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불꽃으로 사는 길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
녹취자: 이재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는 어떻게 그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말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 주신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하고 난 다음 5절에서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결국 자신의 잔이 차고 넘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시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거는 그림이 잔칫집에 문맥입니다. 많은 하객들이 모여 신랑 신부가 혼인을 하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주인은 아주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포도주를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잔에 가득가득 부어 마시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잔치집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그 때 학생 중에 한 젊은 부인이 학교를 다녔는데 제 책을 읽고 그리고 만나겠다고 왔습니다. 꽃바구니를 예쁜 것을 사들고 와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론은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저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사왔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남편이 디자인 계통의 회사를 경영하는데 이름을 이야기하면 여러분 중에 아는 사람이 많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집안에 건축 자재로 쓰는 그 어떤 특정한 부분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이 젊은 부인은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하고 있는 일하고 너무 잘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수님 저는 이 세상에서 나를 아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워낙 부자인데 부자들은 대개 사업한다고 바빠서 가정을 잘 돌아보질 않는데 진짜 아내 바라보기입니다.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고 자상하고 유럽의 출장 갈 일이 있으면 아내와 꼭 동반해서 일 년에 몇 번씩 나가서 최근에 디자인들을 보면서 아내에게 조언도 구하고 하면서 실제로 아내가 회사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아주 잘 자라고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행복한 사람인데 딱 한 가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혹 들이 매년 몸에서 수없이 생겨서 2~3년에 한 번씩 수술해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도 모르는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사는데 다른 사람은 자기를 너무나 부러워하고 교회에서도 젊은 부부가 그렇게 부자인데 열심히 헌신하고 충성하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예뻐하시겠습니까? 연세 드신 목사님이었는데 그렇게 엄격하신데 그들 부부를 향해서는 아주 봄바람 같으신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심방을 오셔서 자기 집을 말할 수 없이 그렇게 축복해 주시면서 말씀을 주시는데 자기도 모르게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목사님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냐 그랬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목사님 펑펑 울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남편이 이렇게 잘 해주고 돈도 많고 아이들이 착하게 자라고 심지어는 그 무서운 목사님이 저를 이렇게 많이 사랑해 주셔서 저는 너무 공고해요, 목사님, 저는 죽고 싶어요.” 그리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도 자기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공고한가를 근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그 젊은 부인을 그렇게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을 붙들고 펑펑 우는 것은 쉽지 않잖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또 다른 이유가 아니라 “목사님이 저를 아무리 예뻐해 주셔도 저는 너무 곤고해요” 그리고 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편한 광경이잖습니까? 이것을 자기가 도대체 왜 그런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모두 한 개씩 빈 잔이 있습니다. 그 잔은 세상의 명예와 권세, 돈, 남편 사람, 심지어는 목회자의 사람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빈 잔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그리고 여행을 다니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를 해도 이 마음이 한없이 공허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런 것을 느끼는 것 자체를 너무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느끼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확행’ 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소소한 것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남에게 선을 베풀어서 확실한 행복을 얻는다든지 또 내가 인생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린다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구경하고 옷 입고 그런 것들입니다.
저는 저희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이웃을 만났을 때 ‘우리 뭐 먹었다. 어디 갔다 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혼자 조용히 알고 있는 것이지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엊그제도 인터넷에 이렇게 보니까 어떤 연예인이 어떤 사람이 남편으로부터 발렌타인데이 때 1억짜리 핸드백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진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남편한테 선물 받았으면 선물 받은 것이지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길래 동네방네 인터넷에 올려 가지고 그 사진을 수십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해야지 기분이 좋을까?’ 그리고 올린 것들을 보면 호텔에 가서 뭘 먹고 어느 맛 집에 가서 뭘 먹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요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넷이서 밥을 먹고 160만 원짜리 영수증을 사진으로 찍어서 올렸습니다.
지금 왜 그런 것입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결국 영혼의 빈 잔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줄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그 정신을 딴 데 팔기 위해서 끊임없이 먹고. 입고. 보고. 마시고. 놀러 다니고 하는 그 일에 모두 매달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아파서 병들어서 죽어가는 광경을 찍으면서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어떤 블로거들은 가짜 사진을 갖다가 올리고 그런 정도로 잘 사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진을 계속 올려서 수백만 명의 팔로워들을 거느리고 그 것으로 돈 벌이를 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영혼이 너무 곤고한데 그 곤고한 것을 느끼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들에만 묶여서 사는 이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소비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생산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커다란 공장제 공업이 발달하기 전이니까 구두 만드는 사람은 대대로 구두를 만듭니다. 구두를 가지고 가서 닭이나 고기와 바꾸고 야채와 바꾸고 옷감과 바꾸고 그렇게 하면서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닭을 길러서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구두도 사고 이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커다란 그런 소비에 대한 욕구보다는 물자 자체도 없었지만 그러니까 뭔가를 생산해 내면서 ‘아 이것은 내가 구두다. 그리고 내 기술이 정말 훌륭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는 문화의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씨 아저씨가 3대째 구두를 만들고 있는데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도 공장에서 나오는 구두처럼 튼튼하고 꼼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은 절반 값 가격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을 이용해서 대량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니까 사람들의 인지는 돈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생산하는 사람까지 서로 알지도 못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에 수백 명 수천 명이 들어가서 신발 깔창 만드는 사람은 깔창만 붙이고 구두끈 매는 사람은 구두끈만 매고 색칠하는 사람은 색칠만 하니까 자기 서로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제품만 생산하고 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도 옛날에는 김씨, 이씨, 박씨, 최씨 그러면서 여기 노량진이던 시절에 말입니다. 이렇게 마을의 포구 나루터 있는 근처에 집들이 모여 있었을 거 아닙니까? 