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소명과 헌신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녹취자: 백지영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본받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마음을 확 잡아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약을 읽다가 보니까 이런저런 인물이 오가는데 그렇게 마음을 끌지는 않습니다. 신약을 읽다가 보니까 바울이 그래도 내 내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가 자기는 다윗의 팬이니까, 부부일심동체니까 당신도 다윗을 좋아해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번 구약을 살펴보니까 다윗도 훌륭한 것은 틀림이 없는데 난 오히려 요나단이라는 인물에 더 매력이 끌렸고, 바울, 바울 하는데 나는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좋았습니다. 이렇게 지조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그러다가 제 마음을 사로잡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세례 요한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해서 일생에 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다가 죽어야 될 것인가 하는 한 큰 그림을 그리는 첫 번째 스케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만남이 일평생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해주었다고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분 알다시피 정경선지자로서는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기준으로 구약의 시대를 마무리를 짓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 앞에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는 누가복음 3장의 기록을 보면 그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소명기사의 패턴과 아주 똑같습니다. 혹은 “알 누구누구”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 하는 이 대목이 똑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세례 요한을 바라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만 바라보지 말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약의 선지자의 경험을 가지고 신약시대를 예언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한 사람이었고, 구약과 신약의 가교를 놓는 아주 중요한 정경선지자 못지않은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할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세례 요한의 생애를 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사역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등장하실 때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하시고, 그리고 곧 헤롯에 의해서 목이 떨어져서 순교하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자료를 놓고 보면 그가 한 일이라고는 몇 편의 설교를 남기고 죽은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사회활동이나 특별한 봉사활동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런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신약의 한 시대가 열리는 위대한 나팔소리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 인물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긴 서론적인 이야기를 못하지만 그러나 이제 선지자로서의 이 세례 요한의 체험을 잘 관찰하면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체험과의 연속성과 그 다음에 신약을 예언하는 예언자로서의 아주 중요한 자질들을 함께 연결시켜서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누가복음 1장 80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순서를 따라서. 그 성경 구절을, 제가 4일 동안을 1장 80절을 읽었습니다. 4일 동안을 기도원에서 깨달은 내용들을 메모를 했는데, 그 메모해서 나온 책이 오늘 여러분들이 받으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초판입니다. 이것은 개정판인데, 이 책입니다. 거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파이디언’이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가 ‘어린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에서 ‘파이디언’이 꼭 어린이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베이비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저 다섯 살에서 여섯 일곱 살 된 어린아이라고 보기보다는, 갓난아이 적에 그 아이가 빈들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이 세례 요한이 에센에파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강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무슨 이유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사가랴와 엘리샤벳에 의해서 탄생한 이 세례 요한은 이상하게 예루살렘 제도권에서의 교육을 받지를 않고 광야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부모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모가 예루살렘에서의 교육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광야로 보내야 된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가게 되었고, 갓난아이가 광야에서 혼자 기어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 누군가가 돌보는 사람이 있었고, 그 공동체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때가 되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자라매’라고 하는 성장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성장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성장이라는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례 요한이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여러분들도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과 태어나는 것의 두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러분들의 육체적인 준비입니다. 육체적으로 성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살 때 이미 성경을 훤히 알고 계셨지만, 아마 예수님께서 성경만 가르친다고 하면 열두 살 때 사역을 시작하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이 되실 때까지 성장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의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성장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벌써 육체적으로는 다 성장을 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성장이라는 것은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몸이 잘 준비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여기서 푸른 꿈을 안고 목회사역에 접어들게 되시는데, 목회사역에 접어들게 되면 한없는 체력을 요구합니다. 돈은 은행에서 빌려 쓰면 되고, 지혜는 똑똑한 사람에게 빌려 쓰면 되고, 그리고 다른 것들은 컴퓨터나 현대기기를 이용하면 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건강은 어디서 빌려 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아프면 교회에서 약도 지어다주고 보약도 지어다주고 병원에 입원시켜주지만, 오래 아프면 언제쯤이면 그만 둘까 그러는 데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건강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그 일, 몸을 잘 관리하는 그 일이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운동을 하십시오. 미래에 최소한 30년 정도 쏟아 부을 수 있는 체력을 갖추도록 운동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가 아니라, 강력한 체력을 가진 운동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매들도 똑같이 운동을 하시고, 형제들에게는 나는 격투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특수부대 출신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평범한 사람 한 3대 1정도로 붙어도 한방에 눕힐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격투기 실력을 쌓으면서 강인한 체력을 기르면 정신도 함께 강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건강관리를 잘 해서 목회사역을 끝내는 그날까지 적어도 질병 때문에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연습을 지금서부터 가지고 건강에 대한 철학을 가져나가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역사를 보면 기라성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보면, 로버트 머리 맥체인 같은 사람이나 그리고 또 인디안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고 헌신했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같은 사람은 30세 전 20대에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걸출한 칼뱅, 루터, 그리고 쟁쟁했던 종교개혁가들이 대부분 50대를 넘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찰스 스펄전도 50대 중반에 유명을 달리 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혹독한 목회 사역 때문입니다. 