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주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8~11)
녹취자 : 오희열
우리는 흔히 “목회”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저는 전도사 때부터 “목회”라는 말을 들으면서 한 번도 그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이 과연 목회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젊었을 때는 연세 드신 목사님들이, 당신들이 목회를 달관하신 것처럼 목회의 지혜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때로는 열정을 가지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나 강의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훌륭하기는 했지만 전체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목사가 되고 5년이 지나고 나서야 저는 목사의 직무의 범위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눈을 뜨게 되었고 “정말 목회가 성경적으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그림을 갖게 된 것은 그 후로 훨씬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제가 온몸으로 살아낸 개척교회를 하고 이제껏 교회를 일구어온 나의 목회의 경험이, 나에게 목회가 무엇인지를 다 가르쳐주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실천하면서 목회하는 그것과 함께 저의 끊임없는 신학적인 탐구와 철학적인 탐구가 저에게 목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진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른 학문들을 공부하면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성경의 진리들을 보고 목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오늘 읽은 본문을 가지고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은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어쩌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는 이 노사도가 마음을 졸이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목회의 본질”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했습니다. 목회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면 목회란, 한편으로는 사람을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계속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바울은 성경의 효용성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불신자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은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전자는 신자의 인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완전했었는데 성경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서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선한 일, 하나님은 에베소서에서 인간이 바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한 일을 위해서, 그 일을 잘 행하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목회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사도바울은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했습니다. “점점 더”는 희랍어 성경에 “말론 카이 말론”이라고 나오는데 문자 그대로 “더하고 또 더하고”, “the more and the more”,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정도 사랑하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사랑하면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신자의 목표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어제보다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이 지나온 날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지만 미래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을 가장 덜 사랑하는 날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여야 합니다.
예수 잘 믿던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고 혹은 하나님을 치열하게 섬기던 사람이 나태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식도 늘어나고 경험도 쌓였는데 왜 그렇게 됩니까? “말론 카이 말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구도 “나는 이미 그 표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구원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그 사랑이 계속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자가 하는 일은 실로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설교, 심방, 그리고 교회의 건축, 심지어 디자인의 감각도 필요하고 조직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행정력도 필요합니다. 사람을 인화할 수 있는 탁월한 교제의 능력도 필요하고 어려움을 잘 이겨갈 수 있도록 튼튼한 멘탈리티를 가져야 합니다. 진리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선포하지만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좋은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목회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 중에 하나는 은행에서 대출을 잘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말 안 듣는 장로를 혼내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미끄러진 교인들을 격려하여 다시 일어나게 하고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을 타일러서 함께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 하는 재능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말같은 밥통도 필요합니다. 심방가는 곳마다 잘 먹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목회자가 해야 하지만 그중에 아무것도 목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심지어 설교도 말입니다. 설교는 설교 자체가 목표일 수 없습니다. “봐라. 나는 이 정도의 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 정도로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다. 난 이 정도로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정도로 수사력이 뛰어난 문장을 구사한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설교의 목표일 수가 없습니다.
군인이 전투에서 총을 겨누는 것은 어떻게 총을 겨누는 것이 사진으로 멋있게 나오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적군을 사살하는 것이고 전투의 목표는 거기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투의 목표는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설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심방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권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많은 교인을 모아놓고 소그룹으로 가르치는 성경공부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많은 교인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미끄러진 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심으로 주님을 배반했던 모든 제자들에게 영적인 회복의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림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지휘를 받으면서 함께 동역하며 확장되어 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어보신 세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뜻은 결국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전 그리스어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세 종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은 각각 다른 방면에서 보고 언급한 것입니다. 그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신학교를 나왔니?”, “대학은 어디를 나왔니?”, “전공은 무엇을 했지?”, “충분히 경력을 쌓았니?” 이런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너는 충성할래?”, “순교할 각오는 되어있니?”, 이런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마치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한 번씩 지워주시는 것처럼 세 번을 질문하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대답은 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임했을 때, 그것은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교회에 능력을 주신 사건?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를 세운 사건?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하늘이 열리며 어마어마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때야 비로소 눈에 비늘이 벗겨지며 진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입니다. 