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4)
녹취자: 조경훈
그 다음에 신앙정동론입니다.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은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책입니다. 얼핏 보면 설교집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고 덤벼듭니다. 그런데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 당시에 최근의 아카데미즘이 모두 농축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정동론을 읽어도 열사람이면 이해한 사람은 한 두 명도 채 안 된다는 통계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사도 끝까지 읽은 사람도 열 명에 한 명 밖에 안 되고, 끝까지 읽은 사람 중에 이해하는 사람이 한 둘 밖에 안 되고, 이해했어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한 둘 밖에 안 되고, 올바로 이해했어도 그것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사람은 한 둘 밖에 안 되니까 얼마나 소수의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지난 2년 전에 에드워즈 세미나에 가서 KDMin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 읽었는데 강의를 듣고 보니까 전혀 잘 못 읽은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잘못 읽었다기보다는 배경들을 좀 더 철저하게 이해하고 읽으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신앙감정론이라고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이 돼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 나쁜 번역은 아닙니다. 잘 읽어보시고 옆에 원서를 펴놓고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책을 만만하게 보면서 읽지는 마십시오. 마지막에 읽고 나면 이게 뭐야. 이럴 수도 있어서 의미를 깊이 보면서 읽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강의안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23페이지 6번입니다. 영어에서 affection은 원래 일반적으로 애정을 얘기하는 것이데 이것은 감정의 움직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돌멩이가 떨어지면 파문을 일으키고 나중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이렇게 돼있는 감정인데 여기에 뚝 하고 물체가 떨어짐으로써 감정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얘기하는 feeling이라는 개념입니다. feeling을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 이라고 정의합니다. 엄밀한 정의는 아니지만 현상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여기에 떨어지는 설명이 인식이라고 봅니다. 지식이 어떤 것들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면 그 인식이 감정을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먹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맛있고 시원한 사과입니다. 빨간 사과 하나 큰 것을 백화점에서 사서 탁 물고 콱 깨물었습니다. 이빨이 확 들어가면서 우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입안 가득히 신선한 과즙이 쫙 펼치면서 달콤한 향기와 약간 신 맛이 느껴집니다. 설명을 하니 입에 침이 돕니다. 사물에 대한 설명을 했더니 상상 속에서 인식이 되고 상상이 되면서 감정이 함께 출렁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affect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애호의 정동이 출렁거리게 될 것이고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오혐의 감정이 출렁이는 것입니다. 맛있는 사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욕망이 생기면서 출렁거리게 됩니다. 인식하지 않으면 욕망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인식하니까 욕망이 생기는 것이고 인식은 상상 속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지적인 작용과 함께 감정이 일어나게 되고 감정과 함께 의지가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나눌 때 지, 정, 의로 나눴습니다. 에드워즈는 지성과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느끼면서 하고 싶고 하지 않고 싶고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감정이 의지의 영역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과 감정이 분리가 잘 안되고 감정과 의지는 더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렁거리는 것을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제일 먼저 쓴 말입니다. 지금은 학자들이 꽤 여러 명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affection을 정동이라고 번역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애정이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감정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출렁거리는 동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로 하면 길어지니까 읽겠습니다. 6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감정론을 어려운 책이라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은 별거 아니네. 설교 한 편이네 그러고 읽는데 그것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뭘 알아야지 어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뭔가 조리가 잘 안 맞는 설교 한 편 읽은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전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안 머레이도 20세 때 이 책을 읽었지만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진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에드워즈가 43살에 쓴 작품입니다. 이 때 에드워즈의 학문은 굉장히 무르익고 있었고 놀라운 것은 영국을 비롯한 영국과 학문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사실 시골이었습니다. 