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목회자 부부세미나 개회예배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하고” (마 25:23)
녹취자: 조경훈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대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많은 설교자에게 사랑을 받는 본문 중에 하나가 충성된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달란트는 그 당시에 돈의 단위인데 금을 가지고 계산을 하면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제가 1988-89년도에 책을 한 권 번역하면서 계산을 해보니까 그 때 외환시세가 달러당 700원정도 밖에 안 할 때였는데 한 달란트의 가격이 약 8천 400만 원 정도로 계산이 됐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저는 항상 여기를 설교할 때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에 대한 칭찬이 꼭 같지만 저는 다섯 달란트를 예로 들지 않고 두 달란트를 예로 듭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렇게 엄청난 달란트를 맡은 사람처럼 천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만만한 사람이 두 달란트 맡은 사람입니다.
두 달란트 맡은 사람도 똑같이 주인이 돈을 주니까 그 돈을 가지고 굴렸습니다. 아마 장사도 하고 사업도 하고 하면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두 달란트를 남겨서 주었습니다. 얼마 만에 주인이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주인이 맡기고 간 돈을 배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꼭 같았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마음에 얼마나 들었는지 주인이 세 가지로 칭찬합니다. 첫 번째는 ‘잘 하였도다’, 두 번째는 ‘착하다’ 세 번째는 ‘충성된 종아’ 이렇게 세 가지로 주인이 만족스러움을 표시합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우리는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역자하고도 일 해보셨을 거고 혹은 평신도들과도 일 해보셨을 것입니다. 못하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은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더 났습니다.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이에 비해서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이 사람을 놓아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불편한 무엇이 있다면 해결을 해 주고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더 공급을 해 주어서라도 이 사람을 어떡하든지 데리고 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목회를 한다고 모두 하는 것입니까? 잘해야 합니다. 잘 한다고 하는 것은 어마 어마한 사람을 모은다든지 그러는 것 아니라고 제가 몇 년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농어촌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더욱이 젊은이 타령하면 안 됩니다. 없는 젊은이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잘 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방면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 지역에 이 교회에 목자로 보냈을 때 기대하셨던 것처럼 잘 하는 것입니다. 저 시골에 한 5~60가구 모여 사는 교회에 개척을 시키시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되기를 하나님이 기대 하셨을 리는 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기대하셨으면 서울이나 대도시로 그 사람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잘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거기에 보내셨을 때 기대하셨던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나 대신 거기에 오셨으면 하셨을 그런 목회를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성을 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못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도록 정성을 다해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희 할머니 살아계셨을 때 학교에서도 바늘로 양말을 꾀 메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전구를 집어넣고 기우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우리 할머니가 항상 제 양말을 꾀 메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옛날 옛날에 조강지처와 첩이 있었단다. 그런데 첩은 뺏은 남편의 양말을 기운 후에 가위로 실을 싹둑 잘랐고 조강지처는 이빨로 그 실을 끊었단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 것 같았습니다. 첩은 그 남자를 붙들어서 살기는 했는데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 깊은 정이 없기 때문에 가위로 싹둑 자르는 거고, ‘왜 내가 그 인간이 신고 다니던 더러운 양말에다가 입을 대랴’ 이거고, 조강지처는 살 깊은 정이 들었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고 했어도 그게 예뻐서 꾀 멘 후에는 이빨로 물어뜯어서 실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성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성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가방 하나에 5천원 5백 만 원 짜리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날까요? 5백 만 원 짜리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예화) 저는 어느 교인이 유명한 명품 매장을 해서 심방을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게에서 제일 싼 게 요만한 손지갑인데 330만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비싸냐고 물어보았더니 소를 기를 때 우리는 고기를 먹으려고 기르는데, 소를 기를 때부터 그 가방을 만들려고 소를 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의 피부가 긁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보호해서 부드러운 곳에서 드러눕거나 엎드려도 절대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소를 기르고 어떤 음악을 들려주면 가죽이 부드러워지는가 그렇게 사료를 먹이면서 그 소 한 마리에서 가방 딱 두 개 분량의 가죽이 나온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기계로 박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수작업을 해가지고 장인이 그것 하나를 며칠을 걸려서 가방 한 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기울여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5천 원이고 하나는 800만 원에서 1,000만원도 가는 것입니다.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잘 하는 목회자는 정성을 기울이는 목회자입니다.
