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 않는 주체로 인생살기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25-33)
녹취자: 장미연
‘쫄다’라는 말은 표준어는 아니고 속어입니다. 자기보다 어떤 우월한 힘센 상대를 만나서 마음이 위축되는 것을 가리켜서 ‘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새 많은 젊은이들은 쫄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우리 앞에 전개되는 현실이 어떤 현실일지라도 쫄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 본문 해설
오늘 성경에 보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정탐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열두 명의 사람들이 정탐을 했습니다. 팩트는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게 팩트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명의 사람만 진실을 보고했고 열 명의 사람이 거짓을 보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룰 전쟁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대로 이야기한다면 쫄았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긴 세월, 약 4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쪼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한 순간에 불편함과 편의에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 전체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 질문과 응답 사이트 중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사이트 가운데 ‘쿼라’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 ‘쿼라’ 사이트에서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이고, 생물학과 생화학 그리고 철학을 함께 공부한 조던 피터슨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번 보셨습니까? 이렇게 젊은이들이 반응이 없어요? 저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 쭉 하다가 그냥 가도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슴에 일생에 잊히질 않을 한 번의 강의를 전달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싶습니다. 그러면 호응을 해야 합니다. 그 분이 자신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 1장에서 이런 이야기 합니다. 캐네디언 랍스터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캐나다 해안에는 많은 랍스터들이 살고 있는데 작은 것은 주먹 만한 것부터 큰 것은 1미터 가까이 되는 것 까지 있습니다. 그것들은 수컷들이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지요. 누군가가 그것을 침범하려고 하면 집게발 두 개를 들고 격렬하게 싸웁니다. 결국은 이깁니다. 이기면 이 안에서 세로토닌을 비롯한 생화학 물질들이 분비가 됩니다. 그래서 이 바다가재는 기쁨이 충만하고 거기서 이겼다는 자신감 때문에 이제는 다른 랍스터들이 공격을 해와도 능히 이길 것이라고 하는 쫄지 않는 기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패배했을 경우에는 묵묵히 꼬리를 감추고 자기가 오랫동안 누려왔던 서식지를 양보하고 떠납니다. 그때 그는 이 속에서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생화학 물질이 나오면서 아주 우울한 기분이 되고 다음에 어떤 상황이 오든지 나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쪼는 마음이 깊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II. 쫄며 사는 우리 인생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입니까?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내게 패배감이 있다 아니면 없다’ 혹은 ‘나는 즐겁다 아니면 괴롭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실제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패배했는데 승리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팩트가 아닙니다. 그건 심리적인 하나의 조작입니다. 진건 진거고 이긴 건 이긴 겁니다. 그러면 요즘에 젊은이들이 현실에 대해서 ‘현실이 녹록치 않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당연합니다. 대학 들어오기도 어렵지요.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이야기 할까요? 오늘 아침에 신문에도 나왔는데 스카이 대학 가는 자문료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지만 합격 했을 때 보상 액수가 1억에 다다른답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현실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현실일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스카이 대학에 갈 사람은 다 정해집니다. 거기에 들지 못해서 가난하고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얘기 너무나 많지만 점프 점프해서 가보겠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간신히 어떻게 뚫고 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류대학, 어떤 사람은 이류대학, 어떤 사람은 삼류대학 갔겠지요.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공부하는데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교수인데 (한 45명 정도 내지 50명 수강한다면) 한 클래스 강의하면 A를 줄 수 있는 학생이 8명이라고 학교에서 딱 정해서 내려옵니다. 더구나 A⁺받는 학생은 거기서 제 기준으로는 4명 정도 밖에는 못 받습니다. 진짜 열심히 해야 하는 겁니다. 경쟁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닌 겁니다. 그 다음에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합니다. 바늘구멍 뚫기만큼 어렵습니다. 20대 젊은이 직장 다니는 사람 물어보면 7명은 대게 과외나 컴퓨터 계통에 종사를 하는데 10명중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저 사람은 평생을 보장할 수 있구나’ 하는 사람은 3명도 안 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에 취업을 했다고 칩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하는지 보십시오.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45세 되면 나가라고 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마지막까지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리는 겁니다. 다행히 매번 이긴 사람들은 나름대로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조건으로도 쫄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쪼는 것은 누구와 겨뤄서 이겼다는 것 때문에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의 무게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쫄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의사까지 되고 박사까지 받았습니다. 자기 인생의 무게를 못 이겨서 자살했습니다. 쫀 겁니까? 안 쫀 겁니까? 나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보다 공부를 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가 쫄 리가 없지요. 수입도 많고 자기는 의사고 박사학위를 가졌고 좋은 직장에 취직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 그 자체의 무게 앞에서는 쫄아 버린 겁니다. 자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쫄지 않는 것이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A. 소비와 자기 과시
