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1)
녹취자 : 오희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현존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최고 연구가라고 할 수 있는 고령의 조지 마스던 교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그 뒤로 넘어와서 마르틴 루터, 존 캘빈, 이런 사람들이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서 전 세계에서 한 개인의 신학에 대해서 가장 활발하게 모이고 토론하고 연구되고 있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런 조나단 에드워즈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냐고 해결점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마다 자기 시대에 충실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나 깊이나 넓이로 보면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든지 학회가 없는 곳이 없고 심지어 루마니아 같은 곳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학회가 있어서 열심히 움직입니다.그 이유는 적실성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폭넓고 적응성있는 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여지가 존 오웬이나 리차드 벡스터나 칼빈, 이런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서론은 이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오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관에 대해서 전집이 한 권에 700페이지쯤 되는 스물일곱 권정도 되고, 그 가운데 제가 못 읽은 것이 세 권쯤 됩니다. 설교집이 워낙 많아서 다 읽지 못하고 나머지는 다 읽었습니다. 읽은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비행기에 태우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27권을 쫘악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후에 모여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신학에 대해서, 그가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 선교의 비전과 그의 사랑의 신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말씀드림으로써 오늘의 강의를 장식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전에 이루어질 강의를 보시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교회의 관계부터 출발하고 두 번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학문에 대해서, 에드워즈의 만남, 사랑, 갈등, 다른 학문들의 도움,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나의 목회에 미치는 영향, 이렇게 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오늘날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와 목회에 적용점까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에 돌아가셨습니다. 55세 정도 살고 돌아가셨는데 이 집안이 굉장히 장수하는 집안입니다. 에드워즈는 일찍 죽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백신 부작용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천연두가 절망적인 질병이었는데, 치사율도 높고 낫는다고 해도 얼굴에 곰보가 남습니다. 요새는 어디를 가도 그런 곰보를 보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천연두로 그렇게 곰보 되신 분들이 동네에 많았습니다. 얼굴 전체가 푹푹 패여있습니다. 그런 천연두 예방주사가 처음 나왔을 때 그 불완전한 백신을 자청해서 실험케이스로 접종받고 그 부작용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아쉬운 것은, 55세에 돌아가셨는데 75세까지만 사셔서 20년 동안 그분의 신학이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훨씬 더 놀라운 결과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고 사실 그 후에 계승자가 별로 없습니다. 뭐랄까, 제자들이 스승처럼 똑똑하지 않거나 아니면 공부는 했지만 스승이 만난 복음, 스승이 만난 깊은 하나님과의 경험, 이런 것들의 기반이 안 됐기 때문에 제자들이 전부 이상한 데로 빠지게 됩니다. 유니테리안으로 빠지고 알미니우스로 빠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 됩니다. 당대에 뉴잉글랜드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계승되어서 그것을 발전시켜나가는 사람들의 대가 굉장히 짧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새로운 학풍들이 계속 일어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발견들, 새롭게 발견하자는 운동들이 일어나면서 다시 에드워즈이 학문이 다시 발전하고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1703년 10월에 태어나고 티모시 에드워즈, 목회자였습니다. 장인어른 에스더 스투다드 에드워즈는 그 당시 유명한 솔로몬 스투다드 목사입니다. 청교도 사상을 가진 목회자였는데 굉장히 열렬하고 신실한 목회자였고 든든하고 큰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 교회가 나중에 에드워즈가 부목사로 부임하러 갔다가 장인의 교회를 물려받으면서 목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가입니다. 아직도 이 집이 있습니다. 깨끗이 수리해서 누가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에드워즈가 누군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집 앞까지 가봤는데 민케마 교수가 그런 설명을 했습니다. 1703년에 태어나서 열세 살 되었을 때 예일대학에 입학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나이로 다섯 살 쯤에는 자기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는 자연의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을 짧은 글로 쓸 수 있었고 여덟 살 때는 유물론에 관해 짧은 에세이를 썼다고 합니다. 열여섯 살 때는 거미에 관해 써서 지금으로 말하면 영국의 왕립학회 논문에 게재될 정도로 뛰어난 과학적 관찰 능력을 보였습니다. 거기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열세 살 때 입학해서 열일곱 살에 예일대학을 졸업합니다.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졸업식 때 유창한 라틴어로 답사를 합니다. 그후 스물한 살 쯤에 교수가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수라기보다는 강사쯤 될 것입니다. 