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백지영
설교자의 고난, “고난 속에서 설교자가 태어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고, 대개 이렇게 몇 가지로 나누어서 강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들어가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기본적으로 고난의 길에 선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고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설교자가 됐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현실적인 고통이 그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 신학공부를 시작을 하고 설교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가난, 핍박, 내적으로는 끊임없는 갈등과 자기가 깨어져야 하는 이런 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 길은 일평생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꽃길만 걸어가게 하시는 설교자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나서 거친 광야에서 성장하고 그리고 교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신학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를 했습니다. 첫째, 오라티오, 기도입니다.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신학공부 방법을 이야기함 에 있어서 기도를 제일 먼저 제시했다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 묵상입니다. 당연히 이 묵상은 묵상할 재료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레티오, 읽기를 통해서 성경과 교부들의 글과 이런 신학적인 자료들을 읽고 메디타치오를 통해서 이것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메디타치오 되지 않은 단순한 지적인 전달로서의 신학공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 그 자체가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지적인 유희를 신학공부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가 탠타치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줄 뿐 아니라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도록 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무엇이? 이 탠타치오, 고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쥐똥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 그 당시에 후추가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비쌀 때는 금하고 같이 달아서 후추를 교환할 정도였다고 하니까 아주 귀족층이 아니면 못 먹는 향신료였습니다. - 그런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에 빗댈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 그러니까 이 후추같이 고급향신료는 뭐냐 하면 비꼰 것인데 교황신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레벨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거론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신학적으로 비판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저 자신은 교황주의자들의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악마의 분노로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저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런 신학자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이게 루터의 독일저작전집의 비텐베르그 에디션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고백이지요? 그래서 설교자에게는 숙명적인 고난이 주어지고 그 속에서 설교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을 당한 모든 사람이 설교가 성장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그것을 신앙으로 소화해 내고 그 속에서 진리의 참맛을 알게 될 때에 칼빈이 이야기하는 설교에 있어서의 패밀리아러티(familiarity), 친밀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을 설교하는 데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면 자기 이야기하는 것같이 성경의 진리와 이 사람의 인격이 착 달라붙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배추장사가 배추 이야기하듯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면 두 개가 벌어져서 떠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과연 저 사람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존 오웬 같은 경우는 그것을 두 가지로 찍는데 컨시더레이션 앤 어플리케이션(consideration and application)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진리를 알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컨시더레시션,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메디타치오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플리케이션,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들이 반복이 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설교에 있어서 familiarity, 성경과 설교자 사이에 친밀성을 가지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입에서 나온 설교는 잘 해야 귀에까지 도착하지만 마음에서 나온 설교는 마음까지 다다를 수 있다.”
이제 설교자가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설교자가 순회설교자가 아닌 한 설교자는 목회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한 사람의 설교가 성장하는 것은 목회 속에서 신앙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지 설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그 설교자체가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음으로써 설교가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준이 상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의 방식과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수준의 문제라는 것은 이것은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변화 없이는 수준이 점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그 설교를 하기까지 하나님은 가혹하리만치 잔인하게 설교자에게 고난의 길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그러면서 진리의 대언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목회를 하거나 설교자로 살면서 우리는 수없는 모함과 비난을 받습니다. 그리고 태어났는데 굉장히 많이 설교하고 다니고 목회를 하고 했는데 한 번도 비난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면 존재감이 없는 것이지요. "뭘 이야기하든 너에 대해서는 우리는 관심이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가 권한이 있는 것처럼? 10.35) 그리고 자기가 진리를 선포하면서 이런 고난과 모함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이 그 진리를 모두 기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도 그런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칼빈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저에게 신학적인 감화를 많이 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후에 관심사가 계속 바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저에게 그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까 보여 준 그 삐에르 예배당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2세대이기는 하지만 칼빈하고는(루터하고는? 11.30) 너무 대조적인 캐릭터를 가진 인물입니다. 루터와 같은 경우는 거의 풍운아적인 삶을 산 사람이고, 그리고 칼빈은 성향 자체가 내성적이고 그야말로 샌님타입의 사람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렇게 제네바에서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네바에서 이 사람이 목회를 할 때에 목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그러니까 추방당하고 다시 부임을 하는데 그때 교인이 오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임종할 때쯤에는 만 오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만 오천 명은 장난이 아니고 많은 숫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네바에서 이 분을 무시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분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세르베테스를 화형 시키는데 앞장을 서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어쨌든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 쌓이면서 이 사람의 설교가 단단해지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삐까르디출신입니다. 