서 지루하게 1시간이 넘도록 예배를 견디기보다 새소리 물소리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친구들이 2/3쯤 올라가서 평평한 곳에 매트를 펴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 “얘들아. 목마르니까 물 한잔 줘.” 그러니까 다들 가방을 여니까 맥주가 나오고 맥주를 따서 주는 것입니다. “아니 이건 술이잖아. 나는 교회 다녀서 술 먹으면 안 돼. 음료수를 줘.” 그러니까 거기 모인 8명의 친구들이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라고 다수결로 통과를 시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먹었는데 세월은 지났지만 맥주 맛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맥주 한 병 먹고 도시락 먹고 두 병 먹고 한참 이야기하면서 자기 힘든 이야기를 다 쏟아놓고 보니까 9병이나 됐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산을 내려오는데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다가 어떤 사람이 먹고 버린 바나나 껍질을 밟았습니다. 그것을 밟는 순간, 자신의 몸이 붕 떠는 것 같더니 필름이 끊어진 것입니다. 나중에 의식이 들어와서 들으니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 진짜로 아작 났네. 어떻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부려졌냐?’ 하면서 의사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니까 그렇게 놀랠 필요 없습니다.) 이 자매가 미라처럼 하얗게 온 몸을 깁스하고 119에 실려 와서 지팡이를 짚고 나오면서 성도들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일 빠지면 큰일 납니다.” 그랬더니 친구 따라 주일날 낚시가고 싶어 했던 박집사는 눈을 만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 주일 빼고 내 계획대로 낚시에 갔더라면 아마 그 큰 낚시 바늘에 내 눈이 찔렸을 거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렇게 해도 한 번에 발모가지를 부러 버리거나 주일 안 지켰다고 아폴로눈병 걸려서 눈이 밤톨처럼 붓게 하시거나 주일날 땅 산다고 집 산다고 발모가지를 부러뜨리시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하면서 ‘괜찮네. 아무 상관없네.’ 이렇게 하면 매우 불행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명백하게 잘못하여도 때로는 가만 두시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시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오해를 하게끔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한 번 반문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계처럼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처럼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상의 능력을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사람을 알면서 올바르게 사용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어떠한 짐승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환희를 느낄 수 있게 해드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없어졌는데 음식점에 들어갈 때 제일 짜증나는 것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말을 녹음해서 인형을 세워놓는 것입니다. 사람 크기의 로봇이 종업원 복장을 하고 서 있는데 저는 처음에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기계음으로 ‘어서 오세요.’ 라고 나오는데 듣기가 너무 싫습니다. 차라리 안하고 말지 저런 식으로 할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러한 기계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성입니다. 저도 개를 기르지만 개는 개만도 못한 개는 없습니다. 아무리 못 되도 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악을 선택해도 하나님이 어떨 때는 놔두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재산을 나누어가지면 어떻게 될지 아버지는 다 아는 데도 그 아들이 하겠다는 데로 내버려둡니다. 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가정이 얼마나 복된 곳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 아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그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예수를 안 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티끌만큼이라도 믿을 마음이 생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믿게끔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성령의 감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교육 하십시오.’ 라고 나오는데 ‘인격적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엄마, 아빠와 아이들이 말이 통해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하면 제가 말을 알아듣고 마음으로 알아들어야 하고, 엄마도 아이가 말을 하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말 속에 담겨있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고 인격적인 교육입니다. 결국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나도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랑을 하면 서로 잘 이해하게 됩니다. 너무 사랑하면 이해가 안 되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안 되어도 나는 그 사람을 신뢰하고 그 사람은 나를 신뢰하니까 그냥 사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여기 가까운 곳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저와 집사람은 성격이 너무 반대여서 처음에는 대화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면, 집사람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들면 ‘다다다다’ 말 하는 성격이고 저는 그것을 수첩에 적어놓는 성격입니다. 저는 최고로 화가 나면 목소리가 조용해집니다. 그것을 다 모았다가 한 달에 한번쯤 잠자리에 조용히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이야기합니다. “여보. 당신도 신앙을 가진 사람인데 한번 생각을 해봐.” 그러면서 조근 조근 얘기를 하면 그렇게 말이 많던 사람이 조용히 듣습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데 아내가 너무 잘 들어서 ‘이제 내 이야기가 충분히 전달됐구나.’ 라고 생각하고 “여보. 이제 이해할 수 있지?” 하면 드르렁거립니다. 언제부터 잠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빈정상해서 배고 있던 팔을 빼고 돌아누워서 잡니다. 크게 싸운 적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약간 높인 것이 22년 전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이해하려고 안합니다.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이해 못해도 그냥 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면 굳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해할 수 있으면 좋고 이해할 수 없어도 당신을 사랑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흐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개는 불순종하다가 집안이 망했대.’ ‘아무개는 교회에서 까불고 못된 짓 하다가 트럭에 치여서 죽어버렸대.’ 그런 끔찍한 이야기들만 연상하면서 무서움이 엄습한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하면서 사는 것은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이 아니고 노예의 정신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 사랑에 이끌려서 내 인생에 왜 그렇게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과거에는 긴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가슴 아픈 상처의 순간들이 운명처럼 내게 있어야 했는지, 아직도 우리는 대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쁜 일을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행하는 위대한 일을 보면서 ‘나도 못하는 일인데 너희들이 해줘서 진짜 고맙다. 내가 너희들을 구원한 보람이 있구나. 