사람들이 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제일 먼저 네 가지 정도 들 텐데 첫째로, 소비와 자기과시입니다. 소비를 하는 겁니다. SNS 들어가 보면 대부분이 자기 자랑입니다. ‘나 이런 호텔 갔다 왔다, 나 4명이서 140만원자리 일식 먹었다’하고 영수증까지 찍어 올립니다. 비록 집에 갈 때는 전철을 타고 갈지라도 말입니다. 하고 심지어 더 가엾은 사람들은 그걸 다 사진을 조작해서 다른 사람 것을 올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게 계속되다보면 서머셋 모옴이 ‘서밍 업’에서 이야기했듯이 픽션과 팩트가 서로 섞여서 자기 삶인지 남의 삶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짓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쫀 거예요? 안 쫀 거예요? 그래서 한다는 행동이 소비와 소비를 통한 자기 과시를 하는 겁니다. 알바를 잔득해서 간신히 힘들게 벌어서 명품 티셔츠 하나 사 입는 걸로 땡 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삶은 결국은 그 본질이 소비가 주는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현실 앞에서 쪼는 겁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티셔츠인데 시장에서 사면 5천원인데 백화점 3층에서 사면 5천원자리가 만원이고, 저 6층 꼭대기 행사장으로 올라가면 7천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비싼 돈을 내고 물건을 사고 내려 올 때는 자기가 무엇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예쁜 젊은이들이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시설도 좋은 곳에서 그렇게 쇼핑을 하는 겁니다. 문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될 때는 그것은 삶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런 삶을 꿈꾸는 겁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만 인생의 팁을 드리겠습니다. 소비에 지나치게 눈뜨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생의 날개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들과 같은 젊은 시절에는 특히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보다도 우월한 수준에서 소비를 하고 ‘이런 호텔에 가서 자봤다. 이렇게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이렇게 좋은 호텔에 가서 와인을 마셨다’라고 이야기해도 아무것도 부럽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인가 내면의 세계에 지금 가져야 하는 겁니다. 지금쯤이면 그 단계를 지나서 확고하게 자신의 인생관이 거의 80퍼센트 90퍼센트 가까이 적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을 지나면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새길 수 있어야한다는 겁니다.
B. 중독과 향락주의
두 번째는 중독과 향략주의 입니다. 기독학생이라고 하지만 여러분들에게도 틀림없이 게임에 빠져있는 분들 있지요? 제 충고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의 날개를 꺾는 것입니다. 너무 갑갑하고 무료할 때 하루에 한 30분정도 하는 게임이면, 게다가 통제할 수 있다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평균 하루 스마트폰 보는 시간이 3시간 40분이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안 보기 시작하면 금단현상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것만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주체성을 잃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도구들은 그냥 도구일 뿐입니다. 거기에 탐닉하면 안 됩니다.
(예화) 재벌 3세, 4세를 이야기해보십시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재벌의 딸이 결국은 자살을 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정리해보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31세 된 여성의 재산이 2천억이었습니다. 재벌 3세들, 특히 계승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돈을 쓸 수 있습니다.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결 같이 대 그룹의 3세, 4세 승계자들이 마약에 빠질까요? 그것도 그냥 보통 마약이 아니라 LSD 같은 것을 즐깁니다. LSD는 코카인의 100배입니다. 마리화나, 코카인, LSD 이런 순서로 나가는 겁니다. 아세요? 물론 모르시겠지요. 몰라야 정상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겁니다. ‘마약하고 우리하고 뭔 상관있을까?’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호주에 갔을 때 우연히 공원의 화장실에 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약을 한 주사기는 쓰레기통에 넣지 말고 이 쪽 통에 버려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마약은 매우매우 일반화 되었고 아시아에서 마약 유통의 허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처벌이 너무 약합니다. 정말 미칠 노릇입니다.
마약은 게임 중독이나 쇼핑 중독 혹은 섹스중독 같은 것에 비해 더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독을 왜 그렇게 나쁘다고 보느냐하면 게임을 하는 것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혹은 성추행을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죄는 아니고 개인적인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만약에 시간낭비 정도라고 한다면 더 능력이 있고 시간에 여유가 더 있는 사람들은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독에 빠지게 되면, 일단 중독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오늘 이 중독에서 헤어날 시간입니다. 중독에 빠져 들어가게 되면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 모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피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안 된다는 사람들은 정신과 가십시오. 그리고 체계적으로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를 받고 기도하면서 헤어 나와야 합니다. 그 마지막은 아무것도 없는 아주 음습한 인생의 나락입니다. 그렇게 현실을 마주하는 것에 재미도 없고 그렇게 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수시로 게임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목사님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제 친구는 게임돌인데 항상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길 순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무게를 감당을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안 되는 겁니다.
