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위한 인문학
녹취자: 김정규
의도한 것은 아닌데 강의를 쭉 듣고 보니 제 강의가 결론, 마무리로 적합한 강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여기 모인 분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고 대부분이 신학공부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위해서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와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를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간단한 목차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Ⅰ. 들어가는 말
여기에 보면 세 종류-여왕, 상궁, 시녀들-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제일 위에 여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녀들이 있고 이들이 지휘하는 상궁이 있습니다. 원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의 여왕으로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왕으로서 자기나라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학문이라는 시녀가 필요하고 이 시녀들이 많아서 여왕의 신분에 모두 다스릴 수 없으니 상궁이 하나 필요한데 이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학문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는데-오늘 여러분들이 과학철학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이렇게 모든 학문들에 철학이 관여하면서 그것들을 통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 예술, 문학은 문학, 역사는 역사를 공부하면 되는데 철학을 하는 사람은 다면적인 지식을 모두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공부를 준비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학을 하는 것이 맞는데-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매우 부끄럽습니다. 신학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Ⅱ. 인문학과 자유정신
1. 자유인을 위한 지식
원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인을 위한 지식입니다. 흔히 교양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원래는 자유학예(artes liberales) 혹은 자유과(liberal arts)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노예가 있습니다. 노예는 항상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고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일을 하면 됩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군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의미나 이유는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는 그냥 단순 기능을 하면 됩니다. 깊이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인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저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유인은 창조적인 기질을 가지고 사회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독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총체적이고 독자적인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역사 이래로 인간의 고민은 둘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을 향하여는 어떻게 불결한 자신이 정화될 것인지와 (자신을 향하여는) 자신의 존재가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이바지 할 수 있는가’입니다. 신을 향하여 정화되고, 보다 나은 사회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집요하게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완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내가 있고 내가 마땅히 이러하기를 바라는 내가 있습니다. 항상 그것은 지금 현재의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struggle)하면서 보다 나은 내가 되어가야지만 인간으로서 만족을 느낍니다. 이런 활동들을 인문학이 도와줍니다.
인문학적인 교양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들은 익숙하게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문학적인 교양이 있으면 그것을 낯설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것들을 순간순간 낯설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과거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전수된 신념 그런 것들을 자유정신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듭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공교육입니다. 반공교육과 사상 같은 것은 전수된 신념입니다. 근데 자유정신이 없으면 완전히 거기에 굴복하며 그 구조 속에서 부속품처럼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정신이 있으면 그런 사회적인 신념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확고한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의 유용성입니다.
여기 찰스 윌리엄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이라는 미국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1869년에서 1909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총장을 지냈습니다. 이 사람이 소위 얘기하는 ‘5피트 책꽂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5피트라고 하니 책을 놓은 길이가 한 1.5미터 정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윌리엄 넬슨(William A. Nelson)교수와 함께 편집해 51권의 인문학 선집을 만들고 1917년에 20권의 Harvard Classics Shef of Fiction을 출간합니다. 이것을 왜 만들었을까요? 그때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의 미국의 대학교육은 아주 소수가 받는 혜택이었고, 실제로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자유함양교육의 기회를 못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혹은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거나 못하거나 혹은 대학을 못 들어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책꽂이를 만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책꽂이의 책을 한권씩 생각하며 읽는다면 나름대로 자유정신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의 폭,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51권이 무엇으로 되었을까? 목록은 이렇습니다. 다 읽을 필요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51권중 어떤 책은 이것이 왜 여기에 들어갔는지 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울먼의 일기, 윌리엄 팬의 고독의 열매, 8권에 보면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그 밑에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 히폴리투스, 개구리들, 이솝우화, 영웅전, 단테의 신곡, 영미 에세이,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존 로크, 초서에서 그레이까지의 영국 작가의 이야기, 논어도 나오고 파스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책과는 별개로 후에 이것을 기초로 1911년에 제임스 로엡(James Loeb)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설립이 되면서 그리스 고전과 라틴어 고전을 중심으로 -물론 영어권의 책도 포함-만듭니다. (서가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초록색은 그리스 문헌이고, 빨간색은 라틴문헌인데 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마어한 작품입니다. 현재 500여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고 이미 나온 것 중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다시 번역하고 해제를 달면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어쩌면 계속될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다시 새로운 시도들이 이뤄지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나온 작품들을 이런 식으로 시리즈로 만들겠다는 방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어떡하면 인간이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존재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2. 인문학의 내용과 한계
