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교리반
녹취자 : 양일구
I. 본문해설
A.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중간 상태
1. 육체적 죽음
우리가 예전에 알기로는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고,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들어가보면, 중간 상태라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생소해하는 사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전에 우리들이 배운 방식의 교리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간 상태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우리들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타락 후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원래 불멸하도록 창조된 육체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고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소멸하는데 영혼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전하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악인과 선한 사람이 동시에 육체를 입고, 선한 사람은 육체와의 영혼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영생을 누리기에 접합하도록 육체를 입고, 심판 받을 악인들은 영원한 심판을 견딜 수 있도록 거기에 접합하도록 몸을 입는 것입니다.
맨 처음 사람이 창조 되었을 때, 영혼은 육체와 아울러 창조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완전한 구원이 되려면 처음의 창조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 처음 창조된 사람은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선했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이 되려면, 영혼과 육체 모두가 완전히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만약에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만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구원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서 하늘 나라에 가도 그것이 구원서정의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육체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활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은 이후부터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상태를 중간 상태로 부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렇다면 중간 상태의 장소는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이렇습니다. 쉬운 말로 ‘음부’라는 것은 지옥의 현관쯤 되고,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현관쯤 된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직 완전한 몸을 입지 않았는데도 영혼 만으로도 고통을 당하고, 영혼 만으로도 천국의 기쁨을 일부누린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장소가 완전히 불리된 별개의 장소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 계시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됩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있다. 육체적 죽음을 영혼의 죽음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으며, 생명의 종결이나 상실로 언급하고 있고,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육체적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불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종결인 것이다. 펠라기우스파(펠라기오)와 소기노안파(소키누스)는 인간이 죽어야 될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이 견해는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로 죄의 형벌이라고 가르쳐준다. 죽음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자연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신적 진노의 표현이며 심판이며 정죄이며 저주이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가 나뉩니다.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신자는 죄책에서 구속을 받았는데 왜 신자들이 아직도 죽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지만 죽음이 신자들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성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의 죄에 대한 죽음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죽음은 성도들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성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화를 위해서 노력을 해도 결국 완전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면 낙원에 이르기에 접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우리가 못한 부분들을 하나님이 완전히 성화 시키셔서 낙원에서 주님과 교통하기에 적합한 영혼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수고하고 고통받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안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 되는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여러분은 메멘토 모리를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언제입니까,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갑자기 어느 한 순간에 죽어야 된다는 사실 때문에 커다란 공포가 다가오면서 슬픔이 엄습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최근에 이어령씨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6살 때,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석양에 해가 떨어지는데, 갑자기 우주 공안에 자기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메멘토모리입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죽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엄마는 “네가 건너방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잠이들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그 장난감이 어디있었니?”라고 묻자, 아이는 “엄마 방에 엄마 옆에 있었어”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죽음이란 그렇게 네가 장난감 가지고 놀다 잠들었을 때에 번쩍 앉아서 딴 방으로 옮기는 것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죽음 이외에 우리에게 참다운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 ) 심방 했는데, 몇 년전에는 교회 아이가 소아암에 걸렸습니다. 너무 가엾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룬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아이가 폐암이 커져서 칼비뼈를 누리면서 심장을 누릅니다. 수술을 한번 했는데 대책 없이 고통을 받는 것 보면서 “아..내가 네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라는 마음을 갖었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 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 보다도 귀하다.
참된 개혁주의적(성경적) 영성은 죽을 준비가 된 영성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견해를 예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요 심판이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이 나를 이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안식의 나라로 옮기시는 주님의 어머니 같은 두 팔이다라고 생각을 하니까 죽음에 대해서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경적 경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죽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중간 상태
스올(Sheol)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이고, 하데스(Hades)라는 말은 신약에 나오는 음부의 개념입니다. 스올의 번역이 아마 하데스일 것이라고 보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은 성경 계시의 역사를 따라서 처음에는 불분명하게 주어지다가 나중에는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지옥에 대한 개념과 음부에 대한 개념이 혼합된 가운데 아주 불투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다가 신약 시대에는 하데스와 게헨나가 나옵니다. 게헨나라는 히랍어는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하데스라는 말은 음부로 번역되었습니다.
