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가로 돌아온 제자
“이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1-35)
녹취자: 황인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묘사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매달리셔서 오후 세 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군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와서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찔렀더니 피가 쏟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아무 데도 안 나오고 오직 이 요한복음에만 나온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옆에는 두 명의 강도들이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안식일에 그 사람들의 시체를 달아두는 것이 옳지 않았기 때문에 시체를 다 끌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내리기 전에 그 로마에는 풍습이 있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다리를 꺾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서 금방 죽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삼 일씩 안 죽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체를 치워야 하기에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다리를 꺾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리를 꺾었을까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큰 못이 박히니 체중이 아래로 흘러내리게 되어 손이 찢어지면서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숨을 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주어 다리를 오므립니다. 그러면 폐가 펴지면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생존한다면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이 언제 숨이 끊어질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깐 다리를 뻗어 생명을 연장하지 못하도록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군인들이 와서 다리를 꺾어버립니다. 그러면 다리를 펴서 다시 우그려 폐를 펼 수가 없어 결국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와서는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보니 확실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끌어내렸는데 살아있으면 어떡할까 하는 염려가 생겨 확실히 죽이기 위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짜 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려서 이것을 원심분리기에 돌리면 피하고 다른 성분하고 구분이 됩니다. 맑은 액체가 나옵니다. 만약에 피를 돌려서 혈장만 추출하면 혈장은 붉은색이 아니라 노르스름한 액체가 나옵니다. 그것들이 속에서 분리되는 겁니다. 그것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다가 창으로 찌르니깐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넣었는데 그 당시의 창은 아주 가벼운 물풀에 나무 같은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1.8M 정도 되는 물푸레나무를 사용하고 물푸레나무에 대장간에서 만든 아주 날카로운 창을 꽂아서 썼습니다. 그래서 찌르면 잘 들어가게끔 무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운명하셨는데 그 옆으로 가서 옆구리를 찌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간 창이 장을 뚫고 허파를 지나서 심장을 건드린 것입니다. 결국 그 창은 심장이 왼쪽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피가 확 쏟아지기 위해서는 심장을 건드려서 터뜨렸어야만 많은 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물과 피를 모두 쏟으면 설령 목숨이 붙어 있을지라도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확인 사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물과 피가 모두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보았을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쓴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만약 요한 본인이 들은 것이라면 그것이 참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가 쓴 글에는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때의 문학적인 관심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글에는 자기 이름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라고 한 이 사람, 그리고 그 증언이 ‘참말이다’라고까지 낙인을 찍은 그 사람이 정체가 누구냐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요한이었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다소 이상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이 로마 병정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서 끌려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칼을 들고 말고의 귀를 베면서 예수님의 체포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검을 집어넣어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그리고 나니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엄청난 용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 56절에는 ‘모든 제자가 한 명도 남김없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첫날 설교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슬피 우는 여인의 큰 무리가 따랐지만, 거기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요한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과 창에 허리가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것까지 생생하게 보도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을 포함한 모든 제자가 예수님이 붙잡힐 때 도망갔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겪는 광경을 멀찌감치 지켜보며 계속 따라오다가 결국 도망을 갔습니다. 결국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혼자 매달리셔서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만 따라와서 예수님의 죽음에 통곡하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중요한 죄수들을 처형할 때 그 처형장 십자가 아래로 많은 여자와 온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수 있도록 허락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로마의 군인들이라면 위험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인데 누군가 와서 사람들이 데모하듯이 모일 수 있도록 했었겠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창에 허리가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흘리며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과 창으로 허리를 찌르자 붉은 피와 누런 물이 쏟아지는 광경까지 생생하게 본 사람으로서 이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의문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모든 제자하고 똑같이 요한도 도망을 갔었는데 다른 제자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요한이 어느 순간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것을 깊이 후회하고 가책을 느끼면서 이 골고다 언덕으로 혼자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십니다.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옆에 있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그다음 세 번째 하신 말씀이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이 마르다’,‘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이렇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이제 죄수들을 다 못 박혀있으니 이때는 괜찮았습니다. 높이 매달려있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으니 약간 떨어져 마리아가 있었을 것입니다. 떨어진 곳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받았던 여인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세 번째 말씀을 주십니다.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우리에겐 엄마에게 ‘어떻게 여자라 했을까?’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라 왕궁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매달려있으니 손을 움직일 수 없지만 눈은 보실 수 있기에 ‘어머니, 저기 있는 저 제자가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이 죽어 가시면서 육신의 가족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9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시에 각각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섯 시간 사이에 일곱 마디 말씀을 앞쪽에 대부분 하실 수 있었고 흩어져서 말씀하셨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세 번째 말씀을 하셨을 때는 요한이 거기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요한 혼자서 돌아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로마의 군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다 도망간 거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요한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이 요한은 열두 명의 사도 중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명을 모두 누리고 죽은 유일한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귀양을 갔을 때, 밧모(Patmos)라는 섬에서 받은 계시를 쓴 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은 신기하게 죽지를 않고 순교를 안 당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이 전승에 의하면 에베소 지방에서 목회했다고 합니다. 나중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노 사도를 부축해서 설교단에 올려놓으면 너무 기운이 없어서 겨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이 말만 해도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핍박받아서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가고 거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자연적인 순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마리아를 돌보았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결국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 간격을 재구성해보면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될 때 모두 도망가고 예수님 홀로 잡히시고 비겁한 베드로는 뒤에서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제자들이었는데 다 도망가고 베드로도 큰소리쳤는데 결국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며 따라가다 마지막에 사람들이 알아보고 ‘너 예수와 한 패지!’라고 했을 때 본인은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을 했습니다. 배신자입니다. 