촌놈출신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불량한 선포자다." 시의회 의원 삐에르 아모의 이야기이고, 가장 악명 높은 칼빈의 비난자가 있었는데 제롬 볼섹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생전에 칼빈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들었고 사후에는 구제불능이고 짜증나며 사악하고 불만족으로 가득 찼다. 동성애기질을 보이며 모든 여성들에게 성적으로 탐닉했던 인간이었다." 이렇게 비난을 하고 다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분은 스위스 바젤대학에 있는 이레나 바쿠스라고 하는 학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전공이 17세기입니다. 16세기, 17세기 전공인데 이분이 이러한 비난의 문제를 가지고 논문을 씁니다. 그런데 알리스토 메크레스가 쓴 책에 의하면 제롬 볼섹과 이런 사람들이 칼빈에 대해서 악의적인 비난을 했는데 그것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유럽에서 2백 년 동안 칼빈이 안 읽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레나 바쿠스가 당시에 있었던 베자의 칼빈 전기, 그 다음에 꼴라동이라고 하는 사람이 16세기 칼빈과 동시대사람인데 그 사람이 칼빈에 대해서 쓴 전기, 그리고 볼섹이 쓴 전기 이런 것들을 모두 모으고 주변의 자료들을 다 면밀히 조사한 결과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볼섹이 칼빈에 대해서 온갖 비난을 하는데 그러니까 근거가 뭐냐 그랬더니 "나는 이것을 모두 자료를 보고 한 것이고 그리고 진짜 높은 사람하고 내가 만나서 이야기면서 전해들은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 도대체 만난 사람이 누구고 자료가 뭐냐 라는 끊임없는 질문이 있었을 텐데 그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발을 빼고 더 이상의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그런 갈등의 원인을 밝혀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칼빈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데오도로 베자가 칼빈을 워낙 존경을 했고 마지막에는 진짜 칼빈의 삶이 거의 성자에 가까운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데오도로 베자는 마지막 남은 칼빈의 생애를 보면서 이 칼빈의 경건과 하나님 사랑은 모든 중세의 신학자들과 초대교회 교부들을 능가할 정도라고 전기를 씁니다. 그것에 대한 반론으로서 그런 비평들이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볼섹이 거짓말과 소문과 전해들은 이야기들에 의존하였음을 거의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같이 이렇게 탁월한 학문과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아시아 지방에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증언을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어쩌면 순교하게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의 삼년동안의 사역에 대한 결산서였습니다. 그 모함 당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날은 참 걱정입니다. '뻑'하면 사회법정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치리와 평가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작하자마자 법정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노회나 총회에서 이것을 판결할 때 아주 엄밀하게 판결을 해야 되는데 정치적으로 휘게 판결을 하니까 판결내린 것 마다 법원에 가서 다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권위가 땅에 실추한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교회 최종적인 판단자가 법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된 교회가 너무 잘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하는데, 그래서 사랑 장에서 몇 가지로 사랑의 특징이 나옵니다. 그런데 '매크로 듀메오'라고 나오는데 '듀메오'는 '참다'고 '매크로'는 '최대한'입니다. '최대한' 혹은 '최장기간'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참고. '스테게'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덮개'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래서 '커버(cover)'입니다. 그래서 허물이 있는데 없애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견디느니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휘포 메노’, '휘포'는 '언더(under)'라는 뜻이고 '메노'는 '머물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그냥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면서 사랑으로 악을 이기면서 그 설교자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한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 아픔 속에서 설교가 영글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은 구절입니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이러한 진리가 저를 움직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에 대해서 보여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사도 바울의 아포슬쉽(apostleship),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하도 답답하니까 편지를 쓰면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사도다. 진짜 사도다. 나에게 표가 있다. 내가 사도임이 틀림없는 표가 있는데 그것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다." 이게 먼저 나온 게 아니라 "참음"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사도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예수 만나서 임명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 그리고 이야기하지만 나 진짜 사도다. 증거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진짜 사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래 참았겠느냐?" 그리고 그 다음에서야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성격적으로 아주 독선적이고 키도 작고 목도 짧고 광대뼈 튀어나오고 그리고 아주 독선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십자가 사랑으로 한없이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었는데도 울뚝불뚝 그게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바나바하고 대판 싸우는 사건이라든지 이런 것들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참으면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가 진정으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린도전서 13장 같은 원래의 사도 바울의 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예로 든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은 많은 설교자가 그런 많은 고통들을 인내하면서 이겨내는 가운데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열세 살에 예일대학을 입학하고 그리고 4년 후인 열일곱 살에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 졸업식 때 졸업 식사(式辭)를 라틴어로 스피치를 합니다. 이 사람은 세 살 때부터 글을 쓰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여섯 살 때 자연철학에 관한 소논문을 발표하고 여덟 살 때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글을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는 조금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라틴어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 대학에 강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 사람이 주님을 아주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에드워즈가 됩니다. 어쨌든 전도양양한 학자의 길을 걸어갈 줄 알았던 사람이 외할아버지 교회에 부목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할아버지를 이어서 목회자가 됩니다. 그때 교회가 노샘프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소위 이 교회가 지지하던 반쪽 언약의 문제였습니다. 