그 당시 에드워즈의 얼마 안 되는 작품을 보면서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을 찍어냈는데 초판이 230부가 나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처럼 책이 대량으로 찍혀서 보급되던 시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 권을 팔았다고 하면 지금으로서는 10만 부를 팔았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 에드워즈의 학문을 존중하고 그를 높이 평가해서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대륙에서 발간되는 책들과 좋은 자료들을 계속 에드워즈에게 보내줬고 그것이 에드워즈에게 굉장히 지적인 원천이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에드워즈와 교류를 나눈 사람들로서 글래스고의 맥로렌, 부흥이 있었던 캠버스 랭의 애컬럭, 킬시스의 로브, 애딘버르의 얼스킨, 얼스킨은 거의 제자였었는데 이 사람 외에도 존 윌슨, 마지막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 길레스피 같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감정론은 친절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에드워즈는 모호한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에드워즈가 쓴 이 책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를 설교로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천지창조의 목적처럼 논문형식으로 썼다면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텐데 어려운 것을 설교처럼 만들어놓고 나니까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은 당시 유럽의 지적인 맥락이 18세기 경험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험주의는 본유관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생리적으로 인간은 관념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관념을 가지고 사물들을 보기 때문에 관념에 사물들을 일치시킴으로써 판단력이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통이 유구하게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데아로 거슬러 올라가고 파르메르데스까지 올라가면서 이것이 실재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꽃은 시든 꽃도 있고 병든 꽃도 있고 이미 죽은 꽃도 있고 활짝 핀 꽃도 있고 꽃 봉우리 꽃도 있고 싹이 나와서 겨우 봉우리가 맺히는 꽃도 있을 것입니다. 꽃이라는 본유관념 자체가 있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도 그것이 전체가 꽃이라는 것으로 통일이 되어서 우리에게 인식된다. 그 관념 안에서 현실적으로 이 꽃이 어떤 상태에 있는 가를 판단함으로써 본질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득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까지의 이론이었습니다.
이것을 로크를 비롯해서 경험주의가 대거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것을 다 부인하고 모든 것은 개별 사물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축적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많은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그런 것들에 가장 중요한 이론서 가운데 하나가 인간 오성에 관하여(an human understanding)이라는 존 로크의 책입니다. 어려운 책입니다. 예전에는 오성론이라고 번역했는데 understanding이 오성이 맞긴 합니다. 지금은 이것도 구분이 필요한데 지성론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경험주의는 인간은 따벨라 라싸라고 부르는 백색서판의 상태를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교육을 받고 어떤 상황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백색서판에 그림이 그려지고 그려진 것을 가지고 사물들을 보는 관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 생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론을 만들면서 경험주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17세기에 일어났던 낭만주의의 사조들과 어울리면서 시대적인 하나의 정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본유관념에 입각한 소위 이야기하는 실제와 이데아와의 관련된 방식으로 인간을 이해하던 것들에 대한 대폭적인 방향 수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다 알 필요는 없고 신앙감정론이 나오게 된 지성적인 배경은 당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플라톤주의가 다시 재건이 됩니다. 플라톤주의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때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메디치가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주도합니다.
그 전까지는 비잔틴하고는 거리감을 두고 교류가 많지 않고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메디치가는 그 자체가 인문주의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하고 싶어 했던 사조들이 예술로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해서 이것들이 문학으로 급기야는 메디치가문의 코스모메디치 같은 사람은 비잔틴에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서 그들로부터 기독교와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굉장히 개방적인 가문이었고 돈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메디치가에서 찍어내는 금화가 유럽의 기축통화가 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불러서 들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플라톤의 전통들과 작품들이 놀랍게 동방교부들 안에 보존되어서 그 사람들이 와서 이것을 쏟아 놓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플라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그 쪽의 학문적인 자료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플라톤 아카데미를 아예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책을 찍어내고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인 강좌를 열고 교육을 해서 플라톤으로 해석된 세계관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당시에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인본주의 운동에 대한 자양분들을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을 돈을 많이 주고 고용해서 전 세계에 파송합니다. 사진기가 없었는데 그들의 건물과 생활모습을 칼라로 정교하게 그립니다. 설명을 덧 붙여서 한 도서관 안에서 전 세계의 모든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방대한 데이터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것이 돈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0-15명씩 무리를 지어서 서울에 와서 한류가 뭐냐? 그러면서 BTS부터 해서 다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이면서 도감집을 만듭니다. 수 십 개국의 나라에서부터 들어오기 시작해서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럽의 구석구석 변방의 나라와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지역의 모든 자료를 수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플라톤주의가 들어와서 플라톤주의와 함께 인문주의운동이 일어나고 그것과 함께 다른 고전적인 작품들을 읽는 운동들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것을 그대로 배워서 1세기 정도가 흐른 후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문주의 운동이 기독교 안에 영향을 미치면서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정말 원래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사도들이 우리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순수한 신앙과 일치하고 있는가? 에 대한 회의를 품으면서 대조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고전에 대한 굉장한 열심히 생겨난 것입니다.