한없이 건강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일찍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무한대의 건강을 요구하는지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면서 몸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저는 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십대 초반이 될 때까지 소원이 병원에 한번 입원을 해 가지고 꽃다발을 받고 문병을 받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얀 침대에 누워서 힘없는 얼굴로 문병을 받아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너무 튼튼해서. 열렬하게 일했습니다. 하루에 네 시간, 다섯 시간밖에 자지를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십년동안에 열두 번을 입원하고 열 번을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초판에서 건강에 대해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것을 내가 많이 겸손하게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개정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열렬하게 운동을 하고 해서 건강을 준비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건강만 준비해야 되느냐? 아닙니다. 건강과 함께 짝을 이루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순결입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매우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이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스캔들과 그리고 여기저기 도는 루머와 이런 많은 이야기들이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문화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이런 것들에 대한 경계심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몸에 많은 부위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한번 찔리면 결정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그런 육체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심장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간이나. 마찬가지로 아킬레스건입니다. 그래서 만일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서른네 살에 신학교 교수가 되어서 중간에 한 7, 8년 정도 쉰 것을 빼놓고는 계속 학교에서 가르쳐왔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학생들을 상담했습니다. 그 학생들 중에서 이 문제에 걸려서 넘어지는 학생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심지어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남녀 두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어가는 상황까지도 지켜보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깊은 경계심을 가지고, 이 현재에 흐르는 이러한 음란하고 그리고 성에 대해서 개방적인 문명에 대해서 도전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한 용기와 윤리관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스마트 폰이나 이런 스마트 기기에서 많은 것들을 소비하는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리고 그런 포르노그래피 같은 것들을 접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주의하지 않고 만약에 접하게 된다고 하면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서 섹스홀릭 같은 데 걸리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지금은 경고의 종소리조차도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신학교에서 이런 경고의 종소리들조차도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야기를 하나 드리자면 길선주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대부흥을 일으키고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영업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것들이 기생이었습니다. 한량들이 와서 수없이 술을 팔아주고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하자면 평양기생협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영업전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했더니, “길선주 목사가 주범이다. 그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회심을 시켜서 술꾼들이 술을 끊고 기생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예배당을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조치를 취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 기생 협회에서 가장 탁월한 미모를 가진 기생을 뽑아서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그리고 가장된 회심으로 은혜를 받는 척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는데, 그런 유명한 목사님들이 어디 다니실 때는 호텔도 없고 하던 때니까 항상 자기의 수발을 들게 하기 위해서 여성 한명씩을 대동하고 다니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거기를 자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모든 것을 챙겨주었습니다. 그러다 목사님이 어느 집회에 가셔서 고단하게 집회를 하고 낮 시간에 잠시 대청에서 쉬고 계시는데, 여자가 살며시 다가와서 “목사님 사랑합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길선주 목사가 어떻게 했을까요? 한방에 벌떡 일어나서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던져버렸더니 여자가 대청마루에서 굴러서 댓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획을 긋고 지나간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음의 정욕에 유혹을 받는 시기라고 하는 것을 인정을 할 수 있지만, 거기서 그것과 더불어 싸우는, 그러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연습들을 하고 순결한 사람으로 자라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순결한 마음에 신령한 빛이 비친다고 하는 것은 찬송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는 육체적인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건강과 순결.
두 번째는 지성적인 준비입니다. 목회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우리 말하기는 “목회사역은 그저 교인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목회의 본질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일을, 그러니까 데오스 데올로기아(Theos Theologia), 하나님과 인간에 한한 일을 지혜로서 가르쳐서, 그 사람들의 영혼이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목회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면, 빌립보서 1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져서’라고 했던 것처럼, 그 지식과 사랑을 우리 안에서 증대시키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는 그 지식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식과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느냐? 그것은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목회자의 체험이 평신도의 체험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개혁신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조차도 이 목회자의 목회의 소명은 평신도의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 것이지요. 다만 둘의 차이는 정도와 수준의 차이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는 쥬다이즘,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지요. 자기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면서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면 살아났을 리가 없고, 살리실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으면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실 리가 없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다가, 거기서 대속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그 비참한 저주가 사실이었는데, 그게 당신 자신의 죄 때문에 말미암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 모든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신 대신적(代身的)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내포적 대신(內包的 代身)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아가페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태까지 배워온 모든 역사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왔고 이후의 역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시발점으로 달려가는 역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세계와 역사, 인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고 코페르니쿠스적인 폭발적인 변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 그 핵심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소위 이야기하는 까리따스의 반응입니다. ‘지순애(至純愛)’라고 내가 번역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가페 사랑에 대한 인간 에로스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결국은 까리따스의 사랑은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인데, 그래서 그 사랑은 결국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의 지평 융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다 아가페로 기록을 합니다. 