모두 다 아는 사이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우루루 모이고 그러니까 생산 인프라를 중심으로 모이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아파트 위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 5년 10년을 살아도 다 인사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소비가 그냥 필요해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회학자에 말처럼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품 가방을 혹은 명품 구두를 혹은 명품 옷을 말도 되지 않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그런 것을 하나 탁 사면서 자기 자신이 그냥 이 백이 꼭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닌 이 정도 아니어도 옛날에 다 들고 다녔는데 명품을 탁 차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 세계에서 몇 퍼센트의 부자들 안에 드는 사람이 잠깐 되는 환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소비에 몰두하는 이 풍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비하려니까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계속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심지어 일을 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카드로 결제하고 할부로 사고해서 일을 안 하면 갚을 수 없고 일을 해야 되는 그런 구조가 되어서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미친 듯이 일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서울 근교에 보면 양계장이 있는데 24시간 전깃불을 환하게 켜서 계속 모이를 주면서 닭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을 하루에 2개씩 낳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알을 그렇게 매일 날 수 없는데 그렇게 불을 환하게 켜서 매일 매일 알을 낳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냥 맨 나중에 폐기가 되면 그냥 도계장에서 잡아가지고 싸구려로 팔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세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명을 비판하면서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빈 잔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사회의 흐름 속에 빠져서 교회에서도 모임은 맨 소확행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이런 부분들을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 시인도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부귀영화라고 하면 이 세상에 자기 아들 솔로몬을 빼고는 누구도 누려 본 적이 없을 어마어마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영화로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그런 걸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그가 진짜 사랑하는 것은 왕위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진짜 바라던 것은 땅덩어리가 넓어지고 나라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통틀어서 이 다윗은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왕이 정말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믿음으로 살았으면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꼭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모든 선한 군주의 모본을 보여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하나님이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마지막 부분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단어, 제가 지금 몇 개의 단어를 말할 테니까 최근에 6개월 동안에 이런 단어를 써 본 적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쁨, 환희, 희열, 감격, 감동’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기쁨, 환희, 감격, 감동 이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먹고 입고 쓰고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쁨, 하나님 때문에 희열, 하나님 때문에 환희, 하나님 때문에 감격, 하나님 때문에 감동’,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이런 말을 써 본지가 얼마나 드뭅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과 같은 것이 바로 이런 단어들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명랑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먹고 입고 쓰고 마시는 그런 것들 때문에 명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제가 무시하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죄악시하거나 그러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너무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고 우리에게 주신 기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때문에 나의 영혼의 비어 있는 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세상에 정신을 팔아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압니다. 진정한 기쁨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빈 잔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 가득 채워졌습니까?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졌습니까? 말씀으로 기도로 그리고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습니까?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원의 깊은 샘이 솟아나서 끝없이 충만하게 넘치는 기쁨의 삶을 사는 그 것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만나는 이웃에게 ‘어쩜 저 사람은 저렇게 명랑할까?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늘 행복할까? 어쩜 저 사람은 저렇게 기쁠까? 돈 때문인 줄 알았더니 나보다 가난해. 지위 때문인 줄 알았더니 나보다 더 별로 좋지 않은 직장에 다녀. 재산이 많은 줄 알았더니 그냥 전세 집에서 평범하게 살아 그런데도 저렇게 기쁘다니 도대체 저 사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한 선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환하게 웃으면서 이 안에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바로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고 그리고 그것이 넘쳐 오르는 잔치집의 분위기와 같은 그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잔칫집만큼 기쁜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날은 누구도 다투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들 시집, 장가보내 보아서 알겠지만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 얻어서 행복하게 결혼하는 그 모습을 볼 때 부모는 그 날 안 먹어도 배부르고 아무 소식도 그날은 비극처럼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이 너무 크니까 그런 기쁨을 이 속에서 매일매일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여러분들의 생각을 바꾸셔서 나의 사명은 명랑하게 사는 것,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지, 그것을 보여 주는 그것이 가장 선교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돈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연봉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신문에 보니까 한국에 게임 산업을 거의 시작한 김정주 회장이 우울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자살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전도사 생활하던 교회 바로 근처에 그룹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모두 아는 그 그룹의 회장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집터가 큽니다. 시커먼 개들이 몇 마리 있고 까만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늘 집을 지켰습니다. 오늘 신문에 났습니다. 그 회장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회장이 혼자서 부엌칼로 자기 몸을 막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그룹의 회장인데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웠으면 부엌에서 칼을 갖다가 자기 몸을 수없이 찔렀겠습니까?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세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영혼의 빈 잔이 텅 비어 있을 때 인간이 얼마나 불행해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빈 잔을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놀고 세상일을 하고 돈 모으고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팽개쳤던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면서 ‘내 영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이 말씀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충만한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그리고 이런 기쁨과 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 그 하나님이 나의 목사시다.’ 그것을 깊이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시편 23편을 밤하늘이라고 한다면 이 5절은 그 불꽃놀이 중에서 가장 큰 불꽃이 저 꼭대기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서 팡 터지는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러면 대체 시인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그리고 사람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더 이상의 기쁨은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할 정도의 그 것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셨나이다.” 