C. 폭력과 무모함
세 번째는 폭력과 무모함입니다. 폭력입니다. 소비와 자기과시도 심리를 깊이 들어가 보면 열등감입니다. 열등감 내지 자기 연민입니다. 폭력과 무모함도 역시 자기 열등감입니다. 이번에도 설리라는 가수가 자살했지요. 그런 연예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많은 연예인들이 자실을 하는데 우선 일차적으로 문제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려면 자기가 굉장히 강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유명해지는 것을 너무 바라지 말고요. 반대로 너무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 시대에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가장 근원적인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두 가지로 봤습니다.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한 편으로는 자기가 있는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두 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인생의 의미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 시대 때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전체주의적인 그런 시대에는 좀 달랐지만 그 후에 일어난 르네상스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게 보면 12세기부터 르네상스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아시시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도 그런 르네상스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13세기, 14세기를 거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피렌체라고 하는 그 당시에 플로렌스라고 하는 도시를 필두로 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때는 인간관이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신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 사회를 보다 더 온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본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 두 가지를 감당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한편 동북아 철학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조선시대 때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것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수기’는 ‘자기를 갈고 닦아서 수양을 하여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치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잘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권력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도 물론 포함되지만 자기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을 다스려서 자기 자리에 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사회가 행복하게 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의 사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정확하게 간파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성경은 똑같이 먼저 자기밖에 모르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자기 사랑하면 그 하나님과 합치되고 싶은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예화) 사랑해보셨습니까? 만약에 어떤 자매가 형제를 뼈 속 깊이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형제가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해요. 그러면 살을 깎고 뼈를 갈아서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은 겁니다. 성차별이라고 할까봐 반대로 똑같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칩시다. 이 형제는 꿈이 의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매가 ‘나는 이 세상에 제일 싫은 직업이 피를 흘리는 직업이다. 난 그거 싫다.’라고 한다면 그 형제가 ‘우리가 인연이 아닌가 보다.’라고 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뼈 속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 그럼 하지말지 뭐. 그럼 내가 사법시험을 봐서 법관이 될게.’라고 자신의 인생 방향을 전환을 할 수 있는 그것이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동의 안하세요?
폭력, 소비, 과시 이런 것들은 전부 열등감의 소산입니다. 자기 미모 관리에 아주 기본적인 평균 이상으로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서 오직 미모만 가꾸는 그런 자매들도 있지요. 남자도 마찬가지로 공부도 안 하고 미친 듯이 운동해서 근육 만들어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다 열등감의 소산입니다. 진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그런 것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는 길을 찾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들이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우리가 얼마나 쫄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D. 포기와 자살충동
마지막 하나를 더 들자면 포기와 자살충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사회에서 지칩니다. 그래서 N포세대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했는데 서른 몇 번을 원서를 냈는데 떨어집니다. 이미 나는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은 아닙니다. 이걸 바꿀 수는 없잖아요. 심지어 사람들이 성형수술까지 하고 패션코디에게 돈을 주고도 한 번 해보고 말재주도 배우고 하는데 계속 떨어집니다. 자존감이 계속 낮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집을 못 사도 차는 사고 월세를 살더라도 유명하다는 호텔은 한 번 가서 자보고 좋다던 여행지는 한 번 가보고 다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굳이 그렇게 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딱 트는 겁니다. 그래서 소비에 빠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포기하고 싶은 겁니다. 포기의 극단적인 형태가 자살입니다. 매우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에서도 안 되고 뭘 해도 잘 안 되고 자신감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그냥 가벼운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예화) 한 2년 전에 중국의 네티즌에게 엄청나게 유행하던 시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안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웨이보에 알려진 것입니다. 그 제목이 ‘허돈광녠’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허도광년’(虛度光年)입니다. ‘허’는 헛되게 ‘도’은 보낸다, ‘광년’ 이거는 세월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내고 싶구나.” 그 긴 시를 내가 다 외우지도 못했고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릴 수도 없는데 중국어로 된 시었는데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서 제가 읽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먼 곳에 살고 싶다. 하루 종일 둘이 앉아 맑은 연못을 바라보며 노니는 금붕어 떼를 보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40대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합니다. 물론 여러분 세대는 아닐 겁니다. 저도 아주 즐겨 보던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게 심리가 뭔지 아십니까? 현실에 너무 지친 겁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겁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나오는 그 속에는 내 식구라도 사이좋게 모여서 사는 자연인은 없습니다. 아내도 안 좇아오고 둘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안 나옵니다. 아예 혼자 삽니다. 최근에는 남편하고 애들도 버려두고 여성 혼자 나와서 산속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복잡한 세상 인연 다 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 겁니다. 그야말로 초야에 묻히고 싶은 겁니다. 그게 40대 만의 바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그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도심 물을 먹었고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불편이 싫어서 도시인인데 도시에서 자연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기하면서 사는 극단적인 형태가 자살로 나타는 것입니다. 영어로 suicide라고 합니다. 수어는 라틴어로 ‘sui’. 자기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cide’는 ‘죽이다’입니다. 그래서 genocide라고 하잖아요. 기독교의 대선배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살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다르게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자살합니다. 그래서 자실하는 사람은 의욕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의욕이 너무 강해서 죽는 것입니다.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의욕이 너무 강할 때 너무 강해서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에 그렇게 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고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을 때에 자살합니다. 그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유혹을 현대의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살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살 사이트가 있어서 사람을 모아서 함께 죽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많이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알려진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종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을 택하고, 발견되지 않고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진짜 실종된 사람들이지만 자살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과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살에 대해서 한, 두 번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것도 미성숙의 소산입니다.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것, 그래서 자살을 경험해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날 (무방비 상태로) 이러고 있다가 (어떤 사태가) 툭 하고 나타나면 ‘아’ 하고 그 사태를 만나서 (당황하지 말고) ‘아 내 인생에 이런 복병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가까이 있구나.’ (생각하며 사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말한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마약이 아닙니다. 여기 와서 찬송 부르고 말씀 듣고 기도하는 동안에 ‘세상은 저리 가라. 나는 별 세계에 산다.’라는 그게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사람들이 별 세계에 살지 못합니다. 더 세속적이고 더 낙심 잘하고 더 소비 지향적이고 더 중독에 약하고 취약점을 가지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기가 매우 쉬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모든 것들이 매우 내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이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2부로 들어갑니다.
