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녹취자: 김경애
1절에서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은 2절부터 5절까지 왜 자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논증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는 어린 양이요 그분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깨달은 것을 고백합니다. 3절에서는 시인이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성경본문으로 보면 3절에 주어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심으로” “당신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된 하나의 동기입니다. 그러면 3절을 잘 분해해 보면 의의 길로 이끄시는 것은 목적이고 그 길로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나의 영혼을 소생, 즉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살아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그렇다면 시인의 영혼이 언젠가는 죽은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너무 긴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고 아주 간단하게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우리 영혼이 잘되어야’ 등등 영혼이라는 말을 수없이 사용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잠시 살펴보고 그리고 오늘 3절의 말씀을 할 수만 있으면 끝까지 설교하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빨리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으로 되어있느냐며 구성요소를 물을 때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있다고 많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희랍철학에서 온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에서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 등등의 표현이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깊은 속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구성요소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개혁신학에서는 딱 둘, 인간의 육체와 영혼 이 둘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발견했을 때 이 물건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분해해 보거나 혹은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가보면 몇 개의 부품이 결합되어서 하나의 완제품이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 중에 아무것도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빚어서 만든 사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가 짐승의 육체와 같이 똑같이 혈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영혼이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도 하나님이 다른 육체와는 별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 주어야할 하나님의 명령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를 인간에게 넣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후’ 하는 행동으로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창조하여 아담의 영혼을 창조하여 아담의 육체와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이 영혼이 죽은 상태였다가 하나님이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복음을 들어 회개하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심으로써 그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가 거듭나고 회심하게 되면 그 영혼이 살아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죄가 몰고 올 결과를 두려워하면서 그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죽어있다.’ ‘살아있다.’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 혹은 동물들이 죽고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컵이 있다.’ 이것도 있는 것이고 ‘여기 사랑이 있다.’ 이것도 있는 것이고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처럼 계시지 않고 사랑은 물 컵처럼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고 할 때, 죽어있다고 할 때는 육체가 죽었다고 할 때는 숨을 안 쉬고 아무 동작도 안하면 죽은 것입니다. 식물인간이었다가 나중에 죽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런 개념으로 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영혼을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는데도 성경은 죽은 행실을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으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 그 영혼이 죽어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혼이 살아있을 때는 당연히 살아있는 증거를 막 쏟아낼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충성과 절제 이런 열매들을 막 쏟아냅니다. 이 두 개가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을 이렇게 깊이 만난 사람은 겨우 모세 정도가 다윗과 견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다윗과 같은 정도의 위대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표준이 되었습니다. 어떤 왕이 정말 충성스럽게 살면 성경이 평가하기를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할 정도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왕국을 소유하고 있는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었으면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를 칭할 때는 종이라고 불렀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던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점도 티도 없이 순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조차도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을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약시대에 적용시켜서 이 문제를 풀어보면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침체입니다. 그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침체’ 혹은 ‘영적인 침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영혼이 죽지는 않지만 죽은 자처럼 되고 영혼의 활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어서 기쁘고 감사하고 충성스럽게 살고 싶고 그 다음에 감격이 넘치고 하는 이런 것들이 사르르 식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도 그런 애정의 침체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한 분은 남편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병실을 휙 돌아보고 누워있는 자기의 남편의 등에다 손을 넣어보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그렇게 손을 넣어보면 언제 죽을지는 안다고 그럽니다. 