하프웨이 카버넌트(Half-Way Covenant)라고 해서 이것은 성례에 참여하는 사람의 자격이 무엇이냐 할 때에 반쪽 언약상태만 있어도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진정한 회심이나 구원이 없어도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조상이 예수를 믿었으면 그냥 언약자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런 논리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하자면 교회에서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때 그 교회가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동부에서 제일 큰 교회였고 출석하는 사람이 공동의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6백여 명쯤 됐으니까 아마 그 당시에서는 제일 큰 교회였고 가장 훌륭한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심방이나 교제 이런 것에 별로 재능이 없다, 혹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하루에 평균 열 세 시간씩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손끝에서 지금 예일대학에 나온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이 이십 삼권인가로 되어 있는데 두 권이 volume 1, 2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십오 권입니다. 한권의 분량이 대개 7백에서 8백 페이지입니다. 그런 저작들을 써냅니다. 일 권부터가 우리의 기를 죽입니다. '프리덤 오브 윌'(Freedom of will)이라는 책인데 제가 두 번을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크 트웨인이 하루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일 권 프리덤 오브 윌을 읽다가 집어던지고 이 글은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에드워즈도 과연 이것을 알고 썼을까?" 이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난해한 작품입니다. 주제 자체가 난해하니까. 그런데 결국은 해고를 당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어스킨에게 보내는 1750년 5월 편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던져졌기에 - 자녀가 11명이었습니다. 참 대단했지요? 또 나이도 대개 차이 많이 여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사라 피에르 폰트인데. 스무 살 먹은 목사가 열두 살에게 청혼을 했다니까 요즘에는 이해가 잘 안가지요 그런데 그때는 조혼이었으니까 - 많은 가족들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 26.50) 손에 잡힐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만한 어떠한 문도 보이지 않습니다." 막막한 가운데 인디안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그때 마지막 남긴 설교가 심판 때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이 원고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되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명설교입니다. 그런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도 깊이 있는 설교자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결국은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설교자다운 설교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희망은 꽃길만 걷다가 활짝 핀 국화꽃 같은 설교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길 없습니다. 그리고 빤질빤질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면서 걸어가면 설교도 망가집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십니까? 저는 금방 알겠습니다. 한 사람이 설교하러 올라가서 한 십분만 들으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부의 깊이가 보이고. 그러면 거의 다 보는 것 아닙니까? 금방 잘 알아봅니다. 오히려 평신도들도 잘 알아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의 설교는 그렇게 쉽게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로서의 고난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수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목회를 하는 경우에는. 그래서 목회지가 없는 설교자는 설교가 계속 깊어지면서 성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신앙적으로 아주 깊게 많은 묵상을 하고 자기와 씨름하는 하는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하고 섞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웬만하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하고 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내 책을 읽고 혹은 나의 설교를 듣고 공감을 표시해 주는 사람하고 있을 때 심신이 릴렉스 되고 편하지, "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저는 이상하게 동의가 안 되는데요?" 이러면 스트레스 받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어디 그런 게 있느냐고 따지고 들 때는 더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이겨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설교가 두 가지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해는 따로 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한 것만큼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이해한 것만큼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도안 상으로 같은 사람이 있는데 원래는 다 다른 사람으로 그렸어야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인데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한 피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실 때 한 가지 성향 혹은 한 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사용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젊은 나이에 설교가 아주 탁월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저도 제 나이 만으로 서른셋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오늘날의 설교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가 원래 구약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구약언어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관심이 많고. 그래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특히 우가리트어는 신대원 3학년 때 혼자 사이러스 고든의 6백 페이지짜리 책을 독학으로 띠고 토판(土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카드어, 아카드어는 함무라비법전에 쓰여 있는 언어입니다. 그런 것에 푹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나한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나? 물론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지금도 제가 텍스트를 보고 있지만 우가리트어나 이런 것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겠지요. 들여다보면 또 다시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사상 이런 것에 심취하면서 제 인생에 전환을 이루게 됐는데, 이때 하나 깨닫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무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살다 갔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다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우면서 성숙해 지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자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강사로 와서 한번 설교하고 가는 거야 어려울 게 없겠지만 함께 설교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설교자입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경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크기는 작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냐 하면 병든 것입니다. 사랑이 벌써 식었습니다. 회색으로 변했잖습니까? 