두 가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 차례대로 살펴봅시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세 가지 직분이 있었습니다. 삼직이라고 하는데 그 세 가지 직분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회는 지탱되고 있었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먼저 왕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나아와 계시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반대로 백성들의 죄 많은 형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고 제사를 드림으로 죄를 지었어도 아주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다시 용서받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좋은 왕, 좋은 선지자, 좋은 제사장일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종일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진 채로 살아야지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3 종류의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어느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매우매우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의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이 일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부을 때 성령이 임하셔서 그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불결로부터 정화시키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기름부음을 다윗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왕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생에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것은 사무엘이 첫 번째로 기름을 부었던 그 때였습니다. 이세의 집안에서 이제 사무엘이 그를 점찍어서 기름을 부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다윗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지혜로운 임금으로 훌륭하게 모든 임금의 기준이 될 정도로 순수하게 사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 자신도 훌륭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기름 부음을 통해서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능력 그리고 순결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죄 짓고 타락했을 때 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때 그는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전임자 사울이 하나님이 부으신 성령을 거두어 가실 때 거의 미치광이가 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는 광경을 자기가 똑바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르짖었던 이유도 바로 그 것 때문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습니다. 진짜 지옥의 입구까지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회개하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가는 것, 떠나지 않고 성령이 자신 안에 계셔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복의 주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기름은 구약에서 결국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붓는 그 행위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광경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결국 요즘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 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서 말할 수 없는 환희와 희열과 감격 속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 고백이 우리말로 지금 바꾸자면 말입니다.
저는 엄마, 아빠는 예수를 안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모들이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고모들하고 같이 살면서 저를 애기 때 없고 고모들이 너무 예뻐해서 우리 집안 전체에서 14년 만에 태어난 어린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집이 종갓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독자입니다. 그러니까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업혀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업혀서 다니던 그 교회에 한 사십년 후에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미아리 옛날에 공동묘지 있던데 있는 교회입니다. 그 때 아주 어렸을 땐데도 다는 기억이 안 나고 이렇게 창문이 햇빛이 드는 광경이 그 것이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물론 교회당은 새로 지었지만 그 때의 그 모습이 뚜렷이 기억이 나서 제가 설교를 하면서 너무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어 다니고 5살 때까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후로부터는 저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쯤 되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가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부모들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두 가지만 해주면 모든 것을 해 준 것입니다. 예수 사랑하게 만들어 주고 교육시켜 주면 거의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 언젠가 되겠지’ 끝까지 안 믿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반성해야 될 점이 있는 것이 유치부 때부터 그렇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녔는데, 물론 내가 열심히 뭐를 배워 보겠다고 예수를 믿어 보겠다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니까. 그런데 그 많은 선생님들을 거쳤는데 나한테 ‘남준아, 너 진짜 예수 믿어지니? 진짜 구원받았니?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이 네 마음에 믿어지니? 내가 가르쳐 줄까?’ 한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몇 사람이 있었으면 제 인생이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제가 교회에서 나대거나 말썽을 부리거나 그런 거 하고는 거리가 먼 착실한 학생이었지만 어쨌든 나한테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봐 주는 어른이 없었습니다. 이제 생각이 들어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회의를 느끼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인가?’ 교회 와서 어른들을 보니까 그 분들은 나만큼 더 인생에 대해서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냥 와서 열심히 박수치고 소리 내서 기도할 뿐이지 그렇게 인생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교회 안에 많은 위선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때, 나이가 14년 2개월 되었을 때 주일날 교회를 갔는데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철둑길을 따라서 이렇게 그 밑으로 쭉 걸어서 교회를 가는데 엎드려졌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눈물도 얼어버릴 정도로 추웠습니다. 내 눈물을 훔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결심했습니다. 신은 없다. 나는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에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리고 무신론을 선언하고 저는 교회를 안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무신론적인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 나름대로 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제 하나님을 그렇게 마음으로 부인하고 그리고 제 동생이 지금 우리 교회 장로님인데 그렇게 착실하게 교회 다니는 동생을 매일 데리고 이야기를 해서 결국은 그도 신앙을 버리게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주님께 돌아오고 나서 제일 먼저 회개한 것이 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다시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됐고 교회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다가 어느 해인데 엄청나게 아프고 인생에서 너무 그 보기 힘든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리고 밤 새워서 공부를 하는데 새벽마다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뎅그렁 뎅그렁 그런 종소리 들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바깥에 나가서 새벽에 나와서 낮은 할 수가 없습니다. 동네가 너무 가난해서 매일 싸우고 피를 흘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아주 너무 험악한 동네였습니다. 밖에 나가서 밤에 이렇게 보면서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가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입니다. 뎅그렁 뎅그렁 울리는 종소리가. 그런데 결국은 너무 고민을 하다가 그렇게 종소리를 매일 새벽에 들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몇 달이 지난 다음에 내발로 걸어서 20~30명 모이는 작은 교회에 가서 등록을 하고 그 때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렇게 6년 만에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고 방석을 하나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피아노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먼 길을 떠났다가 고향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삐그덕 삐그덕 풍금 소리가 나면서 찬송가가 나왔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쭉 찬송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문제가 목자 되신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것이 내 인생의 비극의 씨앗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주님 없이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안됐는데 목사님이 번듯한 청년이 이렇게 열심히 교회에 나오니까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교회에 삼십 명밖에 안되는데 말입니다. 