목회는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 일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하나가 없으면 도저히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될 때, 선교사로 올 때 한 번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회심과 함께 샘이 터지고 하늘이 열리며 비가 쏟아지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거듭난 신자의 마음에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구원받았다고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깊은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구원의 핵심은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놀라운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사람이 사랑을 했습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사랑했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요한 사도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왜 세상을 사랑했습니까?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모든 죄의 의지적인 뿌리를 “자기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모르 수이” 자기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사랑을 부수시고 예전에 없던 새로운 사랑을 그 마음에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주십니다. 신자의 마음 속에서 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자가 이런 사랑이 주어졌는데 처음에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처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지거나 점점 더 쪼그라듭니다. 죄가 커지면, 자기 사랑이 커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작아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면 자기 사랑이 축소됩니다. 신자 안에는 여전히 죄라는 것이 있고 이 죄의 정체는 자기 사랑입니다. 이 죄가 융성해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약해집니다. 그러면 목회란 무엇인가? 이 자기 사랑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이러스처럼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여러분에게는 자기 사랑이 없습니까? 저에게는 자기 사랑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은 어차피 있는데 이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죽이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점점 더 커지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사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목회자는 선교와 떼어 놓을 수 없이 일생을 같이 삽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는 목적 아래 있습니다. 목표는 목적의 하위 개념입니다. 전투에 한두 번 이겨도 전쟁에서 질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전투에서 아무리 이겼어도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선교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냐? 물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은 전도해서 어떤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까? 다 목사를 만드는 것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사회의 엘리트로 만드는 것입니까?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절대 엘리트가 못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주 극소수만 엘리트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도 선교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표는 물론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다음에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을 만들고 싶은가? 지도자로 세우고 싶다? 그것도 목적은 아닙니다. 지도자가 되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을 지도자 옆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도와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린교회의 지도자는, 사람으로서는 궁극적으로 저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도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5천 명 가까운 성도들이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합니다. 지도자?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목사가 되는 사람도 적습니다. 목사가 되느냐, 지도자가 되느냐, 지도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느냐, 목사가 있는 교회의 집사가 되느냐,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정치인이 되느냐, 어머어마하게 큰 음식점의 사장이 되느냐, 아니면 그 집에서 접시를 닦는 일꾼이 되느냐, 그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양태, 혹은 양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각자 예능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예능인으로 살듯이 각자의 모습으로 살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선교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사랑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불신하는 자들을 지옥에 던지시고 남은 사람을 통해서 어떤 나라를 이루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결국 사랑의 나라를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그 사랑의 나라가 바로 교회의 비전입니다. 그 사랑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세계로 통합됩니다.
이제 한 가지 소결론을 내립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 구원을 얻을 때는 하늘로부터 부어지지만 그 다음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설득되고 성령의 감화를 받음으로써 그 사랑은 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물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인간 속에 그 사랑을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지만 그 사랑해야하는 사람이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매우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의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아파하지 않고는 그 사랑이 점점 더 커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이 일어난 것이 평양 대부흥과 연결된다는 논문의 결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거의 같은 때에 인도에서 똑같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카하시 라는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입니다. 중국선교를 하던 존스턴 선교사가 한국 선교사에게 영향을 주고 그 선교사로부터 받은 영향이 북한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 소식이 평양에 있는 선교부에 영향을 주고, 그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씨앗처럼 모여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존스턴 선교사가 카하시 지방을 갔습니다. 어른들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모여서 울고 있었습니다. 통역을 세워서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왜 울고 있니? 너희 엄마, 아빠는 어디 가셨니?”, “우리 엄마, 아빠는 부흥집회에 갔어요.”, “너희는 왜 울고 있니? 부모님이 없어서 우니?”, “아니요.”, “그럼 왜 우니?”,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조금밖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 아이들은 일곱, 여덟, 아홉, 열 살 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주먹만 한 교회가 축구공처럼 커지고 애드벌룬처럼 커지는 게 부흥이 아닙니다. 부흥은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예전에는 없던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목회의 마지막 영광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섬김을 받았던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이것이 바로 목회의 영광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회심과 회심의 보전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듣고 목회를 받으면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뜨려지고 변화되어서 예수를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그 이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리고 각 목회자와 선교사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신 조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증진하였는지에 따라서 각자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의 목적어를 “너희 사랑을”이라고 했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 사랑은 없는데 생긴 사랑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편지는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관계하고 있던 교회들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도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가슴 아프게 기도하게 되는 교인들이 있고 기도를 할 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나오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 같은 경우는 전자였고 빌립보 교회는 후자의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이렇게 함께 은혜에 참여했던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를 보면서 감옥 속에서도 기도를 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에 만족하지 말라. 