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 오희열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왜 하나님을 목자로 모셨는지를 더 넘치는 은혜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5절에서는 그 위에 또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생각해보십시오. 불꽃을 쏘면 가느다란 불길을 그리며 하늘 높이 불꽃이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을 때 작렬하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불꽃이 모두 스러진 후에 불꽃놀이는 끝이 납니다. 시편 23편을 불꽃놀이에 비하다면 5절은 그 어두운 밤하늘 꼭대기에서 작렬하듯이 폭발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불꽃에 해당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제일 먼저 시인은 “내 잔이 넘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례를 하고 가족과 일가친척 지인들이 모두 그들이 부부 맺어진 것을 축하합니다. 주인은 질 좋은 포도주를 오래도록 간직했다가 그 잔칫날에 맞추어 가져오고 하객들은 가득가득 넘치도록 그 잔에 붓고 서로 부딪치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어 웃음소리가 가득한 결혼식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서의 이 잔, 잔에 그 술이 가득 찬 것은 기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빈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 또렷하지 않을 때, 마음은 빈 잔을 느끼며 채워지기를 갈망하지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이 세상의 쾌락, 이 세상의 즐거움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 한 모금의 차가운 설탕물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해갈을 느끼게 하지만 그 설탕물이 뱃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몸은 더 간절하게 물을 찾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향락과 타락의 풍조, 광기어린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사랑, 육체의 자랑,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에 대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그리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이렇게 우리 인간 영혼 안에 있는 빈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갈망하도록, 올바른 것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이 훨씬 넘은 예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서울 북쪽 끝자락에 가면 수유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경기도였는데 오래전에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수유리였습니다. 거기에서 당직의사를 섰던 한 사람이 신문에 글을 냈습니다. 새벽에 당직을 서고 있는데 택시가 왔습니다.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환자를 들쳐 매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의사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이 사람이 방금 쓰러졌는데, 선생님! 이 사람을 살려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침대에 눕히고 진찰을 해 보니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더 이상 손 쓸 일이 없습니다.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하며 하얀 보자기로 덮어두었습니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가족들이 울며불며 몰려왔습니다. 가족들은 돌아가신 분을 보고 슬퍼하며 울었지만 이 의사는 이 죽은 시신을 보면 궁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고 마지막에 죽을 때는 두 손을 펴고 죽는 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움켜쥐고 한 손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의사는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저 움켜 쥔 손에 뭐가 들어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기묘한 자세로 죽을 수 있을까?’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서 의사는 환자의 움켜쥔 왼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펴 보았습니다. 화투 두 장이 툭 떨어졌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화투 두 장을 뒤집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오! 38광땡이네?” 스토리는 이러했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쳤습니다. 초저녁부터 화투를 쳤지만 이 사람은 돈을 많이 잃었습니다. 새벽에 끗발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판돈이 잔뜩 쌓여있는데 자기에게 들어온 화투를 확인해 보니 38광땡이었습니다. 이 38광땡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무데서나 태어나도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좀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도 그 사람에게 그것이 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후손들이 “엄마, 우리 아빠는 어떻게 죽었어?”라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화투를 치다가 38광땡이 들어오니까 너무 좋아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지만 여러분은 무엇이 다릅니까?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영혼을 돌볼 틈이 없이 바쁘게 살면서 화투보다 조금 큰 땅문서, 집 문서, 학위, 이런 것들을 붙들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까?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인생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으로 가득차야 할 마음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만족이 육체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삽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자기가 얼마나 까불고 살았는지를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 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은 지혜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유익이 나이 듦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했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나이 듦이나 혹은 인생의 단순한 지식의 증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누리며 그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인생의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시인은 상처 가득 찬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의 일생도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그는 누구도 건너보지 못한 인생의 시련의 계곡을 통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라고 노래한 것은 아주 간단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모든 시련과 고난의 길을 지나면서 그는 매일매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격적인 은혜로 가득 채우시는 충만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모든 힘과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갚을 수 있는 마음의 너그러움이 생겨났습니다.