스스로 독학을 해서 그리스 고전을 읽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니까 당연히 코이네 히랍어, 히브리어 정도를 읽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초대 교회의 저작들, 교부들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보니까 초대교회의 기독교의 가르침과 로마 가톨릭 하에서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르침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종교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도 르네상스가 들어오는데 층위가 다양합니다. 극단적인 좌파 쪽으로 가게 되면 인문주의 자체가 아예 신의 존재 자체를 다 부정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을 탐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고 알 수도 없는 가치에 인간이 노예처럼 메여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할 짓이 아니다. 라고 아예 영원을 기각해 버리고 현재 삶에서 불안, 초조, 무한, 유한 모두 다 인간 스스로 소화해내서 살아가야 된다는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사고들이(물론 그 이전에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지만) 인문주의와 함께 맞물리면서 확 꽃이 피는 데가 있는가 하면, 우파 쪽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은 부인하지만 그래도 뭔가 확정할 수 없지만 이 세계 속에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우리는 도덕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약간 moderate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좀 더 나가면 신은 인정해야 된다. 그 대신 그 신은 사사건건 인간사에 개입을 해서 뺑덕어멈처럼 회초리를 때리고 꿀밤 주는 그런 신이 아니라 그냥 세계를 만들어놓고 자기 자신은 은근하게 지켜보시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잘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분이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분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나오는 유명한 자료 중에 하나가 피코 델라 미란돌라 라는 사람의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입니다. 그는 굉장한 대학자였고 돈도 많은 귀족 집안이어서 결혼도 안하고 전 세계의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서 인생과 철학의 모든 문제를 토론을 해 보다는 국제대회를 열고 자기가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합니다.
결국 정부의 방해로 성립은 안 되지만 그런 인물들이 인간 존엄성에서 한 연설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아! 내가 이제 너를 창조했다. 아무것도 내가 너에게 미리 정해놓은 것은 없다. 너는 내 형상으로 너를 창조했으니 모든 것은 자유다. 그러니 내가 너를 믿노니 제발 선을 선택하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서 선한 세상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지켜보신다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더 우파 쪽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삶에 개입하신다는 우리와 똑같은 사상을 가지면서도 인간은 하나님과 교회의 한 부속품이라는 중세시대의 사상을 버리고 우리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당시 성직자, 사제, 수도사, 평민들이 있는데 이것을 예전에 피라미드 구조로 봤는데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나타나서 이것을 평면으로 밀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보신다는 보편주의적인 관점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12세기 때의 일이고 그런 사상적인 기반이 잡히게 됩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은 대부분 맨 이쪽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인문주의적인 견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삶에 개입하신다. 인간에게는 자유와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국의 경험주의가 일어나게 되면서부터 놀랍게 플라톤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에는 어떤 영향을 주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 라는 운동이 펼쳐지게 됩니다.
어거스틴주의 운동이 펼쳐지는데 중세 수도원 같은 데서 이야기하던 어거스틴주의가 아니라 어거스틴을 새롭게 해석을 해서 이렇게 혼란스러운 경험론의 시대에서 경험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가지고 어거스틴을 이해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세계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윤리적인 결정을 해야 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규명하는 운동을 펼치는데 사실 어거스틴 신학 안에 경험주의적인 요소가 아주 많습니다.