더 많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점점 더, 시간이 흐를수록, 난관이 올수록, 역경이 올수록, 핍박이 올수록,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일하다가, 그 일을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까? 왜 복음을 전했습니까? 복음을 전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허무하고 거짓된 것들을 향한 헛된 사랑을 버려라, 그것은 너희를 파멸시킬 뿐이다.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했고 그일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목회에서의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목회의 어려움은, 돈, 속 썩이는 교인, 모이지 않는 교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경험해봤습니다. 개척교회를 해서 25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힘들긴 해도 세상에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녀도 그 정도의 어려움은 다 겪습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물론 지금도 살해의 위협을 느끼며 오늘 잠들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환경에서 선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도 그렇게 대단한 어려움은 아닙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럼 무엇이 어렵습니까? 몇백 명의 교인? 몇천 명의 교인을 목양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이 어렵습니까? 자기 자신을 목회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도록, “말론 카이 말론”의 사랑을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목회의 제일 큰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그런 십자가가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모든 교인이 변화되어도 자기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않는 사모.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목회와 선교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자기 선교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목회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 긴 세월을 살면서 끝까지 말을 안 듣는 교인은 자기입니다. 자기는 자기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말론 카이 말론”을 하지 않습니다. 초창기에 목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눈물도 많았고 선교사로 부름을 받을 때는 선교지에서의 첫날 밤에 유언장을 쓰며 시작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생이라도 있어서 딴생각이라도 하면 죽비로 내리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야 할 텐데 자기를 그렇게 혼낼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입니다. 누구에게 굽히고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진리의 칼날 위에 자기를 세우는 그 반성이 없이는 선교사나 목회자나 하나님이 크게 쓰시면 쓰실수록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제껏 제 책을 200만 권 찍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제가 수없이 이야기한 중요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빗나간 열정의 위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열정이 잘못 발휘된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겠습니까?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 집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우리 그때는 빗나간 열정이 위험했는데 이제는 빗나갔어도 좋으니 그 열정이라도 보고 싶어.” 빗나갈 위험이 있는 게 아니라, 차는 너무 빨리는데 핸들이 망가져서 어디로 꺾을지를 몰라서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아예 가지를 않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역자 여섯 명을 뽑는데 아흔여섯 명이 원서를 냈습니다. 면접을 합니다.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난 흔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주님을 만나고 사역해온 동역자로서 “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짜 저 사람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예수를 위해 죽고 살겠다는 그 사랑이 있구나!” 이제는 그것이 점점 더 흐려져 갑니다. 결국 선교사도 목회자도 하나의 직업처럼 변질되어 가는 원인이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의 원인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한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자기를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훌륭해 보이고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긴 세월을 지내면서 금식 기도하는 교인을 많이 보았고 저도 금식기도를 했고 40일씩 금식기도를 하는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건축,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마지막에 다 내려놓고 가는 것입니다. 전설적인 선교를 했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목회를 했다고 해도 두고 가고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세상은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책도 팔리지 않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책이 없이는 못 사는 줄 알았습니다. 출판사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쩌면 박 박사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와 살아계셨을 때의 판매량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지금은 거의 안 삽니다.” 그런 것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도 선교사님과 함께 신학대를 다닐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키도 크지 않은 자매가 삐쩍 마르고 얼굴은 창백해서 항상 똑바로 걸어가고 눈은 항상 복도 천정을 보고 걷는, 얼음공주였습니다. 아마 여러 신학생들이 프로포즈 하다가 까였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여학생들이 열다섯 명밖에 없었습니다.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33년 전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 복도가 눈에 선하고 사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한 적도 없습니다. 도 선교사님이 저를 기억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도 선교사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여학생들이 열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원우수첩을 보고 이름까지 외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아무런 사심도 없었습니다. 학급도 같은 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엊그제 같은데 33년이 지난 것입니다. 아마 지금부터 33년이 지나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다시 만날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100세 넘어서까지 살아계시는 특별한 분들도 계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 소용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을 사랑하라,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라, 불변의 진리입니다. 저도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집사람과 마지막으로 말다툼을 한 것이 22년 전입니다. 말다툼이라고 해봐야 약간 소리를 높이는 정도였지 그렇게 큰 소리를 내거나 뭘 집어던지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도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은 다 헤어집니다. 마지막에 자기만 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남습니까?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기와 관계를 가지신 하나님 한 분이 남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지식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지식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도정이 누군지를 다 알고 그런가보다 하고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라고 하면 사랑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알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칼빈주의자구나? 무조건 천국의 아랫목, 너는 알미니우스주의자? 너는 저기 쓰레기통 옆자리, 너는 순복음주의자? 저기 한 데로 가.”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교리에 예민하고 그 교리 하나하나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믿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장 좋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막판에 가서 그런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문자를 가지고, 자기 의견을 가지고 피 터지게 싸웁니다. 서로를 원수처럼 여깁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까?
