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이경순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부활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자들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할 일 없이 다시 옛날의 직업이던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는 사람들로 돌아갔습니다. 칼빈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굳이 우리는 이것을 예수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그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던 그 어로의 사건을 기억나게 만드는 ‘데자뷰’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그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혔고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마치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하신 일을 오늘은 네 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식탁을 차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숯불과 생선을 구워 제자들을 위한 아침상을 차리고 계셨습니다. 어디서 그 떡과 물고기를 가져오셨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족들을 위해서 아침상을 준비하는 엄마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시간을 좀 거꾸로 돌려서 우리가 한 백년만 뒤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양반과 상민이 있었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을 때는 양반이 상민과 함께 좁은 방에서 잠자리를 함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양에서 밥을 먹는 것은 형제 됨 가족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양반과 상민은 형제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도 똑같은 식사에 관한 문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거부가 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심기가 변한 라반을 피하여 야곱은 도주하였습니다. 라반과 그 일행은 이제 이 야곱을 크게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추격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후에 야곱과 라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을 때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여갈사하두다라고 하는 무덤에 증거를 쌓고 여기를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다짐한 후 그들이 행한 것은 식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후 광야에 들어오게 하셨을 때 만나를 내리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아침 일찍이 들판으로 나아가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광야에 내린 만나는 거대한 하나의 밥상이었고 그 만나를 채집하여오는 그때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한 형제라는 의식을 불어넣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죄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밥을 잡수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죄인들을 당신의 형제라고 받아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스스럼없이 밥을 나누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회개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뿐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말씀하십니다.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이 바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찬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배반하고 간 이 제자들에게 따뜻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을 당신의 형제로 가족으로 맞이하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그 고난이 극도로 클 때, 저녁에 잠이 들면 그다음날 아침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그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련과 난관을 만나도 두 가지를 기억한다면 여러분들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을 믿는 다면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절망에 이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의 인생이 시련과 고난을 수없이 만났지만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때때로 우리에게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도저히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그 말씀의 식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혼의 원기를 회복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우리를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니 식탁을 차려주시는 그리스도께 다시 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반을 모두 끝낸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그리스도를 향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고 예수님은 그 고백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라는 이름을 버리게 하시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니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는 이름이 베드로가 하나님 제대로 모르고 살았을 때의 이름이라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된 때 주신 신령한 이름이 ‘베드로’이었으니 그 뜻은 ‘반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예수님은 당신이 버리게 하신 이름을 다시 부르고 계십니까? 왜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신 것일까요? ‘바요나 시몬’이라는 말은 당시 사용되던 언어인 아람어이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는 것은 희랍식으로 이름을 옮긴 것입니다. 요한이라고 하는 말은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베드로의 아버지의 이름도 시몬이라는 베드로의 이름도 그 당시에는 너무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 이, 박 중 하나가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 당시에도 아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요한 혹은 시몬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버리게 하셨던 이름을 오늘 여기서 다시 부르고 계신 것입니까?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 시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실패한 베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다가 두려워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죽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를 부인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히 실패한 이 사람을 ‘베드로’라고 부른다면 ‘반석과 같이 큰 믿음이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를 좌절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화되기 전에 그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살고 예수께 나아가면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잘 살고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복 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부모라면 사랑하는 아들이 집을 가출하여 어디로 갔는지도 소식을 알지 못할 때 처음에는 아들을 향해 화나는 마음도 들겠지만 하루 이틀 지나갔을 때 얼마나 걱정이 될까요. 그 아들이 골목을 헤매며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을 때 이 모습 그대로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크게 야단을 맞을 거야 새 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깨끗한 얼굴로 들어가면 엄마가 더 많이 사랑해 줄 거야, 그것이 맞는 이야기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전 세계 70여 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단어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에 1위가 엄마 이었습니다. 아빠는 72위 이었습니다. 아빠는 별로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넘치는 긍휼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베드로의 배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만찬석상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고 철없이 제자들은 다투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예수를 버려도 저는 옥에 갇히는 데까지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고하셨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원한에 사무친 화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31절과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당신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 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상심하거나 베드로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죄에서 깊이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믿음 안에서 굳건히 붙들어주는 목양자의 역할을 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복음서의 스토리는 이런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신을 했는데 한 제자가 끝까지 남아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가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제자를 모든 제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서 우두머리를 삼으시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그에게 복종하게하시면서 교회의 역사를 써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실패한 사람을 불러서 그리스도교회의 역사를 써가게 만드셨습니다. 