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신총회부 교역자부부 세미나
녹취자: 백지영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 모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코로나가 있기 전까지는 당연히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코로나를 당하고 보니까 이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이전에는 우리들이 주일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이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덮치고 나서 2년은 약간 안 되지만 1년 한 10개월 가까이, 어떤 때는 다섯 명만 예배를 못 드리게 해서 방송실에서 일하는 직원들하고 같이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설교해야 했던 아픈 기억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뜻 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잘못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하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들의 의미를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지요. 사람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사태를 겪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마음의 생각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커다란 경고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제대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계기를 통해서 이 예배가 언제나 드릴 수 있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한번 우리에게 경고로 울려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목회자들이 예배당에 교인들이 나오지 않는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마음 아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작은 교회들은 문을 닫는 상황까지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고, 언젠가 내년중순쯤에는 모든 것들이 치료제도 나오고 해결이 되어서 다시 예전처럼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목회자인 우리들은, 마음으로 깊은 생각을 하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우리들이 목회를 해야되겠느냐에 대해서 깊은 사상의 목소리를 우리 속에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들이 살펴볼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린 생활이었는데 이제는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그리고(이제) 위드 코로나와 함께 교인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는데, 지난주를 기준으로 저희들이 코로나 나기 전에 3300명이 주일 예배를 장년이 드렸는데 지난주에 겨우 1500명이 모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너무 어떻게 보면 가슴 아픈 일이고 이것이 얼마나 걸려야지 완전히 회복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은 어쨌든 예배를 소홀히 여겼던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이 기간을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인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준비하며 코로나 해제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한 교회가 신앙이 어느 정도 깊은가 하는 것은 그 교회의 예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했던 사람들이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예배시간이었습니다. 그 예배시간에 자기가 높이고 경외하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고 찬양하고, 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격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는 첫사랑의 때가 있고, 첫사랑의 때를 가진 모든 성도들에게는 일치하게 하나님 앞에 감격 속에서 예배드렸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크던 작던, 그 설교자가 유명하던 유명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예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행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사라져버리고 나면서, 우리는 이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이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았던 우리의 안일한 목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한번 경종을 울려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에는 곧 그 중심에 예배가 있고, 어떤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기 위한 한 알의 밀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 모든 사람들이 열렬하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목양하고 그래서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득하게 되면 어떤 세상이 될까요? 그 세상은 분명히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로 나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렇게 모여서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공적인 예배와 함께 가장 강조되는 것이 주일 예배입니다. 거룩한 주일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는 예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이니, 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주일이 거룩한 날이 되기도 하고 속된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 예배가 어떻게 살아 있는 예배가 되겠으며, 살아있는 주님을 만나는 예배 없이 어떻게 그 날이 다른 6일과 구별되겠습니까? 또 하나의 예배는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다름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던 사도 바울의 로마서 12장의 이 말씀이 결국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니,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가 모두 하나님께 드려질 때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알다시피 강수량이 매우 적은 지역입니다. 지금은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농사를 잘 짓지만 그러나 척박한 땅입니다. 그리고 정말 물이 많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헐몬산에 가보면 그 아래는 항상 아주 맑은 물이 한없이 내려와서 농토를 두루두루 적십니다. 그 이천 미터 가량 되는 헐몬산에서 눈들이 겨울이 오면 잔뜩 쌓이고, 그 눈들이 녹으면서 그 물을 계속 아래 지역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주일 예배가 헐몬산이라면, 넓은 의미의 예배는 그 산 아래 펼쳐진 드넓은 들판입니다. 