선교사와 목회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입니다. 감동적인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거의 아실 분입니다. 동남아의 한 나라를 집중적으로 선교하시다가 은퇴하셨습니다. 저도 그분을 잘 알고 사모님도 잘 압니다. 그분도 신학교를 하셨는데 그 신학교에 가서 강의도 했습니다. 그분의 아이들이 너무 예쁘게 자랐습니다. 지금은 다 커서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후배 선교사들이 너무나 존경했습니다. “사모님, 그렇게 수없이 사역지를 옮겨 다니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저렇게 예쁘게 자랐습니까?”, 그 사모님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아니야, 난 해 준 것도 없어. 이 학교가 자리 잡을 만하면 사역지를 저쪽을 옮기고 또 이럴만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돼서 밀어주지 못했지. 그냥 하나만 가르쳐줬어. 딱 하나. ‘얘들아, 너희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선교입니다.
현란한 지식을 가지고 화려한 수사로 수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의 짧은 말은 왜 그렇게 감동이 됩니까?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만듭니까? 두 개도 아니고 딱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하게 만드는데 그 진리는 곧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명료합니까? 선교? 목회? 목회의 목표는 교회도 아니고 심지어 선교의 목표는 전도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선교의 위기, 목회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질리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다 있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도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이 긴 편지를 수없이 쓴 것입니다. 그러면 위기의 가장 근원에는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위기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말론 카이 말로”, 점점 더 사랑하면 헤쳐나갑니다. 헤쳐나가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는 사람은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목회는,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거나 혹은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갑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점점 더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의 궁극적인 저자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그 사랑의 방향을 바꾸거나 혹은 그 사랑을 포기하고 하나님 사랑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무엇을 도구로 그 일을 하십니까?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지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도 굉장히 긴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에 쓰여진 단어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노시스”는 “기노스코”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알다”라는 뜻입니다. “그노시스”가 “지식”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여기에 “에피”가 붙습니다. 이것은 “~에 대하여, ~에 관하여”인데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전혀 잘못된 지식이 있습니다. 알고는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 그것은 모르는 것보다 때로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이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전체적인 앎입니다.
희랍 철학자들이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지식을 크게 “에피스테메”와 “독사”로 나누었습니다. “독사”는 코이네그릭에서는 “영광”입니다. “영광송”을 “독솔로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티그릭에서는 “의견”을 가리킵니다. “사적인 의견”입니다. “에피스테메”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독사”는 사물의 일부만 알고 그 일부를 가지고 판단해서 이런저런 견해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것만 알고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톨릭에서는 “억견”이라고 번역합니다. 심한 번역인데 “억지로 만들어낸 견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에피스테메”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실에 대해서 “예, 아니오”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은 “에피스테메”가 아닙니다. “선교란 무엇인가?” 할 때, “선교는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자기의 지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대답들은 “에피스테메”가 아닙니다.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전체적으로 진술을 해서 그 진술을 듣기 전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선교의 개념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이 “에피스테메”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지식이 여기에만 있으면 안 되고 이 속에서 전체적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그 지식이 전달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식의 깊이와 넓이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가 이것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리고 “총명”은 희랍어로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아이스데시스”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직관적인 지식”입니다. “에피그노시스”가 논리로 설명되는 추론적인 지식이라면 “아이스데시스”는 변증법적 지식입니다. 이성을 통해서 추론해 낼 수 없는 어떤 빛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적인 지식들을 받아들이는데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믿음, 신앙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계가 창조된 것을 압니다. 그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증명해낼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 성경의 진리가 믿어지면서 세계를 보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그 신뢰할만한 분이 하신 그 말씀을 수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초월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이 없이 공부만 계속하면 추론적인 지식은 생기지만 그것도 “에피그노시스”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지식의 대상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연속되어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지만 그 알만한 것들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더듬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지금도 이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까지는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여기에 세계가 있습니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습니다. 나무도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도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것을 이렇게 봅니다. 희미하게나마 “이것은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희미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신학자입니다. 무신론도 신학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궁극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 믿게 됩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었는데 그 복음도 성경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이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초월적인 진리들을 받아들입니다. 수납합니다. 이것이 계시의 수납입니다. 