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회복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이 솔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1절에서 고백을 하고 2절부터 왜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인지를 설명합니다. 2절에서는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시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물질적인 공급이며 또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 동안에 끊임없이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뭐라고 나오냐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했는데 소생이라는 말은 이 책이 원래 쓰여 졌던 히브리어로 ‘살아나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시인의 영혼이 언젠가는 죽은 때 같은 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문제죠 그렇죠? 영혼 영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등등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기 때문에 간략하게 영혼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고 이 물건이 몇 가지 부속품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려면 그것은 만드는 공장에 가서 합체시키는 부속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어요. 근데 거기서 ‘흙’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파르’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사실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티끌 그 먼지와 티끌을 모아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육체를 만드시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제일 먼저 그렇게 티끌로 빚어져서 인간의 몸이 된 것이죠. 그러면 하고 많은 삼라만상 중 하나님이 왜 인간을 티끌을 사용해서 빚으셨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아파르’ ‘티끌’이라고 하는 말은 가치 없는 것의 대명사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티끌로 먼지로 빚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의 육체가 무엇으로부터 빚어졌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티끌로 사람을 지으신 거죠. 이것이 육체를 빚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영혼이 창조된 것입니다. 생기가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에 하나님 중 일부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행동은 창조의 행동이에요. 그래서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영혼이 창조되어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함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바로 만났던 그 영혼과 육체가 헤어지는 거예요. 영혼이 우리의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의 육체는 그야말로 땅 속에서 불과 몇 년 안에 다 분해가 되어 먼지 티끌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그 영혼도 역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혼을 어떤 사물처럼 그렇게 추측해서 볼 수는 없어요. 영혼 비슷한 것이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에는 없기 때문에 사실 그 영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리고 성경은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쓴 책이 아니라 영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는 거죠. 영이라는 말 혼이라는 말 이렇게 쓰이는데 사실은 이것은 모두 다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거죠. 근데 이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어요. 냄새 맡고 뭔가를 사물을 보고 기억을 하고 또 그것을 감촉을 느끼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하등한 기능이 그것들을 담당하는 거예요. 영혼의 고등한 제일 고등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동물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지능이 아무리 뛰어난 동물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신 것이죠.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왜 영혼을 주셨는지 이제 이해하실 수 있겠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과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 거죠. 그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 중 하나님을 가장 흡사하게 닮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 영혼에 대한 공부를 우리가 별로 안 해요. 그것이 커다란 맹점이에요. 이 시간에 아주 길게 영혼에 대해서 설교하면 이제 이 3절을 다 못하고 3분의 1하고 끝내야 돼요.
그래서 이제 정리를 해드리자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어요. 두 개의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두 개는 거울처럼 서로 마주보는 맞장이에요. 그래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사람이 다스리게끔 하도록 인간을 만드신 거죠. 그래서 천상 세계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 직접 다스리시고 이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다스리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으니 인간의 지위는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거예요. 그래서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지위가 인간의 지위에요. 결국 천사들은 나중에 모두 사라져요. 폐기 처분된단 말이죠. 근데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거하게 되는데 결국 인간의 영혼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신해서 만약에 이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 아름답게 가꾸게 하려면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주셔야 돼요. 그래서 인간에게 그런 놀라운 능력을 주셨어요. 과학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학 자체가 우리의 갈 방향을 알려주지는 못해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고 문화를 통해 역사와 그리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통해서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죠. 인간이 왜 존엄한가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데 인간이 존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를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는 이제 인간의 영혼이 죽어요. 여기서 영혼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의 몸이 숨을 못 쉬고 그냥 눈을 감고 죽는 거를 뜻하는 게 아니에요. 영혼은 불멸하는 사물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없어지거나 죽을 수가 없어요. 멸절되지 않는 것이 영혼의 비결이에요. 영혼이 영혼인 근거 그 이유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무시무종하신 분이에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분이고 또 이런 사물은 유시유정해요. 시작도 있고 끝도 있어요. 결국은 없어지는 것들이에요.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죠. 근데 우리의 영혼은 유시무종해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어요. 영혼이 그런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 거죠.
그래서 이것들은 이 영혼이 죽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진짜 ‘없어진다든지 부서져 버린다.’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영혼이 제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힘이 없고 생기가 없고 영혼을 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할을 못하는 것이 영혼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 영혼이 죽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거죠. 여러분들 중에서 예수 안 믿고도 살 수 있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진짜 신자라면 하나님 없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거죠. 무엇이 그렇게 살 수 없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였고 다행히 여러분들 속에는 그것이 의식 속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도저히 인생의 고민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살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은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은 왜 괴로움을 안 느끼나 느끼죠. 아무도 안 느끼는 사람 없어요. 밤중에 사람들이 환락에 빠지는 이유도 결국은 괴롭기 때문에 그러는 거죠. 결국은 어떤 사람이 사창가에 문을 두드릴 때 그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거예요. 그 마음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서 하나님에게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사창가에 문을 두드리면서 하룻밤의 쾌락으로 그 허무함을 달래보려고 하는 거라 얘기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영혼에 대해서 이해하실 수 있죠.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요. 그것은 이제 영혼이 태어나는 거죠. 영혼이 맨 처음에 창조될 때 하나님이 영혼을 살아있게 하셨다는 점에서 영혼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니까 이것이 ‘거듭남 혹은 두 번째로 태어난다.’라는 의미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신자가 되고 영혼이 살아났어요. 여러분 살아나고 나면 인간의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깨어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돼요. 이게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신 분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이런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을 누리게 되는 거죠. 이걸 우리말로 은혜를 많이 받았다. 혹은 성령 충만하다. 은혜를 받아서 기쁨의 생활을 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죠. 다른 곳에서는 그런 기쁨이 올 수가 없어요. 물론 주식을 샀는데 주식이 올랐다든지 아니면 땅을 샀는데 엄청나게 집값이 올라서 부자가 됐다든지 뭐 아들이 인류 대학에 합격을 했다든지 뭐 딸이 의사 면허를 받았다든지 기쁘겠죠. 근데 그거는 영혼의 기쁨까지는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그건 뭐냐면 일반 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이 있어요. 일반 섭리의 복은 사물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거죠.