18세기가 사상적으로 인간의 윤리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는 때였습니다. 기존에 있는 형이상학적이고 실재적인 질서는 무너졌는데 후대에 나오는 실존주의나 니체같은 식으로 세계를 보는 견해는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깊은 경건을 가르쳐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한 사람이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 선을 택하게 되는 것인가? 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내린 결론이 경험주의 철학에서 인간 감정의 움직임의 이론을 가져오고 플라톤 철학에서 선의 이데아와 인간의 마음의 끌림이라는 현상을 가져오면서 두 개를 결합시켜서 인간이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것이 예뻐 보이기 때문에 내리는 것이다. 도덕적인 결정은 심미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좋은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인간이 그것을 하면 참 좋은 세상이 될 의지적인 결정들, 도덕 규칙들이 어떻게 저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떠한 메카니즘 속에서 인간 안에서 안 좋아보이던 도덕적 규칙이 좋아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결정을 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도덕 심미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바깥에서 생각을 하고 위에서 부터 태어나면서 부터 우리나라, 인간의 마땅한 도리,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나라에 충성하지 않으면 배역자다. 이런 식으로 바깥에서 명제적인 규칙으로 인간에게 강요되었습니다. 그것이 효과적인 사람도 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많이 인간이 깨어난 것입니다. 깨어난 인간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도덕적인 결정이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규칙만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어떤 심리작용이 일어나면서 그런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를 연구할 만한 토대가 마련이 된 것입니다.
경험론에서 인간의 심리에 대한 많은 이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일반 철학적 관점에서는 플라톤 운동, 소위 이야기하는 네오 플라토니즘 운동인데 플로티누스를 통해서 플라톤을 찾아가는 신플라톤주의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그것에서 신앙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 서클에서는 그런 고민을 훌륭하게 계승해주는 사람이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을 재발견하게 되니까 영국에서 지금 활발하게 일어나는 경험주의와 너무나 설명이 통하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네오 플라토니즘 운동의 물결에 편승해서 모데르나 근대의 어거스틴 운동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의 도덕 감정이 결정되는 것인가?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최신의 학설들을 이 사람은 습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간의 신앙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religion에서 나온 religious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두 가지 학설이 있는데 religion이 릴리가르에서 왔다고 봅니다. 하나는 반복하다. 이고 하나는 묶다. 라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치고 그것을 끊임없이 묶는 것을 religion이라고 본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데 그 때 그 종교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 religion이라고 하면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생각하지만 당시 유럽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religion이라는 말은 사실 경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김요섭 교수가 얘기하는 것처럼 관심사 자체가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일어난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 아니라 경건 이대로 좋은가? 라는 고민을 하면서 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 식의 가르침을 따라서는 절대로 그 경건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이것을 religious affection이라고 쓸 때도 이 religion이 불교, 도교, 유교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에 그런 종교가 없었습니다. 가톨릭도 안 들어왔을 때입니다. 기껏해야 아르메니우스주의냐 무슨 주의냐 정도의 이단이 있었지 새로운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1905년에 1차 인민법, 68년에 2차 인민법이 생겼는데 특히 1차 인민법에 대거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religious의 의미는 경건입니다. 경건과 정동의 관계가 무엇인가? 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정동은 어떤 무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정동이 일어남으로써 그렇게 되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틀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은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부흥에 대한 영적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1941부터 1945년,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두 번의 부흥의 경험을 통해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놀랍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놀랍게 회개를 하고 너무 너무 주님을 사랑하고 요즘으로 말하면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주위에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나면 세례 줘도 되지 않습니까? 믿는 자로서 표가 있지 않습니까? 진짜 참된 성령의 체험인지를 보자. 하고 1년 정도를 기다릴 정도로 에드워즈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부흥에 대한 영적 경험을 보면서 정동 이론으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우리에게 인식으로 떨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출렁거리며 사랑의 정이 출렁거리게 되는데 이것이 반복될 때 항구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경향성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갈래가 부흥에 대한 영적 경험이 들어가고, 그 다음이 신플라주의운동이 들어가고,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들어가고, 당시 영국의 도덕심미주의가 합쳐지면서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설명한 것만 가지고 읽기 시작해도 다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 에드워즈가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진리와 인식을 그렇게 강조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이전까지는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인간의 마음에서 정동이 일어나는 것, 그리고 인간에게 어떤 경향성이 생기는 것 이 셋 사이에 연관관계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험주의라고 하는 학문적인 사조 속에서의 도구를 가지고 이것을 설명해 내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어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떨어질 때 인식에서 인간의 정은 출렁거리게 되고 이 때 일어나는 정은 거룩한 정이다. 이것이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일관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된다. 