거기서 3년 동안 강의를 하고 외할아버지가 있는 노샘프턴교회에 부임을 하고 그후 거기의 담임목사가 되어서 21년 동안, 쫓겨날 때까지, 1950년에 쫓겨났으니까 29년에 부임해서 21년 동안 목회하다가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 교회의 선교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1921년에 깊은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알미니우스주의자였는데 이 회심을 경험하면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칼빈주의자가 됩니다. 칼빈주의자이지만 스물일곱 권의 전집에 보면 칼빈이라는 열두 번 나옵니다.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칼빈 뿐만 아니라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데오드로베자 이외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출전도 많이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과거에 칼빈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누가 말했다고 해서 거기에 굴복하면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은 선상에 놓고 성경과 자신의 신학으로 비평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비평할 것은 비평하면서 세워갔는데 그 전체적인 줄거리는 칼빈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같은 사람은 워낙 거목같은 사람이어어서 칼빈주의자라고 불려지는 것에 대해서 썩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존 오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칼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더 깊이 있게 탐색해 들어간 부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와 존 오웬,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과 존 오웬 사이에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존 오웬과 조나단 에드워즈 사이에 다시 또 1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에 지금까지 약 30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으니 100년 동안 얼마나 신학이 상승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앵무새처럼 칼빈주의를 이야기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22년 뉴욕시 맨하튼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1722년에 “Resolution”이라는 결심문, 그리고 그의 메모와르라고 하는 영적일기, 매일매일 일기를 쓴 것은 아니고 뭔가 깊은 깨달음이 있을 때 각오 같은 것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미셀러니, 이것은 원래 잡기, 잡술, 정리되지 않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신학 묵상록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는데 신학 묵상록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학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짧은 것은 한 줄짜리부터 시작해서 다섯 페이지에서 여섯 페이지가 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당시에 외출할 때 아내가 항상 핀과 메모지를 잔뜩 준비해줬다고 합니다. 말을 타고 가다가 어떤 생각이 나면 말을 멈추고 펜을 꺼내어 메모를 하고 옷에 꽂아두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옷에 잔뜩 붙어있는 메모지를 아내가 하나씩 떼어서 정리해주었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타고 다닐 때만 쓴 것이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쓴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육필로 쓴 기록들이 예일대학에 가면 바이네카 라이브러리 아카이브에 아직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 둔 것이 미셀러니입니다. 책으로 실리지 않은 것도 많지만 책으로 나온 미셀러니가 700페이지씩 세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파스칼의 팡세와 비슷한데 팡세는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면이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파고들어가는 종류의 비망록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미셀러니같은 것들을 잘 정리해서 신학대전 같은 것들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더 살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연구생들도 거의 읽지 않는 것이 미셀러니입니다. 너무 어렵고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역사 철학, 미학, 자연과학, 이런 것들을 생각날 때마다 왔다갔다하면서 속기, 약자 등을 섞어 쓰면서 기록해서 읽기가 난해한데, 한번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정말 걸작품입니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들을 거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24년에 예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고 했는데 그때는 학교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교수라기 보다는 강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6년에 메사추세츠 노샘프턴 교회의 부목사로 청빙받게 됩니다. 27년에 목사안수를 받게 되고, 1727년에 후기 청교도 교회지도자였던 후커의 증손녀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라 피에르폰트를 자신의 아내라고 찝었을 때가 열두 살 때였다고 합니다. 심했습니다. 그후에 길러서 아내로 데려온 것입니다. 사라 에드워즈는 청교도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 증손녀였고 제임스 피에르폰트의 딸입니다. 에드워즈가 사라 피에르폰트에게 반한 것은 경건이었습니다. 아주 경건하고 당찬 여자였습니다. 에피소드가 있는데, 공동의회를 할 때 “이 사례비로는 못 살겠으니까 사례비를 올려주시오.” 했던 사모님입니다. 그 당시 교적집안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사라 에드워즈가 결혼하고, 에드워즈는 이미 결혼 전에도 깊이 주님을 체험하고 그 후에도 부흥을 경험하면서 엔필드의 부흥 같은 것을 경험하는데 사라 에드워즈는 사실 남편의 영적인 깊은 경험에 동참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출장가고 다른 외부 강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때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남편의 부흥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렇게 일평생 부흥의 파도를 넘고 많은 고난도 함께 겪으면서 일생을 영적으로 함께 하는 동지와 같은 부부가 됩니다.
