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청년부 교역자 대담
녹취자: 조경훈
그리스적 명랑성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명랑성은 이오니아적 명랑성과 소크라테스적 명랑성이 있습니다. 둘 다 그리스입니다. 이오니아적 명랑성은 뭐냐 하면 그리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환경적인 면에서 염세적입니다. 다른 염세적인 이유는 환경이 그리스가 엄청나게 나쁘냐? 하면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토양으로 보면 그리스가 굉장히 비옥한 땅입니다. 뭘 심어도 잘 되고 올리브가 굉장히 잘 되는 곳이고 포도를 어디든지 심으면 최상의 포도가 맺히는 곳입니다.
명랑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먹고 살고 힘들어가지고 고달프게만 살면 비관할 틈이 없습니다. 오늘 빨리 노동을 해서 집에 가서 빵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농사가 잘 되고 적의 침입도 없으니 인생은 무엇일까? 하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가 그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된 이유가 지중해라는 기후와 관계가 있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바다에 나가면 수산물이 풍부하고 햇빛을 무지하게 많이 받아서 과일과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짧은 한 철에만 일을 해야지만 먹고 살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은 사시사철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등이 춥고 배가 고프면 딴 생각을 못 하는데 등이 따뜻하고 편안하니까 온갖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무엇으로 됐을까? 탈래스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탈래스가 사는 곳에 가면 다 물입니다. 앞에도 바다고 호수들도 많고 물 위에 육지들이 떠 있는 것 같은 곳입니다. 아낙시마네스는 공기가 아니냐? 파라클레토스는 불이 아닌가? 흙이 아닌가? 이러면서 이오니아적 사고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질적인 사고가 맞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을 보면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뭐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올림푸스라는 신화를 구현해 낸 것입니다. 신화라는 것은 다 만든 것입니다. 곰이 무슨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고 결혼을 하고 그럽니까?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신을 만드는데 신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신은 사람 모양을 하고 있지 않고 대개 짐승모양을 하고 있어서 소나 용 같은 형태로 돼있어서 인간하고 무한한 격차를 가지고 저 위에서 지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의 신은 여태까지 있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신도 아닙니다. 신인데 신들끼리 싸움하고 이혼하고 간통하고 혼외자 낳고 복수하고 그리고 서로 시기하고 모의하는 것입니다. 그 신들은 아무 신도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갈까?’ 이런 신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명랑한 것입니다. 다 불사의 신들이니까 내가 신으로 태어나서 한 번 밖에 없는 신생을 얼마나 보람 있게 살아볼까?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움직이는 데로 살면 되는 신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기다 투사시킵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아십니까? 다시 이것을 이렇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봐라! 신들도 별거 없이 저러고 살지 않느냐? 하고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극이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이 발달합니다. 비극이 예술성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신화를 모티프로 해서 호메로스 이전에 탄타로스 라는 사람이 있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 라는 거목들이 이어집니다. 비극을 상영을 하는데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원형경기장은 산이 이렇게 돼있는데 산을 깎아서 스탠드로 만듭니다. 그리스 시대에 벌써 18,000석이 들어가는 야외공연장이 탈레스가 살던 고장에 이미 있었습니다. 비극을 써서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오늘날과 같지 않고 원맨쇼 같이 한 사람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역이 없어서 무대가 있는데 관중석에서 안보이게 무대 앞을 파가지고 오늘날에 오페라 할 때 연주단들이 밑으로 내려가서 안 보이고 무대만 보이게 만듭니다. 여기에 15명에서 25명 되는 노래 잘 하는 코러스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와서 ‘아! 이 괴로운 인생을 왜 살아야 되나?’ 독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코러스가 저 쪽을 보는 게 아니라 관객들과 같은 방향으로 등지고 무대 쪽을 보면서 ‘너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았잖아! 네가 살기 싫어도 살아야지.’ 