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녹취자: 이새봄, 박나리
사회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한번 질문들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열청이들이 묻고 김남준 목사님이 답하는 ‘열청 번개토크쇼’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잠시 그래도 시작하기에 앞서서 진행 순서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한번 드리겠습니다. 토크쇼는 청년들이 보내준 질문에 따라서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될 예정입니다. 1부 순서에는 ‘고통과 통증’에 관한 질문과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 2부 순서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관한 질문과 답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1부와 2부 순서 사이에는 현장 이벤트와 댓글 이벤트까지 있으니 온라인으로 지금 참여하고 계시는 우리 분들도 끝까지 시청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온라인으로 지금 참석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댓글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네, 이 댓글 이벤트는 오늘 토크쇼가 마치는 순간까지 진행됩니다. 댓글 이벤트는 혹시 어떻게 하는 겁니까? 네, 지난주일 목사님께서 ‘소확행’에 대한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지 소확행을 대체할 참신한 문구, 그리고 그 의미를 댓글 창에 적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러면 이제 진행에 대한 설명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목사님과 토크쇼를 진행해 볼까 합니다. 잠시 혹시 댓글창에 남겨주시는 분은 참신한 댓글을 남겨주신 분께, 세 분께 기프트 카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 고통과 통증에 관한 질문
문제1) 누구나 고통을 겪을 수는 있지만 통증은 제몫이라 하셨는데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비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목사님) 너무 중요해서 제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93년도 12월 10일에 교회가 개척이 되고 이렇게 설교, 주일 설교를 길게 한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기록이 1998년도 9월 30날 주일이었는데 2시간 24분 설교를 했습니다. 근데 그 이유는 제가 한 시간을 착각을 해서, 그래서 1시간 24분 설교를 한 줄 알고 비교를 했는데 2시간 24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의 30년 만에 제가 이렇게 긴 시간을 처음 설교를 한 것입니다. 저의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근데 이제 오늘 굉장히 많은 질문이 나온 게 뭐냐 하면, ‘고통과 통증’에 대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제 통증. 사실 우리가 엄격하게 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불행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면 불행이 무서운 게 아니라 불행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고통, 만약에 불행한데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병자들은 불행을 의식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불행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렇게 보면 불행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불행에 뒤따르는 엄청난 고통을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 고통이 오기 전에 죽는다면 무서워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말은 그럼 맞냐라고 보면은 엄밀하게 말하면 고통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통증이 무서운 겁니다. 자세히 말해서. 그러니까 뭐냐 하면 불행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불행에 뒤따라오는 고통이 두려운 거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은 그게 나에게 전달돼서 느껴지는 통증이 무섭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근데 그게 고통과 통증의 관계는 뭐가 똑같냐면은 고통은 병이고 그 다음에 통증은 진통이 오는 겁니다. 아픈 겁니다. 암에 걸리잖습니까? 암은 불행이잖습니까 모두. 근데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는데 일주일 죽기 전까지 1도 고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걸어서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서 갔는데 “폐암입니다. 한 달을 못 넘기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죽은 케이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무슨 얘기냐면 고통은 왔는데, 불행은 왔는데 고통도 왔는데 근데 통증은 없는 겁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암이 하필이면은 신경 거기에 딱 걸린 겁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암은 2기밖에 안 되는데 통증이 엄청나게 옵니다.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지 않으면 안 될, 마약성 진통제를 집어넣지 않으면, 몰핀을 집어넣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러면 이제 그럼 우리가 정확하게 다뤄보면 불행을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불행이 있고 못 막는 불행이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예를 들자면 나는 이제 어제 설교 중에서 여러분, 지난주 설교 중에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좀 주목해야 될 게 뭐냐, 몸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강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데 그거는 여러분들이 다시 들어야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몸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렇게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건강관리를 잘 안 하잖습니까? 그게 불행이 됩니다. 후회. 그러면 무슨 얘기했냐면 오늘 내가 부주의하게 살고 오늘 내가 부주의하게 살고 잘못 생활을 하면 그게 불행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불행은 내가 모두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암에 걸리거나 이런 사람들 다 이렇게 섭생 관계를 이렇게 관찰해 보면은 이미 그렇게 될 만한 원인들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거를 미리 알고 피해가도록 살아야 되잖습니까? 그러면 어느 정도는 그런 불행을 줄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 주의했는데도 닥쳤습니다. 그런 불행은 사실 막을 수가 없는 겁니다. 또 이미 기존에 발생한 불행입니다. 내가 태어났는데 아빠가 누군지 모른 채 태어났다, 아니면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부모가 이혼했다든지 아니면 고아원에 버려졌다든지 이런 것들을 내가 어떻게 막을 수가 없는 거잖습니까. 막을 수 있는 불행은 최대한 막고 그 성공할 확률이 0.01%만 돼도 온 힘을 다해서 그걸 막아야 됩니다. 그게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지금 건강에 대해서 상당히 자신이, 젊은 시절에 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조심하지 않으면 내 일평생 그런 불행을 지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근데 일어나잖습니까? 일어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통증을 줄이는, 통증을 줄여야 되잖습니까? 그래서 오늘 내가 이거 답변을 안 하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이게 다음 주일 설교 스포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이 뭐냐 하면 ‘왜 나는 울고 있나, 불행을 뻥 차버리는 길’ 그게 다음주 설교 제목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통증을 줄이는지 이번 주일날 집중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말하면 스포가 됩니다.
