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수련회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스7:10)
녹취자 : 조원정
성경 전체에서 사실 교사들에게 적합한 말을 찾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우리 담임목사님이 이 구절로 교사들에게 큰 감동을 주신 것이 있어서 저는 그 후로 이 말씀을 교사들에게 가르치는데 많이 활용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벨론이 유다를 함락한 후 나라는 꼭두각시 정권을 거쳐서 완전한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 및 지도자에 영향이 되는 모든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잡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다니엘의 이야기가 이 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70년 정도 세월이 흘렀을 때 꿈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성을 수축하고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포고령이 내리게 됩니다. 포고령이 내리게 된 이유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던 제국이 종교적인 화해나 혹은 융합을 통해서 제국을 통치하게 용이하도록 하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 문제를 이용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고레스 왕의 칙령을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지도자 몇 사람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주도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이 스룹바벨이란 사람에 의한 1차포로 귀환이 이루어 졌고 두 번째 포로 귀환이 바로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된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성전을 재건할 사명을 가진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인지 오늘 10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을 연구한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정치적으로 보면 자신은 어마어마한 미션을 띠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방해를 무릎 쓰고 성전을 건축할 미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적인 협박과 위협,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 했으니 이스라엘의 복원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수많은 종족들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집요하게 방해하였는지를 느헤미야 같은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에 둘러 싸여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결심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더 많이 연구하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과업이 주어지고 일의 중량감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에스라가 결심한 것은 일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한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려면 길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교사는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지만 내가 교사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교사를 해도 되나 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의사가 얼마나 인간의 몸에 대해서 모르는지 안다면 병원 오는 환자들이 겁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아이들이 교회 오는 것을 겁나게 할 정도로 여러분들은 무지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교리학교를 거치지 않으면 정교사가 될 수 없으니 다행이지만 그것 교리학교 여러분 가운데 소수를 빼놓고는 대부분이 날라리 비슷하게 졸업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몇 분은 정말 고등학교 때 수능 보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교리 반에서 수석을 한 어느 청년이 하는 말이 고 3때도 이렇게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인정해 줄만 합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기독교 교리요약』(A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을 닳도록 읽었고 그보다 좀 더 두꺼운 “Manual of Christian Doctrine”을 여러 번을 읽고 나중에는 두꺼운 루이스 벌코프의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조직 신학에 도전한 사람은 제대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그 정도는 읽어줘야 합니다. 옛날에 나왔던 스타크래프트 매뉴얼이 500페이지였던 것을 기억해 보면 알 수 있고 아이폰(iPhone) 매뉴얼도 모두 적으면 700페이지에 못 들어 갈 겁니다. 서비스 센터에 있는 사람도 잘 모릅니다. 하물며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책을 멀리하고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교리반을 양심의 가책이 될 정도로 날라리로 졸업했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가을에 제가 인도할 테니 꼭 오셔서 마지막 기회를 붙잡으시고 새롭게 정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연구했다고 하지만 어디 그 사람이 율법만 읽었겠습니까? 율법을 해설한 책도 읽었을 것이고 선배들의 글도 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중에 한 달에 한권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 교사로서 약 5년 정도 봉사했으면 최소한 40권 들어가는 책꽂이 칸에 두 칸 정도는 성경과 신앙, 어린아이, 청소년의 심리 상태나 발달에 대한 책들이 꽂혀 있어야 합니다.