예를 들어서 ‘어 나는 이상하게 나이 팔십이 됐는데도 어디 아무데도 아픈 데도 없고 건강하다.’ 이거는 일반 섭리의 복이에요. ‘애들이 잘 길러주지도 못했는데 모두 애들이 다 잘 산다.’ 일반 섭리의 복이에요. ‘다른 동업자들은 전부 다 어려움을 겪는데 우리 남편이 하는 회사는 곧 잘 된다.’ 일반 섭리의 복이에요. 영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에요. 그런 것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영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거죠. 영혼의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건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아니에요. 샘솟듯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생물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이 솟아나는 영적인 샘물은 성령의 은혜는 우리에게 놀라운 생명력을 주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생명을 경험할 때 느끼는 거죠. 그래서 많은 고난을 굉장히 커다란 고난을 겪는데도 이 기도와 말씀으로 은혜가 충만해지면서 그것들을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생겨나는 거죠. 이 영혼을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은혜를 주셔서 이걸 살려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자로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면 우리의 모든 삶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명절 끝 날에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뭐냐면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 영적인 은혜가 충만하게 넘칠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요. 그래서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주어지고 도저히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의 이 능력이 생겨나는 거예요. 힘이. 그리고 교육을 별로 못 받았어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놀라운 이해력이 생기면서 주님의 마음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바로 영혼의 에너지가 되는 거지. 그 힘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인간으로 창조하시고 또 나를 나로 만드신 그 뜻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거죠.
근데 이제 신자의 영혼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제 우리 신자의 영혼이 한 번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면 그게 거기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건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이 생명이 점점 더 증대돼요. 그래서 아주 충만하게 되는 거죠. 그런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한 상태가 바로 그렇게 충만해지는 상태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계속 더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불순종하고 그다음에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부터 멀어지고 말씀에서부터 멀어지고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경건해서 멀어지면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하고 절교할 정도로 괴로운 삶을 사는 거예요. 예수 잘못 믿고 살면 예수 안 믿은 사람보다 절대 행복하지 않아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이 시인이 왜 하나님을 목자라고 모시게 되었냐 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당신이’ 이렇게 나와요 그게 ‘당신이 내 영혼을 살려내셨고 내시고’ 이런 뜻이에요. ‘확 살아나게 하시고’ 이런 뜻이에요. 그 얘기는 거꾸로 추적해 보면 다윗과 같이 신실하게 믿음 생활했던 사람도 자신의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거죠. 그랬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자기를 자기 영혼을 살려내신 것을 경험하죠. 늘 살아있으면 살리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겠어요. 죽은 자 것처럼 되어 봐야지만 살아나는 것을 경험할 것 아니에요. 그 다과 다윗도 역시 죄인의 자식이었으니까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도 사실은 뭐 그렇게 완벽한 생애는 아니었잖아요. 이런저런 죄들을 많이 지었겠죠. 그중에서 정말 그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죄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고 이 일로 7만 명이 역병으로 죽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간음과 살인의 죄를 병합해서 지은 끔찍한 일을 한 거죠. 근데 왜 그랬을까요? 다윗의 영혼이 죽어 있었던 거예요. 거의 죽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름답게 살던 사람이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 “너희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라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나아가노라”고 했던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그런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던 거죠. 이렇게 죽어있었던 거죠. 영혼이. 그걸 가리켜서 유식한 말로 영적 영혼의 침체라고 말하는 거예요. 침체.
이런 침체에 빠질 때에는 우리들이 오늘 기도해 주신 장로님이 기도 속에서 말한 것처럼 표리부동한 삶을 살게 돼요. 이름은 그리스도인인데 말도 안 되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왜?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인데 영혼이 죽어 있으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위해서 성결하게 진실하게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어느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어요. 개구리 두 마리를 갖다가 납작한 비이커에다가 물을 넣고 그리고 밑에 램프에 불을 붙였어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게끔 만들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개구리 한 마리를 놓았어요. 그랬더니 개구리가 눈을 껌뻑껌뻑하고 그 비커 속에 있었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푹 삶아졌어요. 만약에 개구리를 논에서 잡아다가 미지근한 물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했더라면 개구리가 사우나 하듯이 이렇게 쑥 들어갔겠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죄가 들어오는 거예요. 천천히. 그래서 결국은 이 영혼의 아름다운 기능을 모두 파괴해요. 그래서 그렇게 믿음이 좋던 사람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권력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신실하던 사람이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눈이 뒤집어져서 교회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영혼이 죽었을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푸른 풀밭으로 자기를 인도하셔서 모든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들을 공급해 주신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정도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이 영혼을 살려내시는 거는 그런 정도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는 영혼의 터치를 통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이 눈앞에 보이는 인생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는 거 그게 신앙생활의 비밀인 거예요.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지지난주에 설교를 했어요.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부흥회가 성에 안 차는 거 아시죠. 저는 세 시간은 설교를 해야 돼요. 지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두 번째 긴 설교를 했는데 2시간 16분 했어요. 그런 예가 자주 있지는 않아요. 보통 칠십 분 정도면 끝나는데 그날 2시간 16분을 설교했어요. 근데 어느 청년이 편지를 보냈어요. 목사님 지난주일 설교로 최소한 한 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 주일의 설교를 듣기 전 몇 달 동안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청년입니다. 근데 그 말씀을 듣고 제가 깊이 주님을 만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거는 내가 돈을 주거나 선물을 주거나 혹은 밥을 같이 먹은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신 기쁨이에요. 절망의 터널에서 자살의 카드를 만지던 청년이 그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고 자기가 ‘이제 어떻게 하든지 살아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누가 뭘 사준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영혼을 하나님이 소생 시키신다.’라고 말하는 거죠.