그리고 이 사람은 아예 나동그라져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살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 위해서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끄러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까지 품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다 끌어안고 설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불평과 원망 그리고 설교 내용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다 다 끌어안고 미성숙한 지체들을 용납하며 가는 그 정신과 심령의 고통 속에서 설교는 업그레이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뭘 몰라서 그래. 그리고 올바르지 않아. 내가 정당해."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그것은, 이런 설교자가 고난을 당할 때 그때에 그런 많은 고난을 자기죽음의 기회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은,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은 두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옛사람 또 한사람 새 사람이 있습니다. 새 사람은 구원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본성이라면 옛사람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그게 구원받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죄의 지배는 끝났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이기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옛 본성을 죽이는 기회로 삼으면서 설교자는 그 고난에 대해서 아주 생생한 경험을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독트리나라고 하는 ‘기독교교양론’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포르마 비벤디 꼬피아 도켄디(38.20)”, 라틴어로 말하자면 "삶의 형태가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가르침의 깊이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집사람하고 어제 교회에서 있었던 회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전도의 중요성을 나누는데 그런데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신학교 다닐 때 은혜를 받아가지고 불이 붙었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한 일 년 동안 밤마다 전철에서 전도한 적이 있는데 맨 처음에는 다 미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망신시키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에 사로잡혀서 전도를 하고나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합니다. 그러면 불량배들이 나를 끌어내리려고도 하고 그랬습니다. 끌려가서 얻어맞지는 않았습니다. 지혜롭게 싹 피했는데 끌어내리려고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치열하게 전도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런다고 보자 이것입니다. 그리고 강대에 올라가서 전도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가 살아있을까요? 죽어있을까요? 물론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았으면 깊이지는 모자랄지 모르지만 듣는 모든 사람이 이상하게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전도해야 되겠구나. 내가 전도를 안 했어. 아 이런 나쁜 일이 어디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입니까? 포르마 비벤디, 포르마는 형태고 비벤디는 삶입니다. 삶의 형태입니다. 그것이. 삶의 형태가 전도자가 되니까 전도에 대한 가르침이 꼬피아 도켄디, 가르칠 것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목사는 무엇을 설교해야 될까요? 전도만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불신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신자에게는 선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또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히 행하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불신자를 향해 두 개는 신자를 향해서입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방면에 대해서 설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 되겠습니까? 설교자가. 예를 들어서 오늘 설교해야 될 것이 사랑이다, 그러면 그 사랑이 매일매일 누군가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설교가 살아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일은 기도에 대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기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일찍 와서 산속으로 올라가고 밤이면 산속에 올라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 우리 신학교 다닐 때 그랬습니다. 한 학기 딱 끝마치면 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씩 금식을 합니다. 기도제목이 없어도 한하기 동안의 찌꺼기들을 다 털어내는 것입니다 - 그렇게 기도에 불이 붙어 있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설교가 살아있겠습니까? 안살아 있겠습니까? 그러면 설교자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삶의 모든 방면을 설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전 방위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치면서 살 때 설교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게 포르마 비벤디 꼬피아 도켄디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기를 열망하며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는데서 설교다운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옮기는 것 가지고는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영혼을 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 이게 제가 10년 전에 신학을 하다가 그때는 진짜 공부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제가 건강하기도 했고 십삼 년 됐는데, 그때 제가 신학을 공부하다가 필요를 느껴서 몇 가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게 생물학, 의학, 천문학, 그리고 심리학, 법학은 원래 제가 좋아해서 공부를 했고. 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교회가 꽤 규모가 있었고 정신없이 바쁠 때였으니까 제가 다시 대학을 들어가고 대학원을 들어가고 학원을 다니고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과외선생을 초치(招致)했습니다. 그래서 한창 많이 나갈 때는 한 달에 과외비가 160만원씩 나갔습니다. 개인 돈으로 다 냈습니다. 그래서 박사과정 거의 끝나가는 사람들 혹은 그런 사람들 불러서 했습니다. 그때 생물학을 배웠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 사람은 이 의미를 모르는데 저는 이것을 공부하면서 일생에 잊히지 않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피부입니다. 피부가 지금 이렇게 죽어있는 것이지요? 독거미에게 물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스파이덜 바이트(spider bite)에 의해서 셀(cell)이 네크로시스되고 있는 것이지요. 희랍어에서 익숙한 단어 아닙니까? 네크로스, 죽은. 네크로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포의 죽음 중에서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타의적인 죽음입니다. 화상이나 타박상 혹은 독거미 같은 것에 물려서 화학물질에 대한 자극으로 세포가 팽창하면서 괴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네크로시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해가 다 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 사이에도 안 밝혀진 세포의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아포프토시스라고 하는 어려운 용어인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포가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안 밝혀졌는데 그냥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세포의 원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세포가 생명을 다하거나 혹은 외부의 타격에 의해서 죽습니다. 네크로시스입니다. 죽으면 그 세포가 잘게 찢어집니다. 찢어진 것을 식세포가 삼키고 리소솜(lysosome)에서 소화를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ATP라고 하는 화학에너지가 말하자면 주위의 세포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전력이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포는 분열을 계속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의적인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전체가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 세포들이 네크로시스와 아포프토시스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60조개의 꼬마전구가 사람모양으로 있는데 그게 깜빡깜빡하면서 꺼지고 다시 켜지고 꺼지고 다시 켜지고 하면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생명과 죽음이 반대인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생명과 죽음이 반대가 아니라 죽음 때문에 생명이 가능해 지는 패러독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놀랍습니다. 