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김경애
직장에서 잘 나가던 어느 40대 중반의 남성이 있었습니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밤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고 잠을 자면 누가 와서 목을 누르는 것 같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무엇을 먹으면 자꾸 토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도 있는 사람이니까 좋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3일을 입원하고 진찰을 받았는데도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자기는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기독교인 의사가 있는데 그분을 찾아가보라고 했는데 그분은 정신과의사였습니다. 그 의사를 찾아가서 쭉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시군요!’ 그러더니 ‘약을 드셔야겠습니다. 제가 꼭 고쳐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처방전을 주면서 하는 말이 집에 갈 때까지 펴보지 말고 밤에 자기 전에 펴보라고 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밤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침대 앞에서 봉투를 열어보니까 진짜 처방전이 들어있었습니다. 처방전: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약 이름: 구약 약의 종류: 시편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5번씩 물 없이 천천히 씹어 드십시오.
이 사람이 처방전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세상에 살다보니까 별 이상한 의사도 다 있다고 하며 나는 아파서 죽겠는데 놀리다니. 그날 밤에 잠을 한잠도 못 잤습니다. 그날 새벽에 일어나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다시 펴보았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하든지 처방전을 해서 약을 지어야지 돈을 벌 텐데 이렇게 해준 것은 무슨 깊은 뜻이 있는가보다 생각하고 책장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성경책을 꺼내서 먼지를 털었습니다. 이 사람이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계절에 한 번씩 교회에 가는 이름만 신자였습니다. 시편 23편을 폈습니다.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읽고, 밥 먹고 열시반쯤 한 번 더 읽고, 점심 먹고 오후에 한 번 더 읽고, 저녁 먹고 한번 읽고, 마지막으로 잠자기 전에 한 번 더 읽으니까 딱 5번입니다. 5번씩 일주일을 하니까 35번을 읽었습니다. 4주를 하니까 140번입니다. 두 달이 지나니까 이것을 외워서 성경이 필요 없었습니다. 혼자서 읽었습니다.
두 달이 약간 안 되었을 때 집 앞 뜰에 나가서 조용히 외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외우는데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뭔가 마음속에서 커다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 같은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마당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일까? 자기는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올랐고, 돈도 벌었고, 가정도 행복한데 무엇인가 자기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시편23편을 읽으면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에게 목자가 있었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인생의 불행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았다는 데에 자신의 인생의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병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그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이 시편 23편을 모르는 교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일 학교 때 이 찬송을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편 23편은 다윗이 썼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윗이 언제 썼을까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저와 많은 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젊었을 때 쓴 시가 아니라 왕이 되고 난 후 노년에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쓴 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편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절이 첫 번째 토막입니다. 이것은 제목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인지를 2절, 3절, 4절, 5절에서 차례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6절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이렇게 세 토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토막을 5번의 설교에 다 해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크게 하나님의 존함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 두 번째는 ‘여호와’, 마지막 세 번째는 ‘주’라고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존함이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각각 하나님의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우선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원래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로 ‘엘로 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학설이 구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유력하게 크게 보는 학설은 이것이 ‘두려워 떨다’라는 동사에서 왔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고 그것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울’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봅니다. ‘울’이라는 단어는 도토리나무를 가리킵니다. 왜 도토리나무냐 하면 도토리나무가 서있는데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이것은 쓰러지지 않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하다는 뜻으로 아마 거기서 ‘우리’ ‘엘’ 복수인 ‘엘로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하나님이라는 이 이름은 모든 것들 위에 가장 강하신 분, 그리고 권능 있는 분,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통치하시는 분 이런 의미를 가지고 쓰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막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강조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쓸 때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그 하늘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를 묘사하려고 할 때 그때 적합한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엘로 힘’ 이라는 단어는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 가장 강하신 분, 세계 전체를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졌을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원래는 ‘야웨’라는 이름인데 그 여호와 혹은 ‘야웨’라는 성함은 훨씬 나중에 쓰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계시된 이름이었고 이 ‘야웨’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선민이 만들어지고 나서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 성함은 언약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쓰이는 성함입니다. 