죽을 때가 되면 이 등뼈에 힘이 없어서 몸이 쳐지는 모양입니다. ‘아이 야, 며칠 더 살겠다.’ 그리고 가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렇게 소원해지고 데면데면할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얼마나 맺힌 것이 많으시기에 그러십니까? 그런 것이 말하자면 부부사이의 침체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흐르면서 왠지 그런 생생했던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서 차갑게 교인으로서 간신히 의무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나마도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지 않으면 반은 죽을걸!’ 이런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와야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속에 사랑이 없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억만금을 드려서 하나님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거나 뇌물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의무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주 간략하게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개함으로써 죽었던 인간의 영혼은 살아납니다.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떠한 극단적인 상황에 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근본적인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완벽하게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심지어 교회에도 나쁜 짓을 하고 성도들에게도 악한 일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독특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 받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 이렇게 구원받을 때 선언하심으로 해결되지만 남아있는 이 죄는 끊임없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그 말씀에 나를 비추어 회개하고 자기를 깨뜨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복종시키고 하는 그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도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모두 완성시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할 때마다 자기를 깨뜨려 뉘우치고 죄를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사모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생사 간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제 설명한대로 ‘주일을 한번쯤 빠져도 아무 일도 없더라.’ 이 이야기에 큰 격려를 받고 ‘꼭 매주 교회에 나와야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네가 주일을 안 지켰지? 이 나쁜 것’ 하고 하나님이 집을 불타게 하시고 남편 사업을 박살내 버리시고 아들이 무단 횡단하다가 차에 치어죽고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죄인은 이미 하나님을 등지고 어두운 고통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그 앞에 있는 기다란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하고 그 타락의 길이 너무 달콤하고 기쁘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지 않는 한 끊임없는 괴로움, 주님을 섬기고 순종하지 않으면 끊임없는 허무, 이런 것들에 부딪히며 우연히 일어난 일인데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떠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신데 인간들이 하나님 밖에서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데서 모든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면 시인이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하고 있는 이유가 “주님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나이다”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이 위대한 다윗도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었었던 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니’ 우주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그렇게 위대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블레셋과 싸울 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라는 고백을 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 집약을 해서 하나로 꼭 집으면 죄입니다. 오직 죄만이 사람을 그렇게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위안을 느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하고는 큰 상관이 없겠다. 나는 20년째 권사로 살아왔고, 외도를 한 적도 없고, 남의 돈을 훔친 적도 없고,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 폭행을 가한 적도 없고, 그렇게 살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딱 그 모습이 바로 성전에서 세리와 함께 기도하던 바리새인의 의식입니다. 바람도 피지 않고, 남의 돈을 훔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하지도 않은 것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을 다 행하고 있으면서도 영혼의 침체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죄’라고 하면 신문에나 나오는 정도의 죄,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커다란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대죄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론 그것은 죄이지만 그러나 죄는 크기와 상관없이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램프에 불을 붙이고 접시처럼 생긴 비커에 차가운 물을 붓고, 개구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온도가 올라가게끔 만들었습니다. 한 1시간 20분쯤 지난 다음에 개구리는 삶아졌습니다. 만약 개구리를 논에서 잡아다가 뜨끈뜨끈한 물에다 집어넣었으면 개구리가 그 물속으로 쑥 들어가기를 사우나에서 탕에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가면서 ‘아이고 시원하다.’ 그랬겠습니까? 펄쩍 뛰면서 ‘이 인간이 미쳤나?’ 했을 것입니다. 어느 골짜기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부하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루 세 개를 나누어주면서 지시 했습니다. “너희는 지금 가서 이 부대에다가 50㎏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그랬더니 한 사람은 미련하게 50㎏짜리 돌멩이만 찾았습니다. 한 개를 포대에 넣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20㎏짜리 30㎏짜리 두 개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공깃돌만한 돌멩이를 1,000개를 모아서 50㎏를 만들었습니다. 가지고 와서 저울에 달아보니 모두 50㎏입니다. 그 다음 명령이 이 군인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수고했다. 이 모든 돌멩이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제자리에 놓았고, 두 개 가지고 온 사람도 약간 헷갈렸지만 제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천개를 가지고온 사람은 그 천개 중 단 한 개도 제자리에 갖다놓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아주 건축술이 발달하고 도시정비 시스템이 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시면 그것은 하수도처럼 완전히 다른 관을 통해서 처리됩니다. 