(1) 스올과 하데스의 현대적 개념
“현대에는 경건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든지 죽은 후에는 스올이라고 부르고, 하데스라는 중간 지대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상 형벌이 없고, 모든 자의 동일한 장소이며, 지상 생활에 약화된 방영에 불과한 음침한 장소이고, 삶의 희열이 슬픔으로 변해가는 약화된 인식과 침체된 무능력의 장소이다. 이런 개념은 성경적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올과 하데스를 의미한다면, 그곳에 내려가는 것을 악한 자를 향한 경고로 어떻게 지지하겠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스올에서 불붙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 경고할 수 있었겠는가, 부자는 음부에서 쳐다보며 고통하는 곳이라고 했다. 스올과 하데스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무덤, 죽음의 상태나 조건, 형벌의 장소들으로 사용되었다.” - p227
(2) 연옥, 선조림보, 유아림보
a. 연옥
연옥은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한번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보는 교리입니다. 순교 했거나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 천국에 가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잉여공로라고 합니다. 잉여공로를 교회는 공로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보태주어서 그 사람을 천국으로 올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교리를 토대로 통공사상이 나옵니다. 상호유통하는 것인데, 내가 천국에 들어갔는데 나에게 남은 공로가 있어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려오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나의 공로를 보태줍니다. 그 배급은 교회가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면죄부 판매가 나옵니다. 면죄부 판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교리를 토대로 나오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할 때,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에는 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주교에서는 정말 잘해줍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옵니다. 그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장례집에 찾아다닌 것도 천국에 올라갈 때 공로로 쌓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요셉이여 우리를 위해..” 라고 기도하다가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아무개여..우리를 위해....”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공로가 모자라기 때문에 주님이 조금만 들으시고, 잉여공로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주님이 많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들어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명령도 내리실 수 있는 정도의 강력한 공로를 가지신 분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죽었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 연옥으로 올라가려면 영혼이 통공에 의해서 힘을 얻어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집에 그렇게 많은 천주교인들이 조를 짜서 밤새도록 연불같이 연도를 외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하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정결하게 되어서 천국으로 올라가는데, 밑에서 그 사람 이름으로 공로를 쌓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친구를 위해서 공로를 열심히 쌓으면 속죄함을 받아 천국으로 올라 갈 수 있다는 교리를 천주교는 갖고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허망한 사상입니다. 이 교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가톨릭에서 포기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 때문에 일년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천문학적인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자체가 집단 최면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할 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이성의 스위치를 꺼야지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참된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웜 하트, Cool 헤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케인즈가 경제학에서 가르쳐준 화두인데, 냉철한 지성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경제학을 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신앙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가하는 공격은 지성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냉철한 지성을 갖고 방어 해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활동 뿐만 아니라, 잘 믿는 활동까지 포함합니다. 지성의 활동은 오성의 활동과 이성의 활동으로 나뉘는데, 오성의 활동이 바로 믿음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이성의 활동으로 논리를 따라 믿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해야합니다.
성경 외에는 아무것도 안 읽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중심에 두고, 일반 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서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죄인들이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세상 문화를 냉철한 지성으로 분별해 내야 합니다. 영화를 볼 때에 너무 재미있어서 속편은 언제 나오나 하고 빠지지 말고 항상 냉철하게 보면서 코드를 읽어내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과 인간들이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를 분별한 후에,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린 신문에 매번 싣고 싶은 것이 문화 비평입니다. 가령 광고 카피 속에 들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를 찾아내서 거기에 우리들이 생각 없이 물드는 것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세상의 정신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현명한 지성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리만 배워서 교리칼을 붙들고 틀리게 말하면 목을 확 베어버리려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중심에 두고 문화를 읽어내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b. 선조림보(Limbus Patrum)
“선조림보는 죽으신 후부터 부활하실 사이에 오셔서 해방해주실 때까지 구약 성도들이 억류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유아림보는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라고 본다.”
선조림보나 유아림보(Limbus infantum)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3) 영혼의 수면
(4) 멸절설과 조건적 영생설
멸절설은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멸절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무지무정하신 분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유시무정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적 영생설은 “인간은 사멸하도록 창조 되었지만, 믿는 자들만은 불멸의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의 선물을 받는다. 악인은 완전히 멸절하게 되거나 의식을 잃어버린다.”- p229
(5) 제 2의 시련
이것은 심판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2의 시련을 이야기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두 번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골고루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전능하는 영광과 점증하는 진노의 교리입니다.
B. 그리스도의 재림
“초림이 있으면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 p233
1. 재림 전의 대사건들
(1). 이방인을 부르심
천국 복음은 재림전에 온 세계에 전해져야 한다.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전 국민이 완전히 복음화 되어 복음이야 말로 국민 생활의 능력이 되며 결신을 촉궇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을 부르신 것을 어느 정도까지 부르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복음을 제시 받고, 거부하든지 상납하든지 둘 중에 하나의 태도를 밝힌 후에야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미 보편화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이 의지를 갖고 들으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의 회심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는 이스라엘의 회심을 말해주는데, 로마서는 이 회심을 시간적 종말과 연관시키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이스라엘 전체, 국가적 이스라엘이 결국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종말의 표라고 생각한다.”
