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이신 하나님(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2)
녹취자: 김정규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은 이제 2절부터 5절까지 이어지는 2번째 토막에서 왜 자신이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러한 자세입니다. 아는 것 때문에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은혜로 믿고 난 후에는 왜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자신의 지성 속에 끊임없이 씨름하며 그것을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나오고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완전한 신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2절의 주제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동시에 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풀밭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아름다운 푸른 들판입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필드가 될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풍경화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들에게 그 풀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식량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이끌어 풀밭으로 데려가고 그 풀밭에서 눕게 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풀밭에서 충분히 꼴을 먹고 배부른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 풀밭에서 쉼을 취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의 풀밭은 미국이나 뉴질랜드의 풀밭과 같이 목초지가 풍부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목동들은 그렇게 물과 풀을 얻기 위해서 며칠 혹은 몇 주일 동안을 가축들을 이끌고 이동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이주민 생활을 하여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렇게 목축업에 필요한 풀밭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로는 한정된 풀밭과 많은 가축들 때문에 소유권을 놓고 다투기도 하지요. 그러나 양떼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풀을 먹고 쉬면 다음날 어디로 가야할지는 목동이 알아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날을 여러 날 보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따르는 사람은 적고 원수들은 매우 많았을 때, 그는 일행과 함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이외에 먹을 수 없는 성막의 진설병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광야피난의 생활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많은 고난의 길속에서 시인은 배고픈 설움을 누구보다도 많이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인생을 회고해볼 때, 자기를 그런 극한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이 풀밭은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선한 목동으로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에 그는 동산 높이 올라가 이 목초지에서 어디서 이동하여 양들을 풍부히 먹일 수 있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야 했습니다. 양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여기서 풀을 먹고 쉬다가 목자의 인도를 따라 그 인도를 신뢰하며, 따라가기만 하면 그다음 풀밭과 쉴 곳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들을 그렇게 염려할 것 없이 공급해주며 이끌었듯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배고픈 시절도 있고 외로운 시절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결국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이 시인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의로운 오른팔로 이끌어 주릴 때 먹이시고, 지칠 때 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일평생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맨 처음 주님께 부름을 받을 때부터, 이런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일평생 따랐겠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의 80여 편의 시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혹은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는 장면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존재의 근거를 ‘불안’에서 찾습니다. 즉,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6.25가 났을 때 미군들이 했던 좋은 일은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것입니다. 그런 많은 인물가운데 밴 플리프(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에 의해서 미국으로 이송된 고아들만 약 3만 명이라고 하니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도된 어린아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부모를 잃고 아주 비참하게 죽거나 병들거나 혹은 모진 목숨을 이어갈 희망이 없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자유의 나라를 선물한 것입니다.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들이 군부대의 수용되었고 아이들을 싣고 가기 위한 비행기가 3일후에 미국에서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미군들은 이 아이들을 데려다 깨끗이 씻기고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 옷을 입혀서 편안하게 생활하게 해 주었습니다. 밖에서는 먹어보지도 못했던 머리통만한 햄버거를 하나씩 먹고 잠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 중 아무도 잠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병사가 통역을 시켜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희 왜 못자니?” “잠이 안와요.” “자도록 노력을 해봐라.” 그리고 찬송가도 불러주고, 주기도문도 외워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잠들지 않느냐?” 했더니 그 아이 중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우리 내일은 뭘 먹어요?” 오늘 한 끼는 배부르게 먹었지만 전쟁터에서 오늘 한 끼를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다음끼니도 그렇게 먹을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배부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일 도달하게 될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이 아이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제 너희는 3일후에 너희를 태워갈 비행기를 여기서 만나게 될 것이며, 그때까지 여기서는 뭐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편하게 지내게 해주마.”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고, 아이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내일에 대한 믿지 못하는 불안감이 있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이 지혜로운 병사는 지휘관에게 이야기를 해서 내일 이 아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미리 가지고 와서 하나씩 모두 주었습니다. “이게 너희들이 내일 먹을 빵이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 빵을 가슴에 품은 채 하나씩 둘씩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오늘은 입고 쓰고 먹을 것이 있어도 내일은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불안한 것입니다. 없는 사람은 더 많이 갖기를 꿈꾸며 그 일이 이뤄지지 않을까봐 불안해하고,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결국 이 문제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해결이 될 수 있을까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J. 폴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을 헌납한 게티 가문은 1930년대에 중동에 진출해서 석유사업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모은 사람이었고,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부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게티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버시면 만족을 하시겠습니까?” “The more” ‘좀 더’ ‘좀 더’ ‘좀 더’