제가 여기 왜 왔을까요? 저도 바빠요. 그리고 부흥회 부탁 들어오면 간다고 대답하면 교회보다는 안 간다고 하는 교회가 훨씬 더 많아요. 온 이유는 하나예요. 제가 교회 구경을 못 했겠어요? 지나가면서 이 교회 수없이 봤어요. 어렴풋한 기억력으로는 어쨌든 많이 봤어요. 근데 여러분들 여기 온 이유는 하나예요. 제가 여러분 이름을 알겠어요, 아니면 여러분이 어디 사는지를 알겠어요? 이유는 하나예요. 여러분들의 영혼이 소생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온 거예요. 그 일이 안 일어나면 나는 매우 못하고 가는 것이고 그 일이 일어나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소중한 복을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니 그것을 가리켜서 ‘스피처 블레싱’ 영적인 복이에요.
사물의 복은 그냥 자기가 쓰면 없어지고 자식한테 물려주면 또 자식 때에 없어져요. 그리고 좋은 학교, 좋은 직업 이런 것도 살아있을 동안에나 은퇴하기 전까지나 쓸모 있는 것이지 죽고 나고 은퇴하고 나면 무슨 직업을 가졌었든지 그건 별로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물어보지도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아요. 그게 영혼의 축복이에요. 시인이 그걸 경험한 거예요. 그걸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먹여주시고 입혀주신 것 그것보다도 더 크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의 목자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예요. 목동 시절에 혹은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 다닐 때에는 다윗에게 먹고 입는 문제가 큰 숙제였겠지만은 임금이 된 다음에야 그 까지 이게 무슨 숙제였겠어요. 온 천하의 모든 나라의 재산이 자기의 것인 시절인데 뭐가 아쉬운 게 있겠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왕의 자리에 올라서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흐느끼는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면 왜 사람들이 영혼의 침체에 빠지는 것일까요? 시편이 이야기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예요. 첫째는 이유를 모르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이에요. 그때의 이 시인도 그런 때에는 낙심에 빠지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어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무지 때문이에요. 무지. 시편 73편 같은 데 보면 이제 이 다윗은 아니에요. 그런데 시인이 이제 고민을 하게 돼요. 무슨 고민을 하냐 하면은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야단치시는 거예요. ‘너는 왜 이렇게밖에 못 했니? 너 이렇게 살면 되겠니? 니 마음은 왜 이러니?’ 하면서 야단을 치시는데 그게 너무 곤욕스러워요. 근데 어느 날 ‘그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그리고 눈을 떠서 바깥을 보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거하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왜? 악인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요. 그리고 이상하게 불행한 일도 안 일어나요. 저렇게 살다가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을 거다. 근데 그렇지가 않고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아요. 그리고 꽃상여에 쌓여서 화려한 장지로 떠나는 거죠. 시인은 더 낙심을 해요.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악인이 저렇게 평안하게 살고 그리고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고 화려한 꽃가마에 쌓여서 장지로 갈까. 그럼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저 놈보다는 죄를 안 짓고 살았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야단치시기만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해결을 못해요. 아무리 많이 생각을 해도. 그러다가 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불현듯 캄캄한 밤하늘 같은 자신의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번갯불 같은 깨달음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있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번영을 누리고 떵떵거리고 하나님 없이 평안하게 살던 인간들이 결국은 죽을 것이며 죽으며 그 인간은 죽으며 또 죽은 그 인간의 죽음 뒤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 인생의 허무가 허무한 인생이라는 그 그릇이 죽음과 함께 박살이 나고 깨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의 행복이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가서까지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지막에 고백하는 게 뭔지 아세요?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 영혼의 복을 깨닫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이 부흥회를 하시고 나서 지금 하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예전과는 다른 결심을 하셔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예요. 무슨 결심이냐 하면 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목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구나. 그걸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매일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배워가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아가는 거예요.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소생된 영혼이 아니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영혼이 살아있는 가장 확실한 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 사랑의 감격으로 고난을 이기고 슬픔을 이기고 역경을 이기면서 믿음을 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내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나의 육신의 영달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살아있는 영혼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사람이 죽잖아요. 그러면 벌써 하루만 지나면 냄새 나기 시작해요. 3일이면 구대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시체 썩은 물이 온몸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냉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이 신자의 영혼이라도 죽은 상태에 있잖아요. 시체 썩은 물이 줄줄 흘리면서 그 악취가 그의 인격과 삶을 가득 채워서 오만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넌더리를 내게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게 그게 바로 영혼이 죽은 자의 상태가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소생된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 그러면 하나님이 그 다음 또 영혼이 침체에 빠지는 이유가 뭐냐? 그게 이제 가장 큰 거예요. 그게 죄 때문이에요. 죄는 영혼을 죽이고 그리고 죄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살려요.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아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예외 없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직분을 받을 수도 있고 그 교회에서 아주 중직을 맡을 수도 있어요. 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모두 완전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정확하게 분별해내지도 못하기도 할 것이고 또는 이렇게 이렇게 하다 보니까 교회도 사람을 사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가 무얼 하든지 간에 영혼은 죽어야 했어요. 결국은 자기의 영혼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살 수 없는 거예요. 죄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거죠. 죄가 영혼을 죽일 때 어떤 방식으로 죽이는지 아세요. 죄에 대해 너그럽고 그리고 죄를 짓고 죄와 친숙해지고 나면 우리의 기도가 고사돼요. 그래서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여요. 그래서 죄는 기도를 못하게 하고 기도는 죄를 못 짓게 해요.