대체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자유학예가 이뤄지는데 이것을 대체로 인문학이라고 말합니다. 이 인문학은 한자로 人文學입니다. 사람과 글과 학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해주는 것과 함께 예술을 통한 미를 향유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지식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미를 향유하여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사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적으로 자유학예의 과목은 3학 4과로 나뉩니다. 3학은 글에 대한 문법, 말에 대한 수학, 논리에 대한 논리학입니다. 4과는 놀랍게 산술, 가하학, 천문학, 음악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정신을 갖게 하는데 대단히 기여하는 학문들이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 과목 한 과목이 왜 그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는지는 너무 세부적이어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날은 인문학 광풍이 불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방의 한 교회를 갔을 때, 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젊은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인문학 강좌를 자기끼리 갖기 시작했습니다. 장자 논어부터 시작해서 플라톤까지 읽으면서 차례대로 자기끼리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이 점점 잘되어서 많은 청년들이 인문학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 강력한 영향력을 가져 교회에 나온 아이들이 설교에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이 인문학공부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너희 그런 모임을 하지 말라’고 하며 서로 대화를 하니까 교역자가 게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논리로 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청년들이 교역자에게 입증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목사님 저희가 지금부터 인문학 공부를 시작해야 될까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인문학을 칭송하는 광풍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인문학을 공부하면 돈을 빨리 벌고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까지 전달되면서 인문학이 잘 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본다하여도 그것의 한계는 첫째, 인간중심의 학문의 체계입니다. 그 중심에 인간을 놓은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학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 근거를 인간 이성 자체에 둡니다. 사실 인간 이성 그 자체가 학문의 수단은 될 수 있으나 그 자체가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결국 인문학은 자기 스스로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네 번째 결국 신앙과 신학을 필요로 합니다. 인문학 그 자체에 무슨 새로운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Ⅲ. 신학공부를 위한 인문학
1. 인문학 공부의 필요성
인문학 공부의 효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지만 더 넓게 보면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이기에 기독교인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기에 인간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이 작은 범주는 보다 큰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있습니다. 당연히 기독교인이라고 할 때 기독교와 인이 만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우리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누구인지 판단하게 도와줍니다.
오늘 우리가 트랜스 휴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용어도 익숙하지 않은-강의를 들었는데, 다 종합하면 이것은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학자들에 따라서 트랜스 휴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트랜스 휴머니즘과 포스트 휴머니즘을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럼 포스트 휴머니즘은 무엇인가? 요즘 의술이 발달해서 내가 간이 나쁘면 인공간으로 교체합니다. 줄기세포가 나오고 심지어 짐승의 것을 가지고 이식하기도 하는 이런 기술은 발달 될 것입니다. 남의 팔을 나에게 가져다 붙이고, 얼굴을 Face off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쓰게 되어도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뇌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뇌의 뚜껑을 열고 뇌를 반쯤 갈라서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이식한 경우, 몸의 반을 기계로 하여 600만 불의 사나이처럼, 로보캅처럼 움직이게 할 때 도대체 나는 인간인가에 대한 것이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면 트랜스 휴머니즘은 인간은 어차피 연약하지만 연약한 채로 살 필요가 없기에 좋은 게 있다면 받아들여서 나의 신체를 바꿔서 로봇화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소극적이지만 트랜스 휴머니즘은 훨씬 적극적입니다. 진화를 이제 자연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기술력으로 인간이 주도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시켜간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욕망의 신성화입니다. 여기에 발튀스(Balthus)라고 하는 프랑스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작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1934년에 첫 개인전을 열고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사람들이 발튀스를 ‘회화의 프로이트, 색정광’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왼쪽의 여자는 가슴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른쪽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 중요한 부위가 보일 듯 말 듯한 채 있습니다. 이 발튀스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인데 ‘기타 레슨’이라고 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기타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고 기타교습 선생님은 학생을 꺾듯이 눕혀 놓고 학생의 중요하고 은밀한 부위를 만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작가들이 이것이 피에타상-성모 마리아가 고난당한 예수를 안고 있는-과 너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런 그림을 통해서 발튀스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발튀스는 개인의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닌 당시 모든 사람들 속에 이미 변화하고 있는 당시 사회의 의식을 표출한 것인데 그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자크 라캉의 세미나 제7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름다움은 선보다 멀리간다.’ 이런 고민은 이미 플라톤이 했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선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선에 이끌리기보다는 미에 이끌린다.’ 