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8-9)
녹취자: 오희열
수련회에 와서 무슨 말씀을 전할까 하다가 “목회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리바이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와는 다르겠지만 오늘부터 내일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키가 작고 이마가 튀어나오고 광대뼈도 튀어나오고 목이 짧고 배가 나온 볼품없는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고, 아주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다메섹으로 가는 공문을 청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가장 크게 변화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뵙지는 못했으나 그 사도들 못지않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사랑에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붙들린 강제력이 사도바울의 소명의 본질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 또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내가 복음에 빚진 자로라”고 하는 부채의식도 이 사랑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목회자의 자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하늘의 달이나 별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고 왜 죽으시고 왜 고난을 당하시고 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서 “사모한다”라고 번역했는데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불쑥 나온 것은 내 마음에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시라고 할 때 “증인”의 개념은, 당시의 구약적인 배경으로 보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은 두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정죄할 수 있을 정도로 법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증인이었고, 과학적인 수사방법도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사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 많은 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한 것은, 공동체의 진실성을 확보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의무 중에 하나로 대두된 것입니다. 그런 법정적 용어를 동반하면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하나님 이상의 증인이 될 분이 없는 최종적인 증인을 부르면서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의 증인으로 삼으니 이 사랑은 자신에게 일체의 거짓말이 없는 진실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흥미를 끄는 단어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라고 했는데 “심장”은 우리가 알다시피 cardiac 입니다. 희랍어로 “카르디아”입니다. cardiology라고 하면 심장학이 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cardiac 이 사용되지 않고 “스프랑크니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빌레몬서에서 “그는 나의 심복이라”고 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스프랑크니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혼의 좌소가 심장이 아니라 배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저희의 신은 배요”라고 하면서 악한 자들을 정죄할 때 그것은 결국 인간의 영혼의 좌소가 배에 있다고 보고, 또는 배가 모든 욕망의 근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사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심히 민망히 여기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 할 때 “민망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받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등가번역을 하면, “너무 가엾어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으셨으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뼛속 깊숙이 배어있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제외하고는 화자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목회를 잘하려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고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공부해야겠다고 도전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왜 하나님을 이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할까?”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공부, 목회의 기술, 이런 나머지 많은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런 근본적인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최근에 내가 한 사역자, 목사이기 이전에 내가 왜 하나님을 이 정도 밖에 사랑하지 못할까를 가지고 고민해 본적이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우리의 목회가 사람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거의 고민하지 않는 목회 현장이 된다면 그것은 죽은 목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지금 로마의 옥 속에 갇혔어도 최종적인 고민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의 실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그 의미가 발견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이 증인으로 부를 정도로 아주 분명할 때 그때 그 사람은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왜? 잃어버릴 것도 없고 더 원하는 것도 없고 헤어지기에 두려운 사람도 없고 마주치기에 무서운 사람도 없는 무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랑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사역 이전에 한 사람의 신자로서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이전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목회의 자리에 세워주셨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을 돌보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감옥 속에서도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들은 다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고 할 정도로 그렇게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돌보던 모든 양떼들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1번, 목회자의 정체입니다. 목회자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비상하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평신도의 소명과 목회자의 소명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라고 보았습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을 절절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목회자의 그것은 너무 큰 나머지 도저히 다른 직업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된 사람, 그래서 굶든지 먹든지 내 생업을 모두 접고 이 일에 자신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목회자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든 적게 쓰임을 받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회자는 자신도 행복하고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남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히 바라기는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재능이 있어서 장로님들께도 인정을 받고 담임목사에게도 인정을 받고 성도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잘해서 성도들이 계속 늘어날까?” 하면서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비교해보십시오. 자기 자신과 비교하면서 “1년 전의 나에 비해서 1년 후의 나는 얼마나 변했나?, 목회를 시작할 때의 나와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 점에서 변했나?, 정말 내가 그때처럼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비교하는 사람이 될 때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눈물은 교회의 샘입니다.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나타나고, 인간적으로는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신기하게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면서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주 초월적인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친밀함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친밀함을 계속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은 첫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이 기도 제목은 이날 처음 생각난 기도제목이겠습니까, 아니면 사도바울이 이 빌립교 교인들을 위해 늘 기도하던 제목이었겠습니까? 