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리반
A. 교리의 기본 체계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전체적으로 교리의 체계전체를 외웠습니다. 제일 먼저 서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니까 신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론, 인간이 죄를 범죄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기독론, 그래서 구원하신 구원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론, 교회에서 종말론이라는 것으로 외웠습니다.
1. 서론
1장 종교
1) 하나님의 형상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형상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물들의 조각과 같은 형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핵심적인 부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인간론에 들어가서 좀 더 상세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만드셨는데, 만드신 인간과 하나님은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한 인격적인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야 했고, 하나님의 형상은 이러한 인간의 영혼의 작용과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사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이고, 영혼과 육체로 인간이 이루어지는데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영혼과 영혼의 작용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잘 닮은 피조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영혼을 아는 지식과 매우 일치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인간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올바로 아는 분량과 크기 만큼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을 연구하라”라고 가르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알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면 후행적으로 저절로 따라오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2) 인간의 오관적 판단의 제한성
지난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4중의 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자기에 대한 지식 중 가장 근원적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아는데, 그것을 아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이성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우리들이 말하는 “있다, 없다,”는 부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과학을 공부해서 시간이 흐르면 물이 증발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았다면, 여기에 물이 놓여있고, 몇 일 동안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방을 잠가두고, 몇 일 후에 들어왔을 때, 이 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본다면 얼마나 신비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시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원래 처음부터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소와 산소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냉동실에 넣으면 얼음이 되고, 끓이면 김이 되고, 김이 수증기가 되고, 더 단계를 지나면 아예 수소와 산소로 흩어져도, 우리가 이 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없어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대게 빛의 파장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빛의 파장 중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파장은 지극히 제한된 파장입니다. 그 파장을 넘어서거나 미치지 못하면 볼 수 없습니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도 그 소리 중 우리들이 청취 가능한 대역은 지극히 제한적인 대역입니다. 음의 파장이 워낙 긴 장파나 짧은 초단파는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로서는 폭발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도 우리는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피부에는 통점과 압점이 있습니다. 통점은 고통을 느끼는 지점이고 압점은 누르는 힘을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지점에 고통을 주면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혓바닥은 위에서부터 쓴맛, 양쪽에 신맛, 혀 끝에 단맛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단것을 쓴맛을 맛보는 혀에 발라버리면 “단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 없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더듬이와 같은 오관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없다 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지성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은 다시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판단 능력인 오성과 추론 능력인 이성으로 나뉘어 집니다. 우리의 많은 학문적인 지식의 체계는 추론 기능인 이성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것들은 오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믿음은 바로 이 오성의 행사입니다.
[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시리즈 - 인간의 이성과 오성에 대한 설교 참조 ]
문제는 올바로 하나님을 아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을 주셨는데, 올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의 통로를 따라서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데, 그릇된 자료들을 사용해서 그릇된 세계관에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을 잘못 해석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한 사상의 지적들이 바로 이방종교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기는 알았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 두 가지 인식능력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신앙이고 둘째는 이성입니다. 이런 신앙과 이성의 도움을 함께 받아야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를 릴리젼(religion)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릴리게레(relegere)에서 옵니다. 이것은 “반복하다“ ”묻다“ 라는 뜻입니다.
4) 구약과 신약적 의미로서의 종교
종교를 구약적인 용어로는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공경의 정신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의 정신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것이 훨씬 더 강하게 부각되어집니다.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끼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자신의 질적인 차이입니다. 무한한 질적 차이입니다. 거기에서 커다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숭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경외사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 볼 때, 두려움과 숭경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음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멀리 떠나서 죽을 인간들이지만 그러나 너희가 구원받을 길이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를 위해 준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이 생겨나는 데 그것이 신앙입니다.
5)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
구약의 숭경과 신약의 신앙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꼭 같은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께서 동일한 것을 다른 면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약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결국 구약에서는 경외 사상을 말하고 신약에서는 믿음 사상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계시적인 발전과정에서 전개되어져 오는 것이지만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핵심은 첫 째로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아주 겸비해지게 됩니다. 거룩하심의 두 번째 요소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이것은 성질에 있어서 무한한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도 사랑, 정의 등이 있습니다.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같은 것들은 인간에게 없지만, 이런 사랑,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것이고 인간의 사랑은 불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사랑이 대단히 크게 느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자기의 사랑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때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심의 본질이며,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존재적 초월성“이며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존재적 초월성의 효과는 겸비함이고,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자신이 죄인이며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본질입니다.