그랬더니 9월에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데 11월 감사절에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다닌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너는 어려서부터 다 다녔으니까 학습도 필요 없고 바로 세례를 받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목사님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 주간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맞는데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나 같은 죄인이 그것이 가능할까?’ 고민이 되어서 매일 밤마다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초를 하나 켜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 예수 믿게 해 주신 것 만해도 이렇게 감사한데 제가 이렇게 주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정말 세례를 받아도 됩니까?’ 그것을 일주일 내내 밤마다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드디어 세례를 받는 날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냥 깨끗이 옷을 빨아 입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답을 하고 목사님이 세례를 주시는데 몇 사람이 같이 세례를 받는데 물에 찍어서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목사님이 손을 놓고 기도를 하시는데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쭉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내려오고 나니까 막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 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니 그리고 그렇게 독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로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심지어 동생을 그 신앙을 버리게까지 만들었던 나 같은 사람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랑하시나!’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져서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솜 같은 구름 위에 살짝 떠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를 받고 얼마를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찾았는지 다 울고 나니까 예배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창가에 추워서 유리에 성애가 낀 그런 추운 때였는데 햇빛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내려오셔서 내 마음속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이 너무 확고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살면서 목회하면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런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세상의 헛된 것을 모두 버리고 그런 것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극적인 경험이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주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직장을 다니면서 신학교를 들어가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본 교회까지 가기에는 교회가 너무 머니까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갔습니다. 가서 그렇게 난로도 안 피워주고 그렇게 추웠습니다. 어쨌든 그 날도 가서 하나님 앞에 그 기도 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얼마를 기도했는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님도 저 앞에서 기도하시다가 집에 돌아가셨습니다. 저 혼자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그리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편한 의자에 그렇게 편안하게 앉아서 기도하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시겠나? 아니 내가 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생각해서라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으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도 11월이었습니다. 11월 중하순경 이었습니다. 그 준 겨울에 그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그냥 한기가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한참 무릎을 꿇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렸더니 악취가 나면서 온 몸이 얼어붙는 것입니다. 그 때 결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동상에 걸려도 일어나나 봐라.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을 안 해 주신다면 내가 여기서 얼어 죽어도 안 일어날 거다.’ 그러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원래 소리소리 지르고 막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초에 조용하게 기도해서 그날도 혼자서 조용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했습니다. 분명히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강대가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강대에서 축구공보다는 조금 작고 핸드볼 크기 정도 될까 그보다 약간 작을까 하는 그만한 크기에 불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입니다. 아주 천천히 기도를 하면서 저것이 날아오면 나하고 부딪힐 것 같은데 그러면서 어쨌든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 것이 내 머리에 탁 부딪혔습니다.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속으로 확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나면서 내가 여태껏 기도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열렬하게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두 번째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막 간절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어디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상한 나라 말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내가 여태까지 기도하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까짓 게 뭐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뭐가 대수랴!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분이었구나!’ 똑같이 역시 그렇게 오랫동안을 기도를 하다가 이제 출근할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일어났는데 다리가 굳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똑같이 새벽에 성애가 잔뜩 꼈는데 붉은 그 벌건 아침노을이 창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을 달랐는데 그 때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세례 받을 때나 그 이후에나 똑같이 성령을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티끌과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보이시는 것입니다. 내가 소원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 마음이 확 밀려오면서 말할 수 없이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교회에서 그렇게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엎드려 있었는데 그 다리를 끌고 나오는 그 골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길과 집과 모든 것들이 다 새로운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진즉에 이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을 그렇게 무신론에서 구원해 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지금도 내 마음에 와 계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시인이 바로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기름으로 자기의 머리에 바르시면서 자기를 고귀한 일꾼으로 선택해 주시고 동시에 충만한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실 때 환희, 기쁨, 감격, 은혜, 감동, 모든 충만함이 넘쳐서 결국은 하나님 밖에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경험을 하고 나니까 ‘아! 하나님 이외에 내가 의지할 분이 없구나! 나의 양떼들이 나를 의지하며 나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기고 편안히 쉬었던 것처럼 내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구나!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나니까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다윗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런 방식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받으신 지가 언제입니까?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로 회개하던 때가 언제입니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감격 속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언제였습니까?