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이 솔
40대 중반에 잘 나가던 회사원이 있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좋은 대학을 나와서 승승장구하면서 이제 아주 거의 최고에 다 닿을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시고 절 보세요. 움직이지 마시고. 그런데 시름시름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먹을 수 없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리고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계속되었어요. 그래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가는 곳마다 진단해도 병명이 나오질 않았어요. 대부분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자기가 잘 모를 때에 내리는 진단이 신경성이에요. 그러나 당연히 치료제가 있을 리가 없죠.
그래서 너무 괴로워하던 끝에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크리스찬 훌륭한 의사가 있는데 정신과 의사랍니다. 그 사람에게 진료를 받아보면은 어떻겠냐고 해서 이제 크리스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료를 받았습니다. 너무 고마운 것은 다른 의사들은 도무지 자기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 정신과 의사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자기의 하소연을 집중하면서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환자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의 병이 너무 깊죠.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의외로 “아니요. 어렵긴 어렵지만 제가 반드시 고쳐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처방전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의외로 그 처방전을 봉투에 넣어서 풀로 붙여줬어요. “그리고 이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기 전에 집에서 밤중에 혼자 있을 때 이 처방전을 뜯어보고 그리고 다음 행동을 하십시오.” 세상에 처방전을 봉투에 넣는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지만 그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가기 전에 혼자 조용히 읽어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그래도 이 사람은 도저히 자기가 어떻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의사의 말대로 집에 갔어요.
그리고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저녁때 이제 어두운 시간에 홀로 자신의 방에서 스탠드에 불을 켰어요. 그리고 예의 그 처방전의 봉투를 뜯어보았어요. 그러더니 진짜 그 처방전에는 프리스크립션 처방전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는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이렇게 썼어요. 그러면서 ‘약의 종류 구약.’ ‘약의 명칭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다섯 번씩 물 없이 천천히 씹어서 드십시오.’ 사람은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내가 몸이 아프니까 의사도 나를 희롱하는구나 하고 그 처방전을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 근데 그날 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요. 새벽이 되어서 그는 너무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쓰레기통에서 그 처방전을 다시 꺼내고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의사면 진단을 하고 진찰비를 받고 약을 팔아서 돈을 받는 사람이 의사인데 왜 이 의사는 자기의 수입과 아무 상관없는 일을 나에게 했을까?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교회를 가정 평화를 위해서 가끔 갔기 때문에 시편 23편에 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첫 절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먼지가 케케이 쌓인 성경책을 갖다 놓고 펼쳐서 23편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의사의 말대로 하루에 다섯 번씩 읽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읽고 그리고 아침 먹은 후 점심 사이에 점심 먹고 저녁 사이에 그리고 저녁 먹은 후에 한 번 잠자기 직전에 한 번 이렇게 5번씩 시편 23편을 읽었어요.
그리고 거의 두 달의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제 굳이 성경을 펼칠 필요가 없었어요. 저절로 외워졌기 때문이죠.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리고 정원을 걸으면서 이제 시간이 되어서 시편 23편을 조용히 암송하기 시작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바로 그때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무엇인가 마음 안에서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와르르하는 굉음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들렸어요. 그리고는 생전 처음 무릎을 꿇었어요. 정원의 풀밭에 무릎을 꿇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그리고 그는 거기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가는가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공부도 잘했고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회사에서도 항상 일등을 했고 모든 성적에 있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최연소 나이에 부사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어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우상이었고 그리고 정말 그림같이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서 정말 큰 집에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고 자신은 모든 그 회사의 샐러리맨의 롤모델이 되었어요. 그런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라고 생각하니까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 가지가 없었어요. 자기 인생에 목자가 없었던 거죠.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는 거기서 통곡하며 울며 인생 최초의 회심을 경험했어요.
여기서 퀴즈가 있어요. 자 그 사람이 그 병명도 알 수 없는 그 병에서 치료를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부산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을 안 해요. 참 신기하네. 치료를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받았어요? 받았어요. 그리고 그것은 의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어느 의사가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우리 의사들이 우리 몸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면 병원에 오시기가 무서울 것입니다. 의사들이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요. 우리의 몸은 영혼과 마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중에 오직 물리적인 작용에 속한 것들만 의사들에게 파악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질병과 함께 아주 신비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건강해지는 길을 찾아야 돼요. 영혼과 육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기능이 조화롭게 작용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명랑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에요.
어쨌든 그 사람은 그 질병에서 큰 치유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에 모든 것이 있어도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없다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뼈저리게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와서 이렇게 그럴듯하게 예배를 드려도 여러분 중에는 망가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요. 상당수가 망가진 인생을 살고 있고 본인의 양심이 그것을 증거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이 일간 신문에 나올 정도로 그런 범죄자로 보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자기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언뜻언뜻 느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다만 맛집에 가고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고 친구들과 정신없이 떠들고 포도주라도 마실 때에는 즐거운데 그것은 그냥 마약에 취한 즐거움이고 즐거움을 우리 현실 속에 느껴야지만 그게 즐거움인 거예요. 현실 속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에요. 맑은 정신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마취제 같은 것들을 찾지 않아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알고 있어요. 오늘이 여러분들에게 기회예요. 오늘 이 설교를 듣기 전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멘도 안 해. 우리 교회는 아멘 하지 말라고 내가 얘기를 해요. 시끄럽다고. 세이와 에이맨 바이오 라이프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여기는 너무 젊잖아. 저렇게 밝고 명랑하게 반응하면 설교자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변화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까짓 거 한 시간이면 인생이 바뀌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에요. 잘 들으세요.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근데 문제는 이 시가 언제 쓰였느냐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나뉘어요.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목동이었던 시절에 쓴 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회고한 것이고 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어린 시절에 쓴 시가 아니라 인생의 모든 역경을 다 헤치고 지나간 후 다윗의 말년에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쓴 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두 번째 의견에 내 표를 던져요.
이 시편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이에요. 1절은 시편 23편 전체의 서론이자 주제를 말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이거고 2절부터 5절까지는 두 번째 토막인데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는지를 2, 3, 4, 5절에서 설명해요. 네 가지 이유를 드는데 첫째는 자기를 푸른 풀밭에 놓이시기 때문에 즉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두 번째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기 때문에 세 번째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에 다섯 번째는 더 넘치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이시다 라는 근거를 말하고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인 6절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시인이 미래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결단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결단으로 이 아름다운 시는 끝을 맺습니다.