결국 은혜의 정동론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잘 가르쳐도 정동이 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지 않고는 거룩한 정동이 일어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게 할 때 항구적인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로 쉽게 얘기하면 매일 말씀 듣고 은혜 받아야 돼. 그래야지 네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이 이야기를 에드워즈가 이렇게 복잡하게 더 상세하게 변명할 수 없게끔 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론 넘어가겠습니다. 하여튼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책입니다. 자유의지는 굉장히 난해한 작품이고 에드워즈의 자유론이 어떻게 도덕결정론이냐 이런 문제가 나오는데 복잡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것도 에드워즈 당대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인간이 어떤 도덕적인 결정을 하게 되면, 어떤 선한 일을 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은 백퍼센트 인간의 자율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 지가 기독교에서 난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결정을 한 것이라면 인간에게 책임이 있을 수가 없고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자기가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되고,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할 정도로 완전히 자유롭다면 하나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당시에 고민하던 숙제를 풀어내야 됐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우리는 거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사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과 여지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나의 해석입니다.
에드워즈의 일 권을 보면서 결정론적으로 다 도배가 되어버렸고 인간은 하나님이 결정된 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하구나. 라고 생각을 해 버리는 것은 에드워즈가 자유의지론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때의 정황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부흥이라는 책에서 위험할 정도로 성령의 역사를 확대해서 설명하면서 근거도 없이 예를 드는데 어떤 사람이 내일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언을 했는데 사람들이 다 비웃었는데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신비주의적이고 어떻게 신사도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순복음교회 사람들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살아생전에 순복음에서 목사님을 우리와 같은 견해를 가진 분이라고 초청을 하시는데 안 가셨습니다.
그런 강의를 들어야했던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1899년생이신데 한창 왕성하게 할 때가 사십 대로 계산하면 195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과학을 맹신하던 시대였습니다. 모든 것이 법칙이 있고 절대로 신도 그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결코 신앙의 세계가 그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에 갇힌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극단적이기 하지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이러한 일도 있었다는 반대쪽의 이야기를 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 필요성이 있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항상 그 시대가 어떤 환경에 놓여있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에드워즈의 의지론 전문가는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에드워즈가 결정론자라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거의 없는 것처럼 설명한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것 까지만 이해를 해 주시면 됩니다.
자유에 대한 견해를 개혁파에서 정리를 한 것을 보여드립니다. 같은 것이라고 봤습니다. 유니우스는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는 별개라고 봤습니다. 자유의지는 지성과 의지로 이루어지는데 지성은 자유롭지만 의지가 무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유의지의 상태다. 이렇게 쟌키우스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인 설명을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성적으로는 참된 것을 선택할 수 없는데 행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부자유한 상태다. 그것까지도 자유다. 그런 무능 자체가 자기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고마로스는 타락 전후 모두 자유의지가 있다. 외적 자연적으로 자유고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무능한 존재다. 이게 타락 후에 인간의 모습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도 사실 어거스틴이 이미 다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반복해서 술을 마십니다. 술을 계속 마시면 나중에 알코올 중독에 걸릴 것입니다.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 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됐을 때 우리는 얼핏 느끼는 것은 도저히 자유롭지 않고 어떤 강한 힘에 강요를 받음으로써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 저녁에 술을 마시게 되고 잠이 들 수가 있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그것을 완전한 자유라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도록 선택한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자기의 나쁜 성향이기는 하지만 전적인 자신의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 있는 것은 어거스틴이 보기에는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론을 쓰는데 원래 제목이 자유의지의 선택론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자유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도 먹지 말아야 돼. 라고 선택할 수는 있지만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 속에 있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런 자유론은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있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판단의 오류에 메이지 않도록 정신에 자유를 주는 것이 진리의 힘이라면 그 진리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 은혜의 힘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생각할 때 은혜는 의지의 새로운 힘입니다. 선한 힘을 사랑의 감동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는 것입니다. 대동소이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원죄론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존 테일러 라고 하는 비국교도 설교자인데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인 도덕성을 강조하는 반칼빈주의적인 가르침으로 영국교회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당한 영향을 끼쳐서 이 가르침이 미국에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이 사람이 내 놓은 이론을 조목조목 비판을 하면서 인간의 원제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원죄에 관한 한 모든 신학자들이 개혁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일치를 합니다. 어떤 개혁주의자들보다도 철저한 원죄론자입니다.
