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에 관하여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녹취자 : 김세나
건강도 어느 정도 주셨고, 말씀의 은혜를 특별히 많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염려에 관한 유장한 이야기는 다 할 수 없고, 마지막 절에 나와 있는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엄중한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단어가 ‘헤카키아’라는 단어인데, 여러분들 학교 다니던 시절에 잘 알았던 ‘카코스’의 여성형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나쁜 것. 한 날의 나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매일 매일 나쁜 것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중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삶의 많은 갈등들과 모순들이 생겨납니다.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결코 꽃길만 걸으며 살 수 없고, 우리가 믿고 바라기는 하지만,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카키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쁜 일이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품에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작동에 문제가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된 보잉사 737 에어맥스는 그 제품이 문제가 되어서 450명 정도가 이미 사고사로 죽었고, 최근 뉴스를 보니까 에어맥스 생산을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법정 분쟁이 시작되면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배상금액을 물어줘야 할 상황입니다. 결국 제품 자체가 결함이 있으면 시간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작동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는 괴로움은 첫째는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둘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나쁜 일은 매일 매일 일어납니다. ‘한 날의 나쁜 일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인데도 매일 매일 괴로운 일들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거나 개인적인 일을 하며 살다가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두 번째는 모든 나쁜 일이 나에게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소화가 잘 안 됩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치질이 돋았나 해서 병원을 갔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더니 큰 병원에 가보시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큰 병원에 갔습니다.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서 보았더니, MRI를 찍으라는 것입니다. MRI를 찍고 주위에 있는 동료 의사들을 몇 명 부르더니 MRI찍은 것을 보고 이야기 하면서 서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물러가고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췌장암 말기입니다. 2개월 정도 남았는데 현대 의학으로는 손 쓸 수가 없습니다. 교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꾸기를 그랬는데 기도했더니 나았더라, 그러한 것을 꿈꾸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는 뭐냐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한 날에 나쁜 일은 그 날에 충분하다.’ ‘아케톤’이라는 단어인데 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한 날에 일어나는 나쁜 일은 그 날로써 유효기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날로 유효하다. 그날에만 소용되는 것이다. 표를 끊었는데, 기차표를 끊었으면 그날만 유효합니다. 그 기차에만 유효합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날이 일어났는데 그날에 유효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우리의 뼈를 말리고 더 크고 깊은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이것이 경험해 보니까 매우 해로운 것인데, 심리학에서 뉴클리어 필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핵심감정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떠어떠한 일들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어떤 감정이 이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고 이 사람 안에 지속적으로 있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고, 감정, 의지,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영향력을 끼쳐서 주도적인 지배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핵심감정이라 부릅니다. 예전에 만났던 교인 중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어린 나이에 엄마와 단 둘이서 모든 것을 해치며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너무 순수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속고 친척에게도 속았습니다. 어렸을 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못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뒤에도 여전히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욱 강력한 경우는 트라우마 같은 경우입니다. 트라우마가 확 들어오면 논리적인 것과 상관없이 그것이 자기를 지배하는 핵심 감정이 되어서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면 이러한 핵심감정이 역할 하는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가? 사실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각자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에서 나쁜 일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성향과 그 나쁜 일들의 경험을 만나면 어떻든지 우리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하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정도의 문제가 있겠지요. 어느 정도로 지배를 받게 되느냐, 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들이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과거의 나쁜 경험이나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지배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자유로워지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하는 이 기도도 훌륭한 기도이지만, 그것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쁜 것이 일어나도 결국 ‘나는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최악의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때 일이고, 나는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게 살아가겠다’고 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한 20년 뒤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겠습니까? 한 20년 뒤에 심각한 치매가 와서 산 아래 있는 어느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도 날치니까 그러면 안 되겠지만 양쪽 팔을 수갑에 채워 침대에 감아놓고, 아내가 와도 아내를 내가 알아볼 수 없고, 애들이 와도 우리 애들인지 알아볼 수 없는 처지가 되는 상황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염려가 오늘을 불우하게 살고 우울하게 살게 하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 발견한 인생의 격언이 있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남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정신의 크기를 훨씬 키워서 극단적인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도 인생을 이야기 하면 사추덕을 이야기 하면서 그것이 바로 용덕입니다. 용기입니다.