우리들이 태명도 쓰고 별명도 쓰고 여러 이름을 쓰지만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딱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 하나님의 존함은 하나님의 호적에 기록된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너무 고유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모두 엎드려서 그 이름을 부른 것을 회개해야 할 정도로 거룩히 여기던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입니다. ‘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해 권한을 가지고 계신 주인이시라는 것을 강조할 때 ‘주’, ‘주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단어중 이 다윗은 ‘여호와’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시편 23편을 열자마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이 분이 막연히 온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능력 있는 신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이 시인과 언약관계에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장 고난으로 가득한 생애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생의 고비를 넘겼는데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이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와 언약을 맺으시고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던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여호와를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된 아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도록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자기 확인을 이 여호와라는 단어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여호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사물처럼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어떤 도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느낀 것입니다. 창문이 잘 시공되어 있는 거실에서 밖을 쳐다봅니다. 마당에 빨래가 널렸습니다. 그런데 빨래가 막 날립니다.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빨래를 보면서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빨래는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빨래를 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사람들이 잘못 말하거나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서 한번 밤하늘을 쳐다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의 개수가 6,000개에서 8,000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불빛이 많고 공해가 꽉 차서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백산맥 강원도 횡계 암반대기 같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거기서 별이 쏟아질 것처럼 보입니다. 수천 개의 별들이 보이고 물처럼 흐르는 은하수가 보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중학교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물었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러면 정말 우주는 얼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너 어디에 사니?’ ‘목동에 삽니다.’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줄게. 너희 목동 24평 아파트가 있는데 화장실에 요만한 전구가 켜 있어. 그런데 거기에 날파리 8마리가 날아다녀. 이 우주가 목동 대단지라면 너희 화장실에 켜있는 전구가 태양이고 날파리 8마리가 돌고 있는데 그중의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이고 너는 그 등에 붙어있는 세균과 같은 존재야!’
우주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길이가 사람마다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많이 보는 사람은 빛이 960억년을 달려가야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고, 보통 과학자들은 150억년 내지 160억년을 달려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우리 지구가 있는 이 지구는 태양이라는 항성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세 번째 위성입니다. 거기에 지구가 있습니다. 목성은 지구의 천배이고 태양은 목성의 천배라니 태양은 지구의 백만 배입니다. 이러한 작은 우리 지구 같은 이런 별이 아니라 태양처럼 늘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러한 항성들만 우리 은하계에 이천억 개가 있다고 봅니다. 지구 같은 것들을 모두 합하며 칼세이건이라는 과학자에 의하면 약 4조개의 별이 우리 은하계에 있는데 이런 은하계가 우주 안에 2,000억 개쯤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 드넓은 우주에 비하면 이 지구라는 것은 먼지만도 못하고 거기에서 그린란드 상어도 400년씩이나 살고 거북이도 몇 백 년씩 사는데 인간은 기껏해야 80세나 90세쯤 살고 100세를 살면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연한입니다.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 존재들이 하나님이 있다, 없다 말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지구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분이 웃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첫발자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며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고 두려워서 떠는 것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분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자기의 미천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두 번째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높고 위대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무시무시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만을 깨닫고 그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공포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목자는 그야말로 짐승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자기는 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안에는 이중의 유비가 들어 있습니다. 유비라는 것은 비유해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중의 유비가 무엇이냐 하면 다윗도 한때는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치던 아주 충직한 목자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짐승이 와서 물어 가면 쫓아가서 양을 다시 구해올 정도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정말 양을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일생을 살아보니까 자기가 양떼들을 인도하는 그 방식과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중의 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양의 관계가 하나의 유비이고,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자기가 양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유비가 성립되어서 이중의 유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양떼를 기르면서 목동으로 경험했던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보니까 시편 23편 같은 아름다운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돼지를 치는 사람도 목자이고, 소를 치는 사람도 목자이고, 말을 치는 사람도 목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양의 목자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짐승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좁게는 이스라엘을 넓게는 모든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양이 어떤 짐승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짐승을 창조하실 때 제각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짐승들에게 주셨습니다. 