III. 쫄지 않는 주체로 산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4년 2월 되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이었는데 교회를 가다가 갑자기 가기 싫어졌습니다. 제가 서울 변두리에 살았기 때문에 교회까지는 꽤 긴 들길을 걸어서 가야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2월이었으니까. 가다가 밭이 있는 둑에 엎드려져서 14년 2개월 된 소년이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제가 울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질문이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이었는데 ‘난 누군가?’ ‘난 어떻게 살아야하나?’ 세 번째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네 번째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교회에서 이 대답을 기대했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정리가 안됐기 때문에 또박또박하게 목사님을 찾아가서 “난 누굽니까? 난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이렇게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그렇게 예수 믿는 어른들은 제가 보기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나보다 우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14년 2개월 된 소년의 마음에. 한참을 울다가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닦으면서 결심 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가 되리라.’ 하나의 중요한 인생에 전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배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었는데 너무 신기했던 게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가끔 친구나 선생님이나 가족들에게 이야기 했는데 항상 왕따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전집을 읽어보니까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적어도 하나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아주 희귀하게 이 변종인 인간은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문학가들이 독특하게 전개하는 필치는 우리에게 그런 복잡한 사람들을 미화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친구들보다 우월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 생각도 없는 놈들. 공부해가지고 어딜 가보겠다고. 니들이 인생을 아냐.’ 그런데 이것도 몇 년 하고 나니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은 던져주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공감은 하는데 문학은 우리에게 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고등학교 2학년쯤에 사상서 쪽으로 갔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사상, 철학서에 몰두했습니다. 그것들은 답을 내려주는 겁니다. 너무 신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너무 멋있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줄치며 읽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이 책의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때에는 사르트르, 니체, 하이데거 못 읽으면 어디 미팅도 못 나갔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라든지 앙드레지드라든지 읽지 않으면 이야기에도 못 끼었습니다. 어떤 애들은 커닝 페이퍼처럼 써놓고 각 소설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암기하면서 나갔습니다. 낭만이 있었잖아요. 마지막에 그렇게 내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던 니체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가 결국은 자기 여 제자를 흠모했으나 딱지를 막고 거의 걸인처럼 미치광이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객사하는 광경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철학과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주는 유익 때문에 그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인생을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내가 주님을 안 믿을 때조차도 한 번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에, 물론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마이웨이(my way)라는 곡에서 말 한 것처럼 후회하는 순간들도 있고 아쉬운 순간들도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I did it my way.’ 곧 ‘나는 내 길을 걸었고 그리고 나는 후회가 없다.’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어서 교회도 끊었고 문학 작품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쪽을 모두 끊었고 사상과 철학 속으로 왔는데 그 사람들 자신이 어떤 행복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겁니다. 사르트르는 어떤가요? 황당한 사람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세기의 계약 결혼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런 것들이 동네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 이 일은 전 세계 지성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습니다. 60년대에 말입니다. 그들은 계약해서 결혼을 합니다. 계약하자마자 집요하게 계약 배우자의 여 제자들이 집에도 드나들고 학문적인 교류를 할 거 아닙니까? 사르트르는 그냥 뜻을 세우고 아내의 여 제자들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계약 결혼을 했지만 계약상 배우자가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그녀가 싫어하면 그렇게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반응을 보일 때마다 점잖게 충고했습니다. “착각하지 마. 당신은 내 마누라가 아니야. 우린 계약 배우자야.” 그리고 그 짓을 계속 합니다. 그러다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시몬 드 보부아르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잖아요. 한 여자와 사랑밖에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한 사람만 여자고 나머지 모든 여자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소위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인간존재를 ‘불안’의 개념에서 보는 것 자체도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다. 그 대신 무시무시한 자유다.” 왜? 자기 근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존철학에서 배운 ‘실존은 존재에 선행 한다’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명제입니다. 그건 그때까지 내려왔던 2천년 동안의 철학을 한꺼번에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실존 혹은 현존(existence) 말입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나의 본질이 있게 한 또 다른 본질과의 연관 속에서의 나를 나 되게 하는 근원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내가 이 공간 속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이 실존이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실존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존재자의 관심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지금도 그 철학적인 영향을 아주 광범위하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현대인을 이해하려면 실존철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인생을 이해하는데 놀라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포스터모더니즘입니다.