6) 경건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수렴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께 대해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구약에서는 경외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시고 신약에서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전달해주는 가장 확실한 통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배우며 인간은 여기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대속은 우리 인간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구원받아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으면서도 거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신비하게 이끌리는 사랑을 함께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경건은 숭경 사상을 통해서 자기 사상으로, 신약 시대에는 복음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으로 나가면서 신약이나 구약이나 경건의 일치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복음적 경건이라고 말할 때에는 복음에 계시된 대로 제시된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면서 그 하나님을 숭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자신의 마음과 언어와 삶이라고 하는 세 방면에 골고루 적용되어서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움직이는 핵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정당한 지식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것은 인간의 좌우측을 균형 잡으라고 하나님이 역학적 디자인으로 얹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우리의 몸 가장 위에 두신 것입니다.
7) 인간의 의무
모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두고 피해자라고 여기면 안됩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무지하게 사는 것은 악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것은 열심히 배워서 밥벌어먹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제일 첫 째 용도가 하나님을 알라고 지성과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주를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종교가 인간의 운명을 현저하게 바꾸는 이유는 하나님 혹은 신에 대한 앎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것이 잘못된 통로가 주어질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는 통로를 붙들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올바르지 않는 종교를 갖는 것은 차라리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에 더 어려운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세 가지 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책(만물) 인간 마음의 책,(인간) 계시의 책(성경)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성경이고 나머지는 보조적인 자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액기스가 성경입니다.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거기에서 참된 종교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람이 이성과 오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습득하고 이것을 초월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습득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경책입니다.
좋은 믿음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앎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입니다. 이성이 발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이성이 덜 발달해도 신앙이 훌륭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 때에 아는 것의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목표입니다.
신학 지식을 얻는 목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위해서입니다. 습득하는 수단은 믿음과 이성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아멘 하고 깨닫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멘 하고 믿은 다음에는 그것이 왜 나에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그 속에서 믿음을 기초로 이성적으로 하나하나씩 “나는 왜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를 탐구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림 없게 됩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절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하러 태어났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공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하나님을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생기게 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고 부쩍부쩍 자라듯이,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유익은 논리입니다. 논리는 갖추면 믿음이 조금 식어도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는 것은 떠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신앙은 있는데 논리가 없는 사람은 신앙이 꺼졌을 때 옛날에 받아들인 것도 의심하고 아무것도 안남게 됩니다. 하지만 논리가 있는 사람은 신앙이 식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거룩하시고 존재론적으로 초월하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고 나는 거기에 지음받은 인간일 뿐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합니다. 둘 다 있을 때 최상의 삶입니다. 논리에 불이 붙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참된 종교를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참된 학문을 통해서 이성으로 논리를 터득하여 자기가 그것을 왜 믿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거기에서 참된 회심과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B. 종교의 자리
이곳에서는 종교의 자리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종교의 자리가 지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감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의지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지성 - 종교의 자리를 지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철학은 굉장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에 인간들이 세운 철학 가운데 가장 현란한 철학이 불교 철학일 것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철학 체계이며 그 깊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정 - 종교의 자리를 감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신비종교들이 그러합니다. 체험하고 느껴질 때 이것이 종교구나 생각합니다. 미신이 대표적입니다.
의지 - 종교의 자리를 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가 대표적입니다. 감정은 필요 없이 올바른 이성에 기초해서 행동을 하는 것을 종교의 본질로 봅니다. 그래서 유교는 겉치레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김경애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유림에서 발칵 뒤집혔는데, 뒤집힌 것 자체가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의 자리를 인간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성서심리학에 의하면 마음은 영원의 중심적 기관입니다.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생활 사상, 감정, 의지의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는 한 인간의 지혜, 지성, 감정, 도덕생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영원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 “선한 의지“시리즈 참조)
C.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자간의 잘못된 학설들이 존재하는데, 종교를 인간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학설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연에게 경배하다가 발전한 것이 종교라고 주장하는 학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가 이루지기를 원하는 것을 종교 속에 투영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학설들로 종교의 본질을 왜곡시켜왔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포이에르가 이 논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사상이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포이에르 바하,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앵겔스 이런 사람들이 나오면서 공산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놓고, 그 다음에 스탈린, 레닌, 마오쩌둥(모택동) 이런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20세기의 공산주의의 실험운동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11p 마지막 단락을 보면, 성경만이 종교의 기원에 관한 믿을만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대상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특히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음을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봉사를 요구하고 계시며 어떤 예배와 봉사를 기뻐받으시는지를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 형상따라 지으셔서 이 계시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화롭게 하고픈 마음이 나도록 인간속에 충동을 심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실 때에 그것이 진리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첫 장 종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장 계시
D.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계시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을 알도록 창조하셨는데 인간에게 희미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은 너무 작아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알려고 몰두하다가 보면 이방종교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먼저 당신 자신이 우리가 죄인이어서 눈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잘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의지적으로 인간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보여 준다고 그럴 때 물질을 보고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신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계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식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뉘어 집니다.