사자 같은 경우는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아주 큰 이빨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동물의 제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몸집이 큰 소들도 쓰러뜨려서 죽일 수 있는 강한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고슴도치는 그런 이빨이 없지만 몸을 웅크리면 모든 털이 가시가 되어서 누구도 근처에 가서 만질 수 없게 자기를 보호하고 사자도 그것을 깨물어서 먹을 수 없는 그렇게 자기를 보호합니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스컹크는 진짜 지독한 방귀를 뀝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어렵지만 미국에 가면 저녁때에 동네에 슬슬 돌아다닙니다. 그녀석이 방귀를 한번 뀌고 나면 동네 전체가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심지어는 동물을 질식시켜서 기절시키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도망갑니다. 문어를 보시면 적이 쳐들어오면 먹물을 쏘아서 연막작전을 피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 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빠른 다리도 아니고 이빨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그냥 씹기에 적합합니다. 소도 큰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누군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그런 뿔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만두처럼 말려서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이라고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처음부터 양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가까이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진 짐승입니다. 그랬더니 어느 교인이 그럽니다. ‘목사님 산양 있습니다.’ 산양은 있습니다. 산양 배꼽이 사향입니다. 엄청 비싸고 귀중한 약재입니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야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종위기의 동물입니다.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실 때 중요한 메시지는 양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돌봄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그늘 아래 살아가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가면 수족관이 있는데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지만 정말 거의 5톤, 6톤 정도 될 만한 고래를 유리관 속에 가두고 조그만 인간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으로는 당나귀 한 마리만도 못하지만 머리를 쓸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주어서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그리고 달나라를 여행하고, 무선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며 서로 통신하고, 의학기술이 발달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공지능을 개발해 냅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가 볼 때에는 정말 대단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엄청난 존재라고 믿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뭔가를 연구해서 있는 사물들의 이치를 발견해내는데 있어서 그렇게 탁월할 뿐입니다.
문제는 방황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고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물질이 풍요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고, 보고, 느끼고 하는 일에 온 정신이 팔려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보면 불현듯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진실을 회피한 채로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영장이면서 어마어마한 과학기술을 개발해 내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서 12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비참할 정도로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은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매순간마다 인도해 오셨는데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자기를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짐승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 방법이 동물에 따라 다릅니다. 카우보이 영화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들을 다 우리에서 끌고 나와서 들판에 풀어 놉니다. 짐승들이 오니까 카우보이들이 개들을 데리고 말을 몹니다. 겁을 주면서 채찍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리고 흩어진 말들을 모읍니다. 그러면 말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겁을 먹고 막 한쪽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목동들이 포위망을 좁히면서 우리로 말들을 몰아넣고 문을 잠그면 목동의 하루가 끝납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했던 한 여행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목동이 양을 천 마리쯤 끌고 이쪽 풀밭에서 저쪽 풀밭으로 넘어가는데 가운데 도로가 있습니다. 양들이 이렇게 건너가다가 목동이 소변이 마려우니까 어디론가 뛰어가서 볼일을 봤습니다. 이 양떼들이 도로 사이에 걸쳐서 가만히 서있습니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깜빡거려도 양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동이 와서 ‘가자’하고 자기 음성을 들려주니까 양들이 그 목동을 따라서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을 이끄는 방법입니다. 양을 몰아가지 않고 양을 앞에서 목자가 인도하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소리를 알아서 서로 소통하면서 그러면서 양은 목자를 따르며 그렇게 목동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목동이 양떼들을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양떼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에 대해 깊이 신뢰하고 그 목자를 따라가고 그리고 목자는 양을 사랑하면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자기를 말이나 소 같은 짐승처럼 생각해서 뒤에서 채찍으로 때리며 휘몰아가지 않고 언제나 앞서서 인도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으로 그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 인격적으로 가르치라고 하는데 자녀를 인격적으로 양육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자녀와 대화가 되어야지만 인격적인 교육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에도 그런 하나님을 본받으면서 자녀에 대해서 오래 참으면서 그런 인격적인 소통이 가능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격적인 교육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중학교 학생들은 엄마가 두 문장으로 물어 볼 때에 ‘응’, ‘아니’ 라고만 말해주어도 고마워하라고 합니다. 상대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 하라고 합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격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가 교인들을 비인격적으로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젊을 때를 기억해 보면 강사들이 와서 폭언을 하고 협박을 하고 사람들을 줄 세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비인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십니다. 기독교신앙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자유를 주고 그리고 스스로 마음이 설득되어서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목양입니다.