두 번째는 기술을 다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이 한 번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회를 해도 해도 같은 시찰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목회가 안 되니까 그 목회자를 놓고 그랬습니다. ‘붕어빵을 계속 팔다가도 안 팔리면 재료는 그대로라도 잉어빵으로 바꿔서 파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 계속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뭔가 변화를 줘라.’ 무슨 뜻이냐 하면 잘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기술을 잘 배워서 그것을 자신의 목회에 적용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웃리치, 목회자세미나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교회가 있습니다. 한 교회는 그야말로 정성의 모본이었습니다. 목사님이 한 동리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470가정 쯤 모여 사는 여섯 개 마을로 된 곳이었습니다. 저희가 그 교회 전도를 갔을 때가 1997년도였는데 15명 정도 교인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거기 온지 6년 정도 됐고 교회 문을 닫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참 목회가 재미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서 전도를 하면서 목사님이 제일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470가정을 14명이 6일 동안에 완전히 심방을 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회개를 하면서 저한테 고백하기를 ‘나는 6년이 되는데 470가정을 다 심방전도를 못했는데 이까짓 거 알고 보니까 6일이면 하는 거였습니다. 회개합니다.’ 이 분이 그 다음부터 진심으로 은혜를 많이 받으셔서 새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우리교회 설교도 들으시고 책도 읽으시고 열렬했습니다. 목사님만 그랬으면 뭔 일이 안 일어났을 텐데 사모님이 똑같이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들어보십시오. 14명밖에 안됐는데 우리들이 전도를 해서 마지막 제가 전도설교를 하는 날 75명이 모였습니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얼마나 모였을까요? 되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고 나와서 더 늘어났습니다. 그 교회가 한창 많이 모일 때 백 명이 모였습니다. 거짓말 같지 않습니까? 백 명이 모였는데 목사님이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에 끝까지 충성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도 70명이 모였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목사님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없는 젊은이 타령을 하려면 농어촌목회를 집어치우고 강남에 와서 개척을 해야 한다. 젊은이가 없지 않습니까? 없는데 어떡하겠습니까? 사명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잘 전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서 마지막에 염하고 관에 넣어서 묻어주고 하늘나라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없는 살림에 봉고차 두 대를 사서 새벽 3시에 사모님은 이쪽 방향으로 목사님은 다른 쪽 방향으로 교인들을 실러 다니는 것입니다. 노인 분들은 원래 잠이 없지 않습니까? 봉고차 까지 오니까 새벽기도에 안 나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 싣고 와서 기도를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기도를 해주고 데려다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365일 매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엄청나게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그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1,000명 2,000명이 될 수는 없었지만 거기 있는 노인 분들은 모두 모여서 거기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니까 목사님이 너무 걱정이 돼서 봉고에 체인을 감고 나갔습니다. 저기서 노인 한 분이 눈길에 엎드러져서 울고 있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이제 교회 나가면 몇 번이나 더 나가겠냐? 눈이 와도 나가려고 새끼줄을 신발에 다가 묶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힘이 없어 못 올라가서 거기서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분들 한 분 한 분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성을 다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교회가 기억에 남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도 완전 시골은 아닌데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도 띄엄띄엄 있고 하여튼 목회가 재미없는데 어느 날 도대체 하나님. 나는 언제까지 교회가 이래야 되겠습니까? 교인이 그저 3~40명이 모이고 이러는 교회인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한 번 지역을 이렇게 보니까 전도 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다 일하러 나가고 어른들도 없습니다. 