앞으로도 좀 많이 해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게는 티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로는 당신을 알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주신 말씀을 이해해서 하나님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일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대신해 그 세상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만하기 때문에도 문제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남과의 비교의식에서 오는 한없는 초라한 감정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실 때 우리 모두를 각각 다른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우리 중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은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면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 인간은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의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약점을 다 가지고 있는데 교만한 사람은 그 약점을 못 보고 너무 비관적인 사람은 약점밖에는 안 보입니다. 얼굴도 예쁜 사람이 많고 돈도 많이 번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재적인 작가로서의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후에도 절대로 안 태어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인류에 마지막 남은 그 종자의 희귀종입니다. 유일한 종이어서 사라지고 나면 없어지고 반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약점을 이해하시면서 다루십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로 여기서의 섬김이 끝나고 시내에 있는 큰 교회로 갔습니다. 거기는 청년들이 거의 다 서울대 연대 고대 정도가 절반 이상이고, 전부 좋은 대학교 다니는 아이들 아니면 지방에서 아버지가 엄청 부자라서 유학을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서울대 출신에 박사과정을 다니시는 선생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태어나서 시험이라는 것을 운전면허 시험을 포함해서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시험에 떨어질 때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 이 친구는 티끌만 한 감각도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배가 끝났는데 뒤에서 학부모님하고 길게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선생,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전도사님은 “무슨 일은 무슨 일이예요. 그 집사님이 자기 아들 아무개가 공부 안 한다고 속상해서 저러는 거지요. 공부를 잘 못한데요.” “그래?” 굉장히 순진하게 생긴 젊은이였는데 나중에 서울대 교수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 “왜?” “아이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는 공부 못 하는 게 잘 이해가 되거든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잘 났다.’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도 한 번도 학원을 다닌 적 없고 8시간을 안자면 몸이 못 견디는 체질이라서 8시간 다 자고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니까 “아니. 어떻게 특별히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공부를 못할 수가 있습니까? 공부할 내용이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거는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다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너 잘났다.’ 그랬습니다. 두 달이 흘렀는데 굉장히 우울한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그래?” 물으니까. “아. 전도사님 살기 싫어요.” 박사과정에 공부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테니스를 배우러 갔는데 테니스를 일주일을 가르쳐 주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어느 날 코치가 오더니 짜증을 팍 내면서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 내가 여기서 칠 년을 코치를 했지만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봤다. 교본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는데 왜 못 하냐.’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 공부를 못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딱 맞을 것 같은데 공이 안 맞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약점을 모두 알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인도하시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인도하시는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못 만납니다. 여러분들이 엄마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자식들이 똑같이 예쁩니까? 거짓말입니다. 항상 못하는 아이에게는 ‘형 좀 봐라.’ 아니면 ‘네 동생만도 못하니?’ 그것도 안 되면 ‘야! 뒷집에 아무개는 모의고사에서 전교 3등 했다더라. 너는 똑같은 밥 먹고 운동화신고 뭐 하는 거냐?’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이가 외갓집 가서 엄마 고등학교 다닐 때 성적을 물어봅니다. 외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엄마도 신통치 않았고 ‘인서울도 못 했구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조용히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까지 모두 헤아리면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십니다. 나는 비교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딱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내 인생에 진정한 보람은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강남에서 한 때 유행하던 유머가 있습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 지방대, 고졸, 중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50세 되면 학력도 평준화가 됩니다. 모두 깜빡깜빡하고 생각이 안 납니다. 60세가 되면 용모가 평준화됩니다. 모두 변장을 안 하면 안 되는 얼굴입니다. 70세가 되면 경제가 평준화됩니다. 부자는 저금통에 돈을 넣어두고 침대에 누워있고 가난한 사람은 통장 없이 누워 있는 것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정말 그렇게 구김이 없이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텔레비전에 나올만한 미모나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재능이나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어도 내가 이 지구상 한 모퉁이에 사는 것이 너무 예뻐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당신께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저는 이런 인격적인 신앙을 정말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목이 터져라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열린교회를 개척한 지 25년이 되 가지만 지금도 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집사를 임명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아무 아무개 아무 아무개 아래와 같은 사람을 서리집사로 임명될 자격이 있습니다.’ 라고 방을 써 붙이고 ‘원하는 분은 신청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신청을 안 하면 영원히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노예처럼 얽매이고 누구에게 짓밟히고 두려워하고 무서움 속에서 할 수 없이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내가 너 고쳐줬으니까 너는 이제 죽도록 종처럼 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종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종처럼 섬기는 것이 섬기면서도 기쁨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내가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것인지를 알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쫒아 살아가는 그 무엇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도 보니까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엄마 아빠들이 있을 텐데 공부 안 한다고 족치고 용돈 깎는다고 심지어 협박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공부 안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냥 놔두십시오. 놔두시고 공부하라고 족치지 마시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떻게 기독교적 지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지를 보여줘 보십시오. 맨날 텔레비전 틀어놓고 보지 마시고 아이가 저녁때 집에 들어오면 엄마가 조용히 앉아서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있고 아빠가 조용히 성경 주석 책을 펼쳐놓고 읽고 있거나 키케로의 ‘인생론’을 읽고 있으면 아이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립니까? 저도 다 경험했습니다. 극적인 계기를 경험을 했습니다.