문제2) 신체가 조금만 아파도 삶 전체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신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통증을 피하신 목사님의 경험담이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 또한 믿음이 더 자라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목사님) 믿음, 믿음 문제도 있는데 이거는 마음은 먹기에 따른 겁니다. 저는 성격이,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는데, 저의 성격은 원래 되게 급했습니다. 그리고 뭐든지 생각난 걸 해치워야 되는 거고. 그리고 저는 이렇게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할 때 복선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게 인간관계의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의 복선도 그렇게 아주 잘 읽어내는 편이 아니고 나 자신이 복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이 밑의 말을 다 계산을, 패를 보여주고 그리고 화투를 칠, 카드놀이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고 그러는 거는 우리 피가 아닙니다. 우리 집안의 피가 아닙니다. 우리 아들이 미국에서 박사, 이제 거의 끝내가고 있는데, 걔는 이제 이렇게 와서 “너, 너 오늘 어제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그럼 “어, 저..” 이렇게 얘기를 하면 “너 지금 거짓말 하려고 그러지?” 얼굴에 표가 납니다. 아직 말도 시작 안 했는데. 제가 그럽니다.
근데 1998년도에 이렇게 추리소설 읽으면서. 추리 소설 어디서 읽는지 압니까? 흔들의자에서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흔들의자에 이렇게 기대서 흔들흔들하면서 그게 추리 소설을 읽는 플레이스입니다. 그래서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그게 멋있어 보여가지고 사당동에서 흔들의자 하나 사놨습니다. 이렇게 놓고 그 흔들의자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게 타이프가 좀 느립니다. 그래서 이제 누가 타이프를 쳐주고 내가 8시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못 일어나겠는 겁니다. 근데 그때 허리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때는 돈도 있고 사실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병원 다니기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그리고 버텼는데 결국 많이 잘못됐습니다. 그 후로 한 20년을 고생을 했습니다. 근데 처음에는 이게 너무 화가 나는 겁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못 움직이게 했으니까 그런 세월을 한 6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어느 날 이렇게 내 마음이라도, 니가 만약 이 허리 아픈 거를 평생 달고 달아 살아야 될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 후로 병원에 가봤는데 아무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너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신경질 내면서 살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근데 그건 하나님 앞에서 아니었습니다.그래서 나중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허리에 대해서 “야, 내가 너를 이해한다. 내가 얼마나 너를 학대했으면 이렇게 됐겠냐? 사실은 너도 피해자구나. 근데 네가 피해자가 돼서 나한테 복수를 하는 거구나. 그런데 내가 그 복수를 다 안아주마. 그래서 우리 같이 공존하면서 살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아프면 얘가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찜질도 해주고 그리고 가서 지압도 받고, 그러면 또 또 하루 하루 하루 이틀 정도 더 살 수 있고 또 밤에 너무 아프면 밤 열두시에라도 지압을 받으러 열한 시에라도 지압을 받으러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도록 노력하고 그리고 병이 발견됐을 때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고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딱 병에 걸렸을 때 과할 정도로 의사들을 찾아서 그 병을 입체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인 의견을 가지고 체계적인 치료를 받으라는 것, 그게 나중에 인생을 절약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잖습니까? 그때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아픈 거는. 그리고 이게 일평생 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내가 이렇게 계속 신경질 내면서 다운된 채로 내가 이거 병 하나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거를 너그럽게 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거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다스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당장 내 몸에서 오늘 5시에라도 내가 딱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뭐 칼 가지고 수술을 해서라도 하지, 근데 그렇게 안 될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그게 안 될 경우에는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래야지 남은 삶을 낭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겁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문제3) 태어날 때부터 겪게 된 가정 안에서의 고난으로 인해 너무나도 큰 통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겪는 고난 속에서도 통증을 덜 느끼는 방법이 있을까요?
목사님) 가정에서 통증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저는 깊은 공감을 합니다.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셨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근데 어느 날 어머니, 엄마가 우리 형제가 셋이었는데 셋을 눕혀놓고 밤중에 선언을 하는 겁니다. “얘들아, 내 얘기 오늘 밤에 잘 들어라.” 불을 다 끄고. 그리고 아빠도 거기 있는데 다 이불에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는데 “엄마는 이제 너희들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 없다. 잘 자라라.” 그게 끝이었습니다. 뭐 그 후에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가족관계는 그날 그 선언으로 끝난 거였습니다. 근데 나는 6학년 내 동생은 3학년 그 다음에, 그 밑에 동생은 아직 학교도 안 갔습니다. 그리고 사춘기를 중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 사춘기가 왔는데 얼마나 방황을 했겠습니까?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가족은 다 뿔뿔이 다 흩어지고 동생 둘이 다 다른 데로 흩어지고 가정이 없어진 겁니다. 아버지는 사업하러 내려가시고 이렇게 다 흩어진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겪었을 고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내가 그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근데 그래서 제가 그 어버이날 항상 제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설교한 해가 하나도 없다는 걸 여러분 기억하실 겁니다. 근데 두 분이 왜 헤어지게 됐겠습니까? 아버지가 세상 없이 잘 하셨으면 헤어졌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하면 내 눈에는 두 사람 다 공동정범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도 나는 우리 아버지 용서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그때 스물 일곱이 되던 해에 교회당에 가서 하루를 직장을 휴가 내고 교회당에 가서, 아침에 남의 교회당에 가서 마루에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니 아버지를 용서해라”라고 정확히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음성이 뭐였냐 하면 “사실 네 아버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니 아버지가, 니 아빠가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텐데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거다”.