계시를 수납하는 것은 성령님이 믿음을 통해서 수납하게 해 주십니다. 당연히 이것은 여전히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극복되지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성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속성”이라고 합니다. “에트리뷰트”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다시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를 봅니다. 그때 비로소 이것이 아주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고 기가 막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11:35 까지)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에뜨리뷰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다시 하나님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아주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고 이게 기가 막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과 총명은 새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개의 날개입니다. 하나는 지식이고 하나는 총명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풍성하게 경험되려면 너무 지성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지성을 거부해야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까지 가르칩니다. 우리 때도 목사님들이 와서 채플시간에 이런 신학 여기서 백 번해 봐야 소용없다 그리고 자기 산기도 간 이야기를 장황하게 자랑합니다. 지금도 똑같이 문맥은 좀 다르게 신학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일부분만을 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입니다. 지식과 총명을 통해서 사랑이 일어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그런데 불길이 타오르려면 타는 연료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연료가 지푸라기입니다. 지푸라기를 한 두 트럭쯤 싸놓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러보세요 .그것도 바짝 마른 지푸라기를 그 불길이 어마어마합니다. 바람이 주위에 일어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30분 이상 타지 않습니다. 바람까지 불면 한 번에 확 타버립니다. 그리고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 뭐라고 합니까? 말론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해 집니다. 연료가 무얼까요? 그 연료가 바로 에피그노시스 그리고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여기서는 그림을 두 개만 그렸지만 두 개만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목회는 은혜를 받고 못 받고는 나중문제고 예배당에 딱 들어서서 설교를 듣는 동안에 자기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에 관해서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목회자는 지식의 사람이 아니면 목회의 목표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없는 목회자들은 아무열매도 없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럼 이렇게 묻고 싶으시겠지요, 아니 책 한권도 안 읽으면서 이름도 없는 신학교 나와서 불같이 목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뜨겁습니다. 그게 그 불인지 아닌지는 더 세월이 흘러봐야 압니다. 뜨겁기로 말하면 이단보다 더 뜨거운 데가 어디 있습니까? 담임목사인 저에게 연락을 해서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이단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교인이 없습니다. 더 뜨겁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참 사랑이라면 사람이 그렇게 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이렇게 두 개로 제시했지만 이것은 하나 오늘 설교를 통해 어떤 에피그노시스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에 또 이 위에 얹어져야 합니다. 계속 얹어져야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연료는 타들어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옵니까? 이것을 먼저 관계를 설명하자면 갈멜산을 떠올려보세요? 이 불은 목회자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멜산에 불이 붙었는데 누가 뭘 했습니까? 엘리야가 장작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물론 에피그노시스에 도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론적인 이야기고 현실적으로 목회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에피그노시스가 끊임없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진보가 없이 에피그노니스의 진보가 없이 이미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면 목회에서 이 불은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까는 목회자가 사랑의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무슨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사랑의 사람 이번에는 지식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서 전체적이고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감히 쉽게 저항하기 힘든 어떤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오러 라고 합니다. 라틴어에서는 아우라라고 얘기합니다. 그거 혹시 일본말 아닙니까? 일본에서는 오러 하고 합니다. 신기합니다. 영어에서 온 것이네요 자 그러면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지식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지식을 이야기한다면 대학교수들이 하는 목회는 다 성공해야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안 그런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요 ? 에피그노시스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에피그노시스에서 나오는 이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아트입니다. 이 다아트는 야다 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야다는 알다 입니다. 알다라는 동사가 제일먼저 쓰인 것이 창세기2장입니다. 아담이 하아와 동침하매 가인을 낳았더라. 할 때에 이 단어가 동침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로우라는 이 단어는 지금도 영어에 성교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에 다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은 어디에서 왔냐면 1611년에 킹 제임스버전 성경이 번역이 되면서 그때부터 이 의미가 영어권 속에 퍼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연관이 있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특히 호세아서4장에 보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에 바로 쓰인 지식이 다아트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뭘 가르치느냐면 다아트 지식 그리고 엘로 힘입니다. 하나님의 관한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혹은 하나님이 소유한 지식이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다아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무엇 이길래. 하나님이 지식을 버리니까 나도 너희를 버려서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원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은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이 다아트 엘로 힘은 자, 여기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를 행하고 그리고 인자를 사랑하면서 이 온 백성들을 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웃을 진심으로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하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엔진과 같은 것이 다아트 엘로 힘입니다. 이것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과 완벽한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아주 중대한 신학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다아트 엘로 힘이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하면 그노시스 데우가 됩니다. 