근데 사람들이 요즘에 신앙생활 하는 걸 보면 기도를 거의 안 해요. 그 기도를 하는 시간이 신문 보는 시간보다도 짧아요. 그건 뭐 핸드폰 보는 시간하고는 비교될 수가 없고. 그렇게 살아가니까 죄를 이길 힘이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뭐냐면 형식주의, 타협주의, 적당주의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서 겉모습은 번드르르하게 교회에 다니지만 속은 사실은 세상 사람의 속과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근데 그럴 때 사람들은 생각하는 거야. ‘내가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근데 여러분 죄가 확실히 죄가 크기가 있어요. 크기가. 그러니까 성경에는 큰 죄가 있고 대죄가 있고 소죄가 있어요. 작은 죄가. 예를 들자면 살인을 했다. 간음을 했다. 뭐 이런 것들은 대죄겠죠. 부모에게 폭행을 했다. 이런 것들은 대죄겠죠. 그런데 작은 죄들이 있어요. 뭐 어떤 거겠어요. 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지만은 작은 죄들이 너무 많죠. 욕심, 이기심, 시기, 질투, 원망, 집요한 미움 뭐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허무하다고 느끼는 거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죄죠. 그런 것들이 작은 죄지만 그런 것들은 더 위험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천천히 스며들어오니까. 기도를 한 번에 죽여 버리는 게 아니라 큰 죄는 덜컥하고 지으면 즉시 기도가 안 돼요. 그 작은 죄는 천천히 천천히 기도가 안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느 개울가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 군인이 작업을 하는데 상사로 보이는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병사 세 명에게 자루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지시를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흩어져서 돌멩이를 50kg씩 다 모은다. 실시.” 그랬더니 이 군인들이 가가지고 돌멩이를 담는 거예요. 한 사람은 무식하게 50kg짜리 하나를 찾았어요. 자루에 넣어가지고 왔어요. 두 번째 사람은 30kg, 20kg 세 번째 사람은 머리를 쓴 거예요. 이걸 짊어지고 어디를 어디까지 또 가라 그럴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50kg, 20kg, 30kg짜리를 짊어지면 등이 아파서 어떻게 지나 그리고 공깃돌을 천 개를 모아가지고 50kg를 만들었어요. 다 가지고 갔더니 상관이 그 다음에 내리는 명령이 황당해요. 모든 돌맹이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개 가져온 사람은 또렷해요. 한 개를 가져왔으니까 이걸 기억을 못할 리가 없어요. 두 개 가져온 사람도 약간 헷갈렸지만 제자리에 갖다 놨습니다. 천 개 가지고 온 사람은 한 개도 못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설명이에요. 근데 지금은 그런 풍경이 거의 없어졌어요.
근데 저희 교회가 2002년도에 안양으로 왔는데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교회를 이제 이 똥통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큰 똥통을. 근데 이게 원래 일 년 돼도 1년에 한 번씩만 치우면 되는데 교인이 하도 많이 와가지고 6개월에 한 번씩 퍼내야 되요. 그럼 이제 그걸 신청을 하면 이제 그 구청에서 차를 보내줘요. 업체가 차가 낮에는 안 해요. 냄새가 나니까 항상 새벽에 와요. 아침에 6시쯤 어스름할 때 그게 올 때는 항상 그 차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와요. 베토벤이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그 똥차에다가 그 노래 틀라고 자기가 작곡한 게 아닌데. 그리고 그거를 이렇게 빨아들여가 그 광경 자체가 보기가 싫을 정도죠. 리터를 계산해가지고 이제 돈이 부과가 돼요. 근데 말입니다. 그것을 그중에 한 국자를 퍼가지고 여러 번 걸러내고 걸러내서 아주 진귀한 명품 유리병에다가 담았어요. 위에다 스프레이를 달았어요. 그리고 공중에다가 확 뿌려요. 그러면은 그 출렁거리는 그 찌꺼기들이 있는 똥은 더러워 보이고 공중에 노랗게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거는 안 더러워 보일지 모르는데 냄새는 똑같아요. 동일 본질이에요. 본질이 똥물이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큰 죄와 작은 죄가 있을 수 있지만 본질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큰 죄나 적은 죄나 모두 미워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아주 작은 죄에도 가슴 아파하고 이게 하나님의 그 영혼의 생명이 거의 죽은 것처럼 된 사람은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추호의 가책 하나 안 받는 거예요. 지금 푸틴 보세요. 사람이 할 짓이에요. 뭐 민가 있는데다가 거기다 왜 미사일을 쓰고 로켓탄을 쏴가지고 아파트를 부서뜨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어린 아이들을 학살해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말로가 안 좋아요. 제가 예언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 살아계셔요 그런 것을 봐도 티끌만큼도 마음이 요동을 안 하는 거예요. 그게 영혼이 죽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완전히 죽어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게 그렇게 이 그게 죄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태까지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영혼이 살지 않으면 진짜 사람답게 못 살구나.’ 정확하게 보셨어요. 영혼이 살아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없어요. 절대로 살 수 없어요. 그걸 다윗 자신이 보여주잖아요. 다윗보다 하나님을 덜 사랑한 사람 중에 이렇게 큰 죄를 한꺼번에 지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우리들 중에도 이 두 가지 죄를 한꺼번에 지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마.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저지르는 사람이 있겠느냐고요. 영혼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는지 와는 상관이 없이 무한정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무서운 거를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온 마음을 쏟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아이들 우리 마음대로 못해요. 그런데 최고의 보험이 뭔지 아세요. 유산 물려주는 거 아니에요. 삼대를 가는 유산이 없다고 그랬어요. 그거 줘봐야 소용없어요. 그리고 그거 내버려 두고 죽으면 자식들 간에 쌈박질이 나요. 가장 최고의 보험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인류 대학 그리고 무슨 최고의 학벌 그다음에 무슨 뭐 최고의 회사에 취직하고 그다음에 무슨 의사가 되고 뭐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보험 아니에요. 진짜 보험은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자식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죄에도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려고 하는 그 믿음을 엄마 아빠가 의지하지 않고 자기 독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게 하는 거 그게 최고의 보험이에요.
