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소생시킴 (1)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 김세나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는가를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목자로 모신 이유를 2절에서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3절에서는 보다 높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소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살아나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매우 중요한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영혼’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목숨’이라고도 번역되는 ‘네퓌쉬’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위대한 절을 설교하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에게 영혼에 대해서 몇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영과 혼은 서로 성경에서 교차적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맨 처음에 창조하신 장면에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인간을 흙으로 그 몸을 지으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아파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원래 ‘먼지’, ‘티끌’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그 먼지를 빚어서 하나의 인간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육체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 흙으로 만든 사람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어떤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숨으로 그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어넣으시는 이 행동은 영혼 창조하시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육체로 삼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을 만나게 해 주심으로 한 인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네페쉬 하야’라고 하여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흙으로부터 지으시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직접 창조하여 만드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 깃 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두 개의 자원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육체는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상의 자원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인간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육체는 이 지상에 있는 자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이 지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하면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지상의 자원으로서만 살 수 있게끔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이 지상에 있는 자원으로서는 필요를 조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천상의 자원을 끊임없이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은혜, 이러한 이 지상의 물질에 속하지 않은 천상에 속한 자원을 끊임없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이러한 영혼을 가지고 창조된 사실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 형상은 눈에 보이는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인간 영혼의 존재와 기능의 특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사 천상의 세계는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고, 지상의 세계는 인간에게 위탁하여 통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당신 자신처럼 인간이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당신 자신을 닮은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귀한 당신의 형상을 주어서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느끼고 당신처럼 판단하고 당신처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인간은 존엄성을 갖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존재론적으로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하고 죄를 지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영혼의 실재에 대한 거창하고 논리적인 담론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영혼의 실재 보다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우리에게 풍부하게 줍니다. 그래서 칼빈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와 같이 영혼에 대한 공부는 재미있고 매우 유익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도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아주 적은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매일 매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살아가고 죽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행복해 지는데,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너무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3절 본문을 모두 설교해야 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긴 담론을 여러분들에게 길게 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마음은 그 영혼의 기능이고, 그리고 마음의 기능은 인간의 육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어떠함이 마음의 어떠함, 심지어는 육체의 어떠함까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연관관계를 부지런히 탐구하는 분야가 생겨났는데, ‘슈퍼베니언스(supervenience)’라고 하는 수반 물리학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제가 유물론적인 것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중 중요한 것 안에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질과 정신, 마음과 육체, 이 모든 것들이 매우 밀접한 기능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로 이것들을 함께 작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여튼, 인간의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고등한 기능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입니다. 하등한 기능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욕구를 느끼는 자신의 본능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참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에서 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가 될 때, 그때 인간의 마음은 올바르게 작동하게 되고 그 올바른 마음에 의해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며, 마음과 삶이 일체가 되는 아름다운 인간상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최조의 인류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밀물처럼, 노도처럼 전 인류를 뒤덮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한 광휘를 거두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창조 세계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상당부분 거두어져 가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이것은 네 가지 관계를 파괴시켰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켜 생명적인 교제와 사랑이 끊어지게 만들었고,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렸으며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하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과 