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불꽃으로 사는 길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다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5-6)
녹취자: 조경훈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은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에서 건져주신 은혜 때문에, 마지막 5절에서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사실 성경에는 ‘주께서’라고 안 되어 있고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당신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주께서’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잔을 넘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잔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5절은 명백하게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신랑 신부가 혼인을 하고 하객들이 가득 모인 가운데 축하를 하면 주인은 그동안 잘 보관했던 아주 질이 좋은 포도주를 가져와서 아낌없이 잔에 따라서 모두가 건배를 하며 마시는 아주 흥겨운 잔칫집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술이나 혹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득 찼다라고 하는 것은 기쁨이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잔과 잔이 부딪히면서 포도주의 거품이 일어나고 포도주가 흘러넘칩니다. 사람들은 흥겹게 축하하고 신랑 신부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성대한 결혼식이 막바지로 치닫게 됩니다. 그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이 잔은 무엇일까요? 포도주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고 잔은 그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빈 잔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무엇을 입고 먹고 놀고 쉬고 소비하는 것, 시간을 보내는 것에 골몰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것들을 접하고 소비하는 즐거움에 빠져서 삽니다. 먹방, 길방, 법방 수없는 방들이 SNS에서 깔립니다. 거기서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많은 관심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쏠려있습니다. 관심사가 쏠려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만족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주시는 빈 잔이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질 때만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의 실화였습니다. 서울에 가면 북쪽 서울 끝에 수유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종합병원에 근무했던 어느 의사가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밤중에 택시가 도착하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람이 어떤 남자를 싣고 오는데 그 사람도 검은 양복을 입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응급시스템들이 원만하지 않아서 택시로 사람을 싣고 왔습니다. 선생님 방금 쓰러졌는데 이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그래서 진찰을 해보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무슨 조치를 해 볼 상황이 아니라 완전히 숨을 거뒀습니다. 의사가 얘기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서는 이 사람을 다시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식구들이 알고 심야택시를 태고 병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얼굴을 확인하더니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의사는 가족관계도 아니고 사람이 죽었으니까 참 안됐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눈물이 앞을 가릴 일은 없었습니다.
의사가 죽어있는 사람을 보는데 의사 생활 20년 이상을 했는데 저런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아이들이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기운이 없어서 손을 펴고 죽는 게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인데 이 사람은 한 쪽 손은 쥐고 한 쪽 손은 편 채 죽었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족들이 물러난 다음에 너무 궁금해서 의사가 가서 주먹을 펴 봤습니다. 하나씩 둘씩 폈는데 화투 두 장이 두둑 떨어지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화투를 펴 보는데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어! 삼팔광땡이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상을 당해서 거기를 간 것입니다. 밤새도록 화투를 쳤습니다. 그런데 돈을 잃었습니다. 막판에 돈이 잔뜩 쌓인 상황에서 두 장씩 화투를 나눠줬는데 펴보니까 최고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삼팔광땡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수십 년 전에 치고 안쳐서 궁금해서 이게 대단한 거냐? 하고 화투를 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7-8명이 판돈을 만 원씩 걸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죽을래? 살래? 나는 이거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포기하면 그 사람은 만 원을 잃고 끝나는 거고 한 번 해볼만하다면 만원을 더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판돈이 16만 원으로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3번에서 5번을 걸 수 있다고 합니다. 떨어진 사람도 있지만 돈을 걸어서 판돈을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화투를 보니까 삼팔광땡이라서 너무 좋아서 심장쇼크로 죽었습니다. 난감한 게 어린 아이들이 크면 물어볼 것 아닙니까?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정직하게 말하면 화투치다가 삼팔광땡이 들어와서 너무 충격을 받아 쇼크사 했다고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웃으셨는데 여러분들은 뭔가 다릅니까? 화투를 치다가 그 사람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집문서, 상가문서, 박사학위, 면허증, 권리양도증서, 채권증서, 통장 이런 거를 가지고 웃고 우는 사람들 아닙니까? 핵심은 그런 것들로는 우리 영혼의 빈 잔이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빈 잔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개는 돈 욕심이 없습니다. 개는 미모를 가꿀 욕심이 없습니다. 개를 보면 염색도 하고 리본도 달아주고 옷도 입히고 난리지 않습니까? 개가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주인이 보기에 좋으니까 손톱 발톱 깎아 주고 미장원에 가서 염색까지 해서 데리고 노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쾌락이 우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미친 듯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찾습니다.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못 내려놓습니다. 통계를 보면 하루에 평균 300백 번 넘게 본다고 합니다. 3-4시간 가량을 핸드폰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영혼에 빈 잔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의 영혼의 잔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신을 딴 곳에다가 파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저서 팡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귀족들은 사냥을 하는 것일까? 시장에 나가면 돈을 조금 주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살 수 있는데 많은 비용을 들여서 사냥을 나가고 사냥을 위한 장신구를 갖추고 수고하는 이유가 뭔가? 진짜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면 너무 놀라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이 같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우주의 운명을 생각하면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치는 것이다. 여러분도 다 아는 팡세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 내가 누구인지 밤하늘에 별을 쳐다보고 오늘 집회가 끝나고 상갓집에 가서 나와 친한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진짜 의미 있는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영혼의 빈 잔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고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이 꽂혀서 살아갑니다. 영혼은 이미 죽어서 송장 냄새가 나는데 얼굴에 바르고 치장하고 옷을 입는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다시피 합니다. 모든 관심사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속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해석을 하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없으니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간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육체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이 그런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복에 관한 문제입니다. 참된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가?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돈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돈이 확실한 답은 아닙니다. 병든 사람들은 몸만 건강하면 행복할 것같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들중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심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살을 합니다
