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섬김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3-9)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함께 계셨다고 했는데 누가복음 7장에는 이 기사와 똑같이 시몬의 집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나병환자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식사를 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당시에 율법이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사람은 나병에 걸렸다가 지금은 완쾌가 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병이 나아서 그 은혜가 감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으니 아마 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집에 초청하고 식사까지 대접하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예수님을 집에 모셔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추측이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나병환자가 시몬이나 바리새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초청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청객으로 끼어 든 한 여자에 우리의 시선이 꽂히는 것입니다. 똑같은 기사인 누가복음 7장에서는 이 여자를 가리켜서 예전 성경에서는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고 이번 번역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죄를 지은 여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죄는 매우 특별한 죄를 가리킬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사람을 창녀요 기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여자는 식사자리에 초대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수님이 식사하는 자리에 와서 앉지도 못하고 대접을 받지도 못한 채 보여준 어떤 행동들이 우리의 섬김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듭니다.
나는 오늘 이 여자의 섬김을 통해 배우는 교훈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침묵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여기는 예수님의 대사와 바리새인인 시몬의 대사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사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 주목받고 있는 주인공 같은 이 한 여자의 대사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향유를 가져 왔다든지 눈물을 흘렸다든지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든지 하는 말없는 섬김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11시 예배에 잠깐 왔다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부분 충성하고 있거나 예전에 크게 충성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어도 사람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만 안하면 상처로 말하자면 그냥 살짝 긁혀서 놔두면 아뭅니다. 그런데 상처가 덧나서 작은 상처였는데 결국 발가락을 자르거나 팔목을 절단해야 될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가 말로 덧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군을 세울 때 말에 절제가 없고 분별이 없는 사람에게는 교회에 중요한 직책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비록 교회에 돈도 많이 내고... (7:13~7:29 예배태도로 혼내심) 교회에서는 말에 절제가 없고 말에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 직접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도 누군가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 상처를 매우 덧나게 해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문제를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이 여자에게서 배우는 것은 침묵하는 섬김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였을 때 공동의회를 하는데 시끄러웠습니다. 얼마 안 되는 교회 재정을 가지고 감 놔라 팥 놔라 하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한마디가 좌중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발언을 하시는 건 좋은 데 십일조 안 하시는 분들은 발언하면 안 됩니다. 돈도 안내고 무슨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내십니까? 많은 헌금 생활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말을 별로 안합니다. 공동의회 시간에 재직회 때 어떤 사람들이 나와서 큰 소리로 떠들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뒤에 가서 한 번 찾아보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놀라운 일치점이 십일조를 안 하거나 하다 말았거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여자는 조용히 말이 없이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을 가지고 연극을 해 보신다면 연기에서 이 죄인인 한 여자의 역할을 맡으신 분은 아마도 자연스럽게 눈물을 펑펑 쏟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큰 물질을 예수님께 섬기느라고 바쳤는데 돌아온 것은 제자들이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푼수때기 여편네 같으니라고.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을 텐데. 저걸 푼수 같이 한 끼 식사에 다 쏟아 부어버렸다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내꺼 내가 쓰는데 여러분들 같으면 한마디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예수님 섬기는데 네가 보태준 것 있냐? 할 말이 많은데 그 모든 무시와 비난을 조용히 감당하면서 자기 할 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가 교회인데 왜 이런 저런 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침묵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은 깊이 말없이 침묵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와 같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침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최선의 것을 드린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옥합에 담겨져 있는 향유를 가져옵니다. 당시 이 향유는 언제든지 돈이 필요하면 시장에 들고 가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유동성이 있는 재화였습니다.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사람들이 이 향유를 모은 것입니다. 오늘 그것이 300 데나리온의 가격쯤 될 거라고 제자들이 감정을 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는 돈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데나리온은 성인 남성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노동을 해서 받을 수 있는 하루의 품삯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기술이 없이 공사장에서 무거운 짐만 날라주는 건장한 남성의 경우 8시쯤 일을 시작해서 5시에 일이 끝나는데 15만 원 정도를 안 주고는 사람을 못 구합니다. 해 뜨는 시각을 2시간 뒤로 잡고 해지는 시작을 1시간 늦춰 잡는다면 지금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20만 원 정도가 한 데나리온이라고 봐야 됩니다. 거기에 300을 곱하면 6,000만원이고 일 년 치 연봉입니다.