인간은 원죄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원죄에서 오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으로 연결시킵니다.
설교집으로 넘어 갑니다. 에드워즈의 가르치는 방식이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합니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논쟁적 방식은 논문을 쓸 때 대중적 방식은 설교를 할 때, 논쟁적 방식은 스콜라주의를 이용합니다(스콜라주의는 한참 설명을 해야 돼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대중적인 방식은 교화적입니다. 교화적이라는 말은 세세히 따지지 않아도 들었을 때 ‘아! 나도 그렇게 사고 싶어!’ 쉽게 말하면 은혜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논쟁적 저술을 쓸 때는 이 방식을 택했습니다. 교훈적인 저술을 쓸 때는 대중적인 방식을 썼습니다. 전자의 대상은 대게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염두 해 둔 것이고, 후자의 방식은 성도들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목회자는 쌍칼 잡이여야 됩니다. 두 칼이 다 있어서 이 쪽은 날선 칼, 이 쪽은 뭉툭하지만 힘 있는 칼을 사용해서 부흥회 할 때는 이걸로 하고 학술 발표를 할 때는 이걸로 해야 합니다. 둘 다 있으면 뛰어난 사람이고 둘 다 없으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 가지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에드워즈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에드워즈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존 오웬을 통해서 에드워즈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존 오웬이 훨씬 더 정밀합니다. 관심사가 존 오웬은 에드워즈 못지않은 철학자이기는 했지만 그 당시는 철학적인 격동이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사역을 끝내 다실 때쯤 데카르트주의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데카르트에 대한 공격은 후반기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살았던 시대의 문맥 자체가 다릅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설교나 신학적인 깊이는 에드워즈도 깊이가 있는데 존 오웬 목사님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엄청 심오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존 오웬 전집에 들어가서 설교 한 편만 읽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원서로 읽어야지만 진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편만 천천히 읽어보면 이렇게 엄청나게 심오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로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7세기 개혁파 전통주의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에드워즈의 갈등’ 을 넘어가서 ‘다른 학문들의 도움’ 다음에 ‘미학적인 신학’ 몇 개만 설명을 하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에드워즈 신학 철학에 있어서 가장 압도적인 주제는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인 전통도 어거스틴이 이미 다 세워놓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사랑의 신학인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해됩니까? 우리가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악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보면서 하나님은 거울을 보시는 것처럼 당신 자신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을 보실 때 당신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실수록 더 순전한 사랑이 되고 우리는 자기를 사랑할수록 더 불완전한 사랑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게 이기적인 것은 우리에게 가장 이타적이다. 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결론을 도달하게 됩니다. 미학이라는 것은 가치로서의 미, 미의 현상으로서의 미, 미에 대한 체험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고전미학과 근대미학으로 나눕니다. 고전미학에서는 미의 이념이 뭔가? 미의 이데아가 뭔가? 이게 아름답다 하면 이게 왜 아름다울까? 선과 면과 빛깔 등등 하면서 이것을 아름답게 하는 무엇이 있을 거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게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고전미학이었다면 근대미학은 이것을 보면서 아. 예쁘다! 도대체 내 마음에 뭐가 있길래 이것을 예쁘다고 느끼는 걸까? 이 쪽으로 관심사가 이동을 한 게 근대미학입니다.
