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9._수영로교회 청년2팀 수련회1
1. 십자가를 본 자의 증언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2-35)
녹취자: 박나리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일찍이 당해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 일곱 마디의 유언은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한 해석이었습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무튼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이것도 유대인들의 아주 교묘한 플롯이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는 강도짓을 한 사람과 동일한 부류의 인간으로서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못을 박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 강도와 예수님은 모두 죽거나 돌아가셨고, 그들의 관례에 따라서 각기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확인 사살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는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신 줄을 알고 다리를 꺾지 않았으니, 이 또한 성경에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다리를 꺾는 것이 나았을 뻔했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군인 중 한 사람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아마도 오른쪽 옆구리였을 것입니다. 창을 깊이 허리에 찔렀고 그 창은 폐를 뚫고 심장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누가 보았는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갔는데, 오늘 이를 본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이 증언이 참이라는 말까지 반복하면서 이것이 팩트였다는 것을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이겠습니까? 누가 이것을 보았습니까? 분명히 마태복음 26장 56절에는 예수 잡혀가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누가 예수님이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여기에 기록을 했을까요?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마지막을 기록한 네 복음서 중에 아무 데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알다시피 복음서는 예수님의 30년 생애, 좁게는 3년의 생애의 대부분 기록을 할애하고 있고, 그 기록들 중 상당 부분을 3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체포되고 신문 당하는 과정부터 부활하신 날까지의 기록이 굉장히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서 집중적으로 보도되고, 많은 내용이 복음서 기록자들 가운데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무 복음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누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여기에 증언한 것입니까?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갈 때, 함께 도망갔던 요한이 어떻게 여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는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이것이 참이라고 증언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정답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모든 제자들과 도망갔지만 요한 한 사람만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십자가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세 번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두 번째 말씀은 십자가에 매달린 한 강도에게 회개하는 것을 보시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세 번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네 어머니니라”라고 하며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하셨을 때, 그 명령을 받들었던 사람이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여섯 시간 중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한 마디의 유언을 정확하게 시간으로 나누어서 말씀했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요한은 다른 제자와 달리 예수님께 돌아왔던 것입니다.
모두 다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상처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에 목자를 치리니 양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생애는 예언되었고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알면서도 관계는 깨뜨리지 아니하시고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하며 오히려 사도 베드로, 배신을 앞에 둔 베드로에게 사명을 다시 일깨워주셨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이유는 예수님이 싫어서도 아니었고, 완벽하게 배신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죽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부인해도 나는 예수를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완벽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확실하게 못 박아서 그 사람들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결국 목숨이 아까워서 죽는 것이 무서워서 모두 도망쳤고, 그들은 어느 한구석에선가 예수와 같은 패라는 지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에게는 그들이 가족이었고, 사랑하는 형제였고, 그리고 사랑하는 친척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배신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은혜와 추억을 다 묻어버리고,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기자신을 위장하며 숨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랑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남녀 간 사랑, 종류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 밑에서 금수저 물고 태어나고, 그 좋은 직장 다니고, 그 잘난 얼굴에 건강하고, 자기한테 잘해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가진 것 없고 심지어 암 선고를 받고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판정이 나도 그래도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랑과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을 체험하셨습니까? 사도들보다 더 체험하셨겠습니까? 능력을 받았습니까? 이 사람들은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도 부여받았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셨습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광경까지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사단이 파멸을 당하는 광경까지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버렸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 청년 시절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정말 치열하게 봉사하고, 모든 교역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후에 전개된 삶을 보면 도저히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외도하고, 이혼하고, 도박하고, 무너진 사람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위에서 부르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 숨어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있을 때, 요한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을 특별히 예뻐하셨고, 어떻게 보면 제자가 아니라 아들처럼 사랑하셔서 그 품에 기대어 예수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주님과 함께 만찬에 참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예수를 버린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목숨이 아까워 형들과 함께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러나 어느 한구석에 숨어 있는 동안 그의 양심이 소리쳤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다니, 그분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는데, 내가 그분을 배신했단 말인가,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주님의 십자가 매달리신 혼자 매달려 죽으시는 광경을 생각하며 지난 추억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소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한순간 요한은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숨었던 자리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미 사형집행은 끝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일어날 기적을 기대하며 구경을 왔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모두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올 때 한 젊은이는 그 모든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눈물을 쏟으며 골고다 언덕으로 거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그 언덕에 무슨 물건을 떨어뜨리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예수를 찾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고 세 번째 말씀을 유언으로 받들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갔을 때 요한이 예수님께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제가 왔습니다. 