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그 하나님 없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자기 아내한테도 별로 대접을 못 받고 그 다음에 뭐 형제들한테도 별로 대접을 못 받고 뭐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렇게 가정에 관심이 없으셨으니까 그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대접해드리고 말고 아주 어린 나이였으니까. 그렇게 가만히 보니까 그것도 너무 외톨이로 혼자 외롭게 그 어린 나이에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사업이라는 걸 하면서 고난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 순간에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다음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모두 끊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진짜 진짜 제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잘 모셨습니다. 그래서 사업하다 빚을 지셔서 오갈 값이 없을 때 저희 집에 모시고 2년 6개월을 살았고 그리고 나중에 혼자 살고 싶으시다 그럴 때는 저 변두리에 있는 정말 조그만 빌라를 우리도 어려운데 사서 거기다 모셔드렸습니다. 행복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근데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뭐냐면 아픔을 곱씹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거는 중요한 건 뭐냐 하면 그거는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불행입니다.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근데 그거를 자꾸 소환을 해서 현재의 기억으로 불러오잖습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는 시간을 내가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 흘러가잖습니까? 그러면 언젠가는 지금 이렇게 잘 살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또 그거를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평생을 살아도 현재는 안 살다가 죽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피할 수 없이 가정의 아픔이 있다? 뭐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아버지도 예수 믿으시고 후에, 그 당시에는 둘 다 안 믿으셨습니다. 나중에 두 분 다 예수 믿으셨습니다. 어머니 진짜 열심히 예수 믿다 돌아가셨습니다. 아,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열심히 믿으셨고 그러니까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어머님은 아직 안 돌아가셨는데. 근데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도 여전히 안 믿으실 수 있고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거를 자꾸 현재의 기억으로 소환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니까 마음, 마음적으로는 다 용서하고 그냥 엄마도 사랑도 하고 아빠도 사랑하고 다 다 그렇게 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자기 자신을 그냥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걸 현재의 기억으로 소환하지 말고 이거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거기서 멈추고. 그리고 그렇게 힘들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면서 제 마음을 다스려달라고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빌립보서 4장 6절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다스려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그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서 살 것인가, 그거는 이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분량만큼 하면서 노력을 하면서, 이혼했어도 그분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그렇게 살면 너무 훌륭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거를 자꾸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게 참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제 치유되는 과정 그 자체가 자기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을 한번 이렇게 헤아려 보십시오. 그거를 감수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오늘을 살아야 되겠다는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자) 정말 또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지 또 가정의 그런 고통 앞에서 정말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 했던 것들이 목사님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나서 되게 은혜가 많이 됐습니다.
문제4) 욥과 같이 예기치 않은 고난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어떻게 그 통증을 덜어낼 수 있을까요?
목사님) 이건 또 스포가 될 것 같습니다. 패스?
사회자) 조금만, 프리뷰로 조금만.
목사님) 조금만?
사회자) 프리뷰로.
목사님) 사실 폭풍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 불행을 많이 만나는 사람한테 가서는 사실은 폭풍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제 병이 들잖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들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당하잖습니까. 그걸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거는 너무 무책임한 겁니다. 근데 보십시오. 이렇게 기력이 없는 사람은 기력이 있는 사람에 비해서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팔다리나 한쪽이 불구가 된 사람은 기력이 없어도 걷기만 하는 사람으로 봐도 너무 무겁습니다. 팔다리 하나 없는 사람은, 아니 두 개 없는 사람, 두 개 없는 사람은 목발이라도 짚고 걸어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겁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계속 내려다 보면은 마지막에 어디까지가 가냐면은 식물인간이라도 누워 있는 사람이 부러운 사람도 있는 겁니다. 오늘 장례식을 치른 사람.
내일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내게, 내가 제가 지난주에 그런 질문을 했잖습니까? 여러분 친구에게 일어나는 죽음, 이혼, 사별, 아니면 암, 교통사고, 심장마비, 이렇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왜 여러분에게만 일어나면 안 됩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확률적으로 누구에게나 오는 겁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도 지금 암 걸려가지고 투병하는 지체들 있습니다. 나 그럴 줄 알았다, 나 10년 전부터 내가 예상했다 이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와이 미(why me)? 하나님, 왜 납니까? 근데 그런 질문 자체가 되게 웃기지 않습니까? 와이 낫 유(why not you)? 왜 니가 아니냐? 그렇게 물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수많은 사람들이 걸리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30% 정도의 확률이라면 나한테도 그 정도는 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거를 많은, 욥과 같이 환난을 만나려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쓰나미처럼 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 인간적인 문제 다 이렇게 올 수 있잖습니까?