삶에 대한 용기가 없이는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는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 한 것과 같은 불행한 상황, “췌장암 말기입니다. 간암 말기입니다. 폐암 말기입니다”라고 들은 사람들은 모두 충분히 그것을 예측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산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일주일 전에는 생각지도 못하였고 자신의 인생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 자체가 한번 후려쳐서 이 사람이 이것에 의해서 정신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나쁜 것이 ‘헤카키아’라고 하는 것 없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악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LA 꼭대기에 있는 겟디 뮤지엄이란 곳이 있습니다. 겟디라는 사람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석유재벌로서 어마어마한 돈을 번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회심 비슷한 것을 하면서부터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많은 선한 사업을 하는데, LA의 어느 예쁜 산 위에 겟디라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뮤지엄을 만들었습니다. 그림 하나에 몇 백억 씩 하는 그림들이 즐비하게 걸려있고 제가 본 건축물 가운데 저를 즐겁게 하였던 몇 개 건축물 중 하나로 저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그곳에 가서 건축 해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물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물이 시냇물도 없는 재잘재잘 흐르는 것입니다. 딱 보니까 돌멩이를 타고 물을 흐르게 하면서 개울 바닥에 여러 개의 길이와 크기가 다른 돌기둥을 박아 놓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 놓았는가 하면, 소리가 건물의 벽과 벽 사이를 비율적으로 기가 막히게 지나가면서 막대에 따라 크고 작은 소리기 나면서 벽면을 때리면서 이중으로 툭툭 치면서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건축을 눈으로 보기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거기에 나와 있는 돌멩이는 좁게 보면 물이 흐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물의 흐름이 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나와 있어서 물길을 가로막는 것은 ‘카키아’입니다. 놀랍게 그러한 것들 때문에 아주 아름다운 소리를 드러내게 됩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매일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게 나의 인생을 지나면서 하나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꼬일까. 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소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인데 나에게는 얻기에 너무 비범한 것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였습니다. 거기에서 신정론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내 인생을 꼬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인생을 꼬이게 하시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허망한 인생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되고 싶은 대로 되었다면 인류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었을 것이고, 작가가 되었을 거고, 그렇게 살았겠지만, 은퇴를 앞두었을 것입니다. 그 삶이 무엇이 그렇게 재미 있었을까 싶습니다. 마광수 교수는 한때 그렇게 날리더니 자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인생의 마지막에 결국은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는 길마다 다 막고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나만 꼬인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꼬이게 만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꼬인 마디마디가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꼬이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를 드립니다.
목회만 가지고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목회가 개척을 해서 여기까지 교회가 옵니다. 대체적으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 행복했겠다, 쉬웠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일장일단인데 내가 교회를 개척해서 내 설교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주님 사랑해서 교회를 섬기고, 그러한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 보아 왔지만 거의 개척할 때부터 해서 최근에 약간 어려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고 내가 하고 싶은데 못 한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넓은 벌판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결정, 모든 돈, 모든 문제, 모든 것은 결국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그 심적인 부담으로 나의 건강을 그때부터 깎아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정신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중압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 목회하다보면 자신 마음대로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오면서 괴로움으로 옵니다.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그러한 것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성화시키실 수 없습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성화는 사랑의 싸움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는 사람이 깎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준성 목사가 ‘나 이거 가지고 가겠습니다.’ 허락도 안 받고 휙 가지고 갑니다. 상처 받을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없어도 물이 많습니다. 밖에 나가면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움켜쥐고 안 놓고 집착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꼭 하나 내놓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을 위한 훌륭한 헌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실 자기의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내 놓으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깎이고 성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꼬이게 하시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 하면, 그래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이러한 이야기를 하여도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내려와서 사람들이 고개를 90도로 숙이면서 ‘목사님,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그러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과 사람이 설교하고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그 설교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학적인 이의를 표명하고 대들고 돌아다니면서 험담하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사실은 그러한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나쁜 일은 나쁜 일입니다.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이신데, 그래서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한 날의 괴로움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이 날로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깊은 암시가 숨어져 있습니다. 한날에 괴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 괴로움이 그날로 충분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괴로운 일이 일어났으면, 어제 잠자리에 나쁜 소식을 들었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것이 당연히 떠오르고, 그것이 연결되고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염려를 가져오고 끊임없이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습니까.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아케톤', 곧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 한 날 안에서만 유효할 뿐이라고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목회에,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나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안달복달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으로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지 않았습니까? 