“Back to 예루살렘”이라는 구호는 신학적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이고, 개혁신학에서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구약으로 종료되었다고 봅니다. 구약이 모세를 입법자로 하면서 예시했던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라면,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백성들인 교회가 실현되는 것인데, 종말이 오는 것만 갑자기 옛날 구약의 시점에서의 문맥이 그대로 들어와 새대주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믿고 안믿는 것이 전세계 종말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을 얻어서 이루신 새 언약 백성의 무리들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진 예표의 성취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계시의 연관성과 예표의 실현
구약 | 신약 |
입법자 모세 -> | 그리스도 |
이스라엘 -> | 교회 |
율법 -> | 복음 |
할례 -> | 세례 |
유월절 -> | 성찬 |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구약의 역사들이 성취되어 가는데, 종말에 있어서는 갑자기 구약의 이스라엘이 회복되면서 종말이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모든 나라들이 복음을 다 듣고 난 후, 그 마지막 지점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오면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계시의 연관성과 예표의 실현을 모두 무시하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필요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종말론은 무엇입니까, 육적 이스라엘에서 찾으면 안되고, 영적 이스라엘에서 찾아야 합니다.
(3) 큰 배도와 재난
“세상 끝날이 가까울 수록 크게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세상 끝날에 죄악이 증가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다.” - p234
(4) 적그리스도의 출현
“적그리스도는 분명히 있었으며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끝날에 개인이 악의 화신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친다.” - p235
적그리스도를 자기를 신격화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 와서 제수이트같은 곳에서는 깨어라, 파수대, 666, 세계정부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EU(유럽연합)에서 유럽 통합 대통령을 뽑으면 종말이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사와 연관된 이야기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종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우리의 후손들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미래의 불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 수 많은 상상으로 살아가는 대신에 오늘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5) 표적과 기사
“성경은 이상한 표적을 세상 끝날의 징조로 말해주고 있다. 전쟁, 기즌, 지진이 각 처에 있을 것이니,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며, 이 재난은 우주의 재창조전에 일어날 것이다. 하늘의 무서운 징조가 나타날 것이며, 그 때 하늘의 권세가 흔들릴 것이다,” - p235
2. 재림 자체
(1) 재림 시기
“어떤 학자들은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 p235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신앙이 아주 깊으면 주님이 천년후에 와도 오실 것 처럼 느껴지고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다음 시간에 오실 텐데도 일만년 후에 오실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의 영원의 빛 아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영원을 빛되어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살아갑시다.
(2) 재림의 양식
주님의 재림은 인격적으로 다시 오십니다. 위격인데, 주님이 오실 때 천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인격적으로 재림하십니다.
“오순절에는 영으로 오셔서 육체적 재림, 각인이 눈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견적 재림, 많은 징조가 재림 전 일어나지만 불시에 일어나는 돌발적 재림이 될 것이다. 재림의 목적은 사물의 영원한 상태를 돌입하실 것이다.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목적을 실현할실 것이다. 부활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뉜다. 악인과 의인이 모두 부활할 것이며,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 p236
3. 천년 왕국설
천년왕국설에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나뉩니다. 전천년설은 다시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뉩니다. 엄밀히 말해 천년왕국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까지 포함해 크게 네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설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지상에 세워진 정부들을 통해서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통치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천년동안의 때를 가르킵니다. 그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천년 통치가 있다는 설이 전천년설이고 없다는 설이 무천년설입니다.
예수님의 천년동안의 지상 통치가 그리스도의 심판 전에 있을 것이라는 설이 전천년설이고, 심판 후에 있을 것이라는 설이 무천년설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 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보느냐, 앞에 있을 것이라고 보느냐,로 전천년설과 무천년설로 나뉩니다. 지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대통령이나 왕으로서 인간 관리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무천년설입니다.