딴 놈들은 다 버리고 도망갔지만 저 보십시오.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아마 그는 조용히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얼굴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지도 못한 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예수 버린 것을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화해의 손길은 요한이 내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미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육신으로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여자여’라고 하는 명칭은 그리스어로 아주 지체 높은 왕비나 왕족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육신적으로 나는 당신을 다 섬기지 못하고 이제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요한은 사과한 적이 없고, 예수님은 용서해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요한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이 막내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마음에 어떤 그림자도 없이 요한을 용서했음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이후로부터 요한은 마지막 핍박을 받아 밧모라는 섬에 끌려갈 때까지 지성을 다하여 이 어머니 마리아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은 요한이었지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나머지 네 가지 유언을 받들었습니다. 마지막에 그 모든 고난을 짊어지시고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당신께 부탁하나이다” 하고 운명하시는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인류를 위해 구원을 위한 그 대업을 이루셨다는 것이니,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주님이 원 복음을 주신 이후로 굽이치는 구원의 역사의 물결 속에서 신구약을 통해서 예고되었던 구속의 대업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위대한 구속의 대업의 마침표였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이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앞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과, 내가 그를 믿을 때 그가 나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 삼으심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는 한때 제자들보다도 더 표독스럽게 예수께 대들고 예수를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요한을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은 것을 본 요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가엾게도 아직 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을 완벽하게 깨달은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였습니다. 그냥 좋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나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창에 허리까지 상하게 하여 그 모든 물과 피를 쏟게 하셨다는 그 사실 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무엇을 잘못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저주를 받도록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일생 동안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무지하고 방탕한 자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버린 사람들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구원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아픈 자를 싸매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면서 일생 동안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에 허리를 상하여 그 물과 피를 모두 쏟게 하셨습니다. 그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던 섬김의 허리였는데 결국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자기의 책 속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침 뱉은 그 세상의 입에 어떻게 입을 맞출 수 있겠으며, 그분을 때린 세상의 손과 어떻게 악수할 수 있겠으며, 그분을 그렇게 미워한 세상의 품에 어떻게 안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거기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느 부분만큼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친 제자들처럼 비겁한 사람들이었고, 시시때때로 자기의 편할 때 예수를 찾았지만, 자기의 불리할 때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도 요한의 마음에 요동쳤던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자신의 모습에서 뉘우치는 마음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자의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버리고 그러고도 내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피 묻은 외침이 내 안에서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날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은 스물여섯 때 받은 소명의 체험이었지만, 오늘날에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신학교 교수가 되고 난 이듬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주 깊은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내가 신학 공부를 하면서 온 정성을 들여 공부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때 배운 모든 지식은 흑백 사진이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것은 실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의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복된 영혼의 계절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내가 받았는데, 내가 무엇으로도 이 사랑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삼 년 반 동안을 비현실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제가 순교하게 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밀려왔고, 매일 매일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을 주기 시작하셨고, 내가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는 곳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눈물겨워 교회를 개척했고, 그리고 긴 세월이 이르는 동안 나의 사명은 피 묻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치 않는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이 최고의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의 본질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일생을 끝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지 않고는 여러분들은 신앙의 근처에도 근접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불, 하늘의 불길이 그렇게 타오르는 그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 가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거룩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는 지에 대한 마지막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함께 나누다가, 마지막에 그분이 무슨 유언을 어떻게 남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창에 허리를 찔려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시고 어떻게 운명하셨는지 그 모습은 오직 요한 한사람만이 제자들에게 증언해줄 수 있었고, 다른 모든 제자들은 양심에 가책에 고개를 숙이며 요한의 증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거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앞이 아니면 여러분은 모두 도망친 것입니다.
제가 한 학교에서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고 4년을 봉사한 다음, 다른 학교로 초빙을 받아서 옮겨 갔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그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설교하고 또 제 강의를 학생들이 좋아해서 선택과목을 내놓으면 400명이 신청해서 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묶어서 책으로 만들어 레포트를 쓰게 했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아주 정성껏 레포트를 썼습니다. 교수는 수백 명의 레포트를 내도 그것을 기억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너무 예쁘고 깨끗하게 낸 레포트를 펼쳤는데 내용은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 도대체 우리를 무엇으로 보고 이런 것을 숙제로 내줍니까. 이런 것을 할 시간에 글이라도 한자 더 읽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 레포트는 읽고 교수님이 기분 나쁘셔서 F 주셔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수님이 잘못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레포트라고 낸 것입니다.