하나만 내가 여기서 그 저거를 팁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다, 라는 정도로 폭풍처럼 시련이 오면 어느 날 딱 결심을 하고 ‘이건 내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이다’라고 멀리서 보십시오. 객관적으로. 그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이게 내 인생이 아니라 지금 남의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 발짝 떨어지십시오. 아웃사이더의 마음으로, 구도자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기 자신을 먼저 추스려야 됩니다. 이게 뭐냐면 불행이 커서 쓰러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뭐냐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쓰러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선 세대의 엄마들 보면 남편 사별하고 그다음에 큰 애 먼저 보내고, 우리 집사람도 10명을 장모님이 낳았는데 5명이 죽었습니다. 그 엄마의 마음이,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심지어는 다 커다란 아이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애들도 죽잖습니까? 그렇게 하고 그러면서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새벽부터 나아가서 생선 토막을 자르면서 그렇게 돈을 벌어야지만 그걸 가지고 하루 끼니 간신히 갖고 와서 아이들에게 밥을 끓여 먹이던 엄마의 그 힘은, 삶의 힘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뭐냐 하면 불행이 적어서 그런 엄마들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자식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삶의 강한 욕구와 의지가 그걸 그 불행을 버텨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렇게 안 하면 마지막에 자살할 생각밖에 안 하는 겁니다. 아니면 정신줄을 놓고 환각에 빠져들던가 그럴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피할 수 있는 불행은 피하되 피할 수 없는 불행은 인생 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거를 시인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정신의 힘을 키워라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에 이제 좋은 신앙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그다음에 이런 강의를 듣고. 이렇게 하면서 아까도 나오잖습니까? 자살을 계속 생각했었는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아사밤」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자기 친구가 자살 직전까지 갔는데 그 책을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겁니다. 이게 뭡니까? 결국 우리의 정신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이 강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그 힘이 있는 겁니다. 그걸 자신의 자신 속에서 끌어내려고 해야지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이게 왜 안 바뀌냐고 계속 하늘을 향해서 주먹을 쥐고 원망을 해봐야 마지막에 자기 밖에, 자기 파괴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겁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
사회자) 감사합니다. 이제 고난이 폭풍처럼 밀려올 때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의연한 마음을 가지는 우리 청년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문제5) 고난 속에서 흘리는 눈물과 괴로움의 신음 소리가 어떻게 저의 찬양이 될 수 있을까요?
목사님) 결국은 말입니다. 이런 거 아닙니까? 인생은 해석의 능력이 좌우하는 겁니다. 해석의 능력이. 조지 버나더 쇼라고 하는 영국의 극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쓴 「초인」이라는 작품 속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이게 뭐냐하면 당시에 그 옵티미스트(optimist)와 패시미스트(pessimist)의 대조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옵티미스트라고 하는 것은 낙관주의자입니다. 원래 보누스(bonus)라고 하는 라틴어 단어의 최상급입니다. 그러니까 굳(good), 베터(better), 베스트(best) 이렇게 되듯이. 배드(bad), 워스(worse), 워스트(worst) 이렇게 나오듯이. 워스트(worst)입니다. 그런데 포도주 한 잔이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탁자 위에. 근데 포도주를 이제 가득 따랐습니다. 둘이 같이 건배를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겁니다. 옵티미스트는 낙관주의자이잖습니까? 비관주의자는 “어떻게 해, 이제 반밖에 안 남았어”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옵티미스트는 “와, 그렇게 먹었는데 아직까지도 반잔이 남았어” 생각하는 겁니다.
인생도 어떤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 달라지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이게 예수 믿는 것이 놀랍게 인생 사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의미를 몰랐던 과거의 일들이 해석이 되는 거잖습니까? 내가 왜 그렇게 자살하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을까,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그런 고통받을 때 그런 느낌이 나잖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보다 이런 느낌이 들잖습니까. 나중에 해석의 능력이 생기는 게 내가 그때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진짜 하나님을 찾았을까, 이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딱 설득되는 그 순간, 자기가 너무 하나님 없이 고통을 받은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감격이 밀려오는 겁니다.
근데 그거를 과거만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걸 가지고 현재를 해석을 하는 겁니다. 과거에 그랬으니까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지는 모르지만은, 이것도 사실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처럼 해석이 될 거다라는 생각을 갖는 겁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리가 없다라는 믿음을 활용을 해서 이겨내는 겁니다. 그걸 이겨낼 마음과 의지에 힘을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선한 욕구를 주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가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겁니다. 이렇게 신앙이 깊은 사람은 이 해석의 능력이 뛰어나고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하면 그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여기서 선한 힘이 확 막 솟아오르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으며 그리고 내가 오늘 두 눈을 부릅뜨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사랑 속으로 불러들이시는 과정이다라고 생각하는 해석의 능력이 있는 겁니다. 지난주에 제가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는 집사님 얘기 간증 전해드렸잖습니까? 그런 분들은 바로시간 앞으로 다가온 죽음 앞에서도 그 과거뿐만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죽음을 당하고 있는 현실까지도 아주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건 두려운 건 아닙니다. 근데 그거 거기서 편안하게, 오히려 자기를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해석의 능력이 있는 겁니다.
다 그게 그러니까 이런 거 아닙니까? 뭐냐하면 이유 없이 뭐 때문에 이유 없이 성가실 때는 짜증이 나는데 보람 있는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자꾸 생겨서 신경이 쓰이면 더욱더 의욕이 솟는 겁니다. 어? 이게 안 돼? 어쭈, 이거 봐라? 그래도 안돼? 어? 되네! 되네! 돼!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해석이 되면 해석 그 자체 속에서 그걸 견딜 수 있는 놀라운 정신의 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면 머리 위에 구름이 끼어서 사고가 혼탁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겠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게 그게 해석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해석이 안 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매일매일 말씀의 은혜를 받아 되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해석의 능력을 배양합니다.
사회자) 네, 목사님 이렇게 귀한 답변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저희가 고통과 통증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다 들어보았습니다. 네, 벌써 1부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날아가 버린다 그런 표현이 너무 와닿는 것 같습니다. 네, 빨리 이렇게 지나간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이렇게 정자세로 다들 앉아 계시는데 집중해서 듣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씀에도 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합니다. 네, 그래서 저희가 2부 토크쇼로 지나 넘어가기 전에 잠시 환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목사님 괜찮으십니까?
목사님) 네.
사회자) 환기하는 시간을 또 어떻게 가집니까? 네, 함께 저를 따라 해 주시면 됩니다. 네, 제가 “인생의 무게를” 하면 여러분은 “날려라” 이렇게 힘차게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네, 네, 그러면 “인생의 무게를” (“날려라”) 감사합니다.