예전에 제가 첫 번째 예배당을 지을 때만해도 똥통을 파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지으면서 엄밀하게 말하면 있던 공장을 깨끗이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만들었습니다. 교인이 얼마나 모이냐고 해서 1,000명쯤 모인다고 했더니 700인분짜리 통을 파야한다는 것입니다. 700인분짜리 통을 팠습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니까 일 년에 한번만 치면 되는데 서너 달만 되면 꽉 차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구청에 연락하면 용역을 맺은 사람들이 파란 차에 탱크를 단 트럭을 몰고 낮에 오지 않고 항상 새벽에 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사람들이 불쾌해하니까 새벽에 옵니다. 이상한 것이 새벽기도가 끝날 시간쯤 되면 똥차가 오는데 하필이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틀면서 옵니다. 베토벤이 그런 곳에 쓰라고 음악을 만든 것은 아닌데 ‘따라 라라 라라라’ 그 소리만 들으면 ‘똥차가 또 왔구나!’ 합니다. 큰 호스를 박습니다. 그리고 빨아들이는데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마지막 게이지를 보여주면서 “여기서 시작했는데 이만큼 놀라갔습니다.” 그러면서 영수증을 끊어주면 그것을 은행에 계좌이체로 납부하면 처리가 끝납니다. 똥통에 꽉 차서 출렁거리면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예화는 우리 집사람이 절대로 어디 가서 들지 말라고 했는데, 거기서 출렁거리는 똥통의 뚜껑을 열고 한 바가지를 펐다고 생각하십시오. 너무 더러워서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꺼내서 여러 번 체에 걸러서 아주 노르스름한 물로 정제했습니다. 그리고 은을 만든 스프레이 속에 집어넣고 카펫이 깔린 아름다운 호텔에서 전기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곳에서 스프레이를 뿌렸습니다. 그러면 요만한 수증기 같은 알갱이들이 그 전기불빛을 받으면서 안개처럼 확 퍼집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건더기가 출렁거리는 똥은 너무 더럽고 이것은 조금 덜 더럽다고 느껴지는데 두 개를 가지고 성분을 분석해보면 완전히 동일한 성질이 나옵니다.
자잘하게 자꾸 죄를 짓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 속에 그것이 죄라는 의식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아주 조밀하고, 성령의 선명한 빛 속에서 살면 이것을 다 조사해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도 엉성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명한 은혜의 빛 속에서도 못삽니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살아가고 50㎏짜리 죄를 지은 사람들만 보면서 저는 걸레 같은 인간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참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그렇게 나쁜 짓을 안 하면서 토색질도 안하고 오히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던 이 죄를 별로 안 지은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못 만나고, 진짜로 토색질하고, 속이고, 죄 짓고, 아마도 십일조도 안했을 세리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의롭다함을 얻었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얻게 되는 의는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율법을 행해서 얻는 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보다 훨씬 큰 의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전한 사람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에 들어갔습니까? 죄입니다. 물론 다윗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니까 성경이 다 기록하지 못한 자잘한 많은 죄들을 지었을 것임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는 온전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두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건은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그 당시의 인구조사는 나라가 얼마나 강한 나라인지를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왜? 제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의지하며 살도록 태어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나라로써 여호와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순간 눈이 먼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단의 충동을 받았다고 기록하는데 사단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불순종할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칼빈 선생은 죄를 짓고 마귀 때문에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깊은 영혼의 침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커다란 벌을 국가적으로 받게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사건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적으로 다윗이 얼마나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전혀 그래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죄를 짓고 어느 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의 기쁨을 거의 다 빼앗아가 버리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성령을 자신에게 주어 선지자요 왕으로 삼으셨는데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에게서 성령을 거두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전임자 사울에게서 봤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악령에 씌워서 미치광이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짓고 생전 들어가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어둠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때문입니까? 죄 때문에 그런 깊은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겐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를 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를 섬기는 제사장이 없었습니까? 아니면 제물을 드릴 소가 없었겠습니까? 그랬는데 제사를 다 드려보고 나니까 그는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라고 고백합니다. 결정적인 고백은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51:16)입니다.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고백을 51편에서 하는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이 고백에 이르게 되면서 구약 종교에서 사람들에게 잘못 가르쳐졌던 죄를 많이 지어도 제사만 드리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충격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영혼 깊은 곳에서 중심을 드려야지만 제사가 의미가 있다는 충격적인 복음적인 사실을 지금으로부터 삼천년 전에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침체가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말씀드릴 수 없는 다양한 다른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죄’입니다. 