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련의 골짜기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게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녹취자: 허혜숙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라고 고백한 시인이 왜 하나님과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를 2절부터 차례대로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일용할 모든 것을 주시고 자기를 쉬게 해 주셨기 때문에, 3절에서는 자기의 영혼을 회복시키셔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4절에서는 더 깊은 내용을 다룹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셨기 때문에 라고 쓰여 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의 깊이의 순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는 자기가 무엇인가 아쉬움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고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시인처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만나는 많은 환경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 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좀 더 깊어지면 이런 세상살이에 필요한 일반적인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침체된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죽은 자와 같이 침체되었던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어루만져주셔서 다시 살려내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회복된 영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살도옥 부름 받은 소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신앙이 깊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4절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지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의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당시에 양떼들을 기르는 목동들의 경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든지 목초지가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양떼들을 데리고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떼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자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먹습니다. 풀을 먹으니까 그것이 무슨 영양가가 있겠습니까? 많이 먹습니다. 먹으니까 며칠만 지나면 풀들이 다 뜯어 먹힙니다. 그러면 목자는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인도해 갑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에 때로는 편안한 길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다음 목초지고 가기 위해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골짜기는 우리나라처럼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풀이 가득한 그런 골짜기가 아닙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를 지나면서 모래먼지만 날리는 그런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중동 지방에 영상 같은 것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골짜기를 지나는데 골짜기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맹수들도 도사리고 있다가 사냥감을 노리는 곳이고 도적들도 거기에서 골짜기에 사람들이 지날 때에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거기에서 물건을 강탈하거나 짐승들을 빼앗아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비유인데 이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의 회복과 소생을 경험한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사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런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그런 때가 인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중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이러한 두려운 때를 지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날 기독교의 위대한 목회자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을 하는 것을 아내가 다 듣고는 마지막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다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다윗도 역시 그런 골짜기를 지났기 때문에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어려서 부모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결혼한 아내에게도 멸시를 당하면서 그렇게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겨운 시절을 보냈겠습니까? 그저 양이나 치는 그 소년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서 큰 은혜와 능력을 많이 주셨지만 고난도 그만큼 컸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면서 자기를 죽이겠다고 자객들을 풀고 광야에까지 추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점에 자객들이 와서 자기를 죽일지도 몰라서 그는 남의 나라로 피신하기도 했고 거기까지 잡으러 와서 이제 수염에 침을 발라가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해서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피를 말리는 삶이었습니다. 언제 자기가 임금이 되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셨으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야 되는데 끊임없이 도망 다니고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통곡과 눈물로 날을 세우면서 그렇게 인생의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왕이 되고 나서는 꽃길만 걸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길이 어디 있습니까? 왕이 되고 났는데 나라를 넓게 해 주시고 백성을 평안하게 해 주셨지만 그러나 그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두 가지 대 죄를 짓게 됩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의 지축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죽음으로 떠나갔고 자신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집안에서 칼이 떠나지 않은 비극을 겪습니다. 자기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 강간을 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우두머리가 자기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겠다고 평생 아버지의 오른팔처럼 그렇게 일하던 장수들을 포섭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몰래 무기를 만들어서 저장을 했다가 어느 날 구데타를 일으킵니다. 얼마나 그 일이 급작스럽게 일어나는지 다윗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재를 무릅쓰고 감람산 쪽으로 도망을 가고 결국은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그 모든 반란이 토벌되고 결국은 반역의 무리들이 정리가 되었다는 소식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 왔습니다. 그 때에 문루에 올라가며 그는 슬피 울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압살롬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 그러니 한 번 그 정도까지만 생각을 해 보더라도 얼마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이고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난 다음에 떨어졌던 영적인 심연은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몸부림을 쳤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인생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을 수없이 합니다. 그것을 인생 말년에 한 번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살아온 날이 산 날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다시 그 날을 산다고 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자신은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회고하고 보니까 자기 인생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려서는 가난으로 그랬지만 또 성장하고 나니까 인간관계 때문에 원한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받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존대해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시고 자기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소명을 주셨는데 이 사울 때문에 자기의 소명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정 사이에 끼어서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결코 사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당하고 끊임없이 도망치는 인생이 계속 되었으니 그것도 힘들었겠지만 그렇게 인자한 아버지를 기대했던 사울에게서 살기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향해 창을 던지고 칼을 겨누는 그 끔직한 세월을 보낼 때에 다윗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것을 모두 통틀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다. 