수없는 사람들이 순교 당하고 쫓겨나고, 교인의 기회가 박탈당하고, 신분이 박탈당하고, 설교단에서 추방되고, 그러한 고난에 가득 찬 시대였습니다. 평균 연령이 35세 밖에 안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그 다른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평정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다른 교회 교인으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습니다. 개인적인 것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은데, 외국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사랑하였으니까 결혼하였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순간적인 엄청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집요하게 이혼을 요구하였기에 합의이혼을 할 것인가, 소송을 할 것인가에 서 있었습니다. 변호사는 선정이 되었고 합의를 안 해주면 내일 소송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쌓여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첫줄에서 뭐라고 하였는가 하면, “소송하라고 하십시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이미 부부관계는 박탈이 났고, 당신은 성경적으로 이혼을 안 하고 원만하게 해결을 해 보려고 하고, 남편은 죽어도 이혼을 하겠다고 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소송할거면 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소송하는 중에도 이혼이라는 것이 소송하면 그 다음날 바로 판결이 나서 찢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합의할 수 있는 조정 기간도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당신을 버린 남편이 버린 것을 공식화하겠다고 하는데 주님 의지하면서 사십시오.” 즉시 답장을 하였더니 너무나도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 되면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말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배우고, 젊었을 때는 펄펄 넘치는 기운으로 살았는데 이제 가보니까 무엇이 안 좋습니다. 놔두면 당뇨가 됩니다. 큰 일 납니다. 약을 먹어야 합니다. 온갖 이야기가 점점 들어오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약을 달고 살아야 하고 약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몰라서 눈에 보이도록 펼쳐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찾아 먹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때가옵니다. 그런데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허공중에 별처럼 태어났는데, 결국 먼지처럼 살다가 흩어져서 사라지는 존재들이 되었는데 결국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다가 갈 존재들인데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고 어려움이 안 생기를 여러분들 모두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 그러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오늘 일어나는 일이 오늘만 유효하다.”라고 생각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루’라는 말은 은유적이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 순간으로 족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이 핵심 감정으로 변하여서 모든 것을 염려라는 눈빛 속에 바라보면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끊임없이 해석을 해서 염려에 사로 잡혀서 노예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때, 선적인 행복과 점적인 행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선적인 행복은 행복이 미래에 목표가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서 마지막 내가 주님 옆에 갈 때에는 정말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그렇게 인정을 받고 싶다. 내가 목회가 끝날 때 나는 정말 하나님 사랑하며 산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 이것은 전부다 선적인 행복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인정받고 싶다고 하는 것은 선적인 행복입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모든 행복을 여기에 몰빵하게 되면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행복을 불안전한 데서 오는 불만으로 계속 바꿀 염려가 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목회를 여러분들이 한다고 할 때, “남들은 3년 만에 천명을 모았다고 하는데, 누구는 저렇게 많이 기도한다고 하는데 당신은 뭐야? 누구는 목회하면서도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다고 하는데 누구 좀 봐라. 누구 목사는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전도한다더라. 그랬더니 교인이 얼마가 늘었다더라. 벌써 땅을 샀다더라.” 이러한 식으로 계속해서 보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그렇게 되지 못한 끊임없는 요소가 내게는 고민이 됩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우리에게 경건으로 이것들을 모두 녹여내면 부족한 나를 계속 채찍질해서 앞으로 가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이 한없는 긴장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혼자 있으면 자기 자신의 속이 너무나도 허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우월감을 느끼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가면 친구들끼리라도 슬슬 피하거나 끊임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미래적인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정사하고 회개하는 삶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배운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아가는 이 삶도 거기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조화입니다. 내가 비록 20년 후에는 분당 요양 병원에 강제 수감될 지라도 지금 내가 이렇게 기개가 있고 살아 있어서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고 알아볼 수 있고 기쁘고, 아내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고, 같은 날에 죽을 수는 없지만 언제 둘 중 하나가 혼자가 될지라도 지금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 순간 매 순간, 맛있는 한 끼의 식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풍경을 보는 것, 이 모든 것, 한 잔의 커피에서까지 행복을 느끼면서 점적인 행복이 선적인 행복을 방해하지 않고, 선적인 행복이 점적인 행복을 뭉개버리지 않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일치를 이루는 삶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 전체를 엮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삶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하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면 염려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염려해서 염려가 해결이 된다면 염려만 할 것입니다. 아무런 도움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육체의 건강을 해치게 될 뿐입니다. “큰 일 났어요, 큰 일 났어요, 어쩌고 저쩌고” 해도 담임 목사가, “내가 이미 일고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하면 여러 사람들이 평안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별 것도 아닌 일에 “큰 일이네. 누가 그랬어?”라면서 뒤집어지면 평안하게 있었던 사람들도 엄청난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자신감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은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은 인생에 대한 해석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 해석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실 만큼 나는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절대로 지식이나 교회의 크기나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일 때문에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느끼지 말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열등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교회가 발전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한 목회자로 태어나서 이름 없이 사라지기보다는 교회가 잘 성장해서 한국교회에 뭔가 한 획을 그으며 보람 있게 사역하다가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 나는 어차피 목회자로 재능이 없나보다. 내 목회는 이제 여기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꿈을 마지막까지 간직하면서, 하나님 앞에 교회의 부흥을 꿈꾸십시오.