그래서 결국 머리로는 선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아름다운 것을 쫒아서 행동하는데 문제는 이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고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 발튀스는 저의 이런 절제와 금욕에 관한 이런 해석을 완전히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을 정리한 글이 이것입니다. 발튀스는 타락한 욕망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루시퍼의 수도사였다. 다음 문장이 충격적인데, 신성과 신성모독을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Divinity Blasphemy is equal, 신성하다고 이미 받아들여져 있는 도덕률, 특히 기독교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신성하지만 그 신성이라는 이름아래 인간의 수많은 정신들을 짓밟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하고 도전하는 악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실행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Divinity와 Blasphemy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에 도전하는 또 다른 모욕이 신성이고 추한 것 안에도 미학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인간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할 것인가? 오늘 강의를 통해서 깨달은 점도 있지만 더 혼란스러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킹키스돌스(Kinkys DollS)라는 캐나다 회사에서 섹스로봇을 이용한 성매매촌을 만들었습니다. 30분이용에 60달러, 맘에 드는 여성로봇을 골라서 섹스를 하는데 사람의 반응에 따라 표정이 수시로 변하면서 몸을 사람의 몸과 유사한 감촉으로 만들어서 결국 섹스를 하게끔 한 것입니다. 1호점이 토론토에 생겼고, 2호점이 그 이후에 스페인 독일 영국등지에서 성업 중입니다. 최근 휴스턴에 미국 1호점을 개설하려고 하다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인기 있는 프랜차이즈가 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절대적인 규범을 모두 없애버리고 인간이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여 하나님을 대신하고 나니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기가 결정하게 되었고, 이성주의 시대에는 그것을 집단이라고 보았는데 이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시대는 격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인가라는 판단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문학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도구로 공부하고 그들의 언어로 교통하고 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문학, 철학, 역사, 예술은 자기 나름의 편견과 자기가 익숙해져 있는 문화 안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이것을 넘나들 수 있도록 하는 유익이 인문학에 있습니다. 12세기경부터 서구에 대학이 생긴 목적은 바로 이 자유교양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을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university라고 하며 라틴어로 universitas하는데 이것은 전체를 의미하는 universus에서 옵니다. 그래서 대학교육의 목표는 지금처럼 이렇게 취업을 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정신으로 이 모든 삶과 세계를 판단할 수 있는 그런 판단력을 가진 자유로운 인성을 기르는 것이 대학교육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아까 발표한 내용에서 이렇게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가 되면 이렇게 공부하는 대학의 공부는 필요가 없고 영원히 실업자로 살아야 합니다. (취업이 가능하려면) 대학 1학년 때부터 심장이면 심장, 꽃이면 꽃, 아니면 돼지면 돼지, 하나만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전문성을 가지고 그것을 예술 과학 생명공학과 연결해서 우리들이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이런 총체적인 교육을 받게 될 기회를 어디서 얻게 되겠습니까? 부모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을 때 자식에게 교육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개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에-TV를 틀면 예전에는 먹방 노래방이지만 지금은 개방이 압도적입니다.-수많은 개에 대한 프로그램이 나오는데 이것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한 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결국, 삶의 상황은 끝없이 변합니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매일 다른 삶의 상황을 만납니다. 신앙 인문학 신학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인문학 공부의 또 다른 필요성은 거짓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타인의 견해, 주입된 교육, 맹목적 추종을 통해 자유인이면서 노예처럼 삽니다. 자유학예를 공부함으로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이었던 사람이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일천억명 정도의 인류가 이 지상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전에도 여러분이 있었던 적이 없고, 지금도 여러분 같은 사람이 없고 후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희귀종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셔서 이제 여러분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모두 다른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똑같이 살지 말고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 그리고 다른 판단 혹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살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틀을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니라’ 경외하면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을 공부하면서 깊이 어느 날 자각을 느꼈습니다. 저는 칼빈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의 신학 유산을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가 죽은 후 ‘김남준은 칼빈주의자’라고 하면 저는 정중하게 하늘에서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어거스틴 만큼 제 마음을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가 없습니다. 정말 단 하루도 어거스틴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물론 나는 그의 모든 신학의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이미 책을 통해서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훌륭한 점은 깊이 존경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 그가 나의 최대의 멘토라는 이유로 ‘김남준은 어거스틴주의자’였다는 말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저는 오웬의 전집을 20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나는 흔히 말하기를 내가 목회할 때 ‘그분이 담임목사고 내가 부목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오웬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었을 때 ‘그는 오웬주의자’라는 것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없이 흠모하고 높이 평가하고 그의 저작을 거의 다 읽었지만, 나를 조나단 에드워즈 주의자라고 불러주는 것도 반대합니다. 더군다나 나는 그 4명의 멘토 중 누구의 추종자도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김목사님 당신은 누가 되고 싶습니까?’ 그때 나는 아주 분명하게 ‘나는 김남준이고 싶다.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고 나서 설교자의 최고의 보람은 여러분들이 개혁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청교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여러분에게 크게 거시는 기대라고 봅니다.
2. 인문학 공부, 어떻게 할까?