그렇게 영혼이 살아나는 걸로는 결국은 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처리해야 돼요. 처리하는 건 딱 하나의 길밖에 없어요. 회개하는 거죠. 그래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그 회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여기 제 지갑이 있어요. 이 지갑을 내 방에 왔던 어느 형제가 훔쳐갔어요. 훔쳐갈 때에도 세 단계를 거치는 거예요. ‘저게 지갑이구나. 아 저기 돈과 카드가 들었구나. 아 저거를 내가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풍족할까?’ 그 다음 ‘에이 가져가자.’ 가져가는 거예요. 그 지식에서 정서로 그리고 의지로 실행이 되면서 그리고 집으로 가져가는 거예요. 그리고 밤중에 자기 전에 보니까 꺼내보니까 가방에서 꺼내보니까 목사님 지갑이 있어요. 회개할 때도 똑같이 세 단계로 차례대로 오는 거예요. ‘목사님 지갑이네.’ 지식이죠.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정서예요. ‘아 돌려드려야지.’ 그리고 도로 가져와서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그게 회개에요.
요즘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회개가 없어요. 그리고 무엇인가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나 받으려고 하는 그러니까 참된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거죠. 초대 교부들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그 교부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게 막 그 중압감을 느끼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데 그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를 깨닫는 게 그게 죄밖에 없는 거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엄이나 가리라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 그랬어요. 근데 일시적으로 끊어지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죄에요. 제 신자가 죄를 짓잖아요. 일시적으로 이 영혼의 생명의 기능이 딱 멈춰요.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런 끔찍한 죄를 짓겠어요. 이게 이 영적인 생명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것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불신자보다 더 악랄해질 수도 있고 더 탐욕적이 될 수도 있고 더 말도 되지 않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거죠. 그래요. 진실한 사람의 특징은 늘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던 거죠. 하루에 두 번 하루에 두 가지만 할 수 있으면 살아있는 영혼으로 살 수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니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데 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는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에요. 물어봅시다. 최근에 여러분 앉은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끝났는데도 성경책이 흠뻑 젖을 정도로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때가 언제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마른 눈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늘 눈물에 젖은 성도들의 눈에만 천국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비록 몸은 세상에 살아도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성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이 세상에서 두 번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가슴 아파하며 회개할 때 그때 그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거예요. 근데요. 처음 믿은 사람은 회개에 눈물을 많이 흘려요. 오래된 사람들이 눈물을 안 흘려요. 그것이 문제예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소생된 영혼 살아난 영혼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시인이 죽어 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이렇게 살리시니까 그 끔찍한 죄를 짓고도 결국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존 오엔이라고 하는 17세기에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는 이 다윗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다. 근데 놀라운 건 구약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인물 중에서는 다윗같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인물은 아무도 없어요. 근데 역설적으로 가장 많이 죄를 큰 죄를 저지른 다윗이 하나님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반복할게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는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이 안 주신 게 뭐였어요.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다음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꾸짖으신 게 뭐였어요. 내가 너에게 뭐를 안 줬냐? 그 이외에 네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모든 걸 주셨어요. 그런데 다윗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영혼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탐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욕심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탐욕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끔찍한 죄를 지었어요.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침상을 띄우며 온 몸이 다 이렇게 뼈만 남은 몸이 될 때까지 회개를 해요. 그리고 냉과리와 같이 돼요.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안 지었더라면 오히려 깨달을 수 없었을 하나님의 깊은 성품을 깨달으면서 신앙의 더 깊은 차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지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구약에서 최고의 시인인 동시에 최고의 신학자인 동시에 최고의 철학자였어요.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어요.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을 만약에 알프스 산맥이라고 한다면 다윗은 에베레스트 봉이에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봉이에요. 그런 인물이었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죄 가운데 있다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사는 것을 다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을 보내셔서 여러분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일 수도 있어요. 돌이키세요. 죄와 짝하여 살고 죄에 너그러우면서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처럼 죄를 짓고 진실하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대신 세상을 사랑하며 예수 믿는 사람의 너울을 쓰고 살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하세요. 자신의 진실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세요. 그리고 나의 죽어 있는 영혼을 보세요. 그리고 나의 영혼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요.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살린다고 말했어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생명을 줄 수 있으니 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살아난 영혼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이제 더 바쁘네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아주 매우 중요한 일을 지금 다윗에게 하신 것이죠. 이게 죽은 자와 같았던 다윗의 영혼을 다시 소생시키신 것 다시 살려내신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셨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있죠. 하나님이 안 하시는 일이 목적 없이 일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삽질을 할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셔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시면 거기에 당신의 뜻이 있고 확고한 계획이 있어요. 그러면 이 시인의 죽은 영혼을 이렇게 살려내실 때에는 무슨 계획이 있으셨을까?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말해요. 그리고 의의 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근데 이것도 성경에서 사실은 의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이 의로운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설명해요. 그러니까 사람의 삶에 이 의가 적용되면 그것은 뭐 이렇게 손에 붙들고 있는 어떤 물건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실존의 방식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을 세상에 존재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 그게 의롭다 이 뜻이에요. 그러면 ‘의롭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거는 ‘불의하다’는 말에 반대예요. 말장난 같을지 모르지만 의의 반대말은 불의에요. 그 불의는 무엇일까요? 불의는 또 역으로 의롭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자꾸 돌려치기가 되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의가 무엇인가라는 걸 규명해야지만 불의도 규명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성경에서 의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상태예요. 인간의 마음과 인격, 삶이 하나님의 뜻에 다 합치되어 있는 상태 그걸 의라고 부르는 거죠..