그 세포 안에서 프토시스의 작용이 계속 일어나게 돼 있는 것인데, 그런데 어떤 세포의 경우에는 아무도 프토시스의 죽음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세포들이 살기 위해서 다른 곳에 있는 영양분들을 빨아 당깁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성질을 온 몸에 전파합니다. 이것을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아들이면서 아무도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데는 바짝바짝 말라가고 한 부위만 단단한 살덩어리가 되어 갑니다. 그게 압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암에 의한 사망은 충만한 생명력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데 나는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무대입니다. 1995년 4월 1일 허블망원경이 못 보던 성운 하나를 탐지해 냈고 촬영을 했습니다. 그것을 전송해 왔는데 지구로부터 약 7천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독수리성운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있는데 여기 보면 하나 둘 세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 50.50) 요기서부터 여기까지가 4광년입니다. 빛이 4년을 달려가야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이 구름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뭐냐 하면 성운입니다. 그래서 먼지입니다. 작은 먼지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먼지들은 어디에서 생겼느냐? 우주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H'라고 하는 수소만 있는데 그것도 띄엄띄엄 있어서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의외 적으로 이런 공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이, 마지막 별이 자기의 생애를 마칠 때 폭발과 함께 끝납니다. 쾅하고 터집니다. 터지면서 먼지로 변합니다. 먼지로 변한 것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서로의 중력에 의해서 이렇게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진 것들이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들이 서로 결합을 하면서 핵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핵반응이 일어나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있는 수소들이 모여서 축구공 하나 정도로 농축이 되면 태양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뭉쳐지면 뭉쳐진 것들이 계속 시간이 흐르면서 크기를 점점 키웁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이것이 폭발을 하면서 이 본체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것이 새로운 별들의 탄생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새로운 별들은 과거의 죽은 별들 덕분에 새 별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공간에 있는 천문학적이 별들의 죽음과 생성에 관한 원리부터 생물 안에 세포의 생성과 죽음에 관한 원리,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것이 신자 안에 있는 영혼의 죽음과 생명에 까지 한꺼번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받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합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성경에 이렇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죄 값을 짊어진다는 식으로 번역이 됐는데 그게 아니라, 희랍어 본문으로 보면 죽음의 주체가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콘포르마티오 크리스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한. 여기서 ‘콘포르마티오’라고 하는 것은 ‘형성’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틀에 넣어서 우리가 빚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교리의 핵심입니다. 자, 조금 생소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잠깐 설명을 할 테니까 이해를 한번 해 보십시오.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설교자가 인생을 살아갑니다. 혹은 목회를 하든지 어쨌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고난이 옵니다. 고난이 오는데 이때에 이 고난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그냥 고생이 될 수도 있고 이 사람의 실교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콘포르마티오 크리스티의 교리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나의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당하는 고난일 수도 있고 혹은 자기가 예전에 잘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와서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잘못과 주변의 환경이 결합이 되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그때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어렵게 터득한 것입니다. 신학 책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꼼꼼하게 놓고 오랜 시간동안을 묵상하면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들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개 콘포르마티오 크리스티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합니다. 그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어떤 이유로 당하는 고난이든지 간에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기회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고 내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합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영혼과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이 액츄얼라이즈(actualize), 실제화 되어서 이것이 침투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영혼 속으로.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가 아니라 나를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모든 욕망과 의지를 이것들이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2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에게 실제화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에 눈물 흘리면서 거짓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찬송 부르면서 간음하러 침대에 올라가는 사람 없습니다. 당연히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현재적으로 자신 속에 스며들면서 자기 안에 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죄의 욕망과 본성을 죽이고 성향을 소멸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화 되어서 자신 속에 들어오는 것과 함께 똑같이 뒤따라서 예수 부활의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설교자로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에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다 집어치워버릴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우리가 선배들의 설교만 들어도 그게 딱 나오잖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시련의 길이었다."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한 순간에 자신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막연한 게 아니라 매일매일 신자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새롭게 부어져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 속에서 설교자는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진정한 연합 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깨닫게 되면서 설교가 심오해 지는 것입니다.