그노시스 데우가 되는데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상이 그노시스 크리스투로 바뀝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식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우리말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자 그럼 이 두 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바뀐 이유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선지자와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보여주셨는데 신약시대에서는 그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으니까 당신 자신을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이란 입었다는 뜻이고 라틴어에서 까르네가 고기입니다. 그야말로 육입니다. 그런데 이 육이 우육이나 돈육이 아니라 인육을 입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성육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육신한 것이 무엇이냐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안 보이고 기적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기적을 보면서 어렴풋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이 필요한 시간에 그런 기적을 행해주셨으니까 아무래도 하나님은 좋은 분 같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안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십니다. 그분을 보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도 봅니다. 왜? 그분이 육신을 입으셨으니까 사람으로서 보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육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볼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는 방식으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냄새 맡을 정도로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째든 요한과 같이 그렇게 예수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럼 보세요. 이렇게 오셔서 당신자신을 모든 사람의 오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하나님이 누군지 몰랐는데 그분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 하나님이 저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겠구나! 그래서 하나님을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내신 것이 성육신의 유익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성육신을 입고 오셔서 예수님이 두 가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인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는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는 말이 이런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한 그분이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고 사람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담에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지식에 이르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라고 부르느냐면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노니스 크리스투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식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식 이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위대하냐면 세상의 모든 좋아 보이는 것들을 고상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만물의 찌기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게 만들 정도로 위대한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그렇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여기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 지식을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혹은 불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아까 목회자 선교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듯이 동시에 지식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지식의 핵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많은 사람이 그 구절을 설교합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것은 전체를 읽지 않고 그 구절만 뜯어냅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자기 상상력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아무 학문도 필요 없다 모든 지식은 방해거리다 오직하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으니 당연히 전하지도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지식을 대결상태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고 성경을 고린도전서 1장부터 2장까지 찬찬히 읽어보면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란 것이 너무나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얘기하면 너무 깁니다. 오늘 밤까지 해도 이 지식이 다 안 끝납니다. 그래서 이정도로 접고 한 가지만 이야기를 드립니다. 이 지식과 떨어질 수 없는 것만 오늘 논증하고 총론까지 이야기하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이틀에 다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것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부활하신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이냐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기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당연히 이 세계 속에는 세계와 함께 인간이 창조됩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종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종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고등어 하나에도 수십 종류가 있고 고래하나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고 고사리 하나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고 한국을 기준으로 할 때 소나무가 다 똑같아보여도 80종류가 있답니다. 그러면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당연히 인간도 창조하십니다. 인류학자들은 세계에 천억의 인류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산한답니다. 그런데 천 억중에 아무도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멸종위기의 단하나의 개체입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밑으로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제자를 길러내도 분신처럼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될 수가 없습니다. 뱃속으로 나온 자기자식도 귀 코 입 다 똑같이 닮아도 생각은 딴 놈입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 만드십니다. 그냥 하나 창조해놓고 니들끼리 계속해서 무슨 종자를 만들지 해봐라 하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레미레후 그것들의 종류를 따라서 창조하셨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행동이 먼저입니까? 이 속에 어떤 것들을 창조하셔야 되겠다는 관념이 먼저입니까? 아니 시간적으로 아니라 논리적으로? 당연히 1번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는 것들이 여기에 쏟아지듯이 반영이 되면서 아래로 내려온 것들이 이 세계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하나님의 지성 안에 이러한 다양한 것들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면 이것들이 다 흩어져 있었을까요? 통일성을 이루고 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질문할게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들 때 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었다면 그러면 이것들은 흩어져 있었을까요 어떤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통일성이 있습니다. 