A. 삶의 의미와 신념
자, 그러면 이제 내리막길로 내려가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거대한 담론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김형석 교수가 요새 100세가 다 되셨는데도 활발하게 활동하시잖아요. 연세대학교 철학계 교수셨는데 우리 20대 때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컸습니다. 엄청난 인기 라이트였습니다. 연세대 정문 앞에서 학생 하나가 헐레벌떡 가방을 메고 뛰어오는 겁니다. 질문했습니다. “자네 지금 왜 이렇게 뛰나?” “지각했습니다.” “왜 지각을 하면 안 되지?” “교수님, 빨리 제 시간에 들어가야지 수업을 참석해야지요.” “왜 수업을 빠지면 안 되는데?” “그래야 출석이 되지요.” “그런데?” “그래야지 시험 볼 자격이 있지요. 졸업을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취직을 하지요.” “그래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요.” 계속 묻다가 마지막에 “그러다가 죽는 거지요. 뭐” 그러면 여태까지 했던 말을 다 빼버리고 “자네는 왜 뛰었나?” “죽으려고 뛰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장엄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아주 존엄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존엄한 이유를 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존엄한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받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하나님 닮은 것이 내게 있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이 온 우주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시는데 거기에 인간의 존엄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존엄한 인간은 자유로운 채 존엄한 것입니다. 존엄한 인간은 누구에게 노예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노예로 짓밟히며 사느니 차라리 그냥 장엄하게 죽어버리겠다.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존엄을 인정받으며 살지 못할 바에야 이 현실과 싸우다가 죽어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그게 참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신은 금수저 물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당당함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명지대학교 여기를 슈퍼카를 몰고 와서 차를 탁 세우고 내릴 때 많은 여학생들이 한 번쯤 쳐다보지 않겠습니까? 자신감 있겠지요. 한도 무제한의 카드를 넣고 다니며 쓸 수 있는 재력이 있다면 자신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서 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너무 높은 자리에 있어서 전화한통만 해주면 국영기업체에 취직이 될 수 있고 대그룹에 아주 특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여유롭겠습니까? 대학 4년 동안에. 성적하고 상관없다. 네가 아무개 공사에 들어가기로 됐으니까 그냥 편안하게 재미있게 학교 다녀라. 얼마나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서 오는 여유가 아닙니다.
그러면 삶의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엄중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한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된다. 나는 꼭 된다.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팩트가 아닙니다. 인생은 어차피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안 되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여기에 있고 싶으셨습니까? 10년 후에 어디에 있고 싶지요? 그건 그만 두고. 저 자매가 너무 좋습니다.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달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안 맺어 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 자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안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차피 심지어 하나님을 믿어도 내 뜻대로 안 됩니다. 이런 신앙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아부하면 하나님이 그냥 내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하는데 팩트 아닙니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일수록 인생이 더 많이 꼬입니다. 여기 증인 있잖아요. 제 꿈이 영문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교수였습니다. 수필가였습니다. 아니잖아요. 그냥 목사로서 여기에 와 있잖아요. 꼬였어요? 안 꼬였어요? 꼬였어요.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나는 아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는 내 인생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도 없이 소비나 하고. 좋은데 취직해서 돈이나 벌고. 학자라고 거들먹거리면서 이상한 글이나 써서 젊은이나 현혹시키고.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몰랐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아요. 하는 일 마다 꼬이게 하십니다. 결국은 안됐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을 미혹시키는 글의 작가가 아니라 (진리를 비추는 기독교 작가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학교의 영문과 교수가 됐다고 칩시다. 그러고 책을 써서 몇 부나 팔렸을까요? 지금 학계에 있는 몇몇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교수들이 판매부를 올리지 (저 같은 사람은 어림 없었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약 200만부의 제 책을 독자들이 사주었습니다. 200만부. 분량이 생각 안 나지요? 2.5톤 트럭으로 200대 분량입니다. 전 세계에 말입니다. 영어, 중국어도 있습니다.