"설교가 깊다"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깊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론은 쓰레기이니까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아니 인생이 얼마나 어려운건데 설교를 마냥 쉽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럽니다. 설교를 어렵게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나는 정말 정신병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고 100퍼센트 이해가 되고 무릎을 치는 책들은 많이 읽지 마십시오. 도움이 안 됩니다. 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읽고 95퍼센트쯤 이해되고 5퍼센트는 죽여도 이해가 안 되는 그래서 저자에게 달려가서 한번 개인지도를 받고 싶은 그런 책들을 읽어야지만 지적으로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어려운데 쉬운 설교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요? 사탕발림입니다. 기본적으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의 존재 그리고 신에 대한 비판적 사유입니다. 그게 신학입니다. 그 신학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견고한 삶의 뿌리에 닻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이 내가 지금 삶의 상황 속에서 당하는 고난 때문에 내 마음에 실제화 되고 그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나의 죄가 함께 죽는 것을 그러니까 죄의 성향이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죽은 것만큼 예수의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이게 '미스터리 오브 유니온 위드 갓'(Mystery of Union with God)소위 이야기하는 유니오끄 크리스토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설교자는 설교의 깊은 세계 속으로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다'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하나는 가장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듣는 사람보다 지식의 우위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깊어지려면 지적인 우위에 있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물론 모든 방면에서 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양반이 생물학 박사인데 내가 생물학에서 이 사람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위에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 신학과 성경에 관한 한은 지식적인 우위에 있어서 설교를 다 들은 다음에는 "아, 그런 거였구나. 진짜 오늘 몰랐던 것 하나를 깨달았다. 배웠다." 그런 것이 설교 속에 항상 들어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이 가보지 않은 영적인 깊은 곳에 내려갔었어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런 경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두 가지 역사적인 실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미완성입니다. 그런데 왜 미완성이 됐는지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퀴나스가 말년에 우리가 보기에는 - 물론 가톨릭에서는 미쳤다라고 신경쇠약증에 걸렸다고 취급을 하지만 - 토마스 아퀴나스는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를 흠모하면서 독신의 삶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집이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게 너무 불만이었습니다. 저 자식이 약간 세속적인 욕망도 가지고 이래야지만 내 사업도 물려주고 얘가 뭐 좀 할 텐데 맨날 예수에만 미쳐서 저러니까 아버지가 혈기왕성한 나이에, 우리나라 나이로 열여섯, 열일곱쯤 혈기왕성할 때 이 아이를 미인계를 쓰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래서 진짜 예쁜 여자애를 해 가지고 "너의 사명은 우리 아들을 유혹해서 동침하는 것이다. 자, 들어가라." 문을 열고 집어넣었습니다. 이 여자가 와 가지고 아양을 떨면서 교태를 부리며 아퀴나스가 다가갔습니다. 아퀴나스가 그때 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벽난로에 가서 타고 있는 나무장작을 하나 꺼내어 그리고 벽에다가 십자가를 그린 다음에 "사단아, 물러가라." 해 가지고 결국 이 여자를 불붙은 장작으로 쫓아냈다는 그런 일화가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해서 좀 뚱뚱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그런 사람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어마어마한 지식의 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데 어쨌든 신학대전을 씁니다. 요즘도 개신교에서는 물론이고 가톨릭조차도 이 신학대전을 안 읽어서 가톨릭신학교에서도 고민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오죽했으면 김수환 추기경이 "아퀴나스를 읽자!"하고 운동할 정도였습니다. 유장한 필치로 대단합니다. 여러분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사실은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한번 몰입해서 아퀴나스를 읽어보고 싶은데 사실은 그게 안 됐습니다. 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데 어쨌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나이로 보나 건강으로 보나 모든 것을 볼 때 더 쓸 수 있는 나이인데 필(筆)을 딱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안 쓰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성령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고백을 했느냐 하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났더니 이때까지 내가 쓴 신학대전이 지푸라기와 같았더라."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팡세 저자인 파스칼 이야기입니다. 파스칼의 팡세는 사실은 완성작이 아닙니다. 파스칼이 당시에 있는 무신론을 논파할 작정으로 방대한 유신론 변증서를 쓰기로 작정을 하고 다년간에 걸쳐서 자기가 깨달은 바들을 집적해서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모은 다음에 펼쳐놓고 방대한 유신논증을 펴려고 했던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게 완성이 안 되고 팡세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 사람도 역시 글을 잘 안 씁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죽을 때까지 입고 다녔던 외투가 있었는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외투에 이쪽에 천이 붙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불’ 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이제껏 자신이 알았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영어로 말하면 비욘드 디스크립션(beyond description), 묘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 구절을 내가 잘 외우지는 못했는데 그런 내용입니다. 