먼저 일반 계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은 알 수 가 없습니다. 마치 햇빛을 직접 보고 태양을 알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들여다 볼 때에는 나타나는 유일한 반응은 “모르겠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만물 즉, 자연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신 것들을 통해 올바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충분한 만물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비로서 알게 됩니다. 일반 계시라는 것은 접근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이다“ 인간이 결국 둘로 나뉘게 되면 신앙을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참 신앙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됩니다. 누구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계시에 대해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특별계시는 참 신앙을 가진 자만 접근할 수 있는 제한된 계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전달해주시려고 할 때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일반계시는 자연적인 것을 매개체로 합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 인간의 경험, 역사,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이 구조들로 매개로 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 계시는 모든 인간이 접근이 가능하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접촉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A라고 알려 주셨을 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선입견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A’가 아니라 ‘B’로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이방의 종교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만물들은 창조되었을 때에는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서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그 자체가 빛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생기는데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타락한 인간은 어두워지게 된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게 됨으로 수많은 오해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특별 계시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일반 계시는 매개체가 만물이었다면, 특별 계시는 매개체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접근을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현현
하나님의 불과 연기, 구름 속에서 나타나시고, 천사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모두 매개체일뿐이고 하나님 자신은 그런 분이 아니고 누구도 “하나님을 봤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인간이 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사람의 말로 인간에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기록과 함께 끝났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하나님이 권위 있게 말씀하시며 그 들은 말씀이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적
이적은 하나님이 기적을 배푸시는 것인데,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필연적인 한 방편입니다. 이적은 능력의 표현이며 특별한 인재의 증표며 영적 진리를 상징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능력의 징조입니다. 이적 중에 최대 이적은 성육신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최대의 이적입니다. 바로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세계 전체가 회복되어가며 본래의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종교의 이단적 해석에 의해 파생된 사상들
펠라기우스주의 (도덕주의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보다 훨씬 더 강조하는 오히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찰스 피니에 의해 부각되는데, 원죄를 부인하며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순간에만 죄인으로 떨어지고 타락한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우리의 빚을 청산 할 수 없고, 단지 회개를 권유하는 도덕적 모범과 영향력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속죄는 미덕을 권장 하기 위한 자극제일 뿐이고, 속죄가 빚의 실제적인 청산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기 때문에 피니는 “속죄 그 자체가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라고 결론 짓습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
합리주의자들은 일반적인 통칭인데, 초이성적인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자연신론주의
자연신론자들은 "deism"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자들은 이성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접목시킨 혼합사상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법칙도 만드신 후 하나님은 법칙대로 움직이게끔 하시고 당신은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리킵니다. 도덕 세계 속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고 보는 혼합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주의는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법칙만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돌리는 원인은 신이라고 해석합니다.
일반 계시는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십자가로 돌아가게 해서 구원을 얻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계시는 가치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 계시는 이교의 진정한 확립요소를 설명해줍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넓은 의미에서 깨닫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올바르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 두려워하여 악을 행하지 않게 되고 본성으로는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와 무지와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진리를 곡해하지만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에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큰일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신의 존재, 영원한 도덕 기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행하면 양심적으로 고통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뿌듯해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의 일반적 작용입니다.
성령의 작용은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작용한다. X
성령의 구원하시는 작용은 꼭 신자에게만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불신자에게도 있다. X
그래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계시는 특별 계시의 배경을 형성해줌으로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 될 수 없습니다. 과학과 역사는 성경 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줍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데 이것이 일반 계시이고,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구속주로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특별 계시입니다. 인간이 창조 만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순서는 창조주가 먼저이고 창조에서 구속이 오지만 알 때에는 거꾸로 반대가 되어서 복음을 통해서 구속주를 먼저 알고 그 다음에 창조주를 알아가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먼저 구속주를 알고, 다음에 창조주를 알고 일반 계시를 통해서 만물들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배움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너무 아름답다는 사실을 감탄하게 되며 또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구속주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창조주를 통해 창조주를 알고 창조 만물들을 배움으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순서입니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알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켜 이중 지식이라고 합니다. 신에 대한 이중적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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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실현 방법을 보여준다. 특별 계시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 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 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구속 사건을 알게 해준다. 우리를 지식으로 부하게 하며 죄인을 성도로 변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 시켜 준다. 이 계시는 진보적이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