시편 150편의 시 가운데 아마 이 시만큼 널리 알려진 씨가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는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이었어요. 저는 어마어마한 시편 23편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원시림 속에서 다른 곳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면서 제 인생이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 23편을 읽으며 너무나 많이 울었고 너무나 많이 감사했고 가슴 아파서 통곡했고 행복했기 때문에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시편 23편을 여러분들에게 정식으로 설교하면 열여덟 시간이 걸려요. 열여덟 시간. 그런데 오늘 뚜껑만 열어서 맛만 보여드리고 이제 5시에는 다른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편 구성이 이렇게 되어 있고 그러고 보면 이제 시편 23편 1절에 표제어가 우리 눈에 들어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자 이런 질문은 너무 쓸데없는 질문처럼 보이지 않아요? 왜 하늘에 계신 그분을 부를 때 그 하나님의 성함이 성경에 크게 세 가지로 나와요. ‘여호와’, ‘하나님’, ‘주’ 이렇게 세 가지 성함이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시인이 여기에서 두 가지를 제쳐놓고 ‘여호와’라는 성함을 택했을까? 이 질문은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어떻게 보면 시편 23편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이 한 단어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의 성함에 대한 설명을 좀 해야 돼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해볼까요.
먼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있죠.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해요. 류폴드 같은 신학자는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알라흐’라는 동사에서 왔을 것이다 라고 추측해요. 추측에 불과해요. 그 ‘알라흐’라는 단어는 ‘두려워서 벌벌 떨다’ 라는 동사에서 ‘엘로힘’이 왔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해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하는 것은 ‘엘로힘’은 ‘엘’이라는 명사의 복수형이고 ‘엘’은 바로 아랍어에서 알이고 ‘알라’이고 그리고 여기서는 ‘엘’인데 이것은 ‘신’이라는 뜻으로도 쓰였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어요. 그런데 이 ‘엘’의 복수형이 ‘엘로힘’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근데 히브리어에서 이 복수형은 갯수가 여러 개일 때만 복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소위 히브리어 문법에서 ‘푸르랄리스 마이에스타티스’라는 용어가 있어요. 장엄한 것을 읽을 때 복수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엘로힘’은 ‘엘’의 장엄함을 설명하기 위한 복수 형태일 거라고 보는 거죠.
더 궁금한 건 ‘엘’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죠. 풀리지 않아요. 그런데 그래도 설득력 있는 학설이 ‘엘’은 그 ‘엘’이 아마 ‘울’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을 얻어요. 그리고 ‘울’은 도토리나무예요. 왜 그게 상관이 있냐 하면 도토리나무는 뿌리가 아주 단단해서 폭풍이 불거나 바람이 휘몰아칠 때 다른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도 끝까지 뿌리가 뽑히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나무가 도토리나무 혹은 상수리나무였어요. 그래서 아마 ‘강하다’라고 하는 뜻을 가진 의미에서 ‘엘’이 우리 ‘엘’ 되었고 ‘엘’이 장엄한 복수형으로서 ‘엘로힘’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말로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근데 하나님은 여호와나 주나 모두 다 같은 거지 어떤 면에서는 한 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각각 각각의 성함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사뭇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큰 능력을 가진 신’ 그리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함은 ‘여호와’가 아니라 ‘엘로힘 하나님’이었어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 인류에게 계시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있기 전부터 계시되었고 모든 이방 사람에게도 계시된 이름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지극히 크신 능력을 가지시고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러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범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함이에요.
이에 비해서 ‘여호와’라는 이 단어는 사실 원래 하나님의 성함은 여호와일 수가 없어요. 여호와라기보다는 ‘야외’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면 히브리어를 가지고 다시 한 20분 이상 설명을 해야 돼서 생략을 하겠어요. 그래서 그냥 ‘여호와’는 영어에 쓴 것을 그냥 글자대로 옮기다가 보니까 옮겼고 영어권 사람들은 히브리어의 자음과 모음을 잘못 읽었기 때문에 ‘제호바’라고 하는 이상한 이름이 나온 거예요. 원래는 ‘야외’가 훨씬 가능성이 높은 이름이에요. 근데 아무튼 야외라고 하는 이 성함이 계시가 되었는데 근데 이 ‘야외’라고 하는 이 성함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또 학설이 많이 나뉘는데 그래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있다’ 혹은 ‘되다’라는 하야 동사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 히브리어로 ‘에히에’ ‘아셰르’ ‘에히에’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우리 영어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지만 ‘I am who I am.’ 이런 뜻이에요.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약 70프로 정도는 맞는 거예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다.’ 그러니까 ‘누구에 의해 있게 된 사람이 아니라 원래 계속 계신 그분이 바로 지금 있는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근데 이 하나님의 성함이 계시된 것은 출애굽기 6장에서 계시가 돼요. 그러면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아니 그 앞에도 분명히 ‘여호와’라는 이름이 막 4장에도 나오고 앞에 나오는데요. 그거는 많은 학자들이 나중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나크로니스틱하게 앞에 세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서 넣었을 것이라 이렇게 추측을 하는데 상당한 근거가 있는 학설이에요. 그래서 원래 여호와의 이름이 게시된 것은 모세 시대 때 와서야 ‘야외’라는 이름이 계시가 된 거야. 자 그러면 이제 그러면 ‘야외’라는 뜻은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이라는 말과 다른가. 아주 사뭇 달라요.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죠. 뱃속에 있을 때는 태명을 가지고 있고 어렸을 때는 별명을 부르기도 하고 “아무개야 아무개야” 부르기도 하고 또 집에서는 또 이름을 어떻게 의도했던 거 하고 호적에 올린 거 하고 이름이 달라서 그래서 이름이 잘못 불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진짜 이름이 뭐냐 할 때에는 동사무소 가서 호족 초본을 호족 등본을 떼어보면 거기에 법적인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성함이 여러 개로 나와도 하나님의 진짜 법률적인 호적의 이름을 든다면 그분은 ‘야외’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 ‘주’라고 하는 명칭도 나오는데 이것은 ‘아도나이’인데 그것은 모든 만물을 소유권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생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라고 하는 사상이 바로 ‘아도나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고백 속에는 이제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내가 갖고 있는 것, 갖게 될 것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고 따라서 ‘나는 그 소유주의 뜻대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할 것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그 ‘주’라는 말속에 포함되어있는 거예요. ‘주인’이라고 하는 뜻이죠.
근데 이제 이 ‘야외’는 이 두 가지 이름보다 훨씬 더 방대한 뜻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이 이름만 설명하는 것도 오전 내내 설명을 해도 못할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 핵심만 이야기를 하자면 이거예요. 이 ‘야외’라는 이름 성함은 이방인들에게는 계시되지 않은 이름이에요. 그리고 오직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에요. 그래서 구약학에서 난제가 있어요. 여호와의 원래 이 성함이 뭐냐? 그거 몰라요, 정확하게 말하면.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되어 있는데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성함이 모음이 다 찍혀 있어요. 근데 ‘야외’라고 하는 이 단어에는 모음이 안 찍혀 있어요. 그리고 찍혀 있는데 이 ‘야외’라는 이름이 너무나 거룩해서 그렇게 써놨지만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거기에다가 ‘아도나이, 주님’이라는 글자의 모음을 ‘야외’라는 자음에 붙였어요. 그걸 그냥 읽은 게 ‘여호와’예요. 틀린 거죠.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읽을 때 글자는 ‘야외’라고 쓰여져 있는데 읽을 때는 ‘아도나이’로 있는 거예요.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이름을 차마 못 부르는 거죠. 그 사상 속에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하는 십계명에 대한 계율이 그들의 의식 속에 작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자손들에게 야외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그다음에 온 가족이 그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한다고 해요. 그럴 정도로 이 야외의 이름은 신비에 쌓인 이름이에요.
