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6-34)
녹취자 : 김세나
어제는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결국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적당히 생각을 하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일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소진하기까지 녹아내리도록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모든 염려가 나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염려하고 불안해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에 해를 주지 않고, 미래를 적절히 준비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염려는 빗나간 자기 사랑을 뿌리로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빗나간 자기 사랑이 끊임없는 염려를 가져오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충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긴 본문을 읽었는데, 간략하게 네 가지 정도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먼저 우리 마음에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가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면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설득하고 계십니다. 왜 염려하느냐고 우리에게 나무라시면서, 우리를 밀어붙히시는 것이 아니라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봐라.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먹이고 기르시는데, 너희는 공중에 나는 새보다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으며, 귀하게 여긴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게 하시고,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실 정도로 그렇게 소중하게 우리를 여기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30대 때 교수 생활을 할 때, 강의 시간에 은혜를 많이 받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생이 저에게 “교수님, 미국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아, 그러세요? 수고 많이 했습니다.” 학생이, “교수님 생각이 나서 볼펜 하나 사 왔습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놓고 갔습니다. 저는 사실 볼펜이라는 필기도구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받아서 책상 서랍에 쓱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한 일 년 지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볼펜보다는 먹을 것을 사 왔으면 훨씬 유용했을 텐데, 만년필이라면 모르겠는데 사용하지도 않는 볼펜을 사 왔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도 외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탔는데, 똑같은 볼펜이 기내 쇼핑지에 올라와 있는데, 30년 전이었는데 18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18만 원이면 굉장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볼펜이 40만 원 정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제일 먼저 서랍부터 열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리 만져 보고 저리 만져 보면서 ‘이게 그렇게 비싼 것이었구나.’ 당시 18만 원이면 전도사 한 달 사례비가 될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애지중지 아껴서 쓰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가치를 모를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가치를 알고 나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신기하게 우리 안에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겸손해져서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마치 뉴턴이 고백하였듯이,
(찬양)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하면서, 자기 자신이 세상에 쓸모없고, 하나님 앞에 저주나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이 생깁니다. 은혜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자기 사랑을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중의 감정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동시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감정이 똑같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장점에 기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정말 소중한 존재이구나라고 하는 정당한 자존감에서 오는 그러한 자기 소중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마땅히 갖기를 원하는 거룩한 자존감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이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함께 생기기 때문에 자신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이 감정, 내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감정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고, 적어도 내가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자존감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거룩한 자기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을 세속적인 자존감입니다. 공부도 내가 너보다 많이 했고, 얼굴도 내가 조금 더 낫고, 집안도 훨씬 더 낫고, 돈도 내가 더 많고, 나이도 내가 더 젊고, 키도 내가 더 크고, 체중도 더 많이 나가고, 이러한 비교에서 오는 그런 자존감은 세속적인 자존감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림이라고 하는 데서 오는 자존감을 갖는 것입니다. 어느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죄인이 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 n분의 1의 사랑이 아니라 그냥 나 하나를 위한 사랑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우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질병입니다. 또한 반대로 근거 없이 자존감이 매우 높아서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사람도 질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꼭 누리게 하고 싶은 건강한 자존감입니다.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자기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주 쉬운 예를 드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데, 들에 있는 백합화를 보거라. 당시 팔레스타인의 백합화는 가장 흔한 꽃 중 하나로 얼마든지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꽃이었습니다. 그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금의 모든 왕들은 옷을 입는데 왕의 의복을 담당하는 부서가 어느 나라나 다 있었습니다. 장인들이 왕을 위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은 절대로 옷을 빨아 입지 않았습니다. 진솔이라고 하는데, 처음 만든 진솔옷만을 입고 혹시 더러워지면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진솔옷을 입었습니다. 중국에 가서 박물관을 들렀다가 인상 깊은 전시품을 보았습니다. 청나라 시대에 왕이 입는 튜닉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외투입니다. 아주 예뻤습니다. 수천 마리의 작은 학들이 날아가는 비단 위에 약간 밀크 아이보리 색 천 위에 붉은 학들이 놓여 있고, 여러 가지 색으로 치장이 된 외투였습니다. 그 외투를 만드는데 아주 뛰어난 장인이 4년 2개월 걸려야 한 벌을 만들었습니다. 4년 2개월을 걸쳐서 왕에게 그 옷을 한 벌 지어 드리는데, 처음 입고 식사를 하시다가 고추장 같은 것이 떨어지면 그냥 벗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4년 2개월 동안을 그 옷을 온 힘을 다해 만들었는데 음식 국물 뚝 떨어지면 벗어서 버리고 새 옷을 입는다면 그 장인이 4년 2개월 동안 수고한 것은 불과 몇 분 입기 위해 만든 것 압니까. 그것이 왕족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최고 번영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중국 황제들이 누렸던 것 못지않게 최고의 의복을 누리면 살았을 것입니다. 