그 여자가 향유를 왜 모았을 것 같습니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모을 때 무슨 목적으로 물질을 모읍니까? 앞으로 불가피하게 그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궁핍의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모으거나 이제껏 살았던 삶을 청산하기 위해서 물질을 모으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 여자는 아마 화류계에서 그것도 어마어마한 부잣집 사람들이 드나드는 룸살롱이 아니라 주막집 같은 데서 술이나 받아서 팔던 여자로서 그것은 너무 비참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 중에서 가장 인간으로 안 보는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시대 때의 세금제도는 지역을 할당하고 얼마를 걷어내라고 지시가 떨어지면 세리가 그것을 거둬들이는 방법은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주는 정식적인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세리 자신이 알아서 챙겨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원하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거둬서 그 돈을 착복함으로써 대부분 세리들은 부자였습니다. 인간 취급을 안 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창녀요 기생이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조나’라고 하는 이런 종류의 여자들은 비참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동족이 아닌 이방인과 여자가 몸을 섞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업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겠습니까?
묵상을 해 보면서 이런 그림을 그려봅니다. 아마 이 여자는 그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힘들게, 힘들게 돈을 모으고 언젠가 목표하는 돈이 모이면 이 부끄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가서 땅이라도 좀 사가지고 농사라도 지으면서 살고자 하는 인생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향유를 깨뜨려서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한 끼에 6,000만 원 짜리 향유라고 한다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이 여자는 그 6,000만원의 향유와 함께 그 보다도 더 값비싼 눈물의 향유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었고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섬김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린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는 선물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데 큰 선물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뇌물이거나 그 선물 주는 사람을 향해 매우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한 거다 그렇게 생가하면 안 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정주영 씨가 특강하는 것을 직접 들었는데 자기는 지금도 가정주부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데요. 라디오가 있으면서도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 집안에 실제로 있던 실화를 나는 들었습니다. 그 아들 중에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회장이었습니다. 그 분을 모셨던 우리 교인이 얘기를 하는데 호텔로 오라고 해서 갔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남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절대 작은 방에 안 묵고 하루에 4-500만원 하는 커다란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묵습니다. 갔는데 소파 위에 팬티 빤 거 양말 빤 거 그런 것들이 죽 늘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장님. 이게 무엇입니까? 그냥 세탁 맡기시지 그러셔요?” 그러면 “아이! 그게 잘 안 돼. 아버지 때부터 배워서.” 그런 사람들이 돈이 많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큰 선물을 그냥 우연히 주겠습니까? 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떤 큰 선물을 누군가에게 받았을 때에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뇌물이거나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매우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거나. 뇌물이면 빨리 돌려보내야 되고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 친구 돈 좀 벌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짜 특별한 마음이구나.’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예화) 주후 110년 안디옥에 정말 존경받는 인물인 한 교부가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도 그를 깊이 존경을 했습니다. 그러다 로마 조정을 비판한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투옥이 됐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심하게 로마 정부에서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아가기 전에 구명운동을 했습니다. 그 분이 워낙 불신자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투서를 올렸고 로마 조정이 마음이 곧 움직일 것 같은 기미가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로마 정부의 마음이 움직일 것 같습니다.” 안디옥의 모든 시민들이 선생님을 구원하는 탄원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그 일을 그만 두어라.” “선생님. 왜요?” “나는 이제 살만큼 살았고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바치고 싶었는데 이번에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그것은 순교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는 대충 봉사하는 사람 100명이 모여도 우리의 마음을 쿵 하고 울리는 간증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에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간증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라고 하는 간증입니다. 매일 매일 저는 목회현장에서 봅니다. 공부도 별로 못하시고 인물도 별로 없으시고 나이도 젊지 않으시고 부자도 아니신데 매일 매일 간증이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 구역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것을 드리는 섬김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물질이 있었습니다. 