(예화) 저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아이가 잘 못하면 일 년에 한번 쯤 아이를 눈물이 날 정도로 야단을 치고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대신에 밑에 있는 딸은 꿀밤도 안 때렸습니다. 딸은 절대 때리면서 키우는 게 아니고 아들은 때리면서 키워야 된다는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설교하러 지방을 가는 중에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가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네 아들도 네 아들이고 너도 내 아들 아니냐? 그런데 내가 내 아들에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너는 네 아들에게 하고 있는 게 아니냐?” 그 순간에 차를 길가에 세워서 운전대를 붙들고 한 시간을 넘게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심지어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 주시기라고 하시는 것처럼 사랑으로 오래 참으면서 나를 이끌어주셨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아들에게 늘 불만이었습니다. ‘누가 1등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2등만 하라는데 그걸 못하냐?’ 초등학교 때는 올백을 맞아 오더니 중학교 때부터는 성적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입니다. 먹기만 해서 살은 이렇게 찌고 아이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대를 붙들고 1시간을 넘게 폭포수처럼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잘못 했습니다. 주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못했을까요?’ 그러고 깊이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 아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그 후로 한 번도 성적표를 안 봤습니다. ‘너 공부해.’ ‘시험 점수 어떻게 나왔어?’ 안 물어봤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장가를 가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됐는데도 지금도 서로 만나면 뜨겁게 끌어 앉습니다. 딸이 26살이 됐는데 아직도 뜨겁게 끌어 앉습니다. 4~5년 전까지는 교회마당에 수 천 명이 왔다 갔다 해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랑해.’ 하고 뜨겁게 포옹을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뭘 어떻게 됩니까? 별로 좋은 대학교 못 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무 공부 잘해서 미국 유학을 가서 석사를 마치고 훌륭한 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인격으로 대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자녀들을 그렇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것을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편 23편 1절에 반도 못했지만 여기서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시인은 상처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편애에 시달려서 형들만 예뻐하고 시인은 자식 취급도 안했습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삼상 16:3) 하고 왔습니다. 첫 아들부터 다 보여주었는데 기름을 부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아니다. 아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다 와서 끝났는데 사무엘이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 집에 아들 중이라고 그랬는데 ‘너희 중에 아들이 이뿐이냐?’ 물었을 때 그때서야 이 나쁜 아버지가 ‘아참 한 명 더 있네요.’ 아빠의 마음속에는 다윗을 향한 티끌만큼의 사랑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를 데려와서 그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준 것입니다. 또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이 여자는 자기의 영적인 세계를 거의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을 정말 사랑했는데 이 자식들 속에서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당했다고 하는데 그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아들들 중에 한 명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 왕좌를 빼앗으려고 하였고 반란군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외롭게 살다가 한 여자를 사랑했는데 하나님이 절대로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그 대가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어둠 속에서 두려워 떨며 지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기껏 있다고 해 봐야 왕의 권력과 전쟁을 통해 모아놓은 금은보물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아버지도 아무도 없는 외로운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치료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수없이 줍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세월이 오래 지나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어느 주일 날, 할아버지쯤 되는 분이 비서실 문을 쾅하고 박차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비서가 놀라서 “약속도 안하고 이거 왜 이러세요?” 하는데 저는 불량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 분이 이야기도 안하고 소파에 딱 앉더니 보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 주일 날 ‘네 부모를 공경하라’ 로 설교를 한 날이었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어머니가 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자신을 60세가 넘어서 발견을 했는데 그것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안 잊혀 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 형제들로 받은 상처, 특히 불효한 자식으로 인해서 받는 상처, 아내로부터 받은 상처가 잊힐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의 치료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인 하나님이신지,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분을 반역한 끔찍한 죄에도 불구하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경배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땅바닥에 처박으면서 절하라고 하시거나 무릎 꿇기 싫어하는 사람을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서 부르트려 주저앉게끔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딴 식의 경배는 안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은 거기가 어디든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화려한 언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어휘가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간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는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찌라.
이 시인이 “I shall not want.”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였고 상처투성이의 인생이었고, 그는 우리가 그가 겪은 한두 가지만 만났어도 자살을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치열한 시련의 계곡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며 가슴 벅차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엄마에게서도 못 느껴본 그 부드러운 사랑, 아버지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느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나의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신 주님 때문이옵나이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생기지만 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답은 하늘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고 내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사람을 보며 복수를 꿈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 인격적인 주님을 사랑하고 이 험한 세상을 이겨서 여러분들도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