네, 현장에 계신 분들은 들어오실 때 펜과 종이를 받으셨을 겁니다. 네, 마치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꺼내십니다. 네, 종이 위에 이제 현재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하는 것 또는 과거의 인생 때 과거의 인생에서 자신을 무겁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적어주신 후에 비행기를 접은 다음에 이제 앞쪽으로 날려주시면 됩니다. 네, 그래서 제가 신호를 드리면은 앞으로 딱 달려주시면 됩니다. 네, 지금부터 한 30초에서 1분 정도 적어주시면 되겠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짧은 단어 하나를 딱 적는 겁니까?
사회자) 네네, 단어를, 단어를 하나 적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지금 참여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 댓글창에 여러분의 인생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 또는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주시면 함께 읽고 목사님께 즉흥적인 질문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장에 계시는 분들 보니까 고민하시느라 아직 비행기도 못 접으셨는데.
목사님) 비행기를 접을 줄 알겠습니까?
사회자) 비행기를 접은 지 꽤 오래돼서 모르시는 분들도, 어린이 시절에 한 번씩 해 보셨으니까. 너무 어렵게 접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제일 심플한 걸로 접어주셔도 됩니다. 네, 학 같은 거 접으시면 안 됩니다. 댓글이 좀 달리고 있습니까? 목사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옆에 좀 비행기를 접는 게 좀 어색하다 싶으시면 옆의 분들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날리실 때 조준을 잘해주십시오. 뒤에 있는 분들은 앞에 떨어지지 않도록. 네, 같이 도와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안쪽으로 접어야 합니다. 안쪽으로.
사회자)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옆의 분들에게. 모두 이렇게 날릴 준비를 해 주시면 저희가 같이 날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은 안 적으셔도 됩니다. 여러분. 벌써? 그러면. 너무..
목사님) 앉아서 날리면 안 되고 일어서서 날려야 됩니다.
사회자) 네, 저희가 이따가 같이 날리는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너무 적극적인 참여 감사합니다. 거의 다 접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신호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인생의 무게를” 하면 여러분은 날려라” 하면서 앞으로 던져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인생의 무게를” (“날려라”) 날리십시오. 네, 이쪽으로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비행기 중에 저희가 하나를 열어서 어떤 단어가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이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되게 큰 종이에 되게 짧게 적으셨는데. 네,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고통을 준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진로를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이런 답변을 해 주셨는데 혹시 목사님 진로 때문에 조금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으십니까?
목사님)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짧게 답변을 하겠습니다.
목사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염려한다 그러는데, 말 자체의 모순이 뭐냐면 모든 사람에게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공평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불확실한데, 불확실하지만 염려가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엄청나게 염려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똑같이 불행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래, 불확실한 거는 우리가 피할 수 없지만. 왜?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 모르니까.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를 보면서 희망을 갖느냐 아니면 염려로 자기 속을 다 태우고 현재를 못 살게끔 방해를 받느냐라고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의 몫입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는 그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더 길게 얘기하면 인생 강좌가 되니까, 하나만 얘기하면 여러분 자신의 것이잖습니까?
미래에서 대해서 불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비전을 갖고 희망을 갖고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마음이 주저앉고 염려가 되어서 오늘을 잘 못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겁니다. 아까 그런 사람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 이거 여백이다” 그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갈 이유를 불확실성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충실합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염려를 하면서 오늘을 낭비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 염려는 점점 무게를 더해서 나중에 삶 자체를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의욕을 잃은 상황이 되는데, 마지막에 심하면 손을 옮기고 움직이기가, 손 발을 움직이기가 싫은 정도가 됩니다. 우울증입니다. 네, 이 정도만 말하겠습니다.
사회자) 여기 보면 이제 작은 글씨로 ‘완벽주의’라고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완벽주의.
목사님) 완벽주의가 신앙에 있어서 완벽주의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가정사역을 하시는데 목사로서 결혼을 했는데 이혼 직전까지 갔습니다. 근데 그 이유가 뭐냐면 아내가 정리를 너무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안 맞고 이렇게 모든 게 탁탁탁 탁탁탁하게 각이 지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딱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거 막 여기다 던지고 여기다 던지고 이러고 사모님이 사는 겁니다. 남편이, 목사님께서 “당신 왜 그렇게 사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뭔지 아냐? 자기 세마포를 개킨 거다. 그 성경에 보면 개켜져 있더라 그랬더라. 휙 던지고 가시지 않아. 그럼 당신은 왜 그렇게 사냐.” 어 근데 이제 나는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실은 그 남편, 두 가지 방법인데 남편이 그냥 정리하는 거에 대해서 깨끗이 포기하고 사는 것 또한 방법이고, 자매가 정리를 못하는 자매들은 그걸 왜 그렇게 놔야 되는지를 모릅니다.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그게 질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름대로 자기의 그 기호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지럽히고 간 애가 어지럽히고 간 방을 엄마가 정리를 해주면은 걔는 엄마가 자기 방을 어지럽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질서를 깨뜨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100% 양보하기가 너무 어려운 겁니다. 우리 교회에 똑같은 일로 늘 부부 싸움을 하는 교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든데 어떤 남편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자매가 그냥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정리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정리학교라는 게 있습니다. 정리 정돈, 수납하고 정리 정돈 하는 곳. 그런데 가서 한 달의 교육을 받으면서 이렇게 신세계가 열리는 걸 경험했답니다.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열리는데 지금은 기가 막히게 정리를 하고 삽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합의하면서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완벽주의가 본인이 완벽하게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근데 그 완벽을 남에게 강요하는 데서 거기서 인생의 트러블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시간을 칼같이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데 내 친구가 5분쯤 늦는 것쯤은 “아, 너무 미안해. 5분이나 늦어서” “아 이게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 그냥 책 읽으면서 기다렸어” 이래줄 수 있는 완벽주의자는 예스, 오케이(yes, ok). 문제없습니다. 근데 그거를 자기 완벽주의를 허물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도 그거를 모든 사람에게 짓누르듯이 강요하는 그거를 접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어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자기 구역장을 자기 마음속에서 잘라버렸습니다. 왜? 돈을 빌려가고 제때 안 갚는 겁니다. 근데 그게 또 뭐 큰돈이 아니라 작은 돈. 그런데 세상사는 사람이 셈이 칼 같은 사람이 있고 좀 흐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를 그 정도가 이렇게 구역장을 잘라버릴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그러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생활의 원칙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 원칙을 어겼을 때 화를 더 많이 내겠습니까? 십계명을 어겼을 때 더 화를 많이 내겠습니까? 자기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이데올로기. 그런 것만 주의하면 완벽주의가 나쁜 거 아닙니다.