죄로 귀결됩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경험 없습니까? 신앙적으로 은혜가 다 사라져서 너무 곤고한 상태인데, 한번 신나는 여행을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유쾌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때는 잊힌 것 같습니다. 모두 헤어져서 어두운 골목길을 타박타박 걸어올 때 밀려오는 말할 수 없는 공허감,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내가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해보지 못하셨습니까? 아무도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오직 하나입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면 무엇이 무섭습니까? ‘내가 이렇게 남편한테 대들다가 생활비 안 갖다 주면 어떻게 하지?’ 그것이 무섭습니까? ‘이러다가 이 사람하고 완전히 갈라서는 것 아니야?’ 어떤 것이 무섭습니까? 그것이 안 무서운 사람은 처음부터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반면에 진짜 남편을 사랑한 사람이라면 월급을 갖다 주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러다가 저 마음속에서 내가 지워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M. Schlink)라는 영성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받을 벌을 무서워서 피하려고 비는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고서라도 다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진정한 회개자의 마음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해서 지금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생활고를 비관해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실하거나 쥐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것보다도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누군가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아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깊은 영혼의 침체 속으로 데려갑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기어 다니던 아마도 제 기억에는 없지만 한 살 때부터 다녔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예수를 안 믿으셨는데 고모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가서 43년 만에 설교를 했습니다. 감개무량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고모의 등에 업혀서 교회에 가서 생활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교회에 다녔고, 유치부 때부터 교회에 대한 또렷한 인식이 있습니다. 우리 당회장 목사님은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부흥가셨기 때문에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초등학교 때 저의 기억에 어느 교회든지 가면 예외 없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회개하라.” 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주일학교를 다닐 때 가마니때기를 깔고 천막을 치고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데도 다녔습니다. 예외 없이 교육을 많이 받은 목회자들이 그때는 희귀했고 그냥 웬만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그렇게 들을게 별로 없는 것 같지 모르지만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설교단에 올라가면 잡아먹을 듯이 교인들에게 ‘회개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의 마음속에 주일학교 다닐 때 배운 복음성가가 잊히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장구치고 죄만 짓다가 오늘밤에 죽으면 어찌 하리요. 슬피 울며 이를 갈며 끌려가겠네!’ 어디로? 지옥불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의 상황은 회개에 대한 설교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큰 죄는 아니고 자잘한 죄를 짓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어머니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도 갖고 ‘언제쯤 돌아가시려나?’ 얼마든지 회개할 많을 일들을 우리들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런 죄들을 끊임없이 지으면서 회개하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교회는 정말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이고 당회장목사님의 부흥의 열기가 남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내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오면 다 앉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예배의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해본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복음을 안다고는 고백하지만 복음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 불신자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겉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이 속의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엉키면서 세상 속에서 부딪히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밑바닥까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이렇게 멀어져 깊은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간 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삼천년 전에 시인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를 통한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프린스턴의 위대한 신학자 워필드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사람인데 이 구절을 두고 해석하기를,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깊은 경지를 깨닫게 하셨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해서 쓰레기처럼 굴러버렸을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아주 감격에 차서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물러가서 타락한 자로 인생이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 같아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거기에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인은 자기 자신을 다 드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이었는데 범죄하자 그는 영혼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서 하나님의 준엄한 벌을 받으며 영혼이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왜 그렇게 두려우신 분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이렇게 죽은 자처럼 침체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 해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가서 물수건으로 이 아이의 얼굴을 씻겨주며 대답도 없는 이 아이와 대화하지 않을까요? “아들아. 잘 잤어?” 