불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같이 되고자 한 인간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의 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파괴의 흔적이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된 존재로 태어나고, 하나님이 그 영혼에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시지 않는한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모든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지막으로 수렴해 가면 이것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로 귀결되고 인간의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귀결됩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의 한 모상으로서, 이미테이션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하셨던 사회는 바로 하나님이 최초의 두 인류를 창조하실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지만 두 번째 사람은 또 다른 흙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한 후 그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흙이 부족한 것도 아니신데 왜 공평하고 평등하고 남자도 흙으로, 여자도 흙으로 만드시지 않고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들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까? 이것은 이렇습니다. 인류가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다음 하나님이 그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오실 때, 아담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히브리 문학에서 이 표현은 “the choice of the best”를 의미합니다. 최고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내 뼈 중의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결혼식 주례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결혼식 주례의 소제가 될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고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는, 하와가 아담의 아내이기 이전에 최초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으로서 타자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온 인류의 씨앗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을 향하여 타자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모든 인류가 함께 고백했을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하와에게만 했을 것이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난 가인에게도 했을 것이고, 가인이 아벨에게도 했을 것이고, 셋에게도 했을 것이고, 퍼지는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그 모든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마지막 그림은 모든 사람이, 모든 인류가 구원받은 상태에서 서로를 향하여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완전한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파괴된 하나님의 나라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다시 말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담과 하와의 고백, 그리고 온 인류가 모두 빠짐없이 고백하는 이 고백 사이에 이행하는 한 사회를 두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러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는 사회를 꿈꾸며 그렇게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를 선취적으로 앞당겨서 누리는 것을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사랑의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타락한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사랑의 사회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망가진 그들의 영혼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이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시인같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한 때는 자신의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던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다윗이 쓴 80여 편의 시 속에는 아주 기쁨 속에서 찬양하는 장면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러 있는 고통스러운 탄식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격려를 줍니다. 자, 그러면 ‘소생시키시며’라는 말이 ‘살아나게 하시며’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언젠가 그의 영혼은 죽은 적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여기 컵의 뚜껑이 있다.’는 말과 ‘여기 사랑이 있다.’ ‘여기 민주주의가 있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은 같지만 주어가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서 ‘있다’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똑같이 영혼을 살리신다, 혹은 영혼이 살아있다는 말은 우리의 육체나 짐승이 살아있다는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당연히 영혼이 죽어있다고 할 때 그 죽음의 의미는 우리의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육체는 숨이 끊어지고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리면 물질로 돌아가게 됩니다. 죽은 지 몇 시간 되면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면 썩기 시작하고 땅 속에 묻은 지 7년 정도 지나면 뼈만 남고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불멸하도록 지정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불멸하도록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체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영혼이 죽는다는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은 무엇이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죽은 영혼의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육체가 죽은 사람은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지만,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어 있을 때 오히려 많은 일을 합니다. 그 죽은 영혼의 상태에서 나오는 수많은 일들이 죄입니다. 그렇게 육체의 일을 끊임없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영혼이 죽은, 혹은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의도하신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이탈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이 하는 일들이 현저하게 뚜렷합니다. 육체에 속한 수많은 죄의 열매들은 괄목 할 만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상당부분 사라지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경험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원래 주셨던 영혼의 아름답고 고결한 선택을 상실하고 무엇인가에 의해 점령되어 영혼 고유한 기능을 잘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을 죽음의 상태로 데리고 가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놀랍게도 이것을 여러 가지 이유로 제시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 시인은 사무엘하 11장까지 정말 순결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담의 후손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성경에서 괄목할 만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의 동기가 자신의 왕국의 강성함을 계산해 보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매우 불경하게 비춰졌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백성들과 함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 보다 더 심각한 범죄의 사건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간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영혼의 