재밌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이 사랑하면 죽음을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는 각자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같이 죽자고 하는데 이들도 같이 죽습니다. 같은 해에 남편과 몇 달 차이로 죽습니다. 남편은 백신 때문에 죽고 아내는 다른 전염병으로 죽는데 같은 해에 죽습니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따라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드디어 1729년에 부목사로 갔다가 조금 있다가 솔로몬 스투다드를 뒤이어서 노샘프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여기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시무했던, 그 이전에 솔로몬 스투다드가 목회했던 노샘프턴 교회입니다. 동부입니다. 당시 동부에서 가장 큰 몇 개의 교회 안에 드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 당시 교인이 공동회의 때 투표한 것을 보면 600여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는데 지금 600여명이라고 하면 중형교회 정도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큰 교회였고 그쪽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사례비를 받던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1734년에 “신적이고 초자연적 빛”을 출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34년, 35년, 36년 이 사이에 괄목한 만한 일이 노샘프턴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부흥입니다. 이 부흥은 나중에 복음주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복음주의라고 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믿는 복음주의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골격들,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구속, 교회, 이렇게 쭉 나가는, 이것이 없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중요한 근본조항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복음주의라고 이야기하는데 복음주의 카테고리는 개혁주의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 복음주의는 두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로 내려오는 역사적 기독교의 뿌리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폭발하듯이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단일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횃불은 들었지만 이미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로마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친 소위 Fore runner 들, 선구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틴데일이나 보헤미야의 후스, 더 멀리가면 이태리 게롤라모의 사브나롤라같은 사람들이 이미 있어서 로마교회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이것들이 이렇게 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그때에 구체적으로 로마교회를 찢어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야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처음에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사로서 이것은 정말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로마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오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 시절에 절망한 것은, 그러한 잘못들을 보는데 테째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면벌부가 판매되고 레오10세가 메디치가 사람인데 그렇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 교황까지 만들어놓았는데 교황이 되고 나서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이 가보면 아시겠지만 베드로 성당을 보면 지금 봐도 자신이 외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지어놓았습니다. 그것이 전부 돈입니다. 그것을 짓는데 돈이 모자라니까 면벌부를 판매한 것입니다. 면벌부도 아주 조잡스럽게 찍어서 그것을 사고 돈을 내면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혼이 더 이상 연옥에서 고통받지 않고 돈을 넣는 그 순간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황당무계한 것을 전파하는데 얼마나 대중들이 성경과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했는지,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력이 없고 판단력있는 사람은 순명의 법칙, 로마의 교황청이 명령하면 우리 모두 따라야한다는 정신 속에서 그것을 순종한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들과 고위직들은 그것을 판 돈을 다 건축비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커미션을 먹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수익이 나니까 그런 사업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엄청난 돈이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가 방문단 비슷하게 해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때는 독일에서 로마 가는 길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순수한 수도사는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 독일을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라 나라가 삼지사방으로 찢어져 분열된 나라였습니다. 각자 자기 땅을 차지하고 제후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여기는 이렇게 개판인데 교회가 개판인 이유는 여기 있는 인간들이 개판이라서 그렇다, 우리 교황청은 신성하고 교황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랫것들이 형편없이 신앙생활하고 목회하기 때문에 이럴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로마를 방문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거기서 깊은 실망을 하고 돌아오고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주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전기를 누가 발명했습니까? 제너럴 일렉트릭, 누가 발명했습니까? 칼빈? 에디슨입니다. 그런데 에디슨 이전에 여러 사람이 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먼저 상품화해서 등록한 사람이 에디슨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딱 한 사람만 나타나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입니다. 철학사도 공부하다보면 배우지 않고 독특한 철학을 철커덕 내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으면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학문을 하든지 역사를 알고서 그 학문을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게 1세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루터는 종교개혁이라고 막 헤집고 다녔는데 20년 정도 흐른 후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자, 정치가들도 제후들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자신이 견지하는 종교개혁 사상을 따랐습니다. 이 문제로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이 30년 전쟁입니다. 개신교와 구교가 섞여서 전쟁을 하고 독일 전체 국민의4분의 1이 죽습니다. 각국에서 독일로 와서 전쟁을 하는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완전히 초토화가 됩니다. 