어쨌든 교부들에 의하면 그렇게 사랑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깊이 갖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실체를 보고나서 다시 그 동굴로 내려온 것이 하나의 아낭케(Ananke), 숙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 깨닫고 나니까 이전의 자신처럼 비참하게 살던 모든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이 그 사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정상적인 직업 활동에 종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자기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은 강한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것이 김세윤 교수에 의하면 ‘디바인 엔폴스먼트(divine enforcement)'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디바인 엔폴스먼트 오브 러브(divine enforcement of love)'입니다. 신적인 사랑에 대한 강제력이 내 마음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 저렇게 예전의 나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불행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하는 강한 어떤 아낭케(Ananke), 숙명이 자기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든 성도들에게 다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없으면 사실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이것을 너무 극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에 종사하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되겠다, 그 일을 위해서 내 자신이 불사르게 내어져서 불태워질지라도 나는 기꺼이 좋다 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는 그것을 우리들이 목회의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명은 학교에서 받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의 비극은, 이런 목회의 소명이 없는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의 교수로 있는 한 30년 동안에 수많은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내보내는 것을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소명이다. 만약에 너희에게 이런 소명이 없다면 신학교를 다니지 말아라. 그리고 가서 세속 직업에 봉사하면서 한 교회 목회자를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제가 대충 기억나는 사람만 2백 명 내지 3백 명을 신학교에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특히 이 책이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신학교를 그만 두게 만들었습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아니요.” 그리고 그만 둔 것이지요.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고 떠나서 가서 그 학생들이 사회에서 잘 삽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서원을 했는데 벌 받지 않을까요?”, “내가 보증하는데 벌 안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면 된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 둘 용기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하십시오. 자, 얼마나 좋습니까? 방학하고 나면 두 달이라는 기간이 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소명의 문제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면 한번 목숨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소명이 없으면 내가 기도를 하다가 죽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나를 부르셨으면 확실하게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사인을 내게 주십시오.” 아니 우리의 인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그 길을 가면 불행해 질 것이고, 부르셨는데 안 가면 더 불행해 질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그 정도 용기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소명을 진작 받았어도 방학 때면 항상 일주일씩 금식기도 가서 성경학교를 위해 여름에 기도하고, 겨울에는 일 년 목회를 위해 금식기도 했는데, 자기 목회소명을 놓고 그까짓 거 목숨한번 던져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로 매달리면서 죽기 살기로 한번 기도해 보고 대답을 받고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이제 지식과 사랑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시작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신학교에 와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공부에 대해서, 신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되는지를 강의하라고 하면 아침 아홉시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정해진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양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 책에서, 그러니까 ‘맨 오브 북스(man of books)'가 되지 말고, ‘호모 유니우스 리브리', 라틴어로, ‘한 책의 사람이 되라.' 그 한 책을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성경을 놓고 성경에서 확장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성경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결코 성경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밖을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접학문부터 공부를 해서 힘이 닿는 대로 멀리멀리 나가서 돌되, 항상 성경을 축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자기의 능력에 닿는 것만큼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성경 근처에서 도십시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성경에서 더 멀리 떠나서 여러 학문을 다 도십시오.
기본적으로 이런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논리적으로 창조에 대한 아이디어가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지성이 폭발하듯이 퍼쳐 나오면서 이 세계의 모든 개별 사물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은 모두 역으로 거꾸로 환원하면,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던 것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가리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상적인 개신교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심지어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인데 그 일부분을 탈취해 다가 자신의 마음대로 배열을 한 것이다.” 기독교지성의 사명은 그것들을 다시 이해하고 올바른 조합을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지성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공부를 계속해서 뻗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이런 공부를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해야 될 작업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심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책이 읽기 싫으세요? 목사소명이 아니실 것입니다. 목회는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소명을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살았고 17세기에 대부분 활동했던 화란의 개혁신학자 가운데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주 굉장히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데올로기아 코라타를 이야기합니다. 데올로기아 코라타는 오염된 신학입니다. 왜 사람들의 신학이 오염되는가? 특히 지성과 관련해서 신학이 오염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다섯 가지 이유를 꼽았습니다. 