죽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시편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 사람이 그 성령을 거두셨을 때 그 말로가 어떻게 비참하게 되었는가, 전임자 사울을 통해 생생히 목격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정도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다윗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우리가 뭐 그러한 정도로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교도소를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죄를 지으신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양으로도 접근하지만 질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죄를 양, 크기로만 접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화) 지금은 한국에도 시스템이 발달해서 건물을 지으면 아예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든 오물들이 별도의 통로로 자동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맨 처음 교회를 지을 때에는 그러한 시설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똥통을 지하에 파야 했습니다. 모이는 인원의 규모에 맞는 시설을 지어야 했고, 그 시설은 특수 설비에 의해서 정제되고 거기에서 발효되고 일부는 빠져나가고 그것들을 6개월에 한번, 혹은 1년에 한 번씩 와서 구청에서 보낸 청소대행업체가 와서 청소를 해 주었습니다. 너무 많이 분량이 차서 신청을 합니다. 전화로 신청을 하면, 낮 시간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 새벽기도 끝날 때쯤, 사람들이 아직 다니지 않을 때 새벽같이 초록색 똥차가 옵니다. 이상하게 그 똥차는 베토벤의 ‘엘리제의 위하여’를 울리며 옵니다. 베토벤이 그것 하라고 자기 노래를 작곡한 것은 아닌데 똥차에 그것을 틀어놓고 옵니다. 그리고는 큰 호수를 집어넣고 확 빨아들입니다. 게이지에 얼마라고 나오면 사인을 받고 고지서를 주고 가면 그 돈을 은행에 납부하면 처리가 끝납니다. 맨 뒤에 보면 유리로 칸이 되어 있어서 내용물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저분한 것이 출렁 거리며 도로를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인상을 씁니다. 요즘은 그렇게 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는데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들도 아침에 그러한 차를 보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에 한 국자를 퍼서 몇 번을 필터에 걸러서 아주 노란 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은으로 만든 스프레이에 집어넣고 맑은 카펫에 깔리고 아주 아름다운 라이트가 떨어지는 집에서 공중에 스프레이로 뿌렸습니다. 미세한 노란 수증기 같은 것들이 공중에 퍼집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건더기가 출렁거리며 지나가는 똥차처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동일 본질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enmity to God’-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그리고 그 적의는 반감과 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에 죽음을 가져옵니다. 물론 큰 죄는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작은 죄는 작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깨뜨리는 방해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예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접시처럼 납작한 비커에 차가운 물을 붓고 밑에는 램프를 켰습니다. 1초에 0.02도씩 올라가게 조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큰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개구리는 한번만 뛰면 튀어 나올 수 있는데, 한 시간 뒤에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그 개구리를 따뜻한 물에 집어넣었다면 그가 쑥 몸을 잠그면서 사우나를 즐겼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죄에 대해서 친숙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커다란 자극을 주는 큰 죄는 항상 죄의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잘한 죄들은 우리에게 양심의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개울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처럼 보이는 군인이 부하 3명에게 명령했습니다. 자루를 하나씩 주면서, “각각 50kg의 돌멩이를 담아 오너라.” 하였습니다. 한 병사는 50kg 짜리 돌멩이를 포대에 담았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30kg, 20kg 두 개를 담아서 50kg를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병사는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이 돌을 메고 어디로 이동할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큰 돌멩이를 들고 가면 운반할 때 너무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자자란 공깃돌을 천개를 주워서 50kg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가져와 저울에 달아보니 각각 50kg이었습니다. 다음 지휘관의 명령이 병사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돌멩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를 가져온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두 개 가져온 사람은 조금 헷갈리는 것 같다가 제자리에 놓았지만, 공깃돌 천개를 가져온 병사는 단 한 개도 제자리에 둘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미국의 형법에 위반될 정도로 심각한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죄들은 처리되지 않은 채 회개해 본 적도 없고 뉘우쳐본 적도 없이 계속 쌓여 간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된 회개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기독교적 가르침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 자체가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이고, 죄 속에서 태어나고 죄 속에서 살고 죄 속에서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는 하나님이 그 죄의 권세에서 그를 구해내십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에 잔존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것은 신자 안에서 법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인간관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자신의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세상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하는 존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의 원리를 따르기만 하면 그 죄는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이기고 승리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이 바로 ‘sanctification’-성화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현재적으로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교회와 설교자들이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며칠 전 나의 친구, 마이클 호튼 교수가 교회에 와서 많은 목회자를 상대로 특강을 하였습니다. 특강에서 그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교회가 모든 불신앙의 인큐베이터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유행하게 되었습니까? 죄 없는 인간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경고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속에서 한번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회개한 시간이 언제였습니까? 우리들이 소위 추억하던 첫사랑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과 영광, 은혜,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에 대한 기쁨이 아주 충만하였을 때 말입니다. 그때 회개는 우리의 일상이었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회개를 동반하였고 회개는 곧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었던 죄들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동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슴 아픈 회개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회개 없는 기독교, 죄 없는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도덕적인, 치유적인 이신론’입니다. 