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악인들을 만났지만 악인들을 미워하고 복수하는 대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영혼의 잔잔한 평안도 바로 여기에서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헛된 곳에서 만족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유일한 만족인 것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그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한 기쁨으로 넘치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5절을 보면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새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에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상’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 번역에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 ‘상’을 ‘prize’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이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탁자, 그 중에서 특별히 밥을 차리는 상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소파 같은 것에 비스듬히 기대어 밥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테이블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높이의 테이블이 아니라 티 탁자 같은 야트막한 높이의 넓은 식탁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시인은 갑자기 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밥을 먹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쓰인 이스라엘에는 서구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동양의 문화와 매우 유사한 식사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옛날을 한 번 회고해보면 대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께서 옛날에 대가족이 모여 살았을 때는 약 40명까지 모여서 살았던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집 안에는 그런 많은 식구가 함께 밥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모든 식구가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살지만 그 가족들이 각각 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큰 상이 안방에 차려집니다. 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거기에 못 들어가시고 아버지가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반찬도 매우 특별합니다. 밥그릇도 다릅니다. 그런 1등급 밥상이 차려집니다. 그 다음에 마루에 차려지고 그 다음에 마당에 차려지고 그리고 머슴과 아랫것들이 거기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우리 집사람을 마루에 남겨두고 나는 안방으로 가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런 룰들이 아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보자면 양반과 상민이 있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양반과 상민이 한 방에서 섞여 잠을 자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반이 상민과 함께 밥상을 같이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동양의 문화권에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곧 형제됨, 가족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설교학을 가르쳐주셨던 어떤 교수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초창기에 중국 선교를 할 때 체계적으로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통일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수십 개의 소수민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서양권의 선교사들이 그곳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채 직접 그곳에 가서 몸으로 부딪치고 살면서 언어를 익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손짓, 발짓 하면서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왔고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호소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바디 랭귀지를 알아듣고 이윽고 수염이 길게 자란 촌장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 푸른 눈의 이방인을 그들의 마을에 받아들일지 말지를 장시간에 걸쳐서 의논합니다. 마침내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합니다. 아주 우호적인 표정으로 와서 당신들이 우리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도되는 곳은 공회당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동시설입니다. 거기에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중국은 보통 나라에서 상상도 못하는 요리가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중국은 엄청난 인구를 가졌기 때문에 식문화 자체가 식자재를 아주 광범위하게 확장해서 보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그 때 나오는 요리라는 것이 문명권에서 살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요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에 자주 가지만 중국에 가면 음식점 앞에 케이지가 쭉 있습니다. 그 케이지에는 닭부터 시작해서 저 끝으로 가면 도마뱀에 고양이까지 있어서 요청하면 그 자리에서 고양이를 잡아서 요리해줍니다. 뱀은 그들이 아주 즐겨먹는 음식인데 그런 요리가 나오게 되면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만주 쪽에서는, 우리가 결혼식 할 때 국수를 끓이거나 갈비탕을 주는 것처럼 그곳에서는 뱀국이 없으면 결혼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팔뚝만한 뱀을 동태처럼 삶고 야채를 넣고 큰 솥에 국을 끓여서 한 그릇씩 먹는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온 선교사는 당연히 먹지 못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황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와지면서 여기저기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나오게 되고 선교사는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것은, “너희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니까 너희는 이제 우리와 한 형제이다.” 하면서 식탁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 식탁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은 “나는 너희와 한 형제가 되기 싫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같이 살고는 싶은데 형제가 되기 싫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는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이 식사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전설적으로 부자가 되었던 야곱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에 의해 그는 밧단아람에서 얻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라반의 슬하에서 도망을 칩니다.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추격을 해서 결국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옥신각신하다가 오해를 모두 풀고 화해를 하게 됩니다. 그때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갈사하두다’라는 돌무덤을 쌓아두고 밥을 먹는 것으로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 돌무덤을 지나서 너를 추격하지도 않고 너를 치지도 않겠다는 언약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셨을 때 그들의 식생활의 문제를 ‘만나’라는 방법으로 해결하신 것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게 하심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매일 아침마다 일깨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찬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영적인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 중에 하나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그분이 식탁을 나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어찌 그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고 비난을 퍼부었을 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왔노라” 그래서 그 죄인들과 함께 형제가 되어 식탁을 나누는 것이 그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이 접근했던 선교적인 태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이 큰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생명적인 관계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셨다.” 