자기의 일기 속에 "불, 불, 불,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 하나님" 이런 이야기들로 꽉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가 깊기 위해서는 그런 신비적인 경험을 해야 된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설교가 깊이가 있기 위해서는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인간의 고민을 녹여낼 수 있는 설교여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실수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일단 자기가 설교단에 올라가면 이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면서 이제 말하자면 불신자와 소통할 수 있는 접촉하는 면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문학과 철학과 사상입니다. 특히 문학은 인간이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공감하게 해 줍니다. 모든 인간을 다 경험할 수 없으니까 문학을 통해서. 철학은 그 고민을 풀어내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이 특히 우리 교단에는 많이 있는데 나는 항상 후배들에게 타이릅니다. "충고하는데 20년을 설교해도 마르지 않는 깊이 있는 설교가 되려면 주님도 깊이 만나고 신학공부도 많이 해야 되겠지만 일평생 철학을 부전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해라 그래야지 설교가 깊이 있는 설교가 된다."
강의를 정리를 하겠습니다. 칼빈은 이제 이런 고난의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확장을 교회론 적으로 연결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우려함이라" 사실은 그리스도가 남은 고난이 있다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어떠한 인간의 참여에 대해서 배타적인 그리스도만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신자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당신의 고난을 남겨주십니다. 교회에 남겨준 고난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는 제가 설명할 때 고난을 당하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을 가지고 설교자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예수가 남겨두신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많은 고통들을 교회 안에서 쉐어(share)합니다. 함께 나눕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이냐 하면 아까 영적으로 미끄러지고 미숙한 교인, 심지어 교회에 반발을 해서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올바로 잡고 사랑으로 교화하고 그 다음에 목양을 하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는 진공 속에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개인적으로 엄마가 죽고 아버지가 아프고 애들이 사고를 치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을 다 당하면서 교회적인 그런 고난에 자기가 동참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자신 속에 침투하고 그리고 자기의 죄 된 성향이 죽고 그 다음에 예수의 생명이 스며들어오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성화와 교회전체가 온전한 교회가 되어 가는 것, 이것을 통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모두 다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여러분들에게 책을 한권씩 나누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남겨드리는데 오늘 강의와 연장선상에서 쉽지 않습니다. 읽다가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좀 과장을 하자면 한 줄 한 줄을 피로 썼습니다. 고통이 아니었더라면 나올 수 없는 책입니다. 그리고 읽는 것을 편의롭게 읽기 위해서 뒤에다가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를 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원하시면 그 비블리오그라피를 하나하나 찾아가서 그래서 읽으시면 되고, 이 책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파란 책으로 하드커버로 나왔습니다. 가서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읽어보신다면 신학의 또 다른 개안을 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끊임없는 고난 속에서 비로소 설교자다운 설교자가 되어가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진정한 설교자로 거듭날 수 없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강의 감사드립니다. 강의를 듣고 제가 이해한 바로는 깊이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그 다음에 우리 사역가운데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영혼을 살리고 우리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컨시더레이션과 그것에 대한 어플리케이션을 하나님의 말씀 또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역적으로 잘 연구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그런 게 느껴집니다.
(답변) 존 오웬이 컨시더레이션 어플리케이션을 이야기할 때는 문맥이 좀 다릅니다.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아, 이런 거구나’ 하고 스쳐지나가게 하지 말고 그것을 여기에 있는 것을 계속해서 내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 컨시더레이션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메디타치오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이성으로 이해한 것들이 마음으로 내려오게끔 그것이 컨시더레이션의 핵심이고, 그 다음에 어플리케이션은 그것을 가지고 이 안에서 내면속에서 관조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하나의 의지를 움직여서 자기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자기가 감화를 받은 그 말씀을 구현해 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아, 그거였구나.’ 그리고 생각한 다음에 ‘그것을 수용하기는 너무 고통스럽고 내가 희생하는 게 너무 많지. 이것 빼놓고.’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려오면서 이 안에서 고통을 받더라도 그 안에서 그것들이 소화되면서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 말씀이 꽃피게 하는 것 그게 어플리케이션입니다. 그런 것들이 개인적으로만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마치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왜 인기강사들이 하는 것처럼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질문) 예,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이제 그 어플리케이션을 모든 방면에서 이루기 위해서 설교자가 오늘 강의하신 표현을 빌자면 죽어야 되는 것인데 교수님이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고 특별히 깨닫게 된 모멘텀이 있으십니까?