저는 28년 전에 지하실에서 7명의 교인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젊은 날에 개척했는데 교회를 하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지만 그중의 하나가 싫다는 사람을 집사 안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보니까 다음 싫다는 사람을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주보에 발표를 하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이 집사는 교회를 안 나옵니다. 전도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집사님 요새 교회 왜 안 나오세요?’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이면 집사가 되지 말아야 하고 집사가 되었으면 교회에 왜 안 나오느냐는 전화를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그것을 안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집사 임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심사를 합니다. 교회를 착실히 다녔는지 헌금은 하는지 행실이 올바른지 10월말쯤 벽보를 부칩니다. 장로님과 의논해서 벽보를 부칩니다. ‘아래 사람 200명 정도 되는데 교회는 당신들을 서리집사로 임명할 용의가 있으니 당신들도 원하면 한 달 교육을 받으시오. 그리고 합격하면 집사를 주겠소.’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신청 안할 것 같지만 다 합니다.
제 입장은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데 왜 교회가 그것을 강요합니까? 신청을 합니다. 신청하면 교육을 시킵니다. 와서 한 2년 신청을 하지 않고 보니까 교회에서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5년을 다니고도 집사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슬슬 신청하기 시작합니다. 한 달 동안에 교육을 빡세게 시킵니다. 우리교회의 서리집사가 되려면 당회 면접을 해야 합니다. 당회 장로님들이 부목사님과 조를 짜서 한 방에 한 사람씩 들여보내서 신앙상담을 해서 한해 임명하는 인원이 많을 때는 400명이 되고 적을 때는 180명 되는데 다 심사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느냐? 십일조는 하느냐? 헌금은 하느냐? 부부사이는 괜찮으냐?’ 합격점수가 나오면 그 다음 주에 다음과 같이 서리집사가 되었다고 발표하고 본인에게 통보합니다.
모든 교회가 그것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수는 있지만 마부가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동물학대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도살장 옆에 살았는데 그 소장수들이 소를 데리고 산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소를 나무에 목을 걸어놓고 고삐를 당기면서 양동이로 물을 붓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왜? 양동이 하나면 몇 근이 나가겠습니까? 다 고기값으로 칩니다. 그렇게 해서 도살장으로 끌고 갑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요만큼을 하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요만큼을 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지 마음에도 없는데 누가 강요를 해서 하거나 체면 때문에 이만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은 모래 위에 쌓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인격적입니까?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언제 시간 나면 밥이나 먹자.’ 이 사람 마음에는 인사치레 하는 것이지 마음이 없습니다. 전화 오면 핑계를 자꾸 댑니다. ‘내가 언제 좀 도와줄게.’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빈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마음에 없을 때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뭔가 마음이 있으니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그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누가 야단을 치는 사람 없어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이렇게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서 아까 그 사람처럼 펑펑 울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럴 수 있는 신앙으로써 신앙은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 그렇게 무엇이든지 스스로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하게끔 그렇게 어린이도 교육되어야 하고 어른도 그렇게 교육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이신지 우리가 굳이 그릇된 길을 가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갈 때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해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 여쭈어보겠습니다. 주일을 한번 빼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①큰일 난다. ②괜찮다. 1번 손들어 보십시오. 왜 주체성이 없습니까? 손을 들어보십시오. 주일 빼먹으면 큰일 난다. 10명 정도 드셨습니다. 안 들면 안 되고 둘 중의 하나는 들어야 합니다. 2번 괜찮다. 다시 합니다. 1번 큰일 난다. 늘어나서 20명 정도 됩니다. 괜찮다. 손들어 보십시오. 그랬으면 좋겠지만 ‘거기 박 집사님 댁입니까?’ ‘네’ ‘박 집사님이 지난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으셔서 전화를 했는데요.’ ‘월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습니다. 주일을 빼먹었는데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지난주에 단풍놀이를 갔다 왔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이것이 답입니까?