첫 번째 이유가 뭐냐 ‘하면 언어에 대한 무지’, 두 번째가 ‘역사에 대한 무지’, 세 번째가 ‘인문학에 대한 무지’, 네 번째가 ‘경건에 대한 무지’, 그리고 다섯 번째가 ‘신학에 대한 무지’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신학이 오류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언어에 대한 무지’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언어에 대한 무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자체를 잘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성경언어를 공부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헬포자고 히포자들입니다. 헬라어 포기자, 히브리어 포기자. 아람어는 아예 시작도 안했지요.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 학교의 선생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학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40여년이 넘도록 설교를 했고, 지금도 한 지역교회의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성경의 원어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목회에서 매우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교의 진실성을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은 희랍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랍어는 호메로스 그릭, 아티카 그릭, 그리고 코이네 그릭으로 나뉘어집니다. 할 수 있으면 호메로스 그릭까지는 몰라도 아티카 그릭까지 하기를 바랍니다. 아티카 그릭을 읽으면 여러분들이 이제 고전작품들을 읽을 수 있고, 그리고 또 동방교부들의 작품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코이네 헬라어를 해서는 여러분들이 얼리 크리스찬(Early Christian들을 읽을 수 있고 신약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신약성경을 펼쳐놓고 우리 말 성경에서 잘못 번역된 것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지, 그것도 안하고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해군에 간 사람이 바지에 물을 안 적시겠다는 것이고 육군에 간 사람이 바지에 흙 안 묻히겠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은 날로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헬라어 못지않게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구약성경이 거의 전부다가 히브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서와 그리고 다니엘서들 중 일부는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람어 반드시 공부해야 됩니다. 더 이야기하면 더 깊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도 comparative philology까지는 몰라도, 비교언어학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 세 언어는 최소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것은, 한글성경을 놓고 어디가 틀렸는지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된다 이것입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됩니다. 제가 히브리어를 공부할 때에 구약성경 3분의 2 전권을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다 읽었습니다. 원서로. 모세오경은 제가 여섯 번을 읽었습니다. 저는 아예 모음 없는 자음 텍스트로 읽었습니다. 물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때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소중한 계시를 공부해도 알 수 없는 언어에다가 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 믿음은 적중했습니다. 읽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원어로 읽어나가면서 한글성경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리고 영어성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킹제임즈버전도 오역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올바로 잡아 나아가면서 성경의 진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은, 전문가로서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베이스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언어는 이 정도로 하고,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공부해야 될 것은, 언어이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인문학에 대한 소양의 부족이 데올로기아 코라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무엇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문헌학에 대한 연구, 그리고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되는 연구입니다. 나는 이것을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여기에 계시는 최윤배교수님의 스승이 빌렌반 스페이커르라고 하는 화란의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96세인가까지 사셨는데 현존하는 최고의 마틴 부처 연구가입니다. 그분을 제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교제를 갖고 예닐곱 번 만났습니다. 자택에서. 만났을 때 그분이 하신 이야기가, 한 학생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철학이 이 신학에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너희가 철학을 모르고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겠니?" 그 보수적인 분이. 특히 너희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고는 절대로 신학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부터 시작해서 논리학, 그리고 52권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모두 읽을 필요는 없지만, 특히 철학과 신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책들은 반드시 읽으면서 개념을 잡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서양지성사의 뼈대를 이루고, 이것을 빨리 받아들인 민족일수록 대학이 빨리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과 그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 사람은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플라톤은 지혜의 근원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학문의 방법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얘기고, 그 다음에 역사입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 그러니까 일반역사와 교회사에 대한 무지. 그리고 네 번째가 경건에 대한 무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러한 경건생활과 신앙생활, 목회경험에 있어서 끊임없는 실패가 신학을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신학에 대한 무지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할 때 동방 교부의 모든 저작과 서방교부의 모든 저작들을 읽는 것으로 신학을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터널티판으로서 나온 CCLS Series로 되어 있는 동방교부와 서방교부에 관한 책들, 그 전집이 일억 원이 넘습니다. 나는 오백여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 3백 권 밖에 못 갖고 있는데, 그 책을 거의 모두 읽는 것이 그 당시의 신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거의 외우고, 그 다음에 교부들의 그 작품을 거의 모두 숙독하고 있는 것, 거기서부터 독창적인 신학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킬 수 없겠지요. 그러나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놀지 말고 쉬지 말고 공부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라고 이야기한다면, 목회를 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부의 양이 어느 정도일까? 그게 뭐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사법고시 하는 사람들이 대학정도를 졸업하고 ‘리갈 마인드’( legal mind)가 생길 때까지 독서량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3년 정도에 생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개인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도 ‘씨올로지컬 마인드’(psychological mind)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한 양의 독서와 특별히 사색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놓고 볼 때 나는 공부에 전념하는 시간이 최소한 7년에서 10년은 되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가장 한가한 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임사역을 하고 담임목사가 되어보고 나면 눈물이 날 정도로 서럽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내가 서점에 가서 울었습니다. 왜? 이 책을 다 사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목회가 하고 난 다음에는 제 서재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책이 없냐? 아닙니다. 제가 6만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냐? 읽을 시간이 없어서 제가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이른 아침 새벽기도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밤늦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 수도 없습니다. 외부의 활동을 안 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밀려닥칩니다. 