뭇 사내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면서도 매일 매일 늘어나는 향유를 볼 때 언젠가는 이 수치스러운 직업과 이별할 꿈에 부풀게 하던 물질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것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자기가 비로소 정말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사랑은 향유에서 예수님에게로 옮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니까 나머지 사랑하는 것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정한 사랑은 그 이상의 목표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둘이 사랑을 합니다. 자매가 형제에게 물어봅니다. 결혼을 할 예정이고 날짜까지 받았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나 정말 사랑해?” “그럼 내가 너무 사랑하지.” “나는 얼굴도 그렇게 예쁘지 않은데 왜 내가 그렇게 좋아?” 그러면 정답은 “몰라.”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네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그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 자매가 형제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위해 늘 기도를 했는데 드디어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신앙이 좋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공부를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해서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20대에 박사까지 했습니다. 공부를 잘 하고 신앙도 좋은 사람들은 가끔 있는데 대부분 집안이 별로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인데 할아버지는 더 부자입니다. 돈이 많은 집안은 교양이 조금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집안 식구들을 한 번 봤는데 품격 그 자체입니다. 그런 조건까지 다 갖추어져 있으면 콧대가 높아서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안 합니다. 그런데 너무 친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늘 희생적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잘 해주는 사람들은 센스가 좀 없습니다. 그런데 센스가 탁월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게 수동적인데 이 사람은 성격이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면서 모든 것을 갖춰서 그야말로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백마를 탄 왕자님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굴이 조금 빠집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외모를 볼 때 어디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찾아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키가 조금 작은 게 흠이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은 키도 훤칠하게 큽니다. 그 사람이 자기한테 그렇게 잘 해주면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성이시잖습니까? 아직 결혼을 안했다고 하면 그런 남자를 만나면 사랑에 빠지겠습니까? 안 빠지겠습니까? 사랑에 빠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는 결혼 했는데도 빠질 것 같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겠습니까? 안 빠지겠습니까? 안 빠집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눠지지 않고 상위의 목표가 없어야 됩니다. 고백이 너무 진실했는데 마지막에 ‘네네 아버지가 부자잖아.’하는 그 한마디로 결국 이 여자와의 사랑은 장인어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사닥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너무 사랑하는데 여러 명도 아니고 딱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러면 둘로 갈라집니다. 그때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둘 다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향유에 마음이 집중 돼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허비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이 여성에게 주님을 향해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릴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가슴이 뛰십니까? 우리교회 어떤 성도님은 결혼한 지 20년이 됐는데 아직까지도 남편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정신 나간 여자라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부부들 많이 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시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나 어렸을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니 그렇지 않다면 죽음이나 다름없으리” 그런 식으로 시를 썼습니다. 여러분들의 방금 웃은 웃음이 무슨 의미입니까? ‘20년 살았는데 무슨 가슴이 뛰기는 개코.’ 그렇게 가슴이 뛰면서 사는 부부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몇 년이 흘렀을 것 같습니까? 집사님. 40년? 맞습니다. 한 38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부부는 마지막으로 말다툼을 한 게 22년 전입니다. 현실을 깨보십시오. 그런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 뛰는 그 무엇,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먹게 만드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 이 여자에게는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이 기념하시고 싶은 섬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보고 분개하면서 저 푼수 없는 여편네가 저 엄청난 6,000만 원 이나 되는 향유를 쏟아 부어버리다니.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서 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잘 모르겠는데 오늘 끝나고 같이 밥을 먹을 거죠? 그런데 목사님하고 나하고 가서 6,000만 원 짜리 식사를 했다면 여러분 동의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6,000만 원 짜리 식사가 어디 있나? 있습니다. 중국에 몇 년 전에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1인당 식사 한 끼에 4,980만 원 짜리 식당이 있었습니다. 그 식당을 독일사람 12명이 와서 6억 원을 내고 점심 회식을 했다고 합니다. 가자마자 제일 처음 제공되는 것이 아주 귀한 한 잔의 차와 두 개의 만두가 제공되는데 그 첫 번째 코스의 가격이 250만 원이라고 합니다. 9코스에 걸쳐서 요리가 나오는데 그 요리의 가격이 4,980만원입니다. 