신앙이 정말 별로 없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직장을 다니면서 피곤하니까 주일날 늦잠을 잤습니다. 따르릉 시계가 울렸는데 10시입니다. 끄고 조금만 더 쉬어야지 하고 눈을 감았는데 눈을 떠보니까 10시 50분입니다. 화장도 못하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교회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따르릉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누구?’ ‘고등학교 동창 아무개야. 우리 등산가기로 했는데 너 뭐하고 있어? 우리 다 여기서 기다리는데?’ ‘나 교회에 가야해.’ ‘아니 무슨 교회야? 교회야 저녁에 저녁예배 가면 되잖아? 하나님이 교회에 아침에만 오시고 저녁에는 안 오시냐?’ ‘그래도 못가.’ ‘끊는다. 우리 기다린다. 빨리 와.’ 순간 고민이 생겼습니다. 등산을 갈 것인가? 교회를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교회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긴 설교, 우울한 분위기 그것보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이 봄에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등산을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습니다.
양심을 달랬습니다. 내려오면서 오후예배 드리면 되지. 하고 가방에 조그만 성경 하나를 챙기고 등산복으로 입고 가서 친구들과 예를 들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교회를 안가고 여기에 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큼 까지 올라갔는데 친구들이 여기에서 밥도 먹고 쉬었다 가자고 하며 도시락을 꺼냈는데 너무 목이 말라서 ‘얘들아 나 물 좀 줘 하니까’ ‘물은 없고 음료수밖에 없어.’ ‘그것이라도 줘.’ 가방에서 꺼내는데 맥주 캔이 수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를 다녀서 술을 못 먹어.’ 그랬더니 친구들이 요즘 맥주가 술이냐 음료수냐 다수결로 음료수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한 모금을 먹고 보니까 옛날에 먹던 맛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먹고 한 깡통 두 깡통 먹다보니 이 자매가 9깡통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 놀다가 내려올 때쯤에는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들과 떠들며 내려오다가 돌계단이 수십 계단 이어있었는데 바나나 껍질을 밞았더니 공중으로 치솟다가 계단으로 수없이 굴렀습니다. 눈을 떠보니까 응급실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다음 주일날 온몸에 붕대를 감고 교회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일을 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기를 사람들이 바라지만 사실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떼어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①일주일 이내에 망한다. ②괜찮다. 어떤 것이 답입니까? 사람들은 용기를 얻습니다. ‘주일을 빼먹어도 별것 아니구나. 십일조는 몇 달 해먹어도 별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서 주일을 지켜도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헌금을 드려도 강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드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보다고 계속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손을 보시는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질서를 잡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도 요즘 때리는 부모도 별로 없지만 때리거나 욕설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애들한테 염장을 지르거나 시비를 걸면 이러면 애들 교육이 안 됩니다. 부모가 가장 화가 났을 때에는 아이에게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침묵하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벌입니다. 그렇게 주일도 안 지키고 헌금도 떼어먹으면 그 사람이 그날 밤에 기도가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결국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강요되거나 혹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등에 떠밀리듯이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내가 비록 훌륭한 신앙생활을 못해도 내가 하는 것만큼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이 다윗이 항상 훌륭하게 살았던 것만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주 성장과정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많은 상처를 딛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기까지는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만드는 수많은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강원도에서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유치원까지 강원도에서 다니고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는 큰아들이니까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서울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할머니하고 살았습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갑니다. 그러면 그때는 중학교 시험이 있어서 오래 있지도 못합니다. 한 열흘정도 있다가 올라오는데 여름에 가면 강원도에 홍수가 납니다. 홍수가 나서 둑에 올라가 보면 큰 개울로 홍수가 난 흔적이 떠내려 옵니다. 그때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짐승들이 떠내려 올 때 제일 안타깝습니다. 저는 다 보았습니다. 소도 떠내려 오고, 돼지도 떠내려 오고, 닭도 떠내려 오고, 고양이도 떠내려 오고, 개도 떠내려 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때는 온 국토가 다 민둥산이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면 곧바로 토사에 쓸리면서 한 번에 물이 불어버리는 것입니다. 땅이 흡수를 못하니까 다 떠내려 옵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소가 헤엄을 잘 칩니다. 개는 원래 잘 칩니다. 돼지는 어떻습니까? 잘 뜹니다. 무서워서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떠내려갑니다. 닭은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리는 물에서 사니까 상관없습니다. 고양이도 헤엄을 잘 칩니다.