어느 생의학자가 조사를 했는데 결혼을 안 한 남자는 결혼을 한 남자보다 평균 5년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하면 남자가 5년 빨리 죽는데 결혼을 한 남자들 중에서는 죽고 싶은 남자들이 많습니다. 아내랑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마르지 않는 문학의 원천이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입니다. 유행가를 들어 보면 10개 중에 9개는 사랑 타령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진짜 만족을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행복에 관한 문제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으로? 기쁨으로 어떤 기쁨? 먹고 입고 마시고 권력을 휘두르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마음에 가득 찬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 마음의 잔이 기쁨으로 가득 차고 그에게는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처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가 기억날 것입니다. 가난했지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웠는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실 그런 게 내 인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 그것이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시인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쁨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비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무엇으로? 돈으로 명예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쩜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보고 여러분에게는 자신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그 다른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왕이 된 때만 그런 것을 경험한 게 아니라 목동 시절에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갈 때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도 그런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주께서 원수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주시고’이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입니다. 지금은 번역이 잘 돼서 이 상이 밥상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 성경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라고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학교 졸업식 할 때 교장 선생님이 주시는 상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이 상은 히브리어로 ‘슐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테이블 중에서도 글씨를 쓰는 테이블이 아니라 밥 먹는 테이블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식사할 때 우리처럼 식탁에 앉아서 먹거나 땅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지 않고 소파처럼 생긴 곳에 비스듬하게 기대어서 반쯤 누운 채로 얕은 티 탁자 같은 데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것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이었습니다. 그 테이블을 가리켜서 ‘슐칸’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자기가 기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주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반찬을 차려서 줄 4개로 묶어서 상을 내려보내서 시인이 거기 앉아서 이것저것 먹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원수가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밥상이 무슨 의미인가? 밥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의 문맥에서 밥상은 가족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생명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1893년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때는 조선시대였고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있습니다. 어디를 여행하다가 날이 져 물어서 주막에 들어가서 잠을 잘 경우에 비좁으면 양반과 상민이 함께 한 방에서 잘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밥상을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반과 상민은 가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엄격하게 밥상에 구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을 넘는 것입니다. 똑같은 생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성경의 문맥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 가족인 것을 뜻하고 한 핏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맹세를 하고 난 다음에 식사를 함으로써 서로의 약속에 도장을 찍는 역할도 이 식사가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쏟아져 나갑니다. 애굽에서 먹을 것을 가져왔겠지만 이미 다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이스라엘 전체를 밥상공동체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들판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새벽에 만나가 하얗게 내리면 그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들이 달리 만들어 먹어도 일단은 똑같은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거대한 한 식탁의 공동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제사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화목제를 드린 후에 그 음식을 거기에 있는 모든 지휘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설날이나 추석에 온 가족이 모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애들은 세뱃돈일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함께 모두 밥을 먹는 것입니다. 군데군데 식구가 빠져있으면 매우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온 대가족이 모여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계실 때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신 이유는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냐? 그것이 예수님이 받으셨던 비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의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내가 왔노라. 그래서 당신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회개시키려면 무섭게 설교를 하고 야단을 쳐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함께 밥을 먹음으로써 죄인들에게 예수님이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심어주시고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일깨워서 그 때 그들이 그 사랑을 알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주욱 나오다가 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중간에 나오는 것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성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그때 그것은 성찬이 아니라 그냥 식사입니다. 예수님이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한 일이 밥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그러면서 떡을 떼어 주시고 식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억해라. 그러시면서 잔을 주십니다. 유언처럼 행동으로 남기신 것이 바로 밥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계시록에 가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만 받았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 말씀을 하십니다. 거기서도 먹는 얘기가 나옵니다. 회개하고 교회 바깥으로 쫓아냈던 예수님을 다시 문을 열고 맞아들이면 예수님이 교인들 마음속에 오셔서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밥상을 차려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쪼레라이’라고 나오는데 복수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얼굴 앞에서’라고 나옵니다. 시인을 만만히 보고 괴롭게 하는 원수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위를 하듯이 다윗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시고 다윗과 함께 밥을 먹음으로써 다윗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윗을 해치는 것은 곧 나를 향한 도전이다. 그러니 각오해라. 그것을 보여줄 때 시인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손님이 그 집안에 중요한 사람이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냐는 그 집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손님이면 평소에 먹던 대로 내놓습니다.