(답변) 그것은 또 얘기하면 굉장히 깁니다. 혹시 서점에 가시면 ‘존 오웬의 신학’이라는 책이 있고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으면 2004년도에 출판문화상을 받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되고 지금 질문에 대해서는 첫 번째 책 읽어보시면 거기에 아마 나오게 될 것입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하나만 질문 드리겠습니다. 지금도 그러면 컨시더레이션과 어플리케이션을 적용하기 위한 몸부림이 교수님 계속되고 있습니까?
(답변) 살아있는 동안에 그것이 없이는....
(질문) 예, 그것을 교회에서나 아니면 강의하실 때나 설교 하실 때 어떻게 적용하실 것인지에 대한 개인의 스케줄이 있으십니까?
(답변)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레졸루션(resolution)이라고 하는 결심문을 씁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도 전통적으로 소위 이야기하는 언약서 비슷하게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좀 약간 율법주의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 항상 설교자의 사고는 항상 말씀중심의 사색 속에서 사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져도 설교자가 보는 것은 그 속에서도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러한 말하자면 전방면적인 사고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질문) 예, 그것을 예를 들어서 말씀을 준비하시거나 강의를 준비하실 때 월요일에는 자료를 찾고 말씀을 묵상하고 ....
(답변) 아, 그런 것은 나의 일상적인 생활에 관한 계획이고 그 계획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해야 될 일은 많으니까 항상 계획성 있게 살아야 하겠지요. 그것은 그것이고 그러나 이제....
(질문) 그것을 저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답변) 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 오늘 설교 준비해야지’ 그리고 생짜로 성경을 펴는 것은 그것은 좋은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자가 되기 전에 좋은 청중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몇 있는데 좋은 예배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기도회인도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그리고 남의 설교에 좋은 청중이었던 적이 없는 설교자, 이런 사람들은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설교에 좋은 청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설교 준비할 때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설교하시고 그리고 그 설교를 성경을 통해서 조용히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설교를 하겠다고 성경을 열고 곡괭이를 드는 것은 너무 직업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은혜를 흠뻑 받고 그것을 학문으로 다시 점검하고 확장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밭에 나가서 말씀의 밀을 가져다가 자기 깨어짐으로 빻아서 기도의 눈물로 반죽을 한 후 성령의 오븐에 구어서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베푸는 것이 설교다.” 눈물로, 눈물 정도로 한 것은 너무 약과지요 사실은 거기다 피로 반죽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질문하십시오.
(질문) (? 1.29)아까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문학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읽어보니까 .감명이 깊었다라든지 (?) 혹시 소개해 주실만한 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그런 문학책들을 10대에 읽었어야 합니다. 지금 목사가 됐는데 어느 목사가 도스토예프스키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죄와 벌을 3일 동안을 읽었는데 목사가 그렇게 할 시간은 없잖습니까? 물론 한가하게 노는 목사님들이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늦었는데 이상적인 것은, 저는 하나님께 감사한 게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그런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는데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 다녔습니다. 제가 14년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길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신은 존재하는가?” 네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교회 다녔는데 교회는 그 질문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대답을 안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나이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의 눈에 보기에도 예수 믿는 사람 모두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도 인생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목사님 전도사님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학교가고 싶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12년 동안.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데 읽으면 문학작품의 좋은 점은 무엇이냐 하면 인생의 고민을 다양한 각도에서 하는 것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모든 사람을 만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한참 읽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다 시시해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질문만 하지 답은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사상, 철학 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인기가 실존주의의 사르트르, 하이데거, 프리드리히 니체 이런 사람들, 애들이 다 읽겠습니까? 깝짝깝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여튼 나는 열심히 읽었습니다. 몇 년 그러고 있다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느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들이 길을 찾았다고 하는데 본인이 별로 행복한 것 같이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두 권을 읽었는데 최초로 마음의 안식을 느꼈습니다. 그게 인생론이라는 책하고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톨스토이의 고백록도 읽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없이. 그런데 문제는 지금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가 권하기는 화장실에 걸어놓고, 그리고 저를 가르쳤던 김희보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와 휴식의 차이는 이것이다.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다.” 명언이었습니다. 휴식시간에 읽으십시오. 그래서 읽는데 고전부터 읽어보십시오. 현대소설 이런 것들은 커다란 맥락을 잡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읽으세요. 고전부터 시작해서 읽으시면 나름대로 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해설 같은 것 보고. 그 다음 또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없으시면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