당연히 미에 대한 감성적인 인식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이루어졌다는데 사실 17세기 말부터 이미 사조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낭만주의가 일어나게 되면서 그 전까지는 인간의 지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지성과 의지를 중요시하고 감정은 사실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예술 같은 것을 통해서 감정 자체에 주목하는 철학적인 경향이 생겨나게 됩니다.
철학사에서 의지를 굉장히 중요한 철학의 대상으로 부각시킨 사람이 니체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권력의 의지, 힘의 의지 등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 사람이 존재와 본질과 실존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구원과 영혼의 변화를 이런 경향성의 이론으로 설명을 합니다. 영혼의 기능이 마음, 지성, 의지로 구분을 한다면(물론 지성과 의지가 마음 안에 있지만) 마음이 행동을 산출하는 기능이라고 보고 지성은 지혜와 미에 대한 감각을 의지는 선택한 것을 행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은혜가 선을 행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경향성의 철학을 가지고 들어와서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았을 때 어떤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학문적인 논쟁들이 생기게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disposition 성향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거듭날 때 인간에게는 새로운 성향이 심겨진다는 것을 강조를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에드워즈는 justification by disposition 이 아니냐? 라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공정한 이의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런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가 철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설명을 해서 사물을 보는 근대적인 새로운 관점으로 중생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은 성경과 개혁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로크의 오성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론, 18세기의 도덕 심미자들에 골고루 영향을 받으면서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 생겨난 것이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다 못해서 그러는데 뒤에 넘어가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강의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제4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로 넘어가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에드워즈는 나의 목회에 영향을 주었다. 회심 목회의 중요성이다. 회심 없이는 참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회심을 아주 중요한 목회적인 목표로 삼아야 됩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이 진리를 알고 회심하게끔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설교 사역의 중요성입니다. 에드워즈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역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이 설교 사역이었고 부흥도 설교사역 속에서 일어나게 되니까 에드워즈의 설교사역이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철학자가 미학자나 윤리학자로서의 에드워즈보다도 설교자로서 에드워즈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앙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철저하게 신앙을 성경을 중심으로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나 교육의 방식을 결정하는 학문이 형상이라면 형상으로 빚어서 성도들에게 전달해야 될 내용이 질료입니다.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에드워즈가 펼쳐지기를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시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것을 인정하며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라는 사실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가겠습니다. 중간에 가면 에드워즈가 개혁신학자였느냐? 라고 묻는 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개혁신학자였습니다. 21세기의 개혁신학자가 아니라 18세기에 개혁신학자였고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자기의 시대에 충실한 개혁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워즈의 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서는 당신도 18세기에 개혁신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의 도움으로 나는 위대한 세 명의 스승과 한 원친인 정통주의에게서 채워지지 못했던 지식의 간격을 훌륭하게 채워갈 수 있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와 아름다움의 연결을 이루며 천상으로부터 지상까지, 영원 전으로부터 영원까지의 달음질치는 찬란한 그물망 위에 계신 탁월한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와 이웃 심지어 자연의 모든 사물들 그리고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까지 그 그물망 안에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과 사랑으로 연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사멸할 육체를 지닌 유한한 존재지만 영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분의 창조목적에 참여하며 산다는 점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에드워즈의 작품은 필자에게 이것을 상기시켜준다. 요즘도 에드워즈를 읽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그 때 그랬는데 지금은 안 읽는 날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참 예쁘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혹시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두 사람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1] 요즘 존 파이퍼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기독교 희락주의를 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근거를 둔 것입니까?
맞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기원을 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행복한 삶은 하나님이 끝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끝이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 가운데 쪼끔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조금씩 더 발견해가면서 더 발견하면 될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 내적으로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챤 헤도니즘, 기독교 희락주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면서 한없이 기쁜 삶을 살면서 단지 천국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시밭길 같은 세상으로 보지 말고 현재적으로 천국의 기쁨을 내 안에서 누리면서 살아라. 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모두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그것을 훨씬 더 미학과 연결시키면서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좀 살아. 항상 기뻐하라 그랬잖아. 그렇게 말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냐? 그것을 일평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가면서 그 안에서 기쁨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 없으면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