왜 없나 했더니 비닐하우스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모님이 고물상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거의 고철 값에 나온 빵 기계 하나를 샀습니다. 반죽을 해서 빵을 구워가지고 200개씩 만들어서 그것을 봉지에 담고 커피를 타서 화요일마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다가 이 사람들이 출출할 시간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니까 처음에는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가 했는데 출출하던 차에 ‘집에서 방금 구운 빵입니다. 하나씩 드시고 커피 드시고 일하세요.’ 어차피 먹을 때니까 하나씩 먹고 이야기하면서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몇 천 명이 된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배 이상 커졌습니다. 그것을 하루만 한 게 아니라 매주 쉼 없이 하니까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모든 주민들이 목사님을 다 잘 알고 평판이 좋게 났습니다. ‘추수감사절입니다. 교회에 오셔야 됩니다.’ 하고 광고를 하면 이 사람들이 만 일을 제쳐놓고 부조금 봉투 하나씩 들고 우리에게 잘 해 줬으니까 추수감사절하고 예수 탄생하신 날은 부조하러 가야된다고 동네사람들이 다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술입니다. 해도 안 될 때 똑같은 상황 속에서 훌륭하게 하는 교회가 어느 교회인가 누가 그렇게 해 냈는지를 연구하면서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가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더니 할머니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진짜 나쁜 애들이구나.’ 왜요? ‘그 좋은 예수를 왜 이제 와서 전해주니?’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잘 한다는 것은 정성을 들이는 것, 기술을 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착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착하다’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이 어떤 때에 자녀들을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착하구나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내 마음대로 움직여 줄 때입니다. 엄마가 아무 말도 안하고 외출을 했다가 연락도 못하고 밤에 들어왔는데 혼자 밥을 다 챙겨먹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 자기 방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착하구나. 우리 아들. 정말 착하다.’ 그 다음에 뭐라고 말 합니까? ‘뭐해줄까?’ 그러지 않습니까? ‘정말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에게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했을 때 우리는 착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착하다는 것은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구나.’ 그런 뜻입니다.
목회를 열심히 하면서도 못된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친구는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친구는 모나고 거칠고 자기를 무시하고 이러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친구는 항상 부드럽고 친절하고 마음이 몰캉몰캉해서 자기를 잘 받아드려 주는 사람하고 친구를 하지 말끝마다 거칠고 예의 없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하고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될 때는 있지만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잘 하면서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 주견이 있습니다. 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쪽으로 뻗어나가게 되면 아주 거칠고 사람과 부딪치는 것입니다. 교인이 200명만 되면 어디 가서 앉아서 누구 얘기 들으려고 안합니다. 그것이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개신교 목사들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착한 게 아닙니다. 착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인에게 일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고 모든 기술을 다해서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거칠어진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인에게 착한 사람이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과업에서도 승리를 하고 성품에 있어서도 승리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목회를 많이 하고 나서 정말 상처를 받고 거칠어져서 포학한 사람으로 목회를 끝낸다면 사역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신앙에는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착한 종들이 됩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되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해서 더 많은 이익을 남겨서 주인을 기쁘게 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은 자기가 정말 이루어야 할 사명을 위해서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그것이 충성입니다.