그런데 양은 어떻습니까? 양은 물에 대한 무지무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는 물은 못 마십니다. 그러니까 양은 물에 빠지면 털에 물이 스며들어서 물이 그를 잡아당겨서 가라앉습니다. 하나님을 그것을 다 아시고 양떼들의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부모도 사실은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부모는 많이 있지만 그 자기 자식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목숨을 줄 수 있는데 자식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헤아리는 것은 부모로서도 쉽지 않습니다. 부모는 그런 자식을 보면서 마음에 큰 짐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다윗을 인도하실 때 그렇게 상처가 많고 사연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 다윗의 모든 약점을 알고 그렇게 그의 기질에 맞게끔 인도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다윗은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형들에게도 이후에 결혼한 자신의 아내들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돌아보니까 너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나는 당신이 기르는 한 마리의 어린 양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똑같이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각기 다르게 인도하십니다.
제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를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일류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성적이 좋아서 서울에서 최고의 대학에 붙었든지 아버지가 돈이 많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그때 중등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선생님들이 다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숙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가 끝났는데 저 뒤에서 어떤 중등부 학부형하고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습니까?’ ‘전도사님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애들이 공부를 안 한다고 엄마들이 끌탕을 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요?’ ‘그런데 전도사님 왜?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애들이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을까요?’ 자기는 태어나서 본 모든 시험을 한 번에 붙지 않은 시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운전면허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떨어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답니다. 고3때도 자기는 하루에 8시간씩 자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답니다. 8시간씩 자고도 공부를 해서 서울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서울대 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애들이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을까요?’ 자기는 과외도 하지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냐? 왜 못해요? 책에 다 나와 있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고 모르는 것 물어보면 선생님이 대답해 주시는데 어떻게 공부를 못해요?’ 저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 학교 때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가 가는데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달 있다가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 힘든 일이 있어?’ ‘전도사님 제가 요즘에 살맛이 안 납니다.’ ‘왜?’ 공부만 너무 많이 하니까 몸이 약해지더랍니다. 그때는 테니스가 유행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테니스에 등록을 하고 하는데 공을 주면서 가르쳐 주는데 일주일쯤 지나서 선생님이 신경질을 내면서 자기한테 뭐라고 하더랍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 내가 여기서 7년을 가르쳤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는데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자기는 꼭 맞을 것 같은데 빗나간다는 것입니다. 애들도 시험을 칠 때 맞을 것 같아서 쓰는데 정답이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점에 강하고 약한지를 모두 알고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양 백 마리를 키우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꼴을 먹이고 우리로 데려와서 세어보니까 한 마리가 없습니다. 그때는 당연히 어스름한 때였습니다. 그러면 양 한 마리 값이 얼마이겠습니까? 제가 20여 년 전에 호주에 가서 하도 궁금해서 양 한 마리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그때 돈으로 200불이니까 16만 원 정도면 산다고 했습니다. 쌉니다. 그런데 그때야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99마리가 들어왔으니까 99%들어온 것이니까 그냥 집에 가서 쉬어도 되는데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밤길을 걷다가 발이라도 삐거나 맹수라도 만나면 목동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에 얼마? 고기 한 근에 얼마일까를 생각하면 찾아 나설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양의 눈빛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바라보면서 서로 교감하던 눈빛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을 기르시는 분들은 너무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을 길거리에 버리고 가는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인간성이 그러면 안 됩니다. 주인밖에 모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강아지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 양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목동이 희생을 무릅쓰고 가서 결국 그 양을 구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지 그 양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왜 너만 바보같이 떨어져서 그러고 있느냐고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어깨에 메고 왔다고 했으니 이것이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옵니다. 양이 힘들지 말라고 두 어깨에 멘 것입니다. 한쪽 어깨에 메면 사냥감을 잡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너무 기쁜 것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동네사람들에게 ‘여기 좀 봐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지!’ ‘잠시 후에 내려와. 내가 잔치를 벌일 거야!’ ‘왜?’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 내 마음이 너무 기뻐!’ 설마 그 양을 바비큐해서 그날 저녁에 파티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무슨 뜻이냐 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이 목동은 동네 주민을 위해서 소를 잡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찬양)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매네!