그러니 꼬이게 해주신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이 있으면 인생이 꼬였을 때 아주 exciting해지는 것입니다. 뭔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저 자매하고 안 됐다. 그냥 농약이나 먹고 뒷산이나 올라가서 죽어버리고 싶다.’ 그거 아니지. ‘아, 하나님이 저 자매도 참 사랑하시는구나.’ 어느 부부가 남편이 막 너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어요. 아내한테 “여보 내 얘기 좀 들어봐.” 그윽한 눈빛으로 “나는 다음 생애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할거야.” 아내가 “어떻게 당신은 다음 생애에도 당신 생각만 해?” 그런 것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 너는 꼭 될 거야.” 될 수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그게 몇 사람이나 해당되겠습니까? 그리고 매사 그렇게 좋은 얘기를 듣고 좋게 잘 될 거야. 라고 하면 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자리에서 우리 이렇게 만났지요? 꼬이지 않았으면 여기 왔을 리가 있어요? 꼬이지 않는데 예수 믿고 살겠다고 작심할 수 있느냐고요? 꼬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갖느냐 하면 제가 주는 인생의 선배로서 목사로서의 충고입니다. 꼬일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마라. 그리고 미리 생각하라. 앞으로 내 인생은 아주 많이 꼬일 거다. 여태까지 꼬인 것은 그냥 극장의 예고프로 정도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되요? 결국은 꼬이는 게 인생이구나. 그러면 꼬여도 살아가야 되겠다, 라는 결심이 생겨나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네가 최고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남의 애들하고 싸우면 누구 우리 애를 기를 죽이냐 하는 이런 보호 속에서 살았지요? 그것 꽝 입니다. 철 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 새끼를 끌어안고 어디서 감히 이래주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끝납니다. 대학에서 여러분 친구하고 싸우는데 엄마가 와서 “어디 우리 아들을. 여자한테 와서 어디 감히 우리 아들을 딱지를 놔. 이게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그림이 그려지냐고요? 그렇게 기르니까 유아기를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데도 유아기를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예 철들면서 이 세상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참 많구나, 그러면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배우는 게 가장 쉽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안 배우면 그 다음에 그냥 온 몸으로 피를 흘리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자, 우리 어떻게 살아야 될까? 먼저 명심해야할 것은 우리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난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모두 업, 다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업 보다는 다운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형제들은 진짜 맘에 드는 여자를 한 번에 프로포즈 해서 한 번에 골인된 사람들은 좋은 거 아니라고 난 생각합니다. 짓밟혀도 보고, 실연당하여 농약 들고 뒷산에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도 생겨야지 인생의 깊이를 이해하지요. 저는 목사가 됐으니까 요즘 소설을 읽기는 대게 힘듭니다. 그런데 최근에 제가 1월 달에 아주 작심하고 한 2주 동안에 한 8권을 읽은 작가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그런데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책을 읽게 되면 알게 됩니다. “노르웨이의 숲” 추천합니다. 그리고 “1Q84”도 추천합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많이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린 어차피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 업 앤 다운을 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남성들이 차였습니다. 그러다 하나씩 걸렸는데 만난 다음에 차인 얘기를 안 하고 살기 때문에 그게 일타석일안타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수십 타석 들어서서 겨우 한 대 맞은 겁니다. 그것도 홈런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사람 만난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7급 공채를 했는데 84:1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잘 될 거야.” 그런데 84명중의 1명이 되고 나무지 83명은 헛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 삶의 사태들을 수없이 만나잖아요. 만약에 잘 됐을 때 가슴 떨려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호들갑을 떨고 안 됐을 때 농약 생각이 자꾸 난다면. 물어보겠습니다. 그런 인생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의 조건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폴딱폴딱 뛸 정도로 좋은 일이 연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SNS에서 여러분 친구들이나 어떤 사람들이 ‘아 정말 화려한 삶이다. 진짜 꽃길만 걷는구나.’라고 했는데 남이 보기에 그런 거고 사실은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송중기가 이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의 인생이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첫 번째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게 지침입니다. 수많은 업 앤 다운을 만나고 압도적으로 다운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럴 때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다운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업에 도전할 기운조차 없어져 버리는 것. 그러니까 한 번 넘어진 김에 달리기하다가 넘어졌거든요. 그냥 아예 거기서 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겁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왜? 나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첫 번째가 내 인생의 승리하는 적이 많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안 되는 적이 많습니다. 업 되는 경우가 소수고 다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뭔가 더 높은 관점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아서 업 되었을 때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그 좋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데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그것이 나머지 인생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게 하고. 그 다음에 다운 됐을 때는 다운 된 것 때문에 일어나지 못 할 정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업 앤 다운이 되잖아요. 이것을 멀리서 내려다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내 인생의 무슨 삶의 사태들을 만나든지 간에 이게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데 의미는 수평입니다. 그 의미를 따라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업 될 때도 있지만 의미는 업 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의미를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운 됩니다. 다운됐는데 현실은 다운 됐지만 내가 다운된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찾아내면 업 됐을 때와 다운 됐을 때를 이을 수 있는 점과 점을 이을 수 있는 선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인생길이 되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갈등이 무엇이냐 하면 신념과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갈등한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 사이에 갈등입니다. 존재하는 것과 살아야하는 것 사이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갈등을 느낀다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 그런데 나는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삼시새끼 엄마가 밥해서 먹여주고 학교 갈 차비주면 친구들이랑 차 마실 정도를 주면 그걸로 충분한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식충이지.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한다는 뜻입니다. live my life to live my life 동종 목적어를 쓰자면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는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가야 한다는 것 사이에 괴리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괴리를 잘못 다루게 되면 아주 심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일그러진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마음에 맺히는 것입니다. 대상 파괴적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잘못된 접근이 세 가지가 있는데 아주 감성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잘 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한 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한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감성적인 해결 방식입니다. 감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으른 해결입니다.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몰라. 몰라. 몰라. 어떻게 되겠지. 나도 몰라.” 세상이라는 흐름 속에서 자기를 던져 버리고 그냥 주체도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간은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냥 세상의 제도에 자기를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이 사회가 개떡 같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조가 잘 못 되서 그런 겁니다. 모든 탓을 사회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결책이 아닙니다.