그 헐몬산에서 끊임없이 물이 쏟아져 내림으로서 그 산과 자락을 함께 하고 있는 드넓은 땅들이 기름진 옥토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잘못 드려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주일 동안을 예배하는 정신으로 살다오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후 아마 하나님은 즉시 제사의 제도를 주셨다고 신학자들을 생각합니다. 가인과 아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을 때, 제물만 거절된 것이 아니라 제사가 거절됐고 가인도 하나님 앞에 거절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 제물과 함께 아벨 자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노아가 홍수를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생물들을 방주에 보존했고, 가족들과 함께 그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홍수가 끝났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게 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참혹한 홍수의 심판의 광경을 보시며 다시는 이러한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그 증표를 무지개로 보여주셨는데, 그 무지개도 예배드릴 때 나타난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신약시대 때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자 교회는 비로소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목격했고 살아나신 예수님도 만났지만 이게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몰랐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비로소 그 의미를 가르쳐 주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 곧 복음의 뜻을 깨닫게 되자 이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배에는 언제나 감격이 넘쳤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 기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이 네 가지 일에 자신을 모두 바쳤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말세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쯤 되어서는 이미 이런 은혜의 불길들이 꺼지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일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모이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무리와 같이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더 열심히 모이라고 사도 바울이 권고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리고 이 예배 없이 하나님의 백성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배를 위해서 가장 거룩하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없이 목회를 하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예배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까지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극장을 가면 15분전에 도착해서 표를 끊고, 팝콘도 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들어가서 영화상영하기를 기다리고, 광고를 다 보고 드디어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배당에는 11시가 예배인데 11시 15분 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 분 전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을까요? 그리고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그 모습도 보면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일까?, 예배당에 나올 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는 그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온 사람들일까?” 그것이 의심이 될 정도로 사람들이 예배에 의식이 없이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옵니다. 그리고는 각자 자리에 앉아서 순서에 따라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찬송을 부르고, 교독문을 하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배가 드디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이 됩니다. 그 예배가 예배다워지지 못하는 가장 많은 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설교 시간에 교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3분의 1 교인들이 잡니다. 신기한 것은, 자는 교인도 신기하고 3분의 1 교인이 자는 데도 꾸준히 아무 상관없이 설교하시는 목사님도 신기했습니다. 저 같으면 깨우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든지, 아니면 예배 끝나고 나서 교인을 그렇게 재우는 자기 자신을 야단치든지, 둘 중의 하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3분의 1은 졸고 3분의 1은 주보 뒤적거리고 있고, 저는 교회 개척할 때부터 주보를 안 만들었습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예배시간에 그 주보를 무엇을 볼게 있습니까? 그것을 보고 누가 장가갔나, 결혼했나, 헌금은 얼마 들어왔나, 그리고 헌금 낸 사람 명단 가로세로로 곱하기 해 보고, 몇 명이 하고 그 몇 명이 또 돈을 나누어보면 한 사람 앞에 얼마를 내고, 이러면서 예배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미 나온 주보를 빨간 펜을 가지고 교정을 보면 뭐합니까? 그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설교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핸드폰이 울려가지고 또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 도대체 하나님 보다 더 높은 어디서 전화가 왔기에 하나님 내버려두고 달려 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뿐입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요? 몇 사람이나 올바르게 예배를 드렸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옷 바람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텔레비전 틀어놓고 그리고 예배랍시고 드리고, 딩동 하고 택배가 오면 가서 또 택배 받고, 차 빼달라고 경비실에서 전화 오면 뛰어 내려가서 전화 받고(차 빼주고,) 예배드리다가 오줌 마려우면 화장실에 갖다가 와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하나님 안 계십니다. 하나님 거기 가시겠다고 해도 내가 말릴 것입니다. 거기를 왜 가시느냐고.