딸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집을 갈 때가 되었는데 시집 갈 생각을 안 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 아빠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 얘기니?”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이냐? 언제 한 번 보자.” 그래서 보았습니다. 자기 딸을 좋아하는 남자가 찾아와서 그 청년을 만났는데 한 눈에 이 부부가 저 사람은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쟤는 아니다. 인간성으로 보나 모든 것으로 볼 때 제는 아니다.’ 하고 떠나간 후에 “얘야! 결혼은 한 번 하는 거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시집가야 된다.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은 아니다. 너 가면 행복할 수 없다. 가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정리하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보거라.” 그런데 이 딸은 이미 사랑에 빠졌습니다. 나는 저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습니까? 결국 시간은 흘렀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신혼여행을 떠나가서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신혼여행지에 잘 도착했습니다. 우리 일주일 동안 놀다가 올라갈게요. 올라가면 집에 제일 먼저 인사를 갈게요.” 엄마는 심드렁합니다. “그래라.” 신혼집으로 밤중에 도착을 해서 다시 전화했습니다. “엄마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애썼다.” “내일 신랑하고 인사하러 갈게요.” “그래 와라.” “엄마 밥 줄 거지?” “그래.” 심드렁하니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신랑이 “나 배고파하는 것입니다.” “참아. 엄마가 엄청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아침에 기다렸다가 점심시간에 맞추어서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이모들도 오고 전도 붙이고 요리하는 냄새가 가득 찰 줄 알았는데 대문을 두드리고 마당을 들어가는데 조용합니다. 마루를 지나가는 데도 인기척이 없습니다. 문을 열고 “엄마. 우리 왔어.” 그러고 가니까 엄마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엄마. 왜 자고 있어?” “아빠는 볼 일 있다고 나가셨다.” “우리 인사 왔는데.”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뭘.” 하고 절을 했습니다. 딸은 “엄마! 우리 배고파.” 엄마가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그래 알았다.” 딸은 생각하기를 엄마가 엄청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부엌에 다 차려놓고 너무 많이 준비해서 피곤해 쉬는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엄마가 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부르겠지.’ 하더니 엄마가 나가자마자 1분 만에 상을 차려왔습니다. 소반에다 먹던 밥에다가 차가운 물을 부어서 두 그릇을 만들고 반찬은 딱 하나가 있는데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고추장 달랑 하나인 것입니다. 상을 내려놓는데 털썩 너무 세게 내려놓아서 물이 옆에 쏟아졌습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들게.” 그것은 밥상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 이 놈아. 나는 너한테 일도 관심 없다. 왜 내 딸이 너 같은 놈한테 엮였는지 후회막급이다. 빨리 이것 먹고 사라져라.’ 그 뜻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것을 읽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성경을 품에 안고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을 차려주시고’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이스라엘 군대의 용어로 많이 쓰였습니다. 수많은 군인이 군대에 나갈 때 오합지졸처럼 떼거지로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행과 오를 맞추어서 앞으로 옆으로 줄을 맞춰서 나갑니다. 흩어진 군인들을 그렇게 정돈시키는 것을 ‘아라크’라고 하고 여러 개의 물건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을 ‘아라크’라고 합니다. 암시하는 것은 이 밥상이 반찬 한두 가지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 아주 정성껏 차려진 반찬이 많이 있는 성대한 정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50대 초반의 어떤 가정주부가 등록을 했고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교인이 많으니까 심방을 다 못 다닙니다. 장년 천 명이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모든 교인을 심방 했습니다. 천 명이 넘으니까 일주일 내내 다녀도 도저히 못 다녀서 그 다음 부터는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교육자 회의에 부목사님이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몇 년 되셨고 은혜를 너무 많이 받고 변화되었는데 심방을 받고 싶다고 하십니다. 심방을 받게 해 달라는데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심방 받기를 원하면 날짜를 잡아서 심방을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식사를 집에서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안 된다고 해라. 왜냐하면 가정주부들이 집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압니다. 밥하고 식구들 돌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힘든데 목사까지 그 집에 가서 폐를 끼치느냐. 그냥 밖에서 갈비탕이라도 먹고 집에 가서는 예배만 드리게 하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 그냥 집에서 밥을 하겠답니다.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왜 그러냐고 하니 꼭 대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리고 심방하는 날이 다가와서 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받은 최고의 밥상이었습니다. 아마 이후에도 그런 밥상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가 어떻게 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변화되었고 가정이 바뀌었는지를 간증을 죽 하는데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다 끝나고 식사를 하셔야죠. 그랬는데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10분~15분 쯤 지나서 밥상이 들어오는데 세 명이서 들고 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상을 볼 수 없는 큰 교자상이었습니다. 그것을 두 번에 걸쳐서 날라서 여섯 명 정도가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밥상을 가져 온 것입니다. 밥상을 준비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한 달 전에 계획을 세우고 꼼꼼히 따져보고 집안을 청소하고 상을 빌리고 두 주 전에 시장을 보고 먼저 담을 김치는 담그고 이렇게 이렇게 하고 일주일 전에 할 것, 오일 전에 할 것, 삼일 전에 할 것, 이틀 전에 할 것, 하루 전에 할 것, 재료를 준비했다가 그날 할 것을 모두 목록을 만들어서 형제 두 사람을 부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거의 네 명이서 그 식탁을 만든 것입니다. 쭉 차려왔는데 중복된 반찬이 있는 게 아니라 다 다른 반찬이 가득 있는 것입니다. 그 밥상을 보는데 마음이 좀 슬펐습니다. 아니. 한 끼 먹으면 되는 건데 뭐 하러 이렇게 엄청난 공을 들여서 만드느냐. 우리가 무엇이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쓸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지 왜 반찬을 만들고 있냐 그랬더니 이 분이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얼른 드세요. 그런데 얼마나 반찬이 많은지 사정거리 안 들어옵니다. 젓가락을 뻗어서 손을 뻗어도 반찬이 도달이 안 됩니다. 옆에 앉아서 반찬을 떠서 주어서 먹었습니다.