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이토록 감사하고 내가 주님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피로 내 죄를 씻어 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티끌처럼 보이고 목숨 다 하는 날까지 예수위해 하나님위해 살고 싶었던 날이 그런 감격을 경험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기쁨의 눈물을 언제 흘리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되나?’ 하면서 감격의 참 예배를 드리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이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건조하고 우리의 인생은 힘겹고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무의도식을 하면서 우리 인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셨으니까 한 번 과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집 새로 장만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한 일 년 갑니까? 이 년쯤 지나면 집에 좁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로 차를 샀을 때 한 두세 달 행복합니까? 세상이 주는 기쁨은 언제나 유한하고 효용기간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고 우리의 영혼에 비어 있는 잔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의 빈 잔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는 줄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또 한 가지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게 했던 또 다른 이유가 하반 절에 등장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랬습니다. ‘상’이라는 단어는 원래 이 성경에 쓰인 히브리어 성경의 ‘슐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어는 ‘식탁’을 의미합니다. 밥 먹는 밥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밥상을 우리처럼 이렇게 교자상 같은 것을 놓고 앉아서 먹는 생활이 아니라 좌식 생활을 했는데 소파 같은데 기대어서 다리를 쭉 뻗고 식사를 하는 버릇이 있어서 식탁이 아주 얕습니다. 우리의 응접세트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밥을 차리는 그 상을 가리켜서 여기에 ‘상’ 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주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차려 주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됐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펴 놓고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이 5절에 와 가지고 너무 기뻐서 성경을 안고 방을 뱅글뱅글 돌 정도로 그렇게 기뻤습니다. 한 단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차려 주시고’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라크’ 라는 동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원래 그 ‘아라크’라는 단어가 군대에서 많이 쓰던 단어입니다. 군인들이 좌우로 행렬을 짓고 대오를 지어서 무리를 만드는 것, 질서 정연하게 군대들이 정돈하는 것을 ‘아라크’ 라고 불렀고, 어떤 물건 같은 것을 여러 개를 진열하는 것을 ‘아라크’ 라고 불렀습니다. 결국은 이 밥상도 여러 종류입니다. 그 밥상 중에서도 어떤 밥상인지를 이 단어가 암시하는 것입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 엄마 보기에 속을 썩입니다. 그러더니 시집을 가겠답니다. 엄마가 ‘옳다구나! 잘 됐다! 저 녀석 얼른 치워버려야지.’ 그런데 사위될 사람이라고 데리고 왔는데 기대를 잔뜩 했는데 아무리 봐도 아닌 사람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아도 인물부터 시작해서 학벌부터 시작해서 신앙까지 재산까지 심지어 성품까지 한 2시간 있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건네 보는데 영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딸한테 ‘가지마라. 그 사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남편하고 둘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푹 빠졌습니다. 저 남자 아니면 자기는 죽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고집을 써서 시집을 가는데 결혼식 날이 됐는데도 하나도 안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끝나고 돌아왔습니다. 그 전날 정화가 온 것입니다. ‘엄마, 신혼여행 잘 갔다 왔습니다.’ 엄마는 심드렁합니다. ‘그래.’ ‘엄마 우리 내일 점심 때 인사하러 갈께.’ ‘그래’ ‘엄마 맛있는 거 채려줄 거지?’ ‘올 테면 와라’ 그 전화를 툭 끊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남편이 ‘우리 밥 먹자’ 그러는데 ‘아니 엄마가 집에 가면 엄청 많이 차려났을 텐데 뭘 밥을 지금 아침을 먹어. 귀찮은데 좀 참았다가 우리 가서 점심 맛있게 먹자’ 그리고 이제 남편 된 사람을 데리고 선물 하나를 들고 한복을 입고 온 것입니다. 자기는 올 때는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가면 대문 앞에서부터 지지고 볶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 혼자 도저히 못하니까 이모 두 사람을 불러다가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굽고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조용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문도 열려 있습니다. 가보니까 아빠는 없고 엄마 혼자 배게 비고 자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 왔어.’ ‘어! 누구?’ ‘딸’ ‘어! 그래그래.’ ‘절 받으세요. 장모님.’ 그러니까 ‘아우! 절은 뭘...’ ‘그래도 받으세요. 그리고 우리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입니다. 음식 냄새도 안 나고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엄마, 우리 너무 배고파. 우리 밥 줄 거지?’ ‘그럼, 줘야지’ ‘엄마, 얼른 밥 차려줘.’ 그런데 엄마가 부엌에 나가더니 1분 만에 차려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뭔가 봤더니 아침에 먹던 밥에다가 두 그릇에다가 남은 밥에다가 물을 잔뜩 부어서 젓가락, 숟가락 놓고 반찬 하나가 있는데 수많은 젓가락에 공경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종지 하나를 나가지고 구석에 떨어져 나간 다 망가진 나무 밥상에 차려 가지고 와서는 ‘먹게.’ 하고 탕 놓는데 물이 찍 하고 쏟아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밥상이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난, 네가 싫어! 너 왜 우리 집에 장가왔니? 딸 너도 싫어! 난 네가 결혼한 것이 하나도 안 반가워!’ 그 걸 밥상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인이 천명이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교인을 아내와 함께 심방을 했습니다. 천명이 넘으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따라다녀도 도저히 심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심방을 지금도 조금은 하지만은 심방을 할 때 제일 부담스러운 것은 집에다 뭘 차린다고 그러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주부들이 얼마나 힘든 것을 제가 일기 때문입니다. 그냥 갈비탕이나 그런 것을 밖에서 먹고 집에 가서 예배드리면 되는데 그것을 음식을 한다고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집에서 음식 하는 것을 만류합니다. 그런데 한 이십여 년 전이었는데 50대 초반의 부인이 꽤 먼 곳에 사시는 분인데 우리 교회 와서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 분이 부교역자를 통해서 아주 정중하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을 꼭 한 번 모시고 식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좀 심방을 와 주시면 안 됩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안 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 대신 집에서 밥은 하지 말라고 그래라.’ 그 다음주에 ‘목사님, 그래도 집에서 하겠답니다.’ ‘하지 말라고 그래라. 그리고 그냥 밖에서 먹고 집에 가서 예배드리고 심방하고 차 한 잔 마시고 오자’ 그랬더니 ‘절대로 집에서 밥을 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럼, 뭐 하고말고 내버려 둬라.’ 그리고 그 집에 드디어 심방을 하러 갔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예배를 온 가족이 예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롭게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대로 사니까 저도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가정이니까 마음껏 축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밥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밥상이 들어오는데 요즘은 제가 그런 교자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3명이서 들고 들어오는데 젓가락에 손을 뻗어도 상 끝에까지 안가는 그런 크기의 상에다가 다 다른 반찬을 가득 채워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뭘 이렇게 힘든데 차리느냐?’ 그랬더니 15일 전부터 그 상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15일 전부터 계획을 세워서 10일 전에 김치를 담그고 무엇을 담그고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5일 전에 할 거 3일 전에 할 거 마지막에 전날 식자재를 사다가 너무 중요한 것은 아침에 가서 사다가 자매들이 셋이서 온 정성을 다해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을 위해서 자기가 한 달 동안을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냐? 나 같은 사람한테 이런 거 할 시간에 기도를 하고 성경이라도 한 줄 더 읽지’ 그랬더니 이 분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드세요.’ 저는 지금도 그 밥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음식도 물론 맛있었지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밥상하고 아까 그 밥상하고 비교를 해 봅시다. 이 밥상은 무엇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까? ‘당신은 너무 소중한 분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늘 사모하는 분입니다. 당신은 너무 소중한 분입니다.’ 