근데 이 ‘야외’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독특성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과 맺은 언약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과만 맺은 배타적인 언약 그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된 것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일평생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언약을 배반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붙들고 놓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호와라는 말이 가지고 함의하고 있는 바예요.
자 그러면 이제 그림이 들어오죠. 그렇죠. 시인이 이제 가장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시를 노래하는 거죠. 고난을 당하는 그때에 썼을 수도 있고 말년에 그 고난 당한 것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의미로 이 시를 썼을 가능성이 더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목자 아니 주는 나의 목자 아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신이라고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이 아주 장엄한 언약 관계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관계가 결코 바뀔 수 없다는 것 심지어 자신이 죄를 짓고 환란을 만나고 사망에 음침한 계곡을 지날지라도 이 언약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언약 관계를 소환하고 있는 거야. 그림이 들어오죠. 그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그 하나님을 하나님 이상의 여호와로 여기는 거죠.
그래서 온 땅과 하늘 위에 넓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냥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독점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 짧은 여호와라는 한 단어에 담고 있는 거야. 근데 이거는 공부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에요. 근데 그 여호와가 누구시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럼 이제부터 설명을 해드릴게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우리는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어요. 우리들이 해외 여행하면서 유적지를 즐겨 찾아요. 그리고 로마의 유적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입을 벌리게 돼요. 아 이런 시대에 주전 100년경에 오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기둥이 없는 건물을 짓고 비가 위에 구멍을 뚫었는데 비가 와도 웬만큼 오면 그 비가 위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의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건물을 지었어요. 가보신 분 계시겠지만 판테온이에요. 저는 그 판테온 한가운데 서서 전율을 느꼈어요.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전율을 느꼈어요. 그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그 건축물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정신과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추측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추측을 하는 거죠. 저는 여러분들을 우주의 세계로 초청하겠습니다. 저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과외 선생님을 초청했다가 1년 동안 천문학을 공부했어요. 1년을 공부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목사님은 지금부터 대학 미적분을 공부하셔야 됩니다. 얼마나 하면 됩니까? 그랬더니 일 년 정도 미적분에 몰입하셔야 됩니다. 거기서 내가 고개를 떨구고 연필을 놓고 말았어요.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또 미적분을 하랴 하는 마음으로 천문학을 공부했는데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에 하나였어요. 그중에 일부만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게요.
자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렇게 믿으라 그러세요. 근데 그들은 영원히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뚝 잘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만드신 것 없이 존재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어요. 여기에 있는 이 모든 건물의 어느 요소 중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저절로 생겨난 것이 있습니까? 지어진 모든 것들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마이크는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감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예방하기 위해서 글라스는 안 보이는 사물을 잘 보이기 위해서 모든 하나하나가 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고 그 목적들은 서로 연관을 이루면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게 만들어졌잖아요.
그리고 이제 우주의 세계로 초대할게요. 자 우리는 달나라를 갔다 왔대요. 빛이 12초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물리시간에 배우셨을 거예요. 어떤 아이가 중학생이 물리 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이 우주가 얼마나 커요.” 선생님이 대답했어요. “야 그걸 알면 내가 너희를 여기서 가르치고 있겠니? 그렇지만 굳이 설명을 해줄게.” 무슨 동네에 살아요. 사는 동네가 어디에요? 큰 소리로 사당동 서울? 부산 사당동. 사당동에 무슨 무슨 아파트가 있겠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애야.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였다면 부산 사당동에 아파트의 한 채가 너희 집인데 그 집 중에 화장실이 있거든 거기 빨간 전구가 하나 들어오고 거기에 여덟 개의 날파리가 돌아가는데 그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란다. 그리고 너는 그 파리에 등에 붙어있는 세균보다도 적은 존재란다.”
사실은 그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요. 여러분들 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은하계를 우리 은하계라고 부르죠. 그렇죠. 이런 은하 이 은하는 팽대형으로 원 모양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가 불뚝 튀어나오고 가장자리가 얇은 접시처럼 되어 있는데 이 끝에서 이 끝까지가 이십만 광년 정도 되고 팽대부에 이 두께에 이는 칠백 광년 정도 돼요. 그리고 여기에는 항성이 약 2천억 개 정도 있어요. 항성은 태양처럼 항상 빛나는 별이고 지구 같은 것은 항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행성이라고 부르고 어떤 별에 붙어서 같은 자리를 계속 움직이는 것을 위성이라고 불러요. 근데 태양 하나가 항성인데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항성의 거리가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명왕성은 퇴출됐죠. 수금지화목토천해 까지가 500원 동전에 들어오는 거리라면 다음 항성은 서울에서 대구만큼 멀리 떨어져 있대요. 그러니까 이 우리 은하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 수 있죠. 지구는 달을 위성으로 가지고 있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다른 지구 주위를 돌고 다시 달 주위를 도는 두 개의 위성이 있어요. 이걸 모두 합치면 태양계 안에 약 260 개 정도의 위성이 있고요, 이것을 이 우리 은하계에 이천억 개로 추산되는 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 태양은 이쪽에서 이만 육천 광년 아래쪽에 위치해 있어요. 그래서 그 항성뿐만 아니라 위성과 행성의 모든 가족들을 합치면 이 우리 은하계 안에만 사조 개의 별이 있다고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해요.
밤하늘에 망원경을 가지고 볼 때 가끔 왕별들이 보여요. 그게 큰 별이 아니라 우리 은하계의 가티 수천억 개로 이루어진 은하예요. 그런 은하가 왕별처럼 보이는데 무수하게 많아요.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추측하기를 우리 은하계는 2천억 개의 항성을 가지고 위성까지 4조 개를 거느린 이 은하인데 이 은하는 우주에서 절대 큰 은하가 아니에요. 심지어 최근에는 지구의 칠천조 배나 되는 항성이 발견되었어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거죠. 근데 그러한 은하가 우주 전체 안에 어림잡아서 2천억 개쯤 있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추산하는데 그 추산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우주는 1초에 약 2천 킬로미터 정도씩 계속 팽창하고 있어요. 그 팽창하는 바깥이 무슨 세계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확실한 거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공간은 아니에요. 그리고 폭발하면서 이런 공간이 생겨난 거예요. 그걸 이론화한 게 빅뱅 이론이에요.