영웅이 아니라 실패한 자를 부르셔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다시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에서 용서를 받는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고 할 때에 바로 자신이 핍박자요 포행 자였던 사실 죄인가운데 괴수였던 사실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사랑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큰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그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반석 같은 믿음이라고 그를 부르시는 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우리가 이렇게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존경을 표하기도 하고 호의를 나타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의 구렁텅이에 있든지 혹은 성공의 꽃길을 걷든지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 때문에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 사람조차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베드로가 완전히 실패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그때 맨 첨에 그를 부르셨던 그 처음 이름을 다시 불러주시므로 지금 있는 모습 이대로 당신이 그를 용납해주심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왜 내일입니까? 왜 다음 달입니까? 왜 내년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 어차피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나아갈 텐데 왜 내일입니까? 왜 회개가 다음 주에 합니까? 그리스도 없이 척박한 삶을 사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은혜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팍팍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가슴에 파도치던 하나님의 말씀 감동이 사라졌습니다. 불 붇듯 춤추는 화염과 같던 기도의 언어들이 고갈되었습니다. 마음에 용솟음치던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언제쯤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 당당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가 오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받아들여 질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루신 그 사랑으로 육체를 찢으심으로 새롭게 만들어 놓으신 산 길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 뿌리신 그 길을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의의 모든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핏길을 걸어 주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오늘 바로 이 시간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제가 이것 밖에 안 됩니다. 잘 못살았습니다. 나는 이 모습이 싫습니다. 이렇게 살기가 싫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시는 그 예수께 믿음으로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신 것이었습니다.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이것들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동료와 친구들을 가리킬 것이고 이것들이라면 아마 물고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서 옥에 갇히고 죽는 데까지 가겠노라고 맹세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습니다. 예수보다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배반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얼마나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많으셨을까요? 저 같으면 틀림없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죽는 데까지 따라 간다더니 살았네, 옥에까지 간다더니 왜 여기 있지?’ 제 성격이면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나간 일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현재형의 질문입니다.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라고 물으셨다면 베드로는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할래?’하고 물었더라도 이미 실패한 베드로가 ‘미래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도 왜 지금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 전에 그렇게 배신했는지 자기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때는 주님을 배반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서 ‘내가 그러하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고기보다도 내 곁에 있는 내 친구들 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지우개로 지우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단어만 바꿔서 동일한 질문을 세 번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이 희랍어 성경에는 각각 다른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사랑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의 고백으로 하나의 죄를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 가지가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할 때뿐 아니라 미끄러졌을 때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조차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 가지가 그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거듭나고 구원 받은 신자는 새로운 본성이 심겨졌는데 그 본성이 바로 성령의 내주하신 안에서 심겨진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는 이 사랑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아도 갖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어떻게 이것을 예수위해서 쓸까 생각합니다. 재산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요즘에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더럽게 갑 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밑에서 밥을 먹고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 생활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다가 미끄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기도의 불이 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령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지만 삶은 아주 세속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는 하나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이 소리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사랑 없이 살수 없다.’라고 고함을 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외침이 없다면 그는 구원 받은 신자일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의 본성이 심겨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는데도 은혜 안에서 살지 않으면 인생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닙니다. 꼭 그렇게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안 살고 싶은 것도 아닌 그러한 매우 이상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인생의 초는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러 온 여러분, 이 소리를 설교로 듣지 마십시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 보다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원래 이름을 부르며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은 오직 한 가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 물론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일까요?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예수 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그것이 모든 방황과 불행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설교의 이야기로 듣고 기도하는 척 하다가 돌아가면 여러분의 삶에 무엇이 바뀔까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며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여러분들이 빠져있는 죄와 결별하지 못했고 그리고 세상 속에 살 때는 세상 사람처럼 교회 와서는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아서 교회 오면 세상이 생각이 나고 세상에 가면 하나님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서 자신이 낯설고 세상에서도 자신이 낮선 모순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정직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대면하셔서 개인적으로 물으시는 주님 만나야 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 앞에 서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받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사랑을 받음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그 사람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다 바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도 않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이 주님의 질문이 처음에는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다가 나중에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은 웅장한 소리가 내고 마지막에는 천둥벼락이 치는 것처럼 큰 함성으로 들릴 때 여러분 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인간은 사랑을 받음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므로 서 행복해질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런 사랑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자신에게 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 충만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은혜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을 믿음으로 지납니다. 그 두려움은 변하여 기도가 되고 좌절 속에서 뿜던 그 한숨은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회피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 헛된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 그러지 마십시오. 