우리가 그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리고 그 교인들을 위해 야단치고, 그 교인들을 위해 눈물로 목양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경종이 코로나 사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니 예배 시간에 그런 교인들을 보니 목사는 무슨 설교할 맛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설교도 아주 빨리빨리 끝납니다. 우리 초등학교 주일학교 다닐 때 가끔 목사님 설교 들어보면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 나와서 예배드린다고 교인이 된 줄 압니까?” 그러다가 중학교 때쯤 가니까 “한 시간 반 예배드리면 교인인 줄 압니까?” 그러셨는데, 나는 묻고 싶습니다. 지금 두 시간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을까요? 과연 그러면 교인이 계속 나올까요? 궁금합니다. 이런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그 다음에 교인들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올 때는 그렇게 느림보처럼 왔던 사람들이 갈 때는 왜 또 그렇게 빨리 가려고 합니까? 음악회를 가도 음악회가 끝나면 감동을 받은 사람이 구석구석에 앉아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으면서 그 음악회에서 받은 감동을 간직하면서 천천히 생각 좀 하다가 집에 가는데, 아니 방금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온통 일어나가지고 교회 문이 미어지도록 밀면서 사람들이 나옵니다. 저 멀리서 보면 알록달록한 구슬 같은 사람들이 그 돌계단 위를 쏟아져 내려오면서 흩어집니다. 그렇게 급하게 나가지만, 기껏 해봐야 화장실 아니면 주차장 아니면 집에 가서 빨리 밥 먹고 잠옷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것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나갑니다.
그러니 예배당에서 은혜를 흠뻑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해도 세상이 변화될지 말지인데, 그렇게 쏟아져 내려가는 그 사람들 그중의 절반은 방금 전에 들은 설교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너희들이 이렇게 매주 모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은혜라,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흩어지는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세상을 이길 거룩한 힘이 그 안에 있습니까? 나를 버리고 주를 따라가리 하는 담대한 믿음의 결심이 있습니까? 어떤 일을 만나도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져서 가는 그게 있느냐 말입니다. 문제는 교인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인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그렇게 썩 만족스럽게 목회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은 겨우 움지럭거리기 시작하고 목회자가 눈물을 쏟으면 교인들은 땀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목회자가 피를 쏟아야 교인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니 목회자의 그것은 항상 교인들의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땀과 눈물과 피, 액체의 생애를 사셨던 이유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는 그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렇게 말씀을 준비하고 충분히 기도하고 설교 시간에 강단에 올라가면, 뭔가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도저히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진리를 쏟아놓는다면 교인이 어떻게 잘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인들을 내버려두면서 무슨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런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교인들의 마음은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못 드리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주일 동안을 사는데 어떻게 그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 예배의 깊은 무감각, 그리고 예배에 대한 방만한 태도들을 우리는 깊이 먼저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새로운 예배자로서 설교자로서 다시 태어날 결심을 하지 않으면, 코로나 해제시대가 와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목회해야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고, 그리고 그 설교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먼저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그 설교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비유를 하자면, 밭에서 곡식을 베어 밀을 다 추수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껍질을 다 벗긴 다음에,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그 다음에 절구에다가 찧습니다. 가루로 만들고 채를 치고 그럽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자신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자기가 깨어지는 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루가 되기까지.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눈물을 쏟아서 반죽을 하고, 성령의 오븐에 구워서, 그리고 마지막에 자기의 피의 소스를 발라서, 그게 빵 만드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깊이 인정하는 일 없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이익이 충돌할 때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좇을 수 있겠으며,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희생과 자기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충돌할 때 자기를 버리고 예수를 붙들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모든 교인들이 “아,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당을 떠나게 될 때, 그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마음에 번잡하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예배시간에 위대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찮은 피조물이며 그럼에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기쁨과 감사를 함께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모인 그 사람들이 얼마나 성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는지 이것에 예배의 성과가 달린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주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시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목표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목적을 전쟁이라고 한다면 목표는 전투입니다. 전투에서 한두 번 이겼다고 해서 반드시 전쟁에서 이기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계속 패배하면 결국 전쟁에서 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를 위해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모든 예배를 드리러 나온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예배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주님과 만나게 하는 수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에 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신앙고백하고 헌금하는 모든 순서가 다 소중하고 귀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예배의 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깊이깊이 깨닫고 주님을 만날 때, 나를 버리고 예수를 붙드는 일이 일어나고 나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고 어떠한 희생도 그 설교를 위해서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목사는 6일 동안 진리의 말씀과 함께 분투하고 삶으로서 하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주일의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자기 자신이 그 말씀의 증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하고,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설교되어야 하고, 교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게끔 설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강의를 준비해가지고 와서 여러분을 쳐다보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똑같은 강의를 하는데 이러고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제 강의를 끝까지 들으시겠습니까? 