그런 속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아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내용이 없는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씨름하면서 공부와 목회를 겸하면서, 일평생 자기 자신이 지적인 성숙에 토대한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가도록 몸부림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손을 책에서 놓지 말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신학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를 2000페이지의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원고를 먼저 출판을 했는데,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 왔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미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양의 공부를 우리들이 소화하면서, 자기가 지적인 도전이 없이는 결코 영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두 개가 함께, 지적인 도전과 영적인 도전이 마차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삶으로 승화시킬 때, 그때 거기에서 수많은 설교해야할 내용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신학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관해서 17세기의 패투르스판 마스트리우트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데올로기아 에스디 비벤디 데오 페르 크리스툼”, 다시 말해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삶 전체를 그 지식 속에 녹여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학문적인 노력을 지금과 비교되지 않게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팁을 하나 드리자면, 이렇게 하십시오. 학교공부는 학교에서 끝내십시오. 학교공부는 학교에서 그리고 학기 중에 모두 끝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한 학기에 페이퍼를 쓴 것을 모두 모았는데, 한 학기에 A4용지 500페이지였습니다. 그것을 6학기를 M.Div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업에서 하는 공부는 방학 이후로 미루지 말고 그 안에 모두 소화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주교재, 부교재까지 모두 읽고 레포트 다 끝내고 종강하는 날 나는 이 과목과 손을 뗀다는 각오로 공부를 하고, 방학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그리스고전부터 교회사, 특히 해당되는 것이 성경 신학, 그 다음에 교회사 그리고 조직신학과 사상, 기독교철학과 현대문화 이런 것들에 대한 상식을 계속 넓혀 가야 됩니다. 방학 때쯤 되면 12월부터 시작해서 2월까지 내가 백 권의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고, 읽어야 될 책을 위에다 쌓아놓고 한권씩, 한권씩 쳐 내려가는 것입니다. 물론 1페이지부터 마지막페이지까지는 못 읽겠지만, 중요한 현대의 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읽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이 M.Div 3년만 보내면, 그렇게 안 하고 지금처럼 놀면서 보낸 학생하고 둘이 앉아서 밥을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지적인 수준이 통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교회의 가장 심각한 재앙은 아는 것이 없는 목회자가 아는 것처럼 설교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은,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위대한 능력은 내가 원한다고 갖는 게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며 생각할 때 확실히 우리 목사님은 나보다는 성경과 이 세상 지식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안다, 하여튼 설교의 은혜를 못 받아도 최소한 새로 얻을 지식이라도 있다고 하는 정도는 되어야지 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역사신학 하신 분은 역사신학 안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구약하시는 분은 구약에 대해서 모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전체를 통합해서 필요한 그런 융합적인 지식이 목회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따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여러분들이 계속 공부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몸부림치면서 여러분들이 공부의 끈을 놓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 교인들에게 교리반에 들어올 때 가르친 것인데, “스튜데오 에르고 숨”,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 폴리오르 에르고 숨(si fallor ergo sum)”,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서른네 살에 신학교 교수가 되고 서른여섯 살 때의 일이었는데, 아주 신실한 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교수님, 정말 2년 동안 교수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뭐냐?”, “교수님은 혹시 교수님이 일 년 동안에 우리에게 소개시켜준 책이 얼마큼 되시는지 아십니까?”, “그거 내가 모르지.”, “저는 교수님이 소개시켜준 모든 책을 1년 동안 다 읽었고, 그렇게 이태동안을 목사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한 해에 읽은 책이 제 한 키였습니다.”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한 키. 일 년에 한 키. 이렇게 세워놓고 한 키가 아니라 눕혀놓고 한 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공부하지 않는 것이 신학생으로서 직무유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목회를 이야기하자면 이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진실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뭘 모르는 사람이 진실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자꾸 거짓말을 해야 되고 꾸며야 됩니다. 본질을 빗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학문에 대해서 탁월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가야 됩니다. 능력이 닿으면 일반학문에까지 뻗쳐나가면서 항상 성경의 끈을 놓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눈물 흘리는 책은 성경 한권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의 설움을 모두 쏟아놓는 그 기도의 책은 성경 한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두 눈을 빛나게 하는 책은 이 한권가지고 안 됩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평생 살면서 철학은 부전공이라고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왜 중요한지는 이제 책을 읽으면서 보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첫 번째 육체적인 준비는 육체와 건강(건강과 순결), 지성적인 준비는 성경과 학문, 세 번째 인격적인 준비는 성품과 생활입니다. 자,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결국 한 사람의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에게 어울리는 인격을 가지는 일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축적을 통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성품과 생활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이다.” 최고의 복이다.
복에는 크게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이것들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남다른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태어났는데 나는 핍박도 안 받고, 굉장히 큰 교회의 목사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전적인 후원으로 신학교에 와서 걱정 없이 공부하고 있다.”, “결혼을 했는데 의외로 성품이 좋은 남편을 만났다.”, “아들을 낳았는데 너무나 머리가 좋아서 서울대에 갔다.” 이것은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전자는 광범위하게 베라카의 복이고, 후자는 아세르의 복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어 성경에서 “마카리오이 호이 푸토코이”라고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시작하는 그 팔복의 선언에 나오는 그 마카리오스의 구약 ‘커래스펀던트’(correspondent)가 ‘에세르’입니다. 그 ‘에세르’가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그것은 언약백성만 받을 수 있는 복이고,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복입니다. 그것을 영적인 축복, 영혼의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품을, 우리의 인간성을 변화시키고 성화시키고 새롭게 만듭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설복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너무 훌륭하지요.