이 때에는 우리가 두 가지 큰 어려움을 만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어려움입니다. 사업이 위기에 닥친다든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다든가 사랑하는 가족 중 누군가가 불시에 이 세상을 떠난다든가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은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의 깊음입니다. 시인이 여호와여 깊은데서 내가 부르짖나이다. 그럴 때 그것은 환경적인 깊음입니다. 환경적인 깊은데서 다가오는 것이 영혼의 깊음입니다. 영혼의 깊은 시험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면 환경의 이런 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당연히 영혼에도 영향을 받게 되고 영적인 깊음에도 함께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다윗은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왕궁이 있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고 후궁과 귀빈들이 가득하고 날마다 잔치를 하고 아름다운 보좌에 앉는다 할지라도, 아무리 한 나라의 땅이 넓어 광대한 영토를 이루고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생각할지언정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고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다행히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나가던 때에는 오히려 타락했지만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시간들을 통해서 그의 마음은 연단되고 단련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에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믿었던 친구들도 발뒤꿈치를 들고 원수의 편이 되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도 자기를 기억하지 않고 자기와 함께 피를 나눈 형제들도 자기를 예뻐해 주지 않고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본 받는 대신 불신앙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어떻게 자기 여동생을 강간을 합니까? 그것도 다윗과 같은 집안에서. 그리고는 또 버립니다. 그리고는 서로 그 일을 복수하기 위해서 칼부림이 일어나서 결국은 왕자의 살육이 일어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느 해 가정의 달에 형제의 화목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다음 시간 설교를 위해서 비서실에서 쉬고 있는데 아마 칠십은 다 되신 노인네가 ‘목사님, 좀 들어가겠습니다.’ 하면서 들어와서 소파 맞은편에 털썩 앉더니 칠십이 되신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면서 울었습니다. 영문을 몰라서‘집사님, 왜 그러세요?’ 물었더니 ‘목사님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다윗의 집안의 자식들처럼 우리 집안에 있는 내 자식들이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게 싸우는데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다윗은 그런 과정을 모두 거쳤습니다. 오죽했으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 상처와 고통은 이루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 하는 다윗의 인생을 왜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셔서는 안 될 것 같은 시련으로 일생을 보내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은 맞지만 하나님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다윗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영혼은 더욱 순결해지고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 더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점점 더 깊어져서 고통 받으면서도 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복음의 광채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원래 구약을 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 아름답고 너무 감탄할만한 글들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다윗이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사람인데 지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깨닫지 못하는 복음의 비밀들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 자체가 아주 웅장한 신앙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뛰어난 인물들이 알프스 산맥이라면 이 다윗은 그 산맥 중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그렇게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고난 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그런 고난의 골짜기들을 통과하면서 하나 배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다윗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까? 왜 안 입었겠습니까? 고생을 했습니다. 진짜로 칼의 위협을 당하고 창으로 살해될 위협을 당하고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찢어지고 자기는 이방의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고 자식들이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진짜 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네 육신만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처럼 아무리 원수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인생의 위협을 느꼈을지라도 자신의 영혼에는 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어 집요하게 추격했지만 그 추격을 받고 도망을 다니면서 그의 육신은 쇠약하였으나 영혼은 더욱 강건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찬송)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 합니까
다윗 왕을 모시고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길을 떠났던 한 사람이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로 도망을 가서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나라를 잃어버리고 우리나라로 도망을 와서 이렇게 손님처럼 이렇게 초라하게 거처하느냐?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슴 아픈 시절을 겪으면 겪을수록 다윗의 마음은 점점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희망을 갖는 대신 이 세상은 사명으로 살고 자신의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통하고 모든 것이 좋을 때만 하나님이 위대해 보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이 다윗을 정말 이스라엘을 이끌 임금답게,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울만한 사람답게 그 복음의 계시를 전달해 줄 선지자답게 그를 깊게 넓게 크게 높이 만드시는 과정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넘치는 인생길을 지나면서도 그는 하늘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찬송)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더 단단해 진 확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자원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고 천만의 만만의 원수들이 천만만의 원수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지 이유가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고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를 설명하면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위로를 받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비슷하게 나오는 지팡이와 막대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양하는 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두 기구는 목동들이 양을 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먼저 주께서 ‘지팡이’라고 했는데 이 지팡이는 일반적인 지팡이가 아니라 이스라엘 목동들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자기 어깨 키를 넘어가는 굉장히 커다란 지팡이였습니다. 끝이 휘어있는 그런 지팡이였습니다. 