지난 해에 이야기 한 것처럼 어떻게 하면 내가 가르침으로, 설교로, 삶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본질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규모의 교회를 만들겠다, 이러한 것들이 비전이라는 이름하에 그렇게 하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정말 교회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끝까지 가져야 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아보고, 하나님께서 비록 수적으로는 100-200, 200-300, 300-400, 모두 그렇게 된다면 제가 춤추며 다닐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증거들을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알아주는 것, 그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한 시대에 태어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이름을 많이 알린다는 것도, 그것을 해보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대단한 일일 수 있겠지만, 그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빈껍데기처럼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그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일들입니다. 한 성도의 가슴에라도, 이렇게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변해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할 뿐이라는 것’을 갖게 만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잘 몰랐습니다. 여러분들 만할 때 미친 듯이 쏟아 부어서 나 자신을 우려내고 또 우려냈습니다. 허리가 그렇게 아팠는데도 치료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돈이 없었겠습니까? 한의원에서 엎드려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데 거기 가서 누워 있나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사실 물리치료 너무 싫습니다. 덜덜 거리는 것 올려놓고 사람 어디 갔는지 오지도 않고 20분씩 엎드려 있으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될까 확신도 없고, 물리치료 받으라고 하면 그때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왜 그렇게 살았을까? 지금 앞에 아내도 있지만, 아내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늘 그렇게 살아왔던 날에 대해서 삶 전체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회의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왜 휴식의 시간이 필요 없겠습니까? 나는 2주만 교회 비우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조금 덜 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많은 성도들이 만족하지 않는 부목사들 설교를 생각하고 내가 조금 더 희생하면 되는데 그랬습니다. 그리고 했는데 (너무 아파서) 몇 개월 쉬어 보니까 교회 안 무너집니다. 그리고 부 목사님 설교에도 은혜 받았다던 사람들도 많이 나옵니다. 너무 자존심 상한 것은 인원도 별로 줄지도 않았습니다. 한 70명 정도 줄었습니다. 헌금도 조금 줄었습니다. 나는 한 3개월 되면 “목사님, 안 됩니다. 빨리 컴백하십시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에게도 따뜻하게 해 주고, 월요일에는 산책도 좀 하고, 맛있는 것도 좀 사주면서 그렇게 살지,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마치 현재 행복을 포기한 순교자처럼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목회고 뭐고 되지도 않는데 맨 돌아다니며 사는 것도 안 됩니다. 호주에 가면 호주 장로교회가 한 달을 설교를 안 했다고 하는 것을 담임목사가 노회에 증명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징계를 당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쏟아 붓는 사람, 옛날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법이 있었다면 나를 굉장히 세워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회자도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은 20-30명 데리고 목회를 합니다. 목회가 잘 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데 무조건 한 달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 해 보면 그들은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와도 휴식의 재충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쏟아 붓는 사람들에게 재충전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지, 원래 방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충전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휴식의 달콤함은 노동의 쓴 맛을 안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번에도 양승식 집사가 개척을 나가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개척을 하는데 절대 당신이 목사다 생각하지 말고, 심지어 내가 교회를 개척하였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전도자라고 생각해라, 옛날 같지 않아서 이제는 설교하면 사람들이 몰라오던 시대가 아니다. 미친 듯이 전도해라. 하루에 6시간씩 전도하면 아무리 교회가 안 된다고 해도 뭔가 길이 보일 것이다.”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직은. 열심히 하셔야 하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몰빵 하지 말고, 정지화면도 보란 말입니다. 매순간 내 옆에 아내가 있고, 그리고 자녀들이 있고, 동역자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아내에게 잘 하십시오. 왜냐하면 나이 들수록 권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아내는 나이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씩씩하고 저돌적이 되고, 우리는 남성호르몬이 줄어들어서 여성호르몬이 많아져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때 구박받는 어린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보험료를 따박 따박 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아내를 잘 챙기고 잘 해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