여기보세요 여기는 벽 세우는 사람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천정은 꽤 고급재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것들은 별로 비싸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 카펫 깐 업자가 이 천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것들을 다 만들었는데 이것 설계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 공간에서 밥해먹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고 만약에 그랬다면 이 방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설계자의 마음속에서는 여기서 강의를 듣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크로폰을 놓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만약에 술을 마시고 댄스를 하기 위한 거였다면 이런 조명을 달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예쁜 조명을 달았을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설계자의 마음속에는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통일을 이루겠습니까? 안 이루겠습니까? 그런데 통일을 이루는 것을 모릅니다. 왜 그럽니까? 지식을 모자라기 때문에 그 통일성을 못 보는 것입니다. 좀 복잡하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몰라서 신학의 길에서 많이 방황을 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아브람 칼리퍼 이런 사람들 심지어는 존 칼빈에 이르기까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창조했느냐면 바이더 파더 성부에 의해서 투루더 선 성자를 통해서 인더홀리스피릿 성령 안에서 창조되어서 이것이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자 그럼 잘 보세요! 성부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통일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한분에게서 이루어졌으니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자입니다. 이 성자는 로고스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말씀 없이는 지은바 된 것이 없나니 태초에부터 말씀이 있었다고 요한복음 1장1절이 말합니다. 로고스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담에 중요한 것은 이 만물들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 창조된 것 들안에 그리스도께서 원리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리스도가 영적인 방식으로 실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인간이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만물 안에 영적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로고스로서 원리로서 이 모든 사물들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라도 이상하게 학문 속에는 모든 사물들 안에는 사물들이 서로 연관을 이루는 종합의 질서와 분석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악하고 나면 공부를 많이 해서 정치를 공부하면 정치가 눈에 척 들어오면서 이 인간 저 인간이 나타나서 혹은 잘하고 혹은 개판을 치면서 정치를 하는데 그게 그냥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길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조건일 때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가 이 사물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이 수많은 만물들은 이렇게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것들이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다면 이 모든 만물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 창조 타락 구속 마지막에 완성의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과 연관을 이루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지식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애피그노시스가 아닙니다. 어떤 작은 인포메이션 일수는 있지만 애피그노시스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학문의 지식이든지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 기독교 신학에서만 이렇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18세기 이전에는 이런 방식으로 팜페비아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역사를 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철학자이자 수학자이자 그담에 천문학자이자 음악가이자 하나를 우리는 공부해도 다 못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도 20세가 되기 전에 박사학위를 끝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40세가 평균 수명 이고 청교도시절 때 서른 네 다섯 살이 평균수명이었기 때문에 빨리 그렇게 박사학위를 받고 빨리 애기 낳고 빨리 가르치고 빨리 죽어야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빨리 해야 됩니다. 지금은 학문이 다 파편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느 평신도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로마서를 9장을 읽다보니까 이 구절이 나왔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명 좀 해주세요. 했더니 목사님이 성경구절을 이렇게 보더니 야 이런 어려운 질문은 목회자들이 답을 할 수 없고 신학교 선생님들에게 물어봐야 된다 해서 굉장히 유명하다는 신학교 선생님 에게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이 하는 말이 성도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조직신학이라서 성경은 잘 모릅니다. 그럼 누굴 찾아가야 되냐니까 성서 신학자를 찾아가랍니다. 그래서 성서 신학자를 찾아갔답니다. 로마서 9장에 이 구절이 무슨 뜻입니까 했더니 성서신학교 교수가 성도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구약전공이라서 신약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누굴 찾아 가야됩니까? 신약전공자를 찾아가랍니다. 그래서 신학전공자를 결국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저는 공간 복음 전공이라서 바울신학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누굴 찾아가야 되냐고 하니까 바울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랍니다. 그래서 바울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더니 성도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데살로니가 전서 전공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했더니 로마서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랍니다. 그래서 로마서 전공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제야 되었구나 하고 교수님 이 구장이 무슨 뜻입니까? 했더니 아 성도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8장 전공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은 제가 8장을 전공했기 때문에 감히 9장에 대해서는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학문의 권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학문의 세계가 넓으면 이렇게 평생을 바울신학을 한 사람이 9장은 제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전공은 8장입니다,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게 현실입니다. 결국은 학문의 통합은커녕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산산이 발기발기 찢어진 것입니다. 선교사님이나 저나 다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구약 교수 들어와서 구약안하면 신학이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가면 그담엔 구약이 문제가 아니라 신약을 모르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지나가면 설교 학 교수가 들어와서 그런 거 아무리 많아도 설교를 모르면 그거는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윤리학 교수가 윤리에 대해서 배우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헛짓하는 거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깨닫는 결론은 서로서로는 자기밖에 남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학의 구조 론은 이 에피그노시스를 가진 사람 나오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도정기 선교사님이 고맙게 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면 기도 열심히 하고 공부 아주 열심히 하던 학생으로 기억을 하십니다. 