나는 우리 교인이 그렇게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아들아. 잘 잤어? 엄마 왔어. 간밤에 좋은 꿈 꿨어?” 그 아들은 식물인간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늘나라를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렇게 3년을 누워 있다가 어느 날 부스스 일어나면서 “엄마. 여기가 어디야?” 그 아이가 일어나서 걸어 다니고 풀밭에 나가서 뛰어다니는 것을 본다면 엄마로서 아빠로서 어떤 느낌이 들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지옥을 가지 않게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런 식으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힘겹게, 힘겹게 교회에 겨우 출석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자기아들 딸을 보는 엄마 아빠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은 지옥 안 가게 하시려고 그것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게 하려고 그분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침체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느껴야 합니다.
또 다른 감격이 있습니다.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쁨과 환희, 감격, 은혜, 생명, 용기,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자기가 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가였습니다. 수많은 종교가들, 각기 교주들이 자기가 길이라고 주장하는데 주님은 “나는 또 하나의 길이요”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그 길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진리에 도달했다고 믿고 자기가 발견한 가르침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나도 하나의 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정적인 것인 것은 세 번째입니다. “내가 곧 …생명이니”(요 14:6) 그 종교, 그 철학에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서 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새벽마다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직업이 파출부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파출부를 하니까 파출부의 고용주는 돈이 있으니까 고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루 이틀 가는 곳은 가지 않고 한 달씩 고정적으로 가는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생활여력이 있어서 부르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하찮게 보겠습니까?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그 집의 일을 해줍니다. 그러면 차츰 차도 마시게 되고 자기 고민을 털어놓게 됩니다. 상담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 스승님이 파출부입니다. 그래서 파출부가 시키는 대로 성경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자매님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정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어떤 어려움인가요?” “제 가슴이 뛰어요. 너무 너무 어려운 일인데 이런 어려운 일이 내게 생겼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를 예견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도님들 아직까지도 딸하고 아들하고 싸우시는 엄마가 있습니까? ‘이놈의 자식. 이 못된 계집애 시집도 안가고 공부도 못하고…….’ 그러지 마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기다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대부분 보면 아이들을 올바르게 한다고 야단치는 부모들이 진짜 자식을 너무 염려해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에서 야단치는 부모들은 천명에 한명도 아닙니다. 왜 야단을 칩니까? 명목상으로는 ‘내가 이렇게 잔소리를 해야 올바른 사람이 되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 성질이 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모자라니까 조금만 자신의 마음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으면 하나님한테도 대드는 것입니다. 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절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직업중 제일 치사한 직업이 교인들의 코 묻은 돈을 먹고사는 목사라고 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회장목사님도 아마 옛날부터 목사가 되고 싶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인생이 꼬였습니다. 그래서 당회장 목사님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한얼산기도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굶으면서 전도사생활 하시고 저는 잘나가던 우체국장이었는데 사표를 내고 나니까 어제 설명 드렸던 그런 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가 훨씬 많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데 만약 마음대로 되면 헤헤거리고 좋아하면서 팔짝팔짝 뛰면서 교만해지고, 안 되면 고꾸라져서 수면제라도 먹고 죽어버릴 것 같은 자세가 된다면 도대체 이것을 몇 번을 팔짝거려야 80평생이 끝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씩 자기 뜻대로 되어서 팔짝 팔짝할 때 그것이 진짜 행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태까지도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주님 안에서 내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먹고 가졌던 것은 정말 기도대로 된 적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심리학자들이 우리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하루에 십만 개라고 하는데 항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단호하게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 뜻대로 되었던 순간보다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순간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옳게 기도하며 주님의 뜻이 우리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로는 순수하게 마음을 가졌는데도 안 되는 적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하고 싶어 할 때 아시아에서 전도를 해서 회장이 되고 싶었습니까, 왕이 되고 싶었습니까? 하나님이 순수한 마음으로 원했는데도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을 복음화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안 되게 될 때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영적인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것을 회복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입니다. 수없이 제사를 드리고 나서 소용이 없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구나!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그러고 보니까 진정으로 죽여서 바쳐야 할 제물이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이고, 그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깊이 회개할 때 사람들은 안 잊어버립니다. 