올바른 접근법은 자기가 왜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난 법관이 될 거야. 나는 꼭 그렇게 되고 말거야.” 그게 어느 정도 힘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법관이 된다면 뭘 할 겁니까? “내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부장판사에 오를 거야.” 그 다음에 뭡니까? “반드시 법원장에 도전할거야.” 그래서요? 그 다음에는요? 그 전에 은퇴하겠지요.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은 아직 집에서 걱정할 정도로 많은 나이를 먹진 않았지요. 결혼과 비혼. 예쁜 것과 그저 그런 것. 대기업에 들어간 것과 그냥 중소기업에 들어간 것. 심지어 취업한 것과 백수로 있는 것. 이 모든 것. 일류대학을 나오고 대학을 못 나오고 수석을 하고 꼴등으로 졸업하고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양상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그 양상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 필요 없어.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현모양처가 될 거야.” 그러다 1982년생 김지영 그런 거 쓰실 거 아니에요? 보셨어요? 보세요.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왜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는지 동의할 수 없는지 보십시오. 그러면 그건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못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취업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냥 많이 배웠는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인이다>처럼 살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인생의 본질이 아니고 삶의 양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상은 예를 들어서 자매가 있는데 오늘은 스웨터를 입고 왔는데 내일은 투피스를 입고 왔습니다. 그 다음날은 원피스를 입고 왔습니다. 그 다음날은 오버코트를 입고 왔습니다. 그 다음날은 후드티를 입고 왔습니다. 그래도 자매가 자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직업, 결혼 유무 이런 등등 외적인 것은 한 사람이 아무리 옷을 바꾸어 입고와도 그 사람인 것이 변함이 없는 것 같은 그것이 본질이고 이 옷은 양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팀 켈러 목사처럼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올 수도 있습니다. 머리가 벗겨졌을 수도 있고 머리숱이 많이 났을 수도 있고. 그것은 모두 그 사람의 삶의 양상입니다.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
B. 지혜와 지식의 빛
그럼 본질이 무엇이냐? 인생의 본질은 여러분도 이미 그리스도인이니까 더 철학적인 이야기는 많이 안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라는 인간을 만드셨을 때 기대하셨던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겠지요. “그것은 너무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 이기주의가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고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하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살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업 앤 다운하는 인생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내 친구가 아무리 돈 많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도 나는 거기에 쫄지 않는 것입니다. 왜? 나는 지금 의미를 따라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나보다 월등한 외모를 가지고 월등한 집안에 태어나서 엄청난 부를 누리고 모든 인생의 많은 기회들을 독차지 하는 사람 앞에서도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쫄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태어난 이래로 사피엔스가 호모사피엔스가 된 이래로 -나는 물론 창조론을 믿지만- 그 인구가 천 억 정도 될 거라고 보는데 천 억중에 아무도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 부여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제일 못난 사람이 나보다 우월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난 쟤만큼도 공부 못해. 쟤만큼 집안이 부자도 아니야. 나는 쟤만큼 다른 사람의 매력을 끌만한 존재도 아니야.’ 그런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나는 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없고 그 사람도 내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독특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희귀종 아십니까? 몇 개 안 남았습니다. 몇 개 안 남은 것들은 우리가 보호하려고 하잖아요. 크게 인류에 복지에 도움이 되는 동물이 아닌데도 새 한 마리를 벌벌 떨면서 보호하고 거기에 몇 킬로미터 사람 못 들어간다고 말뚝 쳐놓고 하잖아요. 몇 마리 안 남은 희귀종이 살고 있다고 하잖아요.