저는 어제 선배목사님 한분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갔다 왔습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목사님입니다. 경기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서울대를 나오셨는데,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하시고 그리고도 공부를 해서 결국은 주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3만 명의 교회를 일구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십여 년 전에 은퇴하실 때 굉장히 커다란 액수의 전별금을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10년 지나고 통장을 열어보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동안에 다 쓰신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사람의 명단과 금액을 적어서 돈하고 같이 교회에 보내주면, 교회에서 그 목사님의 지시대로 사람들에게 수없이 십년간 돈을 도와왔던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설교한 것은 공기를 울리고 그 사람이 사라지면 설교도 사라지지만, 그 사람이 끼쳤던 인격적인 감화는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다니엘 호든의 '큰바위 얼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내용을 내가 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결국은 장군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누구도 큰 바위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바위의 얼굴을 매일매일 바라보며 살며 늙어갔던 촌부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큰 바위의 얼굴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바라보면서, “그 큰 바위의 얼굴과 같은 저런 인자하고 훌륭한 인물이 이 동네에서 나올 텐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굴까? 한번 만나보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그의 성품을 다듬어지게 만들었고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큰 바위의 얼굴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 그것을 고린도서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괴로워서 운 적 있습니까? 그 괴로운 게 등록금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괴롭혀서가 아니라, 장로들이 속 썩여서가 아니라, 교사들이 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사역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왜 나는 이 모습일 수밖에 없을까? 하나님 내가 이 모습인 것이 너무 죄송합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은 그 사람을 잘 아는 것입니다. 지식에 갈망이 없는 사랑은 정욕입니다. 이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고 육체만을 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육욕입니다. 그 사람을 아는 기쁨은 그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기쁨하고 비교할 수 없이 감동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그러면 예수에 대한 사랑이 무엇으로 증명되느냐 하면, 희생적인 생활 그런 것에 의해서 입증되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싶어 하는 갈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모든 지식들을 다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씨름하면서 자기 자신이 온전한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거기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그 갈등 속에서 나는 죽고 예수는 내 안에 사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신학교 다닐 때는 연단의 기회가 아주 많습니다. 우선 우리 과거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너무 배고픔의 연단이 있었습니다. 우리 때이었는데도, 그때였는데도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진짜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민주화 운동 때문에 학교가 거의 휴학이었습니다. 하루에 적게 하면 열다섯 시간을 공부했습니다. 많이 하면 열여덟 시간. 세 번을 학교에서 쓰러졌습니다. 내가 왜 쓰러졌는지 모르는데 모든 게 갑자기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님 연구실에 있다가 두 번을 쓰러지고 또 문밖에서 한번을 쓰러지고 세 번을 쓰러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영양실조.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고난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더 위험한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신학 공부할 때, 그저 국민소득 15,000불? 12,000불정도 될 때입니다. 지금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어떻게도 굶는 사람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만큼 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될 시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모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연단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목회사역의 연단은 여직 남아 있겠지요. 그렇지요? 많은 신학생들이 교회 가서 봉사를 잘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할 수만 있으면 신대원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교회에 유급 봉사를 하지 말고 열렬하게 공부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대신 교사나 구역장은 꼭 해야 됩니다. 거기서 진심을 담아서 영혼을 위해서 흐르는 눈물이 한 주도 그런 눈물이 없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사명감 없이, 사명감 없이 전도사만 오래한다고 해서 목회적인 경험이 쌓이는 게 아니라, 교사를 해도 눈물로 목양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1년 한 것이 오히려 목회에 더 큰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사들이 와 가지고 1년 있다가 사표를 내고 떠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교회 온지 6개월 될 때부터 떠날 교회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정함이 없는 사람이 목회사역을 거기에서 승부를 볼 수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교회를 옮기면 많이 기도하고 가고, 간 다음에는 하나님이 옮겨라 할 때까지 죽은 듯이 엎드려서 모든 고난을 감내하며 거기에서 목회에 자기 자신을 쏟아 부어야 됩니다. 직책이 전임이냐 무슨 파트타임이냐 이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자본주의적인 논리로 접근하지 말고, 이 교회가 내 교회라고 생각하고 매달려야 됩니다.
저는 회심하고 세 교회를 다녔습니다. 회심하고 세 교회를 다녔고, 두 교회에서 각각 7년, 8년씩 봉사하고 마지막에 한 교회에 1년 반 있다가 열린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두 교회 사역자로 있는 동안에 단 하루도 내가 담임목사님보다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는 담임목사님 앞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천국 가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주셨습니다.
제가 교수할 때 일이었는데, 교수할 때는 사람이 교만해 지지 않습니까? 또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으니까 학생들이 어떻게 따르는지 귀찮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엄하게 했는데도 그렇게 따라다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만 가면 겸손해집니다. 왜? 그때 제가 중고등부를 전도사를 하고 있었는데 애들이 전혀 회심을 안했습니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피를 한 컵씩 쏟았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그래서 교회를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너 그만 두면 안 된다.”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절 보고 죽으라는 뜻입니까?”, “안 된다.” 결국은 건강도 약해지고, 일주일에 거의 20시간 이상 강의를 하고 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를 했으니까 그 고난이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교회를 갔습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토요일 날 오후까지 설교준비를 모두 끝내고, 그때 중고등부 설교를 제가 한 주에 한 여덟 시간 내지 열두 시간 준비를 했습니다. 길면 열다섯 시간 준비를 했습니다. 설교를 완전히 준비를 끝내고 교회에 가서, 이것 한 사분의 일, 중고등부니까 이것 한 오분의 일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가서 청소를 다시 깨끗이 하고, 사찰이 하는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깨끗이 다시 하고 밤새워서 철야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그것을 2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하는데 놀라운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드리면 막 비행기를 날리던 아이들이 설교를 하는데 눈물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3분의 1정도는 예배를 드리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하다가 쓰러졌습니다. 울다가, 울다가 쓰러져버렸습니다. 저의 설교자로서의 하여튼 소명의 체험을 그 중고등부 전도사 하면서 체험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여태까지 내가 알았던 신학은 흑백사진이었는데 총천연색 동영상으로 신학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제가 설교자로서의 데뷔였습니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제가 열린교회도 개척하지 않았을 것이고, 제가 이것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어디 유학 가서 셈족 언어 좋아했으니까 토판이나 놓고 공부해갖고 와가지고 뭐 좀 했겠지요. 