여러분 은행에 가서 도장으로 적금을 하신 분들은 도장을 가져가야 돈을 찾을 수 있죠. 그러면 은행 직원이 그것을 이 비닐 종이 같은데다가 찍어요. 그리고 그 도장을 통장에다 대고 이렇게 돌려봐요. 딱 맞으면 아 이 사람이 틀림이 없구나. 그리고 신분증을 확인하고 돈을 줘요. 마찬가지로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 인격, 삶과 행동이 비닐 위에 찍힌 도장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진본을 밑에 넣고 이렇게 비춰보는 거예요. 그때 그게 딱 맞을 때 그것이 의로운 상태예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없죠. 그래서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라고 한 거예요. 근데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의인이 하나도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쓰여 진 게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도 쓰여 진 거예요. 그 인간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해야 되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거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후회를 한다면 생각이 모자라시는 분이잖아요. 근데 인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후회를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의 뜻을 바꾸실 수 없는 분이지만 또 성경에는 하나님이 뜻을 바꾸시는 장면도 나와요 그 인간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거예요. 그렇게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완전한 사람은 성경이 아주 많아요. 그리고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이기도 한 거죠. 그러면 그게 바로 의로운 상태예요. 그러니까 그러면 그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자기가 거부해야죠. 그것이 생각으로만 머물지 말고 마음에로만 머물지 말고 실제적으로 삶으로 구현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걸 의로운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근데 불행하게도 여태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던 시대가 너무나 많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거죠.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요.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공정하게 평가를 하고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지 말아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직장을 다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하고 정직하고 희생적이고 이래야 되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똑같이 살아가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우리 나이로 34살 때의 교수가 됐어요. 그때는 굉장히 빠른 나이에 교수가 된 거죠. 그리고 첫 번째 있는 학교에서 두 번째 학교로 옮겼더니 그 학교에서 우리의 내가 사는 주거 환경을 보면서 교수님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습니까. 학교에서 이렇게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면서 그래서 10년 동안에 갚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더 좋은 집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서 옮겼어요. 그래가지고 그 가난하게 살다가 방배동에 있는 42평 빌라로 이사를 갔어요. 뭐 아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저쪽에서 이쪽까지 몇 걸음이나 되는지 발자국을 세보는 거예요. 교회에 가가지고 친구들한테 우리 집에 화장실이 두 개라고 막 자랑을 하고 근데 아니 그렇게 하고 이제 살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느 날 아랫집에 있는 교인 그분도 이제 아주 독실한 교인인데 오셔서 우리 집사람한테 사모님 제가 기도를 하는데 내 집을 우리 목사님한테 팔라고 하나님이 그러시네요. 그래서 내가 아니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나한테도 하셔야지 왜 그 사람한테만 하시느냐 살 사람은 난데. 굳이 사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 뭐 살 돈이 있겠어요.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그 전세를 뽑고 해가지고 그냥 뭐 어떻게 샀어요. 샀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 당시에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어요. 저게 세무사 법무사 사무실에 갔는데 세금이 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그래도 이제 그랬더니 세무사 세무소 그 세금이 얼마라고 그래요. 그래서 뭐가 이렇게 비싸요. 근데 그 직원이 재밌어요. “너무 비싸죠. 그러면 절반만 내세요.” 아니 무슨 나라의 세금이 또 그렇게 여직원 한 사람이 그렇게 절반을 깎아줄 수 있나 그랬더니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저기요 선생님 그 집 한 사람하고 만나서 이 계약서 말고 그 가짜 계약서를 하나 써오세요.”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문제가 됐던 다운 계약서예요. 근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이것을 집값을 한 30% 낮추면 세금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들고 와서 여보 그렇게 얘기를 하던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거 말이 되냐. 집 파는 사람은 집사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목사하고 둘이 앉아서 그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 그 그림을 한번 생각해 봐라. 로마서 12장에 보면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이라고 했는데 그거를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그리고 세금을 아들 저금통까지 깨뜨려서 그렇게 해가지고 전부 다 합쳐서 세금을 냈어요. 그리고 끝났어요. 그거는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걸로 끝났어요.
그 몇 년 후에 더 큰 일이 일어났어요. 그게 뭐냐면 방배동에서 교회를 개척했거든요. 교회가 지하실 교회에서 두 번을 문 닫고 간 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다행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람들이 매일 매일 몰려왔어요. 그래가지고 한 3년 만에 한 250명 쯤 됐어요. 그 지하실이 좁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거야. 동네 골목에 막 여기저기 가게를 얻어가지고 주일학교를 하고 그랬는데 설교가 되게 길었어요. 그때 보통 백 분을 설교했어요. 주일날. 설교만. 사람들이 졸도를 하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다가 이 산소가 안 통해가지고 그 젊은 여자들이. 그런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교회당을 하나 어떤 사람이 건축업자가 교회당 하나를 넘겨받아가지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그러다가 IMF가 터졌어요. 있는 빌딩도 팔리지 않는 상황에 질 수가 없으니까 그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은 교회에 세를 놓겠다고 그러는 거 얼싸구나 옳다구나 하고 월세로 들어갔죠. 거기서 한 3년 반 만에 250명이 1000명이 됐어요. 도저히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자기 이제 부시고 교회 부시고 빌딩 질 테니까 나가달라고 그러는 거 어디 갈 데가 없어가지고 막 했는데 안양까지 가서 난 진짜 안양에서 교수 생활을 했지만 난 안양에 오기 싫었거든요.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안양으로 오게 된 거예요. 거기 땅 없고 뭐 집도 없고 땅도 없고 그 장년 교인이 천 명이니까 애들까지 해서 1300명은 되는데 그게 그렇게 들어갈 만한 장소가 쉽지 않잖아요. 돈이 있었냐고요? 무슨 돈이 있어요. 돈 천오백만원 통장에 있었는데. 그러고 가서 한번 알아봐라 그랬더니 없어요. 가격에 맞는 곳은 장소 위치가 나쁘고 위치가 좋은 곳은 돈이 안 맞고 결국은 못하고 있는데 복덕방에 여기 괜찮은 게 하나 나왔었는데 그냥 도로 집어넣은 물건이 있는데 아마 안 팔 겁니다. 아 그래도 좀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보니까 뭐 한 천 평 정도 되는 공장 건물이에요.