신앙은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에게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그분께로부터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 우물이 얕게 파면 가물면 금방 마릅니다. 지혜로운 어른들이 힘들어도 깊이 팝니다. 그러면 가뭄이 온 동네에 들어도 여기에는 물이 항상 차가운 물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고여 있습니다. 두레박을 던집니다. 두레박이 한없이 내려갑니다. 첨벙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줄을 흔듭니다. 왜? 세모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두레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물이고이면서 무게 때문에 물속으로 쑥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득 담기위에서 우리는 들었다가 한번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풍덩 소리가 나면서 두레박에 물이 가득 고입니다. 우리는 들어 올립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는 이렇게 그냥 의식이 없이 단어를 나열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의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지어낸 말 말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언어를 두레박을 올리듯이 길어 올려서 띄엄띄엄 진실하게 하나님께 말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서 나온 말이면 그 말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거기에서 회개와 간구와 기도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이렇게 물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의 음성을 듣게 만들어주는 힘이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질문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을 모두 질문 하신 후에 “그러하오이다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받아 내신 후에는 예수님이 똑같은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처럼 예수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신해서 걸레처럼 되어버린 사람을 또다시 부르셔서 당신 섬기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원래 요한복음 21장은 없어도 되는 장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을 보면 요한복음의 끝으로서만이 아니라 4복음서 전체의 마무리로써 손색이 없는 그런 완벽한 끝맺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요한복음 21장이 없었으면 우리는 매우 커다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 까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베드로를 비롯한 그 뛰어난 사도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가서 실패한 사람들로 복음서 전체가 끝이 납니다. 그런데 두 장을 넘기면 사도행전에서 그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중요한 사람들이 되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지겠습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죄는 어떻게 된 것인가? 변절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한복음 21장을 요한복음 그리고 4복음서 전체의 부록처럼 여기다가 매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를 통해서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그 기록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장을 지나 21장을 읽은 후에 우리는 사도행전 1장 2장에 나오는 제자들이 지도자가 된 것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섬김을 받으심으로 그렇게 제자들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과정이 위대한 복음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했던 사람이 패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신했던 사람이 사명 자가 되는 회복의 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목자의 직을 맡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실패한 그에게 나타나서 네가 어디에서 공부를 했느냐 네가 얼마큼 능력이 있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육체로 태어나지만 영혼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가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분명한 목적을 그에게 알게 하십니다. 우리 모든 인류의 지문이 다른 것처럼 주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가 이 세상에 있어야할 이유가 있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당신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인생의 최고로 아름다울 때가 언제일 것 같습니까? 주님이 너무 우리에게 시키고 싶어 하셨던 일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인생의 좌표를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는 그 안에서 하늘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다위에 떠 있는 배가 물이 없을 때 그들은 물위에 떠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닷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비를 기다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로 우리의 양식을 삼을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기쁨, 환희, 희열, 이런 단어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낯선 단어입니다. 그러한 기쁨의 삶, 희열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닌 우리 엄마도 아니고 동생도 아닌 나에게 맡기신 이 고유한 사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잠깐 동안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흘러가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세상 앞에 서있으면서 자신도 변해갑니다. 태어나고 그리고 흘러가고 마지막에 죽고 소멸합니다. 그게 인간의 존재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는 허무한 것들에 붙잡혀서 허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은 것과 예수 없이 사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은 요한에게 아무에게도 주시지 않은 독특한 사명을 주심으로서 그가 왜 구원 받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 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주님께 받은 용서하시는 사랑 구원해주시는 은혜 이름을 불러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이제는 너희 양 떼에게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지치고 갈 길을 잃은 수많은 양 떼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품에서 진정한 쉼과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주라는 것이 실패한 자를 다시 불러주실 때 그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신자의 인생의 진정한 보람은 자기의 뜻과 계획을 위해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의 끝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만족과 성공을 꿈꾸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다가 마지막에 손에 쥐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가 한 순간에 여러분들 앞에 드리울 때 여러분들은 할렐루야! 이중표 목사님이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그 고백을 여러분들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끊임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예수를 사랑한 사람들만이 마지막에 고백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신자의 인생의 진정한 보람은 자신의 꿈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티끌로 이 세상에 창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희생하시면서 나를 구원해주신 그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지구의 한 모퉁이에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 있는 것이 내가 없는 것보다도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린다는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작은 사명을 위해서 살아도 그는 하나님 앞에 큰 삶을 사는 것이고 이렇지 않은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 괄목할만한 지위에 오르고 재산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훅 하고 불면 날아갈 검불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좋은 인생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실패합니다.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렇게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를 받아주시는 십자가 사랑 앞에서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다. 다시 충만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십시오. 실패한 베드로를 예수님 찾아오셨습니다. 자기를 배반한 그 실패한 사람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이전에 실패했던 베드로의 삶은 끝나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되었습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로마의 궁박한 핍박아래 두려워하고 여기저기 변절하는 자들이 속출할 때 그는 소망가운데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따르도록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을 동반해 피에 절은 음성으로 눈물 젖은 음성으로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외쳤습니다. 오늘 바로 이러한 세상의 문화에 대적하며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힘겨운 현실에서도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주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바로 그때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 아침에 예수를 만나고 이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 베드로처럼 여러분들이 이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