한 10여 년 전에 폼페이(Pompeii)의 유물이 한국에 와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옛날 로마에서 2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폼페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옆에 베수비우스(Vesuvius)라는 화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화산이 부지직 부지직하고 나온 게 아니라 팡하고 폭발을 해서 터지면서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화산재가 폼페이라는 도시를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 때 도시는 한껏 올라가 봐야 2층 이니까 2층 높이의 건물들이 모두 뒤덮여서 그 도시의 존재가 전설 속에 남아있었지 실제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발굴을 하면서 유적지가 나왔습니다. 지금 발굴을 한 것이 7분의 1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어마어마한 도시입니다. 거기서 발견된 사람의 흔적들이 도자기 형태로 나옵니다. 아이를 안고 죽은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할 것 아닙니까? 터졌을 때 위험하니까 도망가다가 시뻘건 불덩어리와 재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사람이 불에 타서 녹아버린 것입니다. 위에서 불덩어리 같은 흙이 사람을 싸고 쏟아졌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다 타서 녹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속에 공간이 생길 것 아닙니까? 그 공간 속에 석고를 집어넣어서 그 껍질을 깨니까 그 형상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쏟아질 때 어린 아이를 앉고 웅크리고 죽은 여자의 모습도 나오는데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거기에서 궁을 지키고 있던 병사였습니다. 불벼락이 쏟아지는데 꼿꼿이 서있는 자세로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병사가 죽었습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목회자들을 서로 부러워하지만 하나님이 꽃길만 걷게 하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영광을 누리는 사람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픔과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겪습니다. 그런 고통이 엄습하고 오래 지속될 때에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변절하거나 자신의 사명을 버리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이 많이 와도 꿋꿋이 견디면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성취되기를 분투하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나 결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겼다는 말만 나오지 그렇게 이익을 남기기까지 어떻게 고통을 겪고 수고를 했는지는 안 나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동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교회가 보일 때 마다 동료들에게 마차를 세우고 ‘우리 모두 저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한 목회자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이 일구게 하신 교회니까 그것을 자기의 아픔처럼 생각하면서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창인 목사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여기에서 충성되다는 것은 고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난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양떼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마음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잘 하자. 다음에 착하게 되자. 마지막으로 충성되자 이 세 가지인데 마지막 결론으로 뭐라고 하였습니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의 종입니다. 종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희랍어로 ‘둘로스(δοῦλος)’ 라는 단어인데 ‘노예’라고 번역해야 맞는 것입니다. 종하고 노예하고는 다릅니다. 원래 희랍어 원문이 노예인데 영어성경이 제대로 번역된 게 킹제임스버전(King James Version)인 1611년 이었습니다. 그 때 영국학자들이 모여서 ‘둘로스’를 번역할 때 노예라는 단어인 ‘슬레이브(slave)’로 번역을 해야 되는데 번역을 못했습니다. 그때 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노예들을 생각할 때 콤플렉스도 있었고 그 노예가 너무 비참하다는 것 때문에 ‘서번트(servant)’라는 점잖은 단어를 썼는데 당시에 ‘종(servant)’은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두 대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예하고 머슴은 다릅니다. 머슴은 무엇을 받았습니까? 세경을 받았습니다. 머슴이 사람대접을 잘 못 받았지만 그저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그 집에서 세경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아무 소유가 없습니다. 때려 죽여도 죄가 안 되고 노예들 둘이 결합을 해서 자식을 낳아도 마치 자기 집에서 개가 새끼를 낳은 것처럼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게 노예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의 노예입니다. 채찍이 무섭고 형벌이 무서워서 종살이하는 노예가 아니라 예수의 사랑에 포로가 된 노예입니다. 사도바울이 즐거이 자기를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나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 된 바울은’ 바울은 서신서 마다 자기 신분을 밝혔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목을 걸어서 너는 내 노예 하라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붙들려서 그 사랑 아니면 자신이 이렇게 생명을 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붙잡혀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화)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한 20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교회가 작은 교회는 아니고 한 300명가량 모이는 교회였는데 저를 강사로 데려가서 숙소를 얻어주었습니다. 방에 들어갔는데 너무 잘 수가 없는 방이었습니다. 여관이었는데 한 쪽 벽이 새까맣게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그것까지는 견디겠는데 온갖 잡스러운 사람들이 다 와가지고 추잡한 일을 다 하는 그러한 여관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자야 되나 하고 생각하면서 한편 생각으로 약간 분하다 그럴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 자기 보고 여기 와서 자라 그러면 잘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쨌든 차도 안가지고 갔으니까 꼼짝없이 거기에서 잤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밤을 자려는데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한참을 회개기도를 하고 잤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잠이 안 오면서 들려오는 생각이 그래 이 숙소가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너는 잊었니? 너는 상전이 아니라 나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다. 일어나서 한참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하나님. 제가 제 본분을 잠깐 잊었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서도 교인들 데리고 와서 하얀 종이라도 몇 개 바르고 가든지 다른 방을 달라고 하든지 하는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아마 그 여관에 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잊지 맙시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 하나님의 사랑에 부름을 받은 노예들입니다.
복습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잘하자. 착하게 되자. 충성되자. 우리가 종임을 잊어버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