세 가지 단어가 합쳐졌는데, 제일 먼저는 ‘도덕적인’입니다. 그래서 관심이 영적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참 인간으로서 온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초점이 되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느니,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라느니 하는 개념이 사라지고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존재로 피해를 입은 자신을 치유하기 원하는 소망을 기독교 신앙에 투사시킵니다. 마지막은 이신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그러나 이 세계 속에 간섭하시고 매일 매일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태엽처럼 감아놓고 세상 자동으로 돌아가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멀리 인간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계실 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주관된다고 하기 보다는 인간이 성숙한 사회를 꿈꾸면서 만들어간 결과물들이라 보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왕은 왕인데 다스리지 않는, 명목상의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그 속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애통하고 매일 매일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갈망하는 눈물이나 탄식, 애통, 이러한 것들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마니교와 플라톤 철학에 빠졌던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책속에는 경건의 눈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참회와 눈물이 저들의 책속에는 없었습니다.” 훌륭한 철학이었고 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었으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통회하며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용서를 받고 다시금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영혼이 가득 차는 그러한 기쁨 같은 것들은 그 많은 철학 책들이 그에게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남의 이야기처럼 이 설교를 듣지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눈물 흘리며 회개를 하는 시간이 언제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며 경건한 사람들이 쓴 신앙서적들을 읽으며 자신의 죄에 대해서 발견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였고 하늘로부터 오는 가장 좋은 것들을 가로 막았습니다. 내 인생의 곤고함과 내 영혼의 핍절함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그것도 아주 깊은 고통을 동반하여 그러한 죄를 지은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를 미워하게 된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 앉은 그 예배의 자리가 눈물로 적셔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끝났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여서 그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적이 없으니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맙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죽었다.’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느껴지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하실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그러한 죽음의 상태에서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인간을 회개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행실이 옳지 않음을 측정하게 하시고 거기에서 소망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율법과 복음을 합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애통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 주신,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과 그 사람과 사이에 막혔던 영적인 교제가 열리고, 죽은 자와 같았던 영혼은 다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주는 메시지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좋으신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항상 죄에 대하여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용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상 불신자처럼 사는 이유를 우리는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 소생된 경험이 너무 부족합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헤아리고 자신의 죄를 깊이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껏 경험한 것보다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인의 영혼을 왜 소생시키셨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그냥 죽은 채로 살게 내버려 두시지, 왜 하나님이 굳이 이 시인 다윗의 영혼을 살아나게 해 주셨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죽은 영혼으로는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의, 히브리말로 ‘쩨데크’ 혹은 ‘쩨다카’라는 단어입니다. ‘쩨데크’는 인간의 내면의 의로운 질을 가리키고, ‘쩨데카’는 행위를 의미하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꼭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의의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주 쉽게 생각하면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길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불의한 길이고 무엇이 의의 길이겠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고 이웃을 어떻게 공경하며 살아야 할지 가르쳐 준 그 율법, 율법에 합치한 삶을 살면 그것이 의로운 삶이고, 그 율법에 어긋난 삶을 살면 그것이 불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냥 편리한대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대로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은 의로운 삶이 아닙니다. 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이 되고, 결국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규정하는 절대적인 진리이고 규범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길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양한 세상, 변천하는 세계 속에서 수많은 사상과 생각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밀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 정해주신 하나님의 절대규범이 있다고 믿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 의로운 삶을 인간이 율법으로 모두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를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맥락에서 보면 율법에 합당한 길이지만, 구속이 완성되어지는 신약의 맥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 길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에서 제시한 그 길이 우리가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길과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목숨을 내 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이 그 의를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지금은 많이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초창기에 목회를 시작하던 때에 정말 많은 집회를 다녔습니다. 그날도 하루는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초청받아 강연을 하였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차를 몰고 혼자 출발하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도로가 꽉 막혀 늦었습니다. 