3,000만 원이면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껌 값입니다. 여러분들이 설교에 다행히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쳐봅니다. 그래서 교회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고 목사님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강사에 대해서도 아주 좋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쳐도 우리가 가서 6,000만 원 짜리 식사를 점심때 했다면 그런 좋은 감정들이 순간에 분노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놔 두어라.’ 제자들이 볼 때에 예수님이 진짜 존경스러우시려면 어떠했어야 됐습니까? 향유를 막 부으려고 할 때 ‘에! 아깝다.’ ‘나는 필요 없다.’ 아니면 ‘그냥 한 방울만 뿌려라. 그리고 그것은 갖다 팔아서 제자들에게 현금으로 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게 내 몸에 향유를 양동이로 더러 부운 것과 같다.’ 그럴 때 ‘오! 예수님은 정말 다르시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6,000만 원을 그야말로 허비하십니다. 그런 문제 제기를 한 번도 안 해봤을 것입니다. 우리 둘이 6,000만 원 짜리 식사를 점심에 하고 3,000만원은 내가 내고 3,000만원은 목사님이 내고 하면 사람들이 기절을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갸롯 유다의 속셈도 있었지만 그 혼자 한 게 아니라는 게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이 제자들의 반응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반적인 인식을 예수님은 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고 싶었던 것은 당신이 그 향기로운 향유를 확 뒤집어쓰고 싶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곧 죽으실 예수님께 그것이 무슨 큰 호사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시 싶었던 것은 이 여자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모든 최선의 것을 드려서 섬긴 그 섬김이었습니다. 그 섬김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막 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높이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가 흘러가도 누군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알게 되면 이 여자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에 최선의 것을 드려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요새도 교역자 때문에 계속 마음의 근심을 하고 있는데 ‘저기 자리가 비었는데 좋은 교역자가 와야 될 텐데.’ 오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에 안 차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은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올 지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 아무개 진짜 잘했는데, 그런 친구 어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교역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가족부를 너무 잘 섬기시던 한 분이 멀리 이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이 와서 일을 하는데 영 아닙니다. 침묵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최선의 것을 드리지도 않고 기념해야 할 이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바뀌면서 자꾸 사역이 찌그러드는데 그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때 새가족부를 맡았던 박아무개 집사 정말 잘했는데.’ 저희 교회는 부교역자들이 한 서른 댓 명 되는데 정말 충성스럽게 사역을 합니다. 저는 그렇게 큰 불만이 없습니다. 특별히 속을 썩이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신령한 복을 받는 목회를 하고 싶다면 이런 사람이 되라. 세월이 많이 흘러간 다음에 담임목사님이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회상할 때 눈물이 고이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목회에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목사님 교회, 이것은 교인들의 교회 이렇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하나의 교회입니다. 여기에서 충성하는 것은 다른 교회에 가고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당신의 집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부교역자가 나중에 반성을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폭풍처럼 일이 닥치는데 자기는 뺀질뺀질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지금 내 목회도 아닌데 내가 여기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담임목사 이름을 날리게 해 줄 이유가 있나? 나는 지금 시간에는 어떡하든지 체력을 비축하고 지식을 비축하고 목회의 기술을 배웠다가 내 이름으로 간판을 걸고 목회를 할 때 그 때에 쏟아 부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침에 출근을 해서 심방을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얘기 해 놓고는 여기저기 세미나 다니고 사우나 다니고 헬스클럽 다니고 내가 아니고 본인이 그렇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떠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를 시작을 했는데 목회의 고통을 겪으면서 제일 생각나는 장면이 ‘우리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괴로웠겠구나.’하고 생각이 들면서 회개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래도 회개를 했으니까 다행이지 회개를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교회에 계셔서 마지막에 장례식을 하고 돌아가실 분도 물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떠나갔을 때에 이 싱가포르 한인교회에 함께 있었던 교인들이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자모실에 와서 고개 푹 숙이고 핸드폰이나 보던 사람으로 기억이 될 것입니까? 아니면 헌금도 안하고 공동회의 시간에 핏대를 세우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까? 아니면 어떡하던지 장로 한번 되 보려고 용쓰던 사람으로 기억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되겠습니까? 오늘 이 여자처럼 많은 비난과 욕을 먹으면서도 주님을 섬기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말없이 헌신했던 사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사랑하는 예수님께 바쳤던 사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여러분들의 섬김이 여러분들의 헌신이 그렇게 기억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