그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말씀드리고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내일 먹을 빵, 내일 마실 물통 하나만을 가지고 충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졌을 때는 그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해답은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다음에 질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언약의 구주로 믿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는 사람이 왜 그렇게 오늘에 대해 불안하고 내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신뢰관계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불안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 남편?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 다음으로 믿을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섬기며 살아가야할 대상의 자리를 다투고 있는 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물욕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의 중간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지침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천국 시민으로서의 삶의 헌장입니다. 산상수훈 전체를 딱 한구절로 요약을 하면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6장에서 맨 처음 시작할 때 “너희는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저축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 돈의 대한 의존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문제는 사람을 주종관계를 데려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이 사람의 종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너희가 돈을 섬기고 돈의 종이 된다면,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일 수가 있겠느냐?”며 돈을 사랑하게 될 때에 눈이 어두워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며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을 담당하는 지성의 기능과 좋고 싫음을 담당하는 이 정서의 기능은 둘이 매우 밀접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뜨겁게 세상을 사랑하면 이 지성의 판단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며 마지막으로 “이방사람들을 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봐라. 들의 핀 백합을 보아라. 길쌈수고 안하고 창고에 거둬들임은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가 돌보시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신뢰의 결핍이 끊임없는 물질에 대한 집착과 염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의지하며 사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것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마음을 다투는 이 두 숭배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 시인이 인격적인 신앙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면서 물론 염려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했지만 그래도 인생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염려와 근심을 그치게 하시고 당신 안에 있는 그 무한한 풍요로움을 따라서 공급받으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바였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어느 교회 권사님-기도도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하시는-이 늘 근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망태’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1950-60년대 전쟁 끝나고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만든 바구니-사람이 서너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크기-를 어른들이 메고 다니면서 큰 집게로 휴지, 양은 같은 고철을 주어 잔뜩 모아서 고물상에 갔다가 파는 것을 망태라고 합니다. 그 메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 예쁘거나 친절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울면 어른들이 ‘야! 울지 마라 망태할아버지가 너 잡아간다.’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망태를 메고 언덕을 올라가는데 앞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끊임없이 새까만 천 쓰레기를 계속 버리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것을 망태에 열심히 담는데 하도 많이 담아서 이제는 그 망태를 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망태에 깔려서 숨이 막혀 죽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계속 그 까만 쓰레기를 자기 등 뒤에다 담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게 근심, 염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근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근심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은 자기를 위한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라, 그리스도와 교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려입니다. 놀라운 것은 의학적으로 사람이 근심을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 해로운데, 우리의 몸이 근심을 하면 우리의 몸은 놀랍게 이 근심의 원인까지 파악을 한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에서 유명한 어느 의학자의 책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그 근심이 속되고 가치 없는 것일 경우에는 우리의 몸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고상하고 가치가 있는 염려에서 오는 스트레스인 경우에는 우리의 몸에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체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장수하고 무병한 것이 아니라, 좋은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한의학에서 침의 원리도 그런 것입니다. 침은 우리의 몸을 찌르는 순간 우리의 몸이 이물질이 우리의 몸에 침투했다고 믿고 온몸을 각성시켜서 거기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잠들어 있던 자신의 몸의 잠재력을 일깨움으로써 몸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염려가 아니라 탐욕과 관련되어 있을 때,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서도 더 많이 향락하고자 할 때, 인간은 그 욕망과 함께 신속하게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고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모두 주관하실 것이며,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인생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쁨의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또한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완전한 신뢰와 위탁 그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련과 깊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경고하고 나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작정하기로 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결국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나라 군대에게 멸망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최후의 날이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겁탈당한 처녀처럼 모두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황폐해진 때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한 시를 하나님 앞에 씁니다. 