원고를 읽는 것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설교로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고, 특히 여기 젊은 목회자들 계신데 한 10년은 원고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철저하게 풀 스크립트(full script)로, '성도여러분 안녕하십니까?'서부터 시작해서 '기도하겠습니다.'까지 원고를 써야 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성껏 쓰고, 그리고 그것을 모두 외우고, 올라갈 때는 그것을 덮어놓고 설교를 해야 됩니다. 성도들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설교를 해야 됩니다. 10년 정도 그렇게 하면 비로소 여러분은 조그만 요약지만 가지고 올라가서도 설교할 수 있을 만큼 성경적으로, 문학적으로, 수사학적으로 훈련이 될 것입니다. 그 대신 그것을 수없이, 수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벌써 40년 가까이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한 가지 일을 이만큼 했으면 이제 뭔가 그래도 길이 보여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최근에 한 설교 원고 가운데 가장 많이 고친 게 열일곱 번 고쳤습니다. 열일곱 번을 부분적으로 고친 게 아니라 전부 다 고쳤습니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을 들이면서 설교를 준비를 해서 그것을 모두 외워야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아예 하루 시간을 내서 기도원에 가서 준비한 설교를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기도원을 산책하면서 그 설교를 해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감동이 있게끔, 자기의 실제적인 체험이 묻어나게끔,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와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올라가지만 덮어놓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설교에 목숨을 걸고 예배를 인도했더라면 얼마나 우리의 목회는 변했을까요? 이 코로나 사태 때문에 교회는 큰일 났습니다. 성도들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그전에는 자기 교회밖에 몰랐는데 남의 교회에서 어떻게 설교하는지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자기네 교회의 예배가 아니라 다른 교회의 예배에 들어가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노마드(nomad)교인들, 유목민처럼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면서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수가 엄청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게는 아주 커다란 위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제 위드 코로나가 시작이 됐는데, 설교에 대해서 깊이 반성을 하고 게을렀던 점에 대해서 뉘우치고 목숨을 걸고 설교를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완벽하게 외우고 소화해서 교인들의 눈빛을 쳐다보며 설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교인들이 그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그들의 마음가짐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교육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교인이 오면 제일 먼저 교육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예배의 자세가 어때야 되겠는가?” 그것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끝날 때까지 특히 설교시간에는 부동자세다, 똑바로 앉아서 졸지 말고 그리고 설교를 이해하려고 힘써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시간 처음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된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마음이 흐트러질 때 “예수여 도와주시옵소서. 말씀의 은혜를 받게 해주시옵소서”, 그것을 끊임없이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가르치면 안하는 교인은 안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회자가 안 가르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가르치면 따라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안 따라오는 사람들 바라보며 목회하지 마시고, 따라하는 교인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목회를 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그 교회가 부흥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에게 이 마음을 가르쳐야 됩니다. 예배당에 좀 일찍 나와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게 하고, 그리고 일주일 내내 이 한 가지만 시켜보십시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제일 위에다 놓고 기도해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에 내가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이 오셔서 큰 은혜를 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시키셔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를 시키고, 교인들로 하여금 그 기도를 하게하고, 목회자 자신도 일주일 내내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이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고 이것을 못한다면 나는 있어야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불퇴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까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얼마나 우십니까? 우시는 적이 있습니까? 설교를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자기의 원고를 적셔야합니다. 거기에서 진심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목회자이고 저도 목회자이니까 남의 설교를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특히 주일날. 