a. 역사적 전천년설
그 중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은 완전히 잘못된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은 “666” “세계 정부” “짐승의 표”를 계시록에 말씀으로 영해해서 그 근거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순복음 교회에서도 한 때 이런 설교들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ex : 오늘 날 역사적 전천년설을 실제 종말론적 교리로 채택해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는 형제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이쓴 존 맥아더 같은 경우, 역사적 전천년설 교리를 신봉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존 맥아더의 책을 읽을 때 조심하며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머지 부부들은 아주 건전하고 좋은 작가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성약기분할설이라고도 말하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전 세대에 통일된 언약의 본질이라고 안보고, 세대마다 각각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봅니다. 구원을 오늘 날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 시대가 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일곱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c. 후천년설
후천년설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천년주의자였습니다. 대게 우리들이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이 건전하다고 보고, (앞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완전히 잘못된 교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그나마 건전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종말론의 아디아포라의 개념인 것 같음.)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도 이 둘은 사람들이 어느 것을 선택해도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전통은 전천년설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자마자 한국은 일제의 강점기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왕으로 이 땅을 통치하시며 일본 강점기에 겪은 핍박과 억울함의 한을 풀어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핍박받고 고난이 많은 곳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전천년설주의자입니다)
C. 부활, 마지막 심판, 무궁세계
1. 부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 때 부활하실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 p240
(1) 부활의 성질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육체적 부활을 기대한다. 부활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의로운 자를 위한 구원과 영화의 행위가 될 것이다.” - p240
악한 자들은 심판 받기에 적합한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 같은 우리 몸을 지옥 불에 던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냥 육체는 타고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산 그 죄인들의 죄에 합당한 죄 값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에 견디기 적합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의 육체를 가지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에 적합한 몸을 만들기 위하셔서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부활시키십니다.
(2) 부활의 시기
“일반적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세상 끝 날과 일치할 것이며, 최후의 심판 직전에 있을 것이다.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이중적 부활을 주장하는데, 재림시에 의로운 자의 부활이요, 또 하나는 천년이 끝날 때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전천년설의 약점입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때, 의인들이 함께 부활해서 예수님과 함께 세계 정부의 주요 지위를 자치해서 이 땅을 통치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회적 지위가 현격히 낮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시면 자신들은 한 자리 자치해서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영적인 통치의 나라와 세계의 통치를 혼돈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천년설은 이 세상 끝 날에 고난, 배교등의 징조들이 오긴 오는데, 그 때에 가면, 복음의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면서 말씀이 놀랍게 승리하며, 숨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복음의 혁혁한 승리가 모든 역사의 휘날레를 장식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천년이 다 끝난 후에 부활이 다시 있는데, 악한 자들을 모두 부활시켜서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심판하게 됩니다.
2. 최후의 심판
“부활의 교리는 심판 교리와 연결된다. 성경은 궁극적 심판이 있을 것임을 언급한다.” - p241
(1) 심판주와 보조자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심판주가 되실 것이다. 천사들은 보조할 것이며, 성도들도 다소나마 참여할 것이다.” - p241
(2) 심판 받을 무리들
“인류 개개인이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는 사실은 분명이 있다. 의로운 자는 심판에서 제외된다.” - p242
의로운 자들에게 심판의 개념은 사실 악인들이 받는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원한을 풀어주는 의미의 심판입니다.
예화
10년전 출판사에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출판 문제로 만나자고 해서 엘란트라를 타고 천천히 가는데, 갑자가 쾅하는 소리가 나서 브레이크를 밝고 멈추어 섰습니다. 내려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내 차에 부딪친 것입니다. 놀라서 비상등을 켜고 뛰어가서 안다쳤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운전을 그 따위로 하냐고 욕을 합니다. 내가 2차선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직진을 하는데, 오토바이가 3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내 차 뒷 문짝을 들이박고 쓰러진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좀 황당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저는 직진을 하고 가는데 신호등을 무시하고 좌회전을 하다가 와서 밖은 것 아닙니까” 하고 말하니, “내가 지나가면 당신이 비켜야 할 것 아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교통경찰을 부른다고 하길래, 불러서 상황 설명을 쭉 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방방뜁니다. 교통 경찰이 가만히 듣더니, 서초 경찰서 교통과에 가라면서 무전을 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경찰이 사고난 경위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서 그려서 주었습니다. 경찰은 그림을 보고 난 후에 그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말합니다. “당신 몇 살이야, 그렇게 눈치가 없어? 지금 당신이 싹싹 빌어야 손해를 덜보는 상황이야, 당신이 이 사람 차를 찌그러뜨려 놓았잖아. 이거 불법이야” 그러자 오토바이 운전자는 다시 방방 뛰며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교통 경찰이 하도 답답하니까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당신 편 들만한 친구 있냐고 묻자, 오토바이 운전자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교통경찰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더니 오토바이 운전자 친구가 다 듣더니, 친구를 바꿔달라고 해서 통화하는 것을 듣는데, 그 오토바이 친구도 네가 잘못했고 빨리 잘못했다고 빌라고 말합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전화를 가만히 내려놓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교통경찰이 저에게 “교수님, 차 수리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길래, “아니요, 이 분 택배하시는 분이신데 차는 제가 수리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오는데 오토바이 운전자가 그 때서야 “잘못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참 보니까 너무 안되어보여서 봉투에 10만원을 넣어서 열린 교회 신문하고 주었습니다. 당신 돈도 없을 텐데 이 돈으로 치료받고 다음서부터는 안전운전하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런 심판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경찰이 없었으면 길거리에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저의 멱살을 잡았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심판이라는 개념이 죄를 짓고 벌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무섭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자신의 맺힌 한을 풀고, 위로와 도움을 받는 날이 됩니다. 그런 개념에서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양면성입니다.