여러분은 전 인류사에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는 유일한 희귀종인 동시에 마지막 남은 유일한 개체입니다. 여러분들이 죽고 나면 여러분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끝입니다. 영원한 시점에서부터 영원에 흐르기 까지 여러분 인생은 딱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하고 비교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의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렇게 돈 많은 사람도 안 부럽고, 나보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기회를 가져도 나는 그것을 시기하지 않고, 그런 사람에게 위축감을 느끼고 당당하게 쫄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반드시 공부를 잘 해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기가 막히게 멋진 남자친구를 만나야하고 아주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나야하고 어머 어마한 장인 장모를 만나야하고 부모님도 그런 사람을 만나야하고 최고의 회사에 들어가서 우리 친구들보다 내가 나아야 하고 등등 그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것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사가 되고 싶으면 뭐합니까? 성적이 상위 1%안에 못 드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저는 진작부터 인정했습니다. 인정하고 나면 모두 다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되고 그 다음에 백수가 되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일찍 시집가고 아니면 한 50되어서 가고 그 모든 건 삶의 양상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렇게 결혼을 못해서 그게 자기의 죄인 것처럼 매일매일 괴로워하는 겁니다. 자매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첫 시간에 자유를 얻었다고 합니다. 결혼과 비혼은 삶의 양상이지 본질이 아니며, 시집을 갈 수도 있고 안 갈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혼자 행복하게 사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만나서 결혼했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혼자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사람이 둘이 만나면 더 불행해지기 훨씬 쉽습니다. 헤엄을 못 쳐서 내 무게가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자기와 같이 헤엄 못 치는 사람 둘이서 물 한 가운데서 손을 잡았습니다. 잘 들어가겠지요. 그래서 내가 빨리 시집이나 가고 싶어 하고 장가나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에 남은 유일한 희귀종입니다. 그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내 삶은 적어도 누구도 반복할 수 없고 살아갈 수없는 나로서 끝나는 나의 인생이다, 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업 됐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주셔서 여기에 있게 하셨을까? 나한테 무얼 원하시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서 다운 됐을 때 이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닦으시는구나. 모든 사람이 꽃길만 걷고 싶어 하지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꽃길만 걸어서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꽃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웨딩마치 할 때 한 10미터쯤 걸어가니까 예쁘지 이게 다리가 아프도록 갔는데도 안 끝난다면 그게 꽃길이겠습니까? 지긋지긋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폭풍을 만나면 쉼터로 피하고 번개가 치면 숨어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소낙비를 피하기 위해 외투로 가리고 뛰는 것도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신념을 가지십시오. 예수 잘 믿으십시오. 그리고 제발 공부하십시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리니지 게임사용 설명서가 두께가 어느 정도 됩니까? 스타크래프트가 500페이지라고 그러더군요. 인생 사용설명서가 얼마나 될까요? 아무도 제대로 된 사용 설명서를 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설명서를 읽다가 세탁기 설명서를 읽고 그 지식을 가지고 전자레인지를 작동을 한 겁니다.
마지막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이걸 피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은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빛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어떤 엄혹한 현실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완성된 강의는 아니지만 아쉽게 마치겠습니다.
IV. 결론
(예화) 가슴 아픈 예화이지만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결혼을 했습니다.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금술이 좋았는지 12년 동안 아이를 6명 낳았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12살이고 제일 막내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던 30대 중반의 이 부인이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 남자 혼자 남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6개 고아원을 알아보는 것도 한 방법일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선택할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내가 이 여섯 아이를 제대로 기르면서 아내가 저 세상에서도 가슴 아파하지 않게 이 아이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잖아요. 이미 아내가 죽은 현실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힘을 내야 합니다. 성차별이 있을까봐 반대로 똑같이 하겠습니다. 남편이 덜컥 죽었습니다. 마지막 아이가 겨우 석 달입니다. 백일잔치를 앞두고 남편이 갔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엄마가 6개의 고아원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일수 있지만 엄마가 할 짓은 아닙니다. 남편이 갔고 지금 현재 아무런 사회의 직업 활동을 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6명의 아이들이 남아서 앞에 있습니다. 남편이 유산도 못 남겼습니다. 겨우 전세 값 하나 남겼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든지 내가 이 자식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입술을 깨물면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안하면 자신의 인생도 망가지고 여섯 아이의 인생도 망가지는 것입니다.
현실이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안 들면 바꾸십시오. 노력을 하십시오. 돈이 없으면 절약하든지 벌든지 하십시오. 두 번째는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공부해서 경쟁력이 떨어졌다하면 덜 자고 덜 먹고 덜 놀고 공부 하십시오. 모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법고시도 할 수 있고요. 의대를 다시 갈 확률은 적지만 모든지 웬만하면 할 수 있습니다. 뭘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현재의 현실. 그 사이의 갭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닙니다. 자매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면 그만 두는 것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만두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직장에 가서 3시에 퇴근 시켜달라고는 말 못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헬스클럽에 가서 미친 듯이 뛰어서 체력을 길러서 6시 끝나고 나도 아주 상쾌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까지 체력을 단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계속해서 아무것도 못 하면서 패배자로서 현신을 원망하고 앙심을 품으면서 아니면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저의 강의는 이제 끝났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여기에 왜 살아 있는가? 나는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20년 후에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젊음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 만기 어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젊음을 대충 이렇게 살면 30년 후에 어음이 돌아옵니다. 그때 파산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달한 이 강의가 여러분들에게 아주 바람직한 고민을 불러 일으키고 염려하고 본질처럼 느끼던 것들을 그런 게 아니라는 자유를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