그래서 이제 집사들이 거기를 갔어요. 교회 중직들이 가서 사장님 누구요. 저 집을 내놓으셨다고 해서. 안 팔아요. 내놨었는데 도로 집어넣고 “난 안 팝니다.” “아 그래도 우리한테 좀 파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통사정을 하니까 “아 내가 내 땅 안 팔겠다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가시오.” “아 그래도 한 번만 생각해 보세요.”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가 “내가 땅을 주면 당신 거기다 뭐 할 거요.” 그래서 “교회를 지려고 그럽니다.” “아 그래요. 그럼 일주일만 좀 생각해 봅시다.” 돌아와서 우리는 감동을 받으며 야 이게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그분이 뭔가 뜻이 있나 보다. 그리고 열렬히 기도했죠. 그랬더니 일주일 후에 갔더니 “가져가시오” 그분이 스물 몇 살에 장로가 되신 분인데요. 한경직 목사님이 그 공장 건물에 와서 60년대에 그 몇 년 한 2년 동안을 성경 공부를 인도하실 정도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 분이었어요. 근데 이분이 거기다가 가발 공장부터 시작해가지고 한국 근 현대화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지막에 그 전자부품 공장까지 하시다가 은퇴를 하면서 여기 교회를 지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고 있던 차에 교회를 짓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감동을 시키신 거예요. 그러고 그럼 교회가 사시오 그렇게 된 거죠.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36억이라고 그러더라고요. 36억. 근데 뭐 교회에 천오백만원밖에 돈이 없는데 36억을 어디서 구해요. 근데도 이상하게 젊어서 그랬는지 뭐 하나님이 뜻하시면 못할 일이 없나 못할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열렬히 기도했더니 어느 교인이 계약금을 3억 원을 빌려줬어요. 그래서 이제 계약금을 가지고 하려고 그러는데 아니 이게 이 할아버지가 뜻밖에 말씀을 하시는 거죠. 30억을 현금으로 주고 30억으로 계약서를 쓰고 30억은 현금으로 주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거야. 그래가지고 저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이거를 어떻게 하나 그리고 이제 교회 사회생활을 많이 한 집사님하고 장로님들하고 물어보니까 아 요즘 기업에서도 다 그렇게 해요. 그냥 목사님 그 정도 오면 뭐 별로 세무서에서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하십시오. 그래 그래서 마지막으로 공인회계사를 불렀어요. 교인을 이렇게 해도 되겠냐 그랬더니 “목사님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장부를 두 개 쓰셔야 됩니다. 진짜 장부 가짜 장부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그건 안 되지. 어떻게 그 교회를 사는 사람이 장부를 두 개를 써서 하나는 가짜 장부를 만들고 하나는 진짜 장부를 만들면 가짜 장부를 쓸 때 하나님이 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꽤 기뻐하시겠느냐?” 그 날로 딱 접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재직들 다 모아놓고 “난 안 한다.” 그랬어요. “내가 이사를 안 가고 길거리로 쫓겨나면 쫓겨나지 난 그렇게는 안 한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한다냐 그랬더니 집사가 와서 “세금이 3억이나 된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 이야기도 타당한 게 계속 날이 다르게 땅값이 올라가고 있을 때였어요. 가지고 있으면 그냥 돈을 버는 건데 교회에 팔고 나면 그걸로 대출한 거 갚고 그 다음에 뭐 빚진 거 갚고 이렇게 하면 그걸 청산할 때에 자기 돈을 오히려 1~2억을 보태야지 청산이 된대요. 그러면서 내가 교회에 넘겨주는 것까지 할 수는 있는데 내가 이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 돈을 여기다가 넣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도 또 일리가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워낙 싸게 사셨으니까 이게 팔 때에 세금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줬어요. 그때의 3억은 지금 우리 교회 30억보다도 더 컸어요. 그걸 몇 년 동안 못 갚았어요. 한 오 년 동안 못 갚았어요. 그 돈을 너무 돈이 없었어요. 너무너무 고통을 받았어요. 세상에. 근데 그때 아주 큰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배 시간에 설교 시간에 성도들이 모여서 구역 예배 드릴 때 주님 뜻대로 살자 의롭게 살자 사회의 본이 되자 쉬워요. 입술에다 칠만 바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바깥에 나가서 진짜 세파와 부딪혔을 때에 진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피를 요구하는 거요. 근데 그게 진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렇게는 하지 말자. 그리고 만약에 이 땅을 못 사게 된다면 그러면 오늘의 역사를 기록에 남겨놔서 후손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가짜 계약서를 쓰자 그러는데 교회가 반대해서 우리는 그 땅을 못 샀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좋은 곳을 주실 것이다. 고백을 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의의 길로 걸어가는 성도의 삶이에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요. 왜냐하면 사람의 목에다 칼을 대고 ‘너 믿을래 안 믿을래’ 할 때가 온다. 그러면은 그때도 물론 순교해야 되겠지만 그건 진짜 보통 믿음이 아닐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부정직해서 세금을 떼어먹는다든지 사람을 속인다든지 그리고 은근슬쩍 이익을 취한다든지 이러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렇지 않아요. 몇 달 전에 교회에서 결재 서류가 하나 올라왔어요. 이게 뭐냐 그랬더니 교회가 프로그램을 사야 되겠습니다. 무슨 프로그램?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사야지. 당연히. 저는 저자잖아요. 작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한 이백만 권 책을 펴냈어요. 나는 저작권에 대해서 너무 잘 알거든요. 당연히 저작료 내고 써야지. 그런데 금액이 적어요. 이거 왜 이러냐? 그러니까 목사님 어떻게 모두 하겠습니까? 그냥 일부는 하고 일부는 써야죠. 그게 말이 되냐? 내가 한 15년 전에 다 정리해가지고 그 당시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다 정품으로 샀거든요. 