라고 했을 때 그 밥상은 바로 하나님과 나누는 생명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시련과 고난의 계속을 통과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했어도 자신의 빈 잔이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합니까? ‘기쁨’, ‘희열’, ‘가슴 벅차는 환희’ 이런 것들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마치 같이 살기 싫은 부부가 아이들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예배당에 나오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완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자니 왠지 신앙이 자신의 목덜미를 붙들고, 신앙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살자니 세상이 자기를 잡아끕니다. 둘 사이에 찢어져서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완전한 세상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도 아닌, 애매모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환희, 기쁨, 가슴 벅차는 행복, 이런 것들이 신앙의 세계 속에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24년 전쯤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이듬해였습니다. 제 방에서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구절을 발견하고 가슴이 벅찬 감격 속에서 방안을 한참 돌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상을 베푸셨는데 여기에 ‘베푸시고’, 혹은 ‘차려주시고’ 라는 동사가 히브리어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이스라엘의 군대에 적용되는 단어로 많이 쓰였습니다. 군인들이 항오를 맞추어 대열을 이루는데 이 동사가 사용되었고 여러 개의 물건을 질서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식탁이 어떤 식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온 손님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 사람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식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매우 중요하면 반찬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손님이 하찮은 사람이면 시간도 짧고 반찬 수도 별로 없습니다.
어떤 엄마에게 딸이 있었습니다. 딸이 커서 시집을 갈 때가 되었는데 마침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집에 데려오겠다고 합니다. 남편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사위될 사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해 보니 처음부터 너무나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쓰레기를 주워왔을까? 정말 싫다.’ 생각하며 딸을 설득했습니다. “한 번 가는 시집에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웬만하면 생각해봐라.” 했지만 이미 딸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람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는데 자식을 이길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싫지만 결혼식을 올려주었습니다. 딸은 신랑과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그래 잘 했다.”, “엄마, 내일 박 서방과 인사드리러 갈게요.”, “그래 와라.” 왠지 엄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 점심때 갈 테니까 밥 줘야 해요.”, “그래 오너라.” 하고 전화를 툭 끊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신랑이 아침을 달라고 합니다. “무슨 아침이야, 엄마가 잔뜩 차려놓고 기다릴 테니 같이 가서 점심 먹자!” 하고 우유 한 잔으로 속을 달랩니다. 그리고는 신랑과 양 손에 선물을 들고 친정집에 갑니다. 분명히 집안이 떠들썩하고 이모까지 와서 반찬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띵동~” 하고 벨을 눌러보았는데 문이 열려있습니다. 아무 소리가 안 납니다. “엄마~” 하고 불러보며 들어갔더니 불 꺼진 방에 엄마 혼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엄마 우리 왔어요.” 하니까 “그래, 왔니?” 하며 게슴츠레 눈을 뜨며 일어납니다. “아빠는?”, “응, 볼일 있다고 나가셨어.”,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그렇게 인사가 끝납니다. 딸은, “엄마 맛있는 거 많이 했지? 우리 밥 줘요.”, “그래 잠깐 기다려라.” 하고 일어나신 엄마가 1분 만에 밥상을 차려왔습니다. 밥상을 보니까, 아침에 누가 먹다가 남긴 밥 두 그릇에 찬물을 부어서 제사 지내는 것처럼 숟가락을 하나씩 꽂고, 반찬이라고는 달랑 하나,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였습니다. 이것을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소반에 담아서 “탁!” 내려놓으면서 하는 말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게.” 밥상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난 네가 싫어! 우리 집안이 어쩌다가 너랑 엮여졌는지, 난 너무 싫다. 싫어!” 라고 밥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50대 초반쯤 되는 부인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말이, 우리 교회에 와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기쁨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성도였습니다. 저는 원래 교인이 1100명 정도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1100명이 넘어서면서 부터는 1주일 내내 심방을 다녀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심방을 가지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않고 꼭 필요한 곳에 갔습니다. 한 교역자가 그 여성도님이 자기 집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심방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그렇게 원하는데 무슨 행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것을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심방을 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집으로 심방을 갈 때 밥을 준비하지 못하게 합니다. “가족들 밥 해주는 것도 힘든데 왜 목사까지 가서 가정주부에게 괴로움을 더하랴.” 생각하며 식사시간을 피하든지, 아니며 꼭 밥을 먹고 싶으면 바깥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편입니다. 한 번은 교회의 여 성도들에게 밥을 사줄 일이 있어서 밥을 사주면서 “그대들은 무슨 밥이 가장 맛있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하지 않은 모든 밥은 맛있습니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심방은 가는데 밥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하겠다고 합니다. “힘든데, 밥을 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하겠답니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하며 갔습니다. 11시에 그 집을 방문해서 한 20분, 잠깐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하다가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고 “목사님, 이제 식사를 하십시오.” 합니다. 그러면서 밥상을 내오는데 큰 교자상에 반찬을 가득 얹은 것을 세 사람이 들고 오는 것입니다. 갖다 놓았는데 그 밥상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밥상입니까?”, “목사님, 제가 살아생전에 목사님을 두 번 식사를 대접해 드릴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정성껏 기도하면서 차렸습니다.” 합니다. 한 달 전에 식사의 계획을 짰다고 합니다. 보름 전에 실행을 하고 열흘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날짜별로 반찬을 만들어서 마지막 모든 즉석에서 해야 할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가 형제들을 불러서 그 시간에 맞추어 요리해서 예배가 끝날 때 내오도록 한 것입니다. 밥상 이쪽부터 저쪽까지 모든 반찬이 다른데 젓가락을 들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 밥상을 보니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뭐하려 이런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합니까? 이렇게 반찬을 정성껏 만들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이라도 한 장 더 읽지 왜 이러셨습니까?” 했더니, 그분이 마음이 상했는지 “목사님!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합니다. 