저것이 말만 번지르르해서 옛날에 그런 나쁜 짓을 했다고 하며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어?’ 속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의 죄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달 조금씩 돈을 빌려 쓰면서도 돈을 절대 안 갚으면서 몇 년이 지나면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크기의 빚이 됩니다. 한편으로 빚을 빌려 쓰지만 계속 한쪽에서 갚아나가면 그러면 언젠가는 이것이 되듯이 이 죄는 계속 쌓이는데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고개만 끄덕거리시지 마시고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자기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의 회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불화한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저녁때 집에 들어와서 있는데 문을 열고 “아빠!” 부르며 달려왔습니다. 평소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막 달려오더니 나를 끌어안으면서 볼을 부빕니다. 제 딸 이름이 이슬인데 “이슬아. 너 왜 그러니?” 그러니까 “아빠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왜? 무슨 일이 있어?” 그러니까 “나하고 사이가 멀어졌던 친구하고 오늘 화해했어.” 얼마나 기뻤으면 우리 딸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달려와서 아빠한테 뜨겁게 안기면서 가슴에 볼을 부비면서 “아빠, 아빠. 오늘 너무 행복해 살 것 같아. 친구랑 화해했어.”라고 말했을까요? 사람과 관계가 나빠졌다가도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면 그렇게 달려와서 아빠를 끌어안을 정도로 행복한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어떤 놀라운 기쁨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 하나님과 다시 회개하고 화목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도대체 하나님이 그냥 죽게 된 영혼을 내버려두시지 왜 그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까?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학교를 가면서 수줍은 듯이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아들이 간 다음에 엄마가 편지를 펴보니까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마 없을 때 동생 봐준 것 2시간 900원, 아빠 담배심부름 간 것 500원, 그리고 마루 청소한 것 500원, 합계 1,900원을 엄마에게 청구함.’ 엄마가 너무 웃겨서 그 다음날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서 보냈습니다. 이 아이가 친구들과 도시락을 폈는데 편지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야. 너네 엄마 진짜 멋쟁이다. 편지도 넣어 주냐?” 그것도 분홍색 편지지를 넣었습니다. 연애편지 같은 것을 펴보니까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네놈 뱃속에 넣고 9달15일 동안 힘들었던 것 0원, 너 아플 때 응급실로 들쳐 업고 뛰었던 것 8번 0원,’ 등등 써넣고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단다. 아들 사랑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너는 인생을 살면서 할부로 내가 준 구원을 갚아라.’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아도 여러분 없어도 하나님은 다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것도 그렇게 크게 아멘을 하시는 것 보니까 정말 아름답습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은 다음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엄마가 분명히 편지에다가 ‘엄마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단다. 사랑해 아들.’ 그렇게 말해놓고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숙제 안하고 까불다가 되게 얻어맞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려주시는 것은 대가를 바라고 살려주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섬기고 헌신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외상값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셔서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입니다. 그러면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불의한 길’은 이때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적인 가르침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것이 불의입니다. 당회장목사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지금은 부흥회를 거의 가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설교준비하고 학생들 가르치고 목회하기에도 허덕허덕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그때 진짜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나보고 학원선생님 같다고 했습니다. 왜? 순식간에 나타나서 막 설교하고 주일 오후예배에 두 시간 설교하다가 ‘기도합시다.’ 막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부흥회를 갔습니다. 가서 저녁 대접받고 부흥회를 하고 돌아오면 교인들이 여전히 남아서 교회에서 기도했습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충북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집회 요청을 받아서 일찍 출발했는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좀 늦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도로니까 엑셀을 좀 밟았습니다. 경찰이 붙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저기 경찰이 보여서 속도를 줄였습니다. 가니까 경례를 하면서 “면허증 좀 보여주십시오.” “왜요?” 그러니까 “속도를 위반하셨습니다.” “언제 속도를 위반했습니까?” “여기서는 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 너머에서 위반을 하셨습니다.” 아니 산 너머에서 위반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거기 제 친구가 스피드 건을 쏴서 나에게 무전을 때렸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 빨리 끊어주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면서 “대학교수입니다. 여기에 강연이 있어서 가다가 과속을 했습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것을 끊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이지 몰랐고,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받아서 햇빛가리개에 넣고 빨리 가서 간신히 도착해서 집회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밤늦게 왔으니까 자고 아침에 새벽기도가 끝났는데 딱지를 내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에이 내가 그냥 천천히 걸어가지.’ 그러면서 꺼내서 갔습니다. 은행에 가서 이것을 납부하려고 하는데 너무 쌉니다. 그 당시에 속도위반이면 최소한 이만 원 이상이었는데 6,000원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60,000인가? 그것은 너무 비싼데 그러면서 보니까 틀림없이 6,000원입니다. 납기후 금액은 7,200원입니다.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범칙금 6,000원, 범칙내용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만약 그것을 교회직원에게 들려 보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분명히 집회를 간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담배를 피다가 걸리셨을까? 어쩐지 가끔 담배 냄새가 나더라.’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저는 걸리는 적도 거의 없지만 걸리면 절대 봐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법대로 끊으십시오.