인생을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보면, 결국 세월이 흘러가고 인간은 끊임없는 겪음을 경험합니다. 삶의 사태는 불연속적입니다. 툭툭 끊어지고 실제로 왜 이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이 삶의 사태 후에 이 삶의 사태가 도래하게 되었는지 우린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들을 연결할 때 우리는 이러이러한 삶의 모든 사태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하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찾아간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삶의 모든 사태들을 통합해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면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우리가 공부해야할 학문의 대상, 세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하면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사랑은 사람을 모두 획일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기계 속에 넣고 똑같은 사람으로 찍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각자가 내가 되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완전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한 인간이 가장 완벽에 가깝도록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 케이스가 있는데 그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유명해서 가장 잘 아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가장 완벽히 변화한 것으로 바울이 가장 바울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사회학이 되고 자연에 대해 배우는 것은 자연학이 됩니다. 인간 중 가장 독특한 하나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공부함으로써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안에서 모두 하나로 통합됩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이렇게 창조하셨지만 창조하기 전에 논리적으로 하나님에게는 인간과 세계창조를 위한 관념이 있습니다. 이 관념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창조, 보존, 섭리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의도에 맞도록 다스리고 가꾸고 사람들 속에서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회를 이루길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데려오실 때 아담은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남녀 간의 결합의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인류가 서로에 대해 그 고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들려고 했던 사회는 사랑의 사회(Society of Love)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이는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자녀에게도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것이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온 인류가 지구에 다 퍼졌어도 지구 이 끝에 있는 사람이 저 끝에 있는 사람에게 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인간의 죄에 의해서 좌절되니까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사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어 한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이것을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너희는 한 몸이라 너희 중에 누가 아프면 내가 아프지 않더냐? 너희는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의해 실현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그런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며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제 현실을 대면하고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판단을 해야 되는데 이런 판단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이러한 용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초월과 내재, 하나와 여럿, 실재와 본질, 우연과 필연, 유와 무, 시간과 영원, 선과 악, 이성과 사랑, 감각과 지각, 무한과 유한, 이런 개념들이 잘 형성되어 있을 때 복잡한 현실을 비교적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당신의 성경을 알아 친숙하게 됨으로 이런 저런 책을 읽게 되었다면 경건의 뿌리를 느슨하게 찢었을 것입니다. 비록 이미 흡수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어도 그 책들만 가지고 연구해도 성경을 읽었을 때와 똑같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기 전 플라톤의 철학을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 허무한 것을 깨닫고 복음을 알았을 때, 그 복음이 일반계시인 플라톤의 철학 위에서 찬란하게 빛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문학에서는 동・서양의 고전, 한국문학, 현대문학입니다. 역사에서는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 신학공부를 위한 교회사, 철학에는 서양 고전 철학, 동북아 철학, 즉 중국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동북아 철학, 여유가 되면 인도철학, 불교철학 이슬람 철학 등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고 현대철학이 있습니다. 이것을 핵심으로 더 확장한다면 수학, 기하학은 인간의 사고 활동을 아주 촉진시켜줍니다. 특히 저에게 신학공부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법학이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사고의 유연성과 엄격성을 동시에 갖게 되고 복잡한 현실 속에서 정확하게 본질을 찾아내는 훈련을 법학이 시켜줍니다. 윤리학, 경제학, 사회학, 물리학은 고전물리학, 최근의 양자역학, 특히 상대주의 시대에서 양자역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완전히 인간의 사고를 바꿔놓은 것이 바로 양자 물리학입니다. 1927년에 솔베이 학회(Conseil Solvay)에서 이 양자역학의 닐스 보어의 이론이 채택되고 그의 주장들이 동양, 특히 중국의 철학을 동원하여 수립한 것이 알려지면서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자기부상열차, 컴퓨터 스캐너, 우리가 갖고 있는 마트에서 사용해서 레이저 바이런 것들이 모두 양자역학의 도움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생물학, 의학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완전히 우주론이 다릅니다. 저의 경우에는 천문학이 신학공부에 매우 큰 도움을 주어서 추천합니다. 환경공학, 미학, 음악, 미술, 건축학, 기타 예술을 공부함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Ⅳ. 결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신학공부도 못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할까? 그래서 신학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출발해서 주님이 주신 능력만큼 돌변서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냥 성경 중심으로 계속 돌면 됩니다. 그리고 능력이 되시면 좀 나가시고 능력이 더 되시면 좀 더 멀리 가지만 언제나 잊지 말고 성경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많은 책을 읽지만 여러분들은 ‘You don’t have to be a man of books, but you have to be a man of the book.’ 성경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할까? 저의 경험으로 첫째, 전문가에 강의를 들으십시오. 저는 과외를 했지만, 여러분은 인터넷과 아카데미를 찾을 수 있고, 독서그룹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뜻을 세워서 51피트 쉘브를 독파하기로 다짐하고, 다양하게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인문학의 어느 분야에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서 축적하는 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학문적인 능력이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람 카이퍼의 말로 이 강의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는 지혜와 경외라는 책에서 ‘특별은총의 생명력은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의 생명력 가운데 자리 잡게 하셨다. 성경을 주신 것은 분명 우리에게 구원의 방법을 열어 보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새로운 빛으로 일반은총을 풍요하게 만들라고 주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