토판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카드어도 공부했고 우가리더는 혼자 독학을 해서 토판을 읽었고 수메르어까지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 자기의 모든 고난을 사용해서 자기가 깨어지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져 가는 과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이 죄에 빠져서 살게 되는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두 개를 꼽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의지적으로는 아모르수이, 자기사랑이고, 그리고 지적으로는 휘브리스, 교만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주 놀랍게 서로 상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만을 내포하고 있고,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사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기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17세기의 신학자 존 오웬이 자기의 ‘모티피케이션(Mortification)’이라고 하는 책에서, ‘모티피케이션 오브 씬(Mortification of Sin)’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계속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예수를 닮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가장 은혜가 좋아하는 두 가지 축이 있다 이것입니다. (favorite ?) 그런데 하나가 뭐냐 하면 ‘모티피케이션 오브 씬’, 매순간 죄를 죽이면서 사는 것과 또 하나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 속에서 우리는 점점 옛사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이제 칼빈이 ‘비비피케이션’(vivification)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죽이고 은혜는 ‘비비파이’(vivify), 살려내면서,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끊임없이 닮아가는 가운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현란하게 말을 늘어놓는데 감동이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올라가서 짧게 연설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 울림이 너무나 커서 강연이 끝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그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그게 결국은 오늘 여기서 읽은 것을 오늘 설교하는 것은 전자이고, 이것을 자신 안에 녹여서 이것이 여기서 수용이 되어서 다 자기의 피가 용해되어가지고 자기 언어화되어가지고 나오는 이것은 후자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아주 늙었을 때 제자들이 부축을 해서 강대에 올려놓으면 손을 들고 설교를 할 정도의 기운이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부탁하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란다."라고 하면 눈물바다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인격과 삶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결국은 우리의 설교가 본문이라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각주입니다. 본문이 좀 부족해도 각주가 탁월하면 학문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합치되도록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자기변혁과 자기복종의 삶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티그마(stigma)’입니다. 그런데 복수로 나옵니다. ‘스티그마타(stigmata)’ 옛날에 노예의 이마나 혹은 목이나 이런데다가 팔이나 이런데다가 새겨주던 문장입니다. 누구네 집안에 소속된 노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로마군인들 에스큐알(SQR)이라고 새기고 다녔지 않습니까? 여기다가. 그렇게 새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육체에 있는 그 핍박을 받아서 받은 그 스티그마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정신 속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 속에 새겨졌고, 그것이 그의 DNA 자체를 바꾸어 놓아서 예수처럼 살지 않게 만들 수 있었던 그 무엇이 그에게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 설교는 그 인격과 삶속에서 우러나오는 언어가 되고, 그 언어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예수 닮은 인격을 보여줄 수 있을 때, 그때 그 설교자는 살아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마지막은 아니지만 그 다음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정서적인 준비입니다. 정서적인 준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과 열정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것에 대해서 진자운동을 보여줘 왔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사건이 있고나서 중심축이 세워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들이 나중에 로마의 사상적인 박해를 받으면서, 변증가들이 나오면서 신앙의 중심성이 이성으로 추가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대한 반발로 몬타누스주의가 나오면서, 몬타누스가 자기 자신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앙의 중심을 여기에 반동으로 감정 쪽으로 끌어갑니다. 그러다가 아주 굉장히 커다란 반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게 바로 그노시스주의, 영지주의입니다. 구원의 여부를 아예 지식에다가 두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반동이 일어났는데, 수도원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수도원 주의가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반동이 일어나면서 그 유명한 스콜라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스콜라주의의 영향력이 11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결국은 멀게 보면 14세기까지 지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것에 대한 반발로 소위 이야기하는 에카르트나 하인리히, 주조를 비롯해서 로이스베르크 같은, 부르크 같은 그런 인물들이 나오면서 13세기, 14세기에 말하자면 영적인 운동을 다시, 말하자면 신앙개혁운동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비체험이 중시되고 다시 이쪽으로 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중심을 다시 잡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지나면서 결국은 16세기, 17세기 접어들면서 다시 이성주의 쪽으로 흐르게 되고, 여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그 다음에 그런 운동들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네덜란드의 나데레 레포르마티오(Nadere Reformatio)운동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거기서 이제 독일의 경건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결국은 공교롭게도 2백년 후에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이성주의의 본산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추가 왔다 갔다 하면서, 금세기에 와서 튀어서 이쪽으로 나간 것들이 순복음 운동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지금은 이런 것들이 갈피를 못 잡고 오고가고, 아예 열정도 찾아보기 힘들고 지성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아주 혼란스러운, 강이 흐르다가 물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그런 비참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은 이제 그냥 가서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기능만 하면 교회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웅덩이를 파가지고 그 물을 길어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더 치열하게 준비되어야 하겠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과 열정에 있어서 준비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열정이 없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경계했던 게 무엇이냐 하면 빗나간 열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냐 하면, 빗나가도 좋으니까 한번 보고 싶은데 없습니다. 아예 자체가 없습니다. 빗나간 열정이 있어서 막 산에 올라가가지고 박수치면서 뭘 봤다고 그러고 이러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예 없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단 가운데는 있습니다. 이단 가운데 있습니다. 세계 선교 제일 열심히 하는 것도 다 이단입니다. 정통교회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은 없습니다. 교회당에 눈물이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여러분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여러분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다가 성경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오늘 아침 기도할 때 눈물 흘리셨습니까?