이렇게 우주 공간이 생겨나는데 끊임없이 생겨나요. 그래서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를 약 150억 광년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팽창하는 속도가 빛의 속도와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설명하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트랜스포메이션에 의하면 결국 광속보다 더 빠른 물질이 되면 이 모든 우주에 관한 수식들이 다 허수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다 어긋나버리기 때문에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물질은 없다고 보는 거죠. 그게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에요. 그렇게 해서 계산한 우주가 150광년이라고 보는데 최근에 제임스 앱이 떴는데 더 먼 곳에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학자들은 지금 950억 광년까지 바라다보는데 의미가 없는 것이 그것은 모두 관측 가능한 범위의 숫자예요.
더 놀라운 얘기를 해줄까요. 이 태양과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포함해서 이 태양계 전체가 1초에 220킬로미터의 속도로 우주를 비행하고 있는 거예요. 왜? 우주가 팽창하니까. 이게 한꺼번에 같이 이동하는 거예요. 우리 못 느끼는 거죠.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거. 그 어마어마한 우주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1990년대 중반에 목성에서 폭발이 일어났어요. 우주의 이 유성이 가서 부딪혔는데 폭발하면서 불길이 치솟았는데 1940킬로미터 높이의 불꽃이 솟았어요. 그런 걸 지구가 한 번 맞으면 그냥 박살이 나서 없어져 버리는 거야. 근데 그걸 목성이 계속 안팎처럼 품으면서 돌면서 목성이 지구에 천 배예요. 돌면서 그 모든 파편을 다 막아서 보호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이 지구가 안전하게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근데 핵심은 이러한 광대무변한 우주는 우리를 신비 속에 빠져들게 해요.
그래서 파스칼이 자신의 방세에서 뭐라 그랬어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그것을 보면서 한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거죠. 근데 사상은 달랐지만 임마누엘 칸트는 자기가 죽고 난 묘비에 이렇게 새겼어요. 내 마음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가 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이 빛나는 도덕률. 그 사람에게도 반짝이는 하나님의 그 하늘에 반짝이는 그 모든 모습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신비였어요. 근데 이런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있어라.”라는 말 한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은 제일 먼저 하나님 사랑하고 무슨 뭐 하나님과 친밀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신앙의 시작이 아니에요. 신앙의 시작이 뭐냐 하면 그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동시에 그런 티끌만도 못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들고 앙탈을 부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일삼으면서 불순종하며 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커다란 불쾌감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신앙이 시작하는 거예요.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우리 광대하신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조용히 산에 올라요. 그리고 삼겹살 구워먹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거기서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리고 땅으로 내려오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돼요.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보면 잊지도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이 모든 세계가 그분에 의해 창조됐고 그분 때문에 지탱하며 살고 있다가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모든 세계의 운명이에요.
공간이라는 것도 철학에서는 시간이 뭐냐 공간이 뭐냐 굉장히 어려운 주제예요. 근데 이것도 결국 없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주는 팽창하다가 어느 순간에서부터 축소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다시 이 공간이라는 개념은 사라지는 것이고 지금으로부터 45억 년 후쯤 되면 태양은 적색 거성으로 바뀌며 거대한 폭발과 함께 태양의 일생을 마치게 되어 그때 그 불길은 수성 금성 지구를 지나 화성을 넘어서기까지 불덩어리가 돼요. 그때 더 이상 지구는 존재할 수 없어요. 이것이 결국 이 모든 인류의 운명이에요. 그렇게 결국은 공간도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지게 될 때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인가 있지 아니한 것인가 그리고 시간은 흐르는 것인가 과연 정지한 것인가 그리고 이 시간은 과연 영원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되는 거예요.
뉴턴이 ‘브린키피아’라고 하는 물리학 원론에서 시간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러나 200년도 지나지 않아서 모두 무너져서 이제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러면서 이 모든 우주는 흘러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들은 몇 년이나 살아요? 젊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별로 생각 안 하죠. 그래서 젊은 사람은 똑똑하긴 하지만 미련한 거예요. 죽음이라는 걸 생각 안 하니까. 이어령 박사가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어요. “젊은 사람은 늙고 늙은 사람은 죽는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지혜다.” 마지막 눈을 감으실 때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돌아가셨는데 임마누엘 칸트는 마지막에 죽을 때 “에스이스트쿠트” “참 좋다” 하고 돌아가셨어요. 한 분은 윤리학적인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면 한 분은 미학적인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거야.
여러분들은 지금 한창때죠. 메뚜기에 불과해요. 메뚜기는 한 철이에요. 올해 본 메뚜기가 내년에는 없어요. 한참 뛰어다니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잡혀서 사람들에게 볶아 먹히거나 아니면 자연사예요. 젊음, 너무 뽐내지 마세요. 지혜로운 사람은 젊고 싱싱한 자신의 몸속에서 늙은이의 몸을 보는 사람이 지혜예요. 젊음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가고, 그리고 ‘나에게 남는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지혜인 것이죠. 쾌락에 빠지고 젊음에 취해서 마음껏 젊음을 뽐내면서 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면 난 눈물이 나요. 저렇게 생각 없이 살다가 노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젊음은 30년 만기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어음이에요. 지금 생각 없이 살면 여러분들은 어음을 난발하는 것이고 30년 후에 그 어음이 결제가 돌아올 때 여러분들은 갚을 능력이 없어서 파산하게 되는 것이에요.
노인 자살이 심각하고 중년들의 자살이 심각한 것도 사실인데 작년에 죽은 20대 젊은이 가운데 절반이 자살로 죽었어요. 20대 죽은 사람 가운데 절반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요. 돈이 없어서 그건 간접적인 이유예요. 뭐 헤어져서? 간접적인 이유예요. 문제는 뭐죠?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철학이 없는 거예요. 인생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근본이 없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생명의 놀라운 사랑이 자신 안에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고 어느 한순간에 예기치 못했던 불행과 고통이 밀려올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뭐냐 하면 생각 없이 교회 다니지 말라 이거예요.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는 여러분들은 빈털터리가 되고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남들이 가니까 여러분도 북 치면서 따라다니는 꼴이 되어서 결국 여러분들의 인생을 붙잡아줄 수 있는 그 무엇도 기독교 속에서 발견할 수 없어요. 이거는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에 내가 생생하게 여러분들에게 증언하는 거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아무 생각 없이 예수를 믿는 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거죠. 수시로 내 인생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리고 내가 누구이고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화살처럼 박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서 인생의 지혜가 되는 것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에요.