그 밥상을 받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이런 한 사람의 마음에 이런 사랑을 받아서 이렇게 정성껏 차려진 식탁을 누릴까?’ 저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웬만한 요리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태어나서 누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한 달 전에 계획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밥을 차려본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집에서 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여러 개의 반찬이 놓여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찬들이 놓여있는, 말하자면 ‘정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식당에서 사는 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오늘 다윗이 굶주리던 날에 하나님이 큰 상에 온갖 반찬을 놓고 낚싯줄 네 개로 매달아서 구름타고 하늘에서 상을 내려 보냈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학적인 상상력이 빈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정말 인생의 곤고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때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극진했는가를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한 나라의 제왕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왕의 화려한 식탁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겠습니까? 아랫것들이 먹는 소박한 식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왕의 식탁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 차려주신 말씀의 식탁, 하나님의 은혜의 식탁이 정말 화려한 식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서 맛있는 식사를 한 끼만 하고 나도 마음에 아주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교류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혼의 모든 힘이 소진되어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헤쳐갈 수 없을 때에, 그때에 차려진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 그 화려한 하나님의 은혜의 식탁에서 한 끼를 먹고 나면 죽을 거 같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고 이 세상에서 모두 버림받아 나 혼자인줄만 알았던 인생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가까이에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식탁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며 살아 온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은혜, 말씀을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의 은혜를 탁월하게 경험하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과 환희, 마음 벅찬 감격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유익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면서 행복해 할 수 있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이런 것들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인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은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에서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기름을 내 머리에 발라주셨습니다.”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기름을 바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3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나라의 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허용하셨습니다. 이후로부터는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세 개의 솥발과 같은 office, 직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죄 있는 불결한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를 보여주고 실제로 중보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항상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탄원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었고 제사를 통해서 이런 용서를 받게 해 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인물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예언자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미래에 관한 일을 예언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적용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지를 설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오늘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 지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때의 선지자들은 모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 지를 생각하면서 그 백성들에게 믿음의 도리, 생활의 도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전통 편에 서 있다기보다는 계시의 편에 서 있고 백성들의 편에 서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어서 때로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를 자신의 왕국에 구현해서 하나님이 직접 왕이신 것처럼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법과 정치, 행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그 백성 사이에 하나의 도덕적인 규율로 작동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임무를 가진 사람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과 선지자, 왕의 직무는 매우 독특했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 특별한 사람들을 이 세 가지의 직분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능력과 지혜, 용기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바로 기름부음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기름부음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기름부음과 함께 실제로 성령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서 그 직무를 행하기에 적합한 자질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과 신약에서 역사하시는 경륜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이 모든 믿는 신자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 속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사라지거나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달랐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의 모든 언약 백성들 가운데 와 계신다기 보다는 당시 필요한 일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오셔서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신 후에는 다시 돌아가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경험했던 성령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세 번의 기름부음 중에서 첫 번째 경험한 것이 그에게 가장 커다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로부터 이새의 집에 있을 때에 기름부음 받은 충분한 성령의 은혜였습니다. 