라는 언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받았던 식탁은 이렇게 반찬 한두 가지 나오는 식사가 아니라 그렇게 먹을 것이 산해진미로 가득해서 차려진 그 식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받았던 대접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의 목전에서’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 면전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살았지만 그가 그렇게 왕이 되고 그 다음에 나라를 물려받고 그 전쟁에서 이기고 그렇게 왕가를 세우는 이 모든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적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원수들이 보는 면전에서 그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 원수를 한 번에 없애 버려.’ 라고 생각했는데 큰 밥상을 놓고 그걸 차려 주신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밥상을 받고 있는 이 시인을 보면서 원수들이 너무나 커다란 수치를 당하게 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밥상을 받는다는 의미가 이 것이 서구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 이제 조선시대나 과거로 돌아가 보면 양반과 상민이 어쩔 수 없는 환경이면 방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남의 집 사랑방에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양반이 상민과 함께 밥상을 받는 법은 없습니다. 안 먹을지언정 양반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밥상을 함께 받는다고 하는 것은 형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식사 문화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은 왜 저렇게 세리와 창기들, 이렇게 너절한 죄인들과 함께 밥을 잡수느냐?’ 그 종교 지도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나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밥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한패다’라는 것을 ‘그들의 형제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하게 하시는 방법이 그들의 형제가 되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한 가족처럼 그렇게 지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상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지금 그것을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다윗에게 가족이 있기는 있었습니까? 아버지는 자기를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고 그런 아들이 있는 것도 기억 못할 정도로 그렇게 다윗을 아예 신경도 안 쓰던 아버지였고 형들은 자기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식도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살인과 강간, 이런 사건들로 가정이 얼룩집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 인간적으로 이렇게 마음 둘 곳 없는 이 다윗의 심리적인 상태와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았을 때는 그런 것을 모두 이기고 순결하게 살 수 있었지만 믿음이 떠나고 나니까 이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본성을 따라서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하나님의 사람이고 주님이 당신의 은혜로 그를 잡아 주실 때만 주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계시록에 가면 라오디게아에 주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내가 문 밖에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진 것은 나라의 부강함, 보물,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하찮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모든 원수들이 보는 앞에 밥상을 베풀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인을 먹이시고 그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변화시켜서 살게 하신 그것 때문에 이 시인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찬 그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주님의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있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영혼의 식탁이 그렇게 하찮은 식탁이 아니라 온갖 아름다운 하늘의 진미로 가득 찬 그런 식탁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십니까? 너무 병들고 기운이 없을 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한 끼 식사만 맛있게 먹고 집에 가서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의 육체의 힘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는 끊임없이 음식을 소비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 다녀도 매주 마다 매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오랜 신앙생활을 했어도 지금 내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이 없으면 안 믿는 사람하고 비슷하게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기 전까지 불안 무도한(1:16:36) 삶을 살았습니까? 얼마나 사무엘하 11장까지 눈처럼 순결한 삶을 살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무 탐욕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고 이미 그 때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굉장히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은혜에서 멀어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나니까 짧은 순간에 범죄하고 인간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우리아까지 죽이는 그런 끔찍한 살인의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 것을 보면서 그 만도 못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받으며 그 말씀에 우리의 영혼이 생명을 얻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생명적인 관계입니까? 정말 예수의 생명에 내가 결탁되어 있어서 그 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확신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서 그 말씀이 감동이 되고 그 감동이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나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권능을 주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용기와 힘을 갖고 기쁨을 갖게끔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이 것이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에 자신의 영혼이 빈 잔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도저히 하나님 이외에 자신에게 목자가 없으며 그 목자 없이는 자신은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목자시요. 나는 당신의 손의 한 어린양 이옵나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요약을 해 봅시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골짜기에서 날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두 번째 토막이 끝나고 마지막 6절이 등장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결국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나니까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살아있는 날 동안에’ 뜻입니다. ‘내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주 필연적인 어법입니다. 필연을 강조할 때 쓰는 어법입니다.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는 어법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악하게 대하면 당신 자신에게 모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선을 거스르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할 때 불행해지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악해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악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어린 나이일 적에 원하는 모든 것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의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날이 떡국 떡을 써는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집에서 다 썰었잖습니까? 떡을 해가지고 와서 굳혀서. 이 어린 아이가 칼 좀 달라고 막 그렇게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안된다고 그러고 썰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어른들이 둘이 앉아서 떡을 썰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방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녀석이 그 칼을 가지고 손을 빈 것입니다. 어른들이 나가고 자기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안 주던 그 칼을 자기 손으로 탁 넣었을 때 이 아이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손을 베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는 나쁜 것이 없고 하나님이 안 주신 것 중에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상처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 성경에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뭔가 이용 가치가 있어서 사랑해 주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덧입은 사람을 가리켜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결국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와서 자기를 굴복시키고야 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 조사를 하고 우리아에 반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하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추격했습니다. 