이제 겨우 첫 번째 단어를 설명했어요. 근데 이어서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제가 교수로 88년도에 교수가 됐는데 영어 교수님이 장문을 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를 영어로 작문하거라 그러고 났더니 학생 하나가 마지막 시간까지 도저히 이 작문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어느 한순간에 책상을 치면서 “알았다.” 그리고 막 용감하게 답안지를 쓰고 나왔어요. 근데 답안을 이렇게 보니까 ‘여호와 is my cowboy.’ 이제야 부산 사람도 웃네. 신기하네. ‘cowboy’가 아니라 ‘shepherd’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해요.
자 그러면 그 여호와가 목자시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선사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그 끝없이 드넓은 우주를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티끌만큼도 비슷하지 않으신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차이가 나는 그 위대한 분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내려오셔서 다윗 한 사람의 목자가 되시는 거야. 이게 어울리는 그림이에요?
사람이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자매들 많이 있고 형제들이 있잖아요. 결혼 아직 안 했죠. 그렇죠. 하신 분이 대부분이에요.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일생 잊히지 않는 팁을 줄게. 이런 사람하고 결혼하지 마. “오빠. 나 오빠 없이는 못 살아. 내 오빠 없으면 난 죽어버릴 거야.” 이런 여자는 단절해요. 끊어요. 그리고 “얘야. 아무개야. 난 너 너무 사랑해. 난 너 없이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애.”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가짜로 말하면 사귀어주고 아니 이 굉장히 중요한 거야. 이거 아무 하나 안 가르쳐주는 거야. 근데 그걸 진심으로 말하면 끊어요. 그런 사람하고는 안 돼요. 왜냐하면 결혼은 주체를 뭉개고 둘이 합쳐지면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어요. 주체를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 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결혼이에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아멘 아까는 안 하다가 왜 이런 데 아멘 해. 근데 뭔가 서울하고 부산하고 핀트가 좀 잘 안 맞는 것 같아. 절대 그런 사람하고 하면 안돼요. 오히려 이런 사람하고.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 참 뜻밖이다. 그러면서 나도 네가 싫지는 않거든. 나도 한번 너를 좋아해 보도록 노력을 해볼게.” 이런 사람은 진짜야. 그러니까 콩꺼풀을 씌우지 말고 제대로 고르라고. 두 번 기회가 없어요. 한 번에 절대 그 생각을 따라야 돼요
근데 두 번째 봐야 할 게 뭐냐 하면은 사람들은 대개 그 집안을 봐. 근데 그것도 참고할 수 있어요.
근데 집 안을 보는데 재력을 보지 마. 왜냐면 재력은 간접적인 도움을 되는 건 사실인데 아빠가 그거를 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준다는 보장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거 보지 말고 형제인 경우에는 아빠의 성품을 보고 자매인 경우에는 엄마의 성품을 봐요. 근데 형제들에게 조언하는데 이런 여자를 선택하면 절대 가정을 안 버려. 어떤 여자냐 하면 엄마의 사랑을 거의 무제한으로 받고 자란 자매 걔가 버릇이 없을 수도 있어. 그건 감수해야 돼요. 감수해야 돼요. 그게 되면 어차피 인생사는 어차피 딜이니까. 감수해야 해. 왜 이렇게 좋아해? 말씀에서 빗나갈수록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근데 아니 잘 들어보세요. 그 집 엄마가 가난하기는 한데 아이를 위해서 아주 모든 것을 바쳐서 뼈중의 뼈 살중의 살처럼 사랑해서 그런 자매는 꽉 붙들어요. 그 자매는 절대 자식을 안 버려. 혹시 형제는 버릴지도 몰라. 근데 자식은 안 버려요. 아니 너무 마음에 안 들면 형제는 버릴 수 있지. 근데 자식은 안 버려. 근데 일단 자식만 안 버리면 자기가 잘못했어도 화해할 수 있는 루트가 생기는 거예요. 그것은 절대 ??이에요. 근데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엄마의 사랑을 못 받은 자매들 또 형제들도 있거든요. 나도 그런 경우거든요. 근데 그런 사람은 그럼 죽으라는 이야기냐?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주님을 깊이 만나면 그 아픔이 애정으로 승화가 됩니다. 그 대신 신앙이 굉장히 깊어야 돼요. 그럴 경우에는 그런 사람 만나면 틀림없어요.
그리고 이런 사람 절대 결혼하지 마세요. 시집가서 오빠한테 피난 오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안 돼요. 그리고 혼자 살아서 불행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두 손 잡고 물속에 들어가는 거 하고 똑같아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해서 행복하려면 싱글로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야 돼요. 어떻게 말하면 결혼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는 사람을 선택해야 돼요. 그럴 때 인격적인 결합이 되는 거야. 이게 60년 노하우야. 제가 결혼한 지 지금 43년 됐는데 마지막 말다툼한 게 25년 전이에요. 가벼운 말다툼. 처음에는 목회자의 집안이니까 싸우진 않았는데 의사소통이 잘 안돼서 되게 힘들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근데 마지막으로 우리는 뭐 싸우는 왜 내가 뭘 이 정도거든요.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25년 전에. 근데 그렇게 살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혼자 살아서 행복한 사람 중에 배우자를 선택해야 돼요. 그 혼자 행복하다는 것은 상당한 주체성이 자기가 있다는 거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을 선택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봐야 될 게 뭐냐 하면 친구예요.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딱 봐 수준이 쓰레기 같아요. 그러면은 그 사람의 좋아 보이는 모습은 가식이에요. 원래 그 수준이 뛰어나면 수준이 낮은 사람하고 절대 안 만나요. 동정심에서 만나줄 순 있어요. 근데 친구가 될 순 없어요. 그러니까 친구를 먼저 보는 거요. 근데 이게 공식이 여기에 안 맞는 거예요. 시인의 친구가 여호와요. 수준으로 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을 만드신 분인데 친구는 허접한 그저 다윗이에요. 인간일 뿐이에요. 뭐 훌륭하긴 하지만 그러나 또 여러분 중에 다윗만 못한 사람도 없어요. 왜 그러면 최소한 간음죄와 살인죄는 안 저질렀잖아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아주 희귀할 거고, 없잖아요. 근데 그런 죄악 죄악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어요. 근데 그 두 사람이 이 둘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된 거예요.
