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족섬김이 세미나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녹취자: 김정규
저는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 물론 제가 낳은 것이 아니라 우리 집사람이 낳았지만 둘 다 제왕절개로 낳았습니다. 첫 아이 때에는 우리 집사람이 돈을 아끼려고 24시간 진통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할 수 없이 제왕절개를 해서 낳았고 둘째는 그냥 처음부터 아예 제왕절개로 낳았습니다.
저는 그 현장을 못 봤는데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분만실에서 그렇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남편 욕을 한다고 합니다. 아이 낳는 게 얼마나 힘들면 그 자신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니까 산부인과 올 때까지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왔겠습니까만 마지막에 낳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애를 만나러 온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욕을 하면서 그렇게 고통을 참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산모가 온몸에 땀이 흠뻑 흘러 옆에 보여주는 탯줄을 끊은 아이를 볼 때 엄마는 다시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남편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하겠죠.
우리들이 영혼을 낳는 수고도 똑같습니다. 오늘 이 성경이 기록될 때 상황은 아주 미묘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 인사말이 없는 유일한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편지를 썼을 때, 세상 말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열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못된 짓들을 했냐 하면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그 원래의 복음을 버리고 유대인 완전주의자들의 꾐에 넘어가서 이제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기초부터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된 속에서 이제 사도 바울이 급히 편지를 쓰다가 어떤 말까지 서슴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 이외의 것을 전하면 천사들이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런 독설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다가 편지를 길게 쓰면서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고 자기가 이 교인들을 어떻게 복음 안에서 낳았는지를 생각하며 어미의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눈물이 꽉 찬 음성으로 이들에게 다시 사랑하는 표현을 합니다. 그게 4장에서의 예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는데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다시 너희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그렇게 낳은 것이 매우 힘들고, 남자들은 죽어다가 깨어나도 경험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렇게 해 놓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야 이제는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에게 고생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으면, 부모는 아이를 낳은 것과 비교도 안 되는 고생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아이가 너무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하니까 아빠가 그 아이 때문에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깊은 고통 속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 그런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이제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면, 아이를 한 번만 태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한번 태어나게 할 때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해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신앙적으로 만이 아니라, 일반신앙을 떠나서 인간으로 아이를 교육하는 것도 부모에게는 그런 커다란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집 아이들은 부모가 교육에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반듯하게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래도 캐 들어가 보면, 그 집안에 무엇인가 있는 겁니다. 부모가 아이들은 일일이 챙기느라 애쓰지는 못했지만 부모의 반듯한 삶 그리고 뚜렷한 교육 등 뭔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영향을 받아서 자라거나 또는 부모도 훌륭하지 않고, 태생도 그렇게 특출하지 않는데 아주 훌륭한 선생님, 정신적인 스승을 만나서 아이가 올바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다음에 내가 부모다운 부모가 되도록 세 번째 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 뭐하면 훌륭한 스승과 친구를 만나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훌륭한 스승이나 훌륭한 친구를 만나면 아이의 인생이 바뀝니다.
신앙 밖에서도 그 아이가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많은 마음고생을 하면서 아이를 길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야생마처럼 버려두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망가지고, 혹은 망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마음에 깊이 어떤 멍든 부분들이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충분한 사랑 가운데 길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신앙적으로 적용하면, 사람들을 교인들이 전도해서 그가 진짜 예수를 믿게 되고 진짜 회심하게 된다면 그건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그 아이에게는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 양육은 두 번째의 해산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위해서 많이 울어주고 눈물을 흘리고 그 영혼을 충심으로 사랑하면서 돌보지 않으면, 참사람이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새 가족 위원들은 바로 그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전도하고 물론 여러분들은 양육자인 동시에 전도자일 수 있습니다. 또 전도하는 사람들도 새 가족 위원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찾아가고 섬기고, 돌보고 위로하면서 양육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도자가 전도해서 그 사람을 태어나게 한다면 새 가족 위원은 그렇게 태어난 사람을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참신자로 길러내는 일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 하냐면 어디까지 그렇게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말해서 ‘온전한 신자가 되기까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돕는 사람은 자신은 이미 온전함에 이르렀다거나 혹은 벌써 온전한 신자가 되었다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신도 온전한 신자가 되어 가기를 바라면서 그 사람도 온전해지기를 원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새가족의 역사는 정말 오래되었습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하고 교인들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오지만 왔다 갔다가 합니다. 97년도쯤 개척하고 3년 반쯤 되었을 때, 사람들이 진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전에 한 94년도에 이미 새 가족 반이 생겼고, 우리 김경해전도사님이 새 가족 반을 맡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십자가를 경험하라』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한 것이 새 가족 반의 시작이었습니다. 김경해전도사님뿐 만 아니라, 거기에 진짜 영혼을 사랑하는 지체들이 방문한 사람들을 위해서 매주 편지를 쓰고, 메일을 보내고, 사진을 찍어주고, 새 가족 심방을 하고, 새 가족 환영회를 하고, 이렇게 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새 가족 사역의 뼈대가 잡혔습니다. 그때까지 많은 교회를 탐방하고 우리가 배우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고민하면서 좋은 방법을 찾아내기도 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 가족 위원들의 마음은 하나의 꼭짓점에 모여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하든지 전도되어서 온 그 사람들이 참된 회심에 이를 뿐만 아니라 또한 열린교회를 자기 가정처럼 생각하며 사랑하게끔 만드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들의 영적 성숙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두꺼운 교재를 아무리 많이 가르쳐도 이 사람이 이 교회에 정착할 마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정착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끊임없이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심방하는 것은 괴롭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인 자신입니다. 본인 자신이 ‘아. 이 교회가 포근하다 따뜻하다. 이제 내 신앙의 방황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여기에 짐을 풀고 싶다.’ 그런 마음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따뜻해야 합니다.
어느 새 가족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왜요?”, “처음에 왔는데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고요, 그리고 밥 먹는 자리도 따로 마련해 줬어요. 그런데 두 번째 오니까 본 척도 안 해요.” 그래서 “미안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에 온 사람들만 끔찍이 생각하고요. 3번째 주에 오니까 아무도 안 챙겨줘요. 저에게는 좀 도움이 더 필요한데요.”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땐 지금과 좀 달랐습니다. 매주 한 20명씩 이렇게 계속 왔으니 3주를 모이면 60명이 되니 도저히 손길이 챙길 수 있는 것이 안 됐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낯간지럽습니다. 첫 주 왔는데 테이블보도 깔고 여기에 앉으시라고 하면서 다음 주에 오니까 자리도 없고 저리 길건 나가서 밥 먹고 오라고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따뜻한 교회입니다. 따듯하고, 진리가 있고, 주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잘 정착하게 된 사람들 혹은 흔들리다가 다시 섰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옆에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무를 갖다 심어놓으면, 옆에 이런 나무를 한 3년 동안 받쳐놓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뿌리를 내려야 되는데, 나무가 자꾸 흔들리면 뿌리가 잘 착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붙들어 매 놓습니다. 아니면 여러 개의 나무를 대나무 같은 것으로 묶어 놓아서 안 흔들리게 만듭니다. 똑같이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열린교회는 성장해왔고, 사람들은 다 기억 못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섬김을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들의 새 가족 사역에 하나님의 넘치는 복이 있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뒤를 돌아볼 후고의 염려 없이 자기의 섬김에 헌신하기 위해선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고 여러분들이 특별히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섬기는 자들에게 이런 복을 충만히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