그런 것을 겪으면서 20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의 종교개혁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 노년에 지방을 방문했는데 자기 편이라고는 하는데 자기 편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면서 깃발을 들고 말을 타고 누비는 식의 정복이 아니라, 하나씩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부터 카테키스무스, 고백서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뮨처의 농민운동 같은 것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것도 개신교의 줄기입니다. 재세례파, 그리고 신비주의, 이것도 다 개신교 줄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개혁주의라는 말을 넓게 쓰면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이단까지 다 포함한 모든 것이 개혁주의가 됩니다. 좁게 사용하면 거기서 이단들을 제외하고, 더 좁게는 마르틴 루터가 아니라 제네바의 칼빈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개혁주의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내려와서 양쪽으로 치우친 것들을 제외하면 개혁주의 신앙고백, 마르틴 루터, 그것들을 더 상세화 했던 칼빈, 데오드로베자, 멜랑히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쭉 계승되어 오면서 제네바가 중요한 원산지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자로서 가지는 특수성은, 교육에 대한 탁월한 견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개신교가 일어나기 전에 가톨릭이 다 자리잡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대학에 가서 좋은 교육을 받으려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해야 거기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가 크로멜 때 강력하게 일어났다가 틀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후세들에 대한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같은 대학들은 성공회 신앙고백이 없이는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들 집안의 아이들은 고등학교까지는 마치는데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따로 만들었는데 그 학교의 수준이 도저히 당시 사회교육을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00년도 안 되어 그 후손들에게 더 이상 계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선 선구자들은 그 탁월한 대학에서 당시 현대의 문물을 먹으면서 지성적으로 거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예외가 제네바 아카데미였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엄청난 양의 모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 의학, 법학, 의학등을 다 가르쳤는데 내로라 하는 걸출한 교수들을 엄청난 대우를 해 주면 초빙합니다. 그 교육의 질이 유럽 어느 대학에 못지 않은 질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많은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그의 후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게 했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 때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참 긴데 이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후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개혁신학을 상세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 신학이 18세기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를 만나면서 계몽주의 사조와 싸우면서 고전적인 자신의 개혁신앙의 신조들을 지킵니다. 그것이 복음주의의 한 뿌리가 됩니다. 그것만 복음주의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고 하나의 뿌리가 더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18세기의 부흥운동입니다. 1734년도, 35년도, 36년도, 이렇게 3년에 걸쳐서 놀라운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영적인 각성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동네에서 어떤 사람이 죽으니까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모든 동네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각성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잠잠해졌는데 1740년도 8월로 기억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엔필드라는 마을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게 됩니다. 거기서 유명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한 원고 설교가였습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밤에 원고를 볼 수 없어서 한 손에는 원고를 들고 한손에는 등불을 들고 비추면서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울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에드워즈가 설교를 계속해야하니 좀 고정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폭탄이 떨어집니다. 그 설교는 원고가 풀 스크립트로 남아있습니다. 다 번역되어 있어서 도서관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꼭 읽고 싶으시면 정장복 교수의 설교사, 그 중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편을 찾으면 그의 설명이 나오고 설교가 실려 있는데 그 설교의 전문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폭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부흥이 일어나면서 그 부흥의 불길이 온 동네로, 지역으로 동부쪽에 퍼져가면서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비상하리만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요점은, 복음주의라고 하면 저기 루터, 칼빈부터 시작해서 개혁파를 물려받은 것이 복음주의의 뿌리라고 생각하는데 두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내려오다가 다른 하나의 뿌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의 부흥운동이라는 뿌리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데 긍정적인 면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볼 때, 교회의 체계, 교리, 전통, 이런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엄청난 열정, 성령의 역사, 뚜렷한 회심, 이런 역사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기독교의 생명력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데, 부정적인 면은 에드워즈는 아주 거대한 신학의 거목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이것이 틀린 것이라고 판단되면 못 하게 하고,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 옳다고 해석하고 컨트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서 신학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어떤 의미에서 그런 교회의 광적이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들을 경험하면서 신학적인 뿌리는 무지한 채 그런 현상에만 매도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극단적인 순복음식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1차 대각성 때에도 문제가 되었는데 그 이후 2차 대각성 운동이 19세기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쓰임받은 인물이 찰스 피니였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적으로 너무 허술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원죄도 부인했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무능도 부인하고 심지어 성령의 역사도 부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가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깊이 회개하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보자면 