근데 그 사이에 또 이제 교역자들이 바뀌고 직원들이 바뀌고 하니까 그 프로그램이 어도비 프로그램 같은 거는 하나에 250만원 350만 원씩 가요. 근데 그거 없으면 편집을 못 해요. 근데 그것도 하나 깔면 하나밖에 못 써요. 두 대 세 대 네 대 깔려면 그게 세 개 사면 750만원 850만 원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말이 되냐 이거야 강대에서는 의롭게 살라고 외치고 교인들은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열면 툭툭 두드리면 그게 전부 다 다 복사 프로그램 해적판으로 쓰는 거 그거를 쓰고 거기다가 기도문을 쓰고 설교문을 쓰고 거기다 주일학교 공과를 쳐서 그리고 출력을 해가지고 그거를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놓느냐” 말이 되냐 이거예요. 몇 천만 원이 들어가도 좋으니까 교회 안에는 그런 거 하나도 있으면 안 된다. 교회 안에만이 아니라 교육자들 컴퓨터 안에도 그런 거 있으면 안 된다. 그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의 일원으로서 근무하는 거기 때문에 교역자나 직원은 개인일 수가 없어요. 그 컴퓨터에는 그런 거 있으면 안 된다. 능력이 안 되면 그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그리고 교회에 한 컴퓨터만 놓고 거기 와서 쓰고 능력이 되면 돈 다 내고 그걸 사서 써야지 그럼 불신자하고 똑같은 거지 그렇게 남이 애써서 발명해 놓은 글을 저작료를 안 주고 그렇게 해적판으로 베껴서 쓴단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어떻게 내가 그랬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살 수 있냐 내가 그랬어요. 내가 몰라 내가 알았으면 내가 벌써 진즉에 다 휘집어 놨죠. 일 년에 삼천만원 사천만원이 나가도 좋으니까 이거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다 해서 올려라. 그랬더니 무려 천오백만원인가 육백만원이 결제가 올라왔어요. 또 새로운 프로그램 나오면 그것도 새로 업그레이드 비용 내야 되고 그다음에 새로운 것은 또 새로운 돈을 주고 사야 돼. 그게 얼마가 되든지 간에 신앙의 가치와는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의로운 삶은 쉬워요.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의롭고 올바르게 살려고 할 때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가 정확하게 해야죠. 당연하지 않겠어요. 세금 정확하게 내고 모든 면에 있어서 윤리적인 수준이 세상에 있는 데보다는 나아야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것은 그냥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의로운 길을 희생하면서 걸어가게끔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것이다.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죠. 1800년대에 미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서 그 멕시코를 침공할 계획을 세워요. 그리고 실제로 때려요. 그게 소위 얘기하는 녹색 계획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미국에 온 교회가 들고 일어났어요.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일 수 없다. 그때 나온 찬송가가 뭔지 아세요.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루어지다 외치며 사나니
그 찬송이 그때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두운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거예요. 캄캄한 밤바다에 풍랑까지 일어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데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이고 폭풍우까지 불어요. 그런데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비치는 등대의 불빛이 그거 하나만 있으면 수많은 배들이 풍랑을 만나도 안전하게 항구에 대피하는 거예요. 반드시 항구 바다 전체를 수천 개의 조명탄을 쏴서 환하게 대낮처럼 밝혀야만 생명을 얻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시대가 모두 다 그러니까 라고 얘기해요. 뭐 언제 안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도대체 어느 시대가 진리가 대중적이 되고 하나님 사랑하는 신앙이 보편적이었던 때가 언제였어요. 한번 물어보십시다. 언제 예수 잘 안 믿는 사람 삐뚜루 신앙생활 하는 사람 기도 안 하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이 눈에 확 띌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말씀만 사랑하던 시대가 언제가 있었어요. 어두움은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기회에요. 왜? 낮에는 별 볼 일이 없어요. 밤이 돼야 등대의 불빛도 보이고 밤이 돼야 하늘에 별도 보이는 거예요. 세상이 어두운 것이 어떻게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왜냐하면 그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길을 찾지 못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자신의 인격으로 삶으로 온 존재로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어떻게 사는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때로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어떤 삶이 의미 있고 의로운 삶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가치예요. 아멘. 왜 이렇게 힘이 없으세요. 아멘 ‘그래서 서 있는 그곳에서 단단하게 탁 서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이 자체가 선교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십시오. 나의 영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침체에 빠졌는지 부흥을 누리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안 살아도 나는 그렇게 살 것이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나는 싫어하는 사람으로 마지막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분투하면서 살다가 교회에 돌아와서 서러운 눈물을 쏟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더 놀라운 생명으로 채우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나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