사회자) 그러면 한 개만 더 해보겠습니까? 목사님?
목사님) 그러겠습니까? 우리 저 형제한테 부탁하십시오.
사회자) 하나만 여기에 하나만 뽑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를 뽑아주셨습니다.
목사님) 빚. ‘빚’입니다. 이 질문이 나오기를 너무 바랐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 부채 비율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내가 빚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습니다. 어둠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아니라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 man of the light’가 되어야지 ‘A man of Debt’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사실 실생활과 관련이 된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빚이 있습니다. 그런데 빚을 죽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파산입니다. 그래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지금 있는 수입보다 훨씬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소비에 있어서 신축성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이 항상 빚의 사람입니다. 수입이 적은 사람이 빚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빚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3백만 원을 받는데 할부금과 모든 것이 320만 원이 되면 그는 빚을 지면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 빚이 은행에서 대출받은 것이 아니라, 핸드폰 할부로 끊은 것도 다 빚입니다. 노트북 할부로 산 것, 자동차 할부로 산 것, 다 빚입니다. 외투 6개월 할부도 다 빚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래의 갚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경제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살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주위에 있는 지인에게 10원 한 장이라도 나로 인해 누를 끼치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경제적인 독립과 관련된 자존심입니다. 다른 사람의 동정으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삶입니다.
빚을 졌다면 왜 빚을 졌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그 원인을 분석하면 반드시 거기에서는 반성할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회개할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는 빚을 갚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빚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10이라는 수입이 있으면 항상 소비를 얼마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안하고 수도사처럼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속에서 당연히 헌금, 십일조가 있어야 하고 오락비도 있어야 하고 문화생활 비용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비율을 다 줄이는 것입니다. 책은 도서관에서 대부분 빌려보고 6개월 동안 안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영화 구경은 매 달 못가고 두 달에 한 번씩 간다는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끊지 않으면서 다 줄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고통 받고 있다는 느낌이 덜 합니다. 그러면서 일정액이 들어오면 소비를 정하고 반드시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서 자기가 능히 자기 스스로를 조달할 수 있고, 불의한 일, 사건을 만났을 때에도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는 자존감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무 힘들면 파산하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그러나 가능하면 갚으십시오. 그 사람에게 눈물 흘리게 하지 말고, 청산하십시오. 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빚지지 않겠다는 중요한 결심을 하십시오. 너무 안 되면 심리치료, 정신과 치료 받아야 합니다.
사회자) 청년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 댓글이 취업, 건강, 인간관계, 부모님, 신체외모와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는 근육이 나를 무겁게 했는데 지금은 지방이 무겁게 한다’고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목사님) 지방이 자기를 무겁게 하시는 분은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십시오.
사회자) (웃음) 청년들의 삶이 다양한 만큼 청년들의 인생을 무겁게 하는 것들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듯이 고통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통증은 주관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은혜 생활 가운데 감당하고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2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관한 질문
사회자) 그러면 2부 순서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고통을 인정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인지 섭리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관하여 첫 번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문제7) 예정론은 전망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모두에게 예정하신 배우자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목사님) 먼저 용어부터 정리를 하겠습니다.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피조물, 인간이나 천사나 이러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들에 대한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밤하늘의 별똥별이 떨어지고, 내가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이런 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질문 자체가 용어에서 좀 벗어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핵심으로 예정이라고 놓고 보고 조금 넓게 보면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작정하셨으니 그 안에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작정입니다. 넓게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저 암에 걸렸어요.”하면 하나님이 “그랬니? 전혀 몰랐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 예상한 일이 빗나갔다.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너를 통해서 많이 배웠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깨집니다. 그것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제가 예정에 대해서 설교한 것은 제한된 시간 내에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제한적인 설명이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의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헤르만 리델보스’라고 하는 걸출한 신학자에 의하면 성경에서 예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용하는 용도 그 자체가 회고적인 방식으로 예정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맨 처음에 사도가 된 다음에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사도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앙이 깊어지고 보니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예수 믿게 만들어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더 신앙이 깊어지고 인생의 노년에 접어드니 만세 전에 하나님이 영원 전에 계획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정을 생각할 때 구원과 구원에 관한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면, 믿음이 약해질 때는 내가 진짜 구원을 받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정의 교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나는 우연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줄로 묶지는 않았으나 놀랍게도 내가 자유롭게 가는 듯해도 나를 예정하셔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정하신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보존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국 예정을 이야기하고 노래한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러 나갈 것입니다. 관양2동 지역에 나갈 것인데 누구를 예정하셨는지 기도를 해보고 예정되지 않은 사람을 찾아가봐야 헛일 하는 것이라고, 예정된 사람이 누군지 응답해달라고 기도해 봅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니까 절대 예정된 사람들이 아니니, 교회 나와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넓은 뜻에서 보면 누가 배우자를 데려와서 이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네가 그 형제와 결혼할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습니다. 정해진 사람은 어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실질적으로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결혼식인데도 오늘 문자 보내서 우리 결혼 깨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판 싸우고 헤어지고 빚쟁이가 되어 살다가, 나중에 다시 빚 받으러 찾아갔다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적용으로 돌아가면 질문을 한 사람은 결혼을 하고 싶어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할 시간에 화장을 한 번 더 하고, 피트니스 한 번 더 하고, 기도 한 번 더 하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지방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은 해결책이 수도권으로 이사 오는 것입니다.