미사일이 비행기를 따라가면서 격추시키듯이 다윗은 끊임없이 도망갔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따라왔습니다. 결국은 그를 굴복시키고 회개시키고 그를 보호해주고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될 수 있었고 오늘 그런 모든 인생의 굽이굽이 사연이 많은 길을 걸으면서도 마지막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어 준 그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모든 것들은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분 안에 있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아무것도 염려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예수를 믿는 행복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제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나옵니다. ‘살리로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잠깐 있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거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경에는 ‘거하리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좋은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집을 지을 때, 특히 시골에서 집을 지을 때는 집을 지어서 1년 2년 살다가 팔아버리려고 집을 짓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거기에 죽을 때까지 살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 당시에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는 아직 성전이 지어 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 시대였습니다. 성막이라는 것이 물돼지 가죽을 가지고 지붕을 씌워놓고 18평의 직사각형 방이 있습니다. 텐트를 쳐서 작은 방은 6평이고 큰 방은 12평입니다. 12평을 성소라고 불렀고 그 다음에 6형의 작은 방을 성소를 거쳐서 가면 지성소가 나왔는데 6평짜리입니다. 거기에 법계가 있고 거기는 대세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만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속죄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거기를 속죄소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에 성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동식 성전입니다. 그것을 광야 생활할 때 치면 그거를 치고 그 다음에 12지파가 그거를 중심으로 뱅 둘러서 진을 치고 거기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고 그 바로 성막 위에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 그 성막은 신앙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교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산 사람이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하나님은 나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비와 인자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주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주님의 기뻐하시지 않을 것은 자기 인생에서 아예 계획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앞에 모두 내어 맡기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이제까지 인생의 모든 길을 하나님이 그렇게 세심하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또한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있는 오늘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오늘의 본 복(1:28:53)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원로 목사님하고도 아까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62년도부터 이 교회의 목회를 하셨다니까 제가 초등하교 다닐 때 일인데 그런데 세월이 어쩜 그렇게 빠른지 모릅니다. 젊은 나이에 믿음 하나로 지하실에서 교인 7명이 모여서 교회를 개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나 빠른 지 상상도 안 갑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빨리 지나간 것이 과거만 그렇게 빨리 지나 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세월도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은 그렇게 인생이 덧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이 나이인데도 그 강원도에서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선교사가 하던 교회가 있었고 거기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는 아니지만 그 마룻바닥 그리고 나무로 만든 블럭, 그 다음에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그리고 초등하교 길가에 난 풀꽃들, 그리고 추운 겨울이면 냇가에 나가서 형들이 팽이질 하는 모습을 또 연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부러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6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잠깐 동안 흘러가는 것이 우리 내 인생입니다. 젊은 청년이 예수 믿겠다고 교회 왔는데 그 청년들이 이제 그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고 심지어는 시집 장가를 보내는 그런 때가 온 것입니다. 그 엄마 아빠를 세례를 주었는데 그 집의 아이를 세례를 주고, 그 집의 아이들의 결혼 주례를 서고 그러면서 우리가 늙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늙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흘러가는 것입니다. 청년이 와서 장년이 되고 장년이 와서 노년이 되고 노년이 와서 죽음에 이르는 나이가 되고 그 사이에 뛰놀던 어린 아이들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는 다음에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달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온 몸으로 받고 그 피로 구원하셔서 주님이 어둡고 험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하셨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셨으니 이 믿음이 어찌 우리가 얻은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사랑을 생각해 보면서 일생을 살아온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건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주님을 마음의 목자로 모시고 보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이 아닌 것이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 시절 패기만만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머리는 백발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뛰놀던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그리고 우리는 나이를 먹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돌보아주고 존경을 표하는 노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죽습니다. 그러면 나 평신도로 살다가 죽었는데 장례를 지냅니다.
요즘은 그렇게 안 하지만 예전에는 모두 그 관을 매고 교회를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마지막으로 부활의 그날까지 묻히기 전에 정들었던 교회를 관에 누워서 시체가 되어서 마지막에 도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예배당, 그리고 내가 처음 예수 믿은 그 순간, 저 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받았었지. 저기에 어떤 권사, 어떤 집사, 어떤 청년이 함께 앉아서 주님을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를 했었지. 이 사랑하는 교회는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여 벽돌 한 장씩을 놓으며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서 십시일반으로 헌금해서 지은 교회였고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내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차려 주시는 그 아름다운 영혼의 식탁을 매주 받으며 그렇게 나는 험한 이 세상에서 흔들이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지.’ 그렇게 하며 결국 마지막에 목사님의 축도를 받고 떠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모두 서서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며 ‘내가 저 장로님처럼, 저 성도님처럼, 저 집사님처럼, 저렇게 믿음을 지키며 아름답게 주님을 전파하다가 죽을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노년의 죽음을 허락해 달라고 눈물을 훔치는 젊은이들을 뒤로하고 장지를 향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묻혀서 부활의 그 날이 될 때까지 그 땅에서 우리의 육체는 썩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우리의 육체는 거기서 우리의 영혼과 재회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모두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성도들이 마지막 해야 될 일은 살아있는 동안에 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1970년대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70년대 후반 말쯤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전주에 있는 어느 병원에서 환자하고 원장하고 승강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자는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세요. 