어떠십니까? 거짓이 아니라 늘 하던 기도는 그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사람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하는 그의 선교적 비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가 온갖 성령의 능력으로 갖은 은사를 행했으니 우리도 그처럼 그렇게 섬기는 것을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비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평소에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너희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어로 보면 “너희의 그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원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랑을 네 가지로 나눈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을 스톨게라고 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스라고 하고 형제들 간의 사랑을 필리아라고 하고, 그리고 아가페가 있었는데 모두 똑같이 “사랑”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아가페”는 인간을 향한 신의 맹목적 사랑이라고 고등학교 때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실 맹목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의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이 많거나 얼굴이 유난히 예쁘거나 하는 여러 가지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옛날에 비서가 있었는데, “너희 친구들은 시집 잘 가니?”, “네, 그런데 목사님 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결혼해요.”, “결혼해서 신분 상승되는 경우는 없니?”, “전혀 없어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어떻게?”, “다들 자기네 수준에 맞춰서 결혼하는데 여자가 결혼을 통해서 자기보다 훨씬 수준 높은 집에 시집을 가는 경우가 있어요. 영화배우처럼 생기면 기회가 있어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사실은 남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욕망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장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흘러 나오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benevolentiae”, “박애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박애적 사랑은 사랑하는 주체가 사랑에 넘치기 때문에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받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아가페입니다. 성도들을 가리켜서 “아가페토이”, “아가페토스” 라고 하는데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하시드”, 혹은 “하시딤”이 됩니다. “헤세드를 입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은 자들아”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이 아니라 “사랑받는”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아가페 사랑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랑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아가페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받은 사람을 향해서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목회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렇게 구원과 함께 받은 아가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목회가 무엇을 하는 일이냐고 물을 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전도이고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조금밖에 사랑이 남지 않았는데 그것을 다시 점점 더 풍성하게 불러일으켜 줘서 그 사랑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풍성하며”의 희랍어 단어는 “페리시우세”입니다. “페리”는 둘레이고 “세우”는 “넘친다”는 뜻입니다. 커다란 욕조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 물을 가득 부으면 이것이 차다 못해서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마치 포도주를 잔에 가득 부으니까 거품과 함께 잔 테두리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그 상태를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인격 속에 꽉 차서, 심지어 그것이 바깥으로 흘러넘치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목회의 꽃은 사람의 회심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회의 꽃은 불신자를 회심하게 하고 회심한 사람에게 다시 그 회심을 경험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을 넘치도록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기도 가운데 나를 신학교에 가라고 하시는 것처럼 그 소명을 확인하는데 매우 주관적입니다. 객관적으로 이 소명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와 만나서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교제를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될 때, 그것은 소명에 대한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모든 사람을 다 목사로 부르신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여러분이 목회를 여태까지 해왔습니다. 1년, 2년, 3년, 4년이 될 수도 있고 전도사가 안 됐다고 해도 교사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의 일입니다. 인턴십을 했는데 18명~20명 정도가 공부하러 왔습니다. 거기서 회심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 아주 중요한 숙제를 내줬습니다. “1개월의 여유를 줄 테니 조사를 해 보라.” 고 했습니다.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각자 맡은 부서가 있었고 교사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가서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의 명단을 적고, 한 사람씩 명단을 해서 양심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정말 구원받은 아이인지 체크 해 보라고 했습니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교사들에게 기준을 가르쳐주고 체크를 하도록 해서 한 달 후에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 후에 각자의 자료를 가지고 모였는데 모두 굉장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초등부를 담당하고 있던 전도사였는데 학생 수가 약 50명 정도 되는 교회였습니다. 선생님을 시키지 않고 그 전도사가 한 사람씩 불러서 대화하면서 구원받았는지를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총신을 다니는 신학생으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아이는 반드시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딱 두 사람이었고 세 명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 구원에 가까이 가 있는 것 같다고 했고 나머지 45명 정도는 결코 구원받았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의 모습이 무슨 폭격을 맞은 모습이었습니다. 우울해서 거의 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내다가 왔습니다. 자신은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 면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조사 결과를 보고 마지막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데,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런 현실을 파악한 적도 없었지만 이런 현실을 얼핏얼핏 알게 된 때에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다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그 중에 몇 사람은 몸부림치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열린교회에 와서 회심집회를 배워서 자기네 교회에 가서 회심집회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들이 다 만들어 놓은 교회에 와서 굴러가는 부서에 들어가고 자기도 거기서 함께 굴러가면서 하는 것은 진짜 목회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일이라면 신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을 데려다 놓아도 그에게 권위를 주면 그 정도 행정은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말 내가 1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어떤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지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냉정한 것입니다.