그런데 제가 한 15년 전에 안과에 입원해 가지고 눈 수술을 두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쪽 눈 하는데 한 2주 걸렸고, 또 한쪽 눈하고 이렇게 했는데, 이 한쪽 눈 수술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일에 병원에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핸드폰을 꺼내서 우리교회 예배를 들어도 되겠지만, 아니 사지 멀쩡한데 목사가 침대에 누워서 한쪽 눈으로 핸드폰으로 보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목사인데 예배는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외출증을 써주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멀리는 못가니까 제일 가까운 교회로 오전예배 하나, 오후예배 하나 갔습니다. 오전예배에 갔습니다. 하나는 장로교회였고 하나는 침례교회였습니다. 침례교회를 오후에 가고, 장로교회를 오전에 갔습니다. 오전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교인이 그래도 한 사오백 명 모였는데 목사로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설교를 듣는 시간이. 아니 장로교 목사라며 설교하러 올라올 때 정 못하겠으면 박윤선 박사 주석 뒤편에 있는 그 설교라도 좀 베껴가지고 와서 설교를 하지 어떻게 저렇게 성경을 엉터리로 다루면서 설교를 할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논증을 뚜렷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와서 아이고 참 (그래서) 장로교목사로서 참 괴롭다 그리고 왔다가 오후예배에 그 옆에 있는 교회에 갔습니다. 침례교회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한 사십 분하는데 신학을 전공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한 나도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을 때는 또렷했는데 설교를 하고 나니까 더 희미해졌습니다. 그래도 오전 설교는 말도 안 되는 설교였지만 주제는 뚜렷했습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라. 그래야 너와 네 자손이 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 오후예배는 아예 주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정말 변화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래도 은혜를 주시니까 있겠지만, 그러나 다들 제가 보니까 40대 중반, 많아보아야 50세 정도 되신 젊은 목사님들인데, 아니 아직 젊은 나이에 왜 그렇게 설교를 합니까? 목회자가 들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골자가 없는 그런 산만한 설교를 하니까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하면 이 목에 핏줄이 돋아날 내용이 아니면 설교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니 핏대 올리면서 할 이야기가 없는데, 그 하나마나한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정치 이야기나 하면서 그 소중한 예배의 시간을 때워버리니까 교인들이 이 예배에 나오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를 이 위드 코로나시대와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인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또 이번 주에는 추수감사절이니까 하여튼 제가 지지난 주일에 엄청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교인이 50프로가 더 나왔습니다. 이번에 또 야단쳤으니까, 또 추수감사절이고 교회서 떡도 주고 하니까 그래도 한번쯤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조 드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를 망치는 주범은 늦게 오는 교인들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 제대로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예배를 망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지고 있어도 목회자가 설교하다가 울먹이면 쳐다봐 줍니다. 그런데 올라와서 내용도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도 감동을 받은 것이 별로 보이지를 않고 남에게도 감동을 주려는 의지가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할 때, 그 예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말씀을 준비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먼저 깨뜨리고, 그 깨뜨린 말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아서 그래서 설교 한줄 한 줄이 피를 찍어서 쓴 것 같은 내용이 될 때, 교인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설교의 길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진심이 묻어나면 아무리 짧은 설교라도 교인을 변화시킬 수 있고, 묻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긴 설교라도 사람을 바꿔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설교준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격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려고 가지고 온 것이 1997년도에 나온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입니다. 지금은 읽으면 또 느낌이 좀 다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초유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단숨에 십만 권이 넘게 팔렸습니다. 어쨌든 제가 당시에 교수직을 그만 두고 지하실교회에 개척을 해서, 처음에는 학교에서 교수를 하면서 개척교회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쯤 지났을 때 사례금 안 받고 목회를 했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결단하게 해 주셔서 둘 중의 하나를 내려놓아야겠다 해서 학교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진짜 저는 대우를 잘 받았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교수직을 사임하고 교회로 돌아오니까 생활비가 삼분의 일보다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나 그러고 있는데,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일 년에 받은 인세가 교수 일 년 치 연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그 책을 사용해 (주셨습니다.) 서점 주인을 만났더니 6월 달에 책이 가장 안 팔리는 달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그 책을 사겠다고 교인들이 꾸역꾸역 서점에 몰려오면서 다른 책도 팔게 되었다고 저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책이 오늘 여러분에게 가지고 온 책입니다. 여러분이 가셔서 읽어보시고(보시기바랍니다.) 그것에 대한 새로운 개정판이 12월에 나옵니다. 저희 교회에서 이제 그것을 가지고 공과공부를 하는데, (그래서) 교인들의 의식을 아주 놀랍게 변화시켜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는 목회자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못 만나는 예배를 계속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게 교인들에게 타성이 되어서 이제 웬만해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는 교인들은 그냥 은혜를 못 받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강퍅해지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봄에 내리는 비는 살아 있는 식물에게는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생명을 주지만 죽은 나무가 봄비를 맞으면 더 빨리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런 코로나 이전에 드리던 그 예배생활과 결별하고,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언젠가는 모두 죽을 것 아닙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에 30분의 시간이 남아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요? 