선생님’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아! 그 건 안 될 일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환자는 와서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을 빼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장기 판매가 자유로웠습니다. 규제된 지 얼마 안 됩니다. 멀쩡한 사람이 와서 원장님한테 눈물을 흘리면서 ‘제 눈을 빼 주십시오.’ 그러는 것입니다. 그 때 ‘대체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의 눈을 팔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왜 눈을 팔려고 그러냐?’ 하니까 ‘전 돈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에도 신장을 떼어서 팔거나 피를 뽑아서 매혈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눈을 파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눈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하고 연결을 해서 자기 눈을 파고 싶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윤리 상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해서 이 원장님이 ‘도대체 당신은 왜 눈을 팔려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이제 마지 못해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목사님이 오셨는데 교인이 너무 적으니까 목사님의 생활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몇 분이 오셨다가 다른 교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교인이라고 시골에서 열댓 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목사님이 가고 나니까 주일은 어떻게 목사님을 빌려 다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11시에 못 드리고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데 문제는 새벽기도하고 수요예배, 금요예배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열다섯 명의 교인 중 그 교회에 가장 오래 다닌 사람이 이 집사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지체들이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새벽기도를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위해 수요예배를 인도해 주십시오. 금요기도회를 인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 목회자가 아니라 그냥 근근덕신으로 하루하루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인데 본의 아니게 그 교회 목회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목사님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면서 한시적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다 보니까 성경을 가지고 되든 안 되든 말씀을 전해야 됐고 목회 아닌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는 이렇게 따뜻한 집에서 그래도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시골이지만 비를 피하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교회를 가보니까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같이. 그래서 이 집사님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아!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말이 되냐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교회를 짓냐고’ 집사님이 설명을 했습니다. ‘자!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자. 요 앞에 가면 개울이 있다. 개울 바닥을 파면 좋은 모래가 많이 나온다. 그 모래를 갖다가 시멘트를 사다가 내가 벽돌을 찍는 기계가 있으니까 그것으로 찍어서 교회를 짓고 우리 여려 교회에다가 우리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교회당을 짓자.’ 놀랍게 지체들이 마음을 바꾸어서 이 집사님의 제안에 설득이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청년들이 열심이 낮에는 가서 일하고 밤에는 그 개울가에 가서 모래를 퍼다가 열심히 블럭을 찍어 가지고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이 교회, 저 교회 사정을 해서 조금씩 조금씩 찬조를 받아서 드디어 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축하는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돈도 없으니까 자기가 기초 공사를 하고 블록을 쌓고 그리고 위에는 이렇게 판자를 엮어서 종이에다가 콜타르를 먹여서 지붕제로 쓰던 것이 있어서 비를 피하는 것입니다. 루핑을 쳐서 그렇게 예배당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옛날에 있었던 그 판잣집처럼 된 예배당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나무를 사다가 못을 박아서 의자를 만들어 가지고 장의자를 길게 해서 사람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애석하게도 그렇게 지어 놓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엄청난 태풍이 그 지방에 몰아 닥쳤습니다.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어마어마한 폭풍이 일어서 가로수들이 전부 다 쓰러지고 부러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를 가보니까 예배당 지붕이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저기에 가서 박살이 나서 꽂혀 있고 예배당에는 물이 들어오고 쌓아 올렸던 그 블록도 한 쪽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집사님이 가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까 도저히 해결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 신문을 보니까 ‘눈을 삽니다.’ 그러고 나온 것입니다.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때 돈으로 50만원인가 얼마를 굉장히 큰돈입니다. 그러고 이제 매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며칠 동안을 말을 안 하더니 아내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보,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혹시 내가 불구가 되더라도 당신 나 데리고 살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아 그러면 됐다.’ 그러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눈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내 눈을 팔아서 이 교회를 다시 짓고 싶다.’ 그러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거 얼른 가서 팔고 얼른 오셔.’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이 말이 되냐고? 집을 팔아서 건축 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봤어도 자기 눈을 빼서 건축 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안 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일주일 동안을 벽을 보고 드러누워서 밤마다 우는 것입니다. 아내가 너무 괴로워서 ‘그러면 당신 뜻대로 하라고’ 그래서 이 양반이 그 병원에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원장님이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을 해서 점심시간에 병원에 있는 꼭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 모두 예배실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장로지만 교회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집사인 가난한 이 양반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왜 그 병원을 방문했는지를 설명해주는데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즉석에서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을 모두 그 교회를 고치라고 주었습니다. 너끈히 교회를 고치고 새로 짓고도 남을 만큼 하나님이 부어 주셨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전에 이미 일어난 일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며칠을 울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고난과 시련을 당했을 때 지체들이 그렇게 기도해주고 괴롭고 힘겨울 때마다 우리가 찾아올 수 있는 곳이 교회밖에 더 있습니까? ‘이렇게 와서 하나님 앞에 온갖 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과연 그렇게 교회를 사랑한 적이 있었는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마지막에 살아내야 할 삶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고 머리가 하얘졌는데 정한 교회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인생이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있어서 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며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어느 날 죽는 것입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는 것을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충성스럽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무위도식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섬기며 생명처럼 아끼고 여기서 길 잃은 자들을 찾고 방황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슬픔에 쌓인 지체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고통 받는 지체들의 손을 붙들고 그 고통을 나누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살다 간다면 여러분들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았어도 주님은 보좌에 벌떡 일어나셔서 여러분들이 오는 그 길에 붉은 카펫을 깔고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서 그 앞서간 성도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찬송과 기도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