옛 말에 개장수 하려고 해도 오랏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밑천이 있습니까? 한번 내가 학생들 시켜서 뜻밖의 질문 한번 해도 됩니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입니다. 책을 손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책을 읽되 성경과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로 결심하는 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에스라가 한 일이 율법을 준행하며, 했습니다. 동사가 얼마나 재밌습니까? 사역 동사가 아닙니다. 남들에게 율법을 준수하도록 시킬 것이며, 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율법을 실천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가르침의 풍부화는 가르침의 풍성화는 삶의 방식에서 온다.” 삶의 포르마(forma), 양식이 어떠냐에 따라서 가르침은 풍부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기도에 큰 도전을 받고 아이들이 왜 기도 안하는지를 이해했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기도할 수 있는지를 알아냈고 기도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기도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선생님은 공과와는 상관없이 하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삶의 양식이 기도하는 생활이니까 가르칠 말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기도만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의 만물을 선의로 대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경건을 실천하고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누구입니까? 아이들이 됐으면 좋았을 삶을 자신이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진 교사는 자신이 이런 인간이 되어야 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되지 못할 때 가슴 아파 눈물로 기도하고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모든 교육 중 가장 깊은 영향을 오래도록 끼치는 교육은 삶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잘못했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교육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 눈앞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교육은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면 끝납니다. 이제 아이들은 야단치고 가르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면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것이 제일 어려운 교육입니다.
오늘 에스라는 율법을 행했습니다. 실제로 율법을 연구한 것이 남들 좋은 일 시키려고 연구한 것이 아니었고 열심히 탐구해서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놀랍다. 저 사람 어떻게 지식이 저렇게 많을까? 박수를 치고 싶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로 한 것은 에스라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지만 마음에 존재의 울림을 주는 교사는 얼마나 소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수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다 망가진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훌륭한 선생님 한 분 만나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도저히 인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아이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교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돈을 몇 십 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돈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학문을 한없이 터득해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지식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이 일은 할 수 없고 한 나라의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명령을 통해서 새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는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음에 손을 얹고 우리가 말로만 많이 선생이 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로 결심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로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렇게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한 마지막 열매가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고 했는데 율례와 규례는 어떤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하기를 율례는 율법을 지키는 구체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규례는 제사를 지내는 규칙을 가리킨다고 해석을 합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율례와 규례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구체적으로 지키고 준행하기 위한 세부적인 실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보면 에스라는 자기만 알고 있는 율법을 웅장하게 선언하고 끝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삶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고 믿고 행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적용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교사들이 바로 이 일을 해야 됩니다. 웅장하게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선포하고 아이들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헤어진다면 그 교육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그 말씀을 삶속에 적용하며 살 수 있도록 풀어주는 데 능숙한 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까? 두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한 사람이었고 그의 사랑과 깊이와 넓이는 10장에서 17절 이하에서 44절 까지 이스라엘의 타락하였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에 보인 그의 지도력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이 범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그 범죄를 저지른 죄인 본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과 사랑으로 하나 된 교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스펄젼 목사님의 비유에 의하면 율법의 바늘로 복음의 수시를 깨어 수를 놓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인 어린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더 사랑이 가는 아이가 있고 덜 사랑이 가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도드라지게 표를 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에게 애완동물에게 과자 하나 혹은 먹을 것 하나 던져 주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대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그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19년 되던 해에 『교사 리바이벌』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저의 얼마 안 되는 교사 생활을 통해 터득하게 된 진리를 표지에다 썼습니다. 