그러면 목자라고 하는 이 말은 결국 뭘 보여주는 거죠. 결국 하나님이 목자시라고 하는 얘기는 시인이 뭐라는 거를 암시하는 거예요. 아니 왜 이렇게 대답을 못하냐. 하나님이 목자시라고 한 거는 이 시를 쓰는 시인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디 양이 나와요? 여기 전편에 하나도 안 나와요. 양이 근데 목자면 소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말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돼지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식용 개 키우는 사람도 목자예요. 그럴 거 아니에요. 식용개라는 게 뭐 말도 안 되지만 개는 먹으면 안 돼요. 근데 어떻게 그를 얻게 돼. 다 뭘 키우든지 간에 다 목자인데 사람들은 이걸 읽을 때마다 양을 생각하는 거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결국 이 그림 자체가 양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안 나오지만 그림이 자기가 그렇게 스스로 양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는 이 구절을 생각해 양이라고 생각할 때 말한 풀밭을 생각해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풀밭이 없어요. 호주나 적어도 청정지역 뉴질랜드의 풀밭을 생각하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가고 햇빛이 사이사이 비치고 거기에 아주 세탁기에서 방금 샴푸하고 향수까지 뿌린 것 같은 그것도 늙은 양이 아니라 어린 양이 슬로우 비디오로 막 뛰어다니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 양이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기는 개떡같이 살면서 그렇게 순결한 양이 자기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근데 궁금한 건 뭐냐 하면 시편 전체에서 우리 인간을 혹은 이스라엘을 양이라고 비유를 해요. 근데 그게 도대체 무슨 메타포인가 하는 것이 궁금한 거야.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각기 다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재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혹시 여러분 임팔라라는 동물 아세요? 그냥 평범하게 조그만 노루처럼 생기고 뿌리 60센티쯤 나와 있는 아프리카의 사파리에 가면 가장 흔하게 때로 돌아다니는 임팔라예요. 임팔라는 사자에게 좋은 먹잇감이죠. 그래서 동물의 왕국에서 임팔라가 도망을 가는데 사자가 전심으로 질주를 하는 거예요. 거리가 점점 좁혀져요. 그러니까 임팔라가 도망을 가다가 안 되겠으니까 몸을 확 비틀어서 사자를 받아버려요. 근데 임팔라의 뿔이 이 어깨 쭉지로 들어가서 등 뒤로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사자와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뒹굴었어요. 사자는 이미 임팔라를 입으로 물을 정도의 힘을 상실했어요. 임팔라는 가까스로 피묻은 뿔을 빼고 도망을 갔고 취재하던 기자들은 가서 그 마취총을 쏘고 거기에다 택을 붙였어요. 치료를 해주었지만 추적을 해보니까 두 달 만에 사자는 죽었어요.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짐승이라도 다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제를 가지고 있어요. 스컹크는 방귀를 스컹크 한 마리가 방귀를 끼면 미국에서 마을 전체가 하여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냄새가 나요. 그 스컹크들이 그렇게 주택가로 내려와서 방귀를 뀌고 가요. 이거나 먹어라 그러고 가는 거야. 근데 아주 아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골치가 아파요. 그런가 하면 고슴도치는 몸을 움츠리면 아무도 사자라도 삼킬 수가 없어요. 카멜레온은 나무처럼 변신하고 풀처럼 변신해요. 그래서 자기를 보호해요.
근데 양은 아무 자기를 보호하는 도구가 없어요. 뿔이 매달렸는데 그 뿌리의 모양은 뭔가를 받기에 적합한 게 아니라 만두처럼 생긴 뿔이 여기 달렸어요. 자기를 방어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이빨은 껌 씹기에 적합한 이빨이에요. 그래서 누구를 물어뜯을 처지가 안 돼요. 그리고 발은 빠르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 양은 지독한 공수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물을 보면 너무너무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2절에 보면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못하는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쉴만한 물’이 ‘메메호노트라’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끄시며’ 이런 뜻이에요.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목이 말라도 양은 흐르는 물을 못 마셔요. 그러면 목동들이 돌멩이와 흙덩어리를 갖다가 댐을 쌓아서 물을 움직이지 않게 만든 후에 양들을 데리고 와서 물을 먹일 정도로 물에 대한 공포심이 굉장해요. 그럼 결국은 양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볼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야생에서 생활이 안 돼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목사님은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산양이 어때요.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동물이에요. 그냥 계속 높은 곳으로 도망가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짐승의 밥이에요. 그리고 자기를 보호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많은 짐승들 가운데 굳이 나는 너희들의 목자고 너희는 말이다 소다 아니면 카멜레온이다 임팔라다라고 이야기를 안 하고 양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뭐예요? 여기에 신학적인 비밀이 있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양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 곁에서 인간의 도움을 받으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며 공생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에요.
이것이 함의하는 바가 뭐냐 하면 결국 너희는 모든 동물 중에 최고의 영장이다. 그래서 몸집으로 따지면은 우리가 1미터 한 70 정도밖에 안 돼요. 더 작을 수도 있지만 원래는 인류가 110cm밖에 안 됐대요. 독수리가 체가기에 딱 좋은 정도의 최고였대요. 근데 이게 점점점점 커져서 지금 이만큼 키가 됐는데 그래도 40톤씩 하는 고래들 그리고 5톤 6톤씩 하는 코끼리들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하고 사자와 코끼리들을 잡고 그 10미터 15미터씩 되는 고래를 잡아다가 어항 속에 집어넣고 구경을 해요. 그걸 가능하게 했던 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이성의 능력이에요. 정신적으로는 뛰어나서 우주를 탐구할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돼지나 소나 나귀들이 고통받는 것은 고통받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인간은 고통을 받는 거잖아.
여러분 가운데도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가슴 쓰려하고 심지어 여러분 중에 가족들 얼굴도 안 보고 사는 사람 있죠. 그리고 시련을 당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자신의 존재까지 기반까지 흔들리면서 자살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돼지는 그런 생각 안 한다 이거죠. 그렇게 뛰어나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더 강력하고 높은 요구를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것이 물질이나 명예나 젊음이나 쾌락이나 타락으로 채워지지 않아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을 양으로 비유한 것은 무엇이냐면 ‘너희는 절대적으로 나를 의존하고 살 수밖에 없도록 창조되었으며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서 양의 비유를 사용하는 거예요.
우리는 양을 별로 본 적도 없고 기른 적은 더 없어요. 근데 이 최초의 수신자들은 양과 함께 살고 양과 함께 죽었던 사람들이에요. 양이 얼마나 주인 의존적인 동물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주인이 사라지면은 음매음매 하면서 주인을 찾고 주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멀리 흩어졌던 양떼들도 모이고 그리고 주인의 인도를 따라서 푸른 풀밭으로 가서 거기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목자고 너는 양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가슴에 훅하고 다가오는 거예요. 상상할 수 없도록 그게 바로 시인이 경험한 거예요.