그 날 그 집안에 최고의 손님이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밥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감격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것은 문학작품이니까 하나님이 밥상을 하늘에서 내려보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곤고 하던 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시인을 찾아오셔서 말씀에 식탁을 풍성하게 차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먹지 못할 때에 기운을 잃고 죽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할 때 힘을 잃고 죽은 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다 못 먹어서 그렇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너무 먹어서 비만이지만 영혼은 해골만 남았기 때문에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픔을 느껴서 먹을 것을 찾게 되는데 영혼은 안 먹어도 배고픈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 하나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프다고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날에 신앙이 좋았던 사람도 몇 달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못 받으면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빈 잔이 가득 찼습니까? 너무 기쁩니까?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런 단어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기쁨, 환희, 희열, 감격 이런 단어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에 희열을 느끼다. 예배에 감격에 빠지다. 기도에 환희를 경험하다.’ 그런 말을 써 본 적이 있습니까? 시인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넘칠 지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이 포도주 잔이 넘치듯이 그렇게 가득 찹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의 이유가 하나님이 풍성한 말씀에 식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저는 50대 중반까지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건강해서 병원에 입원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병원의 하얀 이불을 덮고 가냘프게 누워있으면 사람들이 꽃다발을 가져오고 문병을 오는 게 그리워졌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 이후에 10년 동안에 11번을 입원하고 10번을 수술했습니다. 심할 때는 몸무게의 20킬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비로소 힘이 없는 게 뭔지를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식탁에 앉았는데 숟가락이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성경구절이 떠오릅니다. ‘기력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 가니라’ ‘아! 이렇게 하다가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니까 숨을 쉬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픈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생겼습니다. 그전까지 나는 뭔가 아픈 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벽기도를 안 나오면 교역자들은 혼났습니다. 이차돈을 봐라. 목이 잘리고도 2미터를 걸어갔다고 하더라. 너는 멀쩡한데 교회를 안 나오냐? 그랬는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정말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너무너무 가엾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너무 기운이 없고 힘든데 한 끼만 저녁때 식사를 맛있게 먹고 나면 아침에 일어날 때 기운이 납니다. 소고기를 먹으면 8시간 후에 힘이 난다고 합니다. 소고기 먹기에 제일 좋은 시간이 점심이 아니라 저녁에 먹어야 됩니다. 낮에 먹으면 밤에 힘이 나니까 밤에는 힘이 떨어져야 잠이 잘 옵니다. 그래서 저녁 때 먹으면 8시간 후인 아침에 확실하게 힘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한 번만 예배를 잘 드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신기하게 죽고 싶었던 마음이 변하여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던 마음에 희망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희망입니까? 눈앞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희망이 없지만 예수 안 믿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생각했지만 믿음을 가진 다음에는 하나님에 약속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42편 43편에 나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며 근심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자기 자신을 희망으로 설득합니다. 그 때 아멘 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절망은 자기를 희망으로 설득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 때 쓰나미 처럼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서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시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원수들에게 시달리고 죽을 것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넘나들었고 왕이 된 후에도 혹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인생의 골자기를 지났습니다. 거기서 안 죽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밥상 때문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에게 풍성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먹으며 영혼이 원기를 얻었습니다. 모든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고 모든 절망을 이기면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일날 우리 교회에서도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29년 동안에 딱 두 번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주일설교를 했는데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은 내가 가는데까지 가겠다고 설교를 했는데 설교만 2시간 16분 23초를 했습니다. 8시 10시 12시 2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앞의 예배가 안 끝나서 바깥에서 30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이 다 뒤로 밀린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확인할 길은 없으니까 그냥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에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목사님. 지난주일 설교 어떠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는 확실히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접니다. 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6개월 동안 자살만 생각하고 있었고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진짜 자살을 하려고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주 설교를 듣고 제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살아야 되겠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던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죽음을 생각한 건 6개월이었습니다. 말씀의 식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 살아야 되겠구나! 하나님 나는 살고 싶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무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직 절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죠? 저는 14살 때 교회를 떠나면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저는 자살까지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죽는 사람의 심정을 아주 밑바닥까지 이해를 했습니다. 그 절망감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혼에 어떤 깊은 어두움입니다. 