모두 절망하고 낙심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그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고 있다는 노래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심정을 울립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렇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지만 하나님이 그 그루터기를 통하여 참 이스라엘을 일으키시려는 역사의 개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진노조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무 의심 없이 엄마를 의지하듯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하나님이 자기의 가장 좋은 것으로 공급해주시고, 그가 이끄시는 모든 길은 최상의 길일 것이라는 믿음 아래서 그분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는 것입니다. 깊이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힘과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비록 지나온 날은 우리들이 알지만 내일 전개될 우리의 날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레는 더욱더 멀리 있고, 내년에는 10년 후에는 20년 후에는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올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미래에 대한 모든 예상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내 옆에 계셔서 나를 붙들고 계시며 나와 함께 하시며 어떤 경우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실 거라는 그 믿음을 우리들이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인생의 가장 곤고한 때에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공급해주시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즉, 약정을 알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나를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보면 이 구절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끄시며”의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메멘호트’(מְנֻח֣וֹת)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많이 목축했는데, 이 양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입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물은 마시지를 못합니다. 양은 헤엄도 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몸 자체가 긴 털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물을 무서워해서 물가로 못갑니다. 그러면 목동은 그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야트막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을 이제 돌멩이나 풀뿌리, 흙덩어리들을 이용해서 댐을 쌓습니다. 그러면 움직이면서 흘러가던 물이 그 댐에 걸려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흐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에 양떼들을 데리고 그 물 가장자리에 와서 그 물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창조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저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부러워하지만,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주고 남는 부분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며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한 사람이 아닌 다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다름을 쉽게 배려하지 않습니다. 학교교육에서도 일정한 공부를 시키고 성과가 오르는 사람들은 대우를 받지만 성과가 오르지 않는 학생들은 불이익을 받습니다. 똑같이 입사해서 조건을 주고 경쟁을 시켜 영업을 잘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대우를 받지만 처지는 사람들은 일단 하등한 사람들로 보고 모든 대우에서 소외를 당합니다. 세상에 모두 그렇습니다. 심지어 안 그렇다고 하지만, 부모들 눈에도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들은 좀 더 사랑이 가고 속 썩이고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정이 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자기의 자녀들을 그리스도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인 것을 알기 때문에 공정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고 그가 고통 받을 때 함께 고통 받으시며, 그의 인생에 굽이굽이 시련과 고난의 날들에 하나님이 함께 참여하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내 인생에 마지막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는 유일한 한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모든 인생의 절망은 외로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외로움은 우리를 끊임없는 소외와 좌절로 이끌어가고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좋은 것들을 포기하게끔 만듭니다. 신앙에 있어서 좋은 자존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분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인은 배고프고 헐벗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언제나 하나님이 이 시인을 들에 핀 백합과 같이 공중에 나는 새와 같이 돌보셨습니다. 기대하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시고 더욱이 영혼이 굶주리고 배고팠을 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사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자신을 다루면서 그렇게 약점이 있는 자신을 그대로 용납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생에 말년에 와서 자신이 살아온 심히 험악하고 고통스러웠던 인생의 여정을 회고합니다. 그때 오직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살아왔구나.’ 굶주릴 때 먹이시고, 헐벗었을 때 입히시고, 내게 모든 필요를 아시고 철을 따라 공급해 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신 것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분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시인은 고난의 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 인생의 말년에 우리 하나님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에나 고난에 가득 찰 때나 원수들에게 에워싸일 때에나 생사 간에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인 것을 굳게 신뢰하며 그분의 품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없는 돈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돈을 찾고 세상에 목말라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이 변화되어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에게는 모자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은 여러분들을 말씀으로 환경으로 설복하십니다. 오늘 부르시는 그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설복되어 그분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