그게 어느 정도 사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째든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 12년 동안 단 하루도 학교 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저 성적이 별로였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단 하나 고등학교 때 영어만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몇 번을 자살하려고 했는데 영어가 너무 재미있어서 못 죽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아주 굉장히 어려서부터 열등감 비슷하게 나는 교육에 있어서 패배한 사람이고 나는 진짜 머리가 나쁘고 학습지진아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신학대학을 갔는데 제가 수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너무 공부가 재미있는 것입니다. 대학원 들어갔습니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두었습니다. 공부가 더 재미있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사과정 할 때는 지루하게 그 부분만 공부해야 됩니다. 그런데 다 집어치우고 나니까 해야 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목회하고 그렇게 책을 쓰냐고 하는데 책 쓰는 게 결과물이고 공부하는 게 저에게 더 즐거웠습니다. 주일날 몸이 안 좋아서 설교를 네 번해야 하는데 한번밖에 못하고 집에 들어가도 그 다음 월요일에는 정확하게 가방 싸들고 마스크 쓰고 약 먹고 공부하러 나왔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또 저한테 배웠습니다. 아침 7시에 아리스토텔레스 메타피치카 중세철학사 17세기 정통주의까지 왜 그랬을까요? 너무 좋은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이 나라, 이 나라는 일본 아니고 한국입니다. 그 나라 교육이 저 한 테는 하나도 안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니까 학문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어차피 지식은 저 자체로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끊임없이 책을 손에 놓지 말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럼 공부만 하면 목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선교사 목회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예수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공부하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로 수렴이 되면서 그러면서 이 전체의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정 가운데에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위해서 성경 밖의 학문을 합니다. 신학을 합니다. 일반학문을 합니다.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됩니다. 끈을 매어서 돌리면 밖으로 나아가는 힘과 붙잡는 힘이 있을 때 좀 더 줄을 풀면서 더 커다란 원을 그립니다. 다윗의 물맷돌처럼 그립니다. 그런데 그 구심력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니까 어떤 사람은 요만큼 돌다가 들어오고 능력이 되는 사람은 이만큼 돌다 들어오고 더 뛰어난 사람은 이렇게 돌고 들어오고 그런데 반드시 시작할 때 성경에서 탐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이 그리고 공부하는 마지막 회귀하는 곳이 성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든지 그 모든 것들이 용해되어서 성경을 해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것이 한번만 주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목회자와 선교사가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어설픈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에피그노니스의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은혜를 받기위해서는 지성을 멈추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계명 중 제일 큰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주시냐면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네 성품과 성품은 다 아실 것이고 뜻은 희랍어로 디아노이아 입니다. 지성입니다.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될 것이 성품입니다. 성품을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꽉 차서 그분께 다 바쳐졌기 때문에 자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타성을 가집니다. 음식점에 사람이 바글바글 합니다. 사람들이 한참 줄을 서고 기다리는데 내 자리는 여기 딱 예약석 이라고 붙어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주일전에 이미 예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좌석은 배타적으로 나한테만 바쳐진 좌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깥에서 아무리 많이 기다리고 웃돈을 준다고 해도 그 음식점 주인은 그 자리를 선교사님 부부를 위해서 예약해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렇게 성품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드릴게 없이 자신의 정성과 이 모든 자기 내면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이라고 나오는데 마치 성품을 바쳐라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디아노이아 입니다. 디아노이아는 지성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성을 통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생각하여보라 그담에 성경에 너무 많이 나오는 예화입니다.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게 수없이 반복이 됩니다. 그 이야기는 알지 못하는 것 이그노런스 이그노런띠아 무지입니다. 무지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무지는 익스큐즈할수 있는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했으니까 나는 책임이 없거나 혹은 책임이 덜 해질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대게 이그노런스 무지에 대해서 대게 두 가지 견해를 가집니다. 좀 넉넉한 청교도는 이그노런스 이스트 올 모스트 이블 무지는 거의 악이다. 거의 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더 엄격한 청교도는 비 이그노런스 이즈더 베리 이블, 무지는 바로 그 악이다 왜 무지가 악일까요.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무지는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하고 고집을 한 것입니다.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는데 안 알려고 무지를 선택하고 그것을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무지입니다. 모르는 게 죄냐 묻는데 성경은 정확하게 바로 그렇다 모르는 것은 죄다. 인간의 의무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안 알기로 선택했으니까 이것은 더 베리 이더. 바로 그 악이다 이것이 성경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무지는 게으름과 따라오고 그리고 불신실함과 따라다닙니다. 가장 파렴치한 악이 무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무지를 경멸하지 아니하고는 에피그노시스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강의를 마감하겠습니다. 빌립보서 제 3장을 보십시오. 제가 11절부터 읽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기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하고 나옵니다. 뭘 위해서일까요? 그게 놀랍게도 10절에 걸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에 알고자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게 예수에 관한 삼중지식입니다. 그것을 알고자해서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뭘 추구하는 것입니까? 지식입니다. 일평생 양보할 수 없었던 인생의 목표는 지식이었고 그 지식을 그렇게 갈망했던 이유는 그 지식이 없이는 사랑이 불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먼저 에피그노시스의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 쳤고 성도들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를 통해서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까지도 이 에피그노시스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기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고서라도 이들이 에피그노시스에 도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만 진정으로 그 사랑이 불타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