어딘 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의 인생길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살았습니다. 돈을 하나님 대신 섬기고 권력을 하나님 대신 모시면서 자기 건강을 하나님보다 숭배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을 멀리 떠나는 여러분들을 내버려두셨습니다. 왜?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인격적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무릎 꿇기 싫다는 사람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차서 주저앉게끔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절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머리끄덩이를 끌어서 땅바닥에 처박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어느 한순간 너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다. 나의 이 고통스러운 인생이 치유할 수 없는 깊은 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년남자처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성공했고, 돈도 벌었고, 집도 얻었고, 행복한 가정도 얻었는데 자신을 행복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렇게 힘겨운 인생을 살고 가위에 눌렸는데 마지막에 알고 보니까 결국 자신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격적인 신앙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시작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는 믿었다고 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과 내가 죄인인 것,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것,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이것이 머릿속에는 있는데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A라는 일을 하고 마음으로는 B를 느끼고 있으면 결국은 A를 하는 것이 아니라 B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슴을 주님으로 가득 채웁니다. 내가 인생이 곤고하던 날에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이 어떻게 내 인생의 고비에서 나를 살려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오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오늘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주님께 기도하고 싶고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기 때문에 이 집회에 나왔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걸어온 길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말씀하십니다. 아니 뭐 하러 그러십니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한발로 걷어차면 그까짓 문은 부서져 버릴 텐데 왜 그렇게 안하십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그 그림을 보면 문의 특징이 있습니다.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어느 그림을 보더라도 손잡이가 없습니다. 안에서만 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위기가 오면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면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떤 사람은 자녀의 문제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더 복이 있는 사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늘 교회에 나왔는데 하나님이 들려주는 설교가 나 한사람을 세워놓고 하시는 말씀인 것처럼 들리게 하셔서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손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달으면서 이렇게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만큼 신앙생활을 못해도 괜찮으니까 요만큼을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요런 신앙생활이 갑자기 이만해집니다. 그런데 억지로 하면 이만큼을 해도 이것은 썩은 사과입니다. 속은 다 썩었습니다. 형식만 있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누구도 걸어본 적이 없는 험한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살아온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제껏 산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길 잃은 양처럼 끊임없이 당신을 떠난 이 비천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그 말을 눈물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모두 깨달으면서 다윗이 정말 자기가 일생에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러면서 이 세상의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어디서도 나의 모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한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비탈에 미끄러져서 쓰러져 있는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내가 예수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오셔서 나를 발견하시고 나를 살려주시고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라고 나 하나 구원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셔서 나를 업고 오시면서 이 양을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천국에서 잔치를 하실 만큼 기뻐하시는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시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기억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무엇 하나를 하더라고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면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섬기면서 사는 이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