누굴 보고 싶다거나 등등 될 수 있겠지만, 저는 30분이 남았다면 나를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려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조용히 눈을 감고 싶습니다. 그처럼 이 예배는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소중하고, 그리고 살아 있을 동안에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 지상의 예배입니다. 이것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유산으로 알고 감사하며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초청이었습니다. 지체가 높은 집안에서 여러분 두 부부를 초대를 했습니다. 가보니까 문을 세 개나 지나는 어마어마한 대부자의 한옥주택입니다. 갔더니 어디서 동원된 사람들인지 하인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양쪽에 도열해서 여러분이 지나갈 때에 인사를 하고, 티 하나 없이 그렇게 온 집안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문 세 개를 지나고 마지막에 연회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큰 방에 가니까 드넓은 방에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복을 입은 하인들이 아주 예쁜 모습으로 여러분들을 환영하고, 비단방석이 놓인 가운데 자리에 여러분 부부가 둘이 앉고 맞은편에는 그 집 주인인 부부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보니까 얼마나 많은 음식을 차렸는지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상 위에 크고 작은 그릇들이 가득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예외 없이 뚜껑을 덮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보자기를 이렇게 무릎에다가 놓으니까 거기에는 은수저가 가지런히 놓였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자, 손님 정성껏 차렸으니 좀 드시지요.” 그래서 손을 뻗어서 그릇 하나를 열어보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샹데리아에 아주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시중을 들으며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첫 번째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속에 들은 음식이 음식이 아니라 똥입니다. 옆에 뚜껑을 열어보니까 묽은 똥입니다. 앞의 뚜껑을 열어보니까 굳은 똥입니다. 전부다 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인테리어가 좋으면 뭐합니까? 10억짜리 파이프오르간이면 뭐합니까?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없는데, 정성이 없는데, 그 예배를 보신 하나님의 심정이 아름답게 차려진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다 그릇 속에 똥이 들어있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교인들이 깊이 심각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만나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깊이 만나 주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 예배의 힘으로 우리들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깊이 만나주시지 하나님 앞에 장난치러 온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말했습니다. “나는 설교할 때마다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마지막 설교인 심정으로 설교한다.” 실제로 리처드 백스터는 그렇게 목회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 생애의 마지막 목회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충성스러운 목자로서 정성껏 꼴을 베어 양떼들에게 먹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가 예배되지 못한 모든 책임이 목회자인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예배당에 나오는 교인들은 교회 오고 싶었던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얼마간은 아예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떠날 사람들이니까, 열심히 권면해야 되겠지만 나온 사람들에게 더 많이 마음을 쓰십시오. “아, 이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싶었던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이 예배가 코로나 이전하고 똑같은 예배라면 이 사람들은 얼마 나오지 않아서 금방 실망하고 말 것이고, 또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변화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가르치셔야 됩니다. 정 못 하시겠으면 잘 하는 사람을 불러다가라도 가르치시든지, 아니 자신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잘 준비해서 그래서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가르치십시오. “우리 이런 예배를 드리자. 예전까지 드렸던 예배는 하나님 못 만나는 예배였으니까 이제는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자.” 만약에 이런 일들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펜데믹의 이것이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어서, “아,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큰 은혜였구나.” 이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고 예배를 능가하는 삶도 없습니다. 예배자로서 실패한 사람이면 신앙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 것이고, 그리고 제대로 된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결국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낼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사람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아도 결국 자기를 이기지 못하는데, 그런 은혜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깊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예배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도록 열렬하게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호소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교회 나온 교인들이 “나 없는 사이에 예배가 변했구나, 나 없는 사이에 교회가 바뀌었구나, 나 없는 사이에 목사님이 은혜를 받으셨구나.” 이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렇게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위드 코로나 시대를 기회라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예배에 대해 신앙적으로 깊이깊이 각성하고, “과연 우리의 예배가 이것으로 충분한가? 왜 우리 교회는 이 정도밖에 예배를 못 드리는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고 가는 책을 완독을 하신다면 마음이 뜨거워질 것이고 예배에 대해서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가르치셔서, 그래서 한번 죽은 예배를 드리던 교회를 바꿔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변화시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