일단 살겠다는 희망을 딱 포기할 때 놀라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깊은 절망에 대한 대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비관하지만 사실은 자기보다도 더 비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안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20억 빚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유산을 정리해 보니까 40억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40억을 정리해서 20억 빚을 갚고 20억으로 살면 되는데 꼭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가 실패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자책을 느끼면서 삶의 희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진짜 희망이 없어서 끊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등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캄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생에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로 살려주셨습니다. 말씀의 식탁으로 차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에 영혼을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어디 성경 읽고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까? 매일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으며 거기서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예배 시간에 오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예배가 끝날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말씀에 간절히 은혜를 받고 싶어 하고 일주일 내내 예배와 목회자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나와야 됩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고 돌아갈 때는 살아야겠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희망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을 가득 채우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큰 식탁을 받고 영혼에 부흥을 누려 기쁨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움직이기 위해서 세 개의 중요한 직분을 주십니다. 이 직분은 솥 발과 같아서 이 위에 이스라엘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 세 직분이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왕은 한 사람이지만 선지자도 한 사람이 아니고 제사장도 수가 많습니다. 왕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질서를 자신의 왕국에 펼쳐서 하나님 백성다운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왕의 통치를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당연히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고 그 질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됐습니다.
두 번째로 제사장은 백성들 편에 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데 백성들은 항상 죄를 짓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데 중재자의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자기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일을 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이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주님 앞에 중재를 하려면 자신은 죄로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선지자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 편에 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이었는데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사장의 임무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오는 임무이고 선지자의 임무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임무입니다. 종종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때로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대중성이 떨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라고 믿었기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박해를 받아서 목이 잘려도 그들은 할 말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왕의 직분이든지 제사장의 직분이든지 선지자의 직분이든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한 소명이 필요했습니다. 소명만 필요한 게 아니라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도 도움이 됐겠지만 하나님이 세 직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게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기름을 부으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해서 그 사람들에게 없던 능력을 주고 놀라운 총명과 정신력을 주고 심지어 육체에 힘을 주고 그 백성들을 지도하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때 동반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 시대에 어떻게 성령의 경륜이 다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시대는 성령이 믿는 자에게 한 번 오시면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 안에 영원히 거하시면서 천국에 보증이 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오시는데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해서 오시고 그 직무가 끝나거나 혹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변심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놀라운 지혜와 총명 그리고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셨고 당연히 그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타락했습니다. 감히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짓밟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시면서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악신이 그에게 임해서 미치광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윗은 평생 세 번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첫 번째 성령 부으심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 부을 자를 찾습니다.” 이새가 큰아들부터 차례대로 내보냈는데 하나님이 다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집에 아들이 이것 밖에 없냐?” 그 때 이새의 마음에 마지막에 생각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지워진 자식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도 이유가 안 나옵니다. 단순히 다윗을 기억을 못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혐의가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윗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라고 하십니다. 기름을 부어서 충만한 성령이 다윗에게 임합니다. 그 전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라고 했습니다. 합한 자라는 뜻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나의 마음에 뒤따라 오는 사람, 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아낌없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는 거기서 이전에도 하나님에 사랑과 은혜를 느끼면서 살았지만 기름 부음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받습니다. 말할 수 없는 깊은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세 번이나 경험을 합니다. 그게 바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라고 하는 뜻입니다.