그 지팡이를 가지고 길을 걸어갈 때에 자신의 보행에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 지팡이의 용도는 양들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에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지팡이를 쭉 뻗으면 지팡이 끝에 휘어진 손잡이를 양의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그리로 가지 말라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라는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인도’입니다. 그것이 ‘주의 지팡이’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목동으로 살아가던 어린 젊은 시절에 양떼를 인도할 때 그 양들이 잘 못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이 지팡이를 사용해서 그 양들의 목을 걸어 안전한 길로 인도했던 것처럼 자기도 살아보니까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 걸어가던 적이 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은근히 돌이키도록 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깨닫고 인격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따라 살도록 다윗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역시 똑같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은 완전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능력이 많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오해하고 깨닫지 못해서 그릇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빗나가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로 목에 걸어서 대열로 다시 돌아오게 하고 양 무리 안에 함께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의 경험이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막대기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앞에 나오는 지팡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양을 위해서 쓰는 물건이 아니라 양을 헤치기 위해서 달려드는 맹수를 격퇴하는데 쓰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끝이 뾰족하게 깎여져있고 길이가 깁니다. 그래서 맹수들이 밤에 양을 헤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가까이 달려올 때 그것들을 쫓아내도록 사용되던 것이 이 막대기입니다. 이 막대기를 가지고 양을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는 한편으로는 따뜻한 인도자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싸우는 용사여야 했습니다. 사랑이 많고 양떼들을 돌보지만 필요할 때 양 무리를 헤치려는 악한 세력, 영적인 세력들에 대해 아주 강한 용사로 나타나서 그것을 꺾어 버릴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줄이 있습니다. 특별히 악기를 잘 탔습니다. 그것으로 미친 기운이 돌았던 사울의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현(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난이라는 손길이 때리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아름다운 음악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 울려 퍼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들이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80여 편의 시를 보십시오. 대부분의 시가 고난 속에서 태어난 시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기만 하고 말씀으로 고난을 이기기만 하면 우리 인생 앞에 놓인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만드는 공장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는 학교가 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서 매달려 기도하는 기도의 학교 하나님을 거슬러 살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배우는 순종의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주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다윗처럼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오히려 강하고 훌륭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사실은 이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목자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더 강한 이유를 지금 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그냥 목자인줄 알았는데 영혼을 소생시켜주실 때는 정말 놀라운 목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실 때에는 그 분이 자기를 생명처럼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주님의 품으로 뜨겁게 파고들고 있는 이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부요할 때 그리고 고난 받을 때 판단이 납니다. 신앙이 있는 것 같아도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복을 주실 때 그 세상에 취해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때 결국은 그의 믿음이 거기까지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거기까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그것밖에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복이 결코 그의 영혼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믿음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어려움이 닥치면 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양수리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수영을 워낙 잘 하는 친구였습니다. 배에다 아이들을 태우고 가니까 자기는 수영하면서 따라간다고 했는데 배가 도착해서 아이들이 내리는데 보니까 따라오던 그 선생이 없어진 것입니다. 심장마비가 와서 물에 가라앉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6대 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장로고 어머니는 권사였습니다.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던 사람들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아들이 죽고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 6대 독자를 데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애도해주고 위로하고, 시체를 3일 만에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저는 그 때 신앙이 없었을 때였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도 저렇게 믿음을 버릴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나중에야 교회에 나오셨겠지만 모르겠지만 발을 딱 끊었습니다. 몇 십 년을 다니던 교회를 발을 딱 끊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식을 잃은 것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마 신앙이 아니었으면 다윗은 여러 번 자살을 했을 것입니다.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죽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고난의 깊이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자기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마음 둘 곳이 없이 늙고 가난하고 그리고 이제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의 인생을 사망의 음침한 깊은 골짜기에서 건져 낸 것을 기억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님의 손을 더욱 더 꼭 붙들고 마치 어린아이가 걸어갈 때 엄마 아빠의 손을 꼭 붙들 듯이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찬송)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렇게 오직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그 고난의 길을 모두 통과하고 왔더니 하나님이 이 다윗을 정말 믿음의 위대한 사람으로 세워주시고 오늘도 그의 신앙의 고백과 노래를 통하여 우리 후손들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도 겨우 70을 살고 하나님께로 갔지만 그러나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살다가 언젠가는 가는 존재들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젊어서 믿은 예수를 꼭 붙들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는 그 때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 때문에 나는 살았습니다. 나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제껏 나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해 오신 하나님 나의 앞날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는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선한 목자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소중한 양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