요한도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지만 열두 제자 중 특별히 사랑하셨던 사람이 세 명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특히 요한 가장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라기보다도 아들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은 앉아서 밥을 먹어도 이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밥을 먹을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이 사랑해주셨던 겁니다. 그러면 요한도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에 모든 기억이 있었을 텐데 그 예수님을 생각할 새도 없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시간은 흘렀습니다.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불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이 요한에게 그 두려운 마음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어딘가 혼자 두려워 떨며 숨어 있다가 두려움보다 더 큰 감정이 요한의 마음속에서 확 솟아올라서 그를 꽉 채웠던 것입니다. 무슨 감정이었을까요? 사랑의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덧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불러주셨고 어떻게 기적을 베푸시고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떡을 떼게 하시고 친밀함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서 예수님 육신의 고동 소리를 들었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다시 생각하고 보니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런 것을 느꼈어도 꾹 누르고 그냥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느 순간에 ‘하! 나는 이럴 수 없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혼자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미 가보니 예수님의 사형집행이 끝나 있었습니다. 아직 돌아가시진 않았지만, 사형집행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러 올라갔던 사람들은 너무 실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던 사람, 문둥병자를 고치던 사람,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던 그 기적의 예수가 뭔가 놀라운 일을 해서 깜짝 놀라게 해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어린 양처럼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고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있으니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기다리면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볼 것 다 봤으니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가고 있을 때, 한 젊은 청년이 그 사람들을 해치면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올라간 사람들도 내려오는데 이 한 청년만 인파를 헤치며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 예수와 한 패지!’라고 물어보면 어떡할 뻔했겠습니까.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아마 그래도 베드로처럼 도망가지 않고 ‘나 예수님 만나러 갑니다.’그럴 용기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조차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 그것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죄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제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있었던 예수의 사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쏟아져 내려오는 인파를 헤치면서 올라가니 내려오던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습니까. 모두가 내려갔는데 한 젊은이가 인파를 헤치며 올라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간 것입니다. 몇 시간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거기서 울려 퍼지는 예수님 유언의 음성을 모두 들었습니다.
이윽고 “요한아, 이제부터 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네 어머니이니라” 부탁하는 음성부터 마지막에 큰소리를 내시며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 드디어 로마 병정이 예수님의 왼쪽 옆구리를 찔러 그 창이 폐를 관통하고 심장을 터뜨려서 왈칵 쏟아지는 그 물과 피가 흐르는 광경까지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고 슬픔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버린 것이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제까지 어떻게 자기를 사랑했는지를 기억하며 모든 사람이 버리고 간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실망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내려오던 그 길을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해치며 그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으니 그때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때에 그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두렵지 않아, 왜냐하면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해 내가 죽을 텐데 그까짓 위험이 대수랴’라는 마음을 가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갔던 것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아무도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광경,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지는 그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요한, 한 사람만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에만 이 기록이 있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 피가 흐르는 광경까지 생생하게 그림처럼 여기에 묘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인들처럼 십자가 아래서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보며 함께 울고 있습니까? 아니면 멀리 두려움 속에 여러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예수를 버리고 아주 먼 곳에 가서 숨어있습니까? 아니면 잠깐 그랬으나 그것을 깊이 후회하고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갔던 요한처럼 골고다 언덕을 내려오는 인파를 헤치며 그리스도의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앞으로 가는 중입니까? 아니면 거기 십자가 아래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 중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보혈을 보고 그분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나를 위해 창에 허리가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손으로 만진 것보다 더 확실하게 내가 두 눈으로 본 것보다 더 내 마음으로 보고 그 피로 속죄함을 받는 것이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있을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자국이 되어서 일평생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예수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예수님께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모든 사랑과 돌봄을 다 받았던 요한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랑받은 베드로와 야고보도, 모든 제자들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자기들은 예수님 때문에 죽을까 두려워서 모두 도망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라고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물에 빠진 아이를 위해 헤엄 못 치는 아버지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사랑이 시킨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성이 시킨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에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충만했기 때문에 ‘너희를 위해 내가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다만 너희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버리고 간 어떤 제자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목을 십자가에 드리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무리들과 제자들과 우리들의 제물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예수를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도망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더 사랑합니까? 두렵습니까? 아니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온갖 기적을 보았는데도 두려웠고 그렇게 오랫동안 말씀을 배웠는데도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도망갔습니다. 새벽닭 울 때 베드로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풍랑이 일 때 제자들치고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이 다시 이 요한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치면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도망가던 제자들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망가서 꼭꼭 숨어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베드로처럼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종류의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만 달랐습니다. 가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래! 내가 돌아가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사랑하시고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셨는데 내가 예수를 버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겠다!’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그렇게 사랑의 용기가 생겨나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서워서 도망갔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없었고 그분의 죽음을 피해 가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도움도 받지 않으신 채 죽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그 십자가 아래에 가서 아마 ‘아! 여기가 진즉에 내가 있었어야 할 자리구나!’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 얼굴이 피로 낭자한 채 온몸을 채찍 맞으시며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슨 그렇게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거기서 그 예수의 고난을 함께 느끼며 아파하고 그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그것이 멀리 도망가서 숨어있어 안전한 것보다 훨씬 편했던 것입니다. 요한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이것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수련회를 마치며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기억하고 그분이 흘리신 보혈이 창에 허릴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신 그 모든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이었단 사실을 생각하고 그 임마누엘의 피에서 우리 모두를 깨끗이 씻어 예수를 마음에 모신 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젊은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