문제8) 이번 설교에서 집안이 망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예시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라고 봐야할까요?
목사님) 답이 다 된 것 같지요? 그것은 넘어가겠습니다.
문제9) 목사님께서 해석하는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데, 과거를 해석하는 능력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모든 불행을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지 내게 찾아온 불행을 왜 하나님께서는 막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을 선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목사님) 세상에서는 모두 다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포춘 텔러들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점쟁이들입니다. 옛날에 중국 역사에 보면 거북이를 불에다가 구워서 줄이 가는 것을 보면서 길흉을 점치기도 하고 우주의 괘를 가지고 점을 치기도 하고 하면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나옵니다. 더 쉬운 것은 토정비결입니다. 토정비결을 연초에 한 번씩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페이지에 해당되는 사람은 수십만 명입니다. 토정비결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이 60~7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놀랍게 미래에 대해서 알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합니다. 톰 크루즈가 나와서 한 때 영화관을 휩쓸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도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래 시간 여행도 그런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래를 알 수 있게 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미래를 알게 되고 잘 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잘 못 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전자는 교만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없어지고, 후자는 실망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도 미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안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겪는 많은 일들도 미래 일과 똑같이 어떤 것은 해석이 되고 어떤 것은 해석이 안 됩니다. 어떤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해석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더 깊어지면 “그 때 잘못 생각했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도 아니었는데” 라고 깨닫습니다. 신앙이 깊지 않아서 해석을 못 하는 경우도 있는데, 신앙이 매우 깊어졌는데도 끝까지 해석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시간 낭비입니다.
해석이 끝까지 안 될 때 우리 신자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내 이성의 해석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현재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이 없이 인생을 사는 것도 위험하지만 이성은 있는데 가슴은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도 매우 위험합니다. 인간이 머리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A이고, 가슴에서 하고 싶은 것이 B일 경우는 대개 A를 부인하고 B를 따라가라고 합니다. B가 매우 비이성적인데도 결국 A를 버리고 B를 따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계속해서 올바른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관리해 나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주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창조되었는지를 아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런 고민을 다룬 것이 ‘마음지킴’ 같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해석이 안 되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남녀가 너무 사랑하게 되면 이성이 필요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슴으로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이해는 안 되어도 그것이 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가야지 진짜 사랑입니다.
문제10)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도 듣고 계신 것 같지 않고, 불만과 불평은 자연스럽게 쌓여갑니다. 이럴 때 어떤 기준과 마음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목사님) 결국은 두 가지로 질문이 요약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와 ‘하나님이 침묵하셔서 답을 해주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은 왜인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사실 두 질문이 하나의 질문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강원도 암반대기 가봤습니까? 강원도 대관령 쪽 횡계에 가면 암반대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랭지 배추의 상당량이 거기서 생산됩니다. 배추가 한창 자랄 때 암반대기를 가면 알프스를 보게 됩니다. 배추 뽑고 나면 시시하지만 배추가 한창일 때 가면 너무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6시에 올라갑니다. 주차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밤을 기다립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별이 쏟아집니다. 서울에서는 그런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조명, 매연 때문에 안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아는 것을 쉽게 만드셨겠습니까? 매우 어렵게 만드셨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으십니까? 원하실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뜻을 가르쳐주고 싶으셔서 아주 안타까워하실 정도로 가르쳐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 이유는 마음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수가 잔잔하고 바람이 전혀 없으면 이것이 거의 거울처럼 보입니다. 나무 그루 수까지 다 셀 수 있고, 나무 사이에 날아가는 새까지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체중계를 댈 때 ‘0’에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이 중립된 상태가 되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이 마이너스로 가든지 플러스로 가든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헛된 욕심과 무거운 욕망의 무게를 버려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영점은 사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점입니다. 그러면 의외로 하나님 뜻이 너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떤 욕심을 품으면 그 무게에 의해 영점이 흔들리면서 진짜 무게가 실린 것인지 내 마음의 바늘이 오른쪽으로 가게 하는 것인지 속에서 판단이 안 됩니다. 분별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하면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을 받을 대 고통 자체가 우리 마음을 흐트러놓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당하면서 이것이 평범한 일이라면 우리가 고통이라고 안 부릅니다. 평상시에 안 겪던 중압감과 괴로움을 우리 마음에 주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흔들어 버립니다. 상황을 얼마든지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는데, 마음이 이미 너무 무거워져서 발을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극복할 힘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흔히 하는 질문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아니면 왜 이런 불행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까. 저 사람들에게는 안 주시고 왜 나에게 주십니까.’ 이러한 질문들이 수없이 떠오릅니다. 인생의 무게를 더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묻고 응답이 없다고 묻는 사람에게 사실 하나님이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고 불행한 일을 만나면 거기서 자기를 깊이 성찰하면서 자기 스스로 짊어지고 있던 욕망의 무게, 헛된 사랑의 무게를 내려놓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가벼워지고 나면 놀랍게 그 상황이 해석되고 하나님의 응답이 들립니다.