알미니우스도 아니고 펠라기우스, 세미 펠라기우스에 가까울 정도로 불완전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스투다드에서 찰스 피니까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피니편이 나오는데 피니는 자서전도 많이 있고 법률가 출신인데, 확실한 것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 거기서 오는 구령에 대한 열정은 굉장히 뜨거웠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면서 2차 대각성은 사실 순수했던 부흥운동들에 많은 변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넘어오면서 D.L 무디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순복음식의 운동이 전개되고 후에 은사주의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나투스주의부터 몬타누스주의까지 없던 때가 없었지만 근대적으로 종교개혁 이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직접적으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들에 영향을 주었던 하나의 뿌리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 공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빼놓고는 복음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목회적인 적용입니다. 정확하게 제대로 된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개혁주의의 뿌리에서 전통과 신학의 자양분을 찾고 그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보면서 그 안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둘을 아주 이상적으로 접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개혁주의 목회가 될 것이고 그런 목회는 우리가 제자 훈련을 하고 요즘은 하지도 않지만 찬양집회를 하고 전도초청을 하고 태신자를 하는 것은 레드오션입니다. 경쟁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깊은 개혁주의적인 학문과 순수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진정한 부흥, 이 두 가지를 접목해서 목회한다면 블루오션입니다. 그런 경쟁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목회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근처에 있는 교회나 그런 분들을 경쟁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왔을 때도 큰 교회들이 있었고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깊은 신학, 학문, 그 다음에 뜨거운 열정. 하나는 개혁주의에서 배우고 하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에서 배워야 합니다. 개혁주의 안에는 이런 것이 없었느냐? 없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윗사람들이 승계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1737년, 이 때는 34년, 35년, 36년을 지나고 1차 대각성운동이 1740년도부터 일어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헛갈려합니다. 저는 첫 번째 각성운동을 1734년에서 36년에 일어난 것이고 그것은 국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불길처럼 번진 것이 1740년, 혹은 41년부터 45년 정도까지 이어졌는데 동부를 휩쓸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사역했던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자가 조지 휫필드였습니다. 그리고 벤자민 플랭클린 같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3년 동안의 일들을 정리해서 놀라운 회심이야기라는 책을 냅니다. A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s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CLC에서 번역되어 나왔고 지금은 절판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 중에 한 토막을 전해드리자면, 한 아이가 나오는데 P.B 바틀렛 이라는 여자 아이인데, 그 당시 4년 2개월, 우리나라로는 다섯 살, 많으면 여섯 살인데 이 아이가 교회만 다녀오면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엄마, 주일이 언제야?”, “어제 다녀왔잖니. 아직 여섯 밤 더 자야지. 왜 물어보니?”, “나는 교회 가고 싶어.”, “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조나단 에드워즈, 그 석학의 설교를 다섯 살짜리가 집중해서 들으며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놀랍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분이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초자연적인 빛과 관계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고 초자연적인 빛이 들어오게 되면 어휘는 잘 몰라도 목회자가 하는 천상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Spiritual Sense, 영적인 감각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영적인 감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에서 없어집니다. 찾아보니까 헛간에서 비명소리가 납니다. 엄마가 놀라서 뛰어가보니 거기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아이에게 많은 어휘가 없으니까 아주 단순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예수님, 나를 구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드리다가 성령을 경험하여 비명소리처럼 큰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놀라운 감각들이 생겨납니다. 옆집에 마당이 있는데 과일나무, 아마 사과나무 같습니다. 그 나무가 커져서 이쪽 집으로 가지가 넘어왔습니다. 거기서 사과가 떨어져서 주워 먹었는데 엄마에게 혼났습니다. 비록 그 가지가 넘어왔더라도 옆집의 나무이기 때문에 그 집 사과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양심에 대해서 철저했던 청교도들에게 그 정도는 기본이었습니다.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울면서 누나를 원망합니다. 누나는 내가 그것을 먹으려고 할 때 그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인데 누나는 알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로 이어져 있는 책입니다. 이야기들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놀라운 회심 이야기들이 전개 됩니다.
이 책을 쓰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때 이미 이 부흥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나왔습니다. 아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마귀의 역사가 아니냐, 조작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잠해지고 1740년에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아주 강력한 설교에 의해 뒷받침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1738년에, 서른다섯 살 쯤 되었으니 이미 상당히 원숙해졌을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를 출판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 번역되어 있는 “사랑과 그 열매”라는 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의 제 8권 ethical writing, 윤리적 저술 중에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과 함께 세 권이 한 volume 속에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3장 이 부분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거의 읽었는데 고린도전서 13장만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해야 하는데 이것을 읽고 나면 내가 이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힐까봐 아직도 의도적으로 읽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서른세 번에 걸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끝냈습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2013년 정도의 일입니다. 언젠가 내 책을 다 만들고 나서 읽으려고 합니다.