그러면 궁금한 건 이거죠.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 위대하신 만유의 주를 어떻게 ‘my shepherd’ ‘나’라는 소유격을 써서 내 인생과 직접 관계를 맺으신 목자로 만들 수 있느냐? 그게 신앙이 그 관계를 불러오는 거예요. 신앙이. 신앙이 불러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기에 너무나 멀고 자기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존재예요. 근데 은혜를 받고 보면 깨닫는 거야. 하나님이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하늘에 계셨는데 은혜를 받은 뒤에는 내 마음에 오심을 그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격을 느끼는 거죠. 근데 이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감격은 세상에 좋은 음식이나 예쁜 애인이나 그리고 오래간만에 찾아간 특급 호텔의 부패가 주는 그런 즐거움이 아니에요. 럭셔리한 여행이 주는 그런 행복감이 아니에요. 빼앗아 갈 수 없는 놀라운 충만함이 밀려오는 거예요.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근데 목자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방법을 암시하는 거죠. 그래서 어떠하냐면 말들은 카우보이가 말들을 다루어요. 그래서 말들을 방목해서 낮 동안에 사방에 흩어져서 풀을 뜯어 먹게 하고 저녁이 되면 카우보이들은 개들을 데리고 그리고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그러면서 총을 들고 말들을 에워싸요. 총을 쏘면서 말들을 위협해요. 그런 말들이 겁을 먹고 막 몰리면서 포위망을 좁히면서 한쪽으로 들어가서 마사에 모두 집어넣고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서부의 목동들의 하루는 끝이 나는 거죠. 근데 양은 그렇게 못해요. 총을 쏘고 달려가면 이 양떼들이 우왕좌왕하고, 그리고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목동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고 온 여행객이 이런 기록을 남겼어요. 천여 마리의 양떼를 이끌고 도로를 이렇게 고속도로를 건너다가 고속도로인데 왜 펜스도 없었나 봐요. 어쨌든지 간에 이렇게 건너다가 그러다가 목동이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어요. 그래서 양떼를 내버려 두고 저 멀리 가서 소변을 보니까 양떼들이 길에 딱 서 있는 거예요. 클락션을 누르고 차들이 깜빡이를 켜도 양들은 꼼짝도 안 하는 거야. 볼일을 끝낸 목동이 와서 “얘들아 가자”라고 하니까 양이 천 마리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아나니 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인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이죠. 신앙생활을 할 때 두려움이 여러분들에게 무언가를 결정하게 하는 신앙을 가지면 안 돼요. 그거는 주체적인 신앙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들에게 인도하실 때에는 여러분들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건네셔요. 그 말씀을 여러분들의 정신으로 깨닫고 그 말씀을 이해함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의지를 가지고 결정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거를 나는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믿든지 안 믿든지는 여러분 자유예요. 아무도 여러분 강요할 사람 없고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든지 말든지는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여러분 마음대로 해요. 그 대신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게 돼요. 그래서 처음부터 생각할 때 자율적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죠. 그 자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자율이에요.
그래서 제가 설교를 듣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저는 예배드리는 그 태도가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everything, everything 모든 것을 말해주는 그리고 그 예배의 태도대로 그는 지난 일주일 살았고 그 예배의 태도대로 앞으로도 일주일 살 것이고 그 태도가 어떠한지에 따라서 그의 일생의 지도는 그려져요. 아무리 많은 돈을 헌금하고 어마어마하게 칭찬받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이 예배자가 아니면 나는 그 사람의 인생을 인정하지 않아요. 왜? 그 인격적인 감화에 있어서 자율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책 속에서 말해요.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의 말씀을 건네신다. 하나님 앞에 제일 반역하는 것이 뭐냐 하면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일체 생각하지 않는 거 그리고 자기 마음만 알아달라고 펼치고 다니는 거 그게 쓰레기 같은 신앙이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 마음을 아는 게 더 급한 거겠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급한 거겠어요.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모든 답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그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전달해주는 거죠. 찬양을 부를 때 은혜를 받는 이유도 곡조가 신나서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가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게 우리의 지성에 자극을 주는 거죠. 그리고 그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마음으로 내려와서 감동을 주고 감동이 의지가 되어서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결심이 생겨나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해요. 성경을 읽을 때 똑바로 앉아서 좌정하고 무릎을 꿇고 임금님 앞에서 성경을 읽는 것처럼 읽어야 해요. 그리고 읽으면서 계속해서 깨닫는 것이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쉬지 않는 가운데 성경을 읽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인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시인을 그런 식으로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거죠. 비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인도하셔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인격적인 신앙이 없어요.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통해야지만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 진실하게 아뢰는 관계가 있을 때 그게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거죠. 그거를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해요. 그 인격적인 것을 제외해놓고 나면은 그건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에요. 노예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거죠.
누구의 조정에 의해서 움직이고 협박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거죠. 그것이 신앙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인도하셔요. 그런데 그 인도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거죠. 그걸 그림처럼 보여주는 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자의 비유예요. 목동에 와서 양을 헤아려 보니까 한 마리가 없어요. 근데 없어진 그 양은 자기도 다 아는 거예요. 왜? 학교에서도 사고 치는 애들만 사고 쳐요. 그리고 걔만 왔으면 다 온 거예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 양이 잃어버렸어요. 근데 그 양을 그냥 포기하면 될 텐데 양을 찾아가요. 양 한 마리에 얼마나 될까요? 20년 전에 호주에 가서 물어보니까 200불이래요. 16만 원. 근데 그 양을 찾아가요. 그 양이 아까워서 찾아간 게 아니라 어디선가 떨고 있을 그 양이 너무 가엾어서 찾아간 거예요. 결국은 저 밑에 굴러 있는 그놈을 끄집어요. 그리고 너무 반가워서 끌어안아요. 그리고 어깨에 메고 그리고 히브리 헬라어 성경에 보면 두 어깨라고 나와요. 두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요. 빌라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큰 소리를 외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창문을 다 열어요. “저녁 먹었어?” 그러니까 “아니.” 그러니까 “조금 이따 우리 집으로 와. 잔치를 할게.” “왜?”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 너무 기뻐서 그래.” 근데 그 양을 바베큐 해주겠다는 건 아닐 거 아니야. 근데 그 양 한 마리가 얼마나 된다고 바베큐를 하는 거죠. 근데 그 양을 위해서 소를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 복음인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을 무엇에다가 쓰겠어요? 여러분들 무엇에다가 쓰겠어요? 여러분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보다 훨씬 더 많이 남겨드릴 자신이 있는 사람 있으면 한번 손 들어보세요. 없어요. 그냥 은혜받아도 또 죄짓고 불순종하고 나태하게 살고 까불고 그러고 살아요. 그러다 회개하고.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사랑으로 보내는 거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목자는 양의 약점을 잘 알아요. 그래서 못하는 것을 못하는 걸로 인정하고 인도하셔요. 예를 들자면 목이 말라 죽겠다는데 양떼를 데리고 흐르는 물가로 가서 막 빠르게 흘러 마셔. 못 마셔요. ‘말도 마셨고 소도 마셨는데 너희는 왜 못 마셔’ 하며 작대기로 두들겨 패면서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제가 아는 형제 중에 서울대를 나온 친구가 있는데 지금 교수가 됐어요. 같이 나는 전도사하고 교사를 하는데 하루는 어느 학부모가 와가지고 심각한 이야기를 선생님하고 나누는 거야. 그래서 물어봤어요. “최 선생님. 집사님이 뭐 그렇게 할 얘기가 많대요.” “전도사님 뭐겠어요. 그 집 아들이 하도 공부 안 한다고 지금 나한테 하소연을 하는 거죠.” 그때는 교사들이 전부 다 스카이대 출신들이었어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이었어요. 그러는 거죠. “그래. 그래서 그런데 전도사님 이상해요.” “왜?” “아니 왜 애들이 공부를 못할까요. 아니 어떻게 특별히 공부를 못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떻게 못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이해가 안 가요.” 그래. 근데 그 친구는 태어나서 모든 시험을 한 번도 불합격해 본 적이 없대요. 운전면허까지. 한 번에 다 붙어서 떨어진 심정이 어떤지를 모른대요. 나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너무 이해가 잘 되는데 어쩌면 이해하다고 그래서 ‘잘났다’ 그리고 속으로.