굴복할 제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숙제를 또 내줬습니다. 그랬더니 또 똑같은 레포트가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왔는데 내용도 똑같습니다. 세 번째 레포트를 내줬습니다. 또 욕을 했거니 하고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 생애 잊히지 않는 레포트였습니다. 시작은 이렇게 했습니다. “정말 이상하다. 도대체 내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난번까지 그렇게 마음에 반감을 불러일으키던 이 교수님의 이 작은 책자가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예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책자를 읽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따뜻한 피를 느끼고 있다. 하나님,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이것이 레포트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예수와 함께 있지 않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분들은 예수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조금 덜한데, 40대 때 펑펑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비판했습니다. 목사님이 왜 우시냐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당신들이 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쏟는 그 날에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우는 이유는 당신들이 울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다면, 목자인 나라도 당신들을 위해 울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답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둔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것은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편한 길을 버려두고 가시밭길을 간 적이 있습니까?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그분이 죽은 것이 나 때문이라는 가책을 느끼며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나타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잊히지 않는 광경이 있습니다. 저를 성남에 있는 한 오십 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설교에 초청했습니다. 그 교회는 동네 주민들이 괴롭히고 핍박을 해서 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고 그날도 동네 사람들을 피해서 목사님이 모처로 도망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가 작은 소리로 설교를 했습니다. 비닐 장판을 깐 거기에 모두 무릎을 꿇고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박박 깎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설교가 끝나자마자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이 목에 핏줄이 빨갛게 서면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교회를 구원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예수를 사랑하도록 도와달라고 대굴대굴 구르면서 울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있는 그 회개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왜 없습니까? 그 아이는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여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며 울었는데, 우리의 마음이 부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마지막 순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마지막에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그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들은 그 십자가 아래로 돌아와야 됩니다. 너무 늦은 회개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이 요한처럼 자기가 있던 곳에서 돌이켜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이 소리치는 외침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나누었던 그 모든 추억들을 생각하면서 떨치고 일어나서 그분께 돌아가야 됩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그렇게 주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돌아가는 것은 발이나 수레나 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짧은 생애 동안 우리 주님을 믿으며 주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가 얼마나 깊었는지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우리 서로 맺은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기억하면,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지라도 돌아가리라.’, 이러한 결심을 하고 요한처럼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우리는 그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 우리 인생의 꿈, 비전과 내가 이 세상에서 갈망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꿈꾸는 어떤 것도 예수를 빼놓은 것이 없고 내 생애 자랑하고 싶은 어떤 것도 예수의 피에 흠뻑 젖지 않은 것이 없도록,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돈을 벌어도 예수 위해 벌고 출세를 해도 예수의 출세를 위한 순수한 예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늙음도 끝이 나고, 어느 순간 우리는 불현듯 인생의 막이 내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막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현듯 내리고, 우리의 이 세상에서 연기는 끝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그날에 마음에 아무런 티끌도 없이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우리 주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꿈에 그리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서 뵈옵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우리 살아온 모든 인생의 길이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한 일생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때로는 박해를 당하고 시련을 겪었지만 예수와 함께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 순간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전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빛나는 면류관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져도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쓰러진 그 자리에서 예수의 손을 붙들고 일어섭니다. 그분의 못 박힌 그 손을 보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분투하며 믿음으로 살았으나 아직 창에 허리를 상하기까지 그렇게 분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나의 행한 공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자기를 온전한 화목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살아온 인생의 모든 발걸음이 그분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천사와 함께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를 높이며 이 땅에 있는 교회를 향해 응원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가 마음에 없는 그리스도인은 가짜입니다. 그 십자가의 흐르는 보혈이 여러분의 마음을 적시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흘러 여러분을 덮고 여러분의 가정을 덮고 교회를 덮고 마침내 온 세상을 덮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그 피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덮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돌아가는 그 길은 먼 곳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진심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진심이라도 일체의 거짓이 없이 진심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용서를 받고 다시 잃어버렸던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