1740년 조지 휫필드가 노샘프턴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 당시에 조지 휫필드라는 인물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사에서 꼭 기억해야할 인물입니다. 그분의 전기들중에 아놀드 델리모어의 전기가 가장 탁월합니다. 축약본, 얇은 것과 두꺼운 것이 있는데 우선은 얇은 책이라도 읽고 도전을 받으신 후에 큰 책을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한 때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조지 휫필드였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정적인 설교를 했는데, 조지 휫필드가 영국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듣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고 그 설교를 듣고 얼마나 감도을 받았는지 “한 번의 오후 예배 설교를 듣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널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부산에서 아오지까지 걸어가서 설교 한 편을 듣고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조지 휫필드의 설교는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라는 20권이상으로 된 시리즈가 있는데 지금은 절판되었을 것입니다. 세계명설교대전이라고 하는데 초대교회 시절의 예수, 바울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까지 나오는데 거기에 조지 휫필드편이 있습니다. 거기에 조지 휫필드의 생애가 나오고 설교 샘플이 세 편 정도 실려있습니다. 이 사람은 부흥사였지만 설교가 굉장히 성경적이었습니다.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학자는 아닌 대중적 설교가였지만 웅변의 달인이었고 술집의 보이를 하다가 회심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가 내용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매튜 헨리라는 영국의 주석가가 있는데 대학자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성경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spiritualize 하여 풀어내는 것에 대가였습니다. 저는 매튜 헨리 전집을 매튜 폴이나 이런 사람들의 책보다는 더 높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아주 건조한 단어장 식의 주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와 주석 중간을 취하고 있는데 제가 신학교 다니던 초창기에 인사이트가 떠오르는 훈련이 안 되었을 때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분을 너무너무 존경해서, 매튜 헨리 신구약 전집은 양팔을 다 뻗어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인데 그것을 네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무릎을 꿇고 읽었다고 합니다. 어떤 설교는 그것을 거의 베낀 것처럼 나오는데 그 대신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아주 깊이 있는 설교들을 토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18세기에 웨슬레와 함께 자신의 온 몸을 불태우듯 하다가 죽은 사람이었고, 과로사입니다. 이 사람이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으련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게 아니란 것을 60대가 되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 자르듯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닳아서 죽는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는데 살아서 보니까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741년 당시에 조지 휫필드의 명성은 너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직 이름이 덜 알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휫필드가 한 번 쓸고 지나간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유명한 설교를 엔필드에서 하는 것으로 불이 붙습니다. 1774년에 독립하니까 그때까지는 영국에 속한 뉴잉글랜드였습니다. 대각성 운동의 절정에 달합니다. 그때 중요한 설교 시리즈를 하게 됩니다. “성령이 역사를 분별하는 표징”입니다. 가짜 영의 역사가 너무 많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에 대해 설교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표징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1742년 3월 16일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부흥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고 행복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바깥에서는 에드워즈를 반대하는 적대적인 세력이 생겨나서 공격을 해댑니다. 크게 두 부류로부터 공격이 왔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교회들, 예를 들어 촌 리 라는 사람이 그런데 그 당시 그 사람들은 old light, new light, 옛빛파, 새빛파로 나눴는데 옛빛파 사람들은 칼빈이나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유장한 뿌리대로 경건하고 조용하게 목회하는 것을 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와 새빛파 사람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모자란다고 하면 이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하나의 신학적 견해의 차이의 대립으로 생겨나게 됐을 때 노샘프턴 교회의 사람들은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에드워즈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가 하면, 사람들이 펄펄 뛰며 은혜를 받을 때 언약식을 합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준수하면서 내가 한 순간의 부흥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만난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서약하면서 살겠다고 서약을 하게 한 것입니다. 모두 서약을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을 안 지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열린교회에서도 그것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1993년에 개척하고 1995년도에 여름수련회를 갔는데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제 마음 속에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에드워즈를 탐독하던 때였습니다. 밤중에 교인들이 다 잠들었는데 제가 서약서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주님을 만난 김 아무개로서 다음과 같이 믿고 살 것을 서약합니다. 첫째 주일을 잘 지키겠습니다. 열렬히 기도하겠습니다. 무슨 일로 섬기겠습니다. 가정에 가서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겠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겠습니다. 등등” 교인들에게 나눠주면서 서약하지 않아도 되지만 잘 읽어보고 간절히 기도하고 마음에 감동이 되면 서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다 서명했습니다. 그때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들은 거기에 서약을 하면서 심각하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두어 번 했을 것입니다.
1744년에 에드워즈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소위 불온서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서적 이런 것이 아니라 당시에 과학이 발전하면서,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