이제 헤어졌어요. 두 달쯤 됐는데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날 찾아왔어요. “전도사님 저 진짜 살기 싫어요.” “왜?” “세상 살맛이 없어요.” “왜?” 공부를 하도 하니까 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때 한창 테니스가 유행했어요. 그래서 동네에 테니스를 배우러 갔대요. 그랬더니 테니스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맨 공 받는 연습만 시키더래요. 일주일 내내. 그러더니 그 친구가 학교 다닐 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고3 때 8시간씩 자고 서울대 갔어요. 그리고 학원은 근처에도 안 갔어요. 학원 갈 이유가 없죠.” “왜?” “모든 게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면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학원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러는 거야. “아유 잘 났다” 그랬는데 하여튼 몇 달 후에 그러고 왔어요. 그러더니 선생님이 일주일을 가르치더니 라켓을 집어던지면서 자기한테 막 그러더라는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고. 내가 여기서 7년을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왜 못하냐고 여기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는 건 내가 가르쳐 주는데 왜 못 하녜. 그때 처음으로 ‘아 이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똑같이 놓고 취급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아세요. 여러분 생긴 것을 너무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나는 왜 이렇게 내성적일까 나는 왜 이렇게 나 댈까 나는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을까 그게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일 수 있어요. 그런 거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생긴대로 사세요. 그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되세요. 생각을 하세요. 교회에서 시킨다고 하지 마세요. 교회에서 강요한다고 순종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판단을 하세요.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여러분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보편 원칙을 발견하세요. 그리고 거기에 여러분 자신을 맞추세요.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원칙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세요. 사랑을 구하세요. 능력을 구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하세요. 돈 많이 벌어도 결코 그것으로 내가 호의호식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배신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세요.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살고, 그리고 좋은 거 먹고 좋은 데 여행 가고 그리고 좋은 형제 자매 만나서 좋은 예식장에서 화려한 결혼식 하세요. 아무 문제 없어요. 괜찮아요. 문제는 뭔지 아세요? 그것들이 있는 자리와 하나님이 있는 자리를 바꿀 때 여러분들은 목자를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구절이 주는 의미예요.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근데 나는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하면은 동의를 할 수 있어도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에 대해선 내가 동의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는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엄마 얘기는 거의 안 나와요. 그리고 아빠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빠는 지독하게 형들을 편애했어요. 그리고 다윗을 자식으로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 중요한 증거가 사무엘이 기름 부으러 왔을 때 다윗이 있다고 아버지는 생각도 안 했어요. 기름 부으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아니라 그러는 거죠. 이 아들이 다냐? 그러니까 그제야 생각난 게 다윗이었어요. 참 참 참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게 다윗이었어요.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무시했어요. 그렇게 가정에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러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여자를 만나요. 근데 그 여자는 불행해도 자기를 버렸어요. 그리고 자기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를 못하는 여자였어요. 법괘가 들어올 때 그는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었지만 아내는 아주 업신여기면서 깔봤어요. 결국은 둘은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진 제왕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이었고 위대한 시인이었고 정치가였고 철학자였고 문장가였고 행정가였고 그리고 영성가였어요.
그런데 딱 하나가 없었어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한 여자를 한눈에 반하게 되어 꽂혔어요. 불행하게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불륜의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다윗의 그 타락을 도덕적으로 보면 비난받을 수밖에 없지만 심리적으로 보면 사실은 이해가 가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범죄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아를 살해해요. 그 끔찍한 죄를 짓고 지은 시가 51편이에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 몸이 수척해지도록 회개를 해요.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요.
(찬양)
어디서 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제왕의 복을 목 모두 내려놓고 한 마리의 길이인 어린 양이 되어서 주님 앞에 눈물로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간절히 기도해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눈물로 적신 책이 시편이에요. 괴로울 때 죄를 지었을 때 방황할 때 고난을 받을 때 박해를 받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이유도 알 수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될 때 기도할 수 없을 때 아니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시편은 나의 친구였어요.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웃고 나와 똑같은 처지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와 주님을 만난 감격의 목소리를 함께 들으며 희망을 가졌어요. 언제나 절망이 변하여 희망을 주었고 시편을 읽을 때마다 그 두려움은 변하여 찬송이 되었고 그리고 그 한숨은 변하여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서 그 높고 위대하신 이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들풀 끝에 매달린 이슬만도 못한 인생을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바로 당신의 품으로 불러 당신의 양때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를 위해 자신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그분이 우리를 위해 아끼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인생의 방황을 끝낸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지고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이혼하고 싶은 사람이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고 억지로 사는 것처럼 믿음 생활하는 타율적인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없는 사람의 종말이 무엇이고 주님의 양떼가 되어 그분의 품 안에 있는 사람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비교하십시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절한 소원은 ‘그냥 내게로 오라. 그리고 너는 내 앞에서 살아라. 나는 너의 목자가 되고 너희는 나의 양떼가 되어서 같이 살자’ 그것입니다.
아침에 눈뜰 때 어떤 생각에 눈을 뜹니까? 사랑에 빠져보셨습니까?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 보셨습니까? 아침마다 눈을 뜨면 그 아침은 어제의 아침이 아닙니다.
(찬양)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 the stars glow above
t‘he end of the world’라는 스키터 데이비스가 부른 노래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say goodbye 하는 순간에 노래하는 새들은 우는 새로 변하고,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는 절망의 화신의 음성 소리가 됩니다. 지는 노을은 핏빛 비극이 되고 떠오르는 태양은 눈부신 아침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비극적인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달린 것이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왜 그렇게 재미없게 명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까요? 사는 건 수녀같이 사는데 신앙은 하나도 없고, 사는 건 수도사처럼 사는데 더럽게 세속적이에요. 그 위선과 거짓의 껍질을 쓰고 사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어요.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껍질을 모두 내던지고 오늘 주님이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여러분들을 향한 마지막 경고의 초청일 수도 있어요. 오늘 그 목자 되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