저는 6년 동안을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진짜 기독교 욕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없다. 설령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내 인생에 참견할 권리가 없다. 나는 하나님 없다고 치고 살아간다. 마지막에 뭐가 찾아왔겠습니까? 미친 듯이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작품을 계속 읽으니까 이런 고민을 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한참 읽다 보니까 답이 없습니다. 문학은 다 질문만 합니다. 답을 찾아서 사상으로 이동을 합니다. 철학과 사상으로 이동을 하는데 거기서 답을 줍니다. 답을 주는데 정작 답을 준 사람은 행복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방황을 하다가 마지막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소외감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나옵니다. 집 뒤가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밭이었습니다. 낮에는 동네가 하도 시끄럽고 더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을 꼬박 새서 공부를 하고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웁니다. 후~ 하고 담배를 피우면 저기서 댕그랑 댕그랑 하면서 교회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상하게 그 종소리가 아침 안개를 뚫고 내 마음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찬송)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Saved by the bell, saved by the bell
마음을 쿵쿵 울리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그런 경험이 계속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겸손해지면서 하나님이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없고 성경도 안 읽었는데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적인 깊은 갈등 속에서 고민하다가 10월의 어느 날에 한 교회를 찾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25분 정도 떨어져 있는 벌판에 있는 조그만 꼬마빌딩의 2층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찾아가 보니까 수요일이었는데 교인 20명이 앉아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장판 한 장을 깔고 누덕누덕 기운 헝겊으로 만든 방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 저기서 어느 자매가 삐거덕 삐거덕 소리가 나는 풍금을 치는 것입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 찬송을 듣는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은 평화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아무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평화를 경험하면서 나는 이 평화를 알고 싶다. 그리고 이 평화 속에서 정말 살고 싶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10월에 교회를 처음 나왔는데 11월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주일날은 교인이 30-40명 정도 됐는지 모르겠는데 연세 많으신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데 멀끔한 청년이 교회를 나오니까 얼마나 반가왔겠습니까? 상담을 하더니 “청년! 너는 다음 달에 세례를 받아라.” 그러는 것입니다. 아니 방금 나왔는데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하니까 너는 받을 자격이 있다. 너는 어렸을 적부터 쭉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그냥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데 목사님 말씀하시는데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세례 문답을 하라고 해서 하기는 했는데 일주일 남았는데 이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매일 밤중에 먼 길을 걸어서 교회당에 교회 불을 다 꺼놓고 와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나 살다가 힘들어서 예수를 믿을 수는 있지만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겠습니까? 나같이 하나님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모진 악담을 쏟아놓던 이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과 결혼을 하겠습니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매일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은 제가 꺾였습니다.