(3) 심판의 시기
예화로 설명 대체
(4) 심판하는 표준
복음의 충만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심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집니다. 유대인 같이 율법을 이미 받았던 사람들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개의 율법을 주셨는데, 하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는 돌판에 세기셨습니다. 돌판에 세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마음에 세긴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졌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범죄할 때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형법 때문에 떨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타날까봐 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범죄에 성공하고, 자기가 돈을 훔쳐서 피해를 준 사람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떨린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율법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세기신 율법의 효능은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댈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을 가르쳐주기에는 현저히 모자라는 정도로만 핑계할 수 없도록 주어지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표준이 되어서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규율할 때, 율법을 통해서 선과 악을 제시 받는데, 선과 악을 규정하는 최종적인 원천은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도덕적 통치] 참조 - 선과 악
3. 최후의 상태
(1) 악인의 최후의 상태
“악인은 지옥이라 불리는 형벌 장소로 전해진다. 지옥이 장소임을 부인하고 상태로 말하지만 아니다. 지옥은 장소이다.” - p243
(2) 의인의 최후상태
“신자의 최후 상태는 현세에 지나고 새 창조가 이룩되기 전에 이루어 질 것이다. 미래의 창조는 새 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현 우주의 갱신인 것이다.” - p243
마치 세상이 창조되면 공간, 시간이 다 무너져버리고, 즉 물질적인 세계가 소멸되어 버리고 영화된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물질 세계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 세계를 창조하셔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가지계를 통해서, 가시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십니다. 다만 이 세계 속에는 침투한 죄의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데 하나도 재미 없습니다. 서로 물어 뜯고 죽이는 일들이 매일 발생합니다. 바다나 물 속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것 같지만, 그 안에서는 작은 미생물들부터 큰 물고기까지 매우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고생물학자들이 고래를 잡아먹는 바다 짐승이 있었다는 근거를 찾아 냈다고 합니다. 이빨 한 개의 크기가 36cm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밍크 고래 같은 것도 씹으면 반토막이 났을 겁니다. 그런 바다 짐승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물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몇 년전에 태평양 쪽에서 길이 17m, 무게 480kg의 대왕 오징어가 잡혔습니다. 이런 오징어가 바다 속에 산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머어머한 몸집의 고래가 밥을 한번도 안먹고 한 숨도 안자고 4천 8백 km를 항해한다고 합니다. 1천 km 밖에서도 고래 울음소리를 소나로 추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어머한 것들이 물질세계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고통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누군가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죄의 결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죄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화 속에서의 죄의 영향들은 제거될 것이고,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유산 조차도 아주 아름다운 형태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마치 영혼의 유령들이 떠돌아 다니는 판타지의 세계라는 환상은 버리고, 물질 세계는 영원할 것입니다.
불에 타서 없어질 소멸될 세상이라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질적으로 완전한 세상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못생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미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옛 사람은 죽었고“ 라고 말합니다. 세계 역시 그런 연관성 속에서 보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완전한 복락을 누릴 것이지만 이 천국의 복락에도 등급이 나뉠 것이다.”
이 복락 자체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락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의미에서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성도가 더 많은 복락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천국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등급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쁨은 지성적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매일매일 새롭게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신자들은 은혜와 기쁨이 밀려오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일들이 매일 일어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나면 더 알 것이 없어지지만,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무한하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셔도, 하나님의 자신의 존재의 크기와 지성적인 내용은 변화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용량 자체를 초과하기 때문에, 계속 보여주셔도 주님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천국에서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말씀에 놀랍게 은혜를 받고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느끼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아주 작은 맛보기입니다.
결론은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