입고 싶고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누렸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럽게 화려하게 지은 그 옷이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만 못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소중하게 아름답게 지은 옷이 백합화를 수천 송이를 꺾어서 시장에 내다 팔아도 못 살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인들이 만든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을 보면서는 장인의 솜씨에 경탄하지만, 들에 핀 백합을 보면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돌보심에 감탄하게 된다는 점에서 둘을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돌보아 기르신 백합과 인간이 공교히 지어서 만든 옷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엄청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에 핀 백합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아름다운 의복의 영광을 능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들에 핀 백합들이 무수하게 많고 심지어 그 백합들 중 대부분이 태어나 한 번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깊은 산속에서 가시에 찔려 향기를 발하다가 사라집니다. 그러한 백합들이 즐비하게 많은데, 그것이 모두 하나님이 돌보시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가 결국 마지막에 말랐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돌봐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신 너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겠는가. 그러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설득하고 계신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 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영혼을 내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영혼을 담고 있는 우리의 육체를 돌보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돌보시는 분이시다, 귀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우리를 건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면 내일, 모레 쓸 것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마음이 근심에 사로 잡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이제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쓸데없기 떄문에 염려해서는 안 되고, 두 번째는 그런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 중 누가 염려하므로 너희의 키를 한 자라도 더 자라게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의미가 그런 키의 의미가 아니라, 원어 성경에 보면 영어로 span이라고 나옵니다. 길이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아무리 염려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너희의 목숨의 길이를 한 자 정도라도 늘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지 염려한다고 너희의 목숨의 길이를 한 뼘이라도 길게 만들 수 없으니 그 염려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만히 보면 우리가 보내는 많은 시간들이 염려와 근심 속에서 우리 자신이 소진되는 가운데 수없이 허비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에너지 총량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못 받을 때는 에너지가 뚝 떨어지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에너지가 많이 생깁니다. 더 힘차게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으로 은혜를 받아도 한쪽으로 계속 쓸데없는 염려를 하면서 에너지를 태워버리고 낭비해 버리면 사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마음의 에너지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치 있는 것으로 쓰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은혜를 많이 받아서 마음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채워야 하고,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신들에게 열심히 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번영을 위한 우상입니다. 언젠가 어느 교수님이 대만을 가서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사람이 손에 요만한 금색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계속 젓가락 같은 작은 막대기로 계속 때리면서 지나가더랍니다. 너무 신기해서 같이 지나가는 사람이 함께 물어봤습니다. “그게 무엇인데 자꾸 때리면서 지나갑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섬기는 우상인데, 이것이 요새 복을 잘 안 줘서 우리가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맞아야 합니다.” 계속 젓가락으로 때리더랍니다. 얼마나 유치합니까.
우리는 바로 이방 사람들의 습관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봤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떤 장면이었는가 하면, 초등학교 1, 2학년쯤 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문 앞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문 안쪽에 있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우리 아빠가 추수감사절 전에 돌아와서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나왔습니다. 반갑게 엄마와 인사를 하였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어주는데, 군복을 입은 아버지가 일곱 달만에 귀대를 해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가서 아빠를 꼭 안아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면서 아빠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저 뒤로 걸어가면서 “Oh my God!” 그러면서 우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빠에게 등을 돌리고 막 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달려와서 안기면서 말을 합니다. “아빠, 이거 꿈 아니지?” “꿈 아니야.” 이 어린 아이가 손을 펼쳐서 아빠의 뺨을 막 만져 보았습니다. “꿈이 아니구나!” 안기고 펑펑 우는 영상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방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 것이 먹고 입고 마실 것을 공급받기 위해 신을 섬기지만, 우리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확신, 그것으로 주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귀하다.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 세 번째, 염려하지 마라. 마지막 네 번째가 33절에 나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사실 얻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주십니다. 우리는 밤 중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일은 아침이 꼭 밝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없을 것이고, 오늘 저녁에도 공기를 이상 없이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없을 것이고, 가을이 지나갔으니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모든 것이 반드시 기도했기 때문에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더라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로 보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악한 주인이라도 종들이 충성스럽게 일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듯이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자녀가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한 시인의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비전을 따라서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시시때때로 공급해 주셔서 아무 염려 없이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종종 염려를 만난다 할지라도 그러한 염려가 우리를 주장하게 하지 못하고, 때로는 괴로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날로 충분하니 그날의 괴로움에 대한 염려를 내일로, 모레로, 글피로 끌고 가서 오지 않은 날까지 근심으로 물들여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내 인생의 창조의 목적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매일 매일 살아갈 때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 데서 오는 것이니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스도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