그러면서 상대역을 코러스로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도 그렇지 내가 아폴론의 명을 받아서 내가 이렇게 산다면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러면서 고뇌를 하면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명 가지고 너무 재미가 없고 선율도 그 때는 단조로웠습니다. 그 다음에 소포클래스에 와서 2명 까지 나오고 마지막에는 3명 까지 나오면서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러스가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머릿속에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리스에 가보지 않으면 못 느낍니다. 로마시대 때와는 달리 그리스 시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상당한 권익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노예를 죽이면 바로 법정에 고발이 됩니다. 정당한 이유로 죽였는지를 문초를 당하게 됩니다. 추울 때는 바람 불고 비가 오니까 못하고 지금 우리의 여름 같은 때로 보면 다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만 천으로 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다 낡았으니까 지금은 흔적도 없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무대 뒤에서 나오고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비밀이 여기서 연기하는 소리가 12,000명이 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큰 발성을 했겠지만 음향학적으로 최대의 설계입니다. 거리를 똑같이 해서 타임 랙이 없이 똑같은 시간에 130도 이상으로 소리가 다 도달해서 울려 퍼지게 했던 것입니다. 반드시 산을 끼어서 부채꼴로 된 지형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무대는 지금의 극장 무대하고 똑같습니다. 기대는 것만 없을 뿐이지 올라가는 계단과 자리까지 다 똑같습니다. 기대는 것이 있는 곳도 있는데 귀족들이 앉는 곳입니다. 푹신한 담요 같은 것도 다 가져갔습니다. 일을 일찍 끝내서 여름을 기준으로 보면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4시 정도에 일을 끝내고 내려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극은 밝은 낮에도 안 되고 어두워져도 안 되고 석양이 기울기 시작하는 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극을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듣고 아사밤 에서 ‘어떤 사람이 못 일어나고 있었다’ 했는데 내가 상상한 것입니다. 비극을 다 들으면서 펑펑 울면서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서 동네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 삶들은 왜 비극을 좋아했을까?’입니다. 우리 같으면 너무 우울하면 코메디같은 것을 봐야지만 해소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희극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없습니다. 자기 삶이 평생 자기 땅도 없고 종노릇하는 사람이나 부잣집이나 차별이 없이 모두 공연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의 민주정신, 평등정신입니다. 그러면서 귀족은 귀족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노예는 노예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인생에 염세와 비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보다 더 슬픈 사연을 거기서 보면서 눈물을 확 쏟는 것입니다.
첫째로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담할 때 울면 울지 말라고 하지 않고 기다려 줄 테니까 울어라. 합니다. 한참 울고 나면 어느 순간에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맨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람들에게 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인생에 고통이 계속 되는 것은 비관적인데 자꾸 희망을 가지려고 할 때 고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짜 의학적으로 반드시 죽을 사람인데 살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몸부림을 칠 때 오늘날에는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그 사람들 생각에는 헛되게 운명에 저항을 하면서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희망고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비극을 보면서 거기서 배우는 것이 인생에 대한 체념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세상만사는 마음대로 안 되고 사랑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조국을 배신하지 않아도 조국은 나를 배신할 수 있구나. 당연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헛된 희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 하나는 비극을 보면서 자기 인생의 비극은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이디푸스 왕 같은 것을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신탁을 받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자기는 스스로 눈을 뽑아버립니다. 내가 지금 돈에 쫄리고 남편하고 사이가 안 좋고 자식이 일찍 죽어서 서러운 사람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고 나면 내가 지금 겪는 것은 새 발의 피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인생의 무게가 약간 가벼워집니다. 사실 희극적인 삶을 원했기 때문에 비극을 택한 것입니다.