열린교회에서 한 10년 있다가 떠난 어떤 목회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린교회에서 교구 사역을 하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면 변화를 받고 너무 기뻐해서 그것이 자기 능력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교회를 해 보니까 그러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지금 나타나셔서, “얘야, 나는 널 쓰지 않겠다.” 고 하시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보죠?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다면 저를 깎아서라도 사용해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섬기는 것 이외에 인생의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며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것을 지금 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고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의 가장 큰 증거는, 그것이 다수일 수 있고 소수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말씀사역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있는 사랑은 나를 만나서 말씀을 배우고 목회를 하면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경계를 넘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물처럼 넘쳐 흐릅니다.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쏟으면서 고뇌하며 사역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잘 훈련받을 경우에는 대기업의 영업사원 같은 교역자가 됩니다. 예의 바르고 아주 세련됐지만 그것뿐인 영업사원. 영업사원도 중소기업도 안 되는 사기성 있는 회사의 영업사원과 대기업의 영업사원은 품위가 다릅니다. 그 차이일 뿐이지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입니다. 영업사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영업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런 식으로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외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을 자꾸 다른 핑계로 돌립니다. 교회가 지원을 해 주지 않아서,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서, 몸이 아파서, 아니면 목회 철학이 달라서, 주위에 돕는 사람이 없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일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외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목회자는 그 사람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왜 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우리가 말씀 사역을 할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때 그 목회의 사역은 빛나고 아름다운 사역이 됩니다.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뭐가 그렇게 필요합니까? 물론 우리는 목회자들이니까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고 속에 근심, 밖에 걱정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하루 나가서 일을 해야만 내일 먹고 살 수 있는 성도들도 아주 많고, 심방을 해보면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 정도의 고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고민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목회의 성공과 실패가 달린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발견하고 나니까 제일 먼저 찾아온 변화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말할 때 나는 열정을 가지고 말하게 되었고, 내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열정을 가지고 말할 때 사람들이 그 말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개한다든지 반발한다든지 아니면 공감한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됩니다.
비교적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열네 살 때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열아홉 살에 주님께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스물한 살에 회심하면서 비교적 착한 신자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헌신한 것은 아니지만 회심한 그 다음 달부터 교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거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가서 봉사하고 여름성경학교를 할 때면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털어놓고 봉사하며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결국 내가 세상의 직업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결심할 때도 저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89년도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주셨고 오전에 학생들이 캠퍼스를 떠나고 야간 학생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조용한 시간에 교수실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면서 매일매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가 알던 그 사랑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고 89년도에 생애에 잊히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말씀을 전하는데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그동안 그렇게 설교해도 무감각하게 듣던 사람들이 아주 뚜렷하게 회개를 하든지 덤벼들든지 둘 중에 하나로 결판이 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뭔가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왕십리 교회라는 곳에서 대학부 수련회를 하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은혜를 받아서 설교를 했지만 부흥회를 다녀본 것은 그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7시 반부터 찬양을 해서 8시에 마치고 제가 8시부터 설교를 시작해서 45분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너무 힘이 들어서 저 산꼭대기에 있는 강사 숙소로 갔는데 저 멀리 집회 장소에서 소리가 들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자다가 깨었는데 아직도 아이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였습니다. 그러니까 9시부터 시작해서 네 시간 동안을 인도자도 없이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하는데 4일 동안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교회에 돌아왔고 주일이었는데 고등학생들이 80명 정도 모였습니다. 마음에 깊은 각오를 하고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 1주일 내내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는데 아이들이 80명 정도 되고 선생님들이 20명쯤 되니까 모두 100명쯤 되는데 아이들이 선생님들과 같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처음 봤습니다. 울면서 땅을 치면서 회개했습니다. 일순간에 교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아이들은 그림처럼 앉아있고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비율이 50대50 정도 되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선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사 모임 시간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이것은 성령의 역사였고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간증하는 교사들이 있었고 또 하나는 전도사님의 신학적 균형이 깨어졌고 이것은 모두 감정놀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제가 능숙하게 휘어잡았을 텐데 그때는 초년시절이어서 가슴앓이만 하고 끝내고 갔습니다. 그리고 두 주 정도 있다가 여름 수련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련회를 했는데 어마어마한 홍수가 났습니다. 오지의 산을 넘어왔는데 여섯 개의 개울이 생길 정도였고 도저히 나갈 수 없게 고립되어서 군부대에 헬기 구조요청까지 해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가난해졌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인데 불타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너를 위해 큰 일을 행하리라.” 설교하러 올라가서 밖에서 뭐를 준비하는 교사들에게 모두 그만두고 다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45분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끝나고 천정이 찢어지는 것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렇게 뺀질거리던 아이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사판처럼 똑같았습니다. 인도자도 없는데 새벽 1시까지 계속 기도하고 어떤 아이들은 기도하다가 기절해버렸습니다. 나중에 한 장로님이 보시기에 너무 안쓰러우니까 “전도사님, 이제 그만 절제를 시킵시다. 쟤네들 저러다가 다 쓰러지겠습니다.” 새벽 1시쯤 되어서 다독이면서 찬양을 같이 하자고 하면서 중지시켰습니다. 그것이 제가 설교자로서 부름받은 첫 날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속에 진정한 설교라는 것이 무엇이고, 사람들이 변화되면 어디까지 회개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그렇게 기이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을 불러놓고 한 마디씩 이야기를 하게 했더니 가슴을 찌르는 간증이 있었습니다. 수련회에 와서도 저에게 무신론을 상담하던 자매였습니다.