그날 아침에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예배당에 와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시간에 세례받을 사람이 따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목사님이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목사님의 손끝으로 시작해서 머리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발끝까지 다 내려왔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몸이 공중에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입니다. 몸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비로소 내가 인생에 긴 방황이 끝났고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그 품 안에 안겼구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구나.’라는 믿음이 드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러면서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얼마를 울고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까 예배는 이미 다 끝났고 교인들은 돌아갔습니다. 몇 사람이 왔다 갔다 합니다. 눈을 떠보니까 얼마나 날이 추웠던지 11월 셋째 주인가 됐는데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끼었습니다. 거기에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 햇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내 마음에 비친 예수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생의 괴로움과 삶을 위한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살려주셨으니까 내가 목숨이 있는 그날까지 나도 이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너무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게 바로 성령의 경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유사한 경험을 여러 번 했는데 효과는 똑같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 순결해지는 마음 그리고 오직 예수만 사랑하고 싶다는 간절한 심령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면 누구든지 순결하게 예수만 위해서 살고 주의 순결한 신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걸레가 아니라 신부처럼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무너진 도덕 생활 그리고 기도와 말씀의 은혜에 게으른 삶의 모든 것들은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증상입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눈에 안 보입니다.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나고 목이 붓고 온 몸에 열이 나고 편도선이 돋으면 코로나 아니면 감기입니다. 징후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고 기도하는 행복이 없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이 점점 싫어지는 것은 영혼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영혼에 필요한 것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시인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해야 되겠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변화시켜 나와 하나님 사이에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되찾아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나를 변화시켜 주셔서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됩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살든지 죽든지 내가 성령 충만을 받겠노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됩니다. 무엇에 불순종하고 어떤 죄가 마음에 있는지를 찾아내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그 고백을 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왜 자신이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끝냅니다. 마지막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합니다. 그 때 마지막 이야기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예전 번역으로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집이라는 문제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줍니다. 여호와의 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특별히 구별하십니다. 거기에 처음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 동산에 두십니다. 거기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들은 쫓겨나고 에덴동산은 닫혔습니다. 하나님이 두 번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위해서 만날 장소를 만드십니다. 출애굽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출애굽을 하고 하나님이 성막을 지으라고 설계도를 주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 설계도를 주셨냐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만날 두 번째 에덴동산으로서 성막을 만드신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제사를 통해서라도 깨끗케 하셔서 잠시 동안이라도 그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 집을 이 시인이 여호와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과 관심사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만나도 왕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백성들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다니엘 같은 사람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는데도 하루에 세 번씩 동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이 있는 곳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세 번 씩 기도를 할 정도로 하나님의 집이 그들 모두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시인을 한 번 보십시오. 장군으로 왕으로 시인으로 철학자로 신학자로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의 집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공급해주시는 은혜,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은혜, 더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어린이는 젊은이가 되고 젊은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은이가 되고 늙은이는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성인이 되어서 교회 문을 두드린 게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기억에 끝은 유치원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서 자랐는데 그 때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50년대 유치원을 다녔으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요즘 박사과정 다니는 것보다 더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집 앞에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치원을 운영해서 거기를 다녔습니다. 다섯 살 때여서 기억이 파편처럼 끊어져 있습니다. 간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나무 블록들, 흙으로 된 운동장, 담장 밑에 피었던 꽃들 그리고 노란 유치원 가방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먼지 나는 한길을 건너면 작은 도랑이 있고 그 도랑을 건너면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이쪽에 한 방이 있어서 거기서 동생과 함께 살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이면 얼음이 꽝꽝 얼고 형들이 거기서 얼음 지치는 것을 보고 연을 하늘 높이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형들이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엊그제 같은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손을 뻗으면 금방 잡힐 것 같습니다. 순간에 지나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젊은 나이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잠깐인 것 같습니다. 그 때 우리 딸이 두 살 이었는데 지금 시집을 갔습니다. 기어 다니던 어린아이들은 시집가고 어른이 되고 그 때 어머니였던 새댁들은 지금 다 할머니가 되어갑니다. 그 때 할머니였던 분들은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그게 내일 일어나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누가 먼저 갈지 모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만약에 이 순간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고단한 일을 끝내고 너는 내게로 오라. 할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목자로 모시고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만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고 난 후에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성도로서 아름답게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이 긴 과정은 죽음 편에서 보면 잘 죽기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잘 산 사람들만 마지막에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주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청소년 때 회심을 하고 주님을 믿고 거기서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좋은 자매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에 유아세례를 주고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이 입교를 하고 입교를 한 아이들이 어느덧 성장해서 결혼을 하고 본인은 늙어갑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는 바뀌기도 하지만 자신은 끊임없이 그 교회를 다닙니다. 