빠져나와 지방도로로 들어섰을 때에는 시간이 빠듯하였습니다. 막 차를 몰아 달렸습니다. 저 멀리 경찰이 서 있었습니다. 속도를 줄이고 갔더니 경찰이 차를 세우면서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속도를 위반하였다는 것입니다. 속도위반 안 했다고 하였더니 여기서는 위반 안 하였지만 산 너머에서 위반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산 너머에서 위반 한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거기에 있는 내 친구가 스피드 건으로 쏴서 속도위반 하였던 것을 무전으로 쳐줬습니다.”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위반딱지를 끊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대학교수였습니다. “제가 대학 교수인데 이 대학에서 초청해서 강연하러 가는 길입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하고는 위반딱지를 끊어주었습니다. 빨리 가야 해서 관심도 없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쭉 갔습니다. 정시에 도착하여 설교를 하고 밤중에 차를 몰고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새벽기도회에 가서 전날 끊은 딱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을 빨리 내야지, 교회 직원을 시킬까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는데 내가 걸어가서 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은행에 갔습니다. 돈을 내려고 하니까 범칙금이 너무 쌌습니다. 6천원 밖에 안 되었습니다. 보통 2만 원 쯤 그 당시 나와야 했는데, 6만원도 아니고 6천원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까 위반 사실, 그래놓고 ‘금연 장소에서 담배 피우다가 걸렸음.’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경찰이, “교수님 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교회 직원이 가지고 갔으면 ‘우리 담임 목사님 어디 가다가 담배 피우다 걸렸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내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물론 별 생각 없이 딱지를 받기는 하였지만, 세상이 이렇게 좋은 게 좋은 세상인가? 그날 이후로 나 자신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위반하지 말자. 위반하면 법대로 끊으라고 하자.’
(예화) 똑같이 심방을 가는데 교회 앞에서 차에 전도사님을 싣고 유턴을 하는데 앞차라 안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차 뒤로 유턴을 하는데 지하도에서 경찰이 튀어 나오면서 딱 붙잡는 것입니다. “교통위반 하셨습니다.” “왜요?” “여기에서 하얀 점선을 밟고 유턴을 해야 하는데 노란 선을 밟고 유턴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게 무슨 땅 따먹기 입니까? 아니, 차들이 제자리 안서고 내 차를 가로 막았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유턴을 했는데, 이것이 불법입니까?” “불법입니다.” “도로 교통법을 보십시오. 1조 1항에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그 법을 그렇게 해석하십니까?” 하니까, “그래도 딱지 끊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알았다.” 그랬더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싼 것으로 끊어줄 권리가 있느냐? 당신은 경찰이고 나를 지적하였으면 제 값으로 범칙금을 매겨야지.” “알았어요. 끊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벌점 15점에 범칙금 6만 원 짜리를 확 끊으면서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습니다. 경찰서에 가니까 컴퓨터로 두들겨 보더니 막 깔깔대고 웃으면서, “선생님, 이것이 걸리게 되면서 면허 정리가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순진하게 사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학의 선생이고 교인들을 가르치는데 차 없이는 안 됩니다. 제가 다른 벌을 받을 테니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교통경찰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6시 이후에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무시간 끝난 뒤인 6시 이후인가 생각하면서 교회로 걸어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집사님에게 했더니 집사님이 막 웃으면서 “목사님,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세상을 사세요? 이거 (돈) 가지고 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퇴근 시간 이후에 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서 내가 얼마나 의식 없이 인생을 살아왔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부조리에 뒤엉켜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세상은 굴러갑니다. 내가 너무나 협조를 순순히 잘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화) 기가 막힌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전세를 전전하다가 두 번째 신학교에 스카우트가 되어 갔는데 그 학교에서 “교수님, 주거 상태가 어떻습니까?” 그래서 “방 두 개짜리 전세에 살고 있습니다.” “식구가 몇 입니까?” “식구가 셋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학교가 돈을 무이자로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5천만 원이었습니다. 5천만 원을 10년 후에 갚으라고 무이자로 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보고 넓은 집으로 이사를 꼭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42평 방배동에 있는 빌라를 전세를 얻어 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을 잘 살았습니다. 어느 날 건너편에 사는 집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더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목사님 댁에 팔라고 하셨습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말씀하시지, 그 집에 가셔서 말씀하셨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어렵게, 어렵게 해서 사게 되었습니다. 아주 싸게 해 주셔서 잘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된 것이 세금을 내는 문제였습니다. 그 집을 사고 세금을 내러 법무사에 갔는데 생각보다 세금이 비쌌습니다. 이 조그마한 집 하나에 어쩌면 그렇게 세금이 비싼가 싶었습니다. 비싸다고 우리 집사람이 이야기 했더니 법무사에 있던 아가씨가 “아줌마, 비싸요?” “비싸죠.” “그러면 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반을 깎아줍니까?”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이 집 값에는 그 세금이 정상인데 덜 내고 싶으면 주인과 이야기해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그 가짜 계약서를 가지고 2/3쯤 집값을 낮춰 오면 세금을 반만 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3장을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바치라고 했는데, 집을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성령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금을 다 내기로 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세금을 내러 왔습니다.” “오셨네요. 가짜 계약서 써 오셨어요?” “아니요.” “그럼요?” “다 내려고요.” 그러면서 세금을 다 내었을 때 그 여직원이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겠습니까? ‘아, 부끄러워. 이런 도덕적이고 애국적인 시민에게 내가 불경한 충고를 했다니.’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아이, 병신.’