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설교를 들은 후에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벽부터 말씀을 듣기 위해서 새벽예배에 나오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지하창고에 모여서 눈물로 기도하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나오지 않은 친구들을 심방하러 가고 토요일이면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혼자 기도하는 강대에 모여서, 많이 모일 때는 35명까지 모여서 토요일 밤을 꼬박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되 야망을 갖지 말고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우리를 통해 보여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아주 높은 수준의 것을 잡아야 합니다.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던 경험들을 책으로 많이 읽고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전할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높은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설교를 하면서 거의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20년 후에도 똑같을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예배를 드리면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설교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깊이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이렇게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마지막에 보시면, 그렇게 사랑이 점점 풍성하게 하는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지식과 또 하나는 모든 총명입니다. 사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에피그노시스”인데 이것은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그것은 1차적으로 영적인 사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혹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실체 등등, 모든 것이 사물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오류가 없는 철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불일듯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에피그노시스”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면서 확장되는 모든 지식입니다. 이 “에피그노시스”는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정확하고, 그것에 충분히 알고 있는 마음으로 가르쳐주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실연의 아픔이 얼마나 클까?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 묘사를 한다고 해도 그 아픔을 죽도록 겪어본 사람들이 가장 잘 압니다. 작가가 그런 것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것을 쓴다고 하면 기가 막히게 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겪기는 했는데 문학적인 능력이 없다면 전달하지 못할 것이고 전달할 수 있는 문학적인 능력은 있는데 경험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도록 글을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은 체험한 것만큼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알다시피,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전인적이고 포괄적인 앎을 뜻합니다. 사물에 대한 정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만한 지식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사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온전한 지식이어야 합니다.
어떤 물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 사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당연히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에 가까이 가 있는 신학을 공부하고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일반학문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렇게 학문에 대해서 넓히고 깊이를 더 하는 가운데 예전에는 희미하게 밖에 알 수 없었던 것을 또렷하게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 그때, 그리고 자기가 그 지식대로 살아갈 때 그것들은 한 설교자 속에서 에피그노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 속에 아가페의 사랑이 불러일으켜 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어제 신입교역자들에게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 유학 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회자의 관심은 그렇게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고 들어가고 그 밖의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회자를 위한 직접적인 준비가 아니라 사물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증진하기 위한 공부여야 합니다. 그 공부는 살아가는 것과 나뉠 수가 없는 공부입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유혹에 빠졌습니다. 남보다 더 탁월한 학문적 지식을 소유해서 그들이 존경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고 격차가 너무 심해서 사람들이 나를 최고라고 불러주는 그런 학문에 대한 지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그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욕망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으로 불타오를 수 있는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꾸준히 경건에 이르게 하는 성경과 학문들을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지적인 성숙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어떤 해에, 교역자를 뽑기도 싫었는데 교역자를 뽑으라고 후보를 잔뜩 모아 놓았습니다. 몇 번을 걸러서 마지막으로 여전도사를 뽑는데 두 명을 뽑는데 마지막에 셋인가 네 사람이 올라왔습니다. 내가 오케이하고 도장을 찍으면 채용이 되는데 올라와서 보니까,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안 되지만 “이 분들이 무슨 배짱으로 열린교회에 원서를 냈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 아닌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과 교역자분들을 두 번, 세 번 걸러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니었습니다. 학력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어느 지방 신학교를 나오고, 흐르는 뉘앙스가 교양이 아닌 것을 보였습니다. 열린교회에서 목회할 수준의 교양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적인 질문들을 했습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 얻는 믿음과 구원을 얻지 못하는 믿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화란 무엇입니까?” 이런 평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문제도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내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맞출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제 생각에, ‘저런 사람들이 교구에 가서 성도들을 가르치면 얼마나 성도들이 괴로울까?’ 결국 그 사람들을 다 떨어뜨리고 교역자를 뽑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일 수도 있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재앙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어렴풋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체험 하나를 가지고 영혼들을 좌우하는 목회를 한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본인에게도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이스데시스”가 나옵니다. 이것은 “총명”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앞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이 “모든”은 “범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깊이”에 관한 “모든”입니다. 칼빈의 해석에 의하면, “아이스데시스”는 “아이스다노마이”라는 데포넌트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아이스다노마이”는 “놀라다, surprise”, 혹은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이스데시스”는 “직관적인 통찰”입니다. 현대 희랍어 성경에서는 “노에시스”라고 번역하는데 그리스철학의 “누스”에서 온 말입니다. “누스”는 “정신”입니다. 세계 전체에 원인이 되고 있는 하나의 정신, “세계의 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인간들은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그 누스 때문에 각자 공통적인 감각을 가지고 진리와 도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쓰인 “아이스데시스”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 오성입니다. 오성과 이성의 차이는, “이성”은 어떤 사물을 전건과 후건,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면서 고리가 연결되어있는 것들을 찾아가는 능력입니다. 이성이 발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공부를 잘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대부분 이성의 연결고리로 되어 있고 시험문제는 이 고리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묻는 것을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스데시스”는 그것보다 어떤 사물을 꿰뚫어보고 그 배후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파악하는 능력이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알게 되는 기능입니다. 처음부터 인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면서 지식을 획득하게 됩니다.