적어도 목사님이 지난주에 한 사람은 변화시키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를 다 비웠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면 죽음까지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 어떤 설교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답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왜 대답이 없지 하고 소리를 질러봐야 더 대답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대답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허둥대지 말아야 합니다.
추가 기타 질문
사회자) 그러면 마지막 추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서 11번부터 16번 중에 숫자를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12번입니다.
문제12)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으로 가지고 나라는 존재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할 때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찾아갈 수 있을까요? 더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어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여쭤봅니다.
목사님) 사실은 철학의 역사는 ‘내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 자아의 문제는 자아가 있느냐는 회의론부터 시작해서 자아는 영혼에 있다는 견해까지 아주 스펙트럼이 넓게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자아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실제적이 삶과 관련시켜서 두 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참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하면 그 참된 자기로 돌아갈 것인가 묻는 것이 훨씬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자기라는 것이 대한 의식을 가질 때부터 이미 순수한 자기를 잃고 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라는 말을 포스트모더니즘은 굉장히 싫어합니다. ‘너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대듭니다. 너답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아닌 사회에서 아예 규정이 되어서 ‘너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10년 동안 직장에서 친구들하고 살아오는 동안에 너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참아주는 사람으로 주위의 지인들에게 각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못 참고 발끈할 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는 왜 화를 내면 안 되나, 너희들은 왜 매일 화를 내면서 나보고 나답지 않다는 말을 하는데 누가 나답다는 것을 규정했는가’ 나는 항거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바깥에서 나를 누구라고 규정하는 것도 참 내가 아니고, 그것을 깨뜨리고 바깥으로 튀어 나오는 나 자신도 참다운 나는 아닙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반발을 느낄 때 그것은 내 마음에 안 들고 틀렸다고 하는 것이고, 그 반발심이 커다란 새로운 자기를 그려내면서 체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는 틀렸다고는 하지만 뭐가 맞는 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말을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지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참된 자기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은 굉장히 실천적이고 정확한 일입니다. 나는 그것이 제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깨달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가 얼핏 볼 때는 자기가 다 살았어도 예수가 살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가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은 예수가 내 안에 사실 때도 나의 ‘자기’를 통해서 예수가 사신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공식이 성립하지 않으면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좁은 사람은 내가 주체가 되면 안 되고 예수가 주체가 되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시로 쓰면 틀린 말이 아니나, 신학적, 철학적,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체가 아니면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사시고 그 예수가 나를 축출하고 예수가 계시다면 나는 껍데기만 예수께 빌려드린 것이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주체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주체는 다 다릅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복종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공식입니다. 내가 있는데 내가 순수한 내가 아닙니다. 섞여 있습니다. 이 섞여 있는 나를 내가 경계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아닌 것을 다 덜어내고 나면 마지막에 나만 남습니다. 자기가 아닌 것을 다 덜어내고 나면 마지막에 자기만 남는 것은 동의할 것입니다. 덜어내는 방식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성을 설득하고 나의 의지를 감화시키고 나의 감정을 당신 사랑으로 지배하심으로 내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심은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고 예수님의 성품과 어긋나는 것을 다 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워내고 덜어낸 상태는 예수가 아니라 여전히 나는 나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은’ 자매와 내가 있다고 칩시다. 똑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과 후에도 자매는 짜장면을 좋아하고 나는 짬뽕을 좋아합니다. 예수님 너무 사랑해도 예수님 사랑했기 때문에 똑같이 한 가지 메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을 때나 은혜 못 받을 때나 똑같이 짜장면을 찾습니다. 나는 비오는 날이면 짬뽕이 먹고 싶습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 경향 등 모든 것들을 없애버려서 획일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우리 안에 깨끗이 덜어내심으로써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모두 다 덜어내고 거기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자기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는 어떻게 발견 되는가 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고 정서로 느끼고 의지를 발동해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발자국처럼 따라오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비로소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봅니다. 그것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삶의 의욕을 잃고 내가 누구인지를 쳐다보면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발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골똘하게 백지를 놓고 수학공식 말 하듯이 이야기를 하고 온갖 책들을 놓고 정리를 해봐도 뚜렷하게 들어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오늘 내가 말씀을 깨닫고 힘을 내어서 말씀대로 살아봐야 합니다. 때로는 말씀대로 못살고 주저앉을 때도 있고, 용기를 내어 살 때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자기 삶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개념이 들어옵니다. 삶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매우 중요한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의 의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욕구와 의지를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갑니다. 그것을 잘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면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지인이나 누구를 만나면 한 없이 기를 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이 다 빠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능력이 닿는 범위까지만 그런 관계를 능력에 맞춰서 조절해야 합니다. 완전히 지쳐서 자기도 번아웃 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엄마라도 아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진짜로 자기가 제대로 된 삶을 살면 엄마나 아빠나 친구나 지인이나 그 사람들을 끝까지 돌봐주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하게 해줘야 합니다. 내가 도저히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빨려 나가는 것이 느껴지면, 그 때에는 그 관계를 질질 끌려 다니면서 자기를 소진하고 사람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일단 이 관계를 잘 조절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늘의 에너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서 자기를 세워가지 않으면 번아웃 되고 관계 자체도 파괴됩니다.
사회자) 네. 이렇게 목사님께서 청년들의 절박한 질문에 귀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늦은 시간까지 청년들을 위해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