무엇 때문이지요?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격과 눈물이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내가 냈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배의 감격? 아예 그런 것 기대도 안합니다. 내 평생의 소원은 이것뿐, 빨리 예배 끝나고 가는 것입니다. 11시에 교회 나오는 이유는, 예배 끝나고 가려고 모이는 것이지 딴 것을 바라고 모이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불러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는 시대에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을, 바윗덩어리와 같은 사람들을 움직여놓게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열정이 그들의 냉담함을 능가해야 하고 여러분들의 사랑이 그들의 무관심을 능가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돌멩이 같던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놀랍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회심하게 됐느냐고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설교하고 목사님이 설교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예수님이 널 위해 죽으셨어.’ 하고 눈물을 흘리실 때 모든 게 내 마음에 믿어졌어요.”그랬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 자리에 앉아서 채플 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늙은이 얘기라고 하겠지만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삼십년이. 그때 우리가 목회사역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이제 더 이상 우리 안 써줍니다. 물러나야 될 때가옵니다. 역사에 의자를 비워주고 나올 때가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교회도 없습니다. 이제 사역지도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생활비는 좀 주려나?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인 둘이 남았습니다. 심지어 사모님 돌아가셨습니다. 아니면 남편 돌아가고 나 혼자 됐습니다. 갈 데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마지막 남는 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침에 여러분에게 특강하러 오기 위해서 교회에 들렀습니다. 잠깐 여러분을 위해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열네 살 이 개월 되던 해에 논둑에서 울면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전까지 교회 다녔는데.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고 6년 동안을 제가 다녔고, 그때 교양은 많이 넓혔습니다. 고등학교 공부 안 하고 실존주의자들의 작품부터 시작해서 문학, 철학, 특히 니체, 사르트르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를 정말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래서, 자기가 사랑과 열정에 있어서 얼마큼 자라가고 있는지를 측정해 보십시오. 그 측정해 보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하고 똑같은 사람 만나면 측정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아주 도움을 주었던 방법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금 딱 이맘때 진짜 읽어야 될 책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고 그것은 부담도 안 줍니다. 화장실에다 놓고 읽어도 되는 책입니다. 전철 타면서 읽어도 되는 책입니다. 전기. 위인들의 전기. 읽으면 충격을 받으면서 나와 이 사람은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여섯 권을 사서, 책을 일곱 권인가를 사서 읽었는데, 하나는 원서, 원서를 두 권을 샀는데, 그런데 한 열 번쯤 읽었을 것 같습니다.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품었습니다.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런 것을 읽으면서 비로소 사람들하고 비교하는 의식이 없어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영적인 준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했는데, 마지막으로 영적인 준비입니다. 그의 모든 준비는 마지막에 화룡점정과 같은 사건은 누가복음 3장에 있었던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하는 것으로서 마지막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사건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했는데, 도시에서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세례를 받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준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정리를 하자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측정하면 되느냐 하면, “내가 기도할 때 얼마나 도취상태에 들어가는가?” 그런 것으로 측정이 안 됩니다. “말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는가?” 그게 아닙니다. “일 년 동안에 내가 목회 사역했는데 영적으로 변화된 양떼들이 얼마나 되는가?, 나 때문에 예수 믿게 된 사람이 몇 명이고 나 때문에 깊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사람이 얼마인가?, 그리고 내가 설교할 때 몇 명이나 내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는가?, 그리고 삶에 대해 고민하는가?” 그것입니다.
제가 건강을 아직 잃지 않았을 때 한 12년 정도 교회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도 왔었습니다. 그래서 매주 한 번씩 해서 12주 정도를 책을 읽고 훈련을 받으면서 목회자의 소양을 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담임목사는 안 받으니까. 전도사님들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심에 대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회심아시지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렇게 해서 결국은 구원에 이르는 단회적인 회심이 있고 반복적인 성화의 회심이 있는데, 그 단회적인 구원에 이르는 회심 없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성인이,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의식이 있는 아이들이, 회심한 아이들이 구원받은 아이일 텐데, 그러면 회심에 대해서 다 의미를 알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신학적으로 자기들이 이해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숙제를 내줄텐데, 한 달 여유를 줄 테니까 네가 하고 있는 부서에 가서 너의 설교와 목회를 받고 설교를 듣고 목회를 받아서 몇 퍼센트나 구원받은 학생들인지 조사를 해 와라 그랬습니다. 조사를, 실제로 면담을 하면서 조사를 했습니다. 한 달에 걸쳐서. 그런데 학생들이 모두 다 얼굴이 하얗게 돼서 온 것입니다. 그 중의 한 학생이 기억이 나는데, 45명을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목회자의 양심으로 조사해 봤을 때 두 명 내지 세 명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고, 다섯 명 내지 여덟 명 정도는 잘 판단이 안서고, 나머지는 확실하게 구원 못 받은 아이들이다 결론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러니까 거기서 이제 결국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결국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주면서 저도 배웠습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웨슬리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가 아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를 목사들이 견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중의 한 사람이 물어보았답니다. 안내하는 사람한테. “웨슬리 목사는 어떻게 이 교회당에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까?” 그랬더니 그 안내하는 사람이 “가르쳐드릴까요?” 그러니까 “그러면요 알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강단에 올라가십시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가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웨슬리가 기도하던 그 강단의 의자입니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꿇었습니다. “엎드리십시오.” 엎드렸습니다. “자, 지금부터 우십시오. 그게 웨슬리목회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릎을 꿇을 수는 있지만 바로 그 순간에 눈물이 나올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목양하는 양떼들을 기억하면서 울지 않는다면 목자 아닙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위해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면 삯꾼입니다. 그렇게 목회해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한계에서 깊게 몸부림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 뭐라고 나오냐 하면 “빈들에서”라고 나옵니다. 에레모스입니다. 광야입니다. 고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외롭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가운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러면서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변화 받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작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상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상품 같은 인생은 더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면 여러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작품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가치는 상승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살고 파도위에 거품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작품 같은 인생을 살아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오. 물러서지 않는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되십시오. 통곡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면서 한 시대를 열어가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