더 심각한 것은, 지하실에 교회 개척을 해서 한 3년 반 만에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세를 들어서 이런 교회당 하나 부수려 하던 것들이 그 당시 IMF가 터지면서 헐값으로 월세가 나왔습니다. 월세로 들어가 살았는데 한 3년 만에 200명이 천 명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소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를 가야 했는데 돈은 없었습니다. 믿음은 많았는데 돈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의 땅을 계약하러 갔습니다. 집사님들이 가서 계약을 했는데 그 땅 주인이 팔려고 내 놓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주소를 받아 가보겠다고, 부동산에 가서 주소를 집사님들이 받아 갔습니다. “영감님, 땅 좀 파십시오.” “안 팔아요. 안 판다는데 왜 자꾸 그럽니까.”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자꾸 조르니까 “안 판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굽니까? 만약에 내가 땅을 팔면 그 땅에서 뭘 하려고 합니까?” “교회를 지려고 합니다.” “교회요?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좋은 조짐이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땅을 팔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수십 년 사업을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청산을 하려고 하는데 옛날부터 이 땅에 교회가 지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36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벌써 20년 전이었는데, 교회 통장에는 1,500만원 있었습니다. 뭘 믿었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36억이라고 하니까, 36억에 계약하자고 해라, 말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니까, 어느 교인이 계약금 3억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36억인데 30억에 계약을 하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가짜 계약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는지 물으니까, 땅을 워낙 싸게 사서 세금을 다 내고 나면 교회에서 받은 돈으로 대출한 것이 청산이 안 되고 2억을 보태야 청산이 되는데 가만히 놔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값인데 자신이 교회에 넘겨줄 수는 있지만 내 돈을 집어넣어서 넘겨줄 수는 없지 않느냐, 그 할아버지의 입장이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 모르니까 집사님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당시는 장로님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는데, “목사님, 95%가 땅 거래는 이렇게 다 합니다. 문제 안 됩니다.” 그래서 회계사를 불러서 물어 보았습니다. “문제가 없다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을 수도 있고 안 괜찮을 수도 있는데 그 대신 확실한 것 하나는 회계 장부 두 개를 쓰셔야 합니다.” 또 가짜 장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딱 결정하였습니다. 목사와 집사가 앉아 가짜 회계 장부를 써서 진짜는 교회에 두고 가짜는 세무서에 내야 하는데 이것은 아니다! 그 할아버지가 36억을 달라는 땅을 저희가 다시 제안을 하였습니다. “세금이 얼마 입니까?” 3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39억을 줄 테니 가짜 계약서를 쓰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 사람은 36억만 주면 된다는 공장건물을 39억을 주고 샀는데, 그 3억을 갚는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때 저는 설교자로서 깊이 그게 뭐냐 하면 “똑바로 삽시다! 말씀대로 삽시다! 의롭게 삽시다!” 이와 같이 설교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할 때 현실로 확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께서 교회 짓고 고생하신 이야기를 하시는데 목사님 교회 정도 크기의 인플레이션으로 본다면 딱 결정을 하고 한 100만 불 정도를 안 낼 수도 있는데 그 선택을 함으로 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쉽게 ‘그거 하면 돼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천 불이나 이천 불일 때에는 하면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백만 불, 이백만 불 될 때에는 그렇게 쉽게 될 수 없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입술로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은 침만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삶을 살려면 자신이 희생을 하고, 교인 천 명 밖에 안 되는 교회가 빚더미에 서서 그 교회를 건축하고 왔는데 그 3억의 무게는 지금 상상해 보면 30억의 무게는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독하게 결정을 내렸을 때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이, ‘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우리에게 매 순간 결단, 그리고 매 순간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만 의로운 삶을 살고 우리의 몸으로는 그것을 살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만 살아가지,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의 가치를 녹여내는 삶을 선택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버겁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우리는 의의 길을 양보하면서 살아갑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 다니는 것만 자신들이 우리와 다르지, 실제 살아가는 삶의 윤리나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너무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불타는 신념, 진리에 대한 불굴의 확신, 그리고 진리에 어긋나게 왕처럼 천년을 살기보다는 종처럼 단 하루를 살다가 죽겠다고 하는 진리를 따라 살고 죽는 정신,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 죽겠다고 하는 결단과 용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눈부시고 찬란한 불꽃은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삶을 존재와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심, 용기, 비전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소생한 영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죄에 대해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삶, 그래서 그러한 불굴의 용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어디에서 읽은 자료에서 보니까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것을 반대하였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만들었던 찬송가가 이 찬송입니다.
(찬송)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은혜, 모든 하늘의 복, 이 땅의 좋은 것들을 한껏 누리며 살다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양보할 수 없는 의의 길을 걸어가려 할 때, 한 번에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그러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타협하고, 양보하고, 세상과 손잡아 짝하고 그러한 식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맛을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이 무엇에 의해서 밝게 빛날 것이며 무엇에 의해서 소금이 쳐진 것 같은 세상이 될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갈망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 충만한 영적인 은혜를 우리의 윤리적인 삶 속에서 아주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건과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는 교회 안에서 자기 소비적인 자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자신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뿐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으로서 나의 가족과 사회, 이 세상에서 윤리적인 삶으로 그것으로 결과가 나타나서 우리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같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다른 주인에게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인다. 그 행복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이것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도지를 막 돌리고 하는 것, 그것이 물론 훌륭한 전도이고 꼭 필요한 전도방법입니다.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존재, 현존, 그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고 정말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사는 사회가 여기 있구나, 참 인간답게 사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보여주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도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면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이 어두운 세상을 빛처럼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며 우리의 인생이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한 줄기 별 빛과 같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