하루에 두 번 펑펑 울 수 있는 교사는 안전합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리드소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맡겨진 영혼은 안전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 양을 지키는 목자처럼 그 영혼들을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한 목자임에 틀림없고 용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연약하지만 사랑이 그를 용사가 되게 만들었으니 마귀의 모든 궤계로부터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양떼를 지킬 것이고 모든 비 진리와 부패로부터 아이들을 막아 낼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어떤 태도로 가르쳐야 합니까?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반드시 참된 회심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아마 특히 소수의 교사들을 빼놓고는 주님을 만나는 회심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복된 경험이 일어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친 내용으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그 말씀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찌르도록 그들이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사실에 깊이 은혜를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도록 그 회개가 삶으로 나타나 구원에 이르도록 그런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심 없이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고 우리가 만약 참된 회심이 없이 아이들을 기독교문화에 길들이게 한다면 그것은 맹수를 그냥 조련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야성이 살아나는 순간에 얽매였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뛰쳐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서 아이들이 참된 회심에 이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한 7년 전에 인턴십 과정을 하면서 숙제를 내줬습니다. 여러분이 맡고 있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중고등부, 유년부, 초등부, 유초등부, 고등부,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한 달 여유를 줄 테니 한 사람 한사람을 면담을 하던지 교사를 통해 하던지 아이들이 몇 명이나 참된 회심을 경험하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조사를 해 보십시오. 한 달 후에 나누는 시간에 전도사님들 얼굴이 모두 백짓장이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 예만 들겠습니다. 45명 정도의 유초등부를 맡고 있는 그렇게 크지 않는 작지도 않는 교회의 교역자였습니다. 자신을 걔네들이 얼마나 구원 받았을까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목회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과 함께 합동으로 아이들이 정말 구원 받았는지 조사를 했는데 신학생으로서의 양심을 따라 판단할 때 45명 중 오직 다섯 명만 구원 받았다고 생각되는데 그중에 세 명은 확실하고 두 명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머지 40명은 전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중에 상당수의 아이는 자신이 직접 면담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90퍼센트 넘는 아이들은 전혀 구원 받지 못했는데 우리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먹고 마시고 놀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르치고 세월 허송하다가 얘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됩니다. 나이가 먹어 올라갈수록 마음은 강퍅해 지고 하나님이 있다는 인식은 굳어지고 신이 없다는 생각은 굳어집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맡겨준 아이를 이 아이의 인생에 마지막 회심의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회심하지 않은 아이를 그대로 올려 보내는 것은 교사로서 매우 뼈아픈 직무 유기입니다. 충분히 그 아이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회심에 이르도록 어린 아이를 낳은 산모처럼 고통하며 아파하며 그 아이들을 생산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여러 번 수술을 경험했지만 가장 힘들었던 수술이 세 번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번은 다른 사람들이 다 병이라고 쳐주지도 않는 수술이었습니다. 편도선 수술이었습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심방도 안 갑니다. 생명에도 지장이 없고 불과 이틀 삼일이면 퇴원하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수술하고 집에 갈 정도로 하찮은 병입니다. 그것은 정말 자기가 그런 수술을 안 받아 본 사람입니다. 담임 목사가 편도선 수술을 받았다니까 사람들은 걱정은 하지만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수술하고 의사가 당부를 했습니다. 목을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당부를 어기고 일주일 만에 큰 소리로 설교를 했더니 어느 날 후드득하고 실이 끊어졌습니다. 길거리에서 한 컵의 피를 쏟았습니다. 이주 동안 꼼짝도 못하고 강원도에 가서 누워있는데 세상에 뭐든지 귀찮습니다. 너무나 아팠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진통제 주사를 가지고 와서 밤중에 내 자신의 엉덩이에 주사를 꽂으면서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습니다. 별로 사람들이 공감을 안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사님 한분이 오셔서 손을 잡으시면서 “목사님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저는 애 낳는 것 보다 그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이분은 나처럼 열꽃이 확 피어가지고 편도를 도려내는 경험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제 편도는 의사 선생님이 20년 의사 생활하면서 자기가 의사되어 가지고 이렇게 큰 편도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도려냈습니다. 이거 경험한 사람만이 나를 붙들고 온 인상을 쓰면서 목사님 너무 불쌍하다고 얼마나 아프냐고 합니다. 입원해 누워 있는데 어느 자매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자매님입니다. “목사님 아프시죠?” “오. 그래. 많이 아프다.” “아이 낳는 것은 훨씬 힘듭니다.” 하고 갔습니다. 아이 낳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이야기 했겠습니까?
영혼을 거듭나도록 회심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은 아이를 출산하는 수고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많은 고통 속에서 우리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그렇게 아파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십니다. 여러분들이 영혼을 그렇게 참으로 사랑으로 가르치고 참된 회심에 이르도록 해산의 고통을 지불하며 가르쳐서 새사람 만드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