그 충만한 성령은 이 다윗을 가득하게 하고 왕의 직분을 감당하게 할 만한 지혜와 용기와 능력과 모든 성품을 주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 성령 충만함 속에는 놀라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기쁨을 느낀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화려한 식탁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성령의 충만함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기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환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성령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성도는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기를 무신론자로 보내고 스물한 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6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는데 정말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모두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제가 예전에 가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뇌와 방황 끝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만져주셨고 저는 하나님께 구원의 길을 물으며 제 발로 걸어가서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 담임목사님의 권유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학습도 받지 못한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그냥 세례를 받으면 된다.”라고 하셔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늘같은 목사님께서 세례를 받으라고 했으니 세례를 안 받을 수는 없는데 그날부터 고민이 생겼습니다. 세례 문답을 외우면서도 매일 밤 교회에 가서 촛불을 켜 놓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교인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주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일주일 동안 매일 밤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세례 받는 날이 되었고 목사님은 저에게 와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세례를 받는데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품에 있는 것 같은 그런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은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마치 깃털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세례가 끝났을 때 나 같은 이런 못된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마음깊이 밀려왔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한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서 큰 해 받으셨나
한참을 울었습니다. 얼마를 눈물을 흘리며 혼자 기도를 하고 눈을 떠 보니 예배는 모두 끝났고 교인들은 흩어졌습니다. 눈을 떠 보니 12월 중순에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고 햇살이 쫙 들어왔습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음은 이 세상에 바라던 나의 욕망, 꿈, 희망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번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꼭 같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일평생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순결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뿐이었습니다.
시인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든 몸과 마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원수들을 용서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가 되고 그 한숨이 변하여 그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을 지나면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한다면 마지막에 나는 정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영혼의 행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행복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진 채 행복하고자 하는 그 모든 욕망이 사실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간은 그릇된 사랑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사망의 길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큰 사명을 받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다른 시련의 길, 고난의 계곡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인생의 고난의 길도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을 향해 큰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다윗이었지만 꽃길만 걸어가게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날들을 지내며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만들어주셨고 배신과 복수의 날들을 지나며 참된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에 완전한 만족은 이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영혼의 만족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그분을 등지고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그의 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달려가도 내쫓을 수 없고 걸어가도 피할 수 없으며 주저앉아도 비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러면서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역경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보다 클 것이고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련보다 더 클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누리는 기쁨,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 앞에서 주린 영혼을 배불리 먹이시는 그분의 은혜 때문에 누리는 비밀스러운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이 매일매일 그 하나님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넉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악함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함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매일매일 잔치를 합니다. 이 사랑이, 압도할 수 없는 그 신령한 기쁨과 은혜,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이름으로 알고 나를 위해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이 넘칩니다. 그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도록 불러주신 은총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은 매일매일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오늘 시인은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고”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라고 말합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악당 무리처럼 덤벼들며 시인을 씹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대적들의 면전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다윗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가족이란다.”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이 은혜의 식탁을 통해서 원수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에 기름을 바르심으로써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늘어난 영토와 쌓여가는 재산, 그리고 점점 많아져가는 왕비나 왕궁, 궁녀들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차려주시는 말씀의 은혜의 식탁, 은밀하게 자신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영적인 은혜 때문에 이 시인은 넘치는 기쁨과 은혜를 느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아름다운 삶이 상처 있는 다윗에게만 주어졌던 삶이 아닙니다. 오늘 누구든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도 당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을 목자의 음성으로 부르시는 예수의 부르심 앞에 나아오는 모든 상처받은 양떼들에게 하나님은 이 환희의 삶을 허락하십니다. 여러분이 멀어졌던 하나님께로,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기쁨 속에서 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