이것은 그래도 벌금에 관한 개인적인 일이었는데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천만원짜리 방 2개짜리 전세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방배동에 집이 있었는데 신학교에서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그런 환경에서 교수님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겠습니까? 하면서 42평 빌라를 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돈으로 5,000만원을 갚고 싶을 때 갚으라고 빌려주었습니다. 그 42평 빌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올라오더니 “제가 기도하는데 목사님에게 우리 집을 팔라고 합니다.” 나는 전세로 그 위에 사는데 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이상하시다. 그러면 살 사람에게도 말씀하셔야지 팔 사람한테만 말씀하시냐?’ 어쨌든 잘되어서 사게 되었습니다. 저는 집을 제대로 산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집도 아니었는데 나는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 처음 알았습니다.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얼마냐고 했더니 얼마쯤 된다고 했습니다. “무슨 그렇게 허름한 산 아래에 있는 빌라 하나가 그렇게 세금이 많아요?” 그러니까 여직원이 그럽니다. “아줌마. 많아요?” “많지요. 그게 얼마나 큰돈인데요.” “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그런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여직원이 마음대로 반을 깎아줍니까?” 그랬더니 이 여직원 이야기가 진짜 계약서 말고 이중계약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나오는 다운계약서를 쓰라는 것입니다. 집을 일억 칠천만원에 팔았지만 일억 사천만 원쯤 팔았다고 가짜 계약서를 써가지고 오면 세금이 반 정도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집사람이 제게 아이디어가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로마서 13장을 봐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라고 했으니 이것이 지방세라도 법대로 내야지, 집을 파는 사람은 집사고 집을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그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겠다. 그렇게 해서 절약한 돈으로는 건축헌금도 부끄럽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 저금통까지 깨서 돈을 맞추어서 가지고 법무사사무실에 갔습니다. “아줌마 오셨네! 계약서 써가지고 오셨어요?” “아니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세금 다 내려고요.”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 법무사 여직원이 어떤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겠습니까?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 이렇게 법대로 사시는 애국자들이셨군요!’ 이랬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병신~’ 전자였겠습니까? 후자였겠습니까? 후자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관에 나가는 데는 안 불러줘서 그렇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개인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 후 몇 년 후에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지하실에서 교인 7명이 한 4년 만에 200여명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나왔는데 밤새도록 철야를 하고 나왔는데 교회 큰길 총신대 사거리 옆에 큰 감리교예배당이 있었는데 간판이 뜯겨지고 ‘월세 혹은 전세 혹은 매매함.’ 교회당에 붙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씻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이냐? 세수도 못하고 집사들을 불러서 다 알아봐서 그날 저녁7시에 제직회까지 해서 그날 그것을 계약하고 들어갔습니다. 본당에 900명 정도 들어가는 예배당이었으니 우리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이 200여명 모였는데 간다고 하니까 헌금 할까봐 180명밖에 안 나왔습니다. 900명 들어가는 예배당에서 요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지금은 제가 너무 부드러운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악을 쓰면서 100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더니 3년 반 만에 1,0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까지 1,300명이니까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건물에는 못 들어가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데 마침 안양에 땅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진짜 안양으로 가기 싫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교수생활을 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안양이 싫었고 어떻게 하든지 강남에서 개척했으니까 서초구에서 개척했으니까 강남에서도 이 개혁주의 교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가게 되었는데 없었습니다. 나는 돈만 가지면 땅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땅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크기가 맞으면 위치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괜찮은 땅을 발견했는데 1,000평짜리 땅입니다. 그러더니 복덕방에서 “그것은 아마 안팔 것입니다. 팔려고 잠깐 내놓았다가 도로 들어간 물건입니다.” 그래도 우리 집사님들이 그 주인 전화번호를 달라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면서 “사장님! 그 땅을 우리에게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쳐다보지 않고 “안팝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니 내 땅을 내가 안 판다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냐?”라며 안판다고 합니다. 또 부탁한다고 하니까 땅을 팔면 거기에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물어서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이 할아버지가 “교회요? 교회라? 일주일 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만납시다.” 돌아와서 우리는 금식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뭔가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열렬히 기도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26살 때 한경직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엄청나게 큰 공장을 하다가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다 정리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여기에 교회를 세워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후에 갔더니 계약을 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36억 원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통장의 돈은 천오백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있는 것이라고는 그 건물의 월세보증금 5억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지.’ 