충분히 인생을 살고 하나님이 때가 되어 부르시면 죽습니다. 마지막에 목사님에 심방을 받고 병상에서 죽습니다. 관에 안치됩니다. 묘지를 향해 가기 전에 고인이 너무너무 사랑했던 교회에 한 번 들러서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관이 교회로 옵니다. 와서 교회 앞마당을 돌아보고 거기서 성도들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받습니다. 그 때 드디어 기도가 끝나고 영원히 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날까지 묻혀 있을 장지를 향해서 갈 때 많은 성도들이 도열해서 마지막으로 작별합니다. 하나님 내가 저 장로님처럼, 저 집사님처럼, 저 권사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교회를 사랑하다가 저분처럼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그렇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일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낙원에서 마지막 우리 몸의 부활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있는 두고 온 교회를 위해 하늘나라에서도 기도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성경은 안 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기도는 계속됩니다. 이 땅에 두고 온 교회를 위한 기도는 계속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지체가 있다는 것, 내가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해서 충성을 하고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인생에 사연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 교회에 와서 기도했고 여기서 응답을 받았고 죄를 지었을 땐 여기서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무지했을 때 여기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어두운 마음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을 그리스도의 의에 횃불을 높이 드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곳도 여기였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선교사들이 핍박받는 성도들이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내려놓고 이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성도들의 눈물과 피로 얼룩진 바닥에서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죽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무엇이었을까요? 교회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끊임없이 무게를 더해 주던 부담스러운 사람, 교회를 위해 섬긴 것도 없이 끊임없이 교회를 힘들게 하던 사람, 분쟁의 한복판에 서서 교회의 몸을 찢던 사람, 목회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성도들에게 생채기를 내던 사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될 수도 있고 혹은 너무너무 이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던 사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말씀을 드리고 사경회를 마치겠습니다. 197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어느 환자의 대화였습니다. 의사는 계속 안 된다고 손을 젓고 환자는 사장을 합니다. 사연이 뭔가 봤더니 병원에 가서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사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장기에 관한 법률이 안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유로웠습니다. 심지어 피도 빼서 팔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봤더니 집사님이었습니다. 시골에서 교회를 섬기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시골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회자가 계셨습니다. 교인인 열댓 명밖에 안 되니까 목사님이 왔다가 한 1년 있다가 가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활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주일날은 누가 와서 예배를 드려주시는데 평상시가 문제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집사님이 제일 열심히 있으니까 그 교회에서 새벽기도도 인도하고 수요예배도 설교하면서 목회가 아닌 목회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자기는 그래도 다 쓰러져가는 집이지만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집은 천막이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 교회를 짓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교인들에게 얘기를 해서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니까 교회를 지읍시다. 온 교인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아니. 집사님. 집사님이 목사님도 아니고 그럴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알다시피 우리는 품 팔아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무슨 돈으로 교회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기도하면서 한 번 노력해 봅시다. 오랜 기도 끝에 마음이 어느 정도 합쳐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에다가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니까 우리를 도와주세요. 하니까 다른 교회에서 아주 조금씩 도와줬습니다. 밤이면 청년들과 냇가에 가서 모래를 퍼서 벽돌을 찍었습니다. 그것을 말려서 드디어 교회를 조그맣게 블록을 쌓고 위에 판자를 얹고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로 된 좋은 의자가 아닌 식당에 있는 의자처럼 만들어서 진짜 너무 기뻤습니다. 불과 몇 달이 안 지났던데 야속하게도 큰 태풍이 불었습니다. 워낙 싸구려로 지으니까 지붕이 뜯겨나갔습니다. 비가 와서 교회는 다 젖고 한 쪽 벽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이 집사님이 너무 가슴아파하였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중에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광고가 나왔습니다. 눈을 이식하려고 하는 사람인데 눈을 사겠습니다. 라고 광고가 나왔습니다. 수소문을 해 보니까 그 병원과 연결된 환자였습니다. 환자는 못 찾고 그 병원을 알고 가서 자기 눈을 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아내가 남편을 보니까 계속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물었습니다. 당신 나 사랑해? 응 사랑하지 그러면 혹시 내가 불구자가 되어도 나랑 같이 살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 신문을 보여주면서 내가 눈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
그 당시 돈으로 50만원이면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이 그러면 얼른 가서 팔라고 했겠습니까? 아니 빚을 얻어서 성전건축을 했다는 사람은 봤지만 눈을 팔아서 건축했다는 사람은 못 봤다. 안 된다 일주일 동안을 씨름을 하다가 아내가 포기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너무 슬퍼하니까 당신 뜻대로 해. 그리고 그 병원을 찾아간 것입니다. 원장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안경을 벗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거기 병원에 직원들을 꼭 필요한 사람들만 남기고 모두 모이라고 해서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나는 한 교회의 장로인데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눈을 팔아서 무너진 교회를 다시 지을 생각을 했겠느냐. 거기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을 사는 대신에 모금을 해서 도와줬습니다. 그 돈으로 눈도 안 팔고 교회를 다시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실제로 병원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던 집사님을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여러분의 재산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다 누리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자녀들은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셨으면 그 뜻대로 살고 마지막에 한 교회를 그렇게 섬기다가 성도로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서 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매일 매일 주님께 기도하며 인격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언제 주님이 부르시던지 감사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지시고 죽어가는 내 영혼을 살리셔서 저는 일생 동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내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시옵소서.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 교회에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인생에 마지막 교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섬기며 성도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큰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