지연 자매, 몇 년 며칠 생입니까? (93년 9월 18일) 열린교회 개척하던 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출생증명서로) 만약에 조작되었다면? 그대는 그대가 태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람이 의도를 가지면 자매 하나쯤 산부인과에서 바꿔치기 하거나 출생일자 하나 정도 고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왕손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재벌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수 천 억의 어마어마한 상속녀도 아니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그렇게 복잡하게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매가 1993년 9월 18일에 태어났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실이라고 깔아놓고 어디 가서도 자신은 93년 9월 18일에는 세상에 존재했노라고 말하고 모든 기억의 퍼즐을 그 시점에 맞추어 짜면서 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식을 획득할 때, 그 믿음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믿음과는 좀 다르지만, 까뒤집어서 알 수 있는 이성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믿음, 이 두 가지를 도구로 지식을 모으고 모은 지식은 상관없이 그것들을 기초하고 함께 버무려서 건물을 쌓듯이 쌓아가면서 나 개인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가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분명히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일 것이라고 믿지만 그렇게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사실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많이 밝혀집니다. 특히 드라마에서 많이 나옵니다. 얼마든지 나옵니다. 우연히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했는데 도저히 지금의 엄마 아빠의 혈액의 조합으로 나올 수 없는 혈액으로 나옵니다. 어려서부터 그것을 굳게 믿고 살았는데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들은 이렇게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전달하시고 초월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이것이 고전적인 주제인 “이성과 믿음의 관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내가 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를 보시면, 20페이지 정도의 꽤 긴 분량을 신앙과 이성의 해석사에 할애하고 그것이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신앙과 이성에 갈등을 일으키면서 조화를 이루고 왔는가 하는 것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사물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갖게 만들고 초월적인 것을 믿게 함으로써 이 사랑은 우리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좋은 이성과 훌륭한 신앙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장작이라면 아가페의 사랑은 그것을 타고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그 불길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지적인 준비를 요구한다면 “아이스데시스”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들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지식으로 삼고 이 두 가지에 의해서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 불타오를 때 그때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칠 때 두 가지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잘 전달을 받아서 무지에서 일어나고, 가르칠 때 성령이 역사함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그것을 믿어지게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소수의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조금 영광을 받으시고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더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목회에 있어서 수와 규모를 추구하지 말고 질을 추구하되 그 질이 계속 확산될 때 그것을 통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스테판 차녹이라는 청교도는 대단한 철학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분의 책을 꼭 읽어보십시오. 특히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담론들은 청교도의 역사에서도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이 당신을 예배하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하는 것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소수의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다수의 사람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면 이런 말은 성립하지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작은 무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에서보다는 다수의 무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의 임무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불붙고 그 불붙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불타오르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임무이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런 일을 잘 하지 않으실 때 소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둘이 사귑니다. 나는 여자이고 이 목사님은 남자입니다. 서로 애인인데 수많은 여자들이 와서 자꾸 찝쩍댑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도가 지나칩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calm, 고요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마어마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병들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은데 나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이렇게 바쁘고 고단하도록 사역을 했는데 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한다면, 몸은 있지만 마음을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 거룩한 시기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애인으로 불러주셨던 내 양떼들이 변심하여 세상으로 갔나이다!” 이 고백을 하게 될 때, 마음이 아프고 시기가 나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오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목회의 본질은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한데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이다. 이것입니다. 매일매일 공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전에 믿어지지 않던 것을 믿으면서 여러분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될, 마음 속의 필연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