그러다가 망한 사람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면서 열렬히 기도했더니 교인이 3억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얼마입니까?” 그랬더니 36억이라는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그러고 평당 360만 원 정도에 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막상 계약을 하려니까 우리 집사님이 와서 전달하는데 36억에 땅을 주는데 6억을 비자금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다시 또 이중계약서를 쓰자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는 것이냐고 했더니 빚을 다 청산해도 그 땅을 워낙 싸게 사서 세금이 많아서 은행 빚을 다 갚고 나면 청산이 안 된답니다. 그래서 비자금으로 주셔야만 이것이 아귀가 맞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고민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을 그때는 장로가 없었으니까 건축위원회 집사님들에게 물어보니까 95%가 다 그렇게 거래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회계사를 불러다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는 아셔야 합니다. 이중으로 회계장부를 쓰셔야 합니다.” 집사가 거짓말로 회계장부를 쓰고 목사가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세금이 얼마냐고 하더냐?” “3억이랍니다.” “36억 달라는 땅이지만 가서 전해라. 39억 드린다고 해라.” 그래서 36억 달라는 땅을 그것 하나 안 쓰려고 39억을 주고 오랫동안 그 빚을 못 갚았습니다.
그때 제가 설교자로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의롭게 살아라.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자.’ 설교하기도 쉽고 구역에서 교인들이 모여서 성경공부 할 때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 3억을 은행에서도 안 빌려주고 사채를 얻거나 제2금융권에서 이자 20%를 주고 그것을 얻어서 낼 때는 연 이자를 24%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말씀대로 살기가 힘든가 하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내가 제직들을 모아놓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못 지으면 못 지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한때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미국은 내심 전쟁을 해서 멕시코를 이겨서 그 영토의 일부라도 한번 땅을 넓혀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의 온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토의 확장을 위한 그런 종류의 전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나온 찬송가가 이것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이 찬송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 불의한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항거했습니다. 결국은 정치가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대해서 엄정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정치인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렷하게 그 길을 가고 잘못할 때는 결기 있게 외쳐서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고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지방에서 어느 집사님이 저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으셔서 토요일마다 올라와서 교리반을 공부하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봉고를 타고 가다가 이런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하면서 봉고를 타고 가다가 애들하고 사모님하고 가는데 서있는 트럭을 긁은 것입니다. 얼마나 심하게 긁었는지 봉고도 물론 낡은 것이었지만 봉고를 폐차하기로 결정할 정도로 들이받은 것입니다. 식구들은 괜찮고 그냥 가려다가 이 생각이 나서 내려서 트럭을 보니까 조금 약간 자국이 나고 망가지지는 않았더랍니다. 거기다가 메모를 붙였습니다. ‘제가 가족들하고 봉고를 몰고 가다가 크게 부딪혀서 봉고는 많이 망가졌는데 트럭도 약간 찌그러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락을 주시면 보험 처리를 해서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남겼더니 한참 있더니 전화가 왔더랍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제 트럭 부딪히고 가신 분이세요?” “네.” “사모님하고 아이들을 괜찮으세요? 아무도 안 다쳤어요?” 이것이 얼마나 사람 사는 세상입니까?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긁어놓고 ‘뭐 괜찮네!’ 그것은 주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이렇게 부딪혔습니다. 메모를 붙여놓고 그것은 사소한 것이고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그 무한정한 은혜를 힘입어서 결기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 겨울 방학 때 저는 보따리를 써서 덕적도라는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을 거기서 공부하고 시도 쓰면서 지낼 요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서울로 나오는 날 배가 오기에는 풍랑이 너무 이는데 그런데도 배가 어떻게 왔습니다. 탔습니다. 떠나자마자 엄청 풍랑이 이는 것입니다. 거의 죽을 정도로 굴러다녔는데 구명조끼를 다 입으라고 해서 입고 사람들은 토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중간쯤 왔는데 빨리 인천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한밤중인데 항만청에서 도로 돌아가라고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돌아오니까 캄캄한 밤중에 섬에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비는 쏟아지고 완전히 흑암입니다. 그때 받았던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빛이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바다인데 딱 하나 저 멀리서 등대 하나가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받은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수천 개의 조명탄으로 대낮처럼 밝혀야지만 배들이 안전하게 피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등대 하나만 빛나고 있어도 수많은 배들이 피난을 하면서 안전하게 항구로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로 그렇게 이렇게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 하나의 등대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하늘은 빛나는 별에게 기회이고 죄악 된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로 살기위한 배경입니다. 기회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아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저 사람은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어쩜 저렇게 행복할까? 도대체 저사람 뒤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회복시켜서 모든 이 지상의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길을 걸어감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거룩한 빛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