이 비극에서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메로스 이전까지는, 호모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전까지는 그리스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개의 기둥 같은 정신이 있습니다. 아폴론적인 정신과 디오니시우스적인 정신입니다. 아폴론은 그야말로 지혜의 신입니다. 아폴론은 이성의 신입니다. 아폴론적인 것은 형언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어떤 한계를 딱 짖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지금 초석에서 유리를 잔뜩 뽑았습니다. 유리가 액체인데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에 부글부글 끓는데 장인이 그것을 떠서 돌려서 후 불어서 이게 만들어집니다. 성질은 유리인데 이 유리는 이 유리와 다릅니다. 이게 아폴론적인 사물의 성격입니다. 한계를 짓고 개별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뜨거운 속에다가 던져버리면 다 용해가 돼서 이 모양이나 이 모양이나 유리액체가 되는데 그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우리가 볼 때 야! 이 기둥 진짜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라고 하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이고 전체적인 디자인이 너무 예쁘다. 이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디오니시우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디오니소스라고 하는 신이 나오는데 모든 신들 중에서 해명이 안 되는 이상한 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리스에서 탄생한 신이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시작해서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지중해를 지나서 이집트를 지나서 그리스도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우스의 이름을 로마스로 부르면 바쿠스라고 하는 술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늘 술독을 옆에 끼고 술에 취해서 이렇게 있는 신입니다. 이성하고 거리가 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신입니다. 어쨌든 이 두 개의 정신이 있다고 보는데 호메로스 이전까지는 디오니시우스적인 것이 우세했습니다. 호머가 나타나면서 아폴론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합니다. 신, 인간, 너의 운명, 나의 운명을 딱 구분을 짓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신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모이라(μοῖρα, 운명) 이라고 합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보면 오딧세우스가 엄청난 방황을 하다가 자기를 기다리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거기서 어느 왕국에 잡히게 됩니다. 거기에 여신이 살고 있는데 너무 예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신인데 오딧세우스라는 사람에게 한 눈에 반합니다. 너. 나하고 살자. 내가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딧세우스가 나는 싫다. 나는 내 아내에게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당신 아내가 나보다 몸매가 예쁘냐? 물으니까 우리 아내의 몸매는 당신의 몸매와 비교할 수가 없다. 당신은 완벽하다. 너무 너무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런데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탁이 떨어집니다. 오딧세우스가 가려면 천신만고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되는 것입니다. 오딧세우스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올 때까지 사이렌에게 시달리고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갈 때까지 그런 거 한 번쯤 더 겪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게 대답합니다. 그게 말하자면 호머식의 사고방식입니다. 비극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전에 아이스킬래스도 있지만 거기서 소포클래스로 넘어옵니다. 소포클래스로 와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는 비극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러면 안 되는 데 불이 신들의 세계에만 있는데 그것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기술을 전수해주게 됩니다. 신들의 세계가 발칵 뒤집히고 신들의 운명이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거기서부터 아폴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사고방식으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완전히 구별되고 운명이 있어서 인간을 실로 꿰서 놓고 신들 맘대로 인간에게 장난질을 치고 그 장난질에 인간은 울고 웃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자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당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포클래스가 와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극을 꾸밀 때 너희들이 한 번 당해봐라. 하면서 인간이 신의 운명도 좌우할 수 있다는 플롯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아폴론적인 사고방식,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거의 미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게 원래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명랑성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소포클래스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신들의 세계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신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에우리피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적일까요 디오니소스적일까요? 이성을 끝까지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미움을 받은 이유가 맨날 왜? 라고 묻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고발할거야. 왜? 노예를 죽였어. 이건 부당한 거야. 그러면 너는 그 아버지의 자식인데 그렇게 하는 게 옳으냐? 나는 이게 정의라고 생각해. 그럼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지 않냐? 그러면서 계속 왜? 라는 질문을 해 가지고 마지막에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All that I know is that I know nothing) 거기까지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골탕을 먹이려고 한 게 아니라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자기도 알고 싶어서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까지 갑니다.
에우리피데스에 와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오니아적 명랑성 이런 것들을 떠나서 소크라테스적 명랑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적 명랑성은 포기를 안 하는 것입니다. 왜인지 끝까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거구나! 라는 진리에 도달해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소크라테스적인 명랑성입니다. 그게 너무 도달하기가 지난한 길입니다. 아주 높은 수준에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할 정도에 까지 이르러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명랑성인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데 이거 하나만 바라보면서 사려면 수도사처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걸로. 살았고 플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모본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비극 같은 것들은 아주 혐오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거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 만큼 연극을 보러 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이오니아적인 명랑성이 아니라 진리와 씨름하면서 마지막에 자유에 이르는 그 길을 보여주는 것을 연극으로 도입을 하면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니체의 해석입니다.
결국 그리스 정신의 위대함이 시궁창으로 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셰익스피어 이전까지는 문학이 다 권선징악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뇌를 실존주의적으로 그대로 보여줍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불러들입니다. 오셀로, 맥베스 같은 것을 읽으면서 누가 나쁜 사람이다. 얘기를 안 해주고 그 속에 깊이 들어와서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보게 만들면서 마지막 판단은 자기에게 맡깁니다. 그게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문학의 대전환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답을 정해놓고 연극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마음에는 연극 중에서